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환장 통수 선협전-205화 (205/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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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멸계에 통수의 씨를 던져두고 수미세계로 나가다 >

[수미선문(須彌禪門)]

웅장한 비석에 아로새겨진 글씨.

그 비석을 감싸고 도는 영기의 빛은 영롱하기 짝이 없는데, 건우는 그 밑에서 비석을 올려다보며 황홀경에 젖어 있었다.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이 비석에는 노야의 깨달음이 담겨 있다. 이 비석 자체가 수미선문의 최고 경전이다. 이 깨달음을 내 것으로 만든다면 나도 노야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건우는 비석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곧 길게 한숨을 쉬었다.

비석에 깃들어 있는 깨달음은 공법이나 수법 따위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법칙에 대한 것으로 아직은 건우가 엿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마도 태령기는 되어야 읽어 낼 수 있을 터. 그 전까지는 그저 영감을 얻는 정도의 도움만 받아야 한다. 억지로 뭔가를 얻으려 하면······.’

데에에에에에에엥!

“크윽!”

건우가 잠깐의 방심으로 마음 속에서 욕심이 일어나는 순간, 거대한 종소리와 함께 건우의 의식이 비석에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건우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수미 세계의 어느 한 곳에 들어와 있었다.

‘이제 그 산적 스승님은 다시 뵐 수 없겠지.’

이전에 수미 세계에서 속성별 수련 공법을 익힐 때마다 어린 건우를 이끌었던 스승.

그 스승은 노야가 안배한 사념체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경지 상승의 안배는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노야의 안배는 유혼결이 마지막이었던 것이다.

‘여기는 어딜까.’

원래는 수미세계의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우였다.

하지만 막상 아공간의 수미산 상징을 통해 이동을 해 보니 선택지가 없었다.

중간에 수미선문의 비석에 닿으면 그 이후엔 무작위로 수미세계에 떨어지는 것이다.

“어라? 이거 봐라?”

건우는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뜻하는 대로 아공간이 열리는 것을 보고 곧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 대에바악! 지금 여기 수미세계죠? 지금 우리 수미세계에 와 있는 거 맞죠?

건우가 들어가자마자 루야가 눈을 똥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게 그렇게 되네? 이러면 이건?”

건우도 상황을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먼저 수미세계로 넘어올 때의 통로였던 수미산 상징물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수미산 상징물을 통해서 조금 전에 있었던 세상으로 이동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재미있네. 이걸 통해서 양쪽을 오갈 수 있는데, 아공간은 그냥 나에게 속해 있는 식이로군. 좋아, 나쁘지 않아.”

건우는 의외의 결과에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아공간 밖으로 나가서 주변을 살폈다.

한 번에 수 천 리를 훑어본 후, 지금 그가 있는 곳이 인적도 없고 수도계 수사들도 없는 한적한 곳임을 알아냈다.

“그럼 여기서 유혼결부터 마무리를 해야겠군.”

건우는 결심이 서자  곧바로 아공간에서 괴뢰들을 불러내어 주변을 정리하고 잠시 머물 임시 거처를 세우게 했다.

그 다음에 그가 한 일은 거대한 진법을 만드는 것이었다.

“유매매가 멸계에 대응진을 제대로 설치했다면 이 진법으로 멸계로 한 번은 갈 수 있다. 물론 돌아올 수는 없지만 그건 상관 없는 일이고.”

건우는 완성된 진법을 꼼꼼히 살핀 후, 이번에는 아공간으로 들어가 선태 괴수를 불러냈다.

선태 괴수는 건우가 아공간의 일부를 격리하여 극멸기를 채운 곳에 머물다가 건우에게 소환되었다.

건우는 그 선태 괴수의 정신 제압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최대한 강화했다.

혹시라도 선태 괴수가 통제를 벗어날 것을 염려한 것이다.

“너는 이제 멸계로 갈 것이다. 그곳에서 나를 도와야 할 것이다.”

키릭 키리리리릭!

선태 괴수는 건우의 말에 더듬이를 납작 숙이며 복종의 뜻을 나타냈다.

건우는 그 즉시 선태 괴수의 힘을 봉인하기 시작했다.

지금 선태 괴수는 화신기 수준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건우가 준비한 진법은 그런 강력한 존재를 멸계로 보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니 선태 괴수의 힘을 봉인해서 진법을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낮춰야 하는 것이다.

결국 선태 괴수는 모든 힘을 봉인당하고 연신기 중기 정도의 힘만 남았다.

때문에 그 크기도 고작 성인 팔뚝 정도로 줄어들어 버렸다.

“이 봉인은 나를 만나면 풀 수 있을 것이다. 네가 품고 있는 멸기함분이면 멸계로 간 내가 경지를 끌어올리기에 충분할 터. 그러니 반드시 나를 찾아 함께 해야 할 것이다.”

선태 괴수의 힘을 봉인하는 것은 괴수를 멸계로 보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고, 한편으로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놈의 목줄을 채우는 것이기도 했다.

선태 괴수는 혹시 정신 통제를 벗어나더라도 봉인을 풀기 위해 건우를 찾아야 할 것이다.

키리리리릭! 키리릭!

“그래, 믿으마.”

건우는 다시 손을 내밀어 선태 괴수를 작은 영수함(靈獸函)에 넣었다.

영수함은 수사가 부리는 영수나 마수, 요수 따위의 생명체를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 확장 기물이었다.

원래 아공간이 있는 건우에겐 필요가 없는 물건이지만 이번 일에 필요해서 준비해 뒀던 것이다.

“그럼 이제는 유혼결을 행할 때군.”

그 후, 건우는 유혼결 공법을 실행하여 새로운 분혼을 만들어 냈다.

수미세계로 넘어온 때문인지 유혼결은 아무 문제없이 펼쳐졌고, 건우의 영혼 일부가 나뉘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 상태로 분혼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두면 유혼결의 힘에 따라서 분혼은 어디론가 떠나 영혼이 깃들기에 좋은 육체를 찾을 것이고, 그 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건우는 분혼을 수미세계에 풀어 놓을 생각이 없었다.

건우는 품 속에서 부적 하나를 꺼내 분혼을 그곳에 봉인했다.

“잠시 이곳에 있어.”

그렇게 준비가 끝나자 건우는 곧바로 아공간 밖으로 나가 이전에 만들었던 진법을 발동시켰다.

제법 많은 양의 중급 영석과 수십 개의 상급 영석이 소비되며 진법이 가동되었다.

건우는 그 진법에 선태 괴수가 들어 있는 영수함과 분혼이 들어 있는 부적을 던져 넣었다.

“이제 멸계에 도착하면 그곳의 극멸기로 부적의 영기가 흩어질 것이고, 그러면 분혼은 곧바로 육체를 찾아 움직일 것이다. 그 후 육체를 얻으면 다시 대응진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선태 괴수의 영수함을 취하면 만사형통할 것이다.”

건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진법이 영수함과 부적을 멸계로 보내는 것을 지켜봤다.

반대 쪽의 대응진이 제대로 작동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진법이 크게 빛을 내더니 영수함과 부적을 이동시켰다.

파지지지지직! 푸스스스스스!

그리고 일을 마친 진법은 그대로 부서져 가루가 되더니 곧 재로 변해 바람에 실려 흩어졌다.

“후우,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건우는 사라지는 진법을 보며 길게 숨을 쉬었다.

그리고 곧바로 임시 거처의 내실로 들어가 가부좌를 하고 명상을 시작했다.

멸계로 넘어간 분혼이 어찌 되는지 확인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몇 달 후, 건우는 자신이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이런, 분혼 쪽의 상황을 알 수가 없군. 더구나 이전처럼 분혼 쪽에 아공간을 열어 살펴볼 수도 없어.”

이전에는 본체인 건우가 분혼인 위문진을 아공간으로 살필 수 있었고, 위급한 상황이면 직접 현신해서 도움을 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 멸계로 보낸 분혼은 그저 생존 유무를 알 수 있을 뿐, 다른 것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서로간의 의식 연결도 되지 않는 상태였다.

“이렇게 되면 분혼이 알아서 잘 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건가? 하하. 그 녀석이 곧 나이니 믿어 볼 수밖에 없겠군.”

그나마 생사를 확인할 수는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한 건우는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는 본격적으로 수미세계에 적응을 해 볼 차롄가?”

둔광을 펼친 건우가 곧바로 임시 거처의 상공에 모습을 드러내더니 뒷짐을 지고 먼 하늘을 바라봤다.

낯선 수미세계.

이제 본격적인 수미세계 모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령기에 오르기 위해서는 새로운 공법이나 등급이 높은 진혈이 필요해. 일단 그걸 구할 방도부터 찾아봐야겠지. 천라패갑방패도 손을 좀 봐야 하고.”

그렇게 중얼거린 건우는 오랜만에 부양도를 꺼내 그 위에 올랐다.

이후 건우는 괴뢰들을 여럿 꺼내 부양도를 맡기고 정처 없이 길을 떠났다.

*   *   *

“그러니까 이곳이 염부제(閻浮提)라고?”

“그렇습니다. 선배님. 달리 섬부주(贍部洲)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도 운이 좋았구나. 인간 수사들이 주류를 이루는 곳이라니.”

“선배님께서 어디서 오셨는지는 몰라도 야차나 아수라족, 용족 따위가 있는 곳에 가셨다면 고초가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입니다.”

“으음? 인간과 다른 종족들의 사이가 좋지 않은가? 아니 그 전에 수도계 수사들의 관계가 좋지 않은 편인가?”

건우는 문득 후배 수사의 대답에 인상을 찌푸렸다.

멸계와의 전쟁이 예비 되어 있는 상태로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언젠가는 멸계전을 벌여야 할 것이니, 당연히 수사들이 단합하여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지금 들어보니 종족 사이의 불협화음이 상당한 듯 싶었다.

“그야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우리 인간 수사들은 섬부주에서나 기를 펴지 다른 곳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이 드넓은 수미세계에서 고작 남쪽 섬 하나, 이 섬부주(贍部洲)만이 인간들의 영역임을 모르신단 말씀입니까?”

“시끄럽다. 내가 본래 수미세계의 출신이 아니라 이곳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그런 것인데 어디서 목소리를 높이느냐?”

“네? 수미세계의 출신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화신기 초기의 인간 수사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건우를 바라봤다.

그 수사는 염부제(閻浮提)의 한적한 곳에 있는 작은 산맥을 차지하고 수련중이던 인간 수사였는데, 건우가 지나는 길에 발견하고 찾아가 정보 수집을 하는 중이었다.

“어찌 그리 놀라느냐?”

건우가 물었다.

“다, 다른 세상에서 수미세계로 오신 것이 참입니까? 진정코?”

인간 수사가 다시 한 번 확인하듯 건우를 보며 물었다.

“그렇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 그럼 수미세계가 봉인에서 해방이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멸계전이 시작될 터인데······.”

“호? 네가 그것을 알고 있느냐?”

건우는 그 수사의 혼잣말에 흥미가 동한 듯이 눈빛을 반짝였다.

“오, 오래도록 전해져 온 이야기입니다. 언젠가 수미세계의 봉인이 풀리면 멸계전이 시작되고, 그 싸움에서 이기면 수미세계가 선계에 편입될 거라고.”

“그래? 그게 언제부터 전해지던 이야기더냐?”

“그, 그것은 확실치 않습니다. 그저 수백 만 년은 넘었다고 알고 있을 뿐입니다.”

“흐음, 그래?”

“그렇습니다. 하지만 너무도 오래 된 이야기라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어쨌거나 멸계전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는 것이 아니냐. 그런데 어찌 이리 화합이 되지 않는단 말이냐?”

건우는 이해가 되지 않아 그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선배님께서 다른 세상에서 오셨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입니다.”

“무슨 말이냐?”

“수사들의 꿈이 무엇입니까. 수련을 통해 선계에 올라 불로불사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 그런데?”

“그런데 봉인된 이곳에선 어떠했겠습니까. 태령기 완경에 이르고 등선기에 들어선 어르신들이 3천년 마다 닥치는 천겁과 1만5천년에 한 번 있는 대천겁을 버티는 것에 한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천겁! 그래 그게 문제구나!”

건우는 후배 수사의 짧은 설명에도 어느 정도 수미세계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수련을 통해 등선기에 이른 수사들이 봉인 때문에 등선의 길을 찾지 못하고 수미세계에 머물러야 하는 상황.

그런데 천겁은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와 목숨을 위협한다.

게다가 천겁은 회를 거듭할수록 더욱 강해지는 것.

얼마를 버티든 결국 등선기의 수사들은 천겁에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일이 오래도록 반복되며 이어졌을 것이다.

수미세계 최고의 경지에 올라도 결국 기다리는 것은 허무한 죽음 뿐.

그러니 그 뒤는 어찌 되었을까.

어떻게든 수명 연장을 하려 애썼겠지만 그게 되지 않으면 결국 깽판만 남는다.

그리고 그 깽판은 대부분 자신이 싫어하는 쪽이나 자신과 연관없는 쪽을 향하기 마련이다.

적어도 가까운 이들은 피하기 마련.

“결국 세력화, 집단화 된 상태로 대치하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겠군.”

깽판에 희생되지 않으려면 이쪽 또한 힘을 기르고 몸집을 부풀릴 수밖에.

오랜 세월 수미세계는 그렇게 변해왔으리라.

“하지만 이제 봉인이 풀렸음을 알았다면 조금씩 변화가 생기긴 하겠지. 물론 그 동안 쌓인 앙금이 쉽게 풀리진 않겠지만.”

건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수미세계, 기대와는 전혀 다른 상황인 것 같다.

< 멸계에 통수의 씨를 던져두고 수미세계로 나가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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