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3
금요일.
하필이면 붙은 한자마저도 고귀하기 그지없는 금요일은 학생, 직장인 할 것 없이 한 주의 목표가 되는 날이다. 하지만 주말 내내 경기가 있는 프로야구 선수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건 강희찬 역시 마찬가지다. 금요일이란 자고로 주말 시리즈의 시작일 뿐이다. 오히려 기쁜 날은 휴식일 전인 일요일이 아니던가.
강희찬에겐 그 정도였던 금요일의 가치가 바뀌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귀는 사람이 공무원, 그것도 8시부터 5시까지 일하는 교육 공무원이다. 그러면 나름대로 금요일에 애정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금요일의 가치가 올라간 만큼 일요일의 가치는 떨어졌다. 월요일에는 선이가 출근한다. 건방지고 시끄러운 애새끼들이 한가득한 지옥으로. 그 이유만으로도 휴일 전날의 가치가 경제 위기 때의 주식의 값어치처럼 급락하기는 충분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 6일 근무하는 프로야구 선수와 평일 5일을 직장에서 보내는 공무원. 극악의 조합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요일인 어제만큼은 달랐다. 왜냐면, 월요일인 오늘이 이선이 다니는 학교의 개교기념일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일요일 저녁이면 신데렐라처럼 본인 집으로 가기 바빴던 이선 역시 하루 더 머물렀다.
강희찬은 조금 큰 잠옷을 입고 정신없이 잠에 빠진 사람의 얼굴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으응…….”
모로 몸을 틀고 머리를 손으로 받친 채 가만히 이선을 내려다보았다. 입을 헤벌리고 자는 게 처음엔 귀여워서 자꾸 손가락이며 다른 것을 집어넣은 적도 있다. 그때마다 잠투정을 부려서 자주는 하지 못하는 장난이지만.
어쨌든 오늘 강희찬은 얌전히 굴었다. 억지로 입술을 빨거나 혀를 넣지 않고 입술만 만졌다. 물론 뺨에 몇 번 뽀뽀하다가 충동적으로 깨물기도 했지만, 아직 깨지는 않았다.
이선의 자는 모습은 종일 보고 있으라고 해도 가능할 광경이다. 돈을 주고 봐도 전혀 아깝지 않을 터였다.
“아, 맞다.”
이선의 자는 모습을 보는 것도 한 시간째. 즉, 강희찬이 깬 지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그의 머릿속엔 냉장고에 두었던 과일과 요플레의 존재가 떠올랐다.
강희찬은 조심히 이불을 들치고, 몰래 들어온 도둑보다도 조용히 발소리를 죽이며 방을 나섰다. 얼마 후 그는 무언가 잔뜩 올라간 쟁반과 함께 돌아왔다.
따뜻한 국물이 있는 밥이나 면 종류, 혹은 물기가 많은 과일. 강희찬은 이선이 집에 오는 날이면 신경을 써서 아침 식사가 될 만한 음식을 골랐다. 아침을 먹지 않는다고, 먹어도 전날 먹다 남긴 빵 정도 먹고 출근한다는 말은 강희찬에겐 충격이나 다름없었다.
애새끼들이 득실대는 지옥도로 들어가는데, 밥을 먹지 않는다니. 그러고 보니 그놈의 학교는 직원을 8시에 출근시키면서 왜 아침밥은 주지 않는단 말인가. 세금은 왕창 뜯어가서 어디에다 그렇게 쓰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플레인 요구르트와 딸기, 블루베리, 복숭아, 그리고 꿀. 요구르트의 크기가 범상치 않은 것을 제외하면 아침에 가볍게 목으로 넘어가기엔 더없이 좋은 조합이었다.
강희찬은 쟁반을 제 쪽에 있는 협탁에 조심히 두었다. 그리고 최소한으로 이불을 걷어 커다란 몸을 구겨 넣듯이 다시 침대에 들어갔다. 쌕쌕. 아무것도 모르고 자던 이선의 미간이 조금 구겨졌다. 아무래도 이불을 들치느라 들어온 찬 공기를 느낀 모양이었다.
“으음… 희찬 씨…….”
잔뜩 잠긴 목소리가 본능적으로 제 이름을 부른다. 눈도 다 못 뜬 것이 꼭 갓 태어난 동물이었다. 강희찬은 재빨리 이불 위로 팔을 둘러 이선을 안았다.
“응. 여기 있어요.”
오늘은 일찍 눈을 떴네. 원래는 쉬는 날이면 간신히 오전이라고 불릴 시각에 눈을 뜰 때도 있었다.
자는 얼굴도 물론 보고 싶지만, 그래도 깨는 모습을 보니 반가웠다. 오늘이 개교기념일이라는 핑계로 어제 새벽까지 함께 영화를 봤다. 당연히 늦잠을 잘 것으로 생각했다.
“희찬 씨, 오늘 무슨 요일……. 아, 학교!”
누워 있던 이선의 몸이 벌떡 올라왔다. 안에 용수철 따위가 붙어 있어서, 상자를 열면 팍 튀어나오는 이상한 장난감 같다. 방금까지 잠투정을 하던 사람답지 않은 기세에 강희찬은 잠시 놀랐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월요일. 오전 8시 30분.
과연. 공무원이란 대단한 존재구나. 선천적으로 공무원의 생체시계를 탑재한 사람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후천적인 것인지. 후자일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그렇다면 더욱 슬프지 않은가.
하지만 오늘은 보통 월요일이 아니었다. 강희찬은 벌떡 일어난 이선의 몸을 다시 조심히 눕혔다.
“더 자도 괜찮아요. 오늘 개교기념일이라며.”
“아…….”
개교기념일. 단어의 뜻이 단번에 머리에 들어가지 않은 듯, 이선은 멍하니 강희찬이 이끄는 대로 베개에 머리를 대었다.
“아, 맞다.”
멍하니 중얼거리고 나서 3초 후. 뒤늦게 쉬는 날이라 기분이 좋았는지 이선은 옆으로 몸을 뱅글 돌린다. 강희찬의 허리를 껴안았다.
“오늘 개교기념일이었지.”
“개교기념일이라고 하루 더 우리 집에 있다가 간다고 했잖아요. 집에 혼자 있었으면 출근할 뻔했네.”
“…안 그래요.”
그렇지. 설마 출근까지 했을까. 그냥 아침에 허둥거리며 다 챙기고 나갈 때 알았겠지.
현관 앞에서 멍하니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보고 싶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모처럼 휴일이 겹치는 날이었다. 초등학교의 개교기념일을 기다릴 줄이야.
“희찬 씨. 그럼, 오늘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거예요?”
이선이 눈을 반짝이며 물어왔다. 다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묻는 것은 연인들에게만 허락되는 어리광이었다.
강희찬은 부드러운 잠옷을 걸친 이선의 몸을 껴안았다. 이선에게는 조금 큰 이 잠옷의 출처는 사실 강영찬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녀석이 첫 외출을 했던 날. 방을 양보해 줘서 고맙다는 명목으로 준 선물이었다.
자취를 한 형에게 주기에 적합한가?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백화점에서 비싸게 사 왔다는 잠옷은 안타깝게도 강희찬의 사이즈가 아니었다.
게다가 잠옷이라니.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입어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맞는 사이즈를 찾기가 참 힘들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남성용, 여성용으로 커플 잠옷을 선물하려고 했단다. 돈이 없어서 달랑 남자용만 사 왔다는 말에 강희찬은 당장 저 새끼의 학교에 전화하고 싶었다. 제발 주말이라고 애새끼들 밖에 내보내지 말고 기숙사에 좀 묶어두라고.
커플 잠옷도 아니고, 사이즈도 안 맞는 걸 산 주제에 강영찬은 능글맞게 말했었지.
‘괜찮아. 형은 어차피 누나가 안 입는 게 더 좋은 거잖아.’
녀석은 한층 더 징그러워진 채였다.
어쨌든 포장도 뜯지 않은 채로 박아두었던 잠옷은 이제 이선의 차지가 되었다. 강희찬의 몸에는 간신히 들어가는 격이지만, 이선에게는 품도 길이도 넉넉했다. 처음 잠옷을 주었을 때, 소매를 접어주던 강희찬의 손길에 이선의 입술이 불퉁하게 튀어나왔다. 물론 바짓단을 접을 때는 더 했고.
하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몇 번 지나니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이후로 이선은 강희찬의 집에 오면 먼저 잠옷을 찾아서 갈아입을 정도에 이르렀다.
접은 소맷단 아래로 드러난 하얀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길쭉길쭉 뻗었지만 만져 보면 제 손에 쏙 들어올 만큼 작게 느껴졌다. 그곳엔 직접 끼워주었던 반지도 제대로 자리하고 있었다.
“주말에는 희찬 씨만 출근하고, 저는 집에 있어서 미안했어요.”
이선의 눈엔 옅게 물기가 어렸다.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정 선생은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이잖아요.”
서로를 마주 본 채 모로 누운 연인들의 쓸모없는 대화다. 송재혁, 아니, 굳이 그가 아니라 지나가는 아무나 보더라도 ‘저 새끼들은 대체 뭐 하는 거야?’라며 인상을 찌푸릴 모습이었다. 하지만 눈을 뜨고 서로를 처음 본 연인들에게는 닿지 않을 목소리였다.
“희찬 씨. 근데 저거 뭐예요?”
누워 있던 이선이 고개를 힘겹게 들며 커다란 몸 너머를 보려 했다. 강희찬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이선 역시 따라서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나란히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았다. 강희찬은 팔을 뻗어 협탁 위의 쟁반을 가져왔다.
“이거 언제 다 준비했어요. 고생스럽게. ”
“고생은 무슨. 과일이야 씻기만 하면 그만이고 이건 냉장고에서 꺼낸 건데.”
“그래도……. 딸기도 다 잘라두시고. 희찬 씨도 쉬는 날인데 좀 더 자야죠.”
제가 먹을 때야 딸기 따위 꼭지도 입으로 끊어서 먹지만, 이선이 먹을 거다. 꼭지를 자른 것도 모자라 정성 가득, 먹기 좋은 슬라이스로 잘라두기까지 했다. 알록달록. 예쁘기만 한 과일 한 접시에 이선은 기쁘면서도 미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강희찬은 개의치 않고, 요구르트가 잔뜩 묻은 딸기 하나를 이선의 입 앞에 대령했다. 이선은 당연하게도 입을 열어 그것을 받아먹었다.
“이거 먹고 아침 뭐 먹을까요?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이거 아침 아니에요?”
“과일이 왜 아침밥이에요. 먹고 싶은 거 생각해 놔요. 만들어줄 테니까. 어제 김치찌개 만드느라 고생했잖아요.”
강희찬이 주말에 출근할 때면, 이선은 대단히 미안한 얼굴을 했다. 집주인은 일하러 가는데 혼자 냉방이 빵빵한 남의 집에서 뒹굴거리며 논다는 죄책감이 묻어났다.
하지만 강희찬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토끼 같은 이선이 잘 다녀오라고 배웅을 해준다. 게다가 어디 다른 데 도망가지 않고 제집에서 얌전히 기다려준다니. 그런 상상을 하면 물론 훈련이고 시합이고 제치고 집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그건 이선이 미안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니다.
야구도 잘 모르는 주제에, 이선은 꼭 주말 경기를 챙겨 봤다. 자꾸만 바뀌는 중계 방송사의 채널이 헷갈려서 고생이 많은 듯하지만, 그래도 이선은 열심히 경기를 봤다. 그리고 경기가 끝날 때쯤이면 차를 몰고 구장으로 강희찬을 데리러 오기도 했다. 그런 날엔 함께 외식하고 이선을 집에 데려다주었다. 가끔 이선은 홀로 주변 마트에서 재료를 사서 음식을 차려둘 때도 있었다. 어제가 바로 그랬다.
어제의 기억을 떠올린 이선은 입에 과일을 문 채로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그거, 맛없었잖아요.”
마트에서 사 온 고기와 양파. 그리고 직접 담그기로 유명한 어머니 식당의 김치. 어제 희생자들의 리스트였다.
“왜. 맛있었는데.”
“희찬 씨……. 제가 만드는 거 먹기 힘들죠. 희찬 씨, 요리 잘하잖아요.”
“맛있었다니까. 왜 사람 말을 안 믿어요. 김치찌개가 어떻게 맛이 없어요. 어제 내가 다 먹었잖아.”
물론, 맛이 없진 않았다. 맛이 없다는 것은 말 그대로 아무런 맛이 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어제 이선이 만들었던 김치찌개는 말 그대로 맛이 없지 않았다. 김치의 맛, 마늘의 맛. 재료 본연의 맛이 살아 있는 개성이 넘치는 맛이었다. 게다가 먹다 보니 나름의 매력도 있었다. 물론 어떻게 어머니가 담근 김치로 이런 맛이 탄생할 수 있는지는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그런가?’
이선은 이제 아리송했다. 어제 자신의 입에 들어갔던 김치찌개는 분명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함께 먹은 강희찬이 저렇게 이야기하니, 또 솔깃했다.
그러고 보니 나쁘진 않았다. 돈을 받고 팔지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식당에서 파는 음식은 조미료를 많이 넣은 것이 아닌가. 소금, 간장, 다진 마늘에 고춧가루. 이 정도의 조미료만으로 이런 맛을 냈다면 어느 정도 선방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세상을 밝히는 하얀 거짓말 덕분에 잃었던 자신감은 금세 충전되었다. 강희찬만이 감지할 수 있는 완충의 기운이었다. 다행이다.
“쌀국수 먹을래요? 그거 잘 먹었잖아요.”
“음. 그럼 나가서 먹어요?”
“아니. 인터넷 보니까 재료만 있으면 집에서 만들 만하겠더라고. 만들어줄게요. 고기 많이 넣어서.”
얼마 전, 함께 갔던 쌀국수 가게에서 이선이 잘 먹었던 것을 기억했다.
입맛이 보수적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잘 먹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면이라면 다 좋은 것인가. 어떤 의미에선 한결같은 이선의 취향에 대한 데이터 하나를 더 추가했다.
그 이후로 강희찬의 유튜브 검색 기록의 팔 할을 차지하는 단어가 ‘쌀국수’였다. 몇 개의 영상을 보고 난 후, 육수와 소스만 있으면 적당히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 육수야 어머니에게 부탁해서 받아왔으니 남은 건 재료만 사면 그만이다.
뭐 제대로 먹은 것도 없는 것 같던데 금방 비워지던 가게의 쌀국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넣을 수 있는 재료는 모두 다 넣어서 푸짐한 한 그릇을 만들어야 한다.
주말 경기를 지방에서 하지 않을 때면 이선을 집에 데려와서 부지런히 먹였다. 연비가 그렇게 나쁘진 않은지 주말 내내 잘 먹이고 나면 월요일엔 제법 살이 붙은 느낌이 들었다. 웃을 때면 뺨이 조금 더 둥글고 높게 올라왔다. 물론, 그건 월요일 퇴근을 하고 나면 금세 푹 꺼진다. 하여간 애새끼들은 악의 축이었다.
“희찬 씨도 먹어요. 아.”
모교이기도 한 이선의 학교에 불만이 샘솟던 차였다. 이선은 아까부터 제 입에만 들어오고 있는 포크를 강희찬의 손에서 빼앗았다. 가장 큰 조각의 딸기를 쿡 찌르고 강희찬에게 내밀었다.
“아.”
“헤.”
뭐가 재밌는 건지. 꼭 자신이 내미는 것을 받아먹으면 저런 뿌듯한 표정을 했다. 가끔 사육사에게 먹이를 받아먹는 동물원 짐승이 된 기분이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이선이 기쁘기만 하면 됐다. 먹이를 받아먹는 게 아니라, 창살 달린 우리에 들어가서 살라고 해도 기꺼이 해줄 의향이 있었다.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김치찌개에 대한 기억은 회복했는지, 이선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강희찬을 올려다봤다.
“저도 도울게요. 같이 만들어요, 우리.”
“…네.”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이선을 내려다보던 강희찬이 한 박자 늦게 답했다. 찰나 동안 망설임의 반작용인지, 끄덕거림은 더욱 거세졌다.
‘…뭘 시킬 수 있지?’
최고의 한 그릇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향하는 길에 의도치 않은 방해물이 생겼다. 하지만 대수랴. 언제나 이선은 요리를 할 때면, 저의 어깨너머로 기웃거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알았어요. 자, 이거 한 입만 더 먹어요.”
완연한 여름이었다. 한낮 못지않은 햇살이 창으로 넘어왔지만, 연인들은 여전히 침대를 벗어날 기색이 없었다. 기적 같은 월요일의 완벽한 시작이었다.
* * *
완벽한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
인터폰 화면을 보는 강희찬의 표정은 북풍한설보다도 차가웠다. 도무지 아홉 살 아래의 동생을 보는 표정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형! 문 열어줘, 얼른! 빨리! 나 오줌 마려워!
“길에다 싸.”
―안 돼! 걸리면 벌금 물잖아!
“돈 줄 테니까 길에다 싸.”
결론이 났군. 이제 계좌로 노상 방뇨 벌금만 보내주면 그만이다. 녀석은 미성년자니 훈방될 가능성이 크지만, 어쨌든.
―안 돼! 엄마가 형이 부탁했던 거 가져가라고 했단 말이야. 빨리 열어줘!
…이런 씨발. 멀쩡한 퀵 서비스 놔두고 왜 저런 놈에게 심부름을 시킨단 말인가.
아파지는 골을 누르던 강희찬은 결국 공동 현관의 잠금을 해제했다. 뒤늦게 아차 싶어 뒤를 돌았을 때, 방문에 기대듯 서 있던 잠옷 차림의 이선은 급하게 문을 닫고 안으로 사라졌다.
“선아, 잠깐만……!”
“형! 문 열어줘!”
이선을 따라 들어가려던 강희찬은 현관문을 매섭게 노려봤다.
새끼가 초인종은 폼으로 달린 줄 아는지. 과학고를 들어가는 데 평생 쓸 머리를 다 써버린 탓에 저렇게 멍청해진 건가?
그러고 보니 분명 그 학교는 학생 전원이 기숙사에서 지내야 하고, 주말에만 외출 겸 외박을 허락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이 새끼는 왜 월요일에 기어 나왔지? 학교 잘렸나?
강희찬은 살벌한 기세로 현관문을 직접 열었다. 벌컥 열리는 기세에 놀랄 법도 했지만, 동생은 예측했다는 듯 멀찍이 서 있었다.
“이거 빨리 받아! 형, 엄마한테 토마토 먹고 싶다고 했다며? 엄마가 그거 손 많이 간다고 가게에서도 잘 안 하는 건데, 형이 부탁해서 하루 종일 만들었다잖아. 아, 화장실, 화장실!”
“…….”
강희찬은 말없이 화장실 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넘겨받은 밀폐 용기 안에는 매실청에 절인 방울토마토들이 환 공포증을 유발할 기세로 가득 차 있었다. 동생의 터져가는 방광은 무시했던 야멸찬 형이 강영찬을 집에 들인 이유였다.
매서운 기세로 화장실 문을 쾅 닫고 들어갔던 녀석은 얼마 후, 들어갈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로 나왔다.
“아, 시원해.”
“너 왜 학교 안 갔어? 주말도 아닌데.”
화장실 문 앞에서 지옥의 사자처럼 지키고 서 있던 강희찬이 물었다.
“우리 학교 방학했는데?”
“뭔 놈의 고등학교 방학이 이렇게 빨라.”
“원래 그렇대. 대신 겨울방학 늦게 한다던데.”
“그럼 계속 집에 있냐?”
“아니야. 그냥 오늘만 집에서 자고 다시 학교 갈 거야. 애들이랑 공부하기로 했어.”
방학인데 기숙사에 남아 공부라니.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으면서도 나름의 고충이 있는 모양이다.
조금은 마음이 누그러진 형은 ‘오줌 다 쌌으면 당장 꺼져’라는 말을 삼켰다. 다소 순화한 표현을 써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이제 꺼져.”
“아, 왜. 집 구경 좀 시켜주라. 나는 와본 적 없잖아.”
“좋게 말할 때 꺼져.”
언제부터 ‘꺼져’가 좋게 말하는 범주에 속했는지. 한국인의 평균적인 언어 체계에서 다소 벗어난 형의 화법이지만, 동생은 개의치 않았다. 대신 이곳에 온 본 목적을 밝히기로 했다.
“엄마가 형 여자 숨겨놨나 보고 오래. 그러지 않고서야 반년이 넘도록 집에 안 올 리가 없다고. 잘 보고 오랬는데.”
“네가 보면 뭐 아냐?”
강희찬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아무리 인재가 없어도 그렇지. 이제 갓 고등학교 입학한 놈에게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게다가 강영찬은 강희찬의 모교인 휘정중을 나왔다. 그 말인즉슨, 남중을 나왔고 지금 입학한 과학고 역시 구더기 같은 남초 성비를 자랑하기로 유명했다.
“엄마가 말해줬는데. 화장실 가서 변기 커버가 내려와 있으면 백퍼 여자 있는 거라고.”
“그래서. 내려와 있든?”
“아니. 근데, 형. 집에 누구 있어?”
멍청히 고개를 젓던 녀석이 갑자기 물었다. 강희찬은 흠칫 놀랐다. 설마 기척이라도 들리는 건가. 하지만 방에 틀어박힌 이선은 마치 없는 사람처럼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사람이 있는 걸 알았는지…….
“현관에 신발 있잖아. 형 사이즈는 아닌 것 같은데. 여자 거 아니야?”
새끼가 쓸데없는 부분에서 날카롭다. 스쳐 지나간 신발의 사이즈마저 알아채다니. 안경잡이는 못 본 사이에 더 징그러워지고 꺼림칙해졌다.
“있지? 그치? 누나 인사시켜 주면 안 돼? 형 여자친구 있었다며? 엄마가 인터넷에서 봤대. 말도 안 해줬다고 나한테 뭐라고 했단 말이야.”
“누나 아니야.”
‘…형이야.’
자라나는 10대 청소년에게 다소의 정신적 충격이 있을 말은 삼켰다. 그 탓인지 녀석은 기세를 꺾지 않았다.
기숙사에 들어간 후, 물리적 거리가 생겨서 그런지, 대가리가 컸다고 이러는 건지. 강영찬은 바닥에 엎드릴 기세로 저의 눈치를 보던 예전의 강영찬이 아니었다.
“거짓말하지 마. 내가 신발 봤는데.”
“안경은 뭐 하러 끼는데? 누가 봐도 남자 신발이잖아.”
호주에서 심혈을 기울여 골랐던 컬렉션 중 하나였다. 이선에게 꼭 어울릴 신발이었지만, 여자 것이라고 볼 디자인도 아니었다. 새끼가 눈이 어떻게 된 게 분명하다.
강희찬은 방금까지 깜짝 놀랐던 동생의 시력과 관찰력에 대한 평가를 손바닥 뒤집듯 바꾸었다. 그때였다.
“어?”
안경 너머로 둥그레진 강영찬의 눈이 저의 뒤를 향했다. 공부를 잘하게 생겼다는 것 말고는 얼굴에 눈만 댕그란 것이 어릴 적부터의 특징이었다. 눈동자가 향한 곳을 찾는 것은 너무도 쉬웠다.
강희찬은 본능적으로 동생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거실을 등지고 있었다. 지금 이선이 있을 침실 문 쪽이었다.
“저기…….”
“…….”
고개부터 빼꼼 내민 이선이 완전히 문밖으로 나왔을 때. 강희찬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위아래 세트인 남색 잠옷을 입고 있던 사람이 어느새 제 옷을 갖춰 입은 채였다. 급했던 모양인지 옷매무새는 다소 흐트러졌고, 호흡이 약간 거칠었다. 물론, 언제나 이선을 주의 깊게 살피는 강희찬만이 알 수 있는 변화였다.
“아, 안녕하세요.”
“으응. 안녕? 찬이……. 아니, 영찬이야?”
“네. 형 친구세요?”
“어? 아, 응. 되게 잘생겼네.”
“감사합니다.”
강영찬은 의외로 당황하고 있었다. 집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여자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까지는 예상했다. 하지만 저런 인상의 남자가 방에서 나올 것은 예상외였다.
언젠가 야구장에서 봤던 형의 선배나 동료들의 풍채와는 사뭇 달랐다. 대충 친구냐고 묻긴 했지만, 사실 남자는 형보다 어려 보였다. 형의 친구라고는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농구 선수나 다른 운동 종목의 선수를 식당에서 봤던 게 전부였던 강영찬은 뒤늦게 고개를 숙이며 제대로 인사했다.
“너 이제 꺼져.”
평소에도 절대 살가운 형은 아니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예민하다. 무언가 초조한 기색이 엿보이는 드문 모습이었다. 당장이라도 이 집을 나가야 한다. 본능이 얘기하고 있었지만, 아직 강영찬에겐 중요한 볼일이 있었다.
“형. 나 돈 좀 주라.”
“뭐? 네가 돈이 왜 필요해?”
“애들이랑 만나서 놀려고.”
“공부한다며. 학교나 기어들어 가. 왜 나왔어.”
“고등학교 애들 아니야. 중학교 친구들이야. 지금 밑에서 기다리고 있어. 형 보겠다고 같이 올라오려는 거 내가 절대 안 된다고 막고 혼자 올라왔는데…….”
“카드 써. 엄마 거 가지고 있잖아.”
“돈으로 필요해. 나 지금 천 원도 없어.”
“아, 그럼 뽑아.”
대화가 길어질수록 강희찬의 목소리는 격앙되었다.
형제가 없는 이선은 충격적인 날것의 대화를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고등학생인 동생과 사회인, 그것도 프로야구 선수인 형의 대화라니.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형제에 대한 환상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었다.
“엄마가 수수료 아깝다고 급한 거 아니면 현금서비스는 쓰지 말랬어.”
“에이, 씨발. 진짜……. 있어봐.”
인상을 잔뜩 찌푸린 그는 결국 이선이 기대선 방문을 지나 지갑을 들고 나왔다.
평소 카드만 쓰는 사람이라도 비상용인지 오만 원권 몇 장이 착실히 있었다. 핸드폰 케이스에 대충 접은 만 원짜리 두어 장을 들고 다니는 자신과는 확연한 차이가 보여서 이선은 괜히 주눅이 들었다. 어른은 이런 상황에서 현금이 필요할 수 있구나. 외동아들이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뭐 하느라 돈이 필요해. 요새 카드 안 되는 데가 어딨다고.”
“한 명이 카드로 낼 테니까 돈으로 달라고 해서. 햄버거 먹으려고.”
“…….”
어린 새끼가 뭘 한다고 벌써 카드깡을…….
한심한 시선이 가감 없이 동그란 안경을 걸친 얼굴에 쏟아졌다. 그러면서도 돈을 꺼내는 손을 멈추지는 않았다. 결국, 오만 원권 다섯 장이 지갑에서 나와 소년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선이 보기엔 다소 과하지 않나 싶은 액수였지만, 소년은 거절 한번 없이 지폐를 받고는 우당탕 집을 나갔다.
혹시라도 형이 다시 뺏을까 봐 저러는 걸까? 하지만 자신이 아는 강희찬은 그런 야박한 사람이 아닐 텐데.
“옷 갈아입었어요?”
한심하게 현관문을 바라보던 강희찬은 어느새 이선에게 다가왔다. 급하게 갈아입은 반팔 티셔츠의 매무새를 잡아주었다.
“으응…….”
이선은 멍하니 대답했다. 마르고, 눈이 큰 소년은 폭풍처럼 왔다가 사라졌다. 아직도 그 여파가 남아 있었다.
“뭐 하러 갈아입었어요. 그냥 있어도 되는데.”
“…동생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어떡해요?”
잔뜩 흔들리는 눈망울이 강희찬을 향했다.
허겁지겁 잠옷을 갈아입은 이유는 짐작하던 것이 맞았다. 혹시라도 강영찬이 방으로 들이닥쳤을 때, 침실에 잠옷을 입은 남자가 있다면. 거기에서부터 꼬리를 문 생각 탓이겠지.
“…….”
한숨을 내쉬었다. 안절부절못했을 이선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형의 친구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던 모습도. 불안에 떠는 지금까지. 무엇 하나 잘못한 것이 없는데. 있어야 할 곳에 당연히 있던 것뿐인데.
혼자서 두려움에 떨며 옷을 갈아입었을 이선을 상상하자 가슴이 아릿했다. 차마 이선에게 따지지도 못할 만큼 속상하고 미안했다.
팔을 뻗어 이선의 몸을 당겨 안았다. 어딘가 나사가 빠진 것처럼 멍한 표정의 이선은 별다른 반항 없이 순순히 품 안에 들어왔다.
“생각했으면 뭐 어쩌게요. 말하면 되지.”
“희찬 씨…….”
당장이라도 돌아가겠다고 할 것만 같다. 불안하다고. 이제 제집에 올 때마다 도둑고양이처럼 소리도 내지 않고 옷을 갈아입었던 좋지 못한 기억이 떠오를 거다. 다시는 오지 않겠다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좋은 추억만 꼭꼭 눌러 담아주고 싶었다. 이선이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연인 관계를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진 않다. 조금 더 멀리 본다면, 언젠가 가족에게 얘기하고 연을 끊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어쨌든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강영찬으로 인해, 이선이 좋지 않은 과거의 일까지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아무런 말 없이 규칙적으로 내뱉는 이선의 숨을 느끼며 강희찬은 초조했다.
“선아. 아무튼, 다시 옷 갈아입자.”
조심히 몸을 뗀 강희찬이 말했다. 반팔 티셔츠의 어깨를 잡고 슬며시 흔들어도 여전히 이선은 무언가 생각하듯 멍했다.
역시 좋지 않은 생각을 하는 게 분명했다. 옷을 안 보이는 곳에 꼭꼭 숨겨놔야 했는데. 서로의 옷을 함께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나란히 서서 빨래를 널고, 어설프게 빨래를 개는 이선의 모습이 웃겨서 방심하고 말았다. 드레스룸 서랍에 얌전히 들어간 사이즈가 다른 옷이 귀여워서 그냥 두었던 게 패착이었다.
강희찬은 이제 이선의 티셔츠 아랫단을 잡았다. 일단 옷을 벗기자. 벗기고 잠옷으로 갈아입히고 나면, 함부로 도망가지는 못하리라.
결심을 마쳤을 때였다.
“…희찬 씨.”
멍하니 허공으로 던지던 시선이 반짝 위로 올라왔다. 강희찬은 깜짝 놀랐다. 옷을 벗겨서 눌러 앉히겠다는 속내가 묻어나는 손놀림도 딱 멈추었다.
“있잖아요…….”
집에 갈래요. 그렇게 말하면 어쩌지. 마음이 다친 공벌레가 되어 꼭꼭 자신만의 공간으로 숨어 들어버리면, 자신은 바깥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일단 혼자 보내는 건 막아야 한다. 여기가 싫다면 호텔에라도 데려가야지. 근데 내일 퇴근 후엔 어쩌지? 공무원의 퇴근 시간엔 자신은 한창 경기를 준비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중간에 몰래 잠깐 나오면…….
“우리 집 갈까요?”
설마 그 시간에 주차장에서 선수를 기다리고 있을 미친 인간도 없을 테니까, 아예 불가능한 얘기는 아닐 것 같은데……. 아, 잠깐, 뭐라고?
“희찬 씨?”
하늘하늘. 가는 손가락이 눈앞에서 흔들렸다. 이선이 제 손바닥을 눈앞에서 흔들고 있었다. 뒤늦게 정신 차린 강희찬은 조금 전 제 귀를 스쳐 간 말을 더듬었다.
“아까, 뭐라고요?”
“그… 우리 집에는 갑자기 찾아올 사람도 없고……. 아, 희찬 씨 내일 출근 때문에 불편하면 괜찮…….”
“가요. 당장 가요.”
위협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이선이 흠칫했다. 잘못 말했나. 후회가 얼핏 비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강희찬의 머리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전화위복. 그가 아는 몇 안 되는 사자성어의 의미를 통감한 순간이었다.
* * *
“…….”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누르려던 손을 멈칫하더니, 이선이 뒤를 돌았다. 경계심이 가득한 두 눈이 강희찬을 올려다보았다. 대놓고 비밀번호를 훔쳐보고 있던 강희찬은 당당했다.
“희찬 씨. 좁다고 웃으면 안 돼요.”
잔뜩 기가 죽은 이유가 그거였나.
강희찬으로선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집이 좁아봤자 두 사람이 들어가지 못할 크기도 아닐 텐데. 아니, 오히려 두 사람이 겨우 들어갈 크기면 더 좋은 게 아닌가? 꼭 붙어 있을 테니.
하지만 이번에도 강희찬은 검은 마음을 능숙하게 숨겼다.
“알았으니까 빨리 열어봐요. 집에 누구 숨겨놨어요? 왜 이렇게 못 열어요.”
“…들어오세요.”
에라 모르겠다. 몇 번이나 망설이던 이선은 결국 지고 말았다.
문을 열고 이선이 먼저 현관에 들어서서 신발을 벗었다. 강희찬이 사다 주었던 운동화 몇 켤레와 슬리퍼 하나가 나와 있는 단출한 모습이었다. 차마 신지도 못한 다른 신발들은 붙박이 신발장에서 얌전히 자고 있었다.
좀 지저분해 보이나? 다 신발장에 넣고 나올 걸 그랬나? 오늘따라 신경 쓰였다. 이선은 발로 슥슥 신발을 정리하며 강희찬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
뭐라고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으련만. 강희찬은 말없이 한참이나 두리번댔다. 연식이 오래된 원룸은 화장실까지 합쳐도 그의 침실보다 작지 않으면 다행인 수준이다. 대체 뭐 볼 게 있다고.
민망해진 이선은 쭈뼛거리며 냉장고를 향했다.
“집, 안 무너져요.”
“집 무너질까 봐 보는 거 아닌데요.”
말 그대로였다. 이선은 퍽 민망한 모양이지만, 강희찬은 이 공간이 참으로 신기했다.
이선의 말대로 좁긴 했다. 열 평은 당연히 안 될 원룸은 원하지 않아도 한눈에 모든 것이 들어왔다. 창 옆의 침대와 그 아래의 원형 좌식 테이블. 겨울용으로 추정되는 베이지색 러그가 여름까지 깔린 모습까지. 혼자 자취하는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나같이 귀엽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편한 데 앉으세요.”
왠지 모르게 어색하게 구는 이선이 자리를 권하며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마저도 귀여운 크기다. 초등학생 키가 될까 말까 한 높이였다.
“희찬 씨. 뭐 마실래요? 물이랑 포도 주스뿐이긴 한데…….”
“포도 주스 언제 열었어요?”
“…….”
“주스는 그냥 버려요. 난 물이면 되니까 빨리 와요.”
“…냉장고에 잘 놨는데.”
불만스러운 말을 중얼거린 이선이 작은 생수병 하나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혼자 사는 남자답게도, 생수 정도는 컵 없이 마시던 게 버릇이 되었는지 생수병을 달랑달랑 들고 강희찬의 곁으로 다가왔다. 뒤늦게 아차 싶어서 컵을 가져오려고 했지만, 강희찬은 이선을 침대 옆에 눌러 앉혔다.
“됐어요. 그냥 마셔도 돼요.”
“그래도…….”
“왜 도망가려고 해요? 먼저 오라고 유혹한 게 누군데.”
“유……! 저, 그러지 않았어요! 그냥… 그냥…….”
“알았어요. 무슨 말을 못 하겠네.”
발끈하는 이선을 끌어 품에 넣었다. 대담하게 먼저 집으로 끌어들일 땐 언제고 이렇게 나온단 말인가.
보들거리는 머리카락에 얼굴을 문질렀다. 방 안을 가득 채우던 이선의 냄새가 더욱 확실히 코끝에 스몄다.
“여기, 언제부터 살았어요?”
강희찬이 가만히 물었다. 철옹성보다도 삼엄하게 느껴지던 이선의 공간에 들어왔기 때문일까. 자신이 모르던 시절의 이선의 모든 것이 알고 싶었다.
“제대하고 발령 났을 때 집 알아봤어요.”
“그때부터 쭉 살았어요?”
“네. 주인아저씨가 좋은 분이세요. 첫해엔 월세도 좀 싸게 받아주셨고.”
“그래요?”
“여기가 좀 오래되고 보안도 안 좋아서, 아저씨가 여자 세입자는 안 받고 싶어 하셨거든요. 담배 안 피우고 동물 안 키운다니까 바로 월세 깎아주셨어요.”
보안이 좋지 않은 원룸이면 보안장치를 달아야지. 도둑놈이 작정하고 들어오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강희찬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 원룸의 건물주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야박했다.
어디를 봐도 이선의 흔적이 가득한 작고 따뜻한 공간은 참 마음에 들지만, 이 원룸의 보안 수준은 형편없었다. 강희찬은 뾰족해지는 마음을 숨기기 위해 더욱 이선의 몸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희찬 씨. 집 재미없죠? 티브이도 없고…….”
이선은 이 집에 그를 데려온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제집이라면 갑자기 찾아올 사람도 없기에 호기롭게 데려왔지만, 참으로 재미없는 공간이었다. 무슨 자신감으로 그를 데려온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니 어이가 없을 정도로 막무가내였다.
자신감이 부쩍 사라진 이선은 꾸물꾸물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밖에 산책할까요? 저번에 공원 갈까요? 아니면 여기 옆 아파트에 공원이 잘 돼서…….”
“완전 재밌는데요. 내가 여길 얼마나 어렵게 들어왔는데, 왜 나가요.”
나간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강희찬은 결의에 찬 눈을 했다.
처음 연인이 되었던 날. 그때 들어갈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이선이 매일같이 먹고, 자고, 벗는 공간이다. 안 궁금한 게 이상하다.
소중하게 보듬어줄 생각이긴 했지만, 그래도 집 구경은 하고 싶었다. 기왕이면 침대에 얼굴을 박고 싶었고. 그건 당연한 본능이었다.
“왜 들어오자마자 쫓아내려고 그래요.”
“쫓아내는 거 아니라……. 희찬 씨 심심할까 봐 그렇죠.”
“재밌다니까. 밥은 여기서 먹어요?”
“네. 일도 여기서 하고.”
침대를 등받이로 쓰기에 딱 좋은 지점. 그곳에 물건 하나 없는 원형 좌식 테이블이 있었다. 이곳에 앉아 멍하니 밥도 먹고 꼬물거리며 애새끼랑 수업시간에 만들 미술 작품을 혼자 만들며 연습하는 모습. 그런 것들이 눈에 그려졌다.
“그렇구나.”
멍한 중얼거림이 공기를 울렸다. 누군가 제 방에 함께 있는 것이 이상했다. 이선은 괜히 양발을 휘저어봤다. 미약한 바람이 일었지만, 방 안을 꽉 채우는 이의 존재감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좁죠?”
“원래 신혼 때는 집이든 침대든 좁은 게 좋댔어요.”
“신… 그게 무슨 소리예요.”
“왜? 비슷한 거잖아요, 우리.”
“…….”
갑작스럽게 흘러가는 대화에 이선은 말을 잃었다. 그리고 몇 초 있다가 부끄러움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대단한 사람이다. 강희찬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었다.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이미 다 봤을 집 안을 다시 한번 휘휘 둘러봤다. 들어왔을 때 한눈에 다 봤으면서 또 무엇이 볼 게 남았단 말인가.
강희찬은 앉아 있는 침대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같이 자려면 꼭 붙어서 자야겠네.”
“네? 희찬 씨, 자고 가게요?”
“왜. 안 돼요?”
반듯한 눈썹의 모양이 뒤틀렸다. 그 아래의 눈빛 역시 불만의 기색이 드러났다.
자고 갈 생각이 없었지만, 저런 반응이면 오기로라도 나가기가 싫어진다. 이선의 앞에서는 올곧고 바른 척을 하며 살고 있지만, 원래 강희찬의 본성이란 이랬다.
먼저 집에 끌어들여 놓고 자꾸 보내려 하는지. 진짜 숨겨둔 남자라도 있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 삐뚤어진 마음은 더욱 삐딱선을 탔다.
“불편하잖아요. 갈아입을 옷도 없고…….”
“아무거나 하나 빌려주면 되잖아요. 뭐가 문제예요.”
뭐가 문제야? 그런 얼굴인 강희찬의 반응에 이선은 말없이 그의 몸을 위아래로 봤다. 눈빛에 불신이 가득해진다. 시선을 의식한 강희찬 역시 저와 이선의 몸을 번갈아 쳐다봤다.
“안 맞을 텐데…….”
“옷이 들어가기만 하면 맞는 거지, 뭐. 아니면 그냥 벗고 있어도 돼요. 여름인데.”
“헉…….”
굉장히 진일보한 방식에 이선은 숨을 들이켰다.
아직도 이선은 강희찬의 집에 가면 그가 챙겨주는 잠옷을 꼭꼭 입는다. 날이 더워졌지만, 긴팔 잠옷 차림이었다. 바깥 온도는 크게 상관없었다. 그의 집은 언제나 냉방이 잘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이선은 혼자 사는 이 집에서도 훌렁 벗고 다닌 일이 손에 꼽았다.
“치, 침대도 작아요. 둘이서 못 자요.”
“잘 수 있어요.”
“희찬 씨가 너무 커서 안 돼요.”
“내가 왜요. 나 말랐잖아요.”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잠깐이지만 뇌 활동이 멈추었다는 것을 느꼈다. 뇌와 함께 온몸이 멈춘 이선을 강희찬은 한참이나 봤다.
한 대 맞은 듯한 이선에 비해, 강희찬은 태연했다. 당연했다. 본인에겐 지극히 맞는 말을 했으니, 그 어떤 감정의 동요가 있을 리가 없었다.
‘요새 너무 마른 거 아니냐? 살 좀 찌워라.’
만나는 코치마다 그런 말을 했다. 심지어 다른 팀 감독들까지 벌크업만 조금 더 되면 완벽할 거라는 말을 한다.
사람이란 게 같은 말을 계속 듣다 보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굉장히 마른 편이구나. 게다가 매일같이 눈에 보이는 게 지나치게 건장한 운동선수들이니 말 다 했다. 강희찬의 머릿속에선 자신은 마른 축이고, 이선은 불면 날아갈 민들레 홀씨였다.
“이리 와봐요.”
그는 시간이 멈추어버린 이선을 두고 먼저 침대 헤드에 기대듯 누웠다. 갑자기 몸을 움직이니 이선은 본능적인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토끼 눈이 끔뻑거리며 강희찬의 동태를 살폈다. 이미 그가 누운 것만으로도 침대가 작아 보였다. 매일같이 누웠던 침대가 저렇게까지 작았던가.
“작은데…….”
말을 하면서도 이선은 꾸물꾸물 강희찬의 옆으로 몸을 옮겼다. 그의 곁에 누워볼까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이거 봐요. 좁잖아요. 둘이서는 못 자요.”
“여기 오면 되지.”
“으앗……!”
순간 몸이 휙 들렸다. 놀란 이선은 어느새 누워 있는 강희찬의 몸 위로 올라온 채였다.
“이러면 잘 수 있겠죠?”
빈틈없이 완벽한 얼굴이 지나치게 가깝다. 이렇게 가까이 있어도 모공 하나 찾기 힘든 피부가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어린아이들을 자주 보는 이선이었지만, 그는 어쨌든 성인이 아니던가. 한창 햇볕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의 얼굴이라기에는 너무도 깨끗하고 흰 편이라 이선은 가끔 무서울 때가 있었다.
자신의 무게만큼 눌리며 서로의 몸이 밀착된다. 얼굴과는 다르게, 그의 몸은 부드러움이라고는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단단한 근육이 오롯이 몸 아래로 느껴진다. 그리고 허벅지 위로 스치는 다른 종류의 단단함까지.
“…윽…….”
이선은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의 단단한 열기를 의식했다는 티가 날 것만 같다. 도록도록. 눈동자를 어느 쪽에 두어야 할지 난감했다. 한참 딴청을 부리다 겨우 그와 마주했을 때. 습한 온기가 입술을 집어삼켰다.
“…….”
피하지 않았다. 원한다면 충분히 고개를 돌려 거부할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이선은 그러지 않았다. 입술을 내맡기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의 허락이었다.
“응…….”
입술이 힘있게 빨린다. 엎드린 탓에 금세 호흡이 가빠졌다. 틈을 놓치지 않는 혀가 잇새로 밀려들었다.
키가 큰 사람이었다. 언제나 그에게 짓눌리듯 입맞춤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새로운 자세는 새로운 감각으로 이어졌다.
불안하다. 불안에 떠는 소극적인 혀끝을 부드러운 살덩이가 달래듯 얽어왔다. 입술을 조금 더 열었다. 등에 머물던 강희찬의 손이 뒷머리를 감쌌다. 커다란 손이 뒷머리를 당기며 입술이 더 깊게 파고들었다. 이선은 몸을 떨었다. 조금만 뒤척여도 그의 단단한 중심이 하반신에 문질러졌다.
열기가 얼굴로 몰렸다. 자극에 더욱 반응하는 것이 옷 너머로도 느껴졌다. 이선의 중심 역시 속옷 안에서 움찔대며 쿠퍼액을 흘렸다. 젖은 속옷의 불편함이 감각을 일깨웠다.
감각과 본능뿐이다. 이선은 열기를 좇아 몸을 조금씩 움직였다. 그의 단단한 성기를 직접 피부로 느끼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흣……!”
서로의 중심이 맞물린다. 옷 너머로도 느낄 수 있는 뜨거움에 이선은 신음을 흘렸다. 뒷머리를 쓰다듬던 강희찬의 손이 허리를 지나 더 아래를 향했다. 커다란 손은 이선의 엉덩이를 강하게 틀어쥐었다. 그리고 이선의 몸을 직접 흔들며 제 몸에 문질렀다.
“흣……! 희, 희찬…….”
결국, 입술을 먼저 떼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그의 이름만을 불렀다. 덥다. 너무 뜨겁다. 오래되었지만 아직은 잘 돌아가는 에어컨이 고장이 났나 의심이 갈 정도였다. 아니면 머리가 고장이 났던가.
탐욕스러운 손길이 이선의 엉덩잇살을 마음껏 주물렀다. 힘이 빠졌다. 강희찬의 몸에 기대었다. 입술을 빼앗긴 강희찬은 대신 이선의 귀를 한입에 머금었다.
“아! 희, 희찬 씨!”
“어. 왜.”
열기에 잔뜩 잠긴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귓속을 울리는 목소리는 겨우 이성을 붙들고 있는 티가 났다. 이선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희찬 씨, 잠깐…….”
“아니야. 아니에요. 괜찮아.”
“흐으…. 읏!”
“괜찮아, 선아.”
더운 열기. 젖은 속옷의 갑갑함. 그 안에서 움찔거리는 성기. 두 사람에겐 익숙하지 않은 쾌감이었다.
몸을 섞은 적은 있었다. 문제는 그 이후로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성적 접촉은 처음이라는 점이었다.
입술을 맞댄 적은 수없이 많았다. 그것도 처음엔 부끄러워서, 중학생들처럼 정말 입만 맞대다 떨어지기도 했다. 사귀기도 전부터 몸부터 맞춘 연인은 모든 걸음이 힘들었다.
“…….”
마음대로 해버리고 싶다.
손바닥에 감기는 피부 아래의 나긋함을 느끼며, 강희찬은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희찬 씨, 잠깐만요. 제발…….”
겨우 정신을 차린 이선이 열기를 가라앉히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강희찬은 몸을 일으키려 하는 이선의 하반신을 옥죄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이선은 몸을 겨우 일으켰다. 혹시나 다시 붙잡힐까 봐. 이선은 재빨리 침대를 벗어났다.
‘좀 심했나…….’
대체 무엇이, 왜? 그런 의문이 들긴 했지만, 이선이 그렇게 느낀다면 그런 거다. 함부로 만진다고 생각했을까. 혹시 마음이라도 다친 걸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해진 사이, 이선은 싱크대 앞에 쪼그려 앉았다. 쪼그려 앉아 눈물이라도 훔칠 게 분명하다. 심장이 덜컥거렸다.
하지만 강희찬의 염려와는 다르게 이선은 싱크대 서랍 하나를 열고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양 그것을 손에 꼭 숨기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강희찬은 몸을 일으켰다. 잔뜩 일어선 좆이 움직일 때마다 불편하게 꺼덕거렸다. 이선은 애써 그곳에 눈을 두지 않은 채 조심스레 침대 위에 앉았다.
“이거…….”
양손으로 소중히 쥐고 있던 물건이 내밀어진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상자였다.
“…….”
무엇인지 알아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강희찬은 한동안 말을 잃고 멍하니 내민 손을 바라봤다. 그리고 몇 초 후.
“이게…….”
“…….”
“이게 왜……?”
콘돔이다. 작은 상자는 백 미터 밖에서 봐도 콘돔 상자였다.
이선이 콘돔을 들고 있다. 아니, 너무 노골적이다. 이선이 피임 도구를 들고 있었다. 이, 씨발. 더 이상하다.
강희찬은 뺨이 붉은 이선의 말간 얼굴과 그가 쥐고 있는 더럽고 추악한 물건을 몇 번이나 번갈아 봤다. 위아래가 상당히 이질적이다. 하지만 이질감과 더불어, 깨끗한 얼굴이 들고 있는 물건에 좆이 먼저 반응했다.
“희찬 씨, 우리… 그…….”
“…….”
“왜, 아무것도… 안 해요?”
“…….”
숙였던 고개를 든 이선과 눈이 마주쳤을 때. 아슬하게 유지하던 평정심마저 날아갔다.
겨우 손을 잡았던 날. 차 안에서 커피를 마시다 충동을 핑계 삼아 입을 맞추었던 날. 언제나 부끄러워하며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이선의 얼굴이 떠올랐다.
더 아껴줘야지. 더 조심해야지.
혹시나 이선의 마음을 다치게 할까 봐. 강희찬은 신중하고 또 신중했다. 평생 플라토닉 러브로 살겠다는 건 아니다. 물론 이선이 바란다면 당연히 따라야겠지만…….
“…….”
하지만 정반대의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강희찬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 뒤늦게나마 정신이 돌아온다. 가장 궁금한 것은 이 물건이 집에 들어온 경위였다. 그는 재빨리 이선의 손에서 콘돔을 빼앗았다. 이런 물건은 이선의 손에 있어선 안 된다.
“이거, 어디서 났어요?”
“이, 인터넷으로……. 판매자한테 물어보니까, 크, 큰 거라던데…….”
이번에도 이선은 민망한지 고개를 푹 숙였다. 숫된 반응이 귀여웠지만, 저질러놓은 짓은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판매자한테 물어봤다니. 그럼 이선이 직접 콘돔의 크기를 물어봤다는 말인가? 설마, 전화로? 시커먼 새끼와 통화를 하며 콘돔의 사이즈를 물어봤다고?
상상은 더욱 흉악하게 변해갔다.
“저번에 편의점에서 샀던 거는 작다고 하셨잖아요.”
노력은 참 가상하다만…….
“…….”
강희찬은 손 안의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이것도 작을 텐데요.”
“네? 그럴 리가……. 아니에요! 그거 큰 거예요.”
“내가 사봤으니까 알아요.”
귀퉁이에 작게 쓰인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슬림핏. 호구는 어떤 순간에도 호구다. 이딴 걸 큰 것이라며 판 쇼핑몰 주인의 얼굴이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런 걸 쓰고 싶었으면 진작 말하죠. 집에 사뒀는데. 젤이랑.”
“네?”
이선의 눈이 둥그레졌다. 저런 얼굴을 보니, 강희찬은 자신이 마치 둘도 없는 변태가 된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연인을 상대로 혼자 추잡한 상상의 아우토반을 달린 셈이 아닌가. 하지만 강희찬은 태연함을 가장했다.
“그, 그걸 왜 사셨어요?”
“정 선생도 샀잖아요.”
“그야……!”
…그렇지.
이선은 뒤늦게 자신의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았다. 강희찬이야 자신이 쓸 것을 샀다 치지만, 자신은 뭐란 말인가. 입을 맞춘 채 서로의 몸을 비빌 때보다도 확 열이 몰렸다. 대놓고 이상한 생각만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몸만 밝힌다고. 그에게 경멸 어린 시선을 받는다면…….
“저는… 그냥…….”
“…….”
“희찬 씨, 저 싫어하지 말아주세요.”
죄인처럼 수그러지는 고개에 강희찬은 어이가 없었다.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이선의 사고 흐름은 알 것 같으면서도 종잡을 수 없었다.
“내가 왜 싫어하는데요. 오히려 좋으면 좋았지.”
“…….”
점점 울상으로 변해가는 얼굴에 강희찬의 손이 올라붙었다.
“나랑 이거 쓰고 싶었어요?”
“몰라요.”
“말해줘요. 난 정 선생님이 좋아하는 건 다 알고 싶어요.”
가만히 뺨을 덧그리는 손길이 이선을 달랬다. 수치심이 조금 옅어졌다.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용기였다.
“우, 우리 이제 사귀니까…….”
“…….”
“희찬 씨가 싫은 거 아니면, 저는…….”
“안 싫어요. 아까도 말했잖아요.”
“…….”
“이거 오늘 써야겠네.”
커다란 손에 비하면 작은 콘돔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이선의 고개가 갸웃했다.
“이거… 못 쓰잖아요.”
“왜요?”
“아까 작다고 그러셨잖아요.”
슬쩍 튀어나온 입술이 손 위의 콘돔 상자를 가리켰다. 강희찬은 속을 감춘 채, 평온한 얼굴로 그것을 이선을 향해 내밀었다.
“써볼래요, 한번?”
* * *
“하……. 아, 희찬… 희찬 씨……. 흑!”
달뜬 신음 사이로 겨우 이름이 흘러나왔다. 동아줄을 잡기라도 하는 양, 간절히 부르는 말에 강희찬은 흘긋 시선을 옮겨 이선의 얼굴을 살폈다.
아직 벌건 대낮이었다. 커튼도 없는 창문에서 바로 쏟아지는 햇살이 하얀 몸 위로 떨어졌다. 나신이 된 하체에 비해 상반신엔 티셔츠가 걸쳐 있었다. 부끄럽다는 이선의 마지막 고집이었다. 비록 가슴 위까지 말려 올라가 의복의 기능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으응……! 아, 앗!”
콘돔을 끼고 있는 강희찬의 세 손가락이 구멍을 조금 더 파고들었다. 순간 하얀 허리가 움찔하며 온몸이 뒤채였다. 햇살을 받아 옅은 색이 더욱 눈에 들어오는 성기가 맥동하듯 움직이는 광경 역시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콘돔, 어때요?”
말과 동시에 강희찬은 욕심껏 손가락을 깊게 박았다. 손가락 대신 자리를 채우고 싶은 성기가 바지 안에서 갑갑하게 갇혀 있다. 따듯하고 조이는 내벽의 감각은 이미 알고 있다. 알고 있기에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이미 이선은 몇 번의 사정을 마친 채였다. 처음 사정을 할 땐 강희찬이 직접 손으로 좆을 잡아 싸는 것을 도왔다. 뒤와 앞이 동시에 자극받아서 결국 안 된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파정하고 말았다.
강희찬은 고집스레 손가락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사정 후 몸은 더 예민해졌다. 내벽의 깊은 곳. 이선이 가장 느끼는 부분을 안달 나게 건드렸다. 쾌감의 정점에 오를 즈음엔 손가락을 뒤로 물렸다. 몇 번 반복하며, 이선은 점점 주어지는 감각에만 매달렸다.
‘조금 더……. 조금만 더 확실히 찔러준다면…….’
눈앞이 자꾸 흐릿했다. 머릿속에 남은 생각은 오직 그것이었다. 느끼는 곳을 확실하게 찔러준다면……. 자극을 받는다면……. 애매한 쾌락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선은 스스로 허리를 조금씩 들썩였다. 빠듯하게 손가락이 들어찬 구멍에 힘을 주었다 풀었다. 그때마다 강희찬의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이선에게 쉬운 쾌감을 주지 않았다.
“아아……!”
그럴 필요가 어디 있는가. 지금도 질금거리면서 혼자 싸대기 바쁜데.
이제는 언제 사정을 하는지 따지는 것이 무의미했다. 이선은 티셔츠에 옭아매진 팔을 들어 올린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팔을 내리고 직접 만져서 쾌감을 얻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이미 본능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성기를 만져 얻을 수 있는 자극보다도 뒤를 통해 느껴지는 쾌감이 더 크리라는 것을.
“씨발, 나랑 섹스하고 싶었어요? 어?”
“흐으…….”
“언제부터? 어? 언제부터 그런 생각 했는데?”
두 개만으로도 구멍이 빠듯하게 벌어졌다. 내벽으로 그의 손가락이 또렷이 느껴졌다. 그의 손가락을 감싸는 얇은 막이 방해되었다. 단단한 맨 손가락을 확실하게 느끼고 싶었다.
마디가 굵어지는 부분이 내벽을 지나며 젖은 소리를 내었다. 콘돔의 윤활액이 내는 소리였지만, 마치 다른 소리처럼 들렸다. 민망한 소리가 견디기 힘들다. 이선은 귀를 막고 싶었지만, 티셔츠가 팔을 방해했다. 이선의 팔은 마치 결박이라도 당한 듯 티셔츠에 옭아 매인 채 머리 위로 들려 있었다. 꼼짝도 할 수 없는 구속은 더욱 정신을 자극했다.
“아, 너무… 너무……. 으응……!”
“너무, 뭐?”
“아, 응!”
정신을 차릴 수 없다. 모든 감각이 아래로 향한다. 이미 구멍 안은 녹아 있었다. 한참을 들어와 마치 제집처럼 드나드는 손가락의 모양에 맞춰진 것만 같았다. 이대로 녹아서, 그의 손가락에 엉겨 붙어버린다면……. 끝을 모르는 자극으로 인해 멍해진 이선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 거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눈치챈 것일까?
그는 이선에게 조금의 틈도 주지 않았다. 콘돔을 써보겠냐는 말로 꼬여내고, 끝까지는 하지 않는다는 말로 이선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이렇게 된 것이다.
그의 말은 정확했다. 정말 끝까지는 하지 않는다. 끝까지 하지 않는다기보다는, 그는 아예 시작도 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팔을 옭아매는 용도로만 티셔츠가 몸에 걸쳐 있을 뿐인 이선에 비해, 그는 상의만 벗었다. 그마저도 옷을 다 챙겨입은 그의 앞에서 혼자 벗은 것이 민망한 이선이 떼를 쓰자 하나 벗은 것에 불과했다.
“나랑 섹스하고 싶었어요?”
쏟아진 햇살이 잔뜩 올라온 근육에 부딪힌다. 압도될 것만 같은 모습에 넋을 놓은 이선을 향해 강희찬이 물었다.
“언제부터. 어? 언제부터 그런 생각 했어?”
“아… 하아……. 희찬 씨… 너무 깊어…….”
“콘돔이나 사고. 혼자, 씨발, 이걸로 뭐 했어요?”
“아무것도… 흐읏……! 아무것도 안 했어…….”
“거짓말. 혼자 써봤어요? 응? 여기 뒤에 쑤셔서.”
안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버거운 손가락이 내벽을 파고들었다. 손목을 비틀고, 손가락을 구부릴 때마다 내벽에 자극이 되었다. 그가 닿아 있는 모든 부분이 이선에게는 자극점이 되었다.
“흐읏! 아냐, 아냐…….”
이선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자신은 무엇을 부정하고 있는 건지. 흐릿한 정신 속에서 무엇 하나 또렷하지 못했다. 아무런 사고 없이, 그저 본능만이 남은 대답이었다.
귀엽지 않은 대답이다. 강희찬은 심술이 샘솟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일부러 스치도록만 만지던 이선의 자극점을 꾸욱 눌렀다.
“아……! 아아……!”
“이거 쓰고 싸볼까? 응?”
“하아, 아, 아응……. 그만……!”
이선의 눈이 크게 뜨였다. 허리가 잔뜩 휘었다. 원하던 감각이었지만, 갑작스러웠다. 이것이 과연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자극인가. 이선은 몸을 비틀어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강희찬은 어림도 없다는 듯 이선의 위로 몸을 드리웠다. 안을 쑤시는 손의 움직임도 더욱 빨라졌다. 척척거리며 젖은 살이 마찰하는 소리도 귀를 더욱 강하게 울렸다.
“아, 아응! 읏……! 시, 싫……!”
“왜. 나오는 거 아깝잖아. 응? 우리 선이 거.”
“…흐윽…….”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 이선은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강희찬을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얼굴에선 이선을 놀리겠다는 짓궂은 기색은 없었다. 그 점이 더욱 무서웠다. 지금도 성기에 손끝 하나 닿지 않은 채 사정을 하고 있었다. 콘돔을 끼고,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흔들리는 성기가 사정하는 모습. 상상만으로도 수치스러웠다.
“왜. 어? 왜 싫어.”
무조건적인 거부에 마음이 상하기라도 하듯, 강희찬은 손가락을 하나 더 천천히 밀어 넣었다. 이선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지금도 이렇게 힘든데, 더 들어오면…….’
정말 몸이 어떻게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선의 걱정과는 달리, 강희찬은 콘돔이 없는 맨 손가락 하나를 더 구멍에 넣었다. 구멍은 마치 기다리기라도 하듯 빠끔거리며 열렸다. 천천히 들어오는 손가락에 맞추어 내벽 역시 그의 손가락에 감겼다.
“응……. 으응……!”
두꺼운 손가락이 이번에는 확실하고 노골적으로 자극점을 눌렀다. 성기를 받는 것 같다. 그의 성기가 들어왔을 때 어땠었는지. 당시에도, 지금도 주어지는 쾌감을 받기도 버거운 이선에게는 정확한 기억이 없었다. 그저 지금의 이선에게는 내벽을 스치는 그의 맨 손가락이 주는 감각이 소중했다.
“아, 앗……! 아, 아! 아아……!”
척척거리는 소리가 절정으로 달려갔다. 이선은 무언가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아랫배에서부터 무언가 당기는 느낌이었다.
안 된다.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선은 그의 손을 피하려 본능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그만해 달라고. 뭔가 이상하니, 제발 멈추어달라고. 그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은 새된 신음뿐이었다.
묽은 백탁액을 힘없이 흘리던 이선의 성기에서 투명한 물이 팍 튀었다. 백탁액이 말라붙은 편편한 복부에 투명한 물이 흘렀다. 쏟아지는 햇살이 반사되었다.
“…….”
강희찬은 멍하니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창 너머로 쏟아지는 여름의 태양빛. 그 아래, 백탁액으로 엉망이 된 하얀 나신. 물기가 번진 마른 몸은 더욱 자극적이었다.
“흐… 으으…….”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 멍하니 눈을 내려 제 성기를 내려다볼 뿐이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혼란스러운 눈이 이내 강희찬과 시선이 닿았다.
“아, 아냐! 아니에요! 아니야…….”
이선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쾌감으로 흐릿한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흐…흐으……. 아니야……. 이거, 아니야…….”
“뭐가. 뭐가 아닌데요.”
“아, 하아… 아!”
다정히 말을 걸면서도, 강희찬은 의식하지 않은 척 손을 더 깊게 넣었다. 사정 후 예민한 몸에 다시 한번 가해지는 자극에 이선은 경련하듯 부들거렸다. 손가락을 받는 구멍과 내벽이 조여들었다. 그와 동시에 쥐어짜이는 것처럼 투명한 액체가 귀두 끝에서 새었다.
“…….”
인정하고 싶지 않은 광경을 다시 마주했다. 이선은 결국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슬하게 걸려 있던 눈물이 옆으로 흘렀다.
쯧. 강희찬은 낮게 혀를 차고는 안을 들쑤시던 손을 조심히 뒤로 물렸다. 하지만 그뿐이다. 자극에서 잠시 해방되게 해주었을 뿐, 손가락은 절대 빼지 않았다. 바깥으로 나온 그의 손에는 거품이 잔뜩 일어난 콘돔 윤활액이 한가득 쏟아진 채였다. 그것이 마치 이선의 몸에서 흐른 애액인 것만 같아, 순간적으로 입에 머금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아니야. 아니에요……. 흐으…….”
“뭐가 자꾸 아니라는 거예요. 오줌 싼 거?”
“아니! 흑……. 그거… 윽, 내 탓 아니에요. 자꾸, 희찬 씨가……!”
“오줌 싼 거 아니에요. 알아요. 이거 오줌 아니야.”
비어 있는 오른손이 이선의 복부를 향했다. 움칫대는 몸짓이 피하려는 듯 바르작거렸지만 불가능이었다. 강희찬은 그대로 오목한 복부에 고여 있는 투명한 액체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아래에 말라 있던 백탁액과 섞여 혼탁해졌다.
‘…먹고 싶다.’
충동에 휩싸였다. 이선의 몸에서 나온 것이다. 아직도 발딱거리는 좆에서 새어 나온 쾌감의 증거였다. 다 먹고 싶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씹어 삼켜버리면……. 그러면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저의 것이 될 텐데.
순간순간 그런 충동에 휩싸여 이선의 몸 곳곳을 깨문 적도 있었다. 지금 역시 비슷했다. 하나도 남기고 싶지 않다. 흘리는 눈물이며 좆물까지. 이선을 통째로 삼킬 수 없다면, 이것이라도 먹어치우고 싶었다.
“비, 비켜주세요. 화장실……. 으읏…….”
“오줌 아니라니까요.”
강희찬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음험한 기색을 감추었다. 이미 눈엔 눈물이 다시 차오른 채였다. 흘린 좆물 좀 먹어도 되겠냐고 물었다가는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라 대성통곡을 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자신은 아마 다시는 이 집의 현관문을 넘어올 수 없을 테고.
“이거 오줌 아니에요. 내가 찾아봤어요.”
“그게… 무슨…….”
“정 선생, 지금 이거 처음 싸는 줄 알아요? 전에도 한 번 쌌잖아요.”
“제, 제가 언제요! 언제 그랬어요!”
이선은 발끈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랬을 리가 없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까지 격하게 가로젓느라 고여 있던 눈물이 흩뿌려졌지만,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처음 할 때요. 그때 다 해봤어요. 정 선생은 자느라 몰랐겠지만.”
“…….”
“이거 오줌이 아니라, 너무 좋으면 나오는 거래요. 내가 찾아봤어요.”
“무…….”
“…….”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뭐 했어요! 왜, 왜……. 왜 자는 사람한테……!”
아이처럼 오줌이나 싼 게 아니라고. 그리고 이것도 처음이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달래려고 했던 소리지만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이선은 당황과 분노로 정신이 없었다.
이럴 때가 아니다. 여차했다가는, 이선은 공벌레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강희찬은 급히 안을 채웠던 왼손을 빼냈다. 엉망이 된 콘돔을 손가락에서 빼내고, 이선의 몸을 일으켜 무릎 위에 앉혔다. 싫다는 듯 미약한 반항이 이어졌지만, 강희찬은 어렵지 않게 묵살했다.
“싫어요. 희찬 씨……. 이런 거, 하지 마요. 다신 하지 마세요.”
“왜요. 왜 싫은데. 좋은 거라니까.”
나긋한 나신이 엉겨 붙는다. 허리에 단단히 팔을 감고 힘을 주었다. 몸이 가까워지며 이선의 다리가 벌어지고, 몸이 꼭 맞아들어 갔다. 강희찬은 제 위에 앉게 된 이선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싫어요. 싫어요……. 이런 거, 이상해요. 이런 거 하면 안 돼요.”
눈동자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충격이 상당한 듯했다.
뭐, 자신 역시 처음 이선이 흘렸던 것이 소변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름의 충격을 받긴 했다. 대체 어떻게 된 몸이란 말인가. 자면서도 꼬박꼬박 느껴서는 정액도 아닌 다른 것을 흘렸다는 것에 화가 나다가도 끝에는 걱정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이선이 보이는 반응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부정이었다. 자신이 그럴 리가 없다. 그다음은 타협이었다.
“희찬 씨……. 이런 거… 이런 건 이상한 사람들만 하는 거예요.”
일렁이는 눈이 간절히 강희찬을 향했다.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났을 때 흔히 느끼는 불안감이었다.
강희찬은 남아 있는 손으로 이선의 눈 아래를 조심히 쓸었다.
“다들 해요. 다들 섹스하다 좋으면 이러는 거예요.”
“무서워요. 희찬 씨……. 무서워요.”
결국, 이선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무엇이 불안한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은 누구에게나 불안한 것이다. 발이 닿지 않는 물 깊은 곳에 들어가거나, 홀로 자전거를 처음 탈 때. 아마도 그와 비슷한 감각일 터였다.
모든 것이 처음이다. 앞으로 이선의 모든 처음은 자신의 것이 되고, 자신의 처음은 이선만이 가질 수 있었다. 정신적인 고양감이 차오르자 바지 아래의 성기가 빠듯했다. 본능이 이선의 허리를 바투 당겨 끌어안았다. 그리고 옷 너머로 안타깝게 느껴지는 맨살에 비벼지도록 허리를 움직였다.
“무서워? 뭐가 무서워요.”
“응……. 읏, 잠깐…….”
“같이 할까요? 응? 같이 할까, 선이야?”
갈급한 숨이 이선의 귓가에 붙었다. 쪽쪽. 조르듯 입을 맞추며, 강희찬은 황급히 바지춤을 내리고 성기를 꺼내었다. 젖은 귀두가 밖으로 나오자 시원한 공기와 섞여들었다. 쿠퍼액으로 뒤덮인 모습에 이선은 숨을 들이켰다.
“희찬……!”
“같이 잡아봐요. 어?”
음험한 기둥이 꺼덕이며 이선의 성기로 다가왔다. 이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입만 벙긋거렸다. 강희찬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 게 아니다. 오히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눈동자가 강희찬을 향했다. 평소라면 이런 얼굴을 보았다면 당연히 물러섰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강희찬은 이선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리고 제 좆과 이선의 성기를 마주 쥐게 했다. 뜨겁다. 델 듯이 뜨거운 열기가 당황스러웠다. 손을 물리려는 이선을 막듯, 그 위를 커다란 손이 강한 힘으로 뒤덮었다.
“잠깐, 잠깐……. 흐읏!”
척, 척. 젖은 소리가 강하게 울렸다. 손바닥에 화상이라도 입을 것 같았다. 온 열기가 한곳으로 고였다. 수치심은 이내 익숙한 쾌감으로 번져갔다.
“아, 으읏! 아…….”
“선아……. 선이야, 좀만 더 세게…….”
이미 젖어 있는 성기에서 다시금 젖은 액이 흘러나온다. 손 틈으로 번져 오는 물기가 더욱 자극적인 소리를 냈다. 입을 꾹 다물고 참으려 했지만, 결국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그가 으르렁대듯 내뱉는 말이 그대로 몸을 통과하여 열기의 중심까지 향했다.
“흐……. 흐윽…….”
눈을 질끈 감았다. 하나의 감각이 닫히니 나머지 감각이 더욱 예민해졌다. 조금 더. 조금만 더……. 그 말은 이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더 닿고 싶다. 열이 고인 성기뿐만 아니라, 그의 단단한 몸에 모든 것을 기댈 수 있다면.
머릿속에서 모든 이성적인 생각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감각뿐이었다. 쾌감을 좇고자 하는 이선의 본능은 열기와 함께 더욱 뜨거워졌다. 손으로 문지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허리가 튕기듯 움직였다. 잠깐 멀어졌다 다시 붙는 틈새로 시원한 공기가 스친다. 그리고 다시 맞붙는 살갗은 더욱 서로를 느끼게 했다. 이선은 경련처럼 움직였던 처음과는 달리, 확실히 엉덩이를 들썩였다. 조금 더. 조금만 더 확실히 만져주었으면…….
“선아.”
“희찬……. 읏, 아……!”
성기를 쥐었던 강희찬의 손이 멀어졌다. 그랬음에도 이선은 착한 아이처럼 열심히 두 성기를 쥔 채 위아래로 흔들었다. 쿠퍼액으로 흥건한 그의 손이 뒤를 향했다. 빠듯할 정도로 손가락을 받았던 구멍은 어느새 닫혀 있었다. 그리고 다시금 그의 손이 입구를 매만지자 반기듯 움찔거렸다.
“아……!”
미끄러지듯 수월하게 긴 손가락이 안을 파고들었다. 처음 콘돔을 낀 손가락 하나만 들어왔을 때만 해도 이선은 몸이 쪼개질 것만 같아서 엉엉 울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제자리를 찾듯 손가락이 몸을 가르고 들어왔다. 내벽이 조였다 풀기를 반복하며, 굵은 그의 손가락을 더욱 안으로 받기를 원했다. 본능의 바람은 금세 이루어졌다.
“앗! 으응……! 거기, 아아……!”
탐욕스러운 손가락이 다른 곳은 볼 것도 없다는 듯 바로 자극점을 눌렀다. 순간 이선의 손에 힘이 풀렸다. 앞과 뒤를 동시에 자극하는 것은 너무도 벅찬 감각이었다.
“똑바로 잡아요. 어? 선아. 빨리…….”
“흑……. 으으… 안 돼, 같이 하면……. 아, 너무……!”
“빨리 잡아. 잡으면 그만할게요.”
그가 요구하는 것을 해내면, 폭력적일 정도로 벅찬 쾌감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새었다. 이선은 차마 눈을 뜨지도 못한 채, 손끝으로만 더듬어 꺼덕이는 성기를 찾았다. 그리고 제 성기를 맞대어 양손으로 함께 쥐었다. 그리고 그가 이끌었던 움직임 그대로 흔들었다.
“아, 아……! 그만… 이제, 그만……. 으응……!”
“응. 괜찮아. 선아, 괜찮아.”
하지만 약속과는 달랐다. 안을 들쑤시는 손끝은 거칠어졌다. 효율적인 움직임이 느끼는 곳만을 사납게 눌렀다.
“그만……. 아, 아아……!”
하반신이 빠듯하게 조여졌다. 따뜻한 내벽이 손가락을 끊어먹을 듯 조이는 순간, 이선의 성기 끝에선 백탁액이 흘렀다. 순간적으로 힘이 빠진 이선의 손 대신, 강희찬은 스스로 움직이기를 택했다. 허리를 끌어당긴 팔에 힘을 주고, 강희찬은 이선의 무게가 실려 있는 하체를 움직였다. 사람 하나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들썩이는 반동으로 인해 좆끼리 비벼졌다.
“아, 나… 나 했어요, 아읏……!”
사정 이후의 예민한 성기는 스치기만 한 자극도 버겁다. 뜨거운 기둥이 사납게 문질러지는 감각에 이선이 눈을 뜨자, 열기로 잔뜩 가라앉은 강희찬의 눈과 마주쳤다. 그 순간이었다.
“읏……!”
이선의 양손 위로 울컥거리는 진한 백탁액이 쏟아졌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스며들기 시작한 희뿌연 액체를 본 순간, 뒤를 쑤시던 손가락 역시 멈추었다.
“…….”
“…….”
잔뜩 붉어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한낮의 햇살 아래, 연인들은 서로를 마주했다. 그리고 아직 시간은 많았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