소설리스트

대환장 통수 선협전-262화 (262/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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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떼기 깔기는 또 내가 한 재주 하지 >

멸계전이 벌어지는 세상에 나타나는 혼돈역은 영기와 극멸기의 충돌로 만들어지는 공간이다.

이 혼돈역은 천지 법칙의 간섭을 받아 시간과 공간이 제 멋대로 흐르고 뒤엉킨다.

하지만 그곳이 외부와 연결되면 그때부터 시공이 안정되어 그 외부와 연동된다.

그 때문에 멸계전이 시작되고 고작 천 년도 지나지 않은 수미 세계의 혼돈역이 억겁의 세월을 품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도망쳐! 피해라!”

“가긴 어딜 간다는 말이냐?! 그냥 죽어라!”

“크하하하, 귀찮게 하지 말고 곱게 죽어라. 그러면 영혼이나마 남겨주마!”

“어찌 이런 곳에 태령기 수사들이! 크아악!”

“아악!”

십여 명의 멸계 수사가 달군 철판 위의 메뚜기처럼 사방으로 뛰었다.

하지만 결국 검선과 마선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고 영육이 갈라지고 찢겨 쓰러졌다.

검선은 수십 개의 검을 날렸고, 마선은 마기가 가득한 검은 화염을 뿌렸다.

도망치던 멸계 수사 중에는 성령기 중기의 수사도 끼어 있었지만 감히 검선이나 마선의 손을 벗어날 정도는 되지 못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건우가 죽은 멸계 수사로부터 전리품을 수거하고 돌아오는 검선과 마선을 보며 인사를 했다.

“수고랄 것이 뭐가 있겠느냐.”

“고작 성령기 하나에 입령기 둘이 있었을 뿐이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무슨 수고를 끼칠 수 있겠느냐.”

검선과 마선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하며 정자로 들어와 앉았다.

그들은 함께 죽은 예닐곱의 화신기 수사들은 아예 숫자로도 치지 않는 듯이 말했다.

그럼에도 그런 저계 수사의 공간낭까지 알뜰하게 챙긴 것은 건우 때문에 빈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서일 것이다.

건우는 다시 정자에 가부좌를 하고 앉은 두 수사에게 묵례를 하고는 정자 밖으로 나왔다.

이제 다시 부양도를 움직여야 할 때였다.

건우가 하는 일은 그들을 혼돈역 곳곳으로 태워 주는 것이었다.

그들이 상이 대륙의 지실곡(志室谷) 근처에서 혼돈역의 입구를 찾은 것은 운에 가까웠다.

원래 혼돈역의 입구는 처음 나타날 때에는 영기의 흐름이 강력하지만 곧바로 안정되고, 그 후에는 아주 가까이 가기 전에는 발견하기 어렵다.

고작 영체기나 화신기 정도의 수사들이 혼돈역의 입구로 추정되는 영기 흐름을 느꼈다고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였다.

혼돈역 입구가 처음 생길 때의 거친 기운을 그들이 알아차렸던 것이다.

하지만 건우의 부양도가 지실곡 근처에 닿았을 때에는 이미 혼돈역의 입구가 안정된 후라 기운이 미약하여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수색 범위를 수천 장씩 좁게 나누어 근처를 이 잡듯이 뒤져야 했다.

그렇게 해서 결국 건우가 혼돈역의 입구를 발견했는데, 그 위치가 계곡의 절벽 동굴 안쪽이었다.

혼돈역의 입구는 보통 허공에 입구가 생기는 것인데, 절벽 동굴 안쪽이라니.

그래서 그 입구를 발견한 것을 운이라 하는 것이다.

어쨌건 그렇게 혼돈역으로 들어오게 된 일행은 그 후로 혼돈역을 탐험하며 괴수를 사냥하고, 영초, 영석을 채집했다.

그러던 중에 멸계 수사를 만나게 된 것인데, 검선과 마선은 운이 좋다고 희희낙락했다.

재산을 불리기에는 사냥과 채집보다 멸계 수사를 털어먹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이 혼돈역을 멸계 쪽에서는 벌써 수백 년 전에 발견해서 거점화하고 있었던 것이지.’

멸계 수사들을 추궁하여 알아낸 바에 의하면 수미 세계 쪽으론 몇 개의 입구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멸계 쪽으론 네 개의 입구가 있다고 했다.

당연히 그곳을 통해 멸계 측의 수사들이 몰려들어와 이 혼돈역을 장악하고 거점을 세웠다고 했다.

그렇게 수미 세계를 침략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그런 와중에 검선과 마선이 들어왔으니 멸계 수사들 입장에서는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는 거지.’

검선과 마선은 멸계 수사가 보이는 족족 목을 땄다.

벌써 이번까지 죽은 성령기 멸계 수사가 여덟이고, 입령기는 그 몇 배에 달한다.

당연히 화신기나 영체기는 논할 것도 없다.

“멸계 놈들의 근거지 중에 하나가 예서 멀지 않은 것 같은데 그렇지 않으냐?”

건우가 혼돈역에 들어온 후의 일을 떠올리며 전각으로 향하는데 문득 마선의 목소리가 뒷덜미를 잡았다.

건우가 돌아서서 두 손을 모으고 정자에 있는 마선을 바라보았다.

마선은 가부좌를 한 상태에서 눈을 뜨고 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두어 달이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만, 중간에 태령기 급의 마수가 있다니 거길 들러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래, 그걸 잊지 않았구나. 나는 혹시 네가 곧바로 멸계 놈들의 거점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했다.”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태령기 마수가 마선 어르신께 어떤 도움이 될지 모른데 말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되었다. 그리고···.”

“네, 어르신.”

“커엄. 이번에는 네게도 좀 챙겨 줄 것이니 섭섭하게 여기지 말거라.”

“네? 아, 감사합니다. 어르신.”

건우는 그렇게 대답하고 마선이 눈을 감은 후에 등을 돌려 전각으로 들어왔다.

그래도 부양도의 주인이 건우란 사실을 인정하는지 마선과 검선은 정자에만 머물 뿐, 부양도의 중심인 이 전각 안으론 들어오지 않았다.

전각에 부양도의 모든 금제와 봉인이 집중되어 있음을 알고 있어 조심하는 것도 있을 것이지만 주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일 것이다.

‘너무 부려 먹었다 싶기는 한 모양이지? 뜬금없이 챙겨 주겠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건우가 마선의 말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 호호호. 요즘 건우 님의 표정이 이전보다 조금 무거워지긴 했죠. 당연히 저 늙은 괴물들이 건우 님의 심경을 모르겠어요?

‘내가 뭐? 나는 별 불만 없는데? 검선에겐 가끔 검공법에 대한 조언을 듣고 있고, 마선에게는 마귀들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 있어서 나쁘지 않아.’

건우는 무슨 소리냔 듯이 정색하며 말했다.

- 정말이요?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해서 무슨 득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냐? 정말이지 그럼.’

- 그렇군요. 그런데 표정이 어두웠던 이유는 뭐예요?

‘그냥 이렇게 검선이나 마선에게 끌려 다니는 시간이 길어지면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거지. 뭐, 저들도 어느 정도 주머니가 차면 알아서들 수련을 시작할 테니, 그때까지만 참으면 되겠지만.’

- 시간 때문이라면 솔직히 그렇게 걱정할 건 없지 않아요? 여긴 천겁도 없는 곳인데요. 시간이야 넘쳐 흐르죠.

건우의 말에 루야가 괜한 소리를 한다는 듯이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건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여기 수미 세계에만 있으면 상관없지. 그런데 나는 홍애지도 오가야 하거든. 그럼 때가 되면 홍애지에서 천겁을 맞게 될 거란 소리지.’

- 어? 그러네요?

루야도 생각지 못했다는 듯이 놀란 목소리를 내었다.

‘어찌 천겁들을 넘긴다고 해도 대천겁이 올 즈음이 되면 그 때는 홍애지에 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 될 거고.

- 하긴 그러네요. 아무리 준비를 잘 해도 대천겁을 완벽히 이겨낼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렇지.’

- 건우 님은 낮은 확률이라도 죽을 가능성이 있다는데 홍애지로 넘어갈 분은 아니죠.

‘그래서 시간을 따지는 거야. 적어도 내가 대천겁을 맞기 전에 홍애지의 고계 수사들을 최대한 많이 이곳 수미 세계로 데리고 와야 하니까.’

- 이번에 검선과 마선을 통해서 수미산 상징의 효과도 확인했으니 홍애지의 고계 수사들만 모으면 되는 거네요?

‘그래. 그리고 홍애지의 고계 수사들을 많이 데리고 올수록 수미 세계가 멸계전에서 승리할 확률은 높아지지. 그렇게 되면 당연히 나도 힘들이지 않고 선계의 주민이 되는 거고.’

건우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선계 등선은 생각만 해도 건우를 흥분시켰다.

***

“그래서 너희가 지금 다 차린 잔칫상에 끼어 앉겠다는 것이냐?”

마선이 분노한 표정으로 낯선 태령기 수사를 보며 소리쳤다.

그런 마선의 곁에 있는 검선 역시 내키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무 그렇게 화만 내지 말고 이 쪽의 체면도 좀 생각을 해 주시구랴. 기껏 혼돈역의 토벌 대장이 되어 들어왔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모두가 나를 비웃지 않겠소?”

인간의 몸에 코끼리의 머리를 지니고 팔이 네 개인 상두족 수사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청동빛 피부를 지닌 우람한 체구의 수사였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강체술을 엿볼 수 있었다.

다른 상두족과 달리 유독 청동빛이 강한 피부는 그가 익힌 고절한 강체술의 효과일 것이다.

“우리가 그대의 체면을 고려하여 손해를 자초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 동안 이곳에 있는 세 곳의 멸계 거점을 토벌하고 이제 마지막 하나를 남겨 둔 상태입니다.”

이번에는 검선이 나서서 상두족 수사를 보며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 말에 담긴 뜻은 마선과 다를 것이 없었다.

멸계 거점 토벌에 너희를 끼어줄 수 없다는 것.

건우는 마선과 검선의 뒤쪽에 조금 떨어져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부양도가 그 뒤쪽에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하필 이럴 때에 수미 세계의 수사들이 나타나다니. 쯧.’

건우가 속으로 슬쩍 혀를 찼다.

일의 시작은 멸계의 네 번째 거점을 확인하고 움직일 즈음에 나타난 상두족 수사들이었다.

처음 건우 일행이 만난 상두족 수사들은 성령기 하나에 입령기 셋이 화신기와 영체기 다수를 이끌고 있는 무리였다.

그런데 그들은 뜻밖에도 검선과 마선, 건우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역시 상이 대륙의 지실곡에서 혼돈역 입구를 찾아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필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지실곡에서 수색을 더욱 세심하게 했다지. 그래서 절벽 동굴 안의 입구를 발견하게 된 것이고.’

만약 건우 일행이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입구 탐색을 정밀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했다.

태령기 수사 둘이 지실곡으로 향한 후에 모습을 감췄다니 혼돈역의 입구가 근처에 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여 꼼꼼하게 뒤졌다는 것.

‘그 뒤로 혼돈역에 들어온 후에도 우리가 움직인 흔적을 뒤쫓아 빠르게 따라잡았다니 저들을 불러들인 것이 어쩌면 자업자득이라 할 수도 있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건우의 얼굴에 살짝 못마땅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밥상을 차렸더니 숟가락만 들고 끼어 앉겠다는 상두족 수사들이 못마땅하기는 그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 네 놈이 감히 어르신들 말씀하시는데 인상을 쓰는 것이냐?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 건우에게 은밀한 의념을 보내며 책(責)을 잡았다.

건우는 영기를 추적하여 의념을 보낸 자가 태령기 상두족 수사의 뒤에 있는 성령기 후기 수사임을 알아봤다.

= 쓸데없는 일로 분란을 만들 생각인 모양인데 자중하시오. 당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오.

건우는 곧바로 의념을 보내어 도리어 상대를 질책했다.

뿌우우우우!

그러자 그 성령기 후기 상두족 수사의 등 뒤에서 거대한 코끼리 두상이 부풀어 오르며 코를 높이 세워 긴 울음소리를 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

곧바로 태령기 상두족 수사의 질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건우는 속으로 그런 그들을 비웃었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냐? 연기 호흡이 아주 척척 맞네 맞아.’

변수를 만들기 위해 분란거리를 만드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태령기 수사들이 대치하는 상황에 성령기 수사 따위가 끼어들 수는 없는 일이다.

건우가 그런 생각을 하며 살짝 고개를 흔들며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그러자 인솔자에게 야단을 맞은 그 성령기 후기의 상두족 수사가 건우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두두(頭頭) 어르신. 감히 저 놈이 두 분 태령기 어르신들 뒤에 숨어 저희를 비웃고 있었습니다. 제가 어찌 그것을 그냥 넘길 수 있겠습니까?”

“뭐라? 우리를 비웃어?”

“설마 두두 어르신까지 비웃을 담이야 있겠습니까? 하지만 앞에 계신 두 어르신을 믿고 저희들을 만만하게 여긴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

성령기 후기 상두족의 말에 태령기 중기의 상두족 수사가 고개를 돌려 건우를 노려봤다.

하지만 건우는 그 눈빛을 받기도 전에 이미 공손히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사실이 아닙니다. 어찌 제가 그럴 수가 있었겠습니까? 저 수사가 아무래도 잘못 본 모양입니다.”

고개는 숙였지만 그렇다고 사실을 인정하지는 못하겠다는 듯이 건우가 그렇게 변명을 했다.

“그럼 이 녀석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냐?”

그 말에 두두라 불린 태령기 수사가 도리어 더 불쾌하다는 듯이 건우를 노려보며 물었다.

하지만 검선과 마선이 부담스러웠던지 아직까지는 건우에게 직접적인 실력 행사는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누가 어르신께 거짓을 입에 담을 생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건우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살짝 고개까지 들며 말을 하고는 다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 녀석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너는 그런 적이 없다 하고, 이 녀석은 그렇다고 하는데 어떤 말이 옳다는 것이냐?”

두두 수사는 건우의 말에 도리어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건우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도 착오를 한 것이겠지요. 사실이 아님에도 그렇다고 여기는 일은 흔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세 어르신들께서 이리 대치를 하시니 심약한 저희들이 마음의 혼란을 겪는 것이야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말하자면 성령기 후기의 상두족 수사가 심약하여 마음의 혼란으로 잘못된 판단을 했다는 이야기다.

인정하면 부하가 잠시 착각한 것으로 넘어갈 수 있는 문제지만 인정하지 못한다면 문제를 키울 수 있는 꼬투리가 들어 있는 말이다.

‘여기서 저 두두라는 수사의 반응을 보면 속셈을 확인할 수 있겠지.’

그냥 작은 실수로 넘길 것이냐, 아니면 건우의 말을 문제 삼아 일을 키울 것이냐.

‘보나마나 시비를 걸겠지.’

건우는 그렇게 예상했다.

“네 이 노옴! 감히 성령기 초기 따위가 성령기 후기, 그것도 특히 정심한 심지를 가진 아이에게 심약하여 착각을 했을 거라 모함을 한단 말이냐?!”

‘역시 그럴 줄 알았다.’

건우가 포옥 한숨을 쉬며 검선과 마선을 바라봤다.

이제는 둘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히죽!

‘자, 판은 잘 깔아드렸습니다. 저들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한번 잘 털어 드십시오.’

< 판떼기 깔기는 또 내가 한 재주 하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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