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환장 통수 선협전-142화 (142/499)

142. 격변의 시작은 사소하게 시작된다

= 오호라. 반갑소이다. 드디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소이다.

“음?”

부양도의 대전에 앉아서 검선의 유산을 살피던 건우는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검을 노려봤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지금 들리는 목소리가 검선의 유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먼 곳에서 전해져, 검선의 유산을 매개체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 몸은 자(子)라 하오이다. 십이간지의 첫 번째 자리를 뜻하지요. 혜선의 유산을 이었기에 그 자리를 맡게 되었소이다. 그리고 검선의 유산을 얻은 수사는 해(亥)의 이름을 받게 되었소이다.

“무슨 소리지?”

= 십이비선의 유산은 각각 열두 방위를 점하고 하나의 진법을 구성하게 되어 있소이다. 그 중에 검선의 자리가 마지막 열두 번째, 해(亥)의 자리라 그리 부른 것이니 마지막 이름을 받았다고 불쾌할 이유는 없소이다.

“너는 누구냐?”

= 지금 이 몸이 전하는 말은 일방적으로 전달만 할 수 있을 뿐, 소통은 불가하오이다. 이 몸의 연구가 아직 미진하여 그런 것이니 이해를 해 주셨으면 하오이다.

“혜선의 유산을 얻은 놈이 십이비선의 유산을 통해서 뜻을 전할 수 있다는 건가?”

= 참으로 오래 기다렸소이다. 이미 다른 유산들은 모두 완성되었는데 유독 검선의 유산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답답했소이다.

“이걸 언제까지 들어야 하지? 아공간으로 가지고 들어가면 들리지 않으려나?”

건우가 머릿속을 울리는 일방적인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 그 동안 몇 번 검선의 유산이 모습을 드러냈으나 매 번 다른 역(域)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또 망천유역입니까?

“검선의 유산을 아공간에서 꺼내기만 하면 어김없이 위치를 알아내는군. 이제는 그게 당연한 상황이 된 모양이지? 그렇다면 같은 역에서라면 유산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도 가능할 거 같은데?”

건우는 귀찮은 일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검선의 유산을 아공간으로 숨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지간한 화신기 수사 한둘 정도야 가볍게 상대할 자신이 있는 그였다.

어쩌면 누구라도 한 번 와 보라는 생각이 강할 수도 있었다.

거기에는 겁먹은 듯이 숨기는 것은 이제 그만해도 될 거 같다는 자신감과 비루한 행동을 하고 싶지 않다는 자존감도 깔려 있었다.

= 언제 다시 연결이 끊어질지 모르니 빠르게 본론을 이야기하겠소이다.

건우가 잠시 귀찮게 달려들 불나방 같은 수사들과 그들의 주머니에 들어 있을 것들을 생각하는 사이에 자(子)가 본론이란 말을 꺼냈다.

= 십이비선의 유산은 그 하나하나를 따로 떼어 놓아도 값진 것이지만 진짜 가치는 열두 개가 모두 모였을 때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소?

“영계 비승의 통로를 말하는 거군.”

= 그러니 어찌되었건 우리 유산의 주인들은 한 곳에 모여야 하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소.

“그야 그렇지만 서둘 이유가 없는 놈도 있는 거지. 나처럼.”

건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이전에도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자신은 다른 수사들과 달리 소천겁을 1만년 가까이 미뤄 뒀다.

예전 7만년 수령의 형자수란과(炯紫水蘭果)를 먹은 덕분이다.

그 덕에 소천겁을 7천년 뒤로 미뤘고, 7천년 후에도 소천겁 까지는 3천년의 여유가 더 있었다.

본래 인간 수사의 소천겁은 3천 년 정도 지나야 찾아오는 것이니 당연하다.

그래서 한껏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이 건우의 입장인 셈이다.

= 솔직히 해(亥) 수사는 우리들 열한 명의 수사들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주고 있소이다.

“음?”

= 해 수사가 검선의 유산을 감추고 있으니 다른 수사들이 불안할 수밖에 없소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어쩔 수 없이 유산의 주인들이 해(亥) 수사를 찾아 나서게 될 겝니다.

“그러니까 유산의 주인들이 떼로 몰려 올 거라고? 뭐, 그래서 어떻게 나를 찾을 건데?”

자의 말을 들었지만 건우는 대놓고 비웃었다.

인계의 화신기 수사들 능력으로 건우의 아공간을 찾아내긴 어렵다.

지금껏 한 번도 들킨 적이 없는 무쌍의 능력이다.

그런데 찾을 능력도 없는 것들이 떼로 몰려온다고 위협을 느낄까?

그저 웃음만 날 뿐이다.

= 해(亥) 수사가 이 자(子)의 말을 비웃고 있을 것이 눈에 선 하오이다. 하지만 이 자(子)가 조금만 더 애를 쓰면 유산이 어디에 있든지 반드시 찾아낼 방법을 구할 수 있을 것이오이다. 그리되면 이 자(子)가 다른 유산의 주인들에게 해(亥) 수사의 행방을 함구하고만 있기도 어려워지지 않겠소이까?

“대 놓고 협박인가?”

건우는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속으로는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다.

완성된 검선의 유산을 아직 모두 파악하진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엄청난 힘이 그 안에 숨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유산의 주인 몇이 연합을 하면?

게다가 만약 아공간에 넣은 검선의 유산까지 찾아낼 방법이 만들어지면?

그 때는 검선의 유산을 아공간에 넣는 것이 도리어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 될 수도 있었다.

검선의 유산 때문에 아공간의 존재가 드러날 수도 있을 테니까.

“이거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닌데?”

= 하지만 굳이 해(亥) 수사와 우리가 척을 질 이유가 있겠소이까. 우리들 유산의 주인들은 오로지 한 가지 목적만 달성할 수 있으면 그만인 일이오이다.

“영계 비승!”

= 영계 비승말이오이다.

건우의 생각과 자(子)의 생각이 일치했다.

= 앞으로 이 자(子)가 나서서 우리 열두 유산의 주인인 유산주(遺産主)들의 의견을 조율해 볼까 하오이다. 그리고 조만간 우리 열두 유산주가 모두 한꺼번에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창구를 만들어 보리다.

“음, 말을 좋은데 수사 놈들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열두 놈이 모여서 한 가지 뜻으로 움직인다? 그게 말이 되나?”

건우는 자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자신이 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다른 열하나 중에 몇은 반드시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그게 조율이 될까? 뭐, 된다면 좋긴 하겠네. 화신기가 된 마당에 영계 비승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숙원이니까.”

건우가 그렇게 중얼거릴 때였다.

= 해(亥) 수사께서는 유산을 감추는 능력이 뛰어나시니 언제 다시 연락이 닿을지 모르겠소이다. 그러니 당분간은 1년에 한 번은 이 날, 이 시간만은 유산을 개방해 주셨으면 하오이다. 그리해 주시면 또 그 사이에 조율된 내용을 전해 드리리다.

“설마 내가 그 말을 따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정 궁금한 것이 있으면 적당한 때에 내가 검을 꺼내면 그만이지. 전할 말이 있으면 그 때 알아서 전해 오겠지.”

건우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검선의 유산을 아공간으로 던져 넣었다.

자(子)가 이후에 할 말이 더 남았는지 어쩐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는 들어봐야 그리 구체적인 내용이 나올 것 같지 도 않았던 것이다.

“혜선의 유산을 이었다고? 십이비선 중에 혜선이 유독 머리가 좋은 책사형이라 했던가? 진법에 특히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고 했었지.”

건우는 십이비선들에 대한 옛 기록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런다가 눈빛을 반짝였다.

“책사란 것들이 보통 음흉하기가 짝이 없는 것들이고 남의 손을 빌려 제 이익을 만들어 내기를 좋아 하는 것들이니 크게 경계해야겠군. 흐흐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뭔가 기대가 된다는 듯이 묘한 웃음을 흘리는 건우였다.

그리고 그 얼마 후, 건우의 부양도는 망천유역(忘川流域)의 사도천(死渡川)에 도착했다.

그 사이에 영체기의 완경에 이른 용랑과 혈원이 건우를 반겨 맞았고, 4대 수도 문파는 이제 형문(刑門)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있었다.

당연히 건우가 없는 동안에 모아둔 수련 자원이 산을 이룰 정도로 쌓여 있어 건우를 기껍게 했다.

건우는 그 모든 것을 아공간으로 아우르고 용랑과 혈원에게 아공간을 열어주며 말했다.

“수고가 많았다. 앞으로는 수련에 힘쓰고 형문은 제 알아서 운영이 되도록 두어라.”

그 동안의 노고에 대한 보상이었다.

언제 그들이 화신기에 오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수련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용랑과 혈원은 건우의 은혜에 감읍하여 거듭 인사를 하고는 아공간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건우는 형문의 영체기 수사들 중에서 일곱을 뽑아 집단 지도 체제를 만들고 이전처럼 운영을 하도록 했다.

그들은 건우라는 화신기 수사를 배경으로 두고 문파를 운영하는 대신에 적당한 공물을 바쳐 성의를 표하면 되는 것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찾지 마라.”

건우는 부양도를 띄워두고 그렇게 선언한 후 모습을 감추었다.

부양도는 그가 사도천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지만 실제로 건우는 아공간에 칩거한 셈이었다.

건우는 아공간에서 검선의 유산을 궁구하며 그 안에 담긴 검선의 비전을 수습했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흘렀다.

* * *

“으음? 감히 누가!”

수미산겨자씨 아래에서 무릎에 검선의 검을 올리고 가부좌를 하고 있던 건우가 검미를 꿈틀거리며 눈을 떴다.

그런 건우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

- 건우 님.

그 때, 루야가 징조도 없이 건우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이등신의 모습을 하고 있는 루야였다.

“이게 무슨 소란이지? 어떤 놈이 부양도에서 소란을 일으켜!”

건우가 화난 목소리로 말을 하며 투명한 아공간 입구를 크게 열었다.

그러자 부양도 7층의 대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그 대전에는 수십 명의 수사들이 들어와 있었다.

건우는 대전의 입구 쪽을 향해 서서 등을 보이고 있는 이들이 형문의 제자임을 알아봤다.

그리고 그들을 핍박하며 대전으로 들어온 이들은 건우가 알지 못하는 수사들이었다.

“화신기가 둘?”

- 그러네요. 화신기 수사가 둘이나 되고, 나머지도 모두 영체기 수사들이에요.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그거야 지켜보면 될 일이지.”

건우가 불을 뿜을 듯이 형형한 눈빛으로 대전의 상황을 노려봤다.

그런 중에 궁지에 몰린 형문의 제자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선배님, 보십시오. 이곳에 뭐가 있다고 이러십니까. 길 선배님께서는 지금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는 형문의 영체기 제자로 두 화신기 수사에게 죽어가는 목소리로 애원하는 중이었다.

건우는 그 말을 통해서 저 화신기 수사들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연히 좋은 의도는 아닐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군. 역시 길우몽이란 놈은 이곳에 없었던 것이야.”

두 화신기 수사 중에 붉은 장포를 입은 사십대 외모의 건장한 수사가 중얼거렸다.

“있어도 상관은 없었겠지. 그 놈이 과거 이곳 사도천의 주인이었던 삼목족을 도살하지 않았나. 그런 놈이니 우리가 제 놈을 죽인다고 해도 억울할 것은 없겠지.”

그 말을 받은 것은 상체를 훤히 드러낸 삼목족의 수사였다.

“길우몽 그 놈이 검선의 유산을 지니고 있을 확률이 있다지 않았나?”

붉은 장포가 삼목족 수사에게 물었다.

“가능성이지. 다도해역과 평량역은 물론이고 이곳 망천유역에서도 그 길우몽이란 놈의 행적이 검선의 유산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니 말이지.”

“하지만 그런 정도로는······.”

“꼭 그 놈이란 말은 아니야. 하지만 그 놈의 성장세가 무섭긴 하지. 짧은 시간에 화신기까지 오른 것을 보면 뭔가 있긴 하겠지. 그래서 기대를 했는데 이렇게 종적을 감추다니.”

“이 부양도가 이곳에 있으니 그 놈이 언젠가는 돌아오지 않겠나?”

“그렇기야 하겠지만 수사의 시간이란 것이 너무도 덧없이 흘러가는 것이라 수백 혹은 수천 년을 기약할 수 없으니 그게 답답한 일이지. 게다가 어디서 비명횡사라도 하는 날에는 기다림 조차도 허사가 될 뿐이니.”

“그래도 이 부양도란 법보에 의념이 생생하게 살아 있으니 길우몽이란 놈이 무탈하긴 할 걸세.”

두 화신기 수사가 그렇게 떠드는 동안에 형문의 제자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두려운 눈빛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갑작스런 기습에 놀라서 도망치다 결국 부양도까지 오게 되었지만 부양도의 화신기 선배는 이미 몇 백 년 동안 종적이 묘연했다.

대부분 부양도에서 머물고 있다는 말을 의심할 정도로 출입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화신기 침입자 앞에서 믿을 것은 부양도의 화신기 선배 밖에 없었는데 막상 와 보니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부양도를 관리하는 괴뢰와 공방진법이 있었지만 두 화신기 수사의 손짓 몇 번에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

“저들은 어쩌겠는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문득 붉은 장포의 수사가 삼목족 수사를 보며 물었다.

붉은 장포 수사가 눈짓으로 가리킨 것은 대전 안쪽으로 몰려 있는 형문의 제자들이었다.

“내가 거느린 아이들이 있으니 저들은 굳이 필요가 없지. 이참에 제물로나 써 볼까 싶은데?”

삼목족 수사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영기를 끌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검은 마기가 넘쳐흐르며 대전 바닥에 검붉은 진법을 만들기 시작했다.

형문의 수사들을 제물로 수련에 작은 성취를 보려는 짓이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대인.”

형문의 제자들이 그 모습에 모두 바닥에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두 명의 화신기에게 감히 덤벼볼 생각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자비를 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삼목족 수사는 코웃음만 칠 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바닥에 검붉은 진법만 영역을 넓혀갈 뿐이었다.

“이리 죽을 수는 없다!”

“맞소이다!”

“죽어도 마귀의 제물이 될 수야 없소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뭐라도 해 보십시다.”

결국 형문의 제자들이 굽힌 무릎을 펴고 떨쳐 일어나며 이를 악물었다.

삼목족 수사는 그 모습에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지으며 눈빛을 빛냈지만 형문의 제자들은 오로지 마지막 한 수를 펼치기 위해 피를 토할 정도로 영기를 뽑아냈다.

꽈르르르릉!

“같잖은 것들!”

“커억!”

“크으윽, 여, 영기가 굳어?”

“이게 무슨!”

하지만 그 긴박함은 갑자기 터져 나온 굉음과 경멸하는 듯한 차가운 한 마디에 무너지고 말았다.

성해룡주를 손에 든 건우의 등장이었다.

이미 대전은 물론이고 부양도 전체가 건우가 불러낸 아공간에 포함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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