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 바쁘다 바빠, 할 일이 많아 >
“으음.”
아공간의 천기영기가 급격하게 짙어지고 있었다.
그 천지영기의 근원은 다름 아닌 수미산.
- 금방 영계 수준으로 천지영기의 밀도가 높아지겠네요.
루야가 건우 옆에 나타나 말을 걸었다.
“넌, 혼원석이나 흡수하지 뭐하러 나와?”
유매가 준비했던 혼원석은 당연히 루야의 몫이 되었다.
- 혈원이나 용랑이처럼 식충이는 되지 말아야죠.
“뭐?”
- 그렇잖아요. 이것들이 하는 일도 없이 수련만 하잖아요. 건우 님이 무르니까 그런 거죠.
“시킬 일이 없어서 오라 가라 할 필요가 없었던 거지. 그리고 마침 이번에 그 녀석들을 쓸 곳이 있어 생각중이다.”
- 그래도 저는 항상 건우님 곁에 있다고요.
“너, 혼원석 때문에 아부하는 거 다 보인다.”
- 그런 거 아니라고요.
“됐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문제는 이건데 말이야.”
건우는 루야의 항변을 가볍게 무시하고 수미산에 눈길을 주었다.
건우의 키와 비슷한 높이에 떠 있는 산 모양의 구조물.
처음 봤을 때와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상상도 못할 현묘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저 돌로 깎은 산처럼 보이는 것은 겉모습일 뿐, 그 안에 무한 세계라 할 수 있는 수미세계가 있었다.
그것을 어찌 화신기 완경 수준의 건우가 알아볼 수 있을까.
‘이건 따지고 보면 수미선문의 비석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상징물이다. 이건 지금 내 수준에서 들여다보는 것은 불가능하지.’
건우는 아공간에 드러난 수미산을 파악하는 것은 깔끔하게 포기했다.
할 수 없는 일에 오래 매달려봐야 얻을 것은 없고 잃을 것만 생긴다.
스스스슥!
건우가 손을 내밀어 수미산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곧바로 의식 연결이 이루어졌다.
이전까지는 꽉 막혀 있었던 의식연결이 지금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으음?”
건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지켜보던 루야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건우를 보며 물었다.
하지만 건우는 루야의 말에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이게 뭐지? 수미 세계의 원하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그런데 이제부턴 시간의 왜곡이 없어? 이곳과 수미세계가 같은 시간선을 가지게 되었다고?’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오는 정보.
그에 의하면 이전에 건우가 반영세계라고 생각하고 드나들었던 수미세계는 시간이 극도로 느리게 흐르는 상태의 수미세계였다.
그래서 건우의 시간만 빠르게 흘러서 기묘한 상황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시간차이가 사라졌다.
건우가 영계에 오르게 되면서 수미세계도 겨자씨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수미세계가 겨자씨 밖으로 나왔다.”
건우가 중얼거렸다.
- 네?
“여기 있는 이것은 그 수미세계와 연결된 통로.”
- 그게 수미세계가 아니라 그곳으로 가는 통로라고요?
“그래. 이 자체가 수미세계는 아닌 거지.”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더니 의념을 집중하여 아공간에서 뭔가를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가 찾고자 하는 것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뭐 하세요?
루야가 물었다.
“수미세계가 겨자씨에서 벗어났다잖아.”
- 그런데요?
“그럼 그 겨자씨는 어디에 있는 거지? 다른 건 몰라도 겨자씨는 내 거잖아.”
- 겨자씨가 건우 님 거라구요?
“예전에 내 칭호 못 봤냐? 수미산을 삼킨 겨자씨의 주인. 내가 수미산의 주인은 아니어도 겨자씨의 주인인 건 맞지. 그 분께서도 그렇게 인정한 거잖아.”
- 에, 그건 또 그러네요.
“그런데 이 겨자씨는 어디에 있는 건지 모르겠네. 뭐 짐작이 가는 것이 있긴 하다만.”
- 짐작이요? 그게 뭔데요?
“뭐긴 뭐겠냐? 이 아공간의 틀, 그게 아마도 겨자씨겠지. 그 분께서 수미산이 들어 있는 겨자씨를 가지고 내 아공간을 만들어 주셨다는 뭐 그런 거 아니겠냐?”
- 하긴, 건우 님의 아공간은 지금도 해석 불가의 영역이긴 하죠.
“자, 어쨌거나 재미있게 되긴 했다.”
- 재미요?
“이제 원하면 언제든지 수미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지. 그리고 그곳 수도계에서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거고.”
- 그게 재미있어요?
“아, 그 이야길 안 해 줬구나? 수미세계가 겨자씨에서 벗어나는 순간부터 거긴 멸계전이 시작되는 거야.”
- 아, 예전에 노야란 수사가 수미세계를 겨자씨에 넣은 이유가 멸계전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했죠?
루야도 과거 건우가 만났던 노야를 기억해냈다.
“그래. 그런데 내가 영계에 오르면서 수미세계도 자연스럽게 겨자씨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결국 멸계전이 벌어지게 된 거지.”
-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일 이 백 년에 뭔가 변화가 생기진 않을 거야. 멸계의 일부가 수미세계와 연결이 되겠지. 그리고 미약한 힘을 지닌 것부터 서로 왕래를 시작 하겠지.”
- 영기와 극멸기를 지닌 존재들이 만나요? 보자마자 서로 죽이려 들겠네요?
“그렇게 멸계전이 시작되는 거지. 그리고 결국엔 두 세계가 완전히 연결되어 이동의 벽이 사라지면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질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 영계의 멸계전이라니 무섭네요. 태령기의 수사들이 나설 거 아니에요?
루야가 상상만 해도 무섭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건우 역시 잠시 그 상황을 떠올려 봤지만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입령기도 아직 감이 안 잡히는데, 성령기를 넘어 태령기(太靈期)라니.
그 위로 태령기 완경이 되어 등선을 준비하는 수사들을 따로 등선기 수사라 한다는데, 그 자세한 내막은 건우도 알지 못했다.
어쨌건 수미세계를 겨자씨에 넣어 멸계전을 피하게 했던 노야란 수사가 바로 그 등선기의 수사였던 것은 분명했다.
물론 그 노야는 등선을 포기하고 수미세계의 멸계전을 미루었기에 등선기라기 보다는 진짜 신선의 경지라고 보는 것이 옳겠지만.
“만만찮은 전쟁이 될 거야. 수미세계의 수사들도 멸계전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테고, 오랜 시간동안 대비해 왔을 테니까.”
- 그래요?
“그리고 그건 멸계 쪽도 마찬가지였겠지. 갑자기 멸계전이 미루어졌으니 그들 역시 상황을 알아봤을 거야. 당연히 언젠가 벌어지게 될 멸계전을 준비해 왔겠지.”
건우는 말을 하며 이번 수미세계의 멸계전이 지금껏 있었던 다른 멸계전들과는 많이 다를 것이란 추측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수미세계를 겨자씨에 넣어서 숨길 때부터 상황은 평범할 수 없게 되었다고 봐야했다.
- 그럼 이제 건우 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루야가 물었다.
“음, 일단은 수미세계에 가 봐야겠지. 앞으로는 수미세계의 멸계전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 주된 목적이 될 테니까.”
- 와, 그거 성공하면 건우 님은 곧바로 선계 등선에 성공하는 거네요?
“그래봐야 경지가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거지. 영계의 축기기 수사나 인계의 축기기 수사가 뭐가 다르겠냐? 도리어 영계엔 고계 수사의 층이 더 두꺼우니 인계보다 대우가 못할 수도 있다.”
- 아, 그건 또 그러네요. 그러니까 선계 등선을 하기 전에 그만한 경지는 만들어 두셔야 된다는 거네요?
“그런 거지. 음, 일단 유매매에게 줬던 대응진부터 확인을 해야겠다.”
건우는 수미세계의 멸계전을 대비해서 준비한 회심의 한 수를 빠르게 시행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 그런데 그게 가능해요? 지금 유혼결(幼魂結)을 펼칠 수 있어요?
루야가 건우를 보며 물었다.
건우가 준비한 회심의 한 수의 핵심이 바로 그 유혼결이었기 때문이다.
“유혼결은 인계, 영계, 선계에서 한 번씩만 실행할 수 있는 대법이다. 인계의 유혼결은 위문진을 통해서 완벽한 성과를 얻었고, 이젠 영계 수준의 유혼결을 펼칠 차례지.”
- 하지만 지금 이곳은 온전한 영계는 아니잖아요.
“그거야 수미세계로 가면 해결이 될 일이다. 게다가 그 쪽은 멸계전으로 멸계와 연결되는 선천진법도 생성되어 있지.”
- 아, 그렇군요.
“유혼결로 혼을 나눈 후에, 그 혼을 멸계로 보낸다. 그리고 그곳에서 성장해서 수미세계의 멸계전에 참가할 방법을 찾고, 전쟁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위치에 오른다.”
- 그리고 결국은 마지막에 뒤통수를 친다고요?
“그게 최상의 시나리오지.”
- 그런데 선태 괴수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이대로 밖에 뒀다간 오래지 않아서 죽임을 당할 텐데요?
그 때, 갑자기 루야가 선태 괴수를 거론했다.
“당연히 아공간으로 데리고 들어와야지.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멸계로 보내서 분혼을 돕도록 해야지.”
- 할 일이 많네요. 참, 그런데 용랑하고 혈원은요? 둘에게 뭔가 시킬 일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 녀석들은 이쪽 세상에 자리를 잡도록 할 거다. 이제 영계에 오르게 되었으니 이전처럼 신분 확인이니 하는 것은 쉽지 않겠지. 영계의 다른 지역 출신이라 하면 그만이니까.”
- 그건 그러네요.
“아무튼, 두 녀석들에게 이쪽 영계에 정착해서 정보 수집도 하고 세력 확장도 하라고 하면 되겠지.”
- 고작 화신기 초기, 중기 수준인데요?
“어차피 더 높은 경지를 내가 지원해 주긴 어려우니, 제 앞가림은 이제 알아서들 해야지.”
그로부터 며칠 후, 혈원과 용랑은 난데없이 공간낭 몇 개씩을 들고 아공간 밖으로 내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
건우는 그들을 내보내며 화신기의 경지가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고, 수도계의 먹고 먹히는 법칙을 잘 아는 녀석들이니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선태 괴수를 아공간으로 들여오고 곧바로 수미세계로의 이동을 준비했다.
* * *
“허어, 내 검이 영계로 올라왔는가?”
수많은 검들이 어지럽게 유영하고 있는 공간.
하나하나가 엄청난 보물로 보이는 검들이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고, 그것들이 제각각 허공을 떠도는데 한 번의 충돌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중앙에 무릎 위에 검 하나를 올려놓고 명상에 잠겨 있던 수사가 눈을 떴다.
그는 오래 전에 인계에 두고 왔던 자신의 검이 영계로 올라온 것을 느꼈다.
“벗들의 유물 몇 개가 영계로 올라왔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내 검은 거기에 끼지 못하여 관심을 끊었는데, 어찌 지금에서야 영계로 올라왔을꼬?”
검선은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자신의 검을 지닌 후배가 뒤늦게 다른 방법으로 영계 비승에 성공한 것이겠거니 추측했다.
“이러면 후배를 한 번은 만나봐야 하는 건가? 그런데 무척 먼 곳에 있는 듯 하군. 그런데도 이리 강력한 기운이 느껴지다니, 후배가 검에 엄청난 공을 들인 모양이군.”
검선은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도 자신의 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짐작해 냈다.
“제법 기틀을 잘 잡았어. 나쁘지 않아.”
검선은 자신의 영과 연결된 검의 등장에 살짝 마음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좋아. 좋아. 내 검을 맡겨 둔 보람이 있군. 좀 멀리 있기는 하지만 언제고 때가 되면 내 손에 들어오겠지. 내가 검의 주인임에야, 일이 그렇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
검선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검들을 일별했다.
그 순간 모든 검들이 운행을 멈추고 환한 빛을 내며 손잡이를 검선 쪽으로 향했다.
검선은 그 모습에 환한 미소를 짓고는 다시 눈을 감고 명상을 시작했다.
영계로 올라온 검이야 때가 되면 다시 그의 손에 들어올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얼마 후.
“음? 있었는데 없어?”
검선이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 눈을 뜨고 의식을 집중해 봤지만 그의 검은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검선은 자신의 검이 간혹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 참,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하지만 당장 급한 것은 아니니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지.”
그렇게 결정을 내린 검선은 이후로 그 검에 대한 관심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 바쁘다 바빠, 할 일이 많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