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협박 아니다. 대화다!
= 조 수사, 경 수사. 잠시 진정하십시오. 어찌 그리 서두릅니까?
건우는 두 영체의 반응에 느긋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조모명과 경려주는 더욱 안달이 났다.
= 이 보시게 길 수사. 지금 상황이 도대체 어찌 돌아가는 것인가?
= 길 수사는 주, 죽은 것이 아니었나요?
건우의 말에 조모명은 바깥의 상황을 물었고, 경려주는 자신이 길우몽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 하하하. 경 수사께서는 이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오신 모양입니다. 그렇게 가차없이 저를 죽이려 하시더니 말입니다.
= 아아, 길 수사.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정말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 으음. 경 수사.
= 네?
= 사과를 하면서도 그게 의미가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죽이려 했던 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경 수사도 그런 경우라면 어떤 사과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텐데요?
= 아아아, 길 수사······.
건우의 말에 경려주는 할 말이 없는지 끝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 이보게 길 수사. 경 사매가 길 수사에게 큰 잘못을 범한 것은 사실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대화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닐 게야. 그렇지 않은가?
그 때, 조모명이 건우를 보며 뭔가 알아차렸다는 듯이 말했다.
= 오호라, 조 수사께서는 뭔가 다른 할 말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어디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건우도 그런 조모명의 말에 관심을 보이며 말할 기회를 주었다.
= 지금 이리 우리 둘과 대화를 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길 수사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더는 우리를 시험하지 마시고 통쾌하게 원하는 바를 말씀해 보십시오.
조모명은 건우의 속이 뻔히 보인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건우는 그런 조모명의 반응이 도리어 반갑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 하하하, 조 수사께서 그리 말문을 터 주시니 그럼 망설이지 않고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그가 가지고 있는 금은연리옥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 그러니까 그 금은연리옥함의 봉인이 위가시(僞假匙)를 썼는데도 열리지 않았다는 말이군요? 맞춤 열쇠 하나가 있는데도요.
이야기를 들은 경려주가 상황을 확인하듯이 물었다.
=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걸 열 방법을 찾기 위해서 해봉당에 의뢰를 하기도 했지요.
= 아, 우리가 포란처 공략을 시작하기 직전에 들어온 의뢰가 바로 길 수사가 했던 의뢰였군요?
= 맞습니다. 그런데 의뢰를 무기한 연기하는 바람에 저도 마냥 기다리느니 포란처 공략 경험이나 얻자고 끼어든 것입니다.
= 그랬군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특이한 금은연리옥함에 대해서는 제가 방책이 있을 듯 합니다.
= 오호? 그래요?
건우는 경려주가 순순히 방법이 있을 거라 털어놓는 말에 조금 놀라며 되물었다.
= 그렇습니다. 그런 식의 봉인은 극금문에서도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썼던 방법입니다. 당연히 그런 봉인을 만드는 데에는 비용도 많이 들지요.
= 금은연리의 봉인 비용도 차이가 있는 모양입니다?
= 당연하지요. 게다가 그 옥함의 경우에는 맞춤 열쇠까지 만들었고, 그 열쇠에도 특별한 수작을 부려 놓은 것입니다. 비쌀 수밖에 없었겠지요.
= 알겠습니다. 생각해보니 당연하겠군요. 그래서 경 수사께서 말씀하신 방책이란 것은 어떤 것입니까?
= 제가 그것을 말씀드리기 전에 길 수사께서는 한 가지 약속을 해 주셔야겠습니다.
건우가 방책을 물어보자 경려주가 단호한 의지를 담아 건우에게 약속을 요구했다.
= 약속이라면 어떤 약속을 바라십니까? 호리병박의 봉인에서 풀어달라는 것입니까?
건우가 물었다.
= 설마요. 그런 소리를 해 봐야 길 수사께서 들어주시겠습니까? 저라도 저를 죽이려 했던 자를 살려줄 아량은 절대 없을 겁니다.
= 커엄. 그럼 뭘 바라는 겁니까?
= 그냥 이전에 빌었던 것처럼 깔끔하게 죽여 주셨으면 합니다. 수천 년, 혹은 수 만 년을 봉인된 상태로 괴롭힘 당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경려주는 다행히 건우에게 과한 요구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건우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영체기 수사의 영체.
어디에 쓰든 쓸모가 적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 길 수사. 나도 부탁하겠네. 경 사매에게 편안한 죽음을 내려 주게.
그 때, 조모명이 나섰다.
= 그리고 나 또한 함께 죽여주면 좋겠네. 대신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길 수사에게 내어 주지.
= 조 수사가 가진 모든 것이라면 무얼 말하는 겁니까?
건우가 관심이 있다는 듯이 물었다.
= 나는 그저 풍수문의 비전을 이었을 뿐이지만, 우리 풍수문도 극금문 못지않게 봉인과 결계 진법에 해박하다네. 그 모든 것을 길 수사에게 전수해 주지.
= 오호, 그건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말씀입니다.
= 저도 그렇게 하겠어요. 풍수문의 것은 조 사형이 더 잘 알테니 저는 극금문의 것을 전수해 주겠어요. 당연히 금은연리옥함의 봉인을 풀 방법도 알려 주죠.
건우가 조모명의 제안에 큰 흥미를 보이자 경려주도 다급하게 새로운 제안을 해 왔다.
건우는 호리병박에 들어 있는 둘이 볼 수 없는 얼굴에 활짝 핀 웃음을 지었다.
건우가 바라는 것을 알아서들 가져다 바치겠다 하지 않는가.
이만하면 목표 달성은 충분한 셈이다.
= 뭐, 좋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을 하고 또 요구가 과하지 않으니 두 수사가 원하는 대로 해 드리겠습니다.
= 오오, 고맙소 길 수사.
= 감사해요 길 수사.
건우의 말에 조모명과 경려주가 감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 하지만.
= 하, 하지만?
= 네?
= 내가 두 수사의 가르침만 받으며 시간을 보낼 수는 없으니 일단 금은연리옥함의 봉인부터 풉시다. 그리고 그 후에 두 분의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이 끝나면 두 분의 바람을 들어드리는 것으로 하지요.
= 그러니까 그 때까지는 우리를 여기 가두어 두고 데리고 다니겠다는 소리군.
= 그렇게 되는군요.
조모명의 말에 건우는 아니라고 둘러대지 않았다.
말하자면 기약 없이 건우의 처분을 기다리는 신세가 될 거란 말이었다.
게다가 수시로 건우가 어떤 요구를 할지 알 수 없기도 했다.
= 그럼 내 길 수사에게 하나만 물어보겠네.
= 그렇게 하십시오.
= 우리를 풀어줄 여지는 있는가?
= ······. 없습니다.
건우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경려주를 살려줄 수는 없을 거 같았다.
그녀를 죽이는 것은 이미 결정된 사실이었다.
다만 조모명은 살려줄 여지가 있지만 그와 경려주가 동문으로 서로 깊은 관계인 듯 보이니 그것이 어려웠다.
결국 조모명도 살려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 좋네.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 것 같으니 길 수사가 하고픈 대로 하게. 다만 일이 끝나면 우리 둘을 윤회에 들게 해 준다는 약속만은 지키게.
= 알겠습니다. 그 약속은 반드시 지키지요. 그리고 두 분을 이유없이 괴롭히는 일도 없을 겁니다.
= 알겠네.
= 고마워요.
= 좋습니다. 그런 일단 금은연리옥함의 봉인을 푸는 것부터 하지요.
건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 경려주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 * *
몇 달 후.
건우는 호리병박 속의 두 수사와 옥함 봉인에 대한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금은연리옥함을 여는 것은 꽤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원래는 극금문 해봉당의 비전을 모두 익힌 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당연히 그것을 제대로 하려면 제한 시간 안에 금은연리옥함을 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사이에 건우의 영체는 안정을 찾을 것이고 인공영체는 불완전해 질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경려주는 봉인을 푸는 지름길을 제시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 고맙군. 덕분에 봉인을 모두 풀어낼 수 있게 되었다.
= 그나마 한쪽 열쇠라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다행입니다. 그게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 정말 신기하군. 열쇠에도 수작을 부려 놓았는데, 그 반쪽으로 그것을 역산해서 해지할 수 있다니. 극금문 해봉당의 실력이 굉장하군.
= 봉인과 결계에 대해서라면 사실 과아분 놈보다는 제가 더 뛰어났을 겁니다. 놈은 풍수문의 비전을 제대로 익히지 않고 무시했으니까요.
= 그건 사매의 말이 맞습니다. 극금문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풍무문의 비전들은 극금문의 비전들과 잘 어울립니다.
= 솔직히 이번에 길 수사의 옥함을 여는 데에도 풍수문의 비전을 섞었어요. 앞으로 배우다보면 알게 될 거예요.
조모명과 경려주는 자신들의 사문인 풍수문의 가치를 높이려 은연중에 애를 썼다.
건우가 그들에게 배울 때에 건성으로 배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엿보였다.
그런 속내를 짐작했지만 건우에게 나쁠 것이 없는 일이라 모른척 하고 있었다.
= 자, 그럼 쉬고 있으시오. 나는 옥함을 열어 내용물을 살펴봐야겠으니.
= 알겠소.
= 조심하세요.
건우는 조모명과 경려주의 인사를 뒤로하고 호리병박을 아공간 한 쪽에 치워 놓았다.
슬쩍 허공에 던진 호리병박은 아공간 어느 구석진 곳에 은밀히 보관이 되었다.
하지만 아공간이 곧 의념 공간이니 생각만 일면 아공간에서 호리병박을 불러 오는 것은 일도 아니다.
건우는 다시 손을 저어 금은연리옥함을 불러냈다.
그리고 봉인을 푸는데 필요한 반쪽 열쇠와 가짜로 만든 반대쪽 열쇠도 불러냈다.
하지만 이전에도 이런 준비로는 옥함을 열지 못했다.
여기에 경려주의 조언을 얻어 만든 진법이 더해졌다.
건우가 앉은 앞쪽 자리가 넓은 광장으로 바뀌며 그곳에 복잡한 선과 문양이 그려졌다.
의념을 이용해서 진법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생각만으로 가능한 것은 이곳이 건우의 의념공간이기 때문이고, 필요한 자원이 모두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건우는 진법 곳곳에 갖가지 속성의 광석, 보석, 영초의 가루나 진액 등을 배치했다.
그런데 그렇게 진법에 배치한 보물들 중에는 허미당의 금은색 상자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그 상자는 허미당의 본명 법보라 가치가 높은 것이지만 과아분이나 경려주의 것에 미치지는 못했다.
그러니 그 중에서 봉인을 푸는데 써야 한다면 허미당의 것이 그나마 덜 아깝다는 생각에 그렇게 선택한 것이었다.
봉인을 풀어내는 성질의 법기가 꼭 필요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열려라(開)!”
모든 준비가 끝나자 건우가 두 열쇠와 진법을 향해 의념이 담긴 영기를 가득 밀어 넣으며 법언을 외웠다.
그러자 열쇠와 진법에서 강렬한 빛이 일었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열쇠가 금은연리옥함으로 날아가더니 금은의 액체로 녹아서 옥함에 스며들었다.
스라라라라라라락!
차르르르르르르륵!
열쇠를 받아들인 옥함에서는 풀먹인 천이 스치는 것 같은 소리가 나더니 이어서 가느다란 사슬이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옥함 뚜껑의 한 쪽이 위로 들렸다.
“저게 인공 영체?”
건우가 열린 옥함 안에 담겨 있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 우와, 저게 영체예요? 그냥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보이는데요? 아, 안에 뭐가 들어 있는 것 같기는 하네요.
건우의 중얼거림에 언제 왔는지 루야가 호들갑을 떨었다.
“일단 인공영체를 취하는 것부터 하고 보자.”
건우는 루야를 무시하고 급한 일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건우의 의념을 받은 인공영체가 허공으로 떠올라, 건우 머리 위에 있는 수미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수미산 위에 올라 앉아 눈을 감고 있는 건우의 영체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