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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완전히 돌아오기도 전, 가장 먼저 인지한 감각은 무거움이었다.
모로 누운 몸을 뒤에서부터 족쇄처럼 얽어매고 있는 묵직한 온기. 정수리 위에서 오가는 누군가의 더운 숨. 그런 것들이 하나씩 감각의 범위로 밀려든다. 피로감과 고통을 느끼는 건 이후의 일이다.
“으으…….”
온몸이 끊어질 듯 저리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아릿하다. 몸 위에 얹어진 것이 너무 무겁다. 고른 간격으로 스치는 숨소리가 너무 덥고, 신경이 쓰인다. 이선은 여러 불만과 함께 눈을 겨우 떴다.
누군가의 하얀 손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제 가슴께에 머무는 커다란 손이었다.
손을 보고 나니, 상체를 누르는 버거운 무게의 출처를 가늠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누군가의 팔 무게일 것이다. 아마도 다리를 옭아매는 건 그의 다리겠지.
겨우 눈만 굴려 시선을 내렸다. 역시 예상대로, 자신의 다리를 옭아맨 누군가의 길고 굵직한 다리가 그곳에 있다.
이렇게 묵직한 팔과 다리를 남의 몸 위에 올려두는 잠버릇이라니. 심보가 고약하다. 그 외에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선은 엉겨 있는 다리가 하나같이 맨살이라는 사실은 애써 외면했다.
모로 누운 채 눈만 멀뚱히 뜨고, 문득 이 상황에 대한 불만이 더욱 깊어졌다. 자신은 아기들이 잘 때 끌어안는 애착 인형이 아니다. 멋대로 팔과 다리를 올려두는 바디 필로우도 아니었다.
뒤에서 자신을 감싸 안은 온기와 무게가 점점 답답해진다. 조금 전까지 이 무게에 짓눌린 채 꿈도 꾸지 않고 잘 자고 있었다는 사실은 모른 척했다.
기억하지 못하는 새벽엔 따끈한 체온이 주는 안락함을 파고들기까지 했다는 점은 이선이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그저, 지금은 팔 하나도 지나치게 무거운 사람에 대한 불만이 샘솟는다.
몸 위에 커다란 돌이 올려진 것만 같다. 아니, 차라리 돌이 올라와 있는 게 더 움직이기 수월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돌에는, 긴 팔다리는 달려 있지 않을 테니까. 이렇게 남을 성가실 정도로 얽어매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이선은 힘겹게 몸을 비틀었다. 근육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어딘가에서 자꾸 둔통이 느껴진다. 몇 번의 꾸물거림으로 미약한 틈이 겨우 생겨났다. 들인 힘에 비하면 결과는 가소로울 정도로 미미해서 허탈할 지경이다. 눈물이 다 날 뻔했다. 하지만 그 소박한 결과마저도 오래 유지되진 못했다.
겨우 밀어내던 팔이 다시금 이선의 몸을 꼭 둘렀다. 손도 대지 못했던 다리에도 잔뜩 힘이 들어왔다. 모로 돌아누웠던 몸이 순식간에 돌려졌다.
“아……!”
정신을 차려보면 일정하게 쿵쿵 뛰고 있는 누군가의 심장 소리가 들린다. 얼굴이 타인의 맨가슴에 닿았다는 자각은 다음이었다. 어젯밤 내내 제 위에서 시야를 차단했던 이의 몸이라는 건 너무도 분명했다.
아무리 오랫동안 봤고, 심지어 맨살끼리 맞닿은 바가 있다고는 해도 얼굴이 닿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맨살이 닿은, 단단한 가슴팍에서 얼굴을 떼고 싶었다. 민망하고 부끄럽다. 게다가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끙끙거리며 몸을 뒤척여보았지만, 강희찬의 팔 힘은 저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 자요.”
꺼끌꺼끌한 목소리가 이선의 정수리를 스쳤다. 입술을 딱 붙이고 말을 했는지, 웅웅거리는 진동이 이선의 머리를 울린다.
“아니…….”
목소리만 들어도 잠에 취한, 잠이 덜 깬 이가 하는 소리였다. 게다가 내용은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학교에 내가 전화해 줄 테니까…….”
“…….”
‘…대체 전화해서 뭘 어떻게 하려고?’
이선은 잠시 반항을 멈추었다. 자는 이가 하는 허튼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지만, 그의 뒷말이 궁금해졌다.
“…….”
평소에 덮는 것보다는 가벼운 이불이 엉겨 있는 두 사람을 덮고 있다. 얇은 천이 두 사람 몫의 온기를 가두었다. 그 안에서 데워지는 따끈한 맨살은 왠지 모르게 씻은 것처럼 보송했다. 강희찬뿐만 아니라, 자신의 살갗까지도.
기분 좋게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팔은 이선을 바투 끌어안았다. 머리 위에서 울리는 쌔근거리는 숨소리는 악마의 속삭임보다 더욱 질이 나쁘다.
피로가 남은 눈꺼풀이 점점 가라앉는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일정히 부풀었다 내려앉기를 반복하는 가슴이 느껴진다.
완전히 잠에서 깼었다고 생각했던 이선은 뒤늦게 자신이 눈을 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일정한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까무룩 잠이 들 뻔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체득했다. 이런 일이 있던 날에는 무조건 늦잠으로 인해 지각의 위기에 처하곤 했다.
이선은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잠을 떨쳐 냈다. 그때마다 얼굴을 스치는 단단한 근육이 주는 온기는 애써 무시했다.
괜히 말을 하다 중간에 그만두어 사람을 궁금하게 만들다니. 게다가 학교에 전화를 해주겠다니. 무슨, 자식 버릇을 나쁘게 만드는 부모도 아니고.
3년째 익혀온 공무원의 생활 패턴은 머리보다 몸이 더 잘 기억하고 있다. 노예는 피로와는 별개로, 움직여야 할 때를 너무도 잘 아는 슬픈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윽.”
끙끙대는 소리를 애써 눌러 참았다. 제 몸을 이렇게까지 바싹 끌어안고 있었다. 그만큼 가까이 있는 강희찬이 자신의 목소리에 잠이라도 깬다면. 그래서 눈이라도 마주치면, 뒷감당할 자신은 도무지 없었다. 민망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닿아 있던 사람을 아침에 어떤 얼굴로 마주하는지는, 이선이 한창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때 봤던 영상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질러대는 근육의 비명을 무시하며, 이선은 온몸에 조금씩 힘을 주었다.
옭아매는 온기를 조심스레 들고 상체를 일으켰다. 일어난 자리엔 팔베개를 해주듯 목 아래를 받치고 있던 강희찬의 팔이 남는다.
“흐으…….”
팔 하나 치워내는 것도 이렇게 힘들었는데. 이선은 서러움을 애써 누르며 팔보다는 더 무거운 다리를 제 몸에서 떼어내려 했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서 순간 눈물이 핑 돌았지만, 자유를 얻기 위해선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 과정이었다.
‘…린치당하면 이렇겠지?’
그리고…….
이선은 상반신을 드러낸 채 예쁘게 자는 어린 얼굴을 노려봤다.
강희찬은 무서운 사람이었다. 장담할 수 있다. 집단폭행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이것보다는 덜 고통스러울 거라고.
혼자서 몇 명분의 고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괘씸해졌다. 게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쌔근쌔근 자는 모습은 더욱 괘씸하고.
끙끙거리며 침대 아래로 발을 내리는 순간, 그를 향한 원망은 더욱 짙어졌다.
“…….”
아래에 허한 기분이 감돈다. 그리고 딱히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다리엔 몸을 가려줄 그 무엇도 없었다. 심지어 속옷까지도. 아무것도 없는 하반신 위로, 상체에는 강희찬의 티셔츠가 걸쳐져 있었다.
‘대체 왜……?’
유명 만화 캐릭터처럼 티셔츠만 입고 있는 제 꼴에 대한 서러움은 둘째였다. 캐릭터야 귀엽겠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정이선이 궁금한 건 그저 ‘왜?’일 뿐이었다.
대체 왜 티셔츠인가. 이선의 것도 아닌, 그의 것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바지보단 티셔츠를 입히는 게 더 수고로울 것 같은데. 남이 입었던 속옷에 손을 대기 싫었을까? 꽤 깔끔한 성격인 것 같으니, 일리가 있는 추리였다.
티셔츠 아래로 얼핏 제 물건이 비추었다. 맨 성기를 의식하자 수치심이 밀려든다. 어젯밤엔 멋진 야경을 비추던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빛 탓인지도 모르겠다.
이선은 애써 허한 하반신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대신 시계를 찾았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봐도, 이 넓은 방 안에는 조그만 시계 하나조차 없었다.
이상할 건 아니었다. 시계를 대신할 제 핸드폰을 찾기 위해 이선은 주위를 둘러봤다.
어제는 어둡고, 경황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역시 넓고……. 좀 지나치게 깔끔했다. 옆에서 눈을 감고 있는 얌전한 얼굴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모델 하우스에서 일어났을 거라 착각했을 만큼.
이선은 몇 번이나 엉덩이를 움직인 후에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어선 채로, 동화 속 공주님처럼 자는 건장한 남자와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넓은 편이다. 그래도 어제 느꼈던 만큼의 막막함은 아니다. 어제 남자의 몸 아래에서 느꼈던 침대는 이 방만큼 끝이 없었다. 하지만 아침 햇살 아래에서 내려다본 침대는 이선의 자취방에 있는 것보다야 컸어도, 침대일 뿐이다.
“…….”
그의 말은 언제나 옳다. 섹스는 별것 아니라는 말까지 포함해서.
이선은 강희찬 너머, 침대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제 옷을 찾아냈다.
걸음걸음 울리는 진동이 온몸을 들쑤셨다. 허리를 굽히고, 속옷을 꿰입을 무렵 끙, 하고 앓는 소리가 새었다. 소리를 들었는지 강희찬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한숨 같은 숨이 흘렀다. 이선의 뒤로 들이닥치는 햇살이 숙면을 방해하는지도 모르겠다.
‘…괘씸해.’
속옷이 걸쳐진 순간, 그래도 최소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킨 이선은 입을 비죽였다. 이 정도면, 당장 강희찬이 눈을 뜬다고 해도 아주 부끄럽지는 않을 거다.
본인은 속옷을 입었으면서 저에게는 티셔츠만 입혀놓은 알 수 없는 배려도. 분명 같이 섹스를 했는데 혼자만 늦잠을 자도 되는 그의 직업도. 미간을 찌푸린 채 얌전히 자는 얼굴까지.
하나같이 괘씸해서 이선은 햇살이 그를 괴롭히도록 내버려둔 채 방을 나서기로 했다. 분명히 그리 마음을 먹고 발걸음을 방문 근처까지 옮겼다. 그러나 문을 열고 나설 무렵, 걸음은 다시 잠자는 공주를 향했다.
‘아직 나이가 젊으니까.’
기껏 잘 태어난 얼굴에 주름이 일찍 지는 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강희찬 본인이야 신경 쓰지도 않을 테지만. 이 얼굴은 보는 사람에겐 적당한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이타적인 생김이니까.
이선은 창가에 다가섰다. 그리고 암막 커튼을 꼼꼼하게 닫았다.
“…….”
그래도 잘 때나마 편히 쉬기를 바랄 뿐이라고. 출근하는 자신을 대신해, 그라도 편히 쉬었으면 좋겠다고. 단지 그뿐이라고 되뇌며.
강희찬이 깰 것이 마음에 걸려, 이선은 도둑처럼 남은 옷을 들고 거실에 나왔다. 그제야 바지 주머니에 있던 시계로 시간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제발 침실 밖에도 씻을 곳이 하나 정도는 있기를.
없다면 주방에서라도 씻고 나갈 각오로, 욕실로 추정되는 문을 조심히 열었다. 다행히 한 번에 정답이었다.
어제 봤던 몇 가지 화장품들이 여기에도 있다. 역시 까다롭긴 한가 보다. 샴푸든 바디 제품이든, 마트에서 행사하는 것으로 적당히 쓰는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화장품들이 헤쳐 모인 화장대를 지나, 세면대 앞에 섰다. 물을 틀려던 이선의 손이 멈추었다. 세면대 위에는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칫솔 하나가 있다.
“…….”
언제 두었을까?
생각은 자연스레 지난밤의 강희찬을 향했다.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댔다. 침대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도록 옭아맸다. 울면서, 기어서라도 조금이나마 그를 피하면, 시트를 겨우 잡은 손이 무색하게 다시 그의 몸 아래로 끌려갔다. 주름이 지는 시트가 마치 자신의 처지처럼 느껴져서, 퍽 속상했다.
그것이 서러워 몇 번이나 울음을 터트렸다. 강희찬이 무섭게 다그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눈가엔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괜찮다는 듯. 달래는 온기에 취해, 조금쯤은 그에게 매달려보다가도 까무룩 정신을 놓기를 반복했다.
‘사람을 몇 번이나 정신을 놓게 하더니.’
정신없이 잠든 자신에게 티셔츠를 입힐 정신과 체력이 있었단 소리다. 대체 왜 속옷 없이 티셔츠 한 장뿐인지는 모르겠으나. 게다가 눈을 뜬 정이선이 침실에 붙은 욕실을 사용하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새 칫솔을 꺼내두었고.
정말 민망하지만. 헐벗었던 아랫도리를 포함해, 보송한 몸의 이유도 대충 예상이 간다. 단순히 에어컨의 냉방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정신이 없었어도 이런저런 것들이 묻어 있던 몸을 남이, 그것도 강희찬이 처리해 줬다니. 새삼 되새겨본 사실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차라리 그가 생김처럼 무심한 사람이었다면……. 그래서 간밤의 민망한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덜 부끄러웠을까?
이선은 부러 과장된 거친 손짓으로 칫솔의 포장을 뜯었다. 치약을 짜서 조용히 양치를 하고, 세수까지 마쳤다.
별것 아니었다.
세상이 무너지거나, 지구의 자전 방향이라도 바뀌는 줄 알았는데. 날씨도 여전했고, 출근하는 것도 똑같았다. 그 사실이 퍽 우스웠다.
‘이게 대체 뭐라고.’
그러고 보면 어머니의 뒤를 따라 학교를 나섰던 다음 날도 이랬다. 시간을 알리는 태양은 원망스레 떴고, 학교가 휴교령을 내린 것도 아니었다.
…고작 이거였다. 이렇게 별것도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의 마음이란 것도 남에겐 이 정도의 영향력도 없는 하찮은 것일 테다.
“…….”
멍한 시선은 한동안 거울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닌 남자는 여전히 안에서 이선을 뚫어지게 응시할 뿐이다.
* * *
교무실 선생님들의 절반 이상이 반소매를 입은 채다. 소수파이자 시대를 앞서가는 긴소매파는 적정 온도로 맞춰놓은 냉방 속에서도 더위를 타고 있었다.
이선은 이런 쪽으로는 전혀 트렌드세터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아침 일찍 집에 들러, 근육통을 참아가며 씻느라 대충 주워 입은 건 반팔 피케티였다.
평범한 광경마저도 지난주와 꼭 닮은 한 주의 시작이었다.
급식도 아이들은 평범하다 느끼지만, 이선은 꽤 마음에 들어 하는 콩나물국이 나왔고. 점심시간 중간에는 주말에 구웠다며 김경원이 쿠키를 내밀었다.
평소라면 배가 불렀어도 어떻게든 입에 밀어 넣어서 해치웠을 테지만, 그럴 순 없었다.
‘그 여잔, 정 선생한테 마음 있으니까.’
쿠키를 목전에 둔 이선의 귓가에, 누군가의 열기와 분노가 섞인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렸다.
여자 손바닥보다 조금 큰 봉투 안에 포장된 조그만 쿠키들을 지그시 보았다. 잠깐의 고민 끝에, 이선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거절의 말을 뱉었다.
‘아……. 네에. 이선 쌤, 오늘 어디 아프세요?’
풀이 죽은 그녀의 목소리가 정이선의 양심을 콕콕 찔렀다. 그래도 모질게 마음을 먹어야만 했다.
그녀의 마음이 어떤지, 진위 여부는 알 바가 아니다. 사실 되는대로 한 소리였을 것이다. 말한 이의 성격상 그럴 확률이 높았고, 또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사실이라 하더라도, 자신에게는 어떤 영향력도 줄 수 없는 마음이었다.
쿠키를 거절하며 정이선은 마음을 먹었다. 죽을 때까지 신규진에게 제 마음 한 자락 비추지 않겠다고.
모두에게 나누어 주는 쿠키조차도 마음이 섞였다고 가정하면 부담스러운 짐일 뿐이다. 제 마음 따위. 신규진에게는 김경원이 내미는 쿠키보다도 거치적거리겠지.
그걸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을까. 아주 어린 시절부터, 누군가에겐 짐밖에 되지 못했으면서. 아직도 그걸 깨닫지 못했다니.
강희찬이 구태여 김경원까지 언급하며 얘기했던 건, 자신에게 이것을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원하지 않는 타인의 호의는 부담일 뿐이라고.
김경원이 앉은 왼편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못했다. 이선은 뻣뻣한 자세로 남은 퇴근 시간까지 오후 업무를 해야만 했다.
한쪽으로 비틀려진 채로 고정된 고개에서 고통이 밀려올 무렵이었다. 운동장에서 놀던 5학년 몇 명이 남는 생수가 있냐며 교무실을 찾아왔다.
땀으로 범벅인 얼굴들은 미적지근한 물로 목을 축이더니 금세 쌩쌩해진다. 그리고 조잘대는 목소리 역시 높아졌다. 그들의 담임인 유성희는 아직도 학교에 남아 있는 아이들을 보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비틀었다. 그녀의 얼굴엔 퇴근이 임박할 때 난입한 불청객에 대한 난감함이 짙게 깔려 있었다.
“학원 끝났어?”
“아니요. 아직 안 갔어요.”
“왜? 학교도 일찍 끝났는데 빨리 가지.”
“늦게 가도 돼요. 너무 일찍 가면 어린애들 있다고, 쌤도 놀다 와도 된대요.”
“아, 그래?”
그냥 얼른 가주지. 그런 얼굴이 고개를 끄덕이며 정면의 모니터 화면으로 다시 돌아간다.
떨떠름한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건너편에 앉아 있는 이선뿐이었다. 안타깝게도 아이들은 40대 사회인의 속마음을 뒤통수만으로 읽을 수는 없었다.
“그럼 계속 운동장에 있는 거야?”
…이번 건 조금 더 노골적이다.
이선은 외줄 타기를 하는 심정으로 눈을 굴렸다.
너희가 얼른 교무실에서 나가야 선생님 중 한 명이라도 ‘먼저 퇴근하겠다’라는 얘기를 할 수 있다고. 그런 의도가 보이는 그녀의 질문에 아이들은 순진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른 데 가야 할 것 같아요. 운동장에 차 들어와서 축구 못 하겠어요.”
“차? 아, 트럭? 방역이랑 청소한다고 했던 게 오늘이었나?”
유성희는 이선을 향해 고개를 갸웃했다. 이선은 컴퓨터 화면 한구석에 띄워둔 메모를 확인했다.
“아니요. 오늘은 울타리 수리 온다고 했었어요.”
“아, 그거?”
유성희는 교무회의 시간마다 열심히 메모한다. 그런 것에 비교해, 전혀 펼쳐지지 않는 그녀의 교무 수첩은 언제나 책꽂이 구석에 있었다.
“괜히 옆에서 공 가지고 놀다가 아저씨들한테 혼나지 말고, 집에 가야지. 학원을 가든가.”
“트럭 아닌데. 그냥 차였어요.”
“그냥 차가 운동장에 어떻게 들어와.”
눈가를 찌푸리는 유성희를 향해 세 녀석 모두 양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투표 모양이요.” 그 말이 나온 순간, 무엇인가 퍼뜩 이선의 머리를 스쳤다.
“아……!”
벌떡 일어났다. 바퀴가 달린 의자가 뒤편의 벽에 부딪히는 소리와 동시에, 교무실의 눈들이 이선을 향했다. 하지만 민망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재빨리 걸음을 떼었다.
“제가… 제가, 보고 올게요!”
왜 저래?
홱 뒤집힌 이선의 목소리를 듣는 모든 이의 속마음은 하나였다. 왜 저럴까. 그러면서도 아무도 이선을 잡거나 말릴 수는 없었다.
그나마 유성희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는지, ‘그래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젊은 선생이라고 무시하면, 그냥 행정실장 쌤 불러버려요. 요새 나이 먹어도, 말 안 통하는 사람들 많으니까.”
말이 통할지 말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절대 행정실장을 불러선 안 된다.
“…….”
몇 번 보았기 때문일까. 이제는 퍽 친근하게까지 느껴지는 독일 차 브랜드의 마크가 중앙현관을 나선 순간 눈에 확 들어왔다. 그 아래의 숫자 배열도 너무도 익숙하다.
차체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어제 저 차를 탔던 기억도 존재감을 키운다.
학생회장 선거를 해봤던 5학년 아이들이 ‘투표 모양’이라고 했던 건 저 앰블럼을 보고 했던 소리였다. 이선의 입에선 한숨이 절로 흘렀다.
열려 있는 후문을 통해 당당히도 들어왔는지,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그 위용을 뽐냈다. 학교 안에 붙어 있는 작은 주차장도, 인근 주민이 이용할 수 있는 건 교직원들의 퇴근이 훌쩍 지난 시간부터인데. 대체 애들이 공을 차며 노는 시간에 후문을 돌파하는 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실내용 슬리퍼를 갈아신지도 못하고 급하게 나왔던 이선의 걸음이 서서히 늦춰졌다. 나오긴 했지만, 막상 어제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강희찬을 마주하는 건 역시 브레이크가 걸렸다.
하지만 주저함도 없이, 세상의 상식과 동떨어진 남자는 당당하게도 검은색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뻗어 나오는 긴 다리부터, 문을 닫는 유려한 팔짓까지. 소비 욕구를 자극하는 멋진 한 컷이다. 하지만 실내화도 갈아신지 못하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급히 운동장으로 나온 정이선에게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장면일 뿐이다.
강희찬은 혼나러 가는 어린애처럼, 싫은 티가 팍팍 나고 있는 이선을 가만히 봤다. 일자로 굳게 다물려 있던 그의 입술이 비틀려 올라갔다.
“내가 전화해 준다니까, 학교는 기어코 왔어요? 선생도 개근상 같은 거 줍니까? 그거 받으면 교장 시켜줘요?”
질질 끌리는 슬리퍼 소리는 검은 차와 딱 1미터 정도의 간격을 유지한 순간 뚝 멈추었다.
뾰족한 시선이 이제는 움직이지 않는 이선의 발끝을 향했다. 하지만 마치 투명한 베를린 장벽이 사이에 있는 것처럼 틈은 좁혀지지 못했다.
‘대체 왜 거기 멈춰 있는 건데?’
이선은 제 얼굴과 발끝을 불만스레 보는 강희찬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곁눈을 돌렸다. 민망한 기억도 한몫했다.
“퇴근 안 해요? 애새끼들 수업은 진작 끝난 것 같은데.”
왜 뻔뻔해. 대체 왜. 뭘 잘했다고 저렇게 뻔뻔해.
어젯밤의 기억으로 인한 민망함을 황당함이 이겼다. 강희찬 못지않게 뾰족해진 이선의 눈이 그를 향했다. 그곳엔 여전히 잘못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당당한 얼굴이 있었다.
불만으로 부풀어 올랐던 이선의 입술이 겨우 열렸다.
“여기 이렇게 차 끌고 들어오시면 안 돼요. 애들 노는 운동장이잖아요.”
“트럭 하나 이 문으로 들어오던데요?”
“그건 울타리 보수하려고 부른 업체라서…….”
요는 그건가. ‘내가 안 들어오기를 바랐으면 왜 후문을 열어놨어?’ 뭐 그런 거.
강희찬의 행복지수는 정말 높을 거다. 스트레스도 받지 않고 살 테고. 그 자신의 정신건강에는 좋아 보이는 사고방식은 정상인인 정이선에게는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다.
아무튼, 얼른 이 차를 학교 부지 밖으로 보내야 했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이 자신이었으니 망정이지, 교장 선생님이라도 이 꼴을 보셨다면. 그래서 ‘정이선 선생님 찾아왔습니다’ 따위의 소리가 그의 입에서 나왔다면……. 상상만으로도 너무 끔찍하다.
무사안일주의의 현신인 자신에게 그의 존재는 어찌 보면 폭탄이었다.
원자폭탄은 자각도 없이 뻔뻔하게도 손가락으로 귀를 문질렀다. 마치 쓸데없는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면서 턱 끝으로 제 차를 가리켰다.
“아무튼, 퇴근 언제 하는데요?”
“제 퇴근은 왜요.”
“저녁밥이라도 사야죠. 어제도 결국 밥은 못 먹었잖아요.”
“…….”
대체 밥을 못 얻어먹어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단 말인가? 돈도 많이 벌고 있으면서. 제 월급의 절반도 안 되는 돈으로 1년을 사는 사람에게서 왜 그렇게 밥을 뜯어내고 싶어 하는 건지. 이유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아직 퇴근 시간 아니에요.”
이선은 눈을 가자미처럼 뜨며 시선을 피했다. 따가울 정도로 노골적인 시선이 이선의 얼굴에 붙어왔다.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도 간이 쪼그라들 것 같다. 어릴 적, 과자를 몰래 먹어버리고 부엌에 계신 엄마의 눈치를 볼 때도 이렇게 떨린 적은 없었다.
‘…거짓말은 아니야. 퇴근이 거의 가까워지는 것이지, 아직 아무도 집에 돌아가진 않았으니까.’
있을 곳을 정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던 남자는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럼 몇 시에 끝나는데요. 공무원들 시간 되면 꼬박꼬박 퇴근하는 거 아니었어요?”
‘언제 편견이야, 그건.’
이선은 비죽 나오려는 반항적인 말을 눌러 참았다.
목 끝까지 차오른 불만을 뱉었다가는, 그의 페이스에 넘어가 이것저것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선은 이제 슬슬 강희찬을 알아본 운동장의 사내아이들이 신경 쓰였다.
인원수가 특출나게 많은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 학교엔 야구부도 있다. 저번처럼 그의 주변을 둘러싸며 사인해 달라고 졸라댈지도 모른다. 그랬다간, 어린 학생들에게 쌍욕을 하는 영상이 인터넷에 퍼질지도 모르고.
“…….”
뼈를 얻어내기 위해선 살을 내어주어야 한다. 강희찬은 어딘가 열 살짜리 초등학생 남자아이들과 결이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각오를 다지듯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일단 차는 빼주세요. 애들 무서워서 이쪽 골대는 쓰지도 못하고 있잖아요.”
이선은 강희찬의 차가 없는 골대만 쓰고 있는 아이들을 향해 턱짓했다. 작은 몸들은 반쪽짜리 스포츠를 위해 이리저리 분주했다. 풋살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 풋살도 일단 골대는 두 개를 쓴다.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들이 쓸 법한 검은 차를 공으로 맞힐까, 그래서 “이놈들!”이라며 무서운 할아버지가 나올까 잔뜩 겁먹은 모습들이 안쓰럽기만 하다.
공을 차고 놀라고 만든 운동장인데. 그러라고 교육청에서 땅을 사고 학교를 지었을 텐데. 세상모르고 쿨쿨 자다가 느지막이 일어나 갑작스레 남의 학교에 난입한 사람의 눈치를, 대체 왜 아이들이 봐야 하는가. 잘못한 건 강희찬인데 말이다.
본인은 이 학교 출신이라고 하나, 지금은 초등학교에 섞이지 못하는 이질적인 존재일 뿐이다. 이선은 얼른 불순분자를 치워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강희찬은 이미 심드렁한 얼굴로 공을 차는 아이들을 보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시선이 떨어진다.
그는 여전히 남들보다는 제 용건이 우선인 사람이었다. 쉽게 정이선의 페이스에 넘어가 주지 않았다.
“퇴근. 언제 하는데요?”
“…….”
“말 돌리지 말고 대답이나 하세요.”
“…지금 챙기고 나올게요.”
이 정도면 포기할 수밖에 없다. 싸움에서 진 개처럼, 이선은 꼬리를 말고야 말았다. 하지만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날카롭게 치뜬 눈이 이선을 향했다.
“정확한 퇴근 시간이 대체 언젭니까?”
이 짧은 시간 동안 퇴근이란 단어가 얼마나 나왔던 걸까.
이선은 이제 슬슬 그가 짜증을 내지 않는 것에 신기함을 느끼고 있었다.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는 직감과 함께. 사실, 지금까지 성질을 부리지 않는 것이 퍽 용할 정도였다.
“정확한 시간은 따로 없는데……. 그래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5시 정도면 정리하는 편이에요.”
강희찬은 왼손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드문 일이었다.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할 땐, 보통 그의 팔엔 아무것도 없었다. 사복을 입을 때 가끔 손목 보호대를 차던 게 다였다.
메탈 재질의 시계가 흰 피부와 더없이 잘 어울린다. 아마 그가 모는 차처럼, 고급품이겠지. 딱히 그렇지 않더라도 착용한 사람 덕분인지 보기엔 가격대가 꽤 높게 느껴졌다.
“근데, 퇴근도 안 하고 뭐 해요? 5시 넘었는데.”
“아…….”
대충 얼버무리느라고 둘러댄 것뿐인데. 어느새 5시가 됐을 거란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퇴근은 6시에요’라고 말해도 통할 것 같지는 않았다.
“…….”
뻔한 거짓말을 들킨 것 같아서 퍽 민망해진다. 이선은 다시금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강희찬의 한숨이 책망을 대신했다.
“그쪽, 벌구과였어요?”
“…벌구가 뭔데요?”
강희찬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선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러고는 제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며 전화번호 하나를 읊었다.
“이거 맞아요? 교무실 번호. 학교 사이트에 나오던데.”
“…네?”
번호의 조합이 어딘지 익숙하다. 익숙한 조합인데, 왠지 끝자리는 다르다.
순간의 고민 끝에, 이선은 익숙함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홈페이지에 있다는 번호는, 아마 이선이 있는 3, 5학년 교사용 교무실이 아닌, 1층 본 교무실의 번호였다.
사고가 멈춘 채 굳어버린 이선을 무미건조한 통보가 깨웠다.
“10분 줄게요. 챙기고 나오세요. 10분 지나도 안 나오면 교무실로 전화할 거니까, 도망갈 생각 하지 말고.”
“아, 잠깐만요!”
교무실 전화번호가 맞는지 확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강희찬은 미련 없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선은 그의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차마 잡진 못했다.
무슨 짓을 할 생각인지, 모르니까 더 불안하다. 알아도 그건 그 나름대로 무섭겠지만.
“2, 20분! 아니, 30분은 있어야……!”
보통 5시면 퇴근한다는 거지, 반드시 그런다는 건 아니다. 게다가 자신처럼 연차가 적은 경우엔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먼저 가보겠다는 말을 꺼내기가 참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보통 이선은 유성희가 가고서도 10분 정도 업무를 보다가 슬금슬금 일어나곤 했다.
역시 일반적인 직장에 다녀본 적이 없어서 그럴까. 공무원이라면 따박따박 같은 시간에 퇴근할 거라는 편견부터가 이상했다.
하지만 강희찬은 오히려 이선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갖은 핑계를 대며 약속을 피하려는 걸로 보이는지, 그의 의심의 기색은 짙어지기만 했다.
손은 여전히 핸드폰을 쥔 채, 강희찬이 고개만 돌려 이선을 내려다봤다. 몇 초 정도 냉랭한 눈길이 이어졌다.
“5분이요.”
“…아…….”
“3분?”
“…아, 아니요! 10분, 좋아요.”
푹 수그리는 고개 위로 비웃음 같은 숨소리가 닿은 것도 같다. 이선의 어깨가 축 처진다. 하지만 그는 다시금 제 차에 체중을 푹 기대어 섰다.
…너무 나쁜 사람이다, 정말로.
슬리퍼를 신은 발로 한순간도 쉬지 않고 교무실까지 달렸다. 겨우 문 앞에 닿은 순간, 소란스러운 문소리가 이어진다. 교무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지만, 눈치를 볼 새도 없었다. 이선은 급히 자리의 컴퓨터를 끄며, 먼저 들어가 보겠다는 말을 했다.
아직 퇴근하지 않았던 유성희와 김경원이 얼른 가서 푹 쉬라는 인사를 건네주었다. 아무래도 그녀들은 엉망인 얼굴로 출근을 했던 이선이 마음에 걸렸는지도 모른다.
‘…얼굴이 대체 왜 그래요?’
‘어디서… 맞으셨어요?’
이미 오늘 아침, 출근한 이선을 향해 그녀들은 꽤 상처가 되는 반응을 보였었다.
그냥 늦잠을 자서 피곤한 것뿐이라고 둘러댔지만, 화장실에서 확인해 본 자신의 꼴에 이선 역시 놀랐으니 할 말은 없었다.
평소라면 의도하지 않은 꾀병을 부린 것만 같아 찔렸을 거다. 그리고 오늘 자신의 상태에 상당 부분 일조했던 남자에 대한 원망을 속으로 되뇌었겠지. 하지만 그럴 여유 따윈 없었다.
“내일 뵙겠습니다!”
인사를 마치기도 전에 교무실 문을 닫은 이선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이들에겐 평소 복도에서 뛰지 말라는 충고를 했다는 사실이 매우 찔린다. 마지막 남은 양심을 챙기며, 이선은 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잰걸음으로 중앙현관에 도착했다. 슬리퍼를 신발로 갈아신고, 신발 앞코를 땅에 콩콩 찧었다.
운동장 쪽으로 향하는 문을 나섰다. 초등학교와는 섞이지 못하는, 이질적인 자동차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차체에 비스듬히 기댄 커다란 인영도 그대로다.
꽤 나이가 많은 층들이나 탈 법한 차라고 생각했는데, 젊은 남자가 기댄 채 핸드폰을 만지고 있어도 큰 위화감은 없었다. 언젠가 함께 갔던 한옥식의 식당도 그렇고. 강희찬은 의외로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는 물건들과 잘 섞여 들어가는 사람이었다.
신발의 밑창이 아스팔트 바닥과 만나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운동장엔 아직도 아이들이 꽤 있다. 반쪽짜리 축구도 절찬 진행 중이다. 차가 무서운 건지, 아니면 그 차에 기대고 서 있는 키가 큰 어른이 무서운 건지는 모를 일이다.
“…….”
이선은 잘게 움직이던 걸음을 급격히 늦추었다. 다급히 나오는 모습을 보이는 건 뭔가 자존심이 상했다.
지금… 그와의 식사를 기대하고 나오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나?
강희찬이 그런 오해를 하는 건 어딘지 탐탁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이선은 다니기 싫은 학원에 억지로 끌려가는 어린애처럼 신발을 질질 끌었다.
‘…이런 게 보통인 걸까?’
그는 말했다. 섹스는 별것 아니라고.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나? 마치 지난밤의 일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늘 내내 이선을 괴롭혔던 둔통이 아니었다면, 분명 꿈이라고 생각했겠지.
“…….”
그에게는 자신과 몸을 섞은 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다음 날, 아무렇지 않은 기색으로 찾아와 저녁을 얻어먹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수 있을 만큼.
이건 강희찬의 성격이 특이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섹스는 그리 큰 의미가 될 수 없는 것일까. 이선으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가뜩이나 느린 걸음이 점점 더 느려지는 것만 같다고 느낄 무렵이었다. 이쪽으로 고개를 튼 강희찬과 눈이 마주쳤다. 곁눈으로 이선을 본 그의 얼굴 옆에는 핸드폰을 쥔 손이 붙어 있었다.
“아…….”
이선은 자신이 왜 숨이 차면서까지 복도를 잰걸음으로 달렸는지 퍼뜩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어디로 전화를 걸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대체 시간이 지나면 얼마나 지났다고……!
“아, 잠깐만요!”
숨을 골랐던 보람도 없게, 이선은 다시 걸음을 서둘렀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뛰어본 게 대체 언젠가 싶을 정도로 전력으로 내달렸다.
오늘 종일 이선을 괴롭혔던 둔통은 이미 잊은 채였다. 강희찬과 점점 가까워지는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핸드폰을 귓가에 대고 있었다. 그 사실이 더욱 공포스러웠다.
제 차에 기대어 있는 강희찬의 팔을 터치다운 하는 것으로 이선의 뜀박질은 끝이 났다.
호흡이 달려서, 전화를 끊어달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허리를 굽힌 채 숨을 고르며, 겨우 ‘강, 희찬… 씨…….’를 말해내는 이선의 등 위로 커다란 손이 덮인다. 땀이 배었을지도 모를 등을 단단한 손이 슬슬 쓸어주었다.
“…아닙니다. 잘못 걸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순간, 강희찬의 수상한 통화도 급히 끝났다.
이선은 아직 남은 헐떡임을 겨우 가라앉히며 허리를 들어 올렸다. 이미 전화를 끊었는지, 강희찬의 손에 있는 핸드폰엔 기본 화면만 보인다.
이선의 눈동자가 불안으로 일렁였다.
“전화, 지금 어디 하신 거예요?”
“아까 얘기했잖아요. 10분 넘기면 교무실에 전화하겠다고.”
이선은 손에 쥐었던 제 핸드폰을 들어 확인했다. 그리고 바로 화면을 강희찬이 있는 쪽으로 보였다.
“12분 지났는데요.”
“10분 넘었잖아요.”
“진짜 들어가자마자 짐 챙기고 바로 나온 거예요.”
“난 약속대로 했어요. 10분 지나면 전화할 거라고.”
“이익……!”
이선은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치 벽 같은 이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강희찬은 심드렁하게 이선을 내려다보았다. 하, 하고 한숨 같은 숨이 그의 입술을 갈랐다.
“걱정 마요. 아직 정 선생 바꿔달라는 얘기는 안 했으니까. 선생들 퇴근 언제 하는지 물어본 게 다예요.”
더 이상하다. 젊은 남자가 대뜸 학교에 전화를 걸어 교직원의 퇴근 시간을 묻다니. 내일부터 아이들의 등하교 교문 지도를 시작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여전히 눈을 가자미처럼 뜨고 노려보는 이선을 향해 강희찬은 무심히 툭 뱉었다.
“타요. 밥 먹으러 가야지. 초등학교니까 저녁밥은 안 줄 거 아니에요.”
“…….”
강희찬은 차체에 기대고 섰던 몸을 일으켰다. 그는 비켜서며, 제가 기대고 있던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이선은 조용히 “감사합니다.”라고 중얼거리며 차에 올라탔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차 안의 공기는 쾌적했다.
에어컨을 작동시킨 채로, 차 밖에 나와 있었다니. 낭비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습관이었다. 그래도 시원한 공기가 몸을 감싸자, 한결 편해졌다. 인류의 쾌적함은 대체로 낭비에서 기인하는 법이다.
“뭐 먹을래요?”
운전석의 문을 연 그가, 차에 오르기도 전에 이선을 향해 물었다.
강희찬과 함께 더운 공기가 밀려들었다. 온기는 지난밤 이선의 몸 곳곳에 닿아왔던 그의 체온과 닮아 있었다. 닿아오는 감각은 필연적으로 지난밤의 기억을 수반한다.
온기와 더운 숨. 자꾸만 오므리려는 다리를 잡아 벌리던 손과 그것이 지난 자리를 물들이던 붉은 흔적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네?”
강희찬의 목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마치 어제로 돌아간 것처럼 더워지던 몸이 순식간에 에어컨의 찬바람에 둘러싸인 채였다. 강희찬은 의아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선은 반사적으로 제 손을 들어, 오른뺨을 쳤다. 짝 하는 파열음이 차 안을 채웠다. 강희찬의 눈이 둥그레졌다. 뒤늦게 그의 손이 이선의 손목을 잡아챘다.
“왜 그래요, 갑자기? 자기 얼굴을 왜 때려요.”
“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
이선은 어물거리며 그의 눈을 피했다. 조금 더 눈을 마주하고 있다가는, 석양도 지지 않는 시간에 이상한 생각이나 하던 것을 들킬지도 몰랐다.
“밥은… 강희찬 씨가 드시고 싶은 거로 드세요. 전 지금 딱히 배고프지 않아서…….”
이선의 몸이 지나칠 정도로 경직된 채 글러브박스를 향했다. 그 와중에도, 강희찬의 시선은 떨어질 기색이 없었다.
“정 선생님은 내 앞에서만 먹고 싶은 게 없어요, 아님, 원래 그런 겁니까?”
“…네?”
기묘한 대치는 오래가지 못한다.
이해할 수 없는 물음을 남긴 강희찬은 ‘…됐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몸을 돌려 시동을 걸었다. 계속 쳐다봐도 그는 추가적인 설명을 해주진 않는다.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한 차는 매끄럽게 학교의 후문을 통과했다. 그 순간, 이선의 입에선 안도의 숨이 흘렀다.
운전석 창 너머로 언뜻 봤을 때, 운동장 안 아이들의 동선은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이제 제대로 된 축구를 할 수 있게 된다면, 저것 역시 다행인 일이다.
미끄러지듯 학교를 벗어나고, 학교 주변의 아파트 단지를 조금 지나가면 큰길이 나온다. 그 큰길에 진입했을 때, 강희찬은 “아.” 하며, 운을 떼었다.
“정 선생님, 혹시 지금 어디 아파요?”
“네?”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뜬금없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향해 되물었으나 이미 강희찬은 굳게 앞을 보고 있었다.
“아침에 먼저 도망가서 못 물어봤는데, 아직 병원 문 열었을 테니까 지금 가죠.”
“무슨… 병원이요?”
이선은 불안해졌다. 마치 아까 그가 핸드폰을 쥐고 있었을 때와 비슷할 정도로, 아니 그보다도 훨씬 불안해졌다.
하지만 이선의 마음을 모를 그는 태연히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신호대기에 걸려 멈춘 틈을 타, 강희찬은 이선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빤히 들여다보는 시선이 몇 초간 이선의 얼굴에 머물렀다.
일자로 굳게 다물린 입술과 여전히 시큰둥한 눈빛이 이선에게 묻는 것만 같았다. 진짜 몰라서 묻는 얘기냐고.
잠깐의 침묵을 가르고 강희찬이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랑 섹스하고 아픈 데가 하나밖에 더 돼요?”
“…….”
“혹시 다른 데도 아프면 말해요. 지금 예약해 두게.”
강희찬은 콘솔박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목적은 그곳에 두었던 핸드폰을 잡기 위함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이선은 황급히 그의 손을 잡아챘다.
서로 다른 체온이 엉킨 채, 애매한 높이에서 멈추었다. 뒤늦게 제가 한 짓을 깨달았다. 이선은 그의 손을 잡아챌 때만큼이나 다급히 손을 놓았다.
“아……!”
본능적으로 놀라서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마치 더러운 물건을 잡았다가 버리는 것 같아서, 뒤늦게 한 번 더 놀랐다.
놀라서 그런 거지, 다른 뜻은 없었다. 그런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이선의 입술이 달싹이다, 겨우 소리를 뱉었다.
“아, 아니…….”
“…….”
“안 아파요. 아무 데도…….”
“그럴 리가 있어요? 얼굴이 그 모양인데. 하다못해 밑에는…….”
“그, 그만하세요!”
높아진 목소리의 끝이 티가 날 정도로 떨렸다.
이선은 미련이 남은 것처럼 허공에 있던 제 손을 물려, 허벅지 위로 가져갔다. 결연하게 꾹 말아 쥔 주먹은 귀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누르기 위함이었다.
강희찬은 바들거리며 날을 세우는 동물 같은 옆모습을 곁눈으로 봤다.
셔츠 위로 뻗어 나온 목부터 얼굴까지. 당황으로 붉게 물든 모습을 보는 건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 그렇다고 갑자기 부끄러워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의중을 파악하려는 끈질긴 시선이 이선의 옆얼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시선을 느꼈는지, 이선은 각오를 다지는 것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에요.”
“그걸 정 선생이 어떻게 압니까? 남자랑 섹스해 본 적도 없으면서.”
“그러는 강희찬 씨도……!”
홱 하고 돌아본 얼굴이 온전히 강희찬의 눈에 들어왔다. 뭔가 결연하게 이를 세울 줄 알았더니,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다시 얼굴은 글러브박스를 향했다.
혼자 부끄러워하다가, 화내다가. 하여간 다채로운 희로애락 쇼다. 계속 보여준다면, 군소리 없이 쭉 보고 싶을 정도로 웃긴 모습이었다.
쇼의 주인공은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지난밤 공벌레의 앉은뱅이 버전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두 다리를 끌어안고, 몸을 둥그렇게 만 이선의 모습을 상상하던 차였다. 강희찬의 귀에 이선의 목소리가 조용히 스쳤다.
“아, 아무튼… 저는 괜찮아요. 아침에 강희찬 씨보다 먼저 일어나서 출근도 했잖아요.”
“…….”
‘그러고 보면, 또 그런가?’
강희찬의 생각에 동의하듯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문득, 홀로 잠에서 깼던 아침의 허한 감각이 다시금 품에서 번졌다. 눈을 떴을 땐 이미 뻗은 팔 아래의 시트는 차가운 기운만을 뿜고 있었다. 간밤에 제 팔을 누르던 적당한 무게도, 조금 찬 것 같아도 끌어안고 있으면 금방 따끈해지는 체온도. 그 모든 것이 환영처럼 사라진 감각은 선득하리만치 허하고 차가워서, 강희찬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늘 불편함 없이 썼던 침대는 지나치게 넓었다. 침대만이 아니었다. 방도, 방문을 열고 나간 거실도. 지나칠 정도로 조용하고 넓었다. 마치 모노톤이 전부인 흑백 무성영화에 들어온 것 같은 공간 속이 너무도 낯설었다.
…도저히 못 견디겠다.
하룻밤 사이에 집은 지방의 원정호텔보다도 낯설어졌다. 견딜 수가 없었다. 머리를 다 말리지도 못한 채, 도망치듯 현관문을 나선 이유였다.
“…….”
다시금 색을 찾은 세상이 운전석의 옆유리를 지나친다. 색색의 간판들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읽을 수 없는 외국어 간판인 레스토랑이나 프랜차이즈 카페. 수제버거집.
전혀 감흥이 일지 않는 풍경을 흘겨보다가, 문득 전방에 있는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삼계탕…….”
“네?”
“정 선생, 삼계탕 먹었어요? 복날 다 지났잖아요.”
혼자 바들거리더니. 이선은 어느새 또 저의 질문에 유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애를 상대하는 직업에서 기인하는 버릇일까. 선생은 기묘하게 말보다는 고갯짓이 먼저 대답을 할 때가 많았다.
“아, 먹었어요. 학교 급식으로 나와서요.”
“나와요? 삼계탕이?”
요샌 급식이 생각보다 잘 나오는 편인가.
“네. 반계탕.”
이선의 고개가 다시 한번 위아래로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아까부터 취조를 하듯 질문 일색이던 그의 말이 이어진 것은.
“그게 뭔데요?”
“삼계탕 반만 나오는 거요. 애들은 한 마리 다 못 먹잖아요.”
혀를 차는 소리가 이선의 귀를 날카롭게 스쳤다.
“그걸 또 반을……. 세금은 뜯어가서, 다 어디 쓴대요?”
“…….”
“닭 못 먹는 거 아니죠? 나 먹고 싶은 거로 고르라고 한 건 정 선생이에요.”
이제 와 저에게 선택권을 주는 게 의미가 있는 일인가…….
이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강희찬의 차는 이미 삼계탕집의 주차장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네.”
강희찬은 이미 제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이선은 착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늘 결정하는 것에 취약한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에 스스럼이 없었다. 평생을 정답인 길만을 걸어온 사람 특유의 자신감일까?
“…….”
멀미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커다란 배에 몸을 실은 것만 같았다. 그의 결정에 고개를 끄덕이던 그 모든 순간은.
자신은 언제나 조각배 위에서 힘겹게 노를 저었다. 누군가 대신 노를 저어주지도 않는 그곳에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어지러움만 이어져 왔다.
역시……. 강희찬은 여러모로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다.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다.
* * *
널찍한 크기의 식당이 아니라면 내키지 않아 하는 취향인 걸까?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미약하게나마 폐소공포증 같은 게 있는 건 아니겠지.
테이블석에 앉은 고개를 이리저리 틀어가며 가게의 너른 홀의 크기를 가늠했다.
아직 직원이 출근하지 않은 건지, 주인이 직접 밑반찬을 가져왔다. 비어 있는 이선의 앞자리를 보고 실망한 듯 그의 어깨가 축 처졌다. 하지만 이선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인을 요구했다가, 이번에도 남자가 주인에게 무안을 준다면, 자신은 나온 삼계탕을 마음 편히 먹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이선은 항아리째로 나온 김치를 적당히 덜어 그릇에 잘게 잘랐다. 왠지 학교 급식대에서 봤던 크기다. 일정하고 균일한 모양새에 이선은 나름의 만족을 느꼈다.
정확할 정도로 한입 크기가 된 김치를 보며, 자신을 칭찬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여닫이 문소리가 들리더니, 강희찬이 나왔다. 그 순간 왠지 주방에서 분주한 소리가 이어졌다.
이번에야말로 강희찬에게 말을 걸어보기 위해 타이밍을 잡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이선은 적극적으로 주인을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강희찬은 물기 하나 남지 않은 말끔한 손으로 의자를 꺼내어 몸을 앉혔다.
“손 안 씻습니까?”
“네? 아까 물수건으로 닦았는데…….”
“밥 먹기 전에 손 씻으라고 애새끼들한테 잔소리할 거 아니에요.”
“…….”
저리 나오다니. 치사하다. 이선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끔한 기가 도는 강희찬의 손을 바라봤다.
자기도 전에는 분명 물수건으로 손 닦고 밥 먹었으면서. 이제 와 혼자 깔끔한 체하며, 사람을 더러운 취급을 하다니. 대체 뭐란 말인가.
그의 손을 한 번, 그리고 식탁 위에 있던 제 양손을 한 번.
번갈아 보던 이선은 결국 의자를 뒤로 빼고 몸을 일으켰다. 심드렁히 제 손톱을 바라보는 강희찬을 지나쳐, 그가 갔던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근시일 내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고, 진단서를 떼어와 그에게 주어야 하나……. 손을 씻고, 세면대의 작은 거울로 얼굴을 비춰보던 이선은 길지 않은 고민을 했다.
손을 닦고, 화장실을 나와 그의 뒷모습을 볼 무렵엔, 역시 늘 그랬듯 자신을 놀린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언제나 진지하고 심드렁한 얼굴을 해서는, 저를 놀리곤 했으니까.
표정의 변화가 없어서 그런가. 장난과 진담의 차이를 알기 힘들다. 결정적인 단점을 본인은 모르는 게 분명했다.
헤어졌다는 그의 여자친구도 분명 냉한 얼굴이 하는 다소 난감한 조크를 오해했겠지.
혀가 능숙하게 굴러가는 사람이었다면……. 그림으로 그린 듯한 여배우와 프로야구 선수 커플은 여전히 건재했을지도 모른다. 역시 실제 성격보다도 손해를 보고 사는 사람이었다.
이선은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있는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
화장실에 가기 전엔 없던 뚝배기 그릇이 강희찬의 옆에서 김을 풀풀 낸다. 가까이 가서 보니, 등에 가려져 있던 그의 앞엔 또 다른 그릇이 있다.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둘 중 하나는 자신의 몫이라는 걸.
강희찬은 제 앞에 있는 뚝배기 그릇의 닭을 능숙한 솜씨로 발라낸다. 다리 하나는 먹기 좋게 떼어내진 채로 그릇의 가장자리에 걸쳐 있다. 나머지 살들은 적당한 크기로 찢어져 국물에 담가졌다. 동작엔 일말의 불필요한 요소가 없었다.
이선은 재빨리 제가 비워뒀던 자리에 앉았다.
“제, 제가 할 수 있는데…….”
쭈뼛거리는 손이 강희찬의 앞에 있는 뚝배기엔 차마 닿지도 못한다. 효율성의 극치를 보여주던 사람은 눈을 치켜들어 잠깐 이선을 흘긋거렸다. 제 작업을 방해받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었다.
결국, 목적지를 잃은 이선의 손이 강희찬의 옆으로 밀려난 채 방치당하는 그릇을 향했다.
“그럼 강희찬 씨 건, 제가 할게요.”
“이거 먹기나 해요. 정 선생이 하는 거 기다리다가 다 식을 텐데.”
어느새 작업을 마쳤는지, 그의 앞에 있던 그릇이 이선의 앞으로 향했다. 오른손이 닿기 편한 곳에 다리 하나. 국물을 푸짐하게 채우는 살코기들. 이 정도면 어린애한테 숟가락만 쥐여 줘도 쉽게 먹으리라.
하지만 흘러나온 말을 무시할 순 없었다.
“…저, 잘해요.”
아마도…….
뒷말은 삼켰다. 강희찬도 딱히 대꾸하지 않는 걸 보니, 그냥 무시할 셈인 것 같다.
이선이 조심히 닭 다리를 집었다.
마치 어머니가 차려주신 삼계탕을 먹는 기분이었다. 어머니도 꼭 다리를 먹기 좋게 뜯어내, 이선의 그릇에 먼저 옮겨 담는 것으로 식사를 시작하셨으니까.
“어차피 잘 못 먹을 것 같아서, 다리 하나는 뼈 발라놨어요. 더 먹고 싶으면 내 거 먹어요. 전복은 정 선생이 다 먹고.”
본인의 말에 따르면 아직 처자식은 없는 미혼 남자는 그제야 제 옆에 두었던 그릇을 당겼다.
이미 이선의 그릇 안에는 전복이 먹기 좋은 크기로 잘려져 있었다. 맞은편에 있는 강희찬의 그릇엔 원래의 모양이 그대로인 전복이 있다. 애초에 이선의 것 역시 저렇게 나왔을 터였다.
이선은 가장 먼저 전복을 집었다. 그와 동시에 강희찬의 숟가락이 잘린 통전복을 이선의 뚝배기에 넣는다.
“전복, 안 좋아하세요?”
“좋아해요.”
고저 없는 목소리가 무심히 흘렀다.
“시즌 중엔 해산물 안 먹습니다. 탈 나면 무조건 경기 빠져야 하니까요.”
“이건 익었는데요?”
이선은 아직 입에 가져가지 않은 숟가락을 그의 눈높이 정도로 올렸다. 부드럽게 익은 것은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강희찬은 별 감흥이 없는 얼굴로 젓가락을 움직였다.
“다시 말할게요. 먹고 싶어지니까 아예 안 건드리는 겁니다.”
“네?”
“이건 익은 거니까 괜찮다고 먹으면, 그다음도 무슨 핑계를 만들어서 먹겠죠. 차라리 처음부터 입에도 안 대는 게 나아요.”
“아…….”
이선은 약간 그의 쪽으로 향했던 숟가락을 갈무리했다. 그런 의도는 전혀 없지만, 어쩐지 약을 올리는 것만 같다. 합, 하는 작은 숨소리와 함께 전복이 이선의 입으로 사라졌다.
닭가슴살에 소금을 찍던 강희찬의 눈에 그 모습이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추욱 처지는 마른 어깨도.
하아. 한숨을 뱉어낸 그가 그 자리를 채우듯 살코기를 입 안에 넣었다.
“시즌 끝나면 먹습니다. 그렇게 죄짓는 표정 안 해도 돼요.”
“저, 딱히 그런 생각 안 했어요.”
“어쨌든 그건 정 선생이 먹어요. 먹기 싫으면 남기든가.”
강희찬의 젓가락이 또다시 살점을 뜯어냈다. 능숙하게 살점을 발라내는 모습을 봐서 그런가. 삼계탕은 미리 다 발라두고 먹는 타입인 줄 알았더니, 또 그건 아니었다. 이번엔 젓가락을 놓는다. 그의 커다란 손이 다리 하나를 잡더니 먹음직스러운 모양으로 몸통에서 뜯어냈다.
두 번. 헷갈릴 것도 없이, 정확히 두 번 입에 가져가더니, 뼈만 앙상히 남아 통에 버려졌다. 이선은 그 모습에 아연했다가 문득 고개를 든 강희찬과 눈이 마주쳤다.
‘뭘 봐. 남 먹는 거 처음 보냐?’
그리 물을 것만 같은 시선이다. 이선은 황급히 눈을 내렸다. 구명줄이라도 되는 양, 닭 다리를 잡았다.
이래서 먹방이라는 게 유행을 하는 걸까?
대체 남이 먹는 모습을 핸드폰 화면 너머로 보는 게 뭐가 즐거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두 입 만에 시원하게 사라지는 고기를 보니, 이선은 자신 역시 그렇게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이 생겼다.
“…….”
두 입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도 꽤 복스럽게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복을 먹었을 때만 해도 고프지도, 부르지도 않더니 갑자기 식욕이 돌았다.
이선은 개인 종지에 나온 소금을 톡톡 찍었다. 조금 많이 묻은 것도 같지만, 그가 했던 것처럼 크게 한 입 베어 물면 될 일이다.
통통한 살코기만큼이나 호기로운 생각은 닭 다리가 입술에 닿은 순간 훅 꺼지고 말았다.
“아, 뜨…….”
“진짜, 김이 펄펄 나는 걸……!”
강희찬은 젓가락을 황급히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제 앞에 있는 물잔을 이선의 입가로 내민다.
내 앞에도 물은 있는데……. 그런 말을 하기엔 그의 표정이 너무도 무서웠다. 이선은 그가 내민 물잔을 얌전히 받아, 입술을 식혔다.
사실, 식히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미리 먹었던 전복보다 뜨거워서 놀란 것뿐이다. 입술을 덴 것도, 물이 필요할 정도도 아니다.
하지만 강희찬은 여전히 탐탁지 않은 얼굴을 해서는 이선의 입가를 쏘아보았다.
“정 선생, 눈은 장식으로 둬요? 뜨거운 게 눈에 보이는데, 그걸……!”
“…죄송합니다.”
슬쩍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인 이선은 닭 다리를 후, 불었다. 이미 식어 빠지고도 남았다.
“쯧.”
혀를 찬 강희찬이 겨우 마뜩잖은 기색을 거둔다. 그러더니 김이 펄펄 나는 고기를 다시금 입에 넣었다.
자기는 불지도 않고 잘만 먹고 있으면서. 저 모습을 보고 따라 먹은 것뿐인데, 왜 나한테만 잔소리하는지 모르겠다.
처음의 기세와는 달리, 이선은 닭 다리를 조금 베어 물고는, 금세 다시 그릇에 넣었다. 아까 배가 고팠던 건 역시 착각인 게 분명했다.
호되게 당하고 나니, 이선은 급격히 다리에 흥미를 잃었다. 그가 알맞게 잘라준 고깃덩이를 공략할 마음을 먹은 이선의 눈에 반절 정도 남은 물잔이 들어왔다.
그가 건넸던 물잔을 어찌할지. 고민하다, 결국 원래 자신의 앞에 두었던 물잔을 슬며시 앞으로 밀었다.
뭔가 또 마음에 차지 않은 그가 한소리를 할지도 모른다. 이선은 개에게 물리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화드득 제 손을 물렸다.
“일부러 그래요?”
“…네?”
‘한쪽 볼에 음식을 밀어 넣으며 먹는 건, 버릇인 걸까?’
오늘도 볼록하게 튀어나온 귀여운 한쪽 볼을 멍하니 보던 이선은 강희찬의 목소리를 뒤늦게 알아챘다.
“더러운 모습 보여줘서 정 떼려고 일부러 그러냐고요.”
“그게, 무슨…….”
“일부러 더럽게 먹어도 별 효과 없으니까, 그냥 먹던 대로 먹어요.”
“…….”
…더럽다니.
닭 다리를 입에 넣었다가 뱉어냈다고 오해하는 것 같지만, 그냥 입술에 좀 닿은 것뿐이다. 더럽지 않은데…….
구태여 정정하기도 우스운 오해를 받았다. 이선은 걱정이 다분히 섞인 짜증을 들었을 때보다도 더욱 기가 죽었다. 숙어지는 고개로 강희찬의 시선이 스쳤다.
“예쁘게 낳아준 부모님을 원망하든가.”
“…….”
또 알 수 없는 소리.
이선은 애써 말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피했다.
강희찬은 표정의 변화 하나 없었다. 단지, 작게 잘라 둔 김치를 보고 혀를 차더니 젓가락으로 한 움큼 잡아 입에 넣을 뿐이다.
이선은 숟가락으로 그릇 안을 휘휘 저었다. 김치나 잔뜩 먹는 주제에, 사람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소리나 한다. 반투명한 국물이 숟가락이 지날 때마다 넘칠 것처럼 일렁였다.
…안 볼 거라고. 식사에 집중할 거라고 마음을 먹어도, 시선은 금세 앞에 앉아 잘 먹고 있는 사람을 향했다.
“원정 갑니다.”
한마디를 뱉어낸 무심한 입술은 다시 뽀얀 살을 한 덩이 물었다. 이선이 멍하니 있는 동안, 강희찬의 그릇은 이미 꽤 비워진 채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입술은, 그의 얼굴 안에서 보면 모나게 작지도, 크지도 않다. 다른 이목구비들과의 조화를 고려하여 누군가 만든 것처럼, 딱 알맞은 모양과 크기로 벌어졌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오늘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살덩이를 삼켜내는 모습을 보며, 이선은 그것이 제 입술과 호흡을 빼앗았던 때를 떠올렸다.
“…듣고 있어요?”
“네? 아……. 네?”
이선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순간적으로 손을 들어, 제 뺨을 칠 뻔한 것을 겨우 눌러 참았다. 이번에도 그가 자신을 미친 사람처럼 쳐다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원정 경기 간다고요. 두 시리즈 연속이라, 내일 출발하면 아마 일요일 밤에나 서울 올 겁니다.”
“아……. 고생하시네요.”
“월요일, 이 시간이면 퇴근하는 거죠?”
“네?”
이선은 고개를 갸웃했다. 도저히 대화의 흐름을 잡을 수 없다. 그의 이런 화법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나름대로 자부했었는데.
강희찬은 이상할 정도로 이선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있다. 그 모습이, 어딘지 피하는 것 같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이선은 언제나 그가 빤히 바라볼 때면 눈을 피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런 본능적인 두려움을 충실히 따른 편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수리를 보여주는 강희찬은 무섭지 않다. 지금이라면 그와 눈이 마주쳐도, 피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반도 먹지 못한 삼계탕은 이선의 신경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집요할 정도로 숙인 강희찬의 얼굴을 보았다. 음식이 들어갈 때마다 점점 부풀던 볼은, 한 번 삼키고 나면 다시 매끈히 돌아온다.
그 모습을 두어 번 볼 무렵, 강희찬은 겨우 고개를 들어주었다.
“정 선생, 아직 파전 안 샀어요.”
“그거… 이걸로 드시는 거 아니었어요?”
이선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손가락으로 제 그릇을 가리켰다.
“이건 내가 사는 거예요. 계산도 벌써 했어요.”
“네? 언제?”
“아까 정 선생 손 씻으러 갔을 때요.”
“왜 계산하셨어요? 아깐 저보고 사라고 그러셨잖아요.”
이선의 눈가가 미약하게 찌푸려졌다.
밥을 내놓으라고 학교까지 차를 끌고 침입해 놓고는, 또 계산을 자기가 하는 건 무슨 경우란 말인가. 화법과 더불어, 평생에 걸쳐도 이해하기 힘든 성격이라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강희찬은 채 말을 잇지 못하는 이선을 가볍게 무시할 뿐이다.
“일요일엔 경기 일찍 끝난다는 보장도 없으니까, 월요일 이 시간에 학교로 올게요.”
“…….”
“그놈의 파전집, 맛없기만 해봐라.”
후일을 도모하는 악당 같은 대사다.
제 입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이선의 몇 안 되는 단골집 사장님께 해코지하는 강희찬의 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이선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그냥 보통 해물파전 맛이에요. 딱히 맛집이라고 소문난 데는 아니라서요.”
“맛없으면 정 선생이 다 먹어요.”
“그냥 제 입에는 괜찮아서…….”
입에 안 맞으실 수도 있어요.
흐릿하게 사라지는 말꼬리와 함께, 이선의 어깨가 또 한 번 축 내려왔다.
괜히 파전집을 추천했던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 아는 가게가 없는 건 참 여러모로 문제였다. 게다가, 이렇게 까다로운 사람을 상대로는 더더욱.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하면 어쩌지? 지금이라도 주변 선생님들에게 맛집을 수소문해야 할지도 모른다.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분명 기억하기로는 미슐랭 가이드에 몇 년째 올랐다는 한식당의 아들이 만족할 만한 곳으로.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을 할 무렵이었다. 하, 하는 낮은 한숨이 테이블을 스쳤다.
“걱정하지 마요. 입맛 까다로운 편 아니니까.”
…딱히 믿음이 가진 않는 말이다. 불신의 기색을 강희찬은 기민하게 잡아냈다.
“팔만 하니까 돈 받고 팔고 있는 거예요. 음식점 아들이라면서 그것도 몰라요?”
말을 마친 그는 이내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뚝배기 그릇이면서 왜 벌써 식냐는 투정이 흐른다.
이미 거의 다 먹어놓고 저런 투정을 하는 이유를 이선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게다가, 제 앞에 있는 그릇에선 여전히 연기가 나고 있다. 괜히 할 말이 없어서 그런 걸까. 진실성조차도 의심이 되는 상황이었다.
“…강희찬 씨.”
충동적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눈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볼이 불룩한 덕에 소년 느낌이 나는 이와 눈이 닿는다. 이선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물었다.
“아, 아니요.”
“…….”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치지 말고, 잘 다녀오세요.’
입술을 물지 않았다면… 사고를 거치지 못한 말이 흘렀을지도 모른다. 마치 연인을 멀리 보내며, 기다리겠다고 배웅하는 것만 같은 말이.
자신은 아니었다. 자신은 그에게 저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이가 아니었다.
다만…….
“…….”
속이 울렁거린다. 그래서 이선은 몇 번이나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서 삼켜내야만 했다. 방심하는 순간 튀어나올 것만 같은 말과 함께.
이 울렁거림의 원인이, 일주일 후 만나게 될 그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며.
* * *
‘이 새끼를 분명 조져야 할 일이 있었는데.’
강희찬은 쉴 새 없이 치킨 조각이 들어가는 이승주의 입을 지켜봤다. 코치의 명을 받들어 강희찬의 호텔 방에 들어온 치킨이 오롯이 이승주의 배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
화요일에 등판하는 투수는 우천취소 등의 특별한 사정이 아니면, 4일을 쉬고 같은 주의 일요일에도 등판한다. 당연히 5일 휴식을 기준으로 조절했던 강희찬의 루틴에도 영향이 갔다. 쉽게 말해, 주에 하루 굶어야 할 걸 이틀을 굶는다는 소리다. 코치는 강희찬의 야식을 매우 신경 썼다.
하지만 지금의 이승주에겐 그런 스트레스 따윈 없었다. 그저 양념보단 프라이드를 선호하는 코치의 취향에 약간의 불만이 있을 뿐이다.
이승주는 오늘도 당연하게 선배의 야식인 치킨을 죄책감 없이 삼켜댔다.
“…너, 아까 누구랑 따로 약속 있다고 하지 않았어? 밥 먹고 들어온다며.”
밥 처먹고 기름진 게 또 들어가냐. 하지만 이승주는 선배의 속내를 알아듣지 못했다.
“백승곤 보고 왔어요. 걔네 학교 숙소가 여기잖아요.”
입에 음식이 들어 있어서인지, 발음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부정확하다. 강희찬은 와락 인상을 구겼다.
당연히 자신이 ‘백승곤’을 알 거라는 말투였다.
그딴 새끼가 누구냐고 따져 물으려다 말았다. 어차피 뻔했다. 고등학교를 같이 나온 운동부 친구겠지. 교우 관계가 거기서 거기인 건 고졸 운동부의 특성이었다. 자신 역시 야구판을 벗어나면, 지인이라고는 고교 동문이 거의 전부였다.
‘더러운 입을 구태여 안까지 보고 싶진 않고.’
이승주가 들어온 이래로, 투수코치는 야식 심부름을 그에게 맡겼다. 코치가 직접 가져와서 먹으라는 것보다야 당연히 부담이 덜어진다. 하지만 오롯이 목적만을 따지자면, 지극히 비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강희찬이 보기엔, 그냥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셈이었다.
그래도 처음 몇 번은 네가 먹으라고 하면, 코치님께 혼이 난다며 거절도 하더니. 이승주는 요샌 아예 당연하게 제가 먹을 거로 생각하며 강희찬의 방문을 두드렸다. 언제였던가. 한 번은 문을 열자, 문밖에서 미리 처먹고 있던 녀석을 본 일도 있었다.
후배가 먹는 걸 보면서 한두 조각이라도 먹기를. 그런 마음으로 이승주를 보내겠지만…….
“고기 먹었을 텐데, 기름진 게 또 먹히냐?”
빡대가리 운동부가 알아듣도록 직접적으로 물었다. 강희찬은 더러운 것을 보는 눈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다행히 이승주는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선배의 혐오스러운 시선 따윈 안중에도 없다. 침대에 기대 누워 말도 못 하는 막내에게 영상통화로 ‘아빠야’를 외쳐대는 권승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처먹어야 시즌 중에도 살이 찐단 소리군. 강희찬은 볼 때마다 신기한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별로 먹지도 못했어요. 여자친구랑 헤어졌다는 소리나 듣고.”
음식을 문 볼이 한층 불퉁해진다. 불만이 덕지덕지 묻은 게, 꼭 놀부 영감이다.
강희찬의 고개가 슬쩍 삐딱해졌다.
“왜 헤어졌대?”
열심히 치킨을 씹던 이승주의 입이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새삼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웬일로 이런 걸 묻는 거지?’
잠깐 의문이 들었지만, 간만에 선배와 대화가 된다는 사실에 먼저 신이 났다. 밥을 먹자고 불러내서는 주야장천 입맛 떨어지는 소리나 했던 녀석에 대한 원망을 털 기회였다.
이승주는 손에 있던 치킨을 와앙 입에 담았다.
“몰라요. 집에서 반대한다는데. 모르죠. 여자도 마음 뜬 것 같은데.”
우물거리는 입이 냉정하게 선고를 내린다. 승곤인지 승헌인지가 듣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강희찬은 한숨을 삼키며 눈을 들어 올렸다.
“보통… 그래?”
“뭐가요?”
“보통, 집에서 만나지 말라고 하는 게 흔하냐고.”
이승주는 입 안에서 골라낸 뼛조각을 후, 하고 비닐봉지에 뱉었다.
“처가에서 반대했던 형들은 좀 있잖아요. 신우 형도 그랬다는데. 형수님 고3 때 만났다고 하지 않았어요? 오빠가 반대해서, 형수님이 대학 가서야 허락받고 만났다고 했었나?”
불명확한 기억이다. 이승주는 제 기억의 오류를 잡아줄 수 있는 권승훈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곳에서 유일하게 박신우의 미혼 시절을 봤을 권승훈은 여전히 화면 안의 딸에게 온 정신이 쏠린 채였다.
이승주를 따라 시선을 옮겼던 강희찬은 다시금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중요한 건 박신우가 미성년자를 꼬드겨서 연애했는지가 아니다.
“결혼하자는 것도 아닌데?”
“왜요? 누가 그런대요?”
“…그냥. 아는 사람이. 부모님이 착한 사람 만나랬다고.”
“…그게 뭐예요?”
뭘 들은 거지?
어처구니가 없는 말은 기어코 이승주의 정신을 치킨에서 떨어트렸다. 여전히 ‘아빠야, 아빠’를 연발하며, 딸아이가 원정 동안 자신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선배의 처절한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대체 뭐지?’
그런 생각을 하며 앞을 본 이승주의 정면엔, 심드렁한 강희찬의 얼굴뿐이다.
아무리 남 얘기라도 그렇지. 지나가는 똥개 새끼가 똥을 먹고 있어도 저것보다는 좀 더 관심이 있을 거다. 이승주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이 형의 친구라고 해봐야 너무 뻔했다.
“…….”
대체 누구냐. 그렇게 비참하게 차인 것도 모자라, 털어놓을 친구가 하필이면 강희찬밖에 없다니. 그 불쌍한 인사의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근데.”
끝이 늘어지며 운을 떼는 이승주의 입가를 날카로운 시선이 훑었다. 평소와 같은 무심한 얼굴인데, 또 묘하게 그렇지만도 않다. 이승주는 강희찬이 자신의 다음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리는 것 같은 알 수 없는 직감에 휩싸였다.
“근데, 그 여자도 어지간히 싫었나 보네요.”
“왜?”
원래 20대 초반엔 남의 연애 얘기가 제일 즐거운 법이다. 게다가 누군가 차였다는 소리면 더더욱.
그리하여, 이승주는 ‘왜?’라는 물음 앞, 미세한 공백을 눈치채지 못했다. 언제나 자유분방함을 자랑하는 입은 한결같았다. 선발에게 한결같음은 미덕이긴 했다. 그런 점에서 이승주는 불펜보다는 선발이 어울리는 인재상이었다.
“차는 이유가 너무하잖아요. 웬만하면 그래도 좋게 말해줄 텐데, 무슨 싸가지 없는 초딩이 ‘엄마가 너랑 놀지 말랬어’ 하는 것도 아니고.”
“…….”
“하긴. 얼마나 징그럽게 쫓아다녔으면 그런 말까지 하겠어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이승주의 뒤로 검고 큰 그림자가 드리운다. 어느새 전화를 끊은 권승훈이었다.
신축 호텔의 밝은 조명이 어쩐지 어둑해졌다는 것을 깨닫기도 전이다. 까마득한 선배의 두툼한 손이 이승주의 뒤통수와 조우했다. 퍽. 어딘지 둔탁한 마찰음이 울렸다.
“아!”
“야, 그렇게 말하면 희찬이 상처받잖아. 딱 봐도 지 얘긴데, 넌 눈치가 그렇게 없냐?”
비웃음이 잔뜩 묻은 말투를 이해한 순간, 이승주의 입에선 ‘왜 때리냐’는 불만조차 나오지 못했다. 불퉁한 강희찬과 비실거리는 권승훈을 바쁘게 번갈아 봤다.
‘…진짜?’
의구심이 들 무렵, 강희찬의 입에선 지금 표정과 잘 어울리는 뚱한 답이 흘렀다.
“제 얘기 아닌데요.”
권승훈의 입가엔 가당치도 않다는 비웃음이 걸렸다.
“아니긴. 내가 그런 소리 하는 놈 중에 지 얘기 아닌 걸 본 적이 없어.”
“…….”
“그 정신 똑바로 박힌 여자 누구냐?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네.”
낄낄대는 권승훈과는 달리 이승주는 사색이 되어갔다. …좆됐다. 이건 반론의 여지 없이 좆된 거였다.
“죄송해요, 형…….”
이승주는 이미 반은 죽어 있는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주눅 든 이승주의 정수리에 강희찬의 날카로운 시선이 꽂혔다.
…냉방이 너무 심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이 방. 아무리 여름 더위가 가시지 않았다지만, 지금 9월인데 이렇게까지 냉방을 세게 돌리다니. 자원도 부족한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기의 원인을 애써 무시하며, 이승주는 오들오들 떨었다. 상황판단이라는 중요한 일을 하지 않는 머리 대신, 이승주의 입은 언제나 열심히 일한다. 그것이 비록 쓸모없는 것일지라도.
“형 얘긴 줄 알았으면… 아무 말 안 했을 거예요.”
“내 얘기 아니라고.”
“네. 그래도 죄송해요.”
부정의 말도 소용없었다. 강희찬이 부정의 말을 더할수록, 이승주는 어깨를 움츠릴 뿐이었다. 물론, 어느 쪽이든 낄낄대는 권승훈의 웃음소리가 커지게 하는 용도밖에 되지 못했지만.
…기분을 풀어줘야 해. 안 그랬다간 정말 치킨 조각이 날아올지도 모른다.
권승훈은 쓸데없이 군기를 잡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부당히 화풀이를 당하는 후배를 구해줄 의인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 상대가 강희찬이라면, ‘쟤 성격 알면서 왜 성질을 건드냐’며 되레 역풍을 맞았다.
이승주는 슬쩍 눈을 들어 올렸다. 미간이 찌푸려진 강희찬의 얼굴을 본 순간, 닭이고 뭐고 다 제치고 방으로 튀고 싶어졌다. 패트릭이나 맥커친의 방으로 튄다면, 저 형도 거기까지 잡으러 오진 않으려나.
하지만 잠깐 그렸던 도피처를 머릿속에서 지워야만 했다. 한국 생활이 꽤 긴 축에 드는 용병 투수들은 이제 ‘꺼져, 씨발’ 정도는 원어민 못지않게 발음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게다가 외국인 주제에, 한국 특유의 나이에 따른 위계서열 체계도 잘 잡혀 있었다. 그들은 이승주가 자신보다 한참 어리고, 그래서 매우 만만한 존재임을 잘 알고 있었다.
도피처가 없는 서러운 막내 투수는 바르르 떨며 입술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 그래도…….”
“…….”
“좀 힘들 때 옆에 있어주면, 마음을 열지 않을까요?”
강희찬의 한쪽 볼이 혀에 밀려 부풀었다. 저건 개빡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합, 하고 입을 다물었던 이승주는 아차, 하며 제 실수를 깨달았다.
…이것은 희찬이 형의 얘기가 아니다. 희찬이 형의―존재나 하는지 모를― 지인의 이야기이다.
“라고, 그 친구분한테…….”
“…….”
“워, 원래 힘들 때가 제일 약해진다고 하니까, 그때를 잘 노리면…….”
사람이 나이를 먹었음을 느끼는 순간이 여럿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사지가 마음대로 컨트롤되지 않을 때였다. 이승주는 제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입술을 깨물었다.
…닥쳐, 주둥이야. 저 개빡쳐 하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거냐고. 주둥이, 너한테는 눈이 달려 있지 않으니 모르는 거냐. 뇌의 외침을 뒤늦게 알아먹은 입이 두려움을 그제야 감지했다.
…코치님. 다음부터는 순살로 주문해 주세요. 금방 먹고 꺼질 수 있게. 그런 바람을 간절히 속으로 되뇔 무렵이었다.
“너, 다 처먹었으면 꺼져. 네 방으로.”
“네?”
“…….”
“…아, 네!”
축객령이 이리 반가울 때가 있던가.
이승주는 행여나 트집이 잡힐까, 음속과 비견될 속도로 정리를 마치고 황급히 일어났다. 그 와중에도 냉한 눈은 이승주가 하는 양을 서늘히 지켜볼 뿐이었다.
‘저러니까 사귀기도 전에 차이지.’
눈이 멀쩡하게 얼굴에 달린 여자가 맞았다. 그리고 그런 멀쩡한 여자는 아무리 힘들어도 강희찬에게 기댈 리가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그녀의 인생에 얼마나 힘든 일이 있을지는 몰라도, 저 망나니가 곁에 있는 게 더욱 큰 시련임은 너무 뻔했다.
겁이 없는 주둥이도 차마 뱉지 못한 말을 꾹 삼키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 자리를 이른 밤 인사가 대신한다. 이승주는 혹시라도 불손한 생각이 들킬까 봐 후다닥 허리를 굽히고 인사했다.
오냐, 라는 권승훈의 대답이 완성되기도 전, 호텔 709호의 문이 쾅 닫히는 건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 * *
“나, 미안한데 여기서 TV 좀 볼게요.”
미닫이문이 열리며, 아직도 트레이닝복을 갈아입지 않은 고대영이 교무실에 들어왔다.
고대영은 1층 본 교무실에 있는 교감 선생님을 피해왔는지, 들어오자마자 리모컨을 들고 TV를 틀었다. 그의 손에 의해 몇 번 돌려지던 채널이 고정되자, 화면엔 한창 진행 중인 야구경기가 나타났다.
“벌써 야구 해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유성희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선 역시 뭣도 모른 채 그녀의 행동을 따라 제 손목을 봤지만, 오늘 아이들에게 미술 준비물을 나눠 주다가 남은 노란 고무줄뿐이다. 자신이 시계를 차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후에야 깨달았다.
“어제 거예요. 재방송.”
‘이게 왜 아직도…….’
이선은 꾸물거리며 고무줄을 손목에서 빼고 텀블러에 아무렇게나 끼웠다. 두어줄 정도 옅게 자국이 나 있었다.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슬슬 쓸어봐도, 딱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생각해 보니, 오늘 미술이 2교시였다.
“밑에 교감 선생님 아직 계세요?”
“네.”
갑작스러운 소음이 공간에 울려 퍼진다. 스포츠 중계 특유의 아나운서 톤이 교무실을 채웠다.
남자 아나운서의 말소리가 이선의 정신을 잡아끌었다.
아니, 채널이 돌려진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누군가의 뒷모습 탓일지도 모른다. 50번이라는 숫자.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이름 석 자를 인식한 후에야, 저 유니폼을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제 나이보다는 약간 어려 보이는 선한 인상 아래의 검은색 유니폼.
자신이 겪어본 강희찬은 예민한 사람은 맞았지만, 그래도 생김만큼은 그런 사포 같은 성미를 어느 정도 완화해 주었다.
하지만 아닐 때도 분명히 있었다. 언젠가 봤던 동영상 속 그는 기분이 나쁜 기색을 숨기려 하지도 않은 채, 한쪽 입꼬리로만 웃었다.
―그럼 쳐.
입 모양만으로도 확실히 읽을 수 있던 짧은 말. 그 후에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뛰어오려는 타자를 향해 그 역시 한 발 내디뎠다.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에는 영 흥미가 없는 정이선이 저도 모르게 강희찬의 이름을 눌러봤던 날. ‘벤치 클리어링’이라는 문구가 붙은 영상 속, 무서웠던 강희찬 역시 저런 검은색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
그래도 사람의 외모 자체에는 흰색이 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일단 선이 곱고, 부드러움을 숨기려고 인상을 벅벅 쓰고 다니나 싶을 정도로 냉한 얼굴이라도.
이선은 잠실 야구장에서 봤던, 자신을 향해 모자를 흔들어줬던 그를 떠올렸다.
“어제 봤던 경기를 또 봐요? 그래도 재밌나. 우리 아저씨도 휴일엔 맨날 그러던데. 점수 다 아는 경기 또 보고, 또 보고. 내가 다 지겨워 죽겠어요.”
“유 선생도 내용 다 비슷하고 배우만 다른 드라마 다 볼 거 아니에요. 맨날 비슷한 물건 파는 홈쇼핑이나.”
“…….”
가늘어진 유성희의 시선이 고대영의 뒤통수에 꽂혔다. 하지만 고대영의 입에선 “어어, 삼진!”이라는 추임새만 흐른다.
유성희는 몇 초 보지도 않은 화면에서 금세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보다도 더욱 야구에 문외한인 이선의 눈은 쉽게 떨어지지 못했다.
야구 화면은 언제나 투수의 등을 보여주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화면은 드물게도 강희찬의 정면을 비춰주고 있었다. 이선이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분명 이틀 전에 봤던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인 것처럼, 마냥 반갑기만 했다. 막상 그를 마주하면 민망함에 눈을 피하기 바쁘면서도, 화면 속 그에게선 눈을 떼기 힘들었다.
이선은 애써 평소와는 다른 화면 구도 때문이라고 되뇌었다.
그러고 보면, 야구장엔 참 카메라가 많기도 했다. 송재혁의 말에 따르면, 무슨 모래 사이에 들어가서 촬영하는 카메라도 있다는데. 그가 거짓말을 한 건지, 아니면 현대의 촬영 기술의 발전 속도가 이선을 기다려주지 않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대체로 송재혁을 불신하는 이선은 전자에 무게를 실었다.
―사실 완투를 노려봐도 괜찮을 페이스지만, 오늘이 화요일 경기거든요. 일요일 등판을 고려하면, 최선형 감독이 완투까지는 시키지 않을 거예요. 많이 던져야 90구 조금 넘기거나, 아니라면 80구 선에서 끊지 않을까 봅니다.
아나운서에 비하면, 불분명한 발음인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오디오를 채웠다.
강희찬의 뒤에서 수비를 보던 내야수 한 명이 그를 향해 피스 사인을 보냈다. 정이선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눈치상 저게 진짜 ‘피―스’가 아님을 직감했다.
…아니, 강희찬이 한 번 흘긋 보고 무시하는 걸 보면, 그 ‘피스’가 맞는 걸까?
―강희찬 선수, 오늘 투구 효율이 굉장히 좋네요. 사실 1회에 다소 투구 수가 많은 것 같았는데, 회를 거듭하면서 투구 효율이 좋아졌어요.
―선발투수는 오랜 이닝을 소화하는 만큼 완급조절이 가장 중요한 능력이에요. 강희찬 선수는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경험이 많아서 그런 완급조절이 능숙한 선수 중 하나죠.
타자가 준비하는 동안, 해설은 계속해서 말을 내뱉고 있었다. 아무래도 대화 소재는 지금 화면에 잡히는 선수가 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화요일 경기만 아니었으면 완투를 노려봐도 괜찮을 컨디션인데……. 선수 본인에겐 조금 아쉬울지도 모르겠어요.
―연봉 고과에도 영향이 가겠죠, 아무래도?
장난스레 묻는 아나운서의 말에 해설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뭐, 선발투수의 연봉 책정엔 승수나 개인 완봉 같은 기록도 중요하지만, 사실 요샌 소화 이닝을 좀 더 많이 보는 추세죠. 180이닝 이상, 더 나아가서 200이닝 이상을 소화해 줄 투수는 용병이어도 흔하지 않기 때문에…….
과연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여유로움이 있었다. 능글맞은 해설이 자연스레 대답을 피하면, 그보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적을 아나운서도 캐묻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네에’라는 아쉬움이 묻어나는 대답이 흐른 순간이었다.
아나운서와 해설의 말이 길어지는 사이, 카메라의 화면은 꽤 실험적인 앵글을 취했다. 화면은 강희찬이 신은 스파이크에서부터 올라간다. 곧게 뻗은 다리를 따라 꽤 많이 올라갔다 싶을 무렵, 흰색 유니폼 바지 오른편의 50이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숫자와 멀지 않은 곳에 드리운 윤곽에 이선은 눈을 크게 떴다.
“……!”
야한 것을 보다가 들킨 청소년이라도 된 것처럼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리 살펴도, 이 교무실에서 야구경기에 관심을 둔 건 자신과 고대영뿐이다. 게다가 허벅지와는 다른 음영을 보이는 부피감에 놀란 건 오직 이선뿐이었고.
슬금슬금 눈동자를 화면으로 굴렸다. 남의 하반신을 노골적으로 찍던 화면은 어느새 강희찬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그제야 이선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슨 영화를 찍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무표정인 그의 얼굴을 잠시 비추더니, 이제 다시 투수의 전체 모습을 보여준다.
야구경기에서 저런 앵글을 보여주는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저러고 있는 현장의 카메라맨도, 화면을 골라 송출하고 있을 PD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괜한 부분을 크게 잡아서 사람을 놀라게 만들고…….’
하지만 어쨌든 강희찬은 뒷모습보다는 앞모습에 훨씬 후한 점수를 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평상시의 야구 중계도 투수를 정면으로 보여주는 각도를 취하는 게 나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화면은 넘어갔지만, 이선의 생각과 시야는 여전히 한 곳에 멈추어 있었다.
지난밤 날것 그대로 보았고, 몸을 가르고 들어오기까지 했던 중심의 윤곽에서 머리도, 눈도 떨어질 줄을 몰랐다.
“…….”
…저렇게 티가 나는데, 평소엔 불편하지 않을까? 바지 유니폼을 더 크게 입어야 할 것 같은데. 아마 남자만 있는 곳이라 본인은 별 신경을 쓰진 않는 것 같지만.
쓸데없는 상념과 더불어 눈은 자꾸 한 곳을 향했다. 강희찬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오른쪽. 그리고 위 방향.
윤곽만으로 그의 수납 방식을 추리해 내던 이선은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제법 매서운 손이 본능적으로 뺨을 향해 내달렸다. 짝,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교무실을 울린 건 그다음이었다.
“이선 쌤?!”
“왜 그래요, 갑자기?”
소리에 놀란 김경원과 유성희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제 뺨을 가감 없는 손속으로 친 이선은 그녀들보다 한 박자 늦게 놀랐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소리가 너무 컸다.
이선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때리고 보니, 꽤 아프다. 후회해도 뒤늦은 일이었다.
…벌건 대낮에, 열심히 일하는―비록 재방송이라 어제 경기지만― 사람을 상대로 대체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상념이었다. 음란한 생각의 꼬리를 끊어버리는 데에는 더없이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제 뺨을 때린 부작용이 컸다. 홧홧한 뺨과 핑 고이는 눈물, 그리고 ‘왜 저래’라며 자신에게 쏠린 교무실의 시선이 그랬다.
“모, 모기… 잡으려고요.”
이선의 변명과 동시에, ‘그게 뭐냐’라는 눈빛을 한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각자의 모니터로 돌아간다. 김경원은 주위를 둘러보며 있지도 않은 모기를 살폈다.
뺨을 내려치는 소리에 잠깐 뒤를 돌았던 고대영은 어느새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이선도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TV로 눈을 돌렸다.
화면 속 강희찬은 이제 익숙한 등 번호 50번을 보여주고 있다.
다행이었다. 야구 중계 화면이 왜 투수를 등지는 구도인지 새삼 깨달았다. 그의 정면은 확실히 경기에 집중하기 힘들게 만드는 요소가 될 터였다.
괜히 보는 사람을 철렁이고 민망하게 하는 하체의 윤곽이 눈에서 사라지자, 이선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번 주 내로 끝마쳐야 하는 공문 처리를 잠시 뒤로 미룬 채, 고대영 못지않게 TV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탁!
공이 잘 맞은 건지 빗맞은 건지, 소리만 들어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런 판단을 해볼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강희찬이 공에 맞았다.
아니, 강희찬에게 맞는다고 생각했던 공은 옆을 스치다시피 빠르게 지났다. 머리는 본능적으로 짧은 상황을 그가 공에 맞았다고 잘못 받아들였다. 게다가, 화면의 각도상 정말 투수와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정이선의 눈이 채 커지기도 전에 이미 중계 화면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데시벨이 확 커진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3루수 슈퍼 캐치!”라는 고함을 쳤다.
―잘 맞은 라인드라이브 타구가 수비 정면으로 향하며, 7회 호크스의 공격이 마무리되었습니다. 광고 보고 오시겠습니다.
광고 스폰서 업체인 노트북 화면 안으로 조금 전의 장면이 느리게 리플레이 된다. 그제야 이선은 멈추었던 숨을 내쉬었다.
강희찬의 옆을 스친 줄 알았던 공은, 다른 각도에서 보니 그와는 꽤 멀리 떨어진 채 수비수를 향했다. 그런데도 놀란 가슴엔 아직도 여진이 남아 있었다.
쿵쿵. 목 아래에서 심장이 뛰었다.
제가 공에 맞은 것보다도 더 놀란 정이선과는 달리, 화면 속 강희찬은 태연하기만 하다. 이 정도 거리에서 공이 지나다니는 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저 파인플레이를 펼치고 기분이 좋은 3루수를 무심히 지켜보며 걸음을 떼고 있었다.
“…….”
방금 위험했던 건 강희찬이 아니다. 그가 아니라, 얼굴 정면으로 오는 공을 글러브로 잡아낸 삼루수임을 깨달았지만, 여전히 눈은 강희찬을 찾았다. 이제 완전히 광고로 넘어간 화면에는 배우가 맥주를 들고 있었음에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광고가 끝나서 무사한 그의 모습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그래야 안심이 될 것만 같았다.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사람만큼은 다쳐서 안 된다. 그라운드에 서 있는 누구에게라도 해당할 말일 테지만, 그래도 강희찬만큼은 더 안전했으면 했다.
왜 방망이를 들고 치는 사람이 헬멧을 써야 한단 말인가. 사람의 팔 힘으로 던진 공과 물체에 맞아서 튕겨 나가는 공 중에 당연히 위험한 건 후자인데. 헬멧을 써야 하는 건 오히려 강희찬이 아닌가?
새삼스레 안전장비 하나 없이 마운드에 서서 타자가 방망이로 쳐내는 빠른 공을 맞이해야 하는 그의 처지가 부당하게 느껴졌다.
…다치지 말고 잘 다녀오라고. 그렇게 말이라도 해봤다면, 덜 불안했을까.
시간을 이틀 전으로 돌려, 그가 아직 서울을 떠나지 않았던 그 날로 간다면. 자신은 과연 그를 향해 잘 다녀오라는, 다치지 않고 이기고 온다면 거하게 한턱내겠다는 애교 섞인 살가운 말을 건넬 수 있을까.
“…….”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이선의 머릿속엔 키가 다른 두 인영이 마주하고 있었다. 아무리 상상해 보려고 해도, 서로를 향한 말 따위는 없었다.
그들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마주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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