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4)

04

채하에게 피치가 생겼던 날의 기억이 돌아왔다고 말할까 했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건 나만 아는 비밀로 간직하기로 했다.

우리가 신경 쓸 일 없게 다 알아서 하겠다는 어머니들의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나와 채하가 집에 다녀온 바로 다음 날 오후 무렵이었다.

“여보세요.”

- 어, 지원아. 엄마.

“응. 왜?”

- 너 7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별일 없지?

“아마 없을걸? 왜?”

엄마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알겠다며 빠르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엄마가 사진 한 장을 보냈다. 온통 검은색 일색이었지만 화려한 결혼식장이었다. 나는 그 사진을 보자마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엄마, 그 사진 뭐야?”

- 뭐긴, 결혼식장이지. 엄마가 방금 계약금까지 걸어 놨어.

나는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계약금? 언제로 예약했는데?”

-7월 마지막 주 토요일. 시간대가 좀 별론데 최대한 빨리하려면 그때밖에 없더라고.

“아니, 엄마 마음대로 그렇게 정해도 돼? 채하는 괜찮대?”

한 달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엄마는 큰 소리로 웃으면서 채하는 당장 이번 주 주말도 괜찮다고 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이렇게 빨리 일이 진행되어도 괜찮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화기 너머 채하 어머니께서 예복 선택과 웨딩 촬영은 채민이 형이 도와줄 것이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도 얼떨떨했다. 엄마와 통화를 마친 후 채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채하야, 엄마랑 통화했어?

오후 02:11

채하 : 응. 우리 결혼식장 예약하셨다던데?

오후 02:12

채하 : 지금 이선준 축가 연습한다고 계속 노래 불러ㅜㅜ

오후 02:12

;;;;;;; 김윤호는 진짜 춤춘대?

오후 02:13

채하 : 응;;;; 엄마한테는 최희주가 사회 본다고 말했어.

오후 02:14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결혼식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을 보자니 주인공인 나만 아직 상황 파악도 못 하고 겉도는 것 같았다.

***

퇴근한 채하와 저녁을 먹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채민 형이었다. 채민 형은 채하에게 내일 저녁때 만날 수 있는지 묻는 것 같았다.

“내일 형이 같이 저녁 먹자는데 시간 괜찮아?”

채하가 나에게 물었다.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채하는 내일 보자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채민이 형도 알아?”

“응. 어제 엄마가 우리 가고 나서 바로 전화했대.”

이제 우리가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런데도 아직 실감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 채하는 기분이 좋은지 퇴근했을 때부터 계속 웃고 있었다.

***

다음 날 저녁, 채민이 형의 가족들이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예약된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채하의 첫 조카인 서영이가 달려와 안겼다.

“삼촌!”

“서영이! 잘 있었어?”

서영이가 “응!” 하고 대답하고는 나에게 “지원 오빠도 안녕!” 하고 밝게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본 채민 형이 서영이에게 “이제 오빠가 아니라 삼촌이라고 불러야 돼.”라고 말했다.

우리는 채민 형과 형의 남편에게 인사를 하고 앉았다. 착석하기 무섭게 채민 형이 웃겨 죽겠다는 얼굴로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너네 집 앞에서 뽀뽀하다가 걸린 거라며? 아빠는 그거 보고 자기가 꿈꾸는 줄 알았대.”

큰 소리로 웃는 채민 형 부부와 달리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시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채민 형은 우리가 집에 다녀왔던 2박 3일 동안 벌어진 일을 모두 다 알고 있었다.

“이제 지원이 배우 할 생각 없냐고 못 꼬시겠네.”

채민 형의 남편인 주헌 형이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연예인 할 생각 없었어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주헌 형을 처음 만났을 때가 18살이었다. 서영이를 임신한 상태로 귀가한 채민 형을 설득하러 온 주헌 형을 그때 처음 봤었다. 주헌 형은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채민 형의 마음을 조금씩 돌리던 중 채하의 집에 놀러 간 나와 마주쳤다.

그러고는 명함을 내밀면서 “학생, 아이돌 할 생각 없어요?” 하고 묻고 “저 사기꾼 새끼!” 하고 소리 지르는 채민 형에게 바로 쫓겨났다. 그 이후로 나를 볼 때마다 몰래 아이돌 할 생각이 없냐고 묻더니 내가 20살이 넘어가자 배우는 어떻냐고 물어보고는 했다.

우리가 한창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채민 형이 핸드폰으로 사진 한 장을 보여 줬다. 넥 카라를 한 코코의 사진이었다.

“이거 뭐야? 코코 어디 아프대?”

“오늘 코코 중성화 수술 했대.”

“갑자기?”

“엄마가 아들 둘 다 결혼 전에 애부터 만들어 왔다고 충격받았나 봐. 코코는 그러지 말라고 예방 차원에서 했대.”

채하의 어머니는 괜찮다고 하셨지만 내심 충격을 받으신 모양이었다. 나와 채하는 코코의 사진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채하의 막내 조카 서현이가 주헌 형의 품에 안겨 “아빠, 코코 아파?” 하고 묻는 것을 보자 코코에게 더 미안해졌다. 못난 인간들 때문에 코코가 잃고 싶지 않은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아 가슴이 아릿했다.

식사가 마무리되고 후식을 먹고 있을 때 채민 형이 결혼식 이야기를 꺼냈다.

“너네 결혼식 할 때면 몇 주 되는 거지?”

“아마도 16주 정도?”

둘째를 임신한 상태로 결혼식을 올린 채민 형이 자신만 믿으라며 큰소리쳤다. 나는 화려했던 결혼식을 떠올리며 채민 형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채하는 조카들에게 이제 나를 삼촌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왜? 지원 오빠는 지원 오빠인데.”

서영이가 아직 완전하게 이해를 하지 못한 듯 물었다.

“이제 삼촌이랑 지원 오빠랑 결혼할 거니까 삼촌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 거야.”

동생이 한 명 더 생긴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아이들은 무슨 뜻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화색을 띠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식사를 마치고 헤어지기 전 채민 형이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형, 이게 뭐예요?”

“우리 조카 선물.”

쇼핑백 안에는 아기 신발과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고마워요. 형.”

우리는 채민 형의 가족들과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채하의 차에 타서 쇼핑백 안에 든 것을 꺼냈다. 앙증맞은 연분홍 토끼 귀가 달린 흰색 아기 신발이었다.

“채하야, 이거 봐 봐. 완전 작아.”

신발 한 켤레가 전부 내 손바닥 위에 올라갈 정도로 작은 크기였다.

“얼른 우리 피치한테 저거 신겨 주고 싶다.”

신발을 본 채하가 말했다. 아직 피치를 만나려면 한참 남았지만 채하는 마음이 급한 모양이었다. 나는 신발을 다시 넣어 두고 함께 들어 있던 책을 꺼냈다. 두꺼운 표지에 쓰인 제목은 <오메가 남성의 임신과 출산>이었다. 임신과 출산을 경험해 본 채민 형이 나를 위해서 일부러 준비한 듯했다.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욕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올 무렵, 채하는 평소처럼 드라이기를 준비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울 뒤로 바지만 입은 채 내 머리를 말려 주는 채하의 모습이 비쳤다.

채하의 배를 힐끔 보고는 내가 입은 잠옷 상의의 목 부분을 슬쩍 들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점점 볼록해지는 내 배와 달리 그의 배는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해 보였다.

“뭘 그렇게 봐? 같이 보자.”

채하가 어깨 위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는 내 잠옷 상의의 목 부분을 살짝 잡아당기고 그 안으로 들어갈 듯 고개를 숙였다.

“아, 하지 마.”

채하의 장난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계속 장난을 치고 싶은 듯 “뭘? 하지 마?” 하고는 잠옷 단추 두 개를 풀었다. 단추가 풀어지자 잠옷은 가슴을 거의 가리지 못하고 벌어져 버렸다. 나는 가슴팍을 부여잡고 그를 밀어냈다. 아직도 지난 주말에 채하에게 시달렸던 피로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채하를 뒤로한 채 채민 형이 선물로 준 책을 들고 침대에 기대앉았다. 두꺼운 표지를 넘기니 책의 목차가 나왔다. 나는 임신 중 페로몬 부분의 페이지를 펼치고 읽기 시작했다.

책에서는 임신 기간 동안 파트너 알파의 페로몬이 필요하다고 했다. 파트너의 페로몬은 몸과 마음의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파트너 알파의 페로몬을 일정 기간 이상 접하지 못한다면 불안 증세를 느끼는 경우가 존재한다고도 쓰여 있었다.

이 부분을 읽고 나자 채하의 페로몬 향을 맡을 때마다 잠이 쏟아지던 것, 그와 떨어져 집에 갔던 첫날 느꼈던 불안감이 설명되었다.

책을 덮고 부엌에서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그러곤 컵에 가득 물을 담아서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채하는 침대 한가운데에 기대앉아 있었다. 비키라고 했으나, 채하는 자신에게 안기라는 듯 팔을 벌렸다.

마지못한 척 채하의 가슴에 기대어 앉으니 그가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재밌어?”

“재밌지는 않은데 몰랐던 게 많이 나와서 신기해.”

말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페이지를 넘겼다. 어느새 책은 신체 변화에 대한 부분으로 넘어갔다. 임신 후기가 되면 가슴이 부풀고 모유가 나올 준비를 한다는 문구를 읽었다. 뒤에서 나를 안은 채하도 같은 부분을 읽었는지 허리께에 있던 손이 점점 위로 올라왔다. 나는 그의 손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어딜 만져.”

채하는 “히잉.” 하고 우는 소리를 냈다. 한 대 맞은 것으로는 손을 뗄 생각이 없는지 이번에는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평소에는 배나 허리를만지더니 오늘은 점점 위로 올라왔다. 맨가슴에 채하의 손이 닿는 느낌에 놀라 움츠러들었다. 손목을 잡고 떼어 내려 했지만 그의 힘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계속 만지면 각방이야.”

내 말에 채하가 바로 꼬리를 내렸다. 풀이 죽은 게 안쓰러웠지만 붙잡혀 울면서 네 번이나 사정했던 기억이 너무나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오늘 채하는 손만 잡고 잠들어야 했다.

***

나와 채하는 며칠째 채민 형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결혼식 준비를 도와준다고 나선 채민 형은 우리를 데리고 인형 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오늘도 나와 채하를 여기저기로 끌고 다니면서 이 옷, 저 옷 입혀 보는 데 신이 나 있었다.

“형, 저 그냥 이걸로 할게요.”

“안 돼. 배 나와 보여.”

“괜찮은 것 같은데요.”

커다란 거울 앞에 서서 몸을 이리저리 비춰 보며 말했다. 내 눈에는 괜찮아 보였지만 채민 형이 보기엔 그렇지 않은지 벌써 다른 예복이 걸린 행거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지금은 괜찮아 보여도 한 달 후를 생각하자.”

채민 형이 옷 한 벌을 얼굴 밑에 대 보고는 나를 탈의실로 밀어 넣으면서 말했다. 다시 옷을 갈아입고 나와 거울 앞에 섰다. 방금 입은 옷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지만 채민 형은 마음에 드는지 흡족한 표정을 했다.

경험자인 채민 형의 선택을 따르기로 했다. 몇 번째 옷을 갈아입었는지 세다가 잊어버릴 정도였던 나는 이제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나와 다르게 세 번째에 예복을 결정해 버린 채하도 기다리다가 지친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곧 집에 갈 거라는 우리의 예감은 착각이었다. 카페로 자리를 옮긴 나와 채하의 앞에 채민 형은 핸드폰을 내밀었다. 핸드폰 화면 속에는 여러 장의 사진이 떠 있었다.

“이게 뭐예요?”

“웨딩 촬영.”

“아니, 그건 아는데 꼭 찍어야 돼요?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채민 형이 남들 하는 것은 다 해야 한다고 난리였다.

“나중에 가끔 꺼내서 보면 재밌어. 그리고 애가 아빠는 결혼사진 왜 없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래?”

채하는 저 말에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어떤 콘셉트가 좋을지 골라 보라는 말에 나는 모든 것을 채민 형에게 일임하겠다고 했다. 채하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안목을 추켜세우자 채민 형은 신이 나서 이것저것 보여 주기 시작했다. 우리는 보여 주는 족족 다 마음에 든다며 박수를 쳤다. 이 사진 저 사진을 보며 한 시간쯤 지나자 채민 형의 머릿속에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힌 것 같았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 해외?”

열심히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채민 형이 물었다.

“아직 못 정했어요. 형은 제주도 갔죠?”

우리 일이었지만 막상 직접 정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혼식 장소와 날짜, 심지어 그날 입을 옷까지 전부 다른 사람이 정해 준 대로였다.

“응. 서영이가 어려서 해외는 못 가고 제주도 갔었지. 형이 우리 둘이 가자고 했는데 서영이가 눈에 밟혀서 그렇게는 못 하겠더라고.”

“우리도 제주도 갈까? 생각해 보니까 비행기 오래 타는 거 피곤할 것 같아.”

“지원이 네가 편한 대로 해.”

나만 좋으면 어디든지 상관없다는 채하의 말에 우리도 제주도로 결정했다. 채민 형이 신혼여행 당시 묵었던 풀 빌라를 예약해 주겠다고 한 덕에 숙소를 알아보는 수고까지 덜 수 있었다.

“내가 피치 낳으면 더 좋은 데로 데리고 가 줄게.”

둘째를 낳고 두 번째 신혼여행을 다녀왔다는 채민 형의 말에 채하가 내 손을 잡고 약속했다. 그 말을 들은 형은 각서를 받아 놓아야 한다고 성화였다.

***

웨딩 촬영을 며칠 남겨 둔 어느 날, 밖에서 저녁을 먹자는 채하의 말에 집을 나섰다.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나를 기다리던 그는 출근할 때와는 다르게 진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출근할 때랑 옷이 다르네?”

“데이트하는 데 신경 좀 썼어.”

신경을 썼다는 채하의 말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너무 편해 보이는 옷차림이었다. 반바지와 긴바지를 두고 고민하다가 긴바지를 입고 나와 다행일 정도였다.

“그럼 나도 집에 가서 다시 옷 갈아입고 올게.”

머릿속으로 여름 정장을 어디에 뒀는지 생각하고 있는데, 채하가 지금도 예쁘다면서 입을 맞췄다. 이전에는 짧은 입맞춤에서 끝났지만 요즘의 그는 쪽 소리만 내고 떨어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흐응.”

채하는 자연스럽게 내 뒤통수를 잡아 끌어당겼다. 채하의 혀가 내 입 안을 헤집고 돌아다니자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가 나왔다.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렸더니 내 허벅지 위에 올려진 채하의 손이 점점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대로라면 데이트는커녕 다시 집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쓰러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 그만.”

평소였으면 그만하라는 말에도 질척거리면서 매달렸을 채하가 의외로 금방 멈췄다. 채하는 핸들에 머리를 대고 크게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팔뚝에 손을 얹고 조심스럽게 괜찮냐고 물었다. 벌떡 고개를 든 채하가 손목을 잡아당겨 다시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방금과는 다르게 짧게 쪽 소리만 내고 떨어졌다.

“응. 괜찮아. 이제 갈까?”

“어디 갈 건데?”

채하는 “가 보면 알아.”라며 출발했다. 30분 정도를 달려 도착한 곳은 호텔 레스토랑이었다. 미리 예약을 해 둔 것인지 직원이 조용한 창가 자리로 안내를 했다. 자리에 앉자 채하가 말리더라도 옷을 갈아입고 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요리가 차례로 나오기 시작했다. 예약할 때 주문까지 마친 모양이었다. 전채 요리를 비우자 그릇이 치워지고 내 앞에는 등심 스테이크가, 채하의 앞에는 연어 스테이크가 놓였다.

“연어? 아직도 고기 못 먹겠어?”

“아니, 그냥 연어가 먹고 싶어서.”

연어가 먹고 싶었다는 그의 말은 거짓말처럼 들렸다. 내가 아는 채하는 연어도 좋아했지만 연어와 고기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무조건 고기를 고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입덧에 어쩔 수 없이 연어를 고른 것 같았다.

“맛있게 먹어. 지원아.”

“응. 너도 맛있게 먹어.”

“썰어 줄까?”

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든 채로 고개를 저었다. 채하는 오늘도 내 식사에만 잔뜩 신경을 기울였다. 나도 이제 그런 채하에게 완전히 익숙해져 혼자 밥을 먹는 게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근데 왜 갑자기 레스토랑?”

“그냥, 가끔 이런 데서 밥 먹으면 좋잖아.”

아무렇지 않은 척 이야기하려는 것과는 달리 조금 긴장한 듯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디저트로 나온 하얀 생크림 케이크를 보았을 땐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포크를 들고 케이크를 거의 으깨 가며 안에 든 것이 없는지 확인하면서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케이크를 다 먹을 때까지 포크 끝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맛있게 먹었어? 이제 일어날까?”

내 앞에 놓인 디저트 접시가 깨끗하게 비워진 것을 본 채하가 말했다. 나는 “으응.” 하고 대답하면서 내가 완전히 헛다리를 짚었다는 걸 깨달았다. 혼자 김칫국을 마신 기분이라 얼굴이 조금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피곤하진 않아?”

채하가 벨트를 매어 주면서 물었다.

“응. 안 피곤해.”

“그럼 좀 걷다가 들어갈까?”

“좋지.”

내 말에 그는 집과 반대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야경 명소로 유명한 공원이었다. 길어진 여름 해 때문에 아직 주위는 완전히 어둡지 않았다. 한낮을 뜨겁게 달궜던 열기 탓에 해가 지고 있어도 날씨는 여전히 후덥지근했다. 하지만 더운 공기를 식히려는 듯 신선한 바람이 조금씩 불어와서 가벼운 산책을 하기엔 나쁘지 않은 날씨였다.

“여기 엄청 오랜만이다.”

“여기 기억나?”

“당연하지. 우리 대학교 때 연애 수업에서 마지막 데이트로 왔던 곳이잖아.”

대학 시절 채하와 함께 교양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정식 교과명은 ‘현대인의 사랑과 커뮤니케이션’이었지만 ‘연애 수업’이나 ‘데이트 수업’ 등으로 불렸던 수업이었다. 파트너와 함께 데이트를 하고 레포트를 제출하는 꿀 교양으로 유명한 수업이었다.

“그때 교수님이 학기 중에 파트너랑 사귀게 되면 A+ 주겠다고 하셨던 거 기억나?”

채하의 손을 잡고 걸으니 교수님이 하셨던 말 중 문득 떠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응. 기억나지.”

“갑자기 그 수업 A+ 못 받은 게 억울하네.”

1학년 1학기에 망쳐 놓은 학점을 메꾸기 위해 열심히 성적을 올리던 나는 종종 채하에게 “사귈래?” 하며 농담을 하곤 했었다. 그러나 그는 웃기만 하고 대답을 피했었다. 학기가 마무리되고 우리의 성적표에는 나란히 B+가 찍혀 있었다.

조잘조잘 말하면서 걷는 나와 달리 채하는 대답만 하면서 묵묵히 걸었다. 숨이 조금 가빠질 때쯤 우리는 야경이 제일 잘 보이는 전망대에 도착했다. 정장을 입고 넥타이까지 맨 그도 더운지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채하의 옆에 서서 전망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밤에도 꺼지지 않고 빛나는 도시의 불빛은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우리 전에 왔을 때도 여기 서서 야경 봤던 거 기억나?”

“거기가 여기였나?”

야경을 봤던 기억은 있지만 정확한 장소까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나와 다르게 채하는 정확한 위치를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그때는 우리 둘이 왔었는데, 오늘은 세 명이네.”

“내가 평생 잘할게.”

나는 장난스럽게 “당연히 잘해야지.” 하고 대꾸했으나 채하는 진지했다. 단단히 결심한 것 같은 얼굴로 채하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광택이 도는 검은색 새틴 상자였다.

채하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누가 봐도 프러포즈를 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뚜껑이 열린 상자 안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가 들어 있었다.

“나랑 결혼해 줄래?”

내 앞에 반지를 내밀며 말했다. 꽃이나 풍선, 촛불 따위의 장식품도 없고 텔레비전과 소설 속에 수백 번, 수천 번은 나왔을 법한 흔한 멘트뿐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어떤 프러포즈보다 특별하게 느껴졌다.

“응.”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채하가 내 왼손을 들어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손가락 위에 자리 잡은 반지가 가로등 조명 때문인지 내 눈에 고인 눈물 때문인지 일렁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반지에 고정했던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들자 나를 바라보고 있는 채하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겼다.

“순서가 많이 바뀌긴 했지만, 내가 평생 행복하게 만들어 줄게.”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채하는 손으로 내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 냈다. 그의 말처럼 순서가 뒤죽박죽이지만 우리가 함께할 미래는 행복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집에 도착해 차에서 내렸을 때부터 채하는 마음이 급해 보였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미리 넥타이를 푸는 것을 보자 지난 주말이 떠올랐다. 현관문이 열리자 손목을 잡고 있는 채하의 손을 뿌리쳤다.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변기 커버를 내리고 그 위에 앉았다. 이제 어떻게 이 상황을 피해야 할지 고민하며 다리를 덜덜 떨었다. 일단 샤워를 하면서 시간을 끌어 보기로 했다. 옷을 벗기 전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조심스럽게 뺐다. 혹여나 흠집이라도 날까 조심스럽게 부드러운 수건 위에 올려 두었다.

평소보다 더 꼼꼼하게 공들여 씻기 시작했다. 샴푸 거품을 깨끗하게 헹궈 내고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헤어 팩까지 꺼내 발랐다. 설명서가 시키는 대로 10분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헤어 팩을 씻어 내고 내친김에 때까지 밀었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채하도 이성을 찾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오판이었다. 여름에는 잘 사용하지 않던 보디로션을 꼼꼼하게 바르고 반지까지 끼고 나오자 채하가 욕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이미 씻고 온 것처럼 보이는 채하가 말없이 나를 화장대 의자에 앉히더니 평소처럼 머리를 말려 주었다. 나는 드라이기 소리를 들으며 거울 너머로 그의 눈치를 보았다.

시간을 더 끌고 싶다는 내 마음과는 다르게 모질이 얇은 내 머리카락은 너무 빠르게 말라 버렸다. 평소의 채하였으면 드라이기의 코드를 뽑아 정리했겠지만 오늘은 화장대 위에 대충 던져두고 내 손을 잡아끌었다.

“채, 채하야.”

이름을 불러 봐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내 양어깨를 쥐어 침대에 앉히고 내려다보는 채하의 눈은 누가 봐도 성욕에 돌아 버린 상태였다.

“딱 한 번만. 한 번만 하는 거야. 알겠지?”

채하가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몇 번이라고 했지?”

“한 번.”

불안감에 다시 되물었다. 채하의 대답에도 완전히 긴장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는 나를 침대 위로 완전히 끌어 올려 입고 있던 샤워 가운의 끈을 풀어 버렸다. 리본 매듭이 흐트러지자 가운은 더 이상 몸을 가리지 못했다.

기억이 없어 아무것도 모르는 첫 경험에 가까웠던 지난번과는 다르게 절제하지 못하는 채하에 대한 기억이 남은 지금은 저번과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긴장이 되었다.

짧게 입을 맞춘 그의 입술이 턱선을 따라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부분에 채하의 입술이 닿았다. 이를 세워 잘근잘근 씹어 대고 힘을 줘 빨아들이는 것이 느껴지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붉은 자국이 남았음을 알 것 같았다.

만족할 만큼 자국을 만들었는지 그 밑으로 내려와 쇄골의 가장 튀어나온 부분을 빨아들였다. 쇄골 위를 덮고 있는 얇은 피부는 자극에 쉽게 붉어졌을 것이다.

“읏.! 아, 아, 거… 거기 하지….”

혀를 내밀어 바짝 서 버린 유두를 찌르는 느낌에 놀라 채하의 머리를 밀어냈다. 하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유두를 살짝 깨물고 입 안으로 빨아들이자 방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쾌감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저지의 말을 뱉었다.

“왜? 여기 빨아 주면 좋아했는데. 아, 기억이 안 나는구나.”

“나! 기억난다고!”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단 한 문장만 맴돌았다. 아, 좆 됐다.

“기억이… 나?”

채하가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내 눈을 바라보았다.

“피치 만들던 날만… 기억이….”

나는 눈을 내리깔아 시선을 피하면서 웅얼거렸다. 지난 주말, 채하에게 잡혀 눈물을 한 바가지 뽑았던 날 기억이 돌아왔다고 하자 나머지 기억도 돌아오게 해 주겠다며 하던 행동을 계속 이어 나갔다.

채하가 손가락으로 엉덩이 틈 사이를 문질렀다. 그곳은 이미 찝찝한 느낌이 들 정도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손이 움직이면서 나는 질척거리는 소리에 얼굴이 빨개지는 것 같았다.

그는 순식간에 나를 엎드리게 만들고 몸을 거의 가리지 못하고 걸쳐진 샤워 가운을 벗겨 냈다. 무슨 일인지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때 채하가 엉덩이 사이로 코를 박았다.

“흐읏!”

은밀한 곳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타인의 숨결과 혀에 놀라는 소리를 내며 움찔거렸다. 내 반응이 재미있는지 채하가 낮게 웃으며 혀를 움직였다.

“으응, 흐으… 읏…!”

뜨겁고 축축한 혀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져 쥐어짜듯 베개를 잡고 신음을 참았다. 그러나 쉽사리 참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 채하야아…. 아흐읏, 그… 그만….”

애원에도 멈추지 않았다. 넓게 구멍 주위를 핥아 올리던 혀는 어느새 구멍 안으로 들어가려는 듯 뾰족하게 서서 입구를 찔러 댔다. 쾌감과 수치심이 복합적으로 몰려와서 몸을 떨렸다.

“으흥, 아, 피치이… 안 돼…. 하읏!”

채하의 혀가 구멍 안으로 들어와 내벽의 얕은 곳을 꾹꾹 누르는 것은 주위를 핥으며 맴돌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수치심마저 잊어버릴 정도의 쾌감이었다. 그러나 내가 쾌감을 느낄수록 피치가 걱정되었다.그는 이런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빠르게 혀를 뒤로 물렸다. 나는 혀가 빠져나가면서 비어 버린 쾌감을 사정으로 채웠다.

몸을 반쯤 돌려 채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쪽 손바닥으로 입 주위를 쓸어내리는 낯은 내 뒤에서 나온 액체인지, 채하의 침인지 모를 액체로 젖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뒤가 빨려서 사정했다는 수치심에 눈물을 조금 흘렸다.

“씨이…. 내가 그만하랬잖아.”

오늘까지 합해 기억하고 있는 3번의 관계 중 내가 울지 않았던 날이 없었다. 울보 설채하는 이럴 때만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눈물을 글썽거리며 채하를 노려보았다. 그는 내가 눈물을 보이자 미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다리 사이에 뻣뻣하게 서 있는 것은 미안한 기색이라고는 몰랐다.

채하의 뽀얀 피부와 상반되는 검붉은색의 성기에는 흉흉한 핏줄과 힘줄이 도드라졌다. 잔뜩 힘이 들어가 꺼떡거리고 있는 것은 단정한 느낌을 물씬 풍기는 주인과 대조적이었다. 저런 것이 다리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생김새였다.

내가 말없이 자신의 성기를 바라보는 걸 눈치챈 채하가 나를 다시 눕혔다. 순식간에 다리를 잡혀 비부를 훤히 드러내는 모양새가 되었다.

“야! 한 번만 하기로 했잖아.”

“그래. 한 번. 나는 아직 한 번도 못 했잖아.”

그의 말에 할 말이 없어졌다. 채하의 손에 잡혀 몇 번 쓱쓱 쓸리기 무섭게 금세 피가 몰려 버린 내 성기를 원망했다. 채하가 내 성기와 자신의 성기를 한 손으로 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맞닿아 있는 귀두를 쓸어내릴 때 손가락에 힘을 줘 조이자 발가락 끝이 곱을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아흐, 살살… 흐앗, 읏!”

“응. 살살, 윽, 할게.”

채하는 말과 다르게 손의 속도를 늦추거나 힘을 빼지 않았다. 손이 움직일 때마다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 같이 아랫배가 뻐근해졌다. 나와 비슷한 속도로 쾌감을 느끼는지 채하가 손을 점점 빠르게 움직였다.

“아! 아! 하으…. 아! 으.”

사정하기 직전, 거의 우는 것처럼 흐느꼈다. 성기 끝에서 튀어 나간 정액이 그의 턱에 묻어 하얗게 흘러내렸다. 사정한 후에도 채하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다. 내 배 위로 정액을 뿜어낸 채하가 한숨 같은 호흡을 내뱉었다. 쾌감을 계속해서 느꼈던 나는 숨을 헐떡거리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채하가 침대 옆에 널브러져 있던 샤워 가운으로 턱에 묻은 정액을 훑어 내고 내 배 위를 닦았다. 그러곤 재차 내 것을 잡아 오며 물었다.

“입으로 한 번 더 해 줄까?”

그 소리에 도망을 가려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지만 농담이었는지 채하는 나를 잡아 자신의 품속에 가뒀을 뿐이다. 나는 사정으로 인한 피로와 채하의 페로몬에 취해 금방 잠들어 버렸다.

잠든 사이 채하가 씻겨 준 것인지 다음 날 눈을 떴을 때는 땀에 절었던 마지막 기억과는 다르게 몸이 보송보송했다. 하지만 가슴에 있던 붉은 자국들은 무슨 일인지 더 늘어나 가슴 대부분이 본래의 색을 잃어버렸다.

***

갑자기 더워진 주말, 나와 채하는 채민 형이 예약해 준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스튜디오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촬영 준비를 했다. 내 가슴팍을 죄다 물어뜯어 놓은 설채하 때문에 남들이 볼까 무서워 조심스럽게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환복하고 나왔을 무렵, 채하는 이미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옆에 앉아 그가 점점 변해 가는 것을 구경했다. 평소에도 얼굴만 뜯어먹고 살아도 10년을 족히 먹고살 듯했던 채하는 전문가의 손길을 거치자 눈을 떼기 아까울 정도로 변해 있었다.

준비를 마친 채하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메이크업 받는 나를 구경했다. 그는 내 얼굴이 따가울 정도로 쳐다보면서 웃고 있었다.

“지원아 셀카 찍자. 셀카.”

모든 준비가 끝나고 채하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평소 사진을 잘 찍지 않는 나였지만 오늘만큼은 채하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이런저런 각도와 표정으로 우리가 사진을 찍고 있을 때, 포토그래퍼가 준비를 마쳤는지 우리를 불렀다.

“자, 두 분 마주 보시고 서로 행복한 눈빛으로 봐 주세요.”

추상적인 표현에 어색하게 웃으며 채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 눈빛은 행복한 눈빛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지원 씨, 노려보지 마시고, 채하 씨처럼 해 보세요.”

채하의 표정을 따라 해 보려고 애썼지만 ‘행복한 눈빛’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채하는 내 귓가에 “인세 들어온 날 통장 잔고 확인하는 거 상상해 봐.” 하고 속삭였다. 그러자 내 표정이 괜찮아졌는지 포토그래퍼는 연신 셔터를 눌러 대기 시작했다.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고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던 그가 “우리 지원이 행복하게 해 주려면 돈 많이 벌어 와야겠네.”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채하에게 짧게 입을 맞추고 “내가 더 잘 버니까 내조나 잘해.” 하고 대꾸했다.

탈의실에서 채하와 했던 농담 때문인지 긴장이 풀려 다음 촬영은 더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기나긴 촬영을 마무리하고 사진 선택까지 마친 우리는 집에 오자마자 뻗어 버렸다. 그날 이후 채하의 메신저 프로필 자리는 우리가 촬영 준비를 하면서 찍은 셀카가 차지하게 되었다.

***

잠들기 전 서로 마주 보고 누워 대화를 하는 것이 요즘 우리의 일상이었다.

“내일 병원 가면 피치 성별 알 수 있는 거야?”

“응. 그렇다던데?”

“어머니가 아들이라고 하신 게 맞을지 틀릴지 너무 궁금해.”

채하는 천천히 내 배를 쓰다듬었다.

“피치가 아들일지 아닐지가 궁금해? 나는 네가 내일도 울지 안 울지가 더 궁금해.”

그가 킥킥거리는 나를 밉지 않게 나를 흘겨보았다. 나를 흘겨본 채하는 등이 보이도록 돌아누웠다. 덩치에 맞지 않게 삐쳐서 등을 돌린 채하의 모습이 귀여웠다.

채하에게 “삐쳤어?”라고 물으며 그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채하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허리께에 올려 둔 손을 슬금슬금 움직여 채하의 배를 만졌다.

“지원아, 나는 지금 내가 너를 또 울릴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해.”

손목을 잡은 채하가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그에게 잡혀 눈물을 뽑았던 지난 밤들을 기억했다. 지금은 내가 꼬리를 내려야 할 때라는 것을 그간의 경험을 통해 알았다. 힘을 주어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했지만 채하를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채하가 재빠르게 몸을 돌려 나를 자신의 몸 위에 올려놓았다.

“놔줘.”

“뽀뽀 한 번만 해 주면 놔줄게.”

입술을 내밀고 저런 말을 하는 그가 능구렁이 같은 아저씨처럼 보였다. “아저씨 같아….” 하고 중얼거리면서 짧게 입을 맞췄다.

“아저씨? 아저씨이?”

그 말이 심기를 건드렸는지 채하는 나를 놔주지 않았다. 채하가 내 양 볼을 잡고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입술 사이를 헤집고 들어온 혀가 입천장과 앞니의 뒷부분을 강하게 긁고 지나갔다. 혀와 혀가 질척거리면서 얽히는 소리가 침실 안에 울려 퍼졌다.

“혀 빨아 줘.”

잠시 입술이 떨어진 사이 채하가 숨 가쁜 목소리로 말했다. 곧바로 입 안으로 물컹한 혀가 밀고 들어왔다. 혀끼리 맞대 비비기도 하고 노골적인 소리를 내면서 빨기도 했다. 그가 큰 티셔츠와 속옷만 입고 있는 내 허벅지를 만지다가 손을 위로 올려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

“으응. 안 돼.”

채하를 저지했다. 오늘은 끝까지 할 생각이 없는지 곧바로 손을 멈췄다. 잘 자라는 말을 귓가에 속삭인 채하가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허리 위에 올려진 단단한 팔뚝의 감촉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

다음 날 오후, 나와 채하는 병원 앞에서 만났다. 의사 선생님은 우리에게 “아기가 아빠를 닮았네요.”라는 말로 넌지시 성별을 알려 주셨다. 나는 입이 귀에 걸린 채하를 진료실 밖으로 내보내고 조용히 의사 선생님께 물었다.

“저기 선생님… 관계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입을 열었지만 문장을 완성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선생님이 내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기엔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니 관계는 가지셔도 됩니다. 그런데 너무 깊은 삽입이나 노팅은 조심하셔야 돼요.”

콘돔을 꼭 사용하라는 선생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그 앞에는 이미 수납을 마친 채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얘기 했어?”

“어? 그냥….”

‘섹스해도 되냐고 물어봤어’라고 말하기엔 지금 이곳은 공공장소였다. 어설프게 얼버무리고 채하의 손을 잡고 병원 밖으로 나왔다. 오늘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병원 말고도 한 군데 더 있었다. 바로 구청이었다.

결혼식 전 혼인 신고를 하자는 채하의 말에 동의했다. 이미 아기까지 있는 마당에 혼인 신고를 미룰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구청 앞에 누군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 유지원! 설채하!”

저 멀리서 우리를 알아보고 이름을 크게 외치는 사람들은 내 친구들이었다.

“너네가 여긴 왜 왔어?”

나는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드는 삼인조에게 물었다.

“혼인 신고 증인 해 주러 왔지.”

씩 웃는 셋을 보자 어이가 없었다.

“증인은 두 명이면 되는데 왜 셋이나 왔어? 그리고 꼭 안 와도 된다던데.”

내 물음에 친구들은 입을 모아 그냥이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함께 구청 안으로 들어갔다. 혼인 신고서 한 장을 꺼내 들고 발급받은 서류들을 참고해서 함께 빈칸을 채워 나갔다. 빈칸을 채우는 모습을 구경하던 셋은 누가 증인을 할 것인지 열띤 토론을 시작했다.

모든 공란을 채우고 증인 부분만 남았을 때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 나는 깔끔한 해결 방법을 제시했다.

“빨리 가위바위보 해서 정해.”

내 말에 저 셋은 어떻게 그런 어린애들 장난 같은 방법으로 정하냐고 아우성이었다.

“싫으면 말아. 여기 직원분한테 해 달라고 하지 뭐.”

그 말에 삼인조는 얼른 가위바위보를 외치고 한 명을 떨구어 냈다. 최희주와 김윤호가 차례로 증인란을 채우고 서명을 했다. 나와 채하는 빈칸이 사라진 혼인 신고서를 들고 접수대 앞에 섰다.

접수대 위에는 ‘접수 후 취소 불가’라는 문구가 빨간색 궁서체로 크게 쓰여 있었다. 붉은 궁서체를 보자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채하는 고민이라고는 없는 표정으로 내 손에 들려 있던 종이를 직원에게 건넸다.

잠시 후 접수가 완료되었다는 직원의 말에 채하는 큰 소리로 “감사합니다!”라고 외친 후 내 손을 잡고 구청을 빠져나왔다. 나는 그렇게 유부남이 되어 버렸다.

함께 저녁을 먹자는 친구들의 말에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전히 고기를 잘 먹지 못하는 채하를 위해 고른 메뉴는 피자와 파스타였다. 나는 새우가 올라간 피자를 한입 베어 물며 친구들에게 물었다.

“축가 준비는 잘돼 가?”

“그럼 그럼. 나 요새 일할 때도 노래하면서 하잖아.”

“우리 맨날 퇴근하고도 연습해.”

이선준은 노래를 하고 김윤호는 춤을 추겠다던 원래의 계획은 둘이 함께 노래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김윤호는 발라드에 맞춰 춤을 추고도 남을 놈이라는 것을 잘 아는 나와 채하가 내린 결정이었다.

“어, 너 손에 반지 뭐냐?”

식사를 하던 중 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본 김윤호가 물었다.

“이거?”

왼손을 들어 내 앞에 앉은 친구들에게 보여 줬다. 새침한 말투로 “부럽지?” 하고 덧붙이자 셋은 입을 모아 야유했다.

“이야, 설채하 저 반지 드디어 줬네.”

“드디어? 이거 언제 산 건데?”

“저거 책상 서랍 속에 두 달 좀 안 되게 묵혀 놨었을걸?”

두 달이 좀 안 된다면 내가 교통사고를 당하기 직전과 얼추 맞아떨어졌다. 갑작스럽게 준비를 한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청혼할 계획이었던 모양이다. 그동안 채하가 했을 마음고생이 떠올라 가슴 한구석이 아려 오는 것 같았다.

“채하야….”

나는 채하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계산할 테니까 우리 먼저 간다.”

채하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내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가는 동안 그는 말이 없었다. 내 핸드폰은 친구들에게서 온 메시지로 불이 날 지경이었다.

최희주 : 야 뭔데 뭔데

오후 06:12

이선준 : 설채하 거기서 잡았으면 한 대 치겠더라ㄷㄷ;;;;

오후 06:12

김윤호 : 뭐야 뜨밤 하러 가는 거임?

오후 06:13

김윤호의 메시지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채하는 누가 봐도 섹스하러 집에 가는 사람 같았나 보다. 조심스럽게 채하를 부르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채하야, 우리 어디 가?”

물론 집이겠지만 알면서도 한 번 물어봤다.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채하에게 돌아온 말은 집이 아니었다. 가고 싶은 곳이 없었던 나는 “아니, 가고 싶은 데는 없긴 한데.” 하고 말끝을 흐렸다. 얼마 후 우리가 도착한 곳은 내가 며칠 전 프러포즈를 받았던 장소였다.

“어? 여기는 왜 또 온 거야?”

“그날 아직 다 못 한 말이 남아서.”

“뭔데?”

“우리 일단 좀 걸을까?”

채하의 말에 손을 잡고 걸었다. 그때와는 달리 나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 프러포즈를 받았던 그곳에 도착했다. 아직 야경을 보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우리가 대학교 때 여기 왔을 때.”

채하가 입을 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아직 해가 완전히 지기 전이었잖아.”

“그랬나?”

디테일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나와는 다르게 채하는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원이 너는 여기 서서 해 질 때까지 저쪽만 바라보고 있었어.”

“…….”

“나는 네 옆모습만 몰래 훔쳐보고 있었고.”

고개를 돌리자 나를 바라보고 있던 채하와 눈이 마주쳤다. 채하는 얼마나 오랫동안 내 옆모습만 보았던 것일까.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눈을 마주했다.

“사실 그때 너한테 좋아한다고 말하려고 마음먹고 왔었어.”

처음 알게 된 이야기였다.

“…근데 왜 안 했어?”

“너랑 친구로도 못 지내게 될까 봐 무서워서.”

채하는 별거 아닌 일을 이야기하듯 가벼운 말투로 말했지만 그 속에 깔린 고민의 무게가 느껴졌다.

“…얼마나… 오래….”

“얼마나 오래 좋아했냐고? 말 안 할래. 나도 비밀 하나쯤은 있어야지.”

“지금도 내가 더 좋아하는데 그것까지 말해 주면 내가 너무 불리할 것 같아.”라고 덧붙였다. 첫눈에 반했냐고 농담 삼아 던졌던 질문에 부정하지 않던 채하가 떠올랐다.

우리는 손을 잡고 올라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채하의 손을 잡고 언덕을 내려가면서 다짐했다. 그동안 놓친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도록 앞으로 채하를 더 많이, 더 열심히 사랑해야겠다고.

우리는 잠옷을 입고 함께 거실 소파에 앉았다. 리모컨을 든 채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채하야, 우리 이제 해도 된대.”

무엇을 해도 되는지에 대해서는 생략되어 있었지만 충분히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자신의 목에 팔을 두르게 하고 번쩍 안아 든 채하가 방으로 들어갔다. 나를 침대 위에 올려놓은 그는 빠르게 상의를 벗어 던지고 내 잠옷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내렸다.

“아, 맞다.”

내 말에 채하는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집에 콘돔 없잖아. 사 와야지.”

“아니, 있어.”

채하가 협탁 맨 아래 서랍을 열어 콘돔 한 뭉치를 꺼냈다. 협탁 위에 올라간 개수가 대충 봐도 열 개는 넘을 듯했다. 서랍 안에는 언제 사 둔 것인지 콘돔이 박스째로 들어 있었다. 나는 일단 한 개를 뜯어 낸 후 나머지는 다시 서랍 안으로 넣었다.

“한 번만. 알지?”

“우리 오늘 첫날밤인데?”

채하는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첫날밤은 무슨. 우리 피치 들으면 섭섭하게.”

“아니, 우리 이제 부부 되고는 첫날밤이잖아.”

나는 채하의 불쌍한 표정에 약했다. 결국 우리는 콘돔 두 개로 타협했다. 채하는 내 잠옷 상의의 단추를 마저 풀었다. 단추가 풀어진 옷은 금세 팔뚝을 타고 흘러내렸다. 서늘한 에어컨 바람이 맨몸을 훑고 지나가자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채하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자 곧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눈을 아래로 슬쩍 내리깔자 밝은색 파자마 하의를 입은 채하의 다리 사이가 묵직한 무게감을 뽐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에 ‘피치가 채하를 닮아야 할 텐데….’ 하고 생각했다.

그는 내 가슴을 모아 쥐고 차가운 공기에 빳빳하게 서 버린 유두를 입에 물었다. 단단해진 돌기를 혀로 이리저리 굴리자 나는 곧바로 신음했다.

“아흣… 응…. 아.”

앞니로 돌기를 살짝살짝 긁고 지나가는 감각에 벌써부터 아래로 피가 몰렸다. 성기가 완전히 발기하기도 전에 엉덩이 사이가 축축하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이제 채하의 관심사는 가슴에서 엉덩이 사이로 옮겨 간 모양이었다.

“이것 봐. 벌써 젖어서 흐르기까지 했네.”

엉덩이 사이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던 채하는 그곳에 얼굴을 묻었다. 흘러나온 액체를 모두 핥아 먹으려는 듯 갈라진 틈 사이를 혀로 길게 쓸었다.

“으흥, 으, 아, 하지 마아.”

내 저지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회음부를 짓누르는 채하의 콧대가 느껴지는 바람에 금방이라도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흐느낌에 가까운 신음 소리를 뱉고 있을 때 채하가 얼굴을 떼고 콘돔 하나를 뜯어 손가락에 끼웠다.

“흐으, 그, 그걸 왜 손가락에 끼워?”

“이러려고 끼우지.”

콘돔을 씌운 검지와 중지를 한 번에 내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와 동시에 아래를 꽉 채우는 이물감이 느껴졌다. 남들은 겨우 손가락 두 개로 엄살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남들보다 두껍고 긴 그의 손가락은 두 개만으로도 충분히 무리였다.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말에 채하는 젤을 꺼내 삽입부 틈에 치덕치덕 발랐다.

“흐앗! 차가워.”

차가운 젤이 닿는 느낌에 움찔했다. 채하가 “미안….” 하고 중얼거리더니 손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왕복 운동을 하자 그 주위에 발린 젤도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채, 채하야, 이거, 흐읏, 이상해애.”

“거기가 뜨거워.” 하고 울먹이자 채하는 당황했다. 고개를 돌려 내 머리맡에 놓여 있던 젤 통을 쳐다보았다. 투명한 통에 빨간 글씨로 ‘뜨거운 밤을 위해 HOT!’이라고 쓰여 있었다.

“어…. 다른 거랑 헷갈렸어.”

미안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채하에게 통을 집어 던졌다. 그의 가슴을 맞고 침대 밑으로 떨어진 젤은 저 멀리로 굴러갔다. 채하는 슬쩍 손을 빼고 무릎을 꿇은 채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야! 왜 빼! 어떻게 좀 해 봐. 아, 씨…. 진짜.”

내 안에 들어와 있던 채하의 손이 빠져나갔어도 이미 젤은 그 안에서 충실히 기능하고 있었다. 화끈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간지러운 것도 같은 느낌에 금방이라도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협탁 위로 손을 뻗어 남은 콘돔 하나를 그에게 던졌다.

채하는 무릎 위에 떨어진 콘돔을 뜯어 성기에 씌우는 대신 다시 손가락을 내 안으로 집어넣었다. 이번에는 손가락 두 개가 아닌 세 개였다.

“아응! 아! 더, 흐응, 빨리, 흐.”

손가락이 내벽을 꾹꾹 누르면서 천천히 밀고 들어감에 따라 허벅지가 오므라들었다. 하지만 채하에게 잡힌 허벅지는 금세 다시 벌어졌다. 그는 손을 움직이면서 내 허벅지 안쪽에 입술을 대고 빨아들였다.

“으, 하으, 응.”

점점 위로 올라가던 입술이 내 한쪽 고환을 입에 물었다. 다른 곳보다 체온이 낮은 살덩이가 뜨거운 입 안으로 들어가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채하가 살살 힘을 줘 빨아들였을 땐 침대 시트를 부여잡고 신음을 참았다.

내가 억지로 신음을 참는 것을 본 채하는 손을 더 빠르게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뾰족하게 세운 혀로 귀두의 갈라진 틈을 핥았다.

“아! 아흣! 응, 좋아, 흐응.”

나는 곧 사정할 것처럼 힘이 들어가는 느낌에 채하의 입에 들어간 성기를 빼려고 했다. 하지만 채하가 나를 놔주지 않아 입 안에 사정해야 했다.

“뱉어.”

그의 턱 밑으로 손을 갖다 댔다. 하지만 손바닥 위에 정액을 뱉는 대신 꿀꺽하는 소리와 함께 삼켜 버렸다.

“아, 그걸 왜 먹어!”

“한두 번 먹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기겁한 나와 달리 태연한 얼굴이었다. 채하는 옆에 놓여 있던 콘돔 비닐을 뜯고 자신의 성기에 끼웠다. 성기의 밑동을 쥐고 내 구멍 주위를 문지르는 그에게 말했다.

“너무 깊게는 안 된대. 노팅도 안 되고.”

채하는 알겠다며 구멍 입구에 성기를 맞추고 느리게 밀어 넣었다. 겨우 귀두만 들어갔을 뿐인데 손가락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부피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직 들어가지 못한 부분이 훨씬 두꺼워 보였다.

“그거, 흐으, 다 넣으면 안 돼.”

“알겠어. 반만 넣을게. 약속.”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다. 빈말이 아니었던지 채하는 성기의 아랫부분을 잡고 손 밖으로 나온 부분만 내 안으로 밀어 넣었다. 여전히 성기를 잡은 상태로 “움직여도 돼?”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손을 떼고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게, 흐으, 하면 안 돼.”

“으, 응.”

그의 대답에는 신음 소리가 잔뜩 섞여 있었다. 채하는 허리를 움직이면서 입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우리 아기, 아빠 처음 봐서 놀라겠네.”라는 소리까지 해 댔다. 나는 그의 팔뚝을 찰싹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아흣, 너는, 씨, 흐으, 애한테,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떡해.”

채하가 “피치, 아빠가 미안.” 하고는 입을 맞췄다. 주어지는 쾌감에 헐떡이고 있느라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의 혀가 밀려들어 왔다. 채하의 혀는 내 혀를 한 번 감싸고 다시 빠져나갔다. 나는 그 움직임을 쫓아 어느새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채하는 내가 입을 다물 정신도 차리지 못하게 나를 몰아붙였다. 그러나 배 속 피치를 걱정해서인지 여전히 얕게 삽입하고 있었다. 나는 더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자극을 원했다.

“흐응, 아! 응, 채하야. 흐으.”

채하의 어깨를 안고 매달렸다. 그는 곧 사정할 것처럼 내 목에 얼굴을 묻고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여 내가 다칠까 얕게 삽입한 채였다. 채하가 주는 자극에 더는 참지 못하고 배 위로 하얀 정액을 흩뿌렸다. 채하도 곧바로 나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고 낮은 신음을 흘리며 사정했다.

그는 정액이 찬 콘돔을 벗겨 내고 끝을 묶어 침대 밑으로 던져 버렸다. 나를 안고 내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어 댔다. 나는 채하의 장난에 웃음이 터졌고 채하도 곧 피식했다.

“우리 한 번 더 할까?”

채하가 내 배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이미 콘돔 두 개 다 썼어. 오늘은 끝.”

“아, 그런 게 어딨어! 콘돔 두 개, 섹스 두 번! 이게 맞지.”

“그러게 누가 막 뜯어서 쓰래?”

채하는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오늘 외출도 했고 그에게 잡혀 두 번이나 사정해 버려서인지 금세 피로가 몰려왔다. 채하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나를 감싸는 페로몬에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 같았다. “나 씻겨 줘.” 하고 웅얼거리다가 까무룩 눈을 감았다.

***

“여보, 식사하세요.”

앞치마를 한 채하가 귓가에 저 말을 속삭여 나를 깨웠다. 눈을 뜬 나는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었다. 채하는 속옷만 입은 상태에서 분홍색 바탕에 흰색 레이스가 잔뜩 달린, 실용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앞치마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작은 앞치마로 그의 커다란 몸을 다 가리기란 무리였는지 ‘입는다’라는 표현보다는 ‘겨우 가리고 있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이거 뭐야?”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허벅지 위에 달랑거리는 앞치마 끄트머리를 잡고 물었다.

“김윤호가 사 줬어.”

“남자의 로망. 알몸 앞치마.”라고 덧붙이는 채하를 보며 김윤호를 조져야 하나, 줏대도 없이 그 말에 넘어간 설채하를 조져야 하나 하는 고민을 했다. 내가 여전히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자 나를 안아 식탁으로 데리고 갔다.

나는 어떤 정신으로 식사를 마쳤는지도 모르게 밥을 먹었다. 출근 준비를 마친 채하가 정상적인 옷을 입고 나와서야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같이 출근하기 싫다며 징징거리는 채하를 키스로 달래 출근시킨 후 벗어 놓은 앞치마를 손에 들었다. 버릴까 고민하다가 일단은 내 방 벽장 속에 숨기기로 했다.

앞치마를 넣은 후 손을 탈탈 턴 나는 곧바로 핸드폰을 들어 김윤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야 김윤호

오전 08:51

미쳤냐??????

오전 08:51

앞치마 뭔데ㅡㅡ

오전 08:52

너 앞으로 우리 채하랑 놀지 마라

오전 08:52

너한테 자꾸 이상한 거 배워 오잖아

오전 08:53

김윤호에게 연달아 메시지 5통을 보냈다. 메시지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김윤호 : 아 진짜 입음? ㄹㅇ?

오전 08:55

김윤호 : 개웃곀ㅋㅋㅋㅋㅋㅋ

오전 08:56

나는 김윤호 대신 채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채하야 김윤호랑 놀지 마라

오전 08:57

걔한테 나쁜 거 배워 오면 큰일 난다

오전 08:58

내 말에 채하는 이유를 묻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일 열심히 하라는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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