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서울에서 출발한 기차가 한 번도 정차하지 않고 달려 대전에 도착했을 때는 50분이 지나 있었다. 기차에서 내린 나는 역 밖으로 나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채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채하야, 나 도착했어. 이제 집에 가려구.
오전 09:52
채하는 내가 연락하는 것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채하 : 잘 도착했어? 피곤하지는 않고?
오전 09:53
응 괜찮아
오전 09:53
채하 : 집에 가서 푹 쉬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오전 09:54
응 너도 일 열심히 해
오전 09:54
채하가 보낸 하트를 화르르 쏟아 내는 이모티콘을 확인하고 택시에 탔다. 집 주소를 말하고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이어폰을 타고 흘러나오던 노래가 여러 번 바뀌자 택시는 익숙한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카드로 계산한 후 단지 입구에서 내려 캐리어를 끌고 걷기 시작했다. 주변 풍경은 크게 변한 것이 없었지만 아파트 상가에 못 보던 카페가 생겼고 슈퍼가 편의점으로 바뀌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8층에서 내리자 3가구가 마주 보고 있는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우리 집 현관문 비밀번호를 눌렀다. 거의 10년 가까이 바뀌지 않은, 보안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번호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타닥타닥 발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이 열리는 기척을 따라 하얀 강아지 한 마리가 달려 나왔다. 채하의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코코였다. 나는 캐리어를 현관에 세워 두고 코코를 품에 안아 집 안으로 들어갔다.
“왔어?”
“지원이 오랜만이네.”
집에는 엄마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채하의 어머니도 함께 계셨다. 현관으로 달려온 코코를 보고 채하의 어머니가 놀러 오신 것을 예상하기는 했지만 얼굴을 보자 조금 당황스러웠다. 나는 당황을 감추고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럼, 잘 있었지. 지원이는 얼굴 좋아 보이네.”
“그래, 너 살찐 것 같다?”
내 얼굴이 좋아 보인다는 채하 어머니의 말에 엄마가 살이 찐 것 같다며 타박했다. 요즘 채하가 잘 챙겨 먹여서 그런지 턱선이 둥글어진 것 같았지만 내 착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어… 잘 모르겠는데.”
모르겠다며 얼버무렸더니 엄마가 손을 뻗어 내 배를 꽉 움켜쥐고 흔들었다. 나는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숨을 “흡.” 하고 들이마신 채 굳어 버렸다.
“모르긴, 이거 봐. 너 관리 안 하면 훅 간다.”
“그래, 채하랑 같이 운동이라도 다녀. 너네 이제 관리 안 하면 아저씨 된다. 내일모레면 서른이야.”
엄마와 채하 어머니는 서로 맞장구를 치며 깔깔거리면서 웃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에게 배를 잡힌 이후로 심장이 철렁해 웃지 못했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 좋은 시간 보내시라는 말을 남기고 코코를 안은 채 방으로 들어왔다. 핸드폰 카메라를 켜서 코코의 사진을 한 장 찍어 채하에게 보냈다.
(사진)
오전 10:30
이거 봐
오전 10:30
코코랑 너희 어머니 우리 집에 와 계셔
오전 10:31
채하 : 정말?
오전 10:32
응, 근데 나 살찐 것 같아?
오전 10:33
채하 : 아니, 왜?
오전 10:34
나는 채하에게 엄마에게 배를 잡혔던 것, 곧 아저씨가 된다는 것과 내일모레면 서른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까지 빠짐없이 일러바쳤다. 겨우 메시지 따위로 내 모든 감정을 전할 수는 없었지만 채하에게 말하고 싶었다.
메시지를 읽은 채하는 내가 달라진 것이 없다고 했으나 그리 신뢰가 가는 답장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나에 대해 객관적인 시선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달라지지 않았다는 채하의 말보다는 살이 쪘다는 엄마의 말이 더 신뢰가 가는 것이 사실이었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좋은 향기가 나는 것을 보니 엄마가 내가 온다는 말에 침구를 새것으로 바꿔 놓은 모양이었다. 따뜻한 햇볕 냄새가 느껴지는 듯한 이불 위에 몸을 둥글게 말고 잠든 코코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면서 나도 함께 졸음에 잠겨 들었다. 나는 강아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이불을 들추고 나를 흔들어 깨우는 엄마의 손길에 다시 눈을 떴다.
“아들, 점심 먹으러 가자. 피곤하면 카드만 주고 다시 자도 돼.”
“으응, 같이 가.”
나는 다시 잠드는 대신 엄마를 따라나서기로 했다.
“뭐 먹을 건데?”
“우리 아들이 사 주는 거니까 비싼 거 먹어야지.”
코코는 채하네 집으로 들여보내고 나와 엄마, 채하 어머니까지 세 명이 함께 집을 나섰다. 우리가 향한 곳은 아파트 상가에 있는 샤브샤브 식당이었다. 비싼 걸 먹겠다는 엄마의 말에 조금 긴장했지만, 메뉴판을 보니 긴장을 풀어도 될 것 같았다.
음식을 주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 위로 샤브샤브 육수와 월남쌈 재료가 올라왔다. 먹을 것을 보자 금방 허기가 돌았다. 대화하면서 천천히 식사를 하는 엄마와 채하 어머니와 달리 나는 말없이 밥만 먹었다. 입에 월남쌈을 넣고도 쉬지 않고 손을 움직여 쌈을 만드는 나를 보며 엄마가 말했다.
“너 지난봄에 구충제 안 먹었어?”
“왜?”
“정신없이 먹길래 배에 기생충 들었나 해서.”
“아, 진짜! 먹는데 왜 그래.”
내 배 속엔 기생충이 아니라 엄마의 손주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아직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조용히 손을 내려 배 위에 얹고는 ‘피치야, 할머니가 몰라서 그런 거니까 못 들은 걸로 하자’라고 속으로 말했다.
“우리 채하가 굶기니?”
채하의 어머니가 물었다. 채하는 나를 절대 굶기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한 끼라도 굶으면 큰일이 나는 사람처럼 굴었다. 하지만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상가에 새로 생긴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이런 건 또 언제 생겼대.”
“너 지난번에도 여기서 커피 마셨잖아. 새삼스럽게 왜 그래?”
“아, 맞다. 깜빡했네.”
엄마의 말에 당황했지만 나는 또 어색하게 웃으면서 넘겨 버렸다. 지난번에 왔을 때 내가 이곳에 왔던 모양이었다.
집에 돌아온 우리는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엄마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건강 관련 프로그램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나는 그 옆에 앉아서 핸드폰만 들여다보았다. 핸드폰 속 영상에 집중할 때 메시지 한 통이 왔다. 발신자는 최희주였다.
최희주 : 너 친정 갔다며?
오후 02:09
최희주 : 설채하 존나 죽상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후 02:10
메시지와 함께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넓은 어깨를 찌부러트리고 컴퓨터 앞에 앉은 채하의 뒷모습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인지 더 불쌍해 보였다.
채하 밥은 먹었어?
오후 02:11
최희주 :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라
오후 02:12
최희주: 올 때 빵 사 와
오후 02:13
제대로 밥도 먹지 않았다는 소리를 듣자 채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희주는 눈치도 없이 빵이나 사 오라는 소리나 하고 있었다.
채하야 점심 먹었어?
오후 02:15
희주의 말을 들은 지 얼마 안 되어 채하에게 점심을 먹었냐고 메시지를 보냈다.
채하 : 웅웅 오늘 2그릇 먹었어
오후 02:16
채하는 이미 최희주가 일러바친 것도 모르고 거짓말을 했다. 내가 걱정할까 봐 거짓말을 하는 그의 노력에 속아 주기로 했다. 멍하니 소파에 누워 있다가 알게 된 점이 하나 있었다.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 처음으로 혼자 대전에 왔다는 것.
나는 침대에 누워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5시가 조금 넘었을 때 온 퇴근한다는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아무 연락이 없었다. 혼자 2박 3일 동안 집에 있을 채하를 생각하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채하의 말대로 함께 올 걸 그랬다고 조금은 후회가 되었다.
저녁을 먹으라는 엄마의 말에 방에서 나왔다. 식탁 위에는 아빠의 퇴근 시간에 맞춰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다. 아빠 생일 전야라서인지, 내가 오랜만에 와서 그런 것인지 잡채부터 갈비찜까지 푸짐한 한 상이었다. 그러나 나는 채하 걱정에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왜 먹는 게 시원치 않아?”
“그냥.”
젓가락으로 밥을 깨작거리며 대답했다.
“그새 기생충 잡은 거야?”
“아, 기생충 아니래도.”
엄마는 기생충 타령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갑자기 궁금증이 들었다. 아들 배 속에 기생충이 아니라 아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반응이 어떨까. 일단 부모님은 나를 아직도 베타로 알고 있으니 크게 충격을 받을 것 같았다. 내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아빠가 입을 열었다.
“아빠는 선물 같은 거 필요 없다.”
나는 저 말이 거짓말인 것을 알았다. 내가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 저 말에 속아 정말 아무것도 준비를 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아빠가 몰래 눈물을 닦던 것을 보았다.
“진짜?”
“그럼. 아빠가 거짓말하는 거 봤냐.”
많이 보긴 했지만 굳이 반박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밥과 반찬을 깨작거리는 사이 부모님은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자리에 더 앉아 있는 대신 밥그릇을 들고 일어났다. 식탁 위를 정리하는 아빠를 보다가 손에 고무장갑을 꼈다. 수세미를 들고 그릇을 닦는데 문득 기억을 잃은 후로 설거지를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한번 채하 생각이 났다.
설거지를 마치고 나왔을 때 거실 텔레비전에서는 일일 드라마가 한창 방영되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텔레비전 안으로 들어갈 기세로 드라마에 집중했다. 나도 그 옆에 앉아 같이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인공이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진부한 전개에 금방 흥미를 잃었다.
핸드폰을 들어 그동안 와 있던 알림들을 확인했다. 전부 쓸데없는 것뿐이었고 채하에게 온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니, 저게 말이 돼!”
내가 핸드폰을 보는 동안 열심히 드라마를 시청하던 아빠가 소리를 질렀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주인공이 갑자기 머리를 다쳐 기억 상실증에 걸려 버린 것이었다. 겨우 저 정도로 머리를 부딪혔다고 기억 상실증에 걸리는 게 말이 되냐면서 열을 올리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조용히 일어나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엎드려 웹툰을 보다가도 금세 흥미를 잃었다. 마음이 다른 곳으로 가 있으니 내용이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웹툰을 꺼 버리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클래식 음악을 틀었다. 잠깐 듣기만 해도 잠이 쏟아지는 것이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듯도 했다.
눈을 감고 있을 때 누군가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다. 나는 현관문으로 걸어가는 엄마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서도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아는 사람인지 엄마는 어서 들어오라며 반갑게 맞이했다.
“어머, 채하야. 언제 온 거야?”
엄마의 입에서 나오는 채하의 이름에 나는 눈을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가자 정말 눈앞에 채하가 서 있었다.
“퇴근하고 바로 왔어요.”
“그래? 밥은 먹었어?”
“네. 집에서 먹었어요.”
채하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엄마와 대화를 했다.
“그럼 과일 먹고 가. 지원이랑 거실에 앉아 있어.”
“아니야, 됐어. 우리 나갔다 올게.”
주방으로 들어가는 엄마의 뒤에 대고 소리쳤다. 엄마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채하의 손목을 잡고 집을 나왔다.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채하는 내가 이끄는 대로 말없이 나를 따라왔다.
우리는 놀이터 한구석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놀이터에는 나와 채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원아, 잘 있었어?”
열두 시간도 채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채하는 나에게 잘 있었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그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페로몬이 느껴지자 방금까지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왜 아무 연락도 없었어?”
“집에 가는 중에 너무 보고 싶어서. 그대로 차 돌려서 오느라고 그랬어.”
나는 말 좀 해 주지 그랬냐고 투덜거렸다. 채하는 미안하다며 내 등을 토닥였다. 내가 느꼈던 불안감이 그에게도 전해진 듯했다.
“저녁 먹었어? 오랜만에 엄마 밥 먹어서 좋았겠네.”
“응. 맛있었어.”
나는 채하 걱정에 밥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아 깨작거렸던 것은 숨기기로 했다. 점심을 제대로 먹지 않고 2인분이나 먹었다고 한 그의 거짓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손을 잡은 채로 천천히 집까지 걸어갔다. 집 앞에서 헤어져야 하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채하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집으로 가는 대신 비상계단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지원아, 잘 자.”
채하는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배 위에 손을 얹고 피치에게도 인사를 했다.
“피치도 잘 자고 아빠랑 내일 다시 만나자.”
“채하 너도 잘 자.”
나 역시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내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동안 채하는 내 뒤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집 현관문 도어 록이 잠긴 후에야 채하가 집으로 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채하와 무엇을 하고 왔는지 물어보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부모님은 여전히 드라마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채하를 만나 긴장이 풀려서인지 갑자기 허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냉장고를 뒤진다면 엄마의 잔소리가 시작될 것이 눈에 훤했다. 피치가 기생충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배고픔을 참는 것이 최선이었다.
씻고 침대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채하가 없어서인지, 배가 고파서인지. 평소였으면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잠들었겠지만 정신이 너무 말똥말똥했다.
억지로 눈을 감고 양을 세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백서른일곱 번째의 양을 셈과 동시에 양의 복슬복슬한 털 뭉치가 치킨으로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 치킨을 먹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자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듯했다.
살금살금 방문을 열고 나와 거실을 살폈다. 부모님은 자고 있는지 집 안이 온통 어두웠다. 나는 일단 현관문 앞에 서서 채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채하야
오후 11:34
자니…?
오후 11:34
‘자니’와 ‘…’가 합쳐지니 헤어진 애인에게 보내는 구질구질한 메시지 같았다. 그렇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 따위는 없었다.
채하 : 아니 왜?
오후 11:35
다행히 채하가 깨어 있었는지 바로 읽음 표시가 뜨고 답장이 왔다. 나는 일단 조용히 문을 열고 집을 빠져나와 채하네 현관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피치가 치킨 먹고 싶대
오후 11:36
내가 먹고 싶어서 눈물이 날 것 같다고 하기엔 조금 쪽팔렸다. 피치 핑계를 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이 열렸다. 천천히 열리는 문틈 사이로 옆구리에 코코를 낀 채하의 모습이 보였다. 채하는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내 꼴에 놀란 눈치였다.
나는 채하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누가 보면 오랫동안 헤어지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애틋하게 인사를 해 놓고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피치가 치킨이 먹고 싶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채하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응. 양념 반 프라이드 반으로.”
구체적인 피치의 주문에 채하는 집에서 제일 가까운 치킨집을 검색해 전화를 걸었다. 그는 아파트 놀이터로 치킨을 갖다 달라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코코, 형이 너 때문에 데이트도 맘대로 못 하잖아.”
채하가 코코의 코를 톡톡 치면서 말했다. 코코는 가족들이 밤에 몰래 나가려고 하면 짖는 버릇을 가졌기 때문에 데리고 나온 모양이었다. 코코는 장난을 치는 채하의 손가락을 살짝살짝 깨물었다.
“몰래 나가면 짖어서 데리고 나온 거야?”
“응. 이제 안 그래도 되는데 계속 짖네.”
재수생 시절 밤마다 몰래 나가 술을 먹고 놀던 채하의 형 때문에 화가 난 채하 아버지가 코코를 훈련시키셨다고 했다. 하지만 코코는 아버지의 의도와는 다르게 채민 형뿐만 아니라 온 가족들에게 짖어 댔다. 심지어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그랬다.
우리가 코코와 놀고 있을 때 치킨이 도착했다. 밖에서 먹기 편하도록 순살 치킨을 시킨 채하가 젓가락 하나를 뜯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맛있게 먹어. 우리 피치도 맛있게 먹고.”
“채하 너도 얼른 먹어.”
프라이드치킨 한 조각을 베어 무니 눈물이 날 정도로 맛있었다. 그와 동시에 오늘 엄마에게 들었던 말들이 다시 떠올라 서러워졌다. 나는 채하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에 대해 전부 말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자꾸 나보고 배 속에 기생충 들었냬. 뭐 먹을 때마다 눈치 주고.”
심각한 얼굴로 말하는 나와는 다르게 채하는 웃겨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야! 너는 네 새끼가 기생충 소리를 들었는데 웃기냐?”
“아니, 어머니도 모르고 하신 말씀이잖아.”
“그래도!”
“우리 피치, 처음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못 부르더니 이젠 할머니한테 기생충 소리도 듣네.”
채하의 말에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조용히 치킨만 먹었다. 채하는 여전히 치킨에 손도 대지 않고 내가 먹는 것만 바라보고 있었다.
“너 왜 안 먹어? 또 입덧해?”
“아니야. 저녁도 많이 먹었고 요새 고기가 별로 안 먹고 싶더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 기억 속 채하는 혼자 치킨 한 마리를 간식처럼 먹고 고기반찬이 없으면 밥도 깨작거릴 정도로 고기를 좋아했다. 내가 걱정할까 봐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느새 치킨이 바닥을 드러냈다. 나는 치킨 한 마리를 거의 다 먹은 나 자신에게 놀랐다. 지금까지 혼자 한 마리를 다 먹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잘 먹으니까 예쁘네.”
채하가 다 먹은 치킨 상자를 정리하면서 말했다.
“너 오글거리는 말 되게 잘한다.”
“난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 피치, 맛있게 먹었어?”
피치에게 물어보았지만 내가 대신 대답해야 하는 질문이었다.
“응, 맛있게 먹었대.”
자리에서 일어난 채하는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고 남은 한 손으로는 코코를 안았다. 다시 집 앞에 도착한 우리는 아까처럼 작별 인사를 했다. 나는 채하에게 짧게 입을 맞추고 현관문을 열었다.
양치를 하고 침대에 누웠지만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 이제 나는 그가 없으면 쉽게 잠들지 못하게 된 모양이었다. 채하에게 전화를 걸자 연결음 세 번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렸다.
- 지원아, 왜? 잠이 안 와?
채하는 단번에 내가 전화한 이유를 알아챘다. 그도 나와 같은 이유로 잠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응, 나 이제 너 없으면 못 자는 것 같아.”
내 말에 채하는 낮게 웃었다.
- 보고 싶어. 지원아.
나도 채하와 같은 마음이었다. 핸드폰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핸드폰은 침대 밑에 떨어진 채였고 채하는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채하야, 지원이 깨워서 밥 먹으라고 해.”
굳게 닫힌 문 너머에서 엄마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채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여전히 잠에 취해 있는 나를 안아 일으켰다. 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그대로 채하에게 안겼다.
“잘 잤어?”
“으응.”
웅얼거리면서 대답했다. 평소였으면 자고 있을 시간에 일어나려니 눈이 쉽게 떠지지 않았다. 채하는 내 볼에 입을 맞추고 천천히 등을 쓰다듬었다. 천천히 움직이던 손길이 내가 입은 티셔츠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아, 손 빼. 엄마 들어오면 어떡해.”
들킬까 걱정하는 것과 달리 잠에 늘어진 말투는 거의 앙탈같이 들렸다.
“피치한테 아침 인사는 해야지.”
아침 인사라기엔 너무 끈적끈적했다. 등허리를 만지던 손이 점점 움직이더니 배에 닿았다. 채하는 낮은 목소리로 “피치, 잘 잤어?”라고 물으면서 배를 어루만졌다. 닫힌 문밖으로 엄마의 발소리가 들리고 나는 깜짝 놀라 채하를 밀어냈다. 내가 바로 앉는 것과 동시에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뭐 해. 빨리 나와서 밥 먹어.”
“어어, 지금 나가려고 했어.”
“채하도 얼른 나와.”
나는 엄마의 뒤를 따라 방을 나오면서 아직 침대에 앉아 있는 채하를 노려보았다. 식탁 위에는 어제저녁에 먹었던 반찬들이 거의 그대로 올라왔다. 아침 식사를 하기엔 조금 늦은 시간이어서인지 아빠는 이미 집에 없었다. 나는 채하와 마주 보고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잘 먹겠습니다.”
“그래, 채하 얼굴이 반쪽이 됐네. 많이 먹어.”
엄마는 채하에게는 많이 먹으라고 하면서 내 밥그릇에는 밥을 절반밖에 퍼 주지 않았다. 그의 앞에 놓인 밥그릇과 내 밥그릇을 눈대중으로 비교해 봐도 차이가 확연했다.
“왜 밥을 이것밖에 안 줘?”
“넌 네 배를 보고 밥이 넘어가니?”
눈칫밥에 목이 꽉 막히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먹지 않으면 피치도 굶는다는 생각에 꾸역꾸역 숟가락을 움직였다. 채하는 엄마의 눈치를 살피면서 엄마가 보지 않는 틈을 타 내 밥그릇에 자기 밥을 덜어 주었다.
“천천히 먹어.”
컵에 물을 따라 내 앞에 놓아 준 채하를 보면서 피치에게 속으로 말했다. ‘피치야, 그래도 너네 아빠밖에 없다. 그치?’ 하고.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식사가 끝나고 밥그릇을 설거지통에 담그자 엄마가 나에게 알약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
“구충제. 얼른 먹어.”
내 손에 알약을 들려 준 엄마는 반찬통을 정리해 냉장고 안에 넣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가 이쪽을 바라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재빨리 채하의 입 안으로 알약을 밀어 넣었다.
“먹었어?”
“응.”
엄마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을 때 알약은 이미 채하의 배 속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들키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채하도 나와 비슷한 마음인지 엄마의 눈치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
엄마는 식당을 예약해 뒀으니 식사 시간에 늦지 않게 오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갔다. 엄마가 나가고 난 후 우리는 방으로 들어가 함께 침대에 누웠다. 싱글 침대에 둘이 눕다 보니 옆으로 누워 있는 나를 채하가 뒤에서 감싸 안고 딱 붙은 모양새가 되었다.
“아버지 선물 샀어?”
뒤에서 나를 안은 채하가 배를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아니, 우리 아빠 돈 좋아해.”
선물 대신 봉투를 준비했다는 말에 채하는 선물을 사러 가자고 성화였다. 나는 밖에 나가는 대신 채하의 품에 안겨서 잠이나 자고 싶었다. 하지만 데이트를 하자며 귀엽게 졸라 대는 채하에게 넘어가 버렸다.
우리는 각자의 집에서 외출 준비를 하고 다시 만나기로 했다. 씻고 준비를 마치자 11시가 넘었다. 채하도 나와 비슷하게 준비를 마쳤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다. 외출복을 입은 나와 달리 채하는 못 보던 트레이닝복을 입었다.
“못 보던 옷이네?”
“응. 서영이네 놀러 왔을 때 놓고 간 거래. 일단 이거 입고 나가서 새로 사 입어야지.”
퇴근 후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대전으로 내려온 채하는 고등학교 때 입던 옷을 입거나 채민 형 남편이 놓고 간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유행이 훌쩍 지나 버린 옷을 입을 바엔 채민 형 남편의 옷을 입는 것을 택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집에서 제일 가까운 백화점으로 향했다. 남성복 매장으로 들어간 채하는 셔츠 여러 벌을 꺼내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채하는 연분홍색과 연하늘색의 차이나 카라 셔츠 두 벌을 손에 들었다.
“그거 둘 중에 뭐 살지 고민하는 거야?”
“아니. 둘 다 살 건데.”
“왜 똑같은 디자인을 두 개나 사?”
채하는 “너랑 나랑 커플룩.”이라고 하면서 내 목 아래로 셔츠 두 벌을 번갈아 가며 대어 보고 나를 거울에 비춰 보기도 했다.
진지한 얼굴로 고민을 하던 그는 내 손에 연분홍색 셔츠를 들려 주고 탈의실 안으로 집어넣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와 거울을 확인하는 사이 연하늘색 셔츠와 검은색 슬랙스를 입은 채하가 탈의실에서 나왔다.
채하는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와 단정한 느낌을 주는 얼굴로 평소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받는 편이었다. 옷까지 깔끔하게 차려입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채하를 쳐다보고 갈 정도였다.
같은 디자인의 셔츠 때문에 ‘우리 연애해요’ 하는 티가 너무 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지만 다른 스타일링 덕에 일부러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모를 듯했다.
계산을 마친 채하가 내 손을 잡고 식당가로 들어갔다.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아빠의 선물로 무엇이 좋을지 고민했다.
“지갑 어때?”
“아빠 지갑 안 쓰는데. 지갑 대신 핸드폰 케이스에 다 넣고 다녀.”
“그럼 신발은?”
“우리 아빠 까탈스러워서 신발은 직접 신어 보고 사.”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결국 우리가 선택한 것은 건강식품이었다.
“비타민, 오메가3, 홍삼. 뭐가 좋을까?”
“음, 홍삼으로 할까?”
아빠는 입에 쓴 것이 몸에 좋다는 말을 자주 하고는 했다. 그래서 맛을 느끼지 못하고 삼켜 버리는 알약류보다는 쓴맛이 느껴지는 홍삼을 선택했다. 채하는 홍삼 코너에서 제일 좋아 보이는 것을 고른 후 계산을 했다.
“내가 사려고 했는데. 왜 채하 네가 사?”
“예쁘게 봐 달라는 뇌물. 지원이 너랑 결혼 허락받으려면 미리 점수를 따 놔야지.”
그가 눈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저렇게 웃으면서 말하면 홍삼 뇌물 따위가 없어도 누구든지 채하를 예쁘게 봐줄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나도 채하처럼 객관적인 시선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일 선물을 산 채하는 내 손을 잡고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파는 매장으로 들어갔다. 매장 안은 계절에 맞춰 여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물건들로 가득했다. 그는 분홍색 복숭아 모양의 부채를 꺼내 매장 입구에서 가져온 바구니에 넣었다.
“부채? 차라리 선풍기를 사지?”
“그냥 부채가 아니라 복숭아 모양이잖아.”
채하는 복숭아 머리핀과 복숭아 장식이 달린 펜, 메모지같이 복숭아 모양으로 생긴 것들은 모두 바구니 안으로 던져 넣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인형들을 모아 둔 코너로 갔다. 많은 인형들 중 흰색 강아지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입을 벌리고 환하게 웃는 인형은 복숭아 모양 물건에 정신이 팔려 있는 채하의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내가 인형을 살지 말지 고민할 때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채하가 내 앞으로 인형 하나를 내밀었다.
“지원아, 이거 너 닮았어.”
채하가 웃으면서 내민 것은 사막여우 인형이었다. 평소 고양이상이라는 소리는 많이 들어 봤지만 여우를 닮았다는 소리는 처음이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사막여우 인형을 바구니에 넣었다. 나도 손에 든 강아지 인형을 채하가 든 바구니에 넣었다.
“이건 왜?”
“저 강아지 너 닮았어.”
우리는 바구니를 들고 계산대 앞에 늘어선 줄의 맨 뒤에 섰다. 주말이어서 그런지 매장 안에는 아이와 함께 나온 가족 단위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채하의 손을 잡자 우리도 이제 가족이라는 게 실감 났다.
나와 채하는 쇼핑을 마치고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우리가 다녔던 고등학교 근처에 차를 세웠다. 졸업한 지 6년이나 지났지만 학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같은 반이었던 우리가 사용했던 교실이 있는 건물도, 공을 차고 놀던 운동장도, 야간 자율 학습을 빼먹기 위해 몰래 넘던 담벼락도 그대로였다.
“여기는 그대로네.”
“그러니까. 시간 빠르다.”
채하도 나처럼 추억에 젖어 들었다. 우리는 운동장 한구석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주말이었지만 운동장에는 축구를 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시간이 날 때마다 운동장으로 달려 나가던 우리의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나도 저 때는 날아다녔는데.”
“아저씨처럼 말하지 마.”
채하의 말에 나는 큭큭거리면서 웃었다. 지금 앉은 벤치가 고등학교 때 점심을 먹고 자주 앉아 있던 곳이었다는 게 떠올랐다.
“우리 고등학교 때 밥 먹고 여기 자주 앉아 있던 거 생각나?”
“응. 여기 앉아서 광합성하고 그랬잖아.”
“그때는 채하 너랑 계속 친구일 줄 알았는데.”
지금 우리의 감정은 친구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너무 커져 있었다.
“그래서… 싫어?”
지금의 우리는 손을 잡고 입을 맞추며 함께 잠자리에 들지만, 관계를 확실한 단어로 정의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알았다.
“아니, 누가 싫대?”
채하와 나의 사이는 짧은 시간 동안 변해 버렸고 그 과정조차 기억이 나지 않으나, 나는 여전히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채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채하의 눈빛에 담긴 의미를 인제 읽을 수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내 눈빛도 같은 의미를 띄었기에.
나는 손을 뻗어 채하의 손을 잡았다. 채하는 내 손을 놓지 않겠다는 듯이 힘을 주었다. 더운 날씨였지만 그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나와 채하, 피치까지 우리 셋이 함께할 미래가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아빠의 생신 케이크를 사고 시간에 맞춰 식당에 도착했다. 예약된 방으로 들어섰을 땐 우리 부모님과 채하의 부모님이 먼저 와 계셨다. 나와 채하는 서로의 부모님 옆에 마주 보고 앉았다. 문을 열고 들어와 자리에 앉는 동안 4쌍의 눈은 계속해서 내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왜 다들 내 얼굴에서 눈을 못 떼시나.”
“오늘 지원이 예쁘네.”
채하의 어머니가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저는 항상 잘생겼죠.”
나는 태연하게 대답하고 핸드폰을 들어 꺼진 화면에 내 얼굴을 비춰보았다. 머리 위에는 아까 채하가 샀던 복숭아 모양 머리핀이 달려 있었다. 필요도 없는 걸 뭐 하러 사나 했는데 이런 데 쓰려고 했구나 싶었다.
“야! 설채하!”
핀을 빼서 앞에 앉은 채하에게 던졌다. 그는 핀에 맞고도 좋다고 웃고 있었다. 나를 제외한 이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웃었다. 식당에 들어올 때도 사람들이 전부 나를 쳐다보았는데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누가 거기서 자래?”
예약해 둔 식당으로 가는 차 안에서 짧게 졸았는데 그새 이런 짓을 해 버렸다. 나는 흰자가 훤히 보이도록 채하를 노려봤다.
“어머, 쟤 눈 빠지겠다. 채하야 지원이 얼굴 밑에 접시 하나 받쳐 줘라.”
엄마의 말에 나를 제외한 모두가 또다시 웃기 시작했다. 채하는 한술 더 떠 펼친 손을 내 눈 밑에 갖다 대었다. 나는 그 손을 탁 소리가 나게 쳐 버렸다. 내가 한창 짜증을 내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직원이 고기를 들고 들어왔다.
“많이 먹어. 지원이가 사는 거니까.”
“내가 사는 거였어? 몰랐네.”
머릿속으로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을 때 채하가 집게를 들고 고기를 불판 위에 올렸다. 붉은빛을 띄는 소고기가 갈색으로 변하면서 맛있는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욱-.”
갑자기 채하가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했다. 부모님들이 시선이 모두 채하에게 쏠렸다.
“채하야,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는 말끝을 흐리면서 앞에 놓인 물을 마시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부모님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재빨리 옆에 놓아 둔 상자에서 케이크를 꺼내 초를 꽂았다. 초에 불을 붙여 아빠 앞에 놓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더니 채하에게 쏠린 관심이 흩어졌다.
짧은 노래가 끝나자 아빠는 내 얼굴을 보면서 소원을 말했다.
“아빠 소원은 착하고 예쁜 며느리 보는 거야. 그리고 얼른 손주도 생겼으면 좋겠고.”
아빠의 소원은 이미 절반 정도 이루어진 상태였다. 예쁜 며느리는 아니었지만 채하는 착했고 이미 손주도 생겼으니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미리 준비해 온 봉투를 내밀었다.
“어휴, 뭘 이런 걸 준비했어. 아빠는 선물 같은 거 필요 없다고 했잖아.”
말과는 다르게 아빠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빠르게 봉투를 반으로 접어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채하가 아까 백화점에 가서 산 홍삼을 건넸다.
“생신 축하드려요.”
“선물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뭘 이런걸 사 오고 그래.”
“예쁘게 봐 달라고 드리는 거예요.”
홍삼 선물에 기분이 좋아 보이는 아빠는 “내가 채하는 처음 봤을 때부터 예쁘게 보고 있었어.” 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우리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채하는 고기가 익는 족족 내 접시 위에 올려 두기 바빴다. 평소 같았으면 내 접시 위의 고기를 들어 채하의 접시로 옮겼겠지만, 아까의 장난 때문에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접시 위에 올라온 고기는 올라오는 족족 내 입 속으로 사라졌다.
“채하야, 고기 그만 굽고 얼른 먹어. 살이 많이 빠진 것 같네.”
“그래, 지원이가 네 밥 뺏어 먹니? 지원이는 살쪘는데 채하는 반쪽이 됐네.”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남자는 살이 찌면 안 된다고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말해 온 사람이었다. 여전히 그 생각은 바뀌지 않은 모양이었다. 채하는 우리 엄마의 눈치를 보면서도 계속 고기를 구우며 나에게 많이 먹으라고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우리 아빠와 채하의 아버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어느새 소주 두 병을 비웠다. 채하의 아버지가 조금 붉어진 얼굴로 나와 채하도 한 잔씩 받으라며 술을 권하셨다. 채하가 운전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을 하자 그럼 나라도 마시라며 손에 소주잔을 쥐여 주셨다.
“아, 제가 술은 좀….”
내가 말꼬리를 흐리자 채하의 아버지는 “왜? 20살 되자마자 그렇게 먹어 대더니?” 하고 물어보셨다.
“술 끊었어요….”
나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잘 생각했네. 아직도 술 먹으면 밖에서 자고 그러는 거 아니지?”
저 이야기는 도대체 언제쯤 잊어버릴지 궁금했다. 나와 채하가 20살이 되기 바로 전날, 우리는 친구들과 함께 번화가에 모였었다. 밤 12시가 지나고 20살이 되자마자 당당하게 신분증을 내밀고 들어간 술집에서 우리는 신나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 후 집으로 어떻게 왔는지는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채하와 나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 앞에서 서로를 껴안고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우리는 해돋이를 보러 가기 위해 새벽에 집을 나선 부모님께 발견되었다. 그 상태로 등짝을 얻어맞으면서 각자의 집으로 끌려 들어갔고 술도 완전히 깨지 않은 상태에서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그게 언제 적 얘긴데…. 안 그래요. 이제.”
6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채하도 마찬가지였는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너희들이 자식을 낳아도 그 얘기는 꼭 해 줄 거야.”
우리 아빠의 말에 채하의 아버지도 맞장구치면서 껄껄거렸다. 나는 조용히 배에 손을 올리고는 피치가 절대 저 이야기를 듣지 못하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채하도 속으로 나와 같은 다짐을 하는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하면서 속으로 눈물을 조금 흘렸다. 내가 제일 많이 먹어서 다행이었다. 하나도 먹지도 못했다면 정말 엉엉 울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우리는 바로 집에 가지 말고 산책 좀 하다가 갈까?”
부모님들과 따로 차를 타고 집으로 가던 중 채하가 나에게 물었다.
“몰라. 나한테 말 걸지 마.”
밥을 먹으면서 기분은 다 풀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삐친 척을 했다. 까칠한 척하는 대답에 채하는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지원아아아.”
채하가 내 이름을 불러 대며 애교를 부려 왔으나 나는 고개를 돌리고 창밖 풍경만 바라봤다. 그는 우리 집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도착한 곳은 드라이브 쓰루가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채하는 창문을 내리고 커피 한 잔과 내가 그 카페에 갈 때마다 먹는 음료를 시켰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벤티 사이즈로 시켜.” 하고 말했다.
저걸 입에 물려 놓으면 내 기분이 좋아질 줄 알았나 보다. 채하는 생각보다 더 나를 잘 알았다. 이틀 동안 눈칫밥만 먹다가 엄마의 눈치를 보지 않고 군것질을 할 생각에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갈 것 같아 얼굴 근육에 힘을 줘야 했다.
“지원아, 우리 이거 마시면서 바람 좀 쐬다가 들어갈까?”
“맘대로 해.”
나는 새침하게 대답하고 채하가 꽂아 준 빨대로 음료를 쪽 빨아 먹었다. 상큼한 과일 맛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집 근처에 있는 공원이었다. 나와 채하는 차에서 내려 한 손에 음료를 들고 공원을 걷기 시작했다. 주변이 어둑어둑해지는 시간이었지만 공원에는 우리처럼 산책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지원아, 이제 기분 좀 풀렸어?”
“아니, 아직.”
채하는 내 손을 잡고 공원을 걸었다. 나는 굳이 채하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10분 정도 말없이 걷던 우리는 벤치에 앉았다.
“내가 어떻게 해야 우리 지원이 마음이 풀릴까? 응?”
“몰라! 엄마는 자꾸 먹는 거 가지고 눈치나 주고, 너는 내 머리에 이상한 핀이나 꽂아 대고!”
“우리 지원이는 피치 때문에 일부러 먹은 건데. 그치?”
그건 아니었지만 일단 수긍하는 척했다. 채하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복숭아 핀을 꺼내 자기 머리에 꽂았다.
“자, 내가 집에 갈 때까지 이거 하고 있을게.”
머리에 핀을 꽂고 손을 턱 밑에 대 꽃받침을 하는 채하를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내가 웃는 것을 본 그는 이제 집에 가자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채하의 손을 잡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제 기분 풀렸어?”
“아직 완전히 풀린 건 아니야.”
진작에 풀렸지만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는 그의 모습을 더 보고 싶어서 거짓말을 했다. 나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삐친 척을 조금 더 하기로 했다. 우리는 다 먹은 음료 컵을 버리고 차에 탔다. 채하가 나에게 입술을 쭉 내밀었다.
“우리 오늘 뽀뽀 한 번도 안 한 거 알아?”
“응. 알아.”
“알면 한 번만 해 줘.”
아직 삐친 척을 해야 했기 때문에 채하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밀어 버렸다. 거절당한 채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시동을 걸었다. 입술을 삐쭉 내밀고 앞만 보면서 운전을 하는 그의 옆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나는 핸드폰 카메라를 켜서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뭐야. 나 찍은 거야?”
“아니거든? 운전이나 해.”
내 말에 채하는 “맞는 것 같은데.”라고 하면서도 더 캐묻지 않았다. 약 10분 정도 달려 집에 도착했다. 그는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는 짧은 시간 동안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이러다 부모님들 보시면 어쩌려고 이래.”
“벌써 집에 가서 씻고 드라마 보고 계실걸.”
채하의 말이 맞았다. 식당에서 나온 지 한 시간은 지났으니 벌써 집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나는 그 말에 채하의 손을 계속 잡고 있기로 했다.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는 피치에게 내일 다시 만나자고 인사를 했다.
“잘 자고, 내일 봐.”
“응. 채하 너도 잘 자.”
“집에 가기 싫어.”
그는 나와 떨어지기 싫은지 내 허리를 끌어안은 채로 징징거렸다. 나는 그런 채하를 달래려고 얼굴을 잡고 쪽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반대편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우리 부모님과 채하의 부모님이 타고 있었다. 어머니들은 입을 벌리고 놀란 표정을 지었고 아버지들은 술에 취해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한 것인지 눈만 껌뻑였다. 우리 사이에 정적만 흐르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부모님들을 태운 채로 문을 닫아 버렸다.
우리 집 거실에 부모님들과 나와 채하, 여섯 명이 모두 모였다. 닫힌 문을 보고 채하의 손을 잡아채 도망가려는 순간 다시 문이 열렸기에 조용히 부모님의 뒤를 따라 집으로 들어와야 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으려고 했지만 이미 바닥에 무릎을 꿇어앉은 채하를 보고는 따라 했다.
아들이 친구와 끌어안고 입술을 비비는 것을 본 부모님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고 나는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다들 서로의 눈치를 보느라 오랫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순간 채하의 폭탄 같은 발언으로 거실에 맴돌던 적막이 깨졌다.
“저희 결혼하겠습니다.”
그 말에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의 시선이 모두 채하에게 쏠렸다. 부모님들의 얼굴에는 경악이 서렸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 ‘미친놈아, 순서가 바뀌었잖아!’ 하고 소리칠 뻔했다.
“결혼이라니?”
채하 어머니께서 되물었다.
“임신했어요.”
부모님들은 놀라지 않으셨다. 채하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를 못했기 때문인 듯했다. 사건을 발생 순서에 따라 설명하지 않고 결과부터 거꾸로 말하고 있으니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누가?”
“제가요.”
나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지원이 넌 베타잖아.”
우리 부모님은 아직 나를 베타로 알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못 하는 것이 당연했다.
“아니, 그게. 내가 오메가가 돼서…. 어쩌다 보니까….”
내가 지금 설명 가능한 사실은 이게 다였다. 어쩌다 피치가 생긴 것인지도 모르니 더는 늘어놓을 것도 없었다. 부모님이 아들이 오메가가 되었다는 것에 놀란 것인지 임신을 했다는 것에 놀란 것인지 완벽하게 구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큰 충격을 받은 것은 확실해 보였다.
“아빠가 아까 착하고 예쁜 며느리 보는 게 소원이라며. 이제 손주도 생겨.”
“착, 착하고 예쁜 며느리…. 손주….”
아빠는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근데 채하가 착하긴 한데 예쁜 며느리는 아니네.”
축 처진 분위기를 살려 보려고 농담을 던졌지만 거실에는 여전히 정적만 흘렀다. 채하는 핸드폰을 꺼내 지난번 병원 검진 때 찍은 초음파 영상을 부모님들께 보여 드렸다. 부모님들은 핸드폰 화면 속 영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짧은 영상이 끝나고 우리 엄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 너 그러면 살찐 게….”
“맞아.”
“그때 복숭아 꿈도….”
엄마는 그때 꾼 꿈이 태몽이 맞았다고 중얼거렸다. 여전히 아빠는 말 한마디 없었다. 얼마 후 아빠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예쁘게 봐 달라는 게….” 하고 중얼거렸다. 아직 정신이 없는 우리 부모님과는 다르게 채하의 부모님은 그렇게 많이 놀란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너희 지금 안 들켰으면 언제 말할 생각이었어?”
“다음 달 정도요….”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 나는 한껏 움츠러들어 채하의 뒤에 숨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그는 나를 보호하려는 듯 감쌌다. 그 모습을 본 아빠는 결국 뒷목을 잡았다.
평소에 빨리 결혼하라는 말을 자주 했지만 베타 여자와 결혼하라는 뜻이었지 남자 알파와 결혼하라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손주를 보고 싶다고 한 것도 내가 오메가가 되어서 임신할 줄 모르고 했던 말이었을 테고.
“아빠…. 괜찮아….?”
나는 조심스럽게 아빠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내 물음에 얼마간 답이 없던 아빠는 무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래. 결혼해!”
“해 버려! 해 버리라고!” 하고 중얼거리는 아빠는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았다. 엄마는 무언가 생각난 듯 놀란 얼굴이었다.
“그럼 너 아침에 구충제…. 어떡해.”
“나 그거 안 먹었어. 채하가 먹었어.”
내 말에 엄마는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채하의 부모님도 결혼 자체는 반대할 생각이 없으신 것 같았다.
“그럼 애들 결혼은 어떻게….”
“배 불러 오기 전에 최대한 빨리하는 걸로 하죠.”
넋이 나간 아빠를 빼고 부모님들끼리 결혼식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결혼식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요….”
그러자 결혼식은 너희 행사가 아니라 부모님 행사라는 말이 돌아왔다. 엄마는 지금까지 뿌리고 다닌 축의금이 얼마인데 그걸 안 하냐고 한마디 덧붙였다.
“그럼 아기 낳고 하면 안 될까?”
“애 낳고 결혼식 하기가 쉬운 줄 알아?”
나는 뭐라도 해 보라고 채하의 옆구리를 찔러 댔지만 채하도 마땅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우리는 조용히 앉아서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어야 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나는 다리가 저려 결국 자세를 바꿔 앉았다. 채하는 부모님들의 눈치를 보면서 “많이 아파?” 하고 속삭이고는 내 다리를 주물렀다.
“너희 신경 최대한 안 쓰이게 엄마가 알아서 할게.”
이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의 결혼 이야기는 마무리 지어졌다. 집 앞에서 입술을 맞대고 있다가 들켜 집으로 끌려 들어온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키스도 아니고 겨우 뽀뽀만 했는데 걸려서 억울하기도 했다.
“그럼 지금 몇 주나 된 거야?”
“13주 됐어요.”
채하의 말에 13주나 됐는데 다음 달에 말할 생각이었으면 아예 낳고 말하지 그랬냐는 타박이 돌아왔다.
“예정일은 언제야?”
“내년 1월 초.”
엄마의 물음에 내가 대답했다.
“그래도 채민이 때보다는 덜 놀랐네.”
“하긴,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채하의 부모님은 그래도 배가 불러 오기 전에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하셨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빠는 여전히 넋이 나간 얼굴로 초음파 영상만 되돌려 보고 있었다.
“딸이래, 아들이래?”
아빠와 함께 초음파 영상을 다시 한번 본 엄마가 물었다.
“아직 몰라.”
채하가 다음 검진 때 성별을 알게 되면 바로 알려 드리겠다고 했더니 엄마는 아들이 분명하다고 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
“큰 복숭아 하나는 아들 꿈이야.”
나는 꿈으로 성별을 맞춘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뜬금없이 전화로 여자 친구가 있는지 물어봤던 엄마가 떠올라서 아예 안 믿기도 어려웠다.
“입덧은 안 해?”
채하의 어머니가 물으셨다.
“저는 안 하는데…. 채하가 해요.”
내 말을 들은 채하의 어머니가 큰소리로 웃으셨다.
“그럼 아까 식당에서 헛구역질한 거 입덧해서 그런 거야?”
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얼굴이 반쪽이 됐더라니.”
나는 갑자기 서러워져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엄마는 자꾸 나한테 배 속에 기생충 들었냐는 소리나 하고, 밥도 조금만 주고, 먹는데 자꾸 눈치 주고!”
몰려오는 서러움에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중요한 걸 비밀로 해. 진작 말했으면 그런 일도 없었잖아!”
엄마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채하는 앞에 놓인 티슈를 한 장 뽑아 내 눈가를 닦아 주었다. 평소엔 채하에게 해 주던 것이었는데 내가 받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앞으로의 계획이 대충 마무리되자 채하의 부모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엄마가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려던 채하를 잡았다.
“채하야, 여기서 자고 가.”
“네?”
“따로 자면 지원이 쟤 또 어제처럼 밤에 몰래 나갈 거 아니야.”
엄마는 내가 어젯밤에 몰래 나간 것을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채하의 부모님도 여기서 자라는 말을 끝으로 우리 집을 나섰다. 채하는 집에서 씻고 오겠다며 부모님을 따라 나갔다.
아빠는 생각보다 많이 놀랐는지 우리만 남자 말없이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씻고 방으로 들어오자 엄마가 채하가 쓸 이불과 베개를 가지고 왔다. 엄마는 손에 들고 있던 걸 내려놓고 바로 나가는 대신 내 옆에 앉았다.
“너랑 채하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중요한 걸 비밀로 하려고 한 거야?”
“그냥…. 그냥 어쩌다 보니까….”
“어휴, 엄마한테는 진작 얘기를 했어야지.”
“진짜 조금만 더 있다가 하려고 했어.”
“언제? 배 불러서? 아니면 애 낳고?”
나는 사고 때문에 유산 위험이 있었다는 것은 숨기기로 했다. 지금은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니 일부러 걱정거리를 만들어 드릴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직도 철이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애가 애를 가졌다는 말도 덧붙였다. 엄마의 머릿속은 내 걱정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아빠랑 둘이 빨리 손주 보고 싶다고 할 때는 언제고 왜 이렇게 걱정이야.”
“그러게나 말이다. 왜 이렇게 걱정이 되는지. 이제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엄마한테 바로바로 얘기해.”
“응. 알겠어.”
엄마의 걱정은 쉬이 끝나지 않고 채하가 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채하가 오자 엄마는 잘 자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그는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채하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채하가 우리 집에서 자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오늘은 친구로서 자는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랑 무슨 얘기 했어?”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얘기는 무슨, 내 걱정만 잔뜩 하고 갔어. 너는 집에서 별 얘기 없었어?”
“응. 그냥 진작 얘기 안 했다면서 뭐라고 하신 것만 빼면 별말 없었어. 채민이 형 때에 비하면 놀라지도 않았고.”
“다행이네.”
“피곤하겠다. 얼른 자.”
나는 채하와 함께 바닥에 깔아 놓은 이불 위에 누웠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들이 생겨서인지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들킬 줄 알았으면 그냥 미리 말할걸.”
“내가 계속 말하자고 했잖아.”
채하가 내 귓가에 속삭이면서 배 위에 손을 올렸다. 나는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렸다.
“우리 피치, 이제 할머니한테 기생충 소리 안 듣겠네.”
“그러게. 나도 내일 아침부터는 눈칫밥 안 먹겠네.”
채하는 짧게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춘 후 장난스럽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의 장난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웃음이 채 흩어지기도 전에 채하의 입술이 한 번 더 내 입술을 덮었다.
“여기 우리 집이야.”
입술 사이로 말캉한 혀가 들어오고 우리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묘하게 변하기 직전, 나는 채하를 밀어냈다. 그는 아쉬워했지만 집에서 더 할 생각은 없는지 가만히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눈을 감기 전 생각했다. 기승전결이 엉망진창으로 섞여 버린 소설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고.
***
다음 날 아침 우리보다 먼저 일어난 부모님은 식탁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채하는 여전히 부모님의 눈치를 보았다.
“아들, 많이 먹어. 채하도 많이 먹고.”
엄마는 어제까지 밥을 먹을 때마다 구박하던 것이 없던 일인 양 내 앞으로 맛있어 보이는 반찬들을 전부 밀어 주었다. 아빠는 말없이 앉아 멍한 얼굴로 채하를 바라보았다.
“잘 먹겠습니다.”
우리는 잘 먹겠다는 인사를 하고 숟가락을 들었다. 밀어 주는 걸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엄마는 직접 반찬을 내 밥 위에 올려 주기 시작했다.
아빠는 밥 한 숟가락을 뜰 때마다 반찬 대신 채하의 얼굴을 한 번씩 노려보았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홍삼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엄마는 웃어 댔다.
“너희 아빠 저러는 거 웃기지 않니?”
“아빠 왜 저래?”
“왜긴 왜야. 삐쳐서 그렇지.”
엄마의 말에 따르면 아빠는 어젯밤 내내 “감히 내 아들한테….”를 중얼거리며 제대로 잠도 못 잤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채하는 죄인이 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식사를 마치고 계속 눈치를 보는 채하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홍삼을 챙겨 안방 문을 열었다. 아빠는 등을 돌리고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아빠, 자?”
“아빠 안 잔다.”
대답을 하면서도 여전히 내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나는 침대 반대편으로 돌아가 아빠의 눈높이에 맞게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자 아빠는 다시 반대편으로 등을 돌려 버렸다.
“아빠, 홍삼 하나 먹어 봐.”
“안 먹는다.”
“왜? 이런 거 좋아하잖아.”
“아빠는 뇌물 같은 거 안 먹어.”
아주 단단히 삐쳐 버린 상태였다.
“어제 그랬잖아. 착하고 예쁜 며느리랑 손주 보는 게 아빠 소원이라고. 그 소원 내가 들어주려고 하는데 왜 그래?”
“그런 뜻이 아니잖아!”
“그럼 어제 채하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안 된다고 하지 그랬어? 어제는 하라며!”
아빠는 나에게 꼴도 보기 싫다며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를 들은 엄마가 방으로 들어와 아빠의 등짝을 세게 내리쳤다.
“애 놀라게 왜 소리를 질러!”
어제의 내 적이었던 우리 집 서열 1위 엄마가 오늘은 나의 아군이 되어 있었다.
“이미 애까지 만들어 왔는데 반대해서 어쩔 거야? 어?”
아들 미혼부 만들고 싶으면 계속 반대하라는 엄마의 말에 아빠는 풀이 죽어 꼬리를 내렸다. 엄마는 아빠에게 “집에서 큰소리 내면 쫓겨날 줄 알아.” 하고는 방을 나갔다. 나도 눈치를 보다가 엄마의 뒤를 따라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왔다. 아빠는 아직도 이불 속을 파고든 상태였다.
엄마가 냉장고 문을 열고 반찬통 여러 개를 꺼내 식탁에 올려놓았다. 나는 식탁 의자를 하나 빼서 앉았다.
“입덧은 안 한다고 했지?”
“응. 안 해. 그러니까 살이 쪘지.”
내 대답에는 아직 앙금이 남아 있었다. 엄마는 “지 애비 닮아서 뒤끝 있는 거 봐.”라고 중얼거리면서 일회용 비닐 팩을 뜯어 반찬을 옮겨 담기 시작했다. 엄마가 반찬을 담아 놓은 비닐 팩을 전부 묶은 후 나는 채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채하야 머 해?
오전 10:32
채하 : 과일 먹는 중
오전 10:33
채하 : 보고 싶어ㅜㅜ
오전 10:33
채하는 집으로 돌아간 지 30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보고 싶다고 난리였다.
나 지금 갈게 문 열어 줘
오전 10:34
엄마에게 채하네 집에 간다는 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집 현관문을 열자 자신의 집 문을 열고 기다리는 채하가 보였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그의 부모님께서 거실에 앉아 과일을 드시고 계셨다.
“지원이 왔니?”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와서 과일 먹어.”
어머니의 말씀에 나는 소파에 앉았다. 옆으로 온 채하가 포크로 복숭아를 찍어 내 입 앞으로 가져왔다. “내가 먹을게.” 하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채하의 부모님은 재밌다는 듯 우리를 보고 박수까지 치면서 웃으셨다.
과일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채하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책상을 버린 나와는 다르게 그의 방에는 아직도 책상이 남아 있었다. 책상 의자를 빼서 채하가 앉은 침대를 바라보고 앉았다. 채하의 손이 뻗어 오더니 내 다리를 잡았다. 다리를 잡은 손에 힘이 실리자 바퀴 달린 의자가 나를 그의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지원아.”
“왜 불러.”
“그냥.”
이유 없이 불렀다는 말에 나는 몸을 일으켜 이유 없이 채하를 안았다. 내 허리를 안은 채하는 그대로 뒤로 누워 버렸다. 나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그의 몸 위에 엎드린 모양새가 되었다.
우리가 끌어안고 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코코가 달려와 문 표면을 긁었다. 그 소리에 채하의 어머니가 코코를 방에 들여보내 주려고 하셨는지 방문을 열었다.
“어머.”
“…….”
“코코는 형아들 노는데 방해하지 말고 엄마랑 놀자.”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든 순간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어머니는 “하던 거 계속해.”라는 말씀을 끝으로 코코를 안고 사라지셨다. 나는 채하를 밀쳐 내고 침대에 엎드려 팔다리를 마구 흔들었다.
“쪽팔려, 쪽팔려, 쪽팔려!”
“이제 우리 사이도 다 아는데 뭐 어때.”
나와 다르게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채하의 팔뚝을 꼬집었다. 몸을 굴려 다시 천장을 보고 누워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는 내 옆에 누워 머리 아래로 팔을 밀어 넣었다. 나는 채하에게 매달려 눈앞에 보이는 가슴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 전 온 가족이 모여 마지막 식사를 했다. 아빠가 안 먹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엄마가 협박에 가까운 설득을 해서 겨우겨우 이루어진 자리였다. 채하 어머니께서 채하의 방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바람에 나는 식사 시간 내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조심해서 가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바로 연락해.”
“알겠어.”
“일한다고 밤새우지 말고.”
“응. 얼른 들어가.”
“채하야, 우리 지원이 잘 부탁해.”
“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배웅을 나온 엄마는 내 걱정으로 가득했다. 아빠는 밥 잘 챙겨 먹으라는 말만 하고는 먼저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우리는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출발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서울행 KTX 표를 취소했다.
“아 맞다. 희주가 빵 사 오라고 했는데.”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희주에 말에 알겠다고 했지만 지금은 계획이 바뀌어 버렸다.
“뭐가 예쁘다고 사 가. 그냥 가.”
나는 “그건 그래.”라고 하면서 그의 말에 동의했다. 희주에게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사다 주기로 속으로만 다짐하면서.
집에 도착해서 반찬을 통째로 냉장고에 넣은 후 침대에 누웠다. 채하는 피곤했는지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버렸다. 나도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벌써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우리는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하고 채하가 집에서 챙겨 온 앨범을 펼쳤다.
“우와, 완전 아기네.”
앨범의 제일 첫 장에는 채하가 태어나자마자 찍은 사진이 있었다. 그다음 장은 눈도 못 뜨는 신생아 채하와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 채민 형의 사진이었다. 서너 살 정도로 보이는 사진 속 채민 형은 인형처럼 귀여웠다.
“우리 피치도 채민이 형처럼 인형같이 귀여웠으면 좋겠다.”
“난 별로.”
“왜?”
“우리 형처럼 얼굴만 믿고 연예인 한다고 가출할까 봐.”
나는 채하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10년이 다 되어 가는 일이었지만 아직도 채민이 형이 가출했던 날은 잊을 수가 없었다.
앨범의 페이지가 점점 넘어갈수록 사진 속 채하가 나이를 먹어 갔다. 아장아장 걷는 채하는 깜찍했고, 앞니가 빠진 채로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웃고 있는 채하는 귀여웠다. 사진 속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아는 채하의 모습이 나오기 시작했다.
앨범의 마지막 장에는 고등학교 졸업식 날 꽃다발을 든 우리가 함께 찍은 사진이 꽂혀 있었다. 그 사진을 본 나는 갑자기 궁금증이 들었다.
“근데 채하 너, 나 언제부터 좋아했어?”
채하는 대답 대신 내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아, 언제부터냐고.”
이번에도 내 입을 막으려는 듯 입을 맞췄다. 방금의 입맞춤과는 다르게 내 아랫입술을 살짝 빨아들였다. 벌어진 입술 틈 사이로 채하의 따뜻한 혀가 밀려들어 왔다. 나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입 안에 들어온 혀를 빨았다. 노골적인 쪽쪽 소리가 끝나고 나는 채하에게 다시 물었다.
“설마 첫눈에 반했다. 뭐 이런 거야?”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그는 내가 팔을 단단히 감았는지 확인한 후 허벅지를 받쳐 나를 안아 들었다.
“맞네. 맞아.”
“조용히 해.”
채하는 나를 안고 방으로 가는 동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기나긴 여름의 해는 아직 완전히 지지 않아서 방 안을 어스름하게 비추고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흘러들어 오는 거실 불빛이 합쳐지자 서로의 얼굴을 보기엔 충분했다.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춘 채하가 내가 입고 있던 티셔츠를 위로 올리고 배에 입을 맞췄다. 배 위로 느껴지는 숨결에 아래로 피가 몰리는 것 같았다. 그는 이런 내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배에 입을 맞춰 댔다.
“으응, 이거 이상해.”
“하지 말까?”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대답을 확인한 채하는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평소에도 넓다고 생각했지만 아래에 깔려 올려다보는 그의 어깨는 더 넓어 보였다.
“근데… 피치….”
채하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피치의 이름을 말하는 나를 보며 잠시 생각을 하더니 옆에 있던 이불을 들어 내 배를 덮었다.
“이러면 피치도 아빠들이 뭐 하는지 못 볼 거야.”
내 말은 그 뜻이 아니었는데, 우리는 서로 다르게 이해를 하고 있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고.”
덧붙인 말에 채하는 그제야 내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럼 안 넣고 할게.”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병원을 방문할 때는 의사 선생님께 관계를 해도 되는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으흣.”
직전의 장난기를 걷은 입맞춤이 닿아 왔다. 잡아먹을 듯이 덮쳐 오는 키스에 나도 모르게 비음이 잔뜩 섞인 소리를 내뱉었다.
허벅지를 만지던 커다란 손이 헐렁한 반바지 밑단으로 슬금슬금 들어왔다. 다른 사람이 만질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허벅지 안쪽에 타인의 손길이 닿자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왜 이렇게 긴장했어?”
채하는 낮은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손길이 어느덧 무릎 뒤쪽 여린 살을 쓰다듬고 있었다.
“나, 흐읏, 긴장 안 했어.”
이런 상황이 처음은 아니겠지만 어떻게 보면 처음 겪는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하려고 했으나 내쉬는 숨에는 이상한 소리가 섞여 있었다. 채하는 내 말이 거짓말인 걸 눈치챈 듯했다.
“피치도 만들었는데 왜 그래.”
“그건 기억이 안…!”
내 바지가 어느새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옷을 침대 밑으로 던져 버리고 이젠 속옷에 손을 댔다. 속옷을 완전히 벗기지 않고 살짝 내려 성기만 밖으로 나오게 만든 채하는 엄지로 귀두를 살살 만지면서 나머지 손가락으로 기둥을 움켜쥐었다.
“좋아? 제대로 만져 주기도 전에 서 버렸네.”
키스만으로 발기한 것을 들킨 순간 무척 부끄러워졌다. 한편으로는 눈빛만 보면 나보다 더 흥분한 듯한 채하의 상태가 궁금해졌다. 나는 손을 뻗어 아직 바지를 걸친 다리 사이를 콱 움켜쥐었다.
“으억?”
남자 평균보다 약간 큰 편인 내 손으로 완전히 움켜쥘 수 없는 부피감에 놀라는 소리가 나왔다. 내 반응을 본 채하가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벗어 내렸다.
“그렇게 보고 싶었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초면이었지만 초면이 아닌 그것과 마주하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려 내 것과 눈대중으로 비교해 보았다. 그동안 평균 이상이라는 생각으로 가졌던 약간의 자부심이 실로 무색해졌다.
침대 옆 수면 등에 비친 채하의 검붉은 성기는 흉흉하게 핏줄이 서 있었다. 저런 것이 내 안에 들어간 적이 있었음을 떠올리니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인사 다 했어?”
“오랜만이라 그런가 인사가 기네.” 하면서 중얼거리던 채하가 내 속옷을 완전히 벗겨 냈다. 성기 끝부터 천천히 훑어 내려간 그의 손은 회음부를 살짝 문지르고 더 밑으로 내려갔다. 은밀한 곳에서 다른 사람의 손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지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미 내 뒤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흐으… 거기 하지 마아…. 흣.”
내 말에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놀리려는 듯 손끝으로 주름 하나하나를 훑듯이 집요하게 움직여 댔다. 수치심과 쾌감이 함께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발끝이 곱을 정도로 힘이 들어가고서야 채하의 손목을 잡았다.
손끝이 무언가로 젖어 있는 것이 보였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자 내가 오메가가 되었다는 것이 다시 한번 실감 났다.
“여기 만지지 마?”
채하는 나에게 잡혀 있는 오른손 대신 왼손 손가락으로 내 뒤를 건드리며 말했다. 나는 그의 왼손까지 잡은 채로 “하지 마!” 하고 소리쳤다. 내 반응이 재밌는지 채하는 알겠다고 웃으며 나에게 잡힌 양손을 빼냈다.
그는 나를 안아 올린 후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게 했다.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아 허벅지를 잡혀 양다리를 벌린 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채하의 성기와 얼굴을 마주하게 되어 다시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천장만 바라보았다.
“왜 나랑 눈을 안 마주쳐?”
채하가 심술이 난 것인지 내 얼굴을 당겨 입을 맞췄다. 나는 채하의 목에 팔을 감고 먼저 그의 입 안으로 혀를 집어넣어 주도권을 잡으려고 했다. 내 행동에 놀란 듯 잠시 움찔하더니 내 혀를 자신의 혀로 문질렀다. 어느새 그의 혀가 내 입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눈 깜짝할 새에 주도권을 뺏겨 버린 나는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움직이는 채하 때문에 호흡하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하아, 숨… 막혀. 그만….”
결국 항복하듯 채하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완전히 안겨 버렸다. 채하는 그만할 생각이 없는 양 내 성기를 잡았다. 좋아하는 사람과 반쯤 헐벗은 채로 키스했으니 성기가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처럼 뻣뻣하게 선 것은 당연했다.
그가 손끝으로 귀두의 갈라진 틈 사이를 문질러 쿠퍼액을 귀두 전체에 펴 발랐다. 쿠퍼액이 윤활제 역할을 하자 예민한 부위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극대화되는 듯했다. 나는 오래 참지 못하고 채하의 손안에 사정해 버렸다. 채하는 그것을 닦는 대신 내 허벅지 안쪽에 묻혔다.
“뭐, 뭐 하는 거야?”
“좋은 거.”
좋은 것이라는 그의 말과는 다르게 불안감이 몰려왔다. 나를 다시 침대에 눕힌 채하는 내가 입고 있는 티셔츠를 위로 끌어 올려 끝단을 내 입에 물렸다.
“으… 으?”
나는 영문을 모른 채로 옷자락을 입에 물고 채하를 쳐다보았다. 무릎을 꿇은 그가 내 양다리를 들어 한쪽 어깨에 걸쳤다. 그러곤 딱 붙은 내 허벅지 사이로 피가 몰려 단단해진 자신의 성기를 밀어 넣었다.
회음부와 고환을 지긋하게 누르고 지나가는 성기에 나도 모르게 “흐읏.” 하고 숨을 들이켰다. 채하는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움직이면서 자극이 이어졌고, 내 성기는 또다시 발기해 버렸다.
“흐으… 아…. 흐응.”
입 밖으로 나오는 신음을 막고 싶었지만 채하가 자극을 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나왔다. 그는 “좋아?”라고 물으면서 더 빠르게 움직였다. 회음부와 성기를 동시에 자극하자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처럼 아랫배가 뻐근해졌다.
“아… 그만…. 흐… 나.”
채하는 내 말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손을 뻗어 내 성기를 움켜쥐고 엄지손가락으로 귀두 끝을 틀어막았다.
“아까 혼자 갔으면 이번엔 같이 가야지.”
쾌감이 계속되는데도 사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 나는 정액 대신 눈물을 뽑아냈다. 채하는 내가 울어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흐윽… 아…. 채하야아…. 하읏.”
“지원아, 윽, 울지 마.”
입으로는 울지 말라고 하지만 채하의 몸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몸을 비틀어 빼내려고 했지만 그에게 다리를 잡혔기에 불가능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 잡힌 채로 눈물을 흘리면서 신음하는 것뿐이었다.
어느 순간 채하는 성기 끝을 잡고 있던 손을 떼 버렸다. 입구를 막은 손이 사라지기 무섭게 곧바로 정액이 흘렀다. 채하도 낮은 신음을 흘리며 내 배 위로 사정했다.
그는 사정 후에도 몸을 떨고 있는 나를 껴안았다. 그러나 나는 채하에게 안기는 대신 등을 돌렸다.
“나 만지지 마.”
“아, 왜 그래애애애.”
“너는 내가 우는데도 계속하고 싶어?”
채하는 나를 뒤에서 껴안은 채 미안하다고 연신 얼굴과 목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며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채하를 뿌리치고 싶었지만 겨우 사정 두 번에 온몸의 힘이 빠져 버렸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어디 가냐는 그의 질문에도 대답 없이 한 번 노려볼 뿐이었다.
한참 동안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나오는 샤워기 아래에 서 있다가 샴푸를 짜서 머리에 거품을 내는데 욕실 문이 열렸다.
“나가.”
나는 거품 때문에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채하는 나가는 대신 넘어져서 다치면 어쩌냐며 버텼다. 일단 채하가 보든 말든 신경을 끄기로 했다. 머리에 묻은 거품을 다 헹궈 내고 샤워 볼 위로 보디 워시를 짰다. 어느새 뒤로 다가온 그가 내 손에 들린 샤워 볼을 뺏어 거품을 내더니 몸에 문질러 댔다.
“흐읏…. 야,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채하는 한 손으로는 샤워 볼을 문지르고, 남은 한 손으로는 거품이 지나간 자리를 훑고 있었다.
“내가 뭘?”
흥분 어린 내 음성과 다르게 채하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면서도 손가락으로 가슴을 만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손끝으로 바짝 서 버린 유두를 튕기며 “좋아?” 하고 내 귓가에 속삭였다. 등 뒤로 나를 껴안은 그의 성기가 단단하게 서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라면 채하에게 잡혀 한 번 더 할 것 같다는 생각에 빠져나가려 했지만 안긴 상태라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결국 채하에게 허벅지 사이를 한 번 더 내주게 되었다.
“흐윽, 아, 그마안.”
“지원아, 화장실이 방음 제일 안 되는 거 알지?”
다른 집에 들릴 수도 있다는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양손으로 세면대를 잡고 잔뜩 흥분해 빨개진 얼굴로 눈물을 흘리는 내 모습이 거울에 비치자 눈도 감아 버렸다. 채하는 그 모습에 아까보다 더 흥분한 모양이었다.
“흐으… 채하야아…. 하윽…. 나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
“내가 잘 잡고 있어.”
내 허리를 안고 목과 어깨에 빨간 자국을 남기는 데 열중하는 눈빛은 평소에 헤실거리면서 웃고 다니는 채하와는 달랐다. 결국 눈이 돌아간 그에게 잡힌 나는 헐떡거리며 사정하는 내 모습을 거울을 통해 두 번이나 보고서야 다시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욕실에 들어갈 때는 내 발로 걸어 들어갔지만 나올 때는 커다란 수건에 싸인 채로 채하에게 안겨서 나왔다. 채하는 이제야 정신이 드는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지원아, 괜찮아?”
조심스럽게 묻는 그에게 나는 “괜찮아 보이냐?” 하고 쏘아붙였다.
“물.”
내 한 마디에 침대 위에 꿇어앉았던 채하가 밖으로 달려 나갔다. 곧바로 물 한 컵을 들고 침대로 돌아온 그는 아직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내 몸을 일으켜 입에 컵을 대 주었다. 그 순간 어느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짝사랑의 시작 (채하 외전)
내가 지원이를 처음 만났을 때는 고등학교 입학식을 며칠 앞두고 이사를 한 날이었다. 나는 이삿짐센터 직원들에게 줄 음료수를 사 오라는 엄마의 말에 집을 나섰다.
처음 오는 낯선 동네였기 때문에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면서 길을 걸었다. 그때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남자애가 내 반대편에서 걸어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애는 춥지도 않은지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손에는 멜론 맛 아이스크림을 쥔 채였다. 뽀얀 얼굴에 고양이처럼 올라간 새초롬한 눈매가 시선을 잡아끌던 아이였다.
그리고 나는 그날 저녁 그 애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우리 앞집에는 우연히도 아버지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창이 살고 계셨다. 아버지의 친구분께서 마련한 저녁 식사 자리에 그 아이가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애의 앞에 앉아 인사를 건넸다.
“안녕. 난 설채하야.”
“반가워.”
이름은 유지원이라고 했다. 나이는 나와 같은 17살이고 나와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할 예정이라고 했다. 살짝 올라간 눈꼬리 탓에 도도해 보이던 첫인상과는 다르게 웃을 때마다 들어가는 보조개가 귀여웠다.
“넌 몇 반이야?”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된다는 것을 들은 지원이가 물었다.
“난 3반.”
며칠 전 학교 홈페이지에서 반 배정표를 미리 확인한 결과 나는 3반이었다. 학급 명단 중 내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어, 나도 3반인데. 우리 같은 반이네.”
친하게 지내자는 지원이의 말에 혹시라도 친구가 생기지 않으면 어쩌나 하던 걱정을 조금은 덜어 낼 수 있었다. 빈말은 아니었는지 입학식 날 아침, 지원이가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다.
“채하야, 학교 가자.”
둘둘 감은 목도리에 얼굴을 반쯤 파묻은 지원이는 양손에 바나나우유를 하나씩 들고 우리 집 문 앞에 서 있었다. 내가 가방을 메고 나오자 지원이는 손에 든 우유 하나를 내밀면서 “춥다. 빨리 가자.”라고 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천천히 걸어서 15분 정도 걸렸다. 가는 동안 지원이는 추운지 한껏 움츠러들어 연신 투덜거렸다. 입학식이 시작될 때까지 교실에서 기다리라는 말에 나와 지원이는 교실로 들어갔다. 나는 자연스럽게 지원이의 옆자리에 앉았다.
교실에 있는 아이들은 지원이를 제외하면 모두 초면이었다. 나와 다르게 지원이는 아는 애들이 많은지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부터 여기저기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어, 처음 보는데. 어느 중학교 나왔어?”
지원이와 이야기하던 아이들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은 나에게로 옮겨 왔다. 친구가 생기지 않으면 어쩌냐는 걱정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지루한 입학식이 끝나고 다시 교실로 돌아왔을 때, 담임 선생님은 서로 얼굴과 이름을 익힐 때까지 당분간은 번호순으로 앉자고 하셨다.
“우와, 우리 또 짝꿍이네.”
우연의 일치인지 나는 17번이었고 지원이는 18번이었다. 우리는 또 함께 앉게 되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과 달리 우리 반이 자리를 바꾸는 일은 일 년 내내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 정도 고등학교 생활에 적응했던 5월, 우리는 빠르게 밥을 먹고 운동장으로 달려가 축구를 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날도 평소같이 식판에 받아 온 밥을 마시는 것처럼 먹어 버리고 운동장으로 가 열심히 공을 차고 놀았다. 그런데 그날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혼자서 상대편 무리를 뚫고 들어가 골을 넣는 데 성공한 지원이가 신이 나서 가장 가까이 있던 나에게 달려와 안겼다. 신이 나서 방방 뛰는 지원이와 다르게 나는 품에 안긴 지원이의 몸에서 풍겨 오는 향기에 굳어 버렸다. 나는 지원이가 내 품에서 빠져나갈 때가 되어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 수돗가에서 세수를 하는 지원이의 얼굴과 목덜미를 나도 모르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왜? 나한테 뭐 묻었어?”
지원이가 물어보지 않았다면 나는 내가 넋을 놓고 물에 젖은 지원이의 얼굴과 물이 흐르는 목덜미를 바라보던 것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날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처음으로 야간 자율 학습을 땡땡이쳤다. 집에 오자마자 왜 이렇게 빨리 왔냐고 묻는 엄마의 물음에 제대로 대답도 못 하고 가방만 던져두고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오후 수업 내내 떠오르는 지원이의 얼굴 때문에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침대에 엎드려 있던 나는 핸드폰을 들어 ‘갑자기 친구 얼굴이 떠올라요’, ‘갑자기 친구가 신경 쓰여요’ 따위의 문장을 검색창에 적어 넣었다. 인터넷에는 나와 비슷한 증상을 겪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고민 아래 달린 ‘님 걔 좋아하는 듯ㅋ’, ‘짝사랑이네ㅋ’, ‘얼른 고백해서 차여라ㅋ’ 따위의 댓글은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나는 잠을 설쳤다. 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같이 학교에 가자고 찾아온 지원이를 보고 생각했다. 고등학교에서 처음 사귄 친구라, 지원이를 친구로서 많이 좋아하는 것뿐이라고.
지원이는 어제 수업이 끝나자마자 말없이 가방을 챙겨 도망가 버린 나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물론 물어봤어도 ‘수업 시간에 자꾸 네가 생각나서 도망갔어’라고 솔직하게 대답할 생각은 없었다.
조례가 끝나고 선생님이 나와 지원이를 불러냈다.
“너희 왜 불러냈는지 알지?”
우리를 교무실 앞에 세워 두고 물으셨다. 일단 “네.”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이 나를 부른 이유는 알 만했다. 하지만 지원이도 불려 온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예상이 가지 않았다.
“어깨동무하고 앉았다 일어났다 200번 하고 들어가.”
선생님은 큰 소리로 숫자를 세라는 말을 하시고는 교무실로 들어가셨다. 나보다 키가 작은 지원이는 내 어깨 대신 허리에 손을 둘렀다. 지원이의 손 때문인지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 같았다.
“지원이 너는 왜 불려 온 거야?”
“나도 어제 야자 안 했어.”
“왜?”
지원이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너 없는데 내가 무슨 재미로 야자를 해.”라고 말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교실로 돌아온 나는 어떻게 200번을 채웠는지 모를 정도로 심장이 쿵쿵 뛰고 정신이 나가 있었다.
나는 교실로 돌아와서도 멍한 상태였다. 지원이는 그새 매점에 다녀온 것인지 딸기우유에 빨대를 꽂아 내밀었다.
“먹어.”
“어어. 고마워. 잘 먹을게.”
빨대를 입에 물고 한 모금 빨아들였다. 입 안 가득 달콤한 맛이 퍼졌다. 나는 원래 우유를 싫어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딸기우유나 초코우유 같은 것을 좋아하는 지원이와 함께 먹다 보니 어느새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우유를 싫어했다는 걸 지원이가 알게 되는때는 한참 후였다.
“어디 아파?”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계속 넋을 놓고 있는 내가 이상했는지 지원이가 아프냐고 물었다. 괜찮다는 내 말에 지원이는 “그래? 오늘 좀 이상하네.”라고 중얼거렸다. 나도 내가 이상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이상해진 지 며칠이 지난 후의 어느 새벽, 내 꿈속에는 처음으로 지원이가 나왔다. 넋을 놓고 바라보았던 그날의 지원이였다. 꿈속의 나는 하얀 목덜미를 드러낸 채 얼굴에서 물방울을 흘리며 활짝 웃는 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잠에서 깼을 때 나를 반겨 주는 것은 지원이의 웃는 얼굴이 아닌 축축하게 젖어 버린 속옷이었다.
가족들 몰래 화장실 문을 잠그고 속옷을 빨면서 깨달았다. 나는 지원이를 친구로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고. 결말을 알 수 없는 나의 짝사랑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
나는 좋아하는 이를 놀리거나 괴롭히는 것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유치한 사람이 아니었다. 마음을 깨달은 이후, 남들이 내 마음을 눈치챌 정도로 잘해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들은 다 알아챘어도 지원이는 여전히 내 속을 전혀 몰랐다.
날이 더워짐에 따라 지원이가 점심시간에 축구를 하는 대신 운동장 한구석 벤치에 앉아 있는 날이 늘어났다. 덩달아 나도 지원이 옆자리에 앉아 있고는 했다. 오늘도 지원이는 점심 식사 후 벤치에 앉아 축구를 하는 친구들을 구경했다.
“으으, 햇빛.”
오늘따라 햇빛이 평소보다 더 따갑게 내리쬐었다. 지원이는 눈이 부신지 눈가를 한껏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손을 들어 지원이의 얼굴 위로 그늘을 만들었다. 축구를 하던 친구들은 움직임을 멈추고 모두 우리를 쳐다봤다.
“야, 니들 연애하냐?”
당황한 나와는 다르게 지원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부럽냐?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 가자. 자기야.”
지원이는 내 팔짱을 끼고 교실로 들어갔다. 나보다 한 걸음 앞에서 걷는 지원이가 빨개진 내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것에 안도해야 했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지원이와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등교 시간과 하교 시간을 제일 좋아했다. 특히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나고 함께 밤거리를 걷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릴 핑계를 만드느라 매일 머리를 쥐어짜곤 했다.
그 시절, 지원이와 함께 있으면 쉽게 얼굴이 빨개지던 나는 어두운 밤에 낯빛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 지원이를 대하곤 했었다.
지원이를 향한 나의 기나긴 짝사랑이 해피엔딩을 맞게 된 지금에서야 웃으면서 되돌아볼 수 있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