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2 (27/31)

  외전2

분홍색 일회용 숟가락이 녹색의 아이스크림을 한가득 퍼냈다.

‘거의 삽으로 퍼내는 수준이군.’

강희찬은 이선의 동그란 정수리 너머로 보이는 광경을 애써 외면했다. 그저 자신의 다리 사이에 쏙 들어와 앉아 있는 몸을 더욱 끌어안았다. 마치 다가올 두려운 미래를 겸허히 받아들이듯이.

“희찬 씨, 아.”

이선은 몸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 위협적으로 아이스크림이 올려진 숟가락을 강희찬의 입가로 가져왔다. 언제나 그랬듯, 강희찬은 망설임 없이 입을 열어 합 하고 아이스크림 한 삽을 받아먹었다.

성인 남자 다섯도 앉을 수 있는 넓은 소파에서, 왜 한 사람이 굳이 다른 이의 다리 사이에 앉아 있는지. 테이블에 잔뜩 있는 새 숟가락을 두고, 두 사람은 왜 하나의 숟가락으로만 먹고 있는지.

곁에 누군가 있었다면, ‘눈꼴시려 죽겠네’ 정도의 타박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엔 두 사람뿐이었다.

기껏 결제한 최신 영화가 멋대로 흘러가든 말든. 강희찬의 온 신경은 품 안의 한 사람으로 귀결했다. 천만을 보장하는 감독의 최신작이든 뭐든 알 바가 아니다. 자신은 디카프리오가 나오는 것만 아니면 상관없다 주의가 되었으니.

이선은 강희찬의 입이 아이스크림을 삼켜내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빤히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이번에도 녹색에 검정 점박이가 흉물스레 박힌 아이스크림을 다시 한번 살살 긁는다.

‘백투백 홈런은 좀…….’

당연히 자신의 입으로 올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외로 아이스크림의 목적지는 이선의 입이었다.

조그만 입에 어울리는 소박한 양이다. 강희찬은 눈을 크게 뜨고 놀랐다. 녹색의 아이스크림이 이선의 입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본 것은 처음이었다.

시선을 느낀 이선은 아이스크림을 입 안에서 녹이더니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배시시 눈을 접었다.

“이거, 희찬 씨 따라서 자주 먹다 보니 저도 좋아졌어요.”

천사가 웃으면 이런 모습일 것이다. 확신할 수 있었다. 확신과 동시에 얼굴 근육이 풀렸다. 하지만 강희찬의 머리는 뒤늦게 이선의 말에서 이상한 부분을 찾아냈다.

‘저도 좋아졌어요’라니. 자신은 스물여섯 해를 한국에서 살아온 토종 한국인이다. 옳게 이해했다면, 전에는 적어도 좋아하진 않았다는 소리였다.

“이 맛… 안 좋아했어요?”

강희찬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끌어안고 있던 몸이 움칫 떨린다. 이선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그게 더 수상해 보일 정도로.

“아, 아니에요! 안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먹다 보면 다른 걸 먼저 먹는……. 그런 거예요! 싫어하지 않았어요!”

…그런 걸 한 단어로 줄인 게 ‘싫어한다’였다.

“…….”

한국어가 어려운 것인지, 이선이 어려운 것인지. 혼란을 느낀 강희찬은 눈을 길게 감았다가 뜨며 정신을 다잡았다.

이선이 좋아하는 게 아니었단다. 그럼 대체 이 초록색의 흉물스러운 친구는 왜 꼬박꼬박 자리를 잡았단 말인가. 부동산 알박기 장인도 아니고.

“…….”

당연히 이선이 좋아하는 맛이라고 생각했다. 본인이 좋아하는 맛을 제게도 권하는 거라고. 그런 줄 알았기에 강희찬은 서슴없이 입을 열었던 거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럼, 왜 지금까지 이거 샀어요? 다른 거 먹지?”

“희찬 씨가… 좋아하시잖아요.”

조심스레 물은 말에, 너무도 아무렇지 않은 답이 즉각 흘러나왔다. 해는 동쪽에서 떠.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아. 그런 당연한 진리를 말하는 기색이었다.

희찬 씨가 좋아하시잖아요. 짧은 말에 오히려 놀란 쪽은 강희찬이었다.

‘내가, 이걸 좋아했다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자신의 취향이었다. 그는 정말 드물게도 놀랐다.

직업이 야구선수, 게다가 투수였다. 감정을 숨기고 표정을 관리하는 게 일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몸에 익혀온 버릇이기도 했다. 하지만 남의 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자신의 취향은 버릇보다도 익숙한 표정 관리에 걸림돌이 되었다.

“이거… 내가 좋아했어요?”

“…아니에요?”

기묘한 반응이었다. 이번엔 이선의 말간 얼굴이 조금씩 굳어갔다. 색이 옅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린다. 그간 알고 있고 믿어왔던 세계에 조금씩 금이 가는 얼굴이었다.

강희찬은 뒤늦게 아차 싶었다. 그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이선을 안심시켜야 한다. 품 안의 몸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끌어안는 것은 덤이었다.

“아니, 안 좋아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알았나 싶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직감했다. 자신은 이제 한평생 이 괴상한 맛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하지만 안도감으로 번져가는 이선의 미소에 비하면, 값싼 대가겠지.

이선은 품 안에서 몸을 슬며시 꼬았다. 부끄러울 때 종종 나오는 사랑스러운 버릇이었다. 이선의 뺨은 웃을 때마다 봉긋한 모양으로 예쁘게 올라온다. 강희찬은 여우에게 홀리듯 멍하니 그곳에 시선을 던졌다. 사람을 홀리는 여우는 온몸으로 뿌듯함을 뿜어댔다. 마치, ‘깜짝 놀랐죠?’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때 처음 같이 먹을 때, 말해줬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기억난다. 흉물스러운 비주얼의 아이스크림이 가득 담긴 통을 가리키며, 좋아하냐고 묻던 이선의 얼굴이.

얼굴에 홀렸고, 다음은 사람 먹는 음식에서 저딴 색이 나도 되나 싶어 놀랐다. 그러는 사이 차마 ‘싫어한다’고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 역시 기억난다.

정확히 따져보자면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이선의 선택을 수용했을 뿐이지.

“…….”

둘 중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데 꼬박꼬박 처먹었어. 게다가 요샌 저 화한 맛이 싫지 않다고 느껴지기까지 했으니 말 다 했다.

대단한 침투력과 파급력이었다. 강희찬은 속으로 아이스크림을 향해 존경을 표했다.

“그래도 말씀 안 해주셨어도 알았을 거예요. 희찬 씨, 특이한 맛 좋아하니까.”

“…내가요?”

강희찬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것이야말로 처음 듣는 소리라는 반응이었다. 이선은 대답 없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따라 금시초문인 사실을 참 많이도 듣게 되었다. 어느새 클라이맥스로 향한 영화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음식 취향보다 흡인력이 떨어지는 영화 따위. 알 바가 아니다. 저 감독도 이제 하락세인 게 분명했다.

“희찬 씨, 사탕도 특이한 맛만 좋아하잖아요. 계피 사탕 같은 거. 그거 보통은 인기 없는 맛이에요.”

“…….”

대단한 비밀 이야기라도 해주듯. 이선은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 목소리까지 낮추었다. 강희찬은 저도 모르게 귀를 가까이 대고 집중했다.

“그래도 요즘엔 저도 그런 거 자주 먹어요. 희찬 씨 따라서 먹다 보니까 좋아졌어요.”

결국, 웃음이 터졌다.

시커먼 사탕 따위. 좋아할 리가 없다. 까다롭진 않지만 평범한 입맛이었다. 자신 역시 남들처럼 포도나 오렌지 사탕을 맛있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미각을 가지고 있었다.

존재 가치를 도저히 모르겠는 시커먼 사탕을 받았던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이선이 주었기 때문에. 그 어떤 취향도, 고집도 이길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였다.

“그래요.”

하지만 이것은 아마도 평생,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이 되겠지.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이선은 깜짝 놀랄 테니까.

연인을 향한 비밀을 묻으며, 강희찬은 이선을 바투 당겨 안았다.

“있잖아요, 희찬 씨…….”

혼자만의 비밀을 만든 연인의 속내를 알지 못하는 이선은 꼼지락대며 말꼬리를 늘렸다.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는 편이었지만, 부탁이 있을 때 나오는 태도였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탓에 빨리 철이 들어야 했겠지만, 이럴 때 보면 또 영락없는 외동아들이었다.

강희찬은 구부정했던 허리를 폈다. 언제 그런 버릇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선이 말을 꺼낼 때면 언제나 몸은 경청할 준비를 마쳤다. 좀처럼 먼저 제 의견을 꺼내는 일이 드물어서, 이선의 부탁은 강희찬에게는 참 소중했다.

“네. 왜요?”

“그게…….”

조금 더 당연하게 요구를 해도 좋을 텐데. 남의 기분을 먼저 살피는 이선의 성격이 답답할 때도 있었다. 적어도 자신에게는 제멋대로 굴어주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것은 앞으로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가면서 조금씩 변해갈 것들이었다. 마치 처음엔 무언가 먹여주려고 해도 거절하더니 지금은 예쁘게 입을 벌리는 것처럼. 점점 변해가는 이선의 모습도 오롯이 자신의 몫이었다.

“그냥 해보는 말인데…….”

“…….”

“혹시 내일 경기 끝나면 밖에서 밥 먹어도 되나 해서요.”

되도록 어머니에게 부탁하여 받아온 반찬으로 집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하지만 강희찬은 딱히 외식을 싫어하는 부류는 아니었다. 오히려 집에서 밥을 자주 먹게 된 이유는 이선 때문이었다.

자신이 퇴근하는 시각은 보통 이선은 이미 저녁을 먹은 후였다. 굳이 다른 사람들의 눈이 있는 식당에 가서 혼자 밥을 먹는 것보다, 집에서 먹는 게 몸은 귀찮아도 마음이 편했다. 밥을 먹으며 애인의 몸을 더듬어도 그 누구의 눈치도 볼 일이 없고.

하지만 원한다면 밖에서 먹어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뭔가 먹고 싶은 게 있나?’

고개를 끄덕이며, 강희찬은 생각했다. 제발 밤에도 영업을 많이 하는 가게의 메뉴면 좋겠는데…….

강희찬이 선선히 허락했는데도, 이선의 기색은 변함없었다. 여전히 무언가를 망설이고 있었다. 마치 할 말이 더 남아 있는 사람처럼. 혹은 뭐가 마려운 똥강아지처럼.

“그게, 저기… 재혁이도 같이……. 먹어도 되나 해서요.”

“…….”

“아니! 희찬 씨 불편하면 괜찮아요. 그냥…….”

“먹어요.”

“…네?”

먼저 말을 꺼낸 주제에 토끼같이 커다랗게 눈을 뜬다. 반응에 오히려 강희찬은 기가 막혔다.

대체 이선에게 자신은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저런 것도 이리 어렵게 부탁해야 할 만큼 아직도 어려운 존재인 건지.

조금 삐딱해졌지만, 별 불평은 하지 않았다. 놀란 이선의 얼굴이 퍽 귀엽기 때문이라고.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같이 먹자고. 그거잖아요. 애인 친구 만나서 테스트받는 거.”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셋이 밥 먹는 건데…….”

이선은 펄쩍 뛰며 부정했다. 이미 녹아가고 있는 아이스크림은 안중에도 없었다.

“됐어요. 나도 대충 알아요. 해본 적은 없어도.”

“아니, 진짜 테스트 같은 거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왜요. 송 PD가 데려오랍니까? 어떤 놈인지 보자고?”

토끼같이 놀란 이선에 비해, 강희찬은 장난스레 말을 이어갔다. 애초에 테스트 운운하는 것 자체부터가 이선을 놀리는 짓궂은 장난임을 모르는 건 이선뿐이었다.

장난을 이해하지 못한 순진한 이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냥, 희찬 씨 보여주고 싶어서요.”

당장이라도 천장에 머리가 닿을 기세로 펄쩍 뛰던 기색이 누그러졌다. 대신, 뜬금없는 말을 내뱉는 이선을 강희찬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선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희찬 씨랑 재혁이, 원래 아는 사이인 거 알아요. 저보다 오래 알았을 거고.”

“뭐, 그러네요.”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구단 직원의 얼굴 따위. 제대로 인지한 건 이선과 만난 이후였다. 강희찬에게 송재혁이란 요 몇 년간 살아 움직이는 카메라 거치대였다. 지금의 송재혁도 직장 동료라는 사실보다도 누군가의 친구로서만 인식되었고.

“예전부터 재혁이한테는 걱정만 시켰거든요.”

“…….”

뭐, 그렇겠지. 투아웃 같은 놈한테 카드를 턱턱 맡기는 호구이니 걱정이 안 되는 게 더 이상하다.

“그래서 희찬 씨 자랑하고 싶어요. 이렇게 대단하고 멋진 사람이랑 만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

“그냥, 누굴 만나면……. 재혁이한테 소개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 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앞으로 자신이 사는 세상에서만큼은. 친구에게 소개하고, 어머니에게 만나는 사람이라며 보여주고. 그런 연애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내뱉는 입김마저 금세 차게 얼어버리는 겨울날. 지하에 있던 가게에서 올라온 후 어렴풋이 깨달았던 사실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확신으로 변했고.

“…그렇게 말하면 들어줄 수밖에 없잖아요.”

“네?”

이제 손 안에 있는 아이스크림은 다시 얼려도 먹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강희찬은 이선의 손에서 그것을 빼앗았다.

“그럼 나 말고 송 PD한테 보여줄 애인이 또 있어요? 왜. 또 하나 더 만들게요?”

강희찬이 얼굴을 가까이했다. 묻는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위협적이다. 이선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물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니에요. 그런 생각 한 적 없어요.”

“그러니까 더더욱 내가 만나야지. 앞으로 소개해 줄 애인 없잖아요.”

“…….”

이선이 멍하니 강희찬을 올려다보았다. 깜빡. 깜빡. 끝이 살짝 내려간 눈이 끔뻑거리기 바쁘다. 이선의 얼굴을 가만히 보던 강희찬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소린지 이해를 못 하고 있군.’

이런 닭살스러운 말은 리바이벌이 힘드니까 좀 한 번에 알아들어 줬으면 좋겠는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한 세 시간 후의 일이 눈에 보였다. 이래 놓고 잘 때 품에 파고들어 ‘아까 그 말, 무슨 뜻이에요?’라고 물어올 것이 빤했다. 그러면 대답을 피하고픈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이선의 입을 막을지도.

“어쨌든, 가요. 자리 만들어주고. 가게 예약은 내가 할 테니까. 나도 송 PD한테 하고 싶은 말 있었어요.”

“무슨 말이요?”

“돈 없는 공무원 좀 그만 벗겨 먹으라고.”

요새 이선은 강희찬이 보내주는 초대권으로 야구장에 오는 일이 잦았다. 야구장에 자주 찾아온다는 것은 당연히 송재혁과 마주칠 일도 많아졌다는 뜻이었다. 카메라 거치대는 덥다는 이유로 기어코 이선에게서 음료를 얻어 마셨다. 똑똑히 봤다.

송재혁은 자신이 외야에서 러닝을 하느라 모를 거라 여겼겠지. 하지만 그건 오산이다. 정이선에게 한정돼서 강희찬의 시력은 몽골인의 그것과 비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냥 아메리카노도 아니고, 크림이 잔뜩 올려진 음료에 쿠키까지. 알뜰히 받아먹는 모습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봤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취업을 조금 빨리 했다는 이유로, 이선에게서 얼마나 얻어먹었을지 훤했다. 몇 푼 되지도 않을 공무원 봉급에서 빼먹을 게 뭐가 있다고.

“재혁이 벗겨 먹지 않아요. 저도 돈 없지 않고.”

호구는 딱 호구스러운 소리나 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유일한 친구에게 싫은 소리를 할까 걱정하고 있었다. 아니면 오랜만에 들은 호구 소리가 불만스러웠거나.

“알았어요. 내일 시합 끝나고 가면 되는 거죠?”

“희찬 씨, 괜찮아요? …아무렇지 않아요?”

“아무렇지 않으면? 뭐, 어때야 해요?”

강희찬의 질문에 이선은 말문이 턱 막혔다. 색이 짙어진 눈동자가 흐트러짐 없이 이선을 향했다. 이럴 때의 강희찬은 화를 내는 것보다 무서웠다. 물론, 그는 이선에게 화를 내진 않지만.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의외로 섬세하기도 했고. 보쌈집을 갔을 때와 같은 인원 구성이었지만, 이선이 말하는 의미는 전혀 달랐다. 단순히 외식하고 싶다는 뜻만이 아니었다.

아마도 이선의 곁에는 송재혁이 아닌 강희찬이 앉을 것이다. 그러한 자리의 구성은 세 사람에게만큼은 너무도 명백한 의미가 아니겠는가. 강희찬의 현재 연인이 누구인지. 그 사람의 성별이 무엇인지.

이미 선을 넘었다고 해도, 그것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일은 또 다른 경계를 넘는 일이었다. 아무리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사람이더라도.

“아니…….”

오히려 이선이 걱정하고 있었다. 그를 향해, 강희찬은 말없이 가만히 추궁했다. 평소와 같은 무표정인데도 어딘지 화가 난 것만 같아서, 절로 주눅이 들었다. 늘 그랬듯 그는 이선의 기색을 기민하게 알아챈다.

강희찬은 어느새 형형했던 눈빛을 거두었다. 그저 이선을 품에 넣었다. 강희찬의 품에 들어간 채, 그의 턱이 정수리에 올라오는 자세는 이제 몸이 기억했다.

무서웠던 마음이 눈 녹듯 풀린다. 보상이라도 받는 것처럼, 이선은 그의 몸을 팔로 둘러 꼭 안았다. 버거운 온기가 오롯이 저의 것임을 실감했다.

“그런 거 하나하나, 이렇게 어렵게 부탁하지 않아도 돼요.”

“…….”

“아직도 나를 다룰 줄을 몰라요? 해달라는 게 아니라 무조건 하라고 해야지. 그래도 되는 사람이잖아요.”

“그치만…….”

옹알거리는 소리가 품 안에서 맴돈다.

무섭게 굴어서 내심 서러웠나. 이선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아마도 눈에 눈물방울을 매달고 있을 것이다.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여리고 여린 이선은 눈물이 날 때면 오히려 제 품을 파고드는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강희찬은 왼손을 올려 이선의 뒷머리에 대었다. 힘이 약한 모발이 기분 좋게 손바닥에 감겼다.

“시켜줘요. 나, 애인이라고. 창피한 거 아니면.”

“창피하지 않아요!”

이선은 전기라도 맞은 것처럼 파드득거렸다. 재빠르게 강희찬의 품에서 온기가 빠져나갔다. 역시나 눈가가 부은 채였다. 그런 꼴을 한 주제에, 주먹을 말아 쥐니 참으로 용맹해 보였다.

“희찬 씨, 창피하지 않아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이렇게 멋진데…….”

“…….”

“자랑하고 싶어요.”

용맹스러운 기색은 어느새 잦아든다. 당연했다. 듣기에도 참 부끄러운 말을 대놓고 하니 말이다. 저렇게까지 말해줄 만큼 좋은 놈도 아닌데 말이지. 물론, 이선에게만큼은 그런 놈이 되려 죽을 만큼 노력하겠지만.

민망한 얼굴을 숨길 겸, 강희찬은 다시금 이선의 몸을 끌어안았다. 이선은 금요일에 퇴근하면 자연스레 저의 집으로 왔다. 그 때문인지, 머리카락에서 번지는 익숙한 향이 마음에 꼭 들었다.

“그럼 자랑해 줘요. 말하고 싶은 사람들한테는 마음껏 얘기하고. 갑자기 불러내서 몇 분 만에 오는지도 보여주고.”

“그런 짓은 안 해요.”

“해보고 싶었던 거, 다 나랑 해요. 남기지 말고.”

전교에 아웃팅을 당한, 중학생들만도 못한 학생 시절의 연애. 혹은 그만도 못했을 짝사랑뿐인 두 번째 마음.

그 시절의 이선을 자신은 만날 수 없다. 할 수만 있다면, 그때의 이선을 찾아가 안아주고, 지금처럼 누구보다 소중히 보듬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때의 이선이 꿈꿨을 평범한 일상을 함께 해줄 수는 있다. 지금의 강희찬이. 그것은 명백히 저의 몫이었다.

“희찬 씨.”

눈물도 감동도 참 많은 여린 팔이 제 허리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희찬 씨. 많이 좋아해요.”

물기 어린 고백은 귀보다 먼저 심장을 향했다.

강희찬은 손을 들어 이선의 뒷머리를 쓸었다. 손에 들어오는 익숙한 감각이 말하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반쪽이라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전하는 고백은 홈런보다도 강했다. 선수를 뺏겨버렸다. 이런 멋진 고백을 듣고, “나도 좋아한다”라고 해봐야 모양 빠진다. 그저 가는 머리카락에 입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

별것도 아닌데 눈시울이 붉어지고, 서로의 반응 하나에 안절부절못한다. 단순한 고백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명문이었다.

비록, 오늘 결정된 약속으로 인한 파급력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 * *

[혹시 일요일에 경기 끝나고 시간 되나 해서… 같이 밥 먹을까?]

PC용 메신저에 도착한 내용을 확인하며, 송재혁은 다시 한번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지나치게 고개를 돌려 사위를 살펴도 오히려 수상스럽다. 누가 봐도 ‘나 지금 업무 중에 딴짓해요’라고 온 동네 광고하는 꼴이 아닌가.

송재혁은 업무의 얼굴을 가장한 채, 무심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래. 뭐 먹어?]

딱히 큰 기대는 하지 않고 보낸 메시지였다. 어차피 이런 걸 고르는 데는 재능이 없는 친구였다. ‘너 먹고 싶은 거 먹자.’ 익숙한 말이 귓가를 울리는 듯했다. 하긴. 익숙하다고 해봐야 요샌 이선과 함께한 적이 거의 없었다. 이유야 당연히 정 선생에게 새로 생긴 애인 탓 아니겠는가.

[응. 근데 둘이 말고 셋이서.]

5분의 시차를 두고 이선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태연함을 가장하는 것도 거기까지였다. 헙. 송재혁은 차마 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바보가 아니라면, 이선이 말하는 셋이라는 게 누가 될지 모를 수가 없었다.

이선이 메시지를 보낸 시간에 눈이 갔다. 얼마나 고민을 하고, 몇 번이나 내용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는지 알 수 있었다.

강희찬이랑 먹는 거냐고. 송재혁은 자세히 추궁할 수 없었다. 고민했을 친구에 대한 배려는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 둘 사이의 경과가 궁금한 게 자신이 아니던가.

고작해야 채널 구독을 원래대로 돌리고, 영상을 올린 게 전부다. 그저 눈을 감고 동전을 던졌을 뿐인 송재혁은 이선에게 차마 ‘강희찬과 잘되고 있냐’ 따위의 질문을 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아무런 진전이 없다면……. 분명 친구는 큰 눈에 눈물을 가득 담아서는 어색하게 웃을 것이다. 그런 얼굴을 보고 싶진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전화라도 걸어서 전후 사정을 육하원칙에 맞추어 듣고 싶다. 하지만 송재혁은 자기 자신을 제법 잘 파악하는 놈이었다. 가장 재밌는 것이 남의 연애사다. 그것도 둘 다 얼굴을 아는 이의. 그런 재미난 이야기를 들으며, 일하는 척 평정을 가장할 자신이 없었다.

[응. 난 괜찮아.]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진중하고 진중한 친구의 탈을 쓰고 후일을 도모했다.

두고 보자, 정 선생. 둘이 나란히 앉기만 해도 놀려줘야지. 어차피 그렇게 다시 붙어먹을 거면서 세상 무너진 척이나 했다고 말이야.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눈과 입은 실실거렸고, 다리는 저도 모르게 달달 떨렸다. 빨리 놀리고 싶어. 부끄러워할 정 선생을 괴롭히고 싶어 죽을 맛이었다.

한 주의 마지막 경기가 끝나고, 거의 실시간이나 다름없이 영상을 올린 후 송재혁은 사무실을 급히 나섰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이선 때문이었다.

임시 출입증이 있어서 밖에서 기다리진 않겠지만, 그래도 오래 기다려서 좋아할 리가 없다. 혹시라도 강희찬이 먼저 나온다면 저를 가만두지 않을 것도 같고.

송재혁은 재빨리 1층으로 내려갔다. 이선은 선수용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목에 멀거니 서 있었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별로 안 기다렸어. 근데 빨리 나왔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아무래도 일이 있는 자신보다 관람객 신분인 이선이 먼저 나온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튀어왔다. 늦었다가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강희찬의 성질머리라면, 늦는 자신을 버리고 먼저 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혹시 모른다. 송재혁 없는 송재혁과의 식사 자리를 만들지도.

“아, 혹시 차 가져왔어?”

“아니. 술 마실 것 같아서 안 가져왔는데. 왜?”

“잘됐다. 그럼 희찬 씨 차 같이 타고 가면 되겠다.”

‘희찬 씨’래 ‘희찬 씨’.

이미 들은 바가 있던 호칭이 유난스레 낯간지럽다. 그건 옅게 홍조가 올라온 이선의 두 뺨이나, 슬며시 올라간 입꼬리 때문일지도 모른다.

송재혁은 명치를 벅벅 긁었다. 언젠가 꼭 정이선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막상 보니 내성이 생기진 않는다.

송재혁은 선수용 주차장으로 향하는 복도 벽에 등을 기대었다.

정 선생의 ‘희찬 씨’는 오늘 경기도 안 나갔으면서 참 늦게 나온다. 버리고 가보자고 해볼까? 그런 생각을 잠시 했지만, 생각으로 끝냈다. 아무래도 오늘 식사의 물주가 될 확률이 높은 분이었다. 잠깐만 참으면 지갑도 입도 행복할 길이 열린다.

“아, 이제 선수들 나오나 봐.”

더 오래 기다렸을 정이선은 여전히 속없이 즐거운 얼굴을 했다. 핸드폰으로 열심히 무언가를 적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손가락을 보니, 문자를 치는 중이다. 웃고 있는 입술을 꾸욱 문다. 아무래도 그놈의 ‘희찬 씨’가 문자 상대겠지.

‘염병. 저딴 거 보낼 시간에 빨리 나오기나 하라고.’

송재혁은 가자미처럼 흘기던 눈을 겨우 거두었다. 두 사람이 있는데 한 놈이 애인과의 문자 삼매경이다. 남은 한 사람은 쓸쓸해졌다. 그리하여 급하게 올렸던 영상의 반응을 확인한다는 핑계를 대며 핸드폰을 볼 때였다.

휘익!

갑자기 이선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뭐야.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송재혁은 눈만 커다랗게 뜨며 놀랐다.

“…….”

이선은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입술에서는 웃음을 잔뜩 걸고 있었다. 신난 기색으로 송재혁을 향해 주먹을 내밀었다.

“손 좀 줘봐.”

“…뭐?”

“손. 줄 거 있어.”

“…….”

뭐지, 대체?

미심쩍게 보면서도 송재혁은 손바닥을 내밀었다. 이선의 하얀 주먹이 그 위를 드리웠다. 대학에 다닐 땐 열심히 피아노 연습을 하던 손가락이 보이고, 이내 사라진다.

손바닥 위에 남은 것은 먼지보다 큰 검은 무언가였다. 송재혁은 고개를 숙여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

…모기다. 먹지도 못했는지 피 한 방울 없이, 둔한 정이선의 손에 압살당한 가여운 존재가 유명을 달리한 채였다.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모기 사체를 바라보는 송재혁에게 이선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선물.”

‘이런, 미친……!’

선물은 무슨 개뿔 선물이란 말인가. 인상을 팍 찌푸린 송재혁은 배고픔과 기다림의 지루함, 파릇한 연애를 시작한 친구를 향한 모난 부러움이 섞인 짜증을 드디어 폭발시켰다.

“아, 드러! 뭔 선물이야!”

“…재미없어?”

이선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재미없지?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얼굴에 송재혁은 더욱 황당했다. 모기를 잡아주는 행동의 대체 어디 부분에서 재미를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다.

“손이나 씻고 와, 드러운 놈아.”

“피도 안 났어. 안 더러워.”

이선은 모기를 잡았던 손을 펼쳐서 얼굴 가까이 가져왔다. 결백을 주장했지만, 송재혁은 잔뜩 찌푸린 얼굴을 뒤로 물렸다.

“아, 빨리 안 씻고 와? 저 모퉁이 돌면 화장실 있으니까 다녀와.”

송재혁은 팔을 휘휘 저었다. 이선이 적극적으로 보이는 손바닥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더럽지 않은데. 이선은 제 손바닥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식당 갈 건데…….”

순순히 가기는 싫었는지, 마지막까지 한마디를 중얼거리면서 발을 질질 끌었다. 느릿한 걸음이 화장실을 향했다. 장난 한번 친 대가가 퍽 귀찮은 모양이었다.

송재혁은 화장실에 들어가는 이선의 모습을 매섭게 보았다. 다행이다. 같이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아서. 모기 좀 만졌다고 손까지 씻는 건, 아무래도 너무 귀찮은 일이니 말이다.

이선이 들었다면 퍽 억울해할 생각을 목 안쪽에 꼭꼭 밀어 넣은 순간이었다. 선수단 로커룸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나왔다. 커다란 인영은 자세히 볼 것도 없이 두 사람이 기다리던 이였다.

“아, 강희찬 선수.”

송재혁은 손까지 흔들며 존재감을 내비쳤다.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찼던 강희찬은 송재혁과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굳혔다. 세상에. 사람 얼굴을 보고 저게 무슨 표정이란 말인가.

잔뜩 불만스러운 기색을 뿜어내며 강희찬이 척척 거리를 좁혔다.

“왜 혼자 있어요? 선이는요?”

아무리 오늘 종일 봤던 직장 동료라도 그렇지. 마치 자신은 보이지도 않는지, 없는 사람부터 찾는 모습에 서운함을 느낄 새는 없었다.

강희찬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온 호칭에 송재혁은 헙 하고 숨을 삼켰다.

‘…선이래, 선이.’

목 뒤에서부터 소름이 쫘악 퍼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호칭이 문제가 아니었다. ‘선이’라는 애칭이 튀어나온 것이 세상 냉한 무표정을 한 강희찬의 입이라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선이 어디 갔냐니까요?”

말하는 본인은 그 어떤 수치심도 없어 보인다. 그 점이 송재혁은 무서웠다.

설마, 평소에도 저렇게 부르는 건가? 한쪽이 ‘선이’이니, 나머지 한쪽은……. 에비에비! 고개를 거세게 휘저으며, 가당치도 않은 생각을 떨쳐 냈다.

‘그냥 버리고 튈까?’

송재혁을 내려다보는 강희찬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송재혁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낙오되면 안 된다.

“아, 화장실 갔어요. 손 씻으러.”

손가락으로 화장실을 가리켰다. 강희찬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걱정스레 바라봤다. 따라가 볼까. 잠깐 고민하는 기색에 송재혁은 속으로 비웃었다. 대체 뭘 걱정한단 말인가. 정 선생이 변기통에 빠져 죽는 것도 아닐 텐데.

다행히 따라가지는 않는구나. 몇 번이나 화장실을 보며 망설였지만, 결국 따라가는 추태는 보지 못했다.

의외로 강희찬은 미련을 덜어내듯 방향을 틀어 입구를 향했다.

“시동 걸어둘 테니까 나오라고 전해주세요, 그럼.”

같이 정 선생 기다리는 거 아니었나.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송재혁은 뒤를 돈 강희찬을 불러세웠다.

“아, 저기……!”

“왜요.”

“혁이도 같이 탈 거예요.”

대체 무슨 생각이었느냐고. 훗날 자서전이라도 내면 한 귀퉁이에 쓸 만한 이야기였다.

변명을 해보자면 나름대로 친근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강희찬은 카메라를 든 자신의 그림자만 봐도 살벌한 기운을 뿜어내기 바빴다. 그런 이가 연애를, 그것도 제 친구와 한다니.

맹맹하고 만만한 것은 정이선이었지만, 제 안에선 강희찬 역시 제법 친근한 포지션이 되어 있었다. 마치 정이선이 얼굴도 한 번 마주한 적 없는 저의 여자친구를 향해 ‘수아 씨’라고 부르는 것처럼.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음에도.

하지만 상상과 현실은 천지 차이다. 먹이사슬 최하위에 있는 식물과 호랑이가 사귄다고 하여, 호랑이가 가장 아래 단계로 내려오는 건 아니었다.

“…….”

강희찬은 출구를 향하던 걸음을 틀었다. 그리고 송재혁을 향해 거리를 좁혔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눈빛이 형형해진다.

‘눈으로 사람도 죽이겠다.’

잘 생각해 보라고, 정 선생을 뜯어말려야 하나. 송재혁은 다시 한번 고민했다. 그때야 힘들어하니, 다시 잘되었으면 싶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냥 혼자 외로운 게 백배는 나았다.

강희찬은 치열하게 고민하는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좁힌 거리에서 송재혁을 내려다보았다. 송재혁은 벽에 등을 기댄 채 눈높이가 한참 높은 이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그냥, 장난으로…….”

…이게, 그 순정만화에서 나온다는 벽치기, 뭐 그딴 건가? 왜 나오는 줄 알겠다.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해 튀어나올 것 같으니까. 물론 두근거림의 근본적 원인은 크게 다를 테지만.

“선이한테도… 정 선생한테도 그래요?”

이미 다 들은 호칭이다. 구태여 고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강희찬은 자연스레 흘러나온 호칭을 고쳐 말하고는 정색했다.

“네?”

“선이한테도 이렇게 놀리고 그러냐고요. 나한테 하는 것처럼.”

“아니…….”

…아직은 안 했지만, 앞으로 그럴 용의는 있다. 심지어 강희찬에게 하는 것보다 더 자주.

자신 있게 부정하지 못하는 송재혁을 보며, 강희찬은 혀를 찼다.

“그러지 말죠? 나한테 하는 거야 상관없는데.”

“…….”

누가 봐도 상관없지 않은데…….

말과 행동이 굉장한 인지 부조화를 일으켰다. 혼란으로 인해 송재혁이 금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릴 때였다.

“아!”

얼핏 보면 채권 채무 관계로 보이는 두 사람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닿는다.

송재혁과 강희찬의 고개가 동시에 한 곳을 향했다. 화장실에서 막 나온 이선이 방금 씻은 하얀 손바닥을 보이며 활짝 웃었다.

“희찬 씨!”

‘선이’가 반갑게 외친다. 저게 사람이라 망정이지, 꼬리 달린 개였다면 꼬리가 헬리콥터처럼 방방거릴 기세였다.

온몸으로 반가움을 뿜어내는 ‘선이’에게 ‘찬이’가 굳이 손을 흔들었다. 10미터 남짓한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 있었다.

“…….”

…아무리 아까 봤다지만, 나도 있어. 내 존재를 잊지 마.

속마음은 뾰족하게 뜬 두 눈이 대신했다. 어느새 강희찬은 채권 추심을 하는 기색을 지운 채였다. 송재혁을 위협하던 그늘도 사라졌다. 대신 그늘을 만드는 거대한 몸은 이선이 달려오는 방향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가증스럽게도 그 얼굴엔 옅은 미소까지 지어져 있었다.

“화장실 다녀왔어요?”

“아, 네. 손 씻고 왔어요.”

이선은 변명하듯 황급히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다른 일로 화장실을 갔다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갓 사귄 연인들 특유의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송재혁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하지만 가증스러운 커플은 그에게 어떤 신경도 써주지 않는다.

“손은 왜? 뭐 묻었어요?”

“아까 모기 잡았어요. 저번에 희찬 씨처럼 한 번에, 확. 여기 어디 떨어졌을 것 같은데…….”

가증스러운 커플은 이제 복도 바닥에 얼굴을 묻을 기세였다. 정 선생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강희찬까지 커다란 몸을 숙이며 모기의 사체를 찾을 줄은 몰랐다. 참신한 그림이었다.

“모기 못 잡잖아요. 어느 둔한 애가 잡힌 거지?”

언제 살벌하게 사람을 위협했냐는 듯, 장난스러운 목소리였다. 송재혁은 킹콩처럼 가슴을 때리고 싶어졌다.

“저도 가끔 잡을 때 있어요. 희찬 씨가 너무 잘 잡는 거지.”

두 개의 머리는 이제 조랭이떡처럼 하나로 붙어 있었다.

모기에 대체 무슨 추억이라도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유머 코드다. 아무래도 저 두 머리통은 저라는 존재를 까맣게 잊은 게 분명했다.

헛기침을 해서 두 사람에게 제 존재감이라도 어필하려던 때였다. 송재혁과 눈이 마주친 이선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 재혁아.”

‘…진짜 날 잊었구나.’

입 안에 쓴맛이 감돌았다. 공복인 탓만은 아니리라. 커플 사이에 껴서 밥을 먹겠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마음을 먹었지만, 생각보다 타격이 크다. 외롭다. 다 함께 있는데도 외로워. 이게 바로 ‘군중 속의 고독’이란 거였다.

“근데 뭐 하고 있었어요, 둘이? 싸웠어요?”

이선은 기묘한 투 샷의 이유를 물었다. 대체 왜 강희찬이 송재혁에게 벽치기를 시전할 기세였는지.

“안 싸웠어요.”

강희찬이 선수를 치듯 먼저 대답했다. 누가 들어도 선생님과 담임 반 초등학생의 대화였다. 유순하게 대답하는 강희찬 덕분에 송재혁은 상당히 억울해졌다.

…눈이 옹이구멍이 아닌 다음에야, 아까 그 자세가 어떻게 ‘싸움’으로 보인단 말인가. 누가 봐도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모양샌데.

정 선생의 반엔, 이런 일로 억울할 꼬마들이 많을 거다. 일방적으로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에게도 ‘싸우지 마. 사이좋게 지내야지’라며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를 할 테니.

이선은 어딘지 불만이 묻어나는 송재혁의 얼굴을 보며 갸웃했다. 싸우지 않았다니 그렇구나 했지만, 아까부터 부루퉁하게 입을 내미는 친구의 모습이 이상했다.

무슨 일인지 물으려던 이선의 정신을 강희찬의 목소리가 잡아챘다.

“가게 예약했는데.”

다분히 고의적인 타이밍이었다. 정이선은 홀랑 저녁 메뉴로 주의를 옮겼다.

“아, 정말요?”

“고기 먹죠. 이 핑계 대고 고기 좀 먹이고 싶은데. 내내 면만 편식했잖아요.”

“…편식 아니에요.”

편식과 가장 거리가 멀어야 할 직업을 가진 탓인지 이선은 의기소침했다. 아이들의 앞에선 어쩔 수 없이 잘 먹는 척을 해야겠지만, 사실 이선은 좋아하고 익숙한 것만 먹는 습성이 있었다.

“나랑 밥 먹을 때 고기 먹는 거 안 좋아했잖아요.”

“그거야, 자꾸 희찬 씨만 굽게 되니까 그랬죠.”

“오늘은 다 구워서 나오는 데로 예약했어요. 혹시 소고기 싫어합니까? 화로구이 집인데.”

이선을 얼러대던 강희찬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송재혁에게 물었다. 방금까지 염려와 걱정이 꿀처럼 뚝뚝 떨어지는 눈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조했다.

하지만 송재혁은 목소리 따위에 서운함을 느끼지 않았다. 말의 내용이 더없이 다정했으니 말이다. 목소리 따위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자고로 껍데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송재혁은 왕벌의 비행 못지않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기도 바빴다.

“그럴 리가요.”

소고기를 싫어하냐니. 참 유머러스하시지. 대체로 과묵한 편이었지만, 이렇게 결정구로 날리는 촌철살인의 유머가 있는 사람이었다. 매력적이다. 강희찬은 들고 있는 지갑의 카드 한도만큼이나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소고기. 얼마나 위대한 울림인가. 그간의 불만과 불평이 환상의 마블링에 의해 사르르 해체되는 미각세포처럼 녹았다.

어느새 송재혁의 얼굴이 바보같이 헤벌쭉 풀어진 채였다. 그 얼굴을 보며, 강희찬은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

…그러시겠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선이 나갈 수 있도록 방향을 이끌었다. 혹시라도 저 추잡한 얼굴을 보지 않도록 몸으로 바리케이드를 만들며.

* * *

도착한 화로구이 집은 전형적인 직장인 두 사람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내부를 가졌다.

단순히 인테리어만 고급이었으면 얼마나 마음이 편했을까. 백 퍼센트 예약제로 운영한다는 방침인 가게의 메뉴판은 그와 걸맞은 도도한 가격만이 즐비했다. 가격만으로도 놀라운데, 심지어 100g당 가격이다.

셋은 내부 테이블석에 자리를 잡았다. 커플이 나란히 앉고 맞은편에 친구가 홀로 앉는, 전형적인 위치로. 그건 여기까지 오는 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송재혁은 운전하는 강희찬의 옆자리에 자연스레 오른 친구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이게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인가. 기묘한 이해를 하면서. 물론, 정 선생이나 강희찬이 들었다면 기가 찼을 테지만.

어쨌든 처음 오는 가게에 도착한 두 친구는 같은 표정으로 메뉴판을 봤다. 차마 숨길 수 없는 질린 기색을 온몸으로 뿜어내면서.

“재혁아, 뭐 먹을래?”

이선이 먼저 굳은 결심을 한 듯 물어왔다. 아무래도 나름의 각오를 다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송재혁은 맞춰줄 수 없었다. 아무리 처음 생긴 애인을 자랑하는 자리라지만, 이건 너무 과하지 않은가.

송재혁이 먼저 운을 떼었다.

“야, 이거 너무…….”

두 사람이 메뉴판으로 시험공부를 하는 동안, 강희찬은 한 번 훑어봤다. 그러더니 탁 덮어버렸다. 주문을 받으러 온 종업원에게 코스 메뉴를 부탁했다. 선택하기도 전, 두 사람의 손에 있던 메뉴판을 강희찬이 직원에게 넘겼다.

세 사람의 메뉴판을 가져갔던 종업원은 이내 반가운 고기와 함께 돌아왔다. 어느 정도 구워져서 나오는지 이미 먹음직한 빛깔의 고기가 불판 위에 고고히 올라왔다.

“먹어보고 괜찮은 건 따로 주문해서 먹어요.”

“또… 시켜 먹어요?”

이미 불판을 장식한 고기를 가리키며 이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 양이 적게 나오는 편이라서 그래야 돼요.”

“아아…….”

“평소에 고기 잘 안 먹으니까, 이럴 때 많이 먹여야지.”

“저, 고기 잘 먹어요.”

강희찬은 가장 때깔이 좋고 통통한 고기 한 점을 이선의 앞접시에 놓았다. 젓가락으로 소금까지 콕 찍어서 고기 위에 올려주는 정성에 송재혁은 잠시 질렸다.

“잘 먹긴. 저번에 나랑 샤부샤부 먹으러 갔을 때, 풀때기만 건져 먹다가 배부르다고 나왔잖아요.”

사진으로 찍어서 광고로 써도 될 만한 비주얼의 채끝이 이선의 입으로 사라졌다. 합. 강희찬은 고기를 우물우물 씹는 모습까지 끈질기게 지켜봤다. 말로는 타박하면서도 행동은 유리구슬보다도 더 섬세하게 다룬다.

송재혁 역시 이선의 평소 식습관은 대충 알고 있었다. 집에 있을 때는 무슨 즉석 국밥을 종류별로 쌓아두고 먹는 것도. 강희찬이 괜히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리라.

귀한 애인에게 몸보신을 시켜줄 기회로 날 이용했구나. 송재혁은 강희찬이 대체 왜 이 자리를 마련했는지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다.

강희찬은 제 목적을 확실히 달성할 셈이었다. 그는 다시 불판 위에서 고기를 집어 이선의 앞접시에 두었다. 그리고 소금이 아니라 이선의 앞에 있던 고추냉이를 조심스럽게 고기 위에 올렸다.

“여기 고추냉이 안 맵긴 한데, 먹어볼래요?”

이번에도 강희찬은 이선의 입 안으로 고기가 들어가서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그리고 송재혁 역시 그랬다.

두 사람이 한 명의 먹는 모습을 지켜본다. 거지 같은 광경이었지만 왠지 이선에게서 오케이 사인이 나야, 제가 먹는 것이 허락될 것만 같았다.

비죽 튀어나온 이선의 입이 오물거리는 모습을 한참 볼 무렵이었다.

“매워요? 부추랑 먹을래요?”

“아니. 많이 안 매워요. 이 정도는 먹을 수 있어요. 희찬 씨도 먹어요. 재혁아, 많이 먹어.”

“아, 어. 잘 먹을게요.”

너만은 날 잊지 않았구나. 네 옆의 강희찬이 하도 없는 사람 취급을 해서, 난 또 내가 모르는 스텔스 기능을 얻은 줄 알았지, 뭐야.

“많이 드세요.”

이선의 말을 따라 하는 앵무새라도 되는 양 강희찬 역시 무심히 말했다.

너야 먹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감정이라고는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지만 송재혁은 개의치 않았다. 몇 점 집어먹으면 자신의 일당 정도는 가볍게 넘어갈 고기를 신중하게 집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찍지 않은 채 온전히 입에 넣었다.

최신 전투기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을 오늘 하루, 아니, 요 몇 시간 사이에 몇 번이나 느꼈던가. 하지만 고기가 들어온 순간 싹 잊혔다. 아까 메뉴판에서 봤던 가격이 너무도 합당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유명 식당 아들이라서 그런가. 고기면 다 맛있는 줄 알았던 송재혁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미슐랭 스리스타에 몇 년 연속으로 오른 한식당 아들내미의 입맛을 만족시킨 맛이다. 송재혁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울 수는 없다. 소고기 앞에서 울다니. 그런 나태한 짓을 할 순 없다.

“여기 엄청 맛있네요. 둘이 자주 오는 데예요?”

그래도 너무 말없이 처먹기만 하면 눈치가 보인다. 송재혁은 녹아 사라진 고기를 대신해 입 안을 채울 녀석을 눈으로 스캔하며 물었다.

“아냐. 나도 처음 와봐.”

“진짜?”

송재혁은 ‘진짜?’라고 묻긴 했지만, 딱히 궁금하진 않다. 단순히 입에 고기를 한 점 더 넣기 위한 추임새였다. 이곳에 이선이 처음 오건, 매일 저녁 오건 크게 흥미는 없다.

그런 송재혁을 대신해 대화를 받은 것은 강희찬이었다. 어느새 또 두 사람만의 세상이 열렸다.

“고기 잘 안 먹으려고 하니까 못 데려왔잖아요. 자꾸 면만 먹겠다고 하니까. 어제도 우동이나 먹겠다고 하고.”

“우동 맛있으니까……. 희찬 씨도 잘 먹었잖아요.”

야구장에서 들었던 것과 같은 대화의 흐름이 이어진다. 말을 들어보니, 이런 문제로 투닥대는 게 한두 번은 아닌 모양이다.

송재혁이 기억하기로도, 이선의 입맛은 간편하고 담백한 축에 속했다. 물론 기름진 중국 음식이나 고기를 먹은 적도 있었지만, 그건 보통 송재혁이 원했을 때였다. 생각해 보면, 이선에게 무엇을 먹고 싶으냐 물었을 땐 보통 먹기 편한 일품요리나 면 요리가 자주 나왔다.

먹어도 배도 부르지 않은 메뉴에 인상을 찌푸리며 다른 걸 먹자 했던 자신과는 달리, 강희찬은 이선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듯했다. 비록 그 식습관이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말이다.

친구와의 식사를 핑계로 고기를 먹여 몸보신을 시켜보려는 것도 이선을 향한 그의 배려 중 일부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송재혁은 새삼 몇 년째 알아온 공포의 직장 동료가 새로이 느껴졌다.

이선이 안전벨트를 매기 전까지는 시동도 걸지 않고 기다려주거나, 입 안에 들어가는 음식 하나 놓치지 않고 지켜보는 모습. 이선의 손가락이 움직일 새도 없이 챙겨 나르는 게 차라리 아버지라고 하는 편이 어울렸다.

하지만 가식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 강희찬이다. 구태여 그가 친구인 자신이 있다고 해서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할 이유는 없었다.

“희찬 씨도 먹어요.”

작은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이선은 어느새 탐스러운 고기 한 점을 강희찬의 앞접시에 두었다. 제 손을 두고 꼭 서로의 손으로 먹고 있는 커플을 보며, 송재혁은 마음 한 귀퉁이에 모가 났다.

아무리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창 꼴값을 떨 때라지만, 예사로운 꼴값이 아니다. 그냥 저 먹을 것은 알아서 먹는 게 효율적일 텐데 말이지.

송재혁은 중간에 헤어진 기간이 있더라도 이래저래 한 사람과 긴 기간 연애 중이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꼴값을 지켜봤지만, 슬슬 한계였다.

집게와 가위를 도맡아 들고 있는 강희찬의 모습도 놀랍고, 그런 강희찬을 세상 안쓰럽게 보고 있는 정이선도 놀랍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건 먹기 좋은 크기로 이미 잘려져서 나온 소고기를 굳이 두 동강 내는 강희찬의 손놀림이었다.

입 안을 적당히 채우는 고기의 볼륨. 씹었을 때 입과 코를 맴도는 육즙과 향. 그 모든 것을 심혈을 기울여 계산했을 주인의 노력 역시 댕강 잘리고 있었다.

“그, 그거 왜 잘라요? 잘라서 나오잖아요.”

강희찬의 앞에선 언제나 어깨가 80%는 수축하는 송재혁이라도, 이 순간만큼은 두려움을 잊었다. 당연했다. 대체 저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고기로 모자이크를 할 작정이 아니라면, 저 지랄을 떠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강희찬은 심드렁할 뿐이다.

“입이 작은 사람이 있으니까 배려해야죠.”

“네? 누가요? 누가 입이 작아요?”

“…….”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는 송재혁의 귀에 대답은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강희찬의 시선이 제 곁에 앉은 이선을 향해 내려왔다. 당연하게도 송재혁의 눈 역시 이선을 향했다.

정이선은 입에 음식이 가득 찼는지 꼭 다문 입술을 쭉 내민 채 오물오물 열심히도 먹고 있었다.

“…응?”

오롯이 자신을 향하던 네 개의 눈동자를 뒤늦게도 감지한다. 이선이 고개를 들어 갸웃했다. 송재혁과 강희찬을 번갈아 보며.

“정 선생, 입이… 작은 편이었나?”

송재혁은 새삼 친구의 얼굴을 살폈다. 슬쩍 봐서는 크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작아서 옹졸한 느낌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본인의 생김과 얼굴에 맞는 딱 적당하고 조화로운 크기였다.

비단 궁금한 것은 송재혁만이 아니다. 이선 역시 본인의 입이 작은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입 안에는 조금 전 강희찬이 앞접시로 열심히 퍼다 나른 고기가 채워진 채였다. 입속 내용물 때문에 이선이 고개만 갸웃대자, 강희찬은 친절하게도 먼저 답을 꺼냈다.

“말고. 안이 작잖아요.”

그것은 마치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주장하는 것만 같았다. 당연한 진리를 왜 모르냐는 듯, 눈빛만으로 송재혁을 깔보는 이는 여전히 현란한 솜씨로 고기를 조각냈다.

“…….”

깜빡. 깜빡. 그리고 또 깜빡.

오래된 핸드폰의 인터넷 속도처럼, 근 30년산 뇌는 뒤늦게 말의 참뜻을 이해했다. 그리고 강희찬이 어째서 정 선생의 입 안이 작은 것을 아는지에 대한 추정도 함께.

‘와, 진짜……. 와.’

송재혁의 눈이 그리 말했고.

‘뭐. 왜.’

강희찬의 시큰둥한 눈빛이 돌아왔다.

“…….”

이건 저 말을 바로 알아챈 내가 더러운 건가, 아니면 강희찬이 쓸데없이 당당한 것인가.

물론 정 선생이나 강희찬이나. 저 나이가 되어서 손만 잡는 연애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친구와 직장 동료의 애정 전선까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진 않았다고!

“…응? 왜들 그래? 뭐야?”

아무것도 모르는 이선만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제 애인이 방금 무엇을 까발렸는지도 모르는 순진한 반응이었다.

송재혁은 기가 막혔다. 요, 얌전한 고양이 같으니. 그렇게 죽어갈 것처럼 빌빌거리더니. 나한테는 어떻게 되었다고 말도 없이 몰래 이런 짓 저런 짓 다 하고…….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중에 둘만 남으면 실컷 놀려야지. 할아버지가 돼도 관짝에 들어갈 때까지 놀려야지.

고개를 갸웃하는 이선을 보며 굳게 다짐할 때였다. 송재혁의 정강이에 날카로운 통증이 스쳤다.

“악!”

본능적으로 허리를 굽히고, 무릎에 손이 갔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탓에 이선이 깜짝 놀랐다. 아무런 미동도 없는 강희찬과 상당히 대조되었다.

“……!”

이선은 재빨리 테이블 아래로 고개를 내렸다. 무릎을 감싸고 있는 송재혁의 손. 그 맞은편으로 꼬고 있는 강희찬의 기다랗고 묵직한 다리.

“…찼죠, 지금?”

이선은 제법 정색하며 강희찬을 보았다. 아마도 학교에선 저런 얼굴을 하겠구나. 아픔이 옅어짐과 동시에 송재혁은 생각했다.

“안 찼어요.”

“찼잖아요. 왜 거짓말하세요.”

“…….”

“희찬 씨, 왜 막 차고 그래요. 싸우면 안 돼요.”

“안 싸웠어요.”

그 말대로다. 아까부터 정이선은 자꾸 ‘싸웠다’라는 표현을 썼지만, 이건 어디를 보나 일방적으로 당한 거였다.

“희찬 씨.”

이선은 말 안 듣는 아이처럼 구는 강희찬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희찬 씨, 자꾸 이러면 속상해요. 목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강희찬은 먼저 꼬리를 내렸다.

송재혁은 그 순간 세 사람의 먹이사슬 관계를 이해했다. 초식동물에게 먹히는 가장 아래 단계의 정이선이 알고 보니 최상위 포식자였다.

“일부러 찬 거 아니에요. 다리 꼬다가 걸린 거지.”

“…진짜요?”

그럴 리가 있겠냐. 아무리 생각해도 제 애인을 괴롭힐 거라 여기고 찬 게 분명한데.

통증은 다 가셨지만, 마음의 상처는 남는다. 그 순간이었다. 이선에게 꼬리를 잔뜩 내리고 있던 강희찬이 서늘한 눈빛을 제게 던진 것은.

“…미안합니다.”

전혀 미안하지 않은 말투다. 정말 실수인가. 절대 신뢰가 가지 않는다. 송재혁은 최대한 늦게 사과를 받기로 결심했다. 발끝이 향한 곳이 조인트였다. 고의성이 다분하지 않은가. 이선 역시 미심쩍은 눈으로 자신과 강희찬을 번갈아 봤다.

그때, 강희찬이 눈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곁에 앉은 이선은 알아챌 수 없는 신호였다. 송재혁은 자연스레 그의 눈빛이 가리키는 곳을 봤다. 벽면에 매달린 메뉴판이었다.

‘뭐 더 시키지 그래요?’

사람에겐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한마디 말도 없이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뜻이 오고 갔다.

송재혁은 깨달았다. 그는 이선을 향해 활짝 미소 지었다.

“아유. 다리가 기시니까 그럴 수도 있지. 난 괜찮아, 정 선생!”

“…….”

손바닥보다도 작을 소고기의 마블링은 단순히 고기의 맛만을 부드럽게 하는 건 아니다. 그것은 인간관계에도 기름칠을 해주었다.

“아, 잘 먹었어요.”

송재혁은 잔뜩 기름기가 올라오는 얼굴로 가게를 먼저 나섰다. 배가 터져라. 아니, 터지더라도 먹겠다는 일념으로 느끼해진 소고기를 한계치까지 밀어 넣은 사람다운 모습이었다.

만족한 얼굴로 인사했지만, 뒤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다. 뭔가 싶어서 뒤를 돌아보니, 자신의 일행이 한참 뒤에서 또 둘만의 대화를 하고 있었다.

“희찬 씨, 돈 너무 썼어요.”

“이게요? 생각보다 안 나왔는데요? 난 예전에 감독님이랑 둘이 왔을 땐 백이십 넘게 나왔어요.”

“헉. 진짜요?”

“정 선생이 안 먹어서 그래요.”

“저 많이 먹었는데요. 희찬 씨가 굽느라고 안 드셔서 그런 거 아니에요?”

카드를 지갑에 넣고 있는 강희찬의 걸음은 달팽이보다도 느렸다. 평소라면 상상도 못 할 보폭의 이유는 곁에서 걷고 있는 이선 때문이었다.

“…….”

…내 존재를 잊지 마.

배는 한껏 따뜻하지만, 마음은 다시 추워진다. 쩝. 송재혁은 입맛을 다시며 두 사람을 지켜봤다. 애인의 지출에 가슴 아파하던 정이선과 눈이 마주쳤다.

“아! 재혁아. 먼저 나와 있었어?”

어. 분명 셋이 같이 나왔는데, 지금 보니 나만 먼저 나왔네. 길도 하나뿐인데 너희는 대체 어딜 다녀왔니?

“주차 좀 멀리했어요. 차 가져올 테니까,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요.”

“아, 그럼 아이스크림 먹을까요? 저기 가게 있는데.”

강희찬의 걸음이 멈추었다. 뒤를 돌아 이선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분홍색 간판을 보았다. 요새는 어디에나 있는 유명한 아이스크림 전문점의 간판을 보자, 그는 아까 넣었던 카드를 선선히 다시 꺼내었다. 그리고 이선을 향해 내밀었다.

“사고 있어요.”

“괜찮아요. 이건 제가 살게요.”

“그냥 내 걸로…….”

“재혁아, 가자!”

강희찬의 말을 중간에 끊은 이선은 재빨리 송재혁의 팔을 잡고 뒤를 돌았다. 억지로 카드를 쥐여 줄 고집을 처음부터 차단했다.

“어어…….”

친구는 여러모로 대단해져 있었다.

“뭐 먹지? 콘으로 하나씩 먹을까?”

“돈 아깝잖아. 이거 하나 먹자.”

“그래도 돼?”

송재혁의 동의를 얻은 이선은 늘 강희찬과 함께 먹는 파인트 사이즈로 결제를 마쳤다. 여기는 내가 계산하겠다는 잠깐의 실랑이가 오갔지만, 결국 이선이 이겼다. 오늘의 이선은 제법 들떠 있었다. 그건 자신에게 애인을 소개했다는 뿌듯함에서 왔을 것이다.

송재혁은 이선이 조금 더 뿌듯함을 느끼도록 가만히 두었다. 아이스크림 앞에 당당히 선 이선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이거랑 요거트랑…….”

“어? 야, 잠깐만. 그거 먹게?”

“응. 왜?”

이선뿐만 아니라 아이스크림을 퍼내려던 직원의 손도 멈추었다. 뭐가 문제지? 송재혁을 향한 두 사람의 눈이 그리 묻고 있었다.

“왜? 이 맛 싫어해?”

뭐, 굳이 대답하자면 좋아하진 않는다. 아예 못 먹지는 않지만,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누군가 권한다면 한두 입 정도는 먹을 수 있어도 돈을 주면서까지 먹고 싶은 맛은 아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송재혁의 호오가 아니었다.

“강희찬, 그 맛 안 좋아하잖아.”

“희찬 씨가 왜?”

“우리 구단엔 걔가 그거 먹여서 여자친구 찼다는 소문까지 있어.”

“…어?”

“그 후배가 얘기해 줬거든. 이거 먹여서 싸웠다고 했었나 헤어졌다고 했었나. 아무튼, 안 좋아하는 건 확실하다니까, 이거 말고 다른 거 담아가는 게 낫지 않겠……. 정 선생?”

여러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오늘은 소고기를 사준 은인이었다. 게다가 앞으로는 친구를 부탁하고 싶은 사람이었고. 그랬기에, 조금은 너그러운 마음을 발휘했다. 어차피 정 선생도 이 맛을 좋아하진 않았으니, 굳이 세 사람이 다 좋아하지 않는 맛을 살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이선의 기색이 이상했다. 마치 자연재해에 전 재산을 잃은 사람처럼 허망한 눈이 유리 너머의 녹색 아이스크림을 향했다. 한참을 그러더니, 이선은 울상이 된 얼굴로 직원을 보았다.

“저기… 아이스크림 취소하고, 음료수로 바꿀 수 있을까요?”

“아, 네. 가능하세요. 결제하셨던 카드 주시면 취소하고 다시 결제해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귀찮을 법도 했지만, 이선의 기색이 심상치 않았던 모양인지 직원은 별 불평 없이 결제 취소를 진행했다. 오히려 끝이 살짝 내려간 커다란 눈에 수심이 어리는 모습을 걱정스레 보기까지 했다. 송재혁 역시 조금 전과는 달리 축 처진 어깨가 갑자기 신경 쓰였다. 뭐지?

“아, 너는 아이스크림으로 먹을래? 그래도 돼.”

“아냐. 나도 음료수로 마실래. 난 커피 맛으로.”

“그럼 세 개 다 커피 맛으로 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이선의 보라색 카드가 다시금 기계에 긁히고 직원은 음료 석 잔을 내어왔다. 각자의 몫으로 하나씩. 강희찬의 것은 이선이 들고 가게를 나오자, 앞엔 검정 세단이 이미 세워져 있었다. 강희찬의 차였다.

‘역 앞까지는 태워달라고 해도 괜찮겠지?’

배가 부르니 걷는 것이 끔찍했다. 그래도 정 선생이 같이 있으니 야박하게 대놓고 내리라고 하지는 않으리라.

송재혁은 반짝거리는 세단의 눈치를 보며 슬슬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자연스럽게 뒷자리에 몸을 실으려고 할 때였다. 이선이 자신의 뒤에서 순번을 기다리듯 서 있었다.

“야. 너 왜 여기 타? 앞에 타.”

“…….”

“앞에 타. 뭐야.”

개를 쫓아내듯 이선을 조수석으로 보냈다. 이선이 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송재혁은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뭐야. 커피 샀어요? 아이스크림 먹는다면서?”

강희찬은 이선이 내미는 음료수를 보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이선은 대답 없이 가만히 있었다.

“…….”

“아이스크림 먹고 싶은 거 아니었어요? 왜 커피를 사 와. 내일 월요일인데 저녁에 커피 마셔서 잠 못 자면 어쩌려고.”

“희찬 씨.”

목소리는 잔뜩 풀이 죽은 채였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파는, 크림이 잔뜩 올라간 커피를 처음 본 강희찬은 깜짝 놀랐다.

방금 전만 하더라도 품에 안길 기세로 설탕처럼 굴던 이였다. 잠깐 차를 가지러 갔던 사이에 어깨가 추욱 처져서는 데면데면하게 구는 것이 이상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그렇게 경고를 했건만. 또 ‘선이’ 어쩌고 하는 거로 놀린 건가.

강희찬의 매서운 시선이 송재혁을 향했다. 송재혁은 두 눈을 소처럼 크게 뜨더니, 고개를 재빠르게 저었다. 결백을 주장했지만, 의심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희찬 씨… 그 맛 안 좋아한다면서요.”

“네?”

“근데 왜 말을 안 해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막…….”

“무슨 소리야? 내가 뭘 안 좋아하는데.”

이선은 결국 조수석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희찬은 오히려 답답해졌다. 대체 5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희찬 씨, 비밀 너무 많아요.”

애가 닳아버린 강희찬은 바짝 조수석으로 몸을 당겼다. 이선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잔뜩 비틀어보아도, 눈에 보이는 건 통통한 왼뺨뿐이다.

강희찬은 이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도록 손에 힘을 주었지만, 이선 역시 몸에 잔뜩 힘을 주었기에 여의치 않았다.

“비밀은 무슨 비밀. 나 비밀 없어요.”

“자꾸 나만 모르고……. 왜 싫어하는 거 주는데 참고 먹어요. 미안하게.”

이런, 씨발. 그거였구나.

이렇게 구는 원인은 딱 하나였다. 그리고 이선이 모르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일을 키운 원흉도 한 명, 아니, 두 명뿐이다.

뒷좌석에 앉은 한 놈과 제집에서 속 편하게 게임이나 하고 있을 왕대가리.

조져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일단 중요한 것은 이선이었다. 강희찬은 조수석을 향해 더 몸을 기울였다.

“나 그거 안 싫어해요. 미친놈도 아니고, 싫어하는 걸 어떻게 먹어.”

“안 좋아하는 거 맞잖아요. 희찬 씨, 왜 자꾸 숨겨요.”

“아니…….”

홰액. 공격적으로 고개를 돌린 이선의 눈가가 반짝반짝 빛났다.

앞 유리에서 넘어오는 불빛이 번져 보기에는 더없이 예쁜 얼굴이었다. 하지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물기로 반짝이는 이선의 눈망울은 타격감이 좋은 4번 타자보다 두려운 존재였다.

“예전에도 그랬어요. 희찬 씨는, 아무것도 얘기 안 해주고 혼자서…….”

“선아,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닌 거 알잖아요.”

단단한 팔이 결국 이선의 몸을 당겨 안았다. 고집스레 창밖만을 보던 고집도 결국 무너졌다. 이선은 익숙하면서도 언제나 설레는 너른 품에 얼굴을 마음껏 파묻었다.

“아이스크림은… 아, 솔직히 먹다 보니까 좋아졌어요. 나 이제 그 맛 좋아해요. 억지로 먹은 적 없어요.”

“…왜 미리 말 안 해줬어요.”

“이렇게 속상해할 테니까. 당연하잖아요.”

“…….”

“그리고… 정 선생이 좋아하는 줄 알고. 좋아하는 거 같이 먹고 싶어서 그랬어요. 속이려던 거 아니에요.”

훌쩍. 서러움을 삼키는 소리가 가슴을 파고든다. 강희찬은 이선을 안은 팔에 힘을 더 주었다. 이선 역시 꾸물거리며 양팔을 강희찬의 허리에 감았다. 서로를 달래주는 온기였다.

한참을 안겨 있던 이선의 눈물은 어느새 말라 있었다.

“희찬 씨. 다음부터는 숨기는 거 있으면 안 돼요. 솔직히 다 말해줘요.”

“네. 그럴게요.”

이선에게는 보이지도 않겠지만 강희찬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늘 팬티 뭐 입었는지 말해줄까요?”

“그, 그런 건 왜…….”

“왜. 비밀 없어야 되잖아요.”

“…장난치지 마세요.”

갑자기 이상한 쪽으로 튀어가는 대화에 이선은 코를 훌쩍이며 뒤늦게 강희찬을 밀어냈다. 한껏 끌어안고 있던 단단한 허리에서 손을 떼고, 그의 몸을 밀었을 때. 이선은 뒷좌석에서 묘한 얼굴을 하던 송재혁과 눈이 마주쳤다.

“재, 재혁아……! 어,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

…언제부터냐니. 두 시간 전부터 계속 같이 있었단다, 친구야. 내 존재를 잊지 마.

이선은 죄를 지은 양 파드득대며 지나칠 정도로 몸을 조수석으로 물렸다. 그에 비해 강희찬의 기색은 태연하기만 했다.

‘아직도 타고 있었어?’

눈빛으로 말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어… 저기……. 아, 맞다. 희찬 씨, 재혁이 오늘 차 안 가져왔대요. 여기서 집 가까우니까, 거기 갔다가…….”

이선이 뒤늦게 손을 허둥거리며 강희찬에게 말했다.

“아, 아니, 난 지하철역 앞에서 내려도 괜찮은데.”

“왜? 타고 가.”

애정행각을 들켰다는 민망함으로 잔뜩 얼굴이 붉어진 주제에, 잘도 말하는구나.

여기에 더 있다가는 무슨 염병을 더 볼지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송재혁이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이유는 그뿐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강희찬의 기색을 보니, 아이스크림 취향을 까발린 게 자신이라는 걸 아예 확신하고 있었다. 이 차에 더 타고 있다간 저승사자가 저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아까도 뻔뻔스레 남의 조인트를 까지 않았던가.

‘차라리 지금 뛰어내릴까?’

그런 생각을 하던 때, 고급 세단은 미끄러지듯 출발했다.

“그냥 집까지 타고 가세요.”

강희찬은 바뀌는 신호를 확인하며 무심히 말했다.

“아니, 괜찮은데…….”

“화요일에 출근하면 어차피 만나잖아요. 오늘 몸이라도 편해야죠.”

“그래, 같이 가자.”

눈치가 둔한 이선은 휙 지나간 소름 돋는 말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다. 태평히 음료수나 빨며 말한다. 하지만 송재혁은 강희찬의 참뜻을 이해했다.

‘오늘 일은 화요일에 얘기할 테니까, 그냥 얌전히 갑시다.’

룸미러를 통해 자신을 흘긋 보는 눈빛에 송재혁은 얼어붙었다.

…역시. 호랑이가 풀때기를 사랑한다고 해서, 호랑이가 먹이사슬의 최하층이 되는 건 아니었다. 고통받는 것은 오직 저뿐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지도 모른다고.

“…….”

“아, 음료수도 맛있다. 그치, 재혁아?”

“너무 많이 마시지 마요. 커피니까. 갈 때 아이스크림 사서 갈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이선과 화요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송재혁, 그리고 화요일만을 기다릴 강희찬. 기묘한 먹이사슬을 태운 세단은 밝은 불빛이 가득한 도로를 서서히 달리기 시작했다.

야경이 꽃망울처럼 흐드러진 밤거리. 밝기만 한 도시의 야경을 나란히 지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송재혁의 눈에 들어왔다. 기어 위에 겹쳐 올라온 두 사람의 손을 보며 송재혁은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어떠한 풍경이 와도 저 손이 떨어질 일은 없겠다고. 그런 기분 좋은 예감이 함께하는 일요일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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