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3이닝 9실점.
깔아두었던 두 명의 주자는 아이싱 처치를 하고 더그아웃에 돌아왔을 땐 이미 점수로 바뀌어 있었다. 초반부터 점수를 크게 준 탓에 수비 시간이 길어지고 늘어지는 경기가 됐다. 선발이 일찍 무너진 게임이란 대체로 그랬다.
패전조―방송에선 추격조라고 하지만, 부르는 이름이야 뭐가 되었든 하는 일은 같았다―가 일찍부터 가동되었다.
어차피 크게 지고 있으니 편하게 던지라는 코치의 조언이 있었을 텐데도, 이제 스물한 살이 된 투수는 힘겹게 마운드 위에서 버티는 중이다. 물론, 일찌감치 대량 실점으로 강판을 당한 입장에서 할 생각은 아니었다.
표정 없이 경기를 지켜보는 자신을 찍기 위해, 중계팀 카메라맨이 더그아웃 앞을 지나다닌다. 걷어차고 싶은 걸 강희찬은 가까스로 참아냈다.
“많이 힘드냐?”
얼쩡거리던 카메라맨이 사라진 후. 낮은 목소리는 공수교대를 하는 짧은 틈에 들려왔다.
머리 위에서 떨어진 소리의 주인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강희찬의 시선이 향한 곳엔 고글을 쓴 감독의 얼굴이 있었다.
180 중반의 키에 거의 100㎏에 육박하는 체중. 그건 최 감독이 선수를 하던 시절엔 분명 흔치 않은 피지컬이었다.
선수 시절에도 위압감을 주었을 체구는 감독이 된 지금도 여전하다. ‘감독’이라는 이름이 붙고 난 후엔 더하면 더했지, 덜어지진 않았다.
“됐다. 앉아 있어.”
감독은 벤치에서 일어나려는 강희찬을 손짓으로 만류했다. 여전히 뒤편에 선 채였다.
경기를 말아먹은 선수는 앉고, 감독은 서 있고. 뭐 하는 그림인지 모르겠다.
“괜찮습니다.”
강희찬은 그라운드로 시선을 보낸 채 답했다.
“너 내일 이천 갈 거다. 거기서 아예 푹 쉬고 올라와.”
“…여기서도 괜찮습니다.”
“네가 감독이냐?”
가끔 저런 말투를 쓰는 최 감독을 보면, 그의 투수코치 시절이 떠오르곤 했다. 스무 살인 강희찬의 눈에 최 감독, 아니 최 코치는 언제나 화가 난 듯한 사람이었다.
어차피 말소를 시킬 거라면 대체 왜 힘드냐는 질문을 하는지 모를 일이다.
“열흘 되면 바로 올린다. 그때도 빌빌거리고 있으면, 그냥 갖다 치워버릴 거야.”
“…네.”
“새끼가. 그러니까 겨울에 살찌우라니까, 말을 들어 처먹지를 않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리곤 최 감독은 발길을 돌렸다. 공격 이닝의 시작이었다. 전광판의 라인업에선 이미 주전들의 이름이 대거 빠져 있었다.
언젠가 광주에서 봤던 광경과 비슷하다.
떠오른 생각을 지우기 위해 강희찬은 애써 준비를 하는 타자의 동작을 의미 없이 눈에 담았다.
* * *
아침에 눈을 떠보니 온몸이 쑤셨다. 저릿저릿한 몸 때문에 더 자지 못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었다.
전날 저녁을 대충 먹고 자서 더욱 기운이 빠진 듯했다. 치킨을 먹자는 제안을 졸린다는 이유로 거절한 업보가 돌아왔다. 선발 등판을 마치면 일부러라도 더 먹곤 했는데, 내키지 않아 대충 때웠더니 이 꼴이다.
초등학생 시절, 과학 상상 그리기 대회라도 하면 꼭 등장했던 ‘식사를 대체하는 알약’은 아직도 미래의 이야기인 듯했다.
욕실에 가기 위해 일어나자, 오른쪽 무릎 관절에선 뚝하는 소리가 났다. 중학교 때부터 걸을 때마다 소리가 나는 무릎도 이제는 대수로울 게 아니었다.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드라이기까지 쓰는데도, 옆 침대 위에 커다랗게 올려진 이불 뭉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야 혹시 죽은 게 아닐까 싶어 코에 손가락을 갖다 대봤지, 햇수로 6년째 방을 같이 쓰다 보면 신경도 안 쓰인다.
강희찬은 드라이기를 내려놓고 둥그렇게 말린 둔덕 옆에 섰다. 얇은 호텔 이불 아래로 느껴지는 부피감은 온전히 사람의 몸이었다. 매년 더 커지는 것 같다, 이 형은. 강희찬은 짧게 생각했다.
투수는 투수끼리, 야수는 야수끼리.
컵스 구단에서 원정경기나 스프링 캠프 동안의 룸메이트를 정할 때 원칙은 대충 그랬다. 물론 1인실을 쓰는 용병 선수들은 제외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규칙에서 벗어난 예외도 존재했다.
선발투수가 나이 차이가 열두 살이나 나는 지명타자 선배와 한방을 쓰게 된 원인은 간단했다.
‘이천에서 형들이 굶기든?’
‘…아닙니다.’
‘얘 살 엄청 찌워야겠네, 최 코치.’
강희찬이 딱 데뷔 시즌에만 봤던 당시의 컵스 감독은 ‘감독치고는’ 편하고 대하기 좋은 사람이었다. 항상 그 옆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있던 투수코치에 비하면 서글서글한 성격이기도 했고. 물론 편하고 좋아봐야 스무 살짜리 선수에게는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한참 위인 어른이었지만.
외국인 선발투수 대신 깜짝 선발로 등장했던 고졸 신인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감독이 한마디 툭 뱉었다. 옆에 있던 투수코치 역시 마찬가지로 시선을 위아래로 두며 품평하듯 강희찬을 보았다.
‘네, 감독님.’
최 코치의 짧은 대답 이후. 그 자리에서 다음 주 원정경기부터의 호텔 룸메이트가 정해졌다.
살을 찌우기 위해 식사량이 많은 선수와 방을 함께 쓰게 하는 건 효과적인 방법일까?
일단 많은 코치들이 시도해 보긴 하지만, 적어도 강희찬은 별 소용이 없다고 보는 편이다. 자신이 몇 년째 증명하고 있었다.
“형. 식사하세요.”
이불, 아니 그냥 덩어리를 손으로 슬쩍 흔들었다.
으으, 하는 소리가 이불 아래에서 흘러나왔다. 드라이기를 강풍으로 틀어도 잘만 자는 줄 알았더니 의외로 선배는 살짝 깨어 있었다.
“이따가… 내려갈게. 너, 먼저 가라.”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가 겨우 문장을 완성했다.
강희찬은 두 번 깨우지 않고 미련 없이 호텔 방을 나섰다. 저러고서 조식이 거의 끝날 때쯤 내려올 것이 뻔하다. 제일 많이 먹는 주제에 제일 늦게 내려온다는 호텔 직원들의 불만은 이미 유명했다.
핸드폰으로 확인한 시간은 10시에 가까웠다. 이미 먹고 있을 동료들이 제법 있겠다고 생각하며 승강기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포털 사이트 앱에서 봐도 모를 뉴스들의 헤드라인에 눈을 둘 무렵, 8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안에는 익숙한 선객이 있었다.
“어? 지금 가려고 했는데. 잘 됐다.”
직장인들이나 입을 법한―사실 직장인이 맞긴 하다― 반소매 셔츠를 입은 매니저가 반색했다.
강희찬은 고개를 한 번 숙인 후 승강기에 올랐다. 매니저가 내리지도 않고 그대로 타고 있던 엘리베이터의 1층 버튼을 누른다. 8층을 찾은 이유는 아무래도 자신인 듯했다.
“짐은 미리 챙겼고?”
“그냥 들고 나가면 됩니다.”
“아침 먹고, 콜 불러줄게. 타고 바로 가면 돼.”
“네.”
“이천에 빈방 있다니까 거기서 좀 지내다, 정 불편하면 출퇴근해. 잠실에서 버스 타는 거 알지?”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게 언제였지?
주로 선수들에게 등말소와 관련된 사항을 전하는 매니저의 목소리가 이랬는지 강희찬은 새삼 깨달았다. 이런 얘기를 건넬 때마다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던 것에 비해 매니저는 오늘 편해 보였다. 강희찬의 이름이 열흘 후엔 바로 엔트리에 들어올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중간에 한 번도 멈추지 않았던 엘리베이터가 1층에 서자 매니저는 택시를 부르겠다며 프런트로 향했다. 그 와중에 신경이 쓰였는지 한 번 뒤를 돌더니 ‘천천히 먹고 나오라’는 말을 했다. 딱히 해줄 대답이 없었다. 강희찬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식당으로 걸음을 돌렸다.
뷔페식인 조식에 익숙한 메뉴들이 보였다. 어느 지역의 호텔을 가더라도 보이는 음식이었다. 음식을 가리는 외국인 용병들의 취향에 맞춰 항상 구단이 호텔 측에 일정한 메뉴들을 요청했다.
이천에 도착하자마자 점심을 먹을 것이 분명하다. 강희찬은 적당히 채운 접시를 들고 테이블을 훑었다. 가장 끼어들기 편한 무리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먼저 먹던 후배 몇이 자리에서 일어나 건네는 인사를 넘기고 의자에 앉았다. 맞은편에 있는 정수리는 사람은 본 체도 않고 먹기 바쁘다. 강희찬은 한숨을 쉬고 젓가락을 들었다.
“형, 이천으로 바로 가요?”
“어.”
옆에 있는 이승주는 강희찬과 마찬가지로 왼손잡이였다. 덕분에 거치적거리는 것 없이 젓가락을 들 수 있었다.
10시가 넘었으니 인터넷 뉴스에 말소 기사가 떴는지도 모른다. 강희찬은 짧게 대답하고는 식어 빠진 갈비찜을 입에 넣었다.
더 이상 대화거리를 찾을 수 없는 이승주는 시선을 맞은편으로 돌렸다. 대각선 방향엔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먹기만 하는 마무리 투수 선배가 있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테이블에 앉았는데, 말이라도 하면 어디 덧이라도 나나.
하지만 선배가 혼자 먼저 먹고 있던 자리에 이승주와 김재경이 끼어들었으니 따질 말은 없었다. 결국, 이승주의 시비 대상은 바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동기인 김재경으로 향했다.
“야, 먹는 데 무슨 폰을 그렇게 해. 밥을 먹든가 핸드폰을 하든가.”
“어.”
“어, 가 아니라. 뭐 하는데?”
왼손으로는 핸드폰을, 오른손으로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꼴이 보기 거슬린다.
한참을 만지작대는 핸드폰에 손을 뻗어 화면을 엿봤다. 거꾸로 향한 채였지만 자기니 여보니 하는 온갖 낯간지러운 말과 함께 이모티콘들이 대화창에 가득한 건 알 수 있다.
이승주는 순간적으로 인상을 팍 구겼다. 그리고 더러운 거라도 되는 듯 핸드폰에서 황급히 손을 뗐다.
“…뭔데, 이건?”
“너도 어제 같이 나가지 그랬냐.”
“어제? 어제 치킨 먹으러 간다며.”
“…어, 뭐…….”
김재경은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3초 뒤, 이승주는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
“아, 미친 새끼가. 치킨 먹으러 가서 여자를 꼬시냐.”
뭐 하는 여자길래 닭집에서 헌팅을 당하는 걸까? 상상해 본 그림은 영 아름답지 못했다.
엔트리는 팀의 순위나 주전 선수의 컨디션에 따라 항상 다르다. 하지만 투수조와 야수조의 엔트리 멤버 수는 대체로 비슷했다.
오늘 말소된 강희찬 대신 1군 엔트리에 들어올 투수는 아마 하나가 아닐 거다. 야수 중 하나를 함께 말소하고 투수 두 명을 올린다. 이닝 소화가 많은 에이스나 그에 준하는 선발투수가 말소될 때 많은 감독들이 쓰는 방법이었다.
최 감독이 주전 야수를 보낼 리도 없으니, 당연히 내야든 외야든 백업이 말소될 테고. 김재경은 외야 멀티 백업도 되지 못한 탓에 대주자로 경기 후반에나 투입되는 처지였다. 하지만 자신이 말소될지도 모른다는 자각은 아직 없어 보인다. 1군 경험이 짧은 인간은 그저 태평했다.
그래도 이승주는 아침부터 동기의 기분을 잡치게 할 만큼 사회성이 거세되진 않았다. 각자 밥을 먹는 동갑내기 선배들과는 달리, 저에게는 섬세함이란 게 있었다. 초 치는 말을 하는 대신 어제 김재경이 야수 선배들과 함께 나갔던 것을 기억했다.
같은 팀 유니폼을 입고 있어도 투수조와 야수조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일부러 따로 나누진 않아도, 결국 훈련 메뉴가 다르므로 자연스레 어울리는 것도 나뉘게 된다.
다른 구단엔 속해본 적 없으니 모르겠지만, 김재경의 입에서 나온 말을 빌리자면 투수조의 분위기가 조금 더 딱딱하고 정적으로 보인단다. 그래서 김재경은 종종 이승주와 이야기를 하다 투수조의 선배가 말이라도 걸면 몸을 굳히곤 했다. 투수들의 성격이 제멋대로라 다른 팀들도 비슷할 거라는 그의 사족은 인정하기 힘들었지만.
어쨌든 김재경이 투수조의 선배를 어려워하는 만큼, 이승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제 야식이나 먹으러 같이 가자는 야수조 선배들의 제안을 드물게 거절한 이유는 간단했다. 투수가 저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투수 조장인 박신우도 꽤 서글서글한 성격임에도, 어디에 나가자며 자리를 만드는 건 야수조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군기가 특히 심한 건 아니었지만, 객관적으로 보자면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려나.
아예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선배라면 오히려 덜 무섭다. 원래 단체 생활에서의 군기는 내리 갈굼으로 전해지는 게 참진리였다. 중학교 때부터 익숙한 일이었다. 1학년 신입 부원을 교육하는 건 3학년이 아닌, 2학년의 몫이다.
이승주는 바로 위 선배 두 명―나이는 세 살 차이가 났지만, 그사이에 다른 투수들이 없었다―을 흘긋 봤다.
남 일에 영 관심이 없는 인사들이다. 그건 이승주가 신인인 시절에도 비슷했다. 아직도 신인 시절 받았던 무관심의 설움이 생생했다. 둘 다 방임주의라서 그런지, 미리부터 후배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될 좆되는 행동’들을 가르쳐 주는 섬세함 따윈 없었지.
둘 중 하나라도 주장이나 투수 조장이라도 맡는 날엔 팀은 콩가루가 될 게 분명하다. 이승주는 입으로 내뱉을 수 없는 생각을 반찬과 함께 삼켰다.
“오늘은 너도 나갈래? 친구 데려온다던데.”
“…또 나가게?”
미간을 찌푸리는 이승주를 향해 김재경은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
“내일은 서울 갈 거 아냐. 가려면 오늘 가야지.”
“형들이랑 같이 나가서 그런 거지, 권 코치님 벌써 아실걸. 너만 나가면 내일 분명 욕먹는다.”
이승주는 마주칠 때마다 ‘승주는 점점 얼굴이 훤해진다’라고 한 마디씩 건네는 타격코치의 얼굴을 떠올렸다. 직접 훈련을 함께하는 일이 없는 이승주의 입장에서야 좋은 사람이었지, 사실 권 코치는 원래 선수단의 분위기를 잡을 때 한 놈만 족치는 것으로 본보기를 보였다.
하지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친구의 조언을 무시한 채, 김재경은 여전히 핸드폰 화면에만 시선을 두었다.
“어젠 형들 있어서 바로 들어왔다고. 섹스삘이었는데.”
“…아, 미친 새끼. 네가 그 삘을 어떻게 알아.”
“보면 딱 와. 오늘도 자꾸 밤에 나오라는 거 보니까 될 각이야.”
“…….”
글쎄요. 유명 해설위원의 특이한 말버릇 중 하나가 이승주의 귀에 자동 재생되었다.
그래도 밤에 여자를 만나러 가는 것 따위로 이 아침부터 들떠 있는 사람에게 초를 칠 수는 없다. 엔트리 말소 여부처럼 친구로서는 꺼내기 힘든 말이다.
사실 밥을 먹는―게다가 선배들과 함께― 순간에 섹스 어쩌고 하는 말을 꺼내는 친구의 신경이 가장 존경스러웠다. 더 노골적인 말을 꺼내서 투수 선배의 기분을 잡치게 할까, 이승주는 침묵으로 대화를 종결시켰다. 저 둘이 기분이 나쁘면, 유일한 후배인 자신만 괜한 화풀이 대상이 될 확률이 높았다.
‘…엔트리 말소됐다고 징징거려도 나는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승주는 그릇에 넓게 퍼진 볶음밥 알갱이들을 득득 긁어모았다.
“너, 조심해라.”
“…네?”
야무지게 딱 한 숟갈이 된 밥을 입에 넣으려는 순간, 대화는 뜬금없이 이어졌다.
이승주를 기준으로 하면 옆자리의 투수 선배와 앞에 있는 외야수 동기. 친하지도 않고, 제대로 대화를 나누는 걸 본 적도 없는 특이한 조합이었다.
이승주는 눈을 이리저리 도록도록 굴리며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갈비찜이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강희찬은 젓가락으로 그것을 뒤적이기 바빴다.
그러고 보면 이 형 어머니가 유명 한정식당을 했지. 조선 시대 유명한 문인의 자택이었다는 한옥을 식당으로 개조했다는 말도 얼핏 들은 것 같다. 이승주는 가본 적 없었지만, 그 유명한 손맛은 경험해 본 적 있었다.
작년 한국시리즈가 시작하기 전, 먹고 힘내라면서 야구장으로 왔던 갖가지 음식들은 아직도 그 맛이 기억에서 잊히지 않았다. 너무 맛있어서 나중에 가볼까 인터넷에 검색해 봤다가 가격을 보고 기함한 쓰린 추억도 있고.
어릴 때부터 그런 음식을 먹고 자랐으면 호텔 조식으로 나오는, 양념이 덜 밴 갈비찜이 입에 맞을 리가 없긴 하겠지. 그래도 아예 못 먹을 맛은 아닌데. 양념 된 고기는 맛이 없을 리가 없다. 그건 이승주에겐 지동설보다도 더 강력한 진리였다.
이승주는 잔인하게 뼈와 살이 분리되고 있는 선배의 갈비찜에서 고개를 돌렸다.
“아무 데서나 몸 굴렸다가 성병이라도 걸리면 너만 손해야.”
―가 다시 오른쪽으로 돌려야 했다.
아마 강희찬은 미리 엔트리 말소 소식을 누군가에게 들었는지도 모른다. 이승주는 잘 모르지만 사실 에이스 투수라면 매니저가 아닌, 직접 감독이나 코치를 통해 미리 들었을 확률이 높았다. 강희찬은 자신처럼 밥을 먹고 다시 호텔 방으로 올라가 쉴 수 있는 편한 차림이 아니었다.
흰 티셔츠에 남방을 걸치고 있는, 누가 봐도 외출을 염두에 둔 깔끔한 차림. 그 위로 있는 얼굴 역시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게 티가 날 만큼 뽀송뽀송하다.
저 깨끗하고 단정한 얼굴과 차림은 입에서 나온 ‘성병’ 소리와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가래톳이니 뭐니, 말소 사유 기사로 나가는 건 너라고. 여자가 아니라.”
그 말까지 나온 순간 이승주는 봤다. 대각선 방향에 앉아 있는 마무리 투수 선배의 입까지 들어갔던 밥 한 숟갈이 그대로 다시 빠져나오는 광경을.
‘더, 더러워…….’
징그럽게 깔끔을 떠는 사람이 좀처럼 보인 적 없던 행동이었다.
밥이 예쁘게 올려진 숟가락이 접시 위로 놓였다. 그러고도 한동안 짜증이 났는지 고개를 숙인 채 무어라 중얼거린다. 강희찬이 맞은편을 보고 있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이승주는 문득 울고 싶어졌다.
…다 꺼져 버렸으면 좋겠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게 있다고, 아침밥도 이런 악조건 속에서 먹어야 한단 말인가.
“…너 이천 안 가냐?”
동그란 정수리를 보여주던 사람은 이내 고개를 들었다. 개짜증이 난 얼굴을 숨기지도 않는다.
…태성이 형은 좋겠다. 희찬이 형한테 짜증 낼 수 있어서. 희찬이 형은 좋겠다. 저렇게 개짜증이 난 얼굴을 보고도 아무런 감흥이 없어서. 이승주는 마음으로 울었다.
짜증이 잔뜩 묻은 얼굴과 목소리를 마주하고도 태연한 강희찬의 입에선 딱 한 마디가 나왔다.
“갈 거야.”
강희찬은 워낙 자기만 아는 새끼라 남이 기분이 좋고 나쁘고를 아예 모른다고 했던가. 윤태성이 언젠가 했던 말에 이승주도 언제나 동의했다. 물론 지금도.
“가면 점심 먹을 거 아냐.”
“어.”
“그럼 왜 여기서 밥 먹는데.”
“아깝잖아.”
에둘러 전하는―사실 표정이나 톤은 노골적이다― 꺼지라는 말에도 순순히 돌아오는 건 선선한 대답뿐이다.
‘돈도 많이 버는 새끼가, 별…….’
분명 선배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이승주가 생각하기에도 강희찬은 특이한 포인트에서 알뜰살뜰했다. 후배들이 밥을 먹으러 나간다면 카드도 흔쾌히 주는 주제에, 호텔 조식은 아무리 맛없어도 챙겨 먹는 희한한 습성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밥집 아들이라 그렇다는 본인의 짧은 말이 핑계처럼 붙기도 했다.
“…….”
이승주는 김재경을 야렸다. ‘야린다’는 말이 어떤 거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 정석이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을 만큼 힘껏 야렸다.
너 새끼가 아침부터 불건전해서 이런 불편한 시간을 내가 보내야 하잖아, 시발.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걷어차 주고 싶었지만, 동기는 빠른 주력으로 간신히 1군 엔트리에서 버티는 처지다. 그 유일한 밑천을 건들 수는 없어서 이승주는 애꿎은 숟가락을 꾹 쥐었다.
남의 짜증을 잘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과 더 이상 대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지, 결국 윤태성은 일어났다. 넓은 접시엔 아직 음식들이 반 정도 남은 상태였다. 그 그릇을 흘긋 본 강희찬이 입을 열었다.
“더 안 먹어?”
“안 먹어.”
똑같은 ‘안 먹어’인데 억양이 다르다. 태성이 형 짜증 많이 났구나. 부산말 쓰는 걸 보니까.
아침부터 비위 상하는 말을 들어서 신경질이 난 사람답지 않게 의자까지 넣고는, 성큼성큼 잔반을 비우는 곳으로 향한다. 그 길목엔 치킨의 영향으로 얼굴이 잔뜩 부은 안정원이 있었다. 아직 음식이 남아 있는 후배의 그릇을 보더니 눈을 둥그렇게 떴다.
“태성이, 왜 밥을 먹다 말아?”
네다섯 살이 많은 포수 선배의 말에도 고개만 끄덕이고 걸음을 서두르는 걸 보면, 비위가 많이 상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원인 제공자는 아직도 태연하기만 하다.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후배가 익숙한지 안정원은 이내 이승주가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비어 있던 자리는 금세 채워졌다.
“희찬아, 매니저 형이 대충 먹었으면 짐 챙기고 나오라더라. 택시 좀 일찍 왔대.”
“네.”
강희찬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접시 위로 내려놓았다. 상황상 어쩔 수 없다는 걸 아는 안정원은 아까와는 달리 남은 음식에 대해 별 얘기를 하지 않았다.
“가면 감독님한테 인사 좀 전해드려. 나중에 찾아뵙겠다고.”
“네.”
“꼭 전하라고.”
“알았어요.”
강희찬이 괴롭히던 갈비찜을 미련 없이 버리러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승주는 숨을 내쉬었다.
김재경을 조져 버리고 싶었지만, 그건 또 포수 선배가 같은 테이블에 앉아버린 관계로 무산됐다.
“윤태성, 왜 저래?”
저 뒤편에서 강희찬이 남은 음식을 버리고 식당을 나갔다. 그 모습을 확인하자 안정원은 재빨리 물었다.
“희찬이 형이 비위 상하는 말 해서 짜증 났을걸요.”
“뭐라고 했길래?”
“…여자 만날 때 성병 조심하라고요.”
“…….”
안정원은 입에 넣으려던 숟가락을 멈추고 대각선 방향에 앉은 이승주를 노려봤다.
역시 식사 중에 할 만한 대화는 아니다. 이승주는 김재경의 다리를 걷어찰까 다시 심각하게 고민했다.
어오씨. 개탄스러운 한숨이 선배의 입에서 터졌다.
“물을 사람이 없어도 그렇지, 무슨 연애 얘기를 희찬이한테 듣고 있냐. 걔 전에 여자친구가 아이스크림 먹여줬는데, 치약 맛 나서 찼다고 그러지 않았어?”
정확히 이승주가 본인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립스틱이 묻은 아이스크림을 자꾸 먹으라기에 짜증이 났는데 결국 맛도 싫어하는 종류였단다. 아무런 죄의식 없는 얼굴로 여자를 길바닥에 두고 택시로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이승주가 아연했던 게 대략 1년 전이었다.
선배의 데이터베이스 업데이트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걸 깨달은 이승주는 신이 났다. 원래 사람이란 남 얘기를 할 때 엔도르핀이 도는 법이다.
“여자가 연락 와서 다시 만났어요.”
“그… 배우 준비한다던 그 여자 맞지?”
“네.”
“그렇게 차여놓고 먼저 연락을 해? 그럼 지금 만나고 있나 보네?”
“그건 아닐걸요.”
원래 배터리란 한 몸이라고 다들 말하지 않는가. 희찬이 형에 대한 건 정원이 형이 모르는 게 있어선 안 된다.
기적의 합리화를 마친 이승주의 머리가 명령을 내렸다. 입을 벌리라고. 몸은 충실히 뇌의 명령을 거부하지 않고 따른다.
“좀 만나다가, 작년에 시즌 끝나고 그 누나가 어디 해외로 놀러 가자고 했대요.”
“알겠다. 여행 갔다가 싸워서 헤어졌구나?”
“아……. 여행 가면 다 싸우지. 신혼부부도 싸워, 그건.”
어느새 김재경은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제 만난 여자와의 연락은 이미 뒷전이었다. 그 옆에 앉은 안정원은 본인의 경험이라도 머릿속에서 되살리는지 탄식과도 비슷한 추임새를 넣고 있었고.
하지만 이승주는 그 반응들에 비웃음밖에 나지 않았다.
상식적인 인간의 상식적인 생각에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 이승주는 잠깐의 틈을 두고 입을 열었다. 극적인 연출을 위함이었다.
“여행은 가지도 않았어요. 형이 병원 가서 검사받고 진단서 떼어다 줬다잖아요. 너도 산부인과 가서 성병 검사받고 오라고. 아마 그 날 바로 헤어졌을걸요.”
턱이 빠질 듯 두 사람의 입이 벌어졌다.
남자친구가 쉬는 기간에 놀러 가자는 말 한번 했다가 호되게 데었을 여자를 떠올렸을까.
이유가 뭔지는 몰라도 안정원의 입에선 ‘어이고’ 하는 반사적인 한숨이 흘렀다. 이승주 역시 그 반응엔 동의하는 바였다.
헤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을 거다. 구단 행사 때문에 마주친 이승주에게 강희찬은 핸드폰을 내밀었다. 특정 번호에서 오는 문자를 차단할 수 있느냐는 물음과 함께였다.
한 시간에 한 번씩 쌍욕이 범벅된 장문의 문자를 보내는 번호를 차단해 주며 이승주가 물었다. 누나랑 왜 싸웠느냐고.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하는, 굉장히 차분한 톤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연했던 건 이승주뿐이었다.
‘말소 사유 나가잖아, 나는.’
분명 그 누나한테도 똑같은 말투로 얘기했을 게 뻔하다. 맞지 않았느냐는 이승주의 물음에 휴대전화를 돌려받는 선배는 그저 ‘내가 왜?’라는 얼굴로 얕게 고개를 저었다. 듣지 않아도 어차피 속으로 하는 생각은 뻔했다. 내 것도 갖다 줬는데 뭐가 문제냐고 생각했을 거다.
싸대기 한 대 맞지 않은 게 용했다. 사실 사람이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으면 대처를 할 수 없다. 상식 밖의 공격을 받은 여자는 며칠 지나고 되새겨보니 새삼 분해서 욕설 문자나 보냈을 거고.
“아무튼, 인터넷에 글 안 올라오는 게 신기해요. 희찬이 형 그런 거 딱 싫어하잖아요.”
“야. 그런 거 올리면 여자가 무슨 좋은 소리를 듣겠냐. 배우 준비했다며. 그냥 똥 밟았다고 생각하는 게 낫지.”
일곱 살이 많아서인지 몰라도 생각의 방향이 달랐다. 안정원의 말에 이승주는 아아, 하고 깨달음을 얻은 소리를 냈다. 연기자 준비까지 한다는 사람이라면 역시 구설수는 만들어서 좋을 게 없긴 하다.
“똥을 밟는 게 훨 낫죠.”
김재경이 한마디를 더했다. 대기화면에 주르륵 쌓여 있는 메시지는 이제 김재경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의 말에 안정원은 밥을 입에 넣으며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백번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배터리 호흡을 맞춰온 정이 발동되는 걸지도 모른다.
“뭐… 희찬이 돈 많이 벌잖아. FA 하면 더 많이 벌 거고.”
세월과 함께 쌓아온 정에도 불구하고, 감싸줄 말이 저것밖에 없다니. 하지만 의외로 못된 구석이 있는 김재경은 그 얄팍한 변명도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그럼 형, 나중에 민선이가 희찬이 형 같은 남자랑 결혼하겠다고 하면 시켜요?”
“…죽고 싶냐?”
김재경 쪽으로 고개를 틀며 확 정색하는 안정원의 태도에도 나불거리는 입은 닥칠 줄을 몰랐다.
“왜요. 그 형 돈 많잖아요. 집도 부자고.”
“선수는 절대 안 돼. 민선이는 공무원이랑 결혼시킬 거야.”
단호한 아빠의 말이다. 아직 학교도 가지 않은 딸의 사윗감까지 미리 정해놓았다는 사실은 미혼 남자 둘을 섭섭하게 만들었다.
…자기도 운동선수면서 저렇게 질색할 것까지야 없지 않나.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다. 안정적인 게 최고인 세상이다. 고개를 끄덕인 동기 둘은 이제 선배의 식사 속도에 맞춰 남은 밥을 새 모이만큼씩 먹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핸드폰의 화면은 여전히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한 채였다.
* * *
주말 아침부터 집 앞으로 데리러 온 송재혁의 차를 타고 이천으로 출발했다. 초여름의 아침 햇살 때문에 오만상을 찌푸리며 일어났을 때와는 달리, 막상 도시 외곽에 도착하자 조용하고 낯선 공기가 느껴졌다.
가끔은 혼자 주말에 이런 데 드라이브를 다니는 것도 나쁘진 않겠구나.
어차피 지켜지지도 않을 생각을 속으로 하며, 이선은 손님에게 나온다는 출입증을 목에 걸었다.
야구장 겸 선수들 숙소 시설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구경을 해봐도 되느냐는 이선의 말에 송재혁은 카메라를 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송재혁은 도착하자마자 카메라를 꺼내고 오전부터 훈련하는 선수들을 찍었다. 누구 하나가 목적인 듯했다.
구경하겠다고 해봐야 갈 곳도, 볼 곳도 없다는 걸 내부를 한참 돌아다니고서야 깨달았다. 반경 5㎞ 안으로는 밭밖에 없는 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큰 건물이 눈에 들어왔지만,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아마 저기가 선수들의 숙소 시설일 것이다. 번쩍거리는 외관은 ‘GUEST’라는 글자가 새겨진 출입증 하나를 목에 건 사람의 입장을 거부하고 있었다.
정이선은 하릴없이 친구가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송재혁은 삼각대에 카메라를 설치해 두고 벤치에 앉아 훈련 모습을 보고 있었다.
“구경 다 했냐?”
“그냥……. 응. 깨끗하네? 넓고.”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이선은 그 옆에 있던 이온음료 한 병을 치우고 앉았다. 마셔도 된다는 송재혁의 말에 반쯤 남은 음료를 마셔보니, 생각보다 미지근했다. 맛도, 온도도 미묘한 탓에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나오길 잘했지?”
“어… 뭐.”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사실이었다. 주말 아침에 일찍 일어난 피로감은 근교의 공기에 씻겨 나간 지 오래였다.
“나중에 애인 만들면 구경도 오고 그래라. 경기 보는 건 공짜니까.”
“말해도 돼? 찍고 있는데.”
“어차피 소리는 안 넣을 거야. 노래 들어갈 거라서.”
송재혁은 괜히 딴소리하는 친구를 곁눈으로 흘긋 봤다.
이름만이라도 알아온 세월이 10년은 넘었다. 다시 만나고서, 그나마 ‘친구’라는 이름에 가깝게 지내온 게 5년이 넘었고. 그래도 여전히 정이선은 ‘이런 쪽’의 대화를 할 때마다 어딘지 어색하고 뻣뻣한 반응을 보였다.
아마도 그건, 이성애자인 자신의 기분을 살피기 때문일 거라고 송재혁은 짐작했다.
‘뭐가 잘못한 일이라고 몇 년을 저렇게 굴까.’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저런 성격이니 예전이나 지금이나 시원찮은 놈들이나 만난 거라고 속으로 혀를 찼다.
“말 돌리지 말고. 매번 지 배고플 때만 불러다 밥 사달라, 술 사달라 하는 연애 말고. 주말에 날 좋으면 어디 먼 데 같이 가서 좋은 거 보여주고, 맛있는 거 먹이고.”
“…….”
“그러는 게 보통 연애지.”
사람이 드문 길바닥에서 재회할 그 무렵, 정이선은 또 혼자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 교복만 벗었지 고등학교 때보다 발전한 게 없는 연애, 아니 애정사였다. 본인 역시 모르지는 않았을 거다.
턱이 빠질 것처럼 시린 겨울. 정이선을 다시 만났던 그곳이 보통 술집은 아니었다는 걸 송재혁은 꽤 나중에 알았다. 그 앞에서 실랑이하던, 딱 봐도 이선보다는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이는 남자의 성향도 더불어.
…차라리 그런 곳에서라도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성격이었다면 살기는 수월했을 텐데.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아갈 것 같은 정이선은 의외로 본인의 눈에 들어온 것 외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 놈만 팬다는 옛날 조폭도 아니고……. 생긴 것답지 않게 외골수였다.
마음에 둔 사람을 대신해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요령 없는 친구는 결국 임용 통과 후 입대를 했다. 그즈음 해서 친구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송재혁은 들은 바가 없었다.
이선의 첫 휴가 때, 술을 마신 그에게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었다. 지금은 만나는 사람이 있냐고. 살래살래 젓는 고개는 체념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 반응을 보고, 혼자 좋아하던 상대와 무언가 있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었다.
송재혁이 취업 준비를 할 무렵, 정이선은 전역을 했다. 전역과 동시에 취업 자리가 정해진 친구에 대한 부러움을 숨기려 송재혁은 다시 한번 물었다. 만나는 사람이 있냐고.
시선을 내린 채 바로 고개를 젓던 지난날과는 달리, 정이선은 잠깐 망설였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저었지만, 송재혁은 그 짧은 지체를 눈치챘다. 20대의 적지 않은 시간을 봤던 그 사람과 관련이 있다는 건 어린애도 눈치챌 수 있었을 거다.
요약하자면, 스물한 살에 특수학교 봉사활동에서 만난 공익근무 요원이 지금은 공무원 준비를 하고 있다. 정이선 선생의 20대 전반에 덮인 사람은 평범하디 평범했다. 너무 평범해서 송재혁이 다 억울할 정도로.
“허구한 날 고시원 근처만 불려다니지 말고.”
“걘 시험 준비하잖아.”
선수들이 내지르는 고함마저도 햇살 속에서 잘게 부서지고 있었다. 도시에선 익숙하지 않은 적막감을 가르는 차분한 목소리를 듣자 송재혁은 인상을 와락 구겼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나 하고 있어. 그렇게 해서 합격하는 것보다, 공무원 시험이 먼저 없어져.”
“…무슨 공무원 시험이 없어지냐.”
“사시도 뒤졌는데 그거라고 없어지지 말란 법 있냐.”
이선은 좁디좁은 고시원에서 계속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신규진을 떠올렸다. 대학교 때 뭇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던 그는 나이를 먹고 캠퍼스를 떠날 시점이 되자 현실의 문제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서울에 있는 적당한 수준의 4년제 출신. 별다른 어학연수나 인턴십 경험이 없어서 취업 시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먼저 취업을 했던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정이선이 아는 사람 중 누구보다 반짝이던 사람은 어느새 열등감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중소기업에 가는 것은 싫어해서, 취업 전쟁에서 도망치는 패잔병처럼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정 선생, 너 돈은 받았어? 어머니 아프다고 구라 치고 빌려 갔다며.”
“아직. 공부하는 애가 돈이 어디 있겠어.”
“아이고, 미친 새끼야. 누가 누굴 걱정해?”
탄식과 타박이 섞인 채 날아들었다. 하지만 이선은 억울했다.
신규진에 대한 걱정 여부는 제치더라도, 자신은 객관적인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공부를 하면 필연적으로 돈이 없어진다. 이선 역시 임용 고시를 준비하던 졸업반 시절에는 과외를 한 개만 남기고 다 끊었다.
조금 더 당당히 들어보려던 고개는 몸을 완전히 돌려 앉은 송재혁의 기세에 밀려 수그러들었다.
“너 카드는 제대로 돌려받은 거 맞지?”
“바로 받아서 왔어, 카드는.”
“호구 새끼, 진짜. 넌 약간 팔자가 그런 것 같아. 본투비 호구.”
“…죽을래?”
아직 음료수가 한참 남은 페트병을 내려놓으며 정이선이 눈을 흘겼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호구도 호구라고 놀리니 화는 나는 모양이다.
웃기지도 않는다. 저렇게 얘기하면 담임으로 맡은 반 초등학생들도 무서워하지 않을 거다. 친구의 시선을 피하며 송재혁은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수들은 오전 훈련이 끝나자 뒷정리를 시작했다. 자꾸만 따라다니는 카메라에 대고 이미 한 번 짜증을 냈던 오늘의 주인공도 함께 공을 줍고 있었다. 갓 입단한 신인 선수들처럼―그들은 마치 ‘누가 더 빨리, 많은 공을 줍는지’ 내기라도 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적극적이진 않아도, 강희찬은 주변에 있는 공을 주워 컨테이너 박스에 던진다. 송재혁은 그의 모습이 잘 보이도록 카메라의 줌을 당겼다.
저 경력과 연봉이다. 이천에 있던 시절보다 잠실 마운드에 오르는 게 더 익숙한 선수기도 하고.
그런 선수가 당연하게 저보다 한참 어리거나 이름값이 덜한 후배들과 함께 뒷정리를 하고 있다. 흠잡을 데 없는 껍데기 때문인지, 저런 모습만 보면 또 사람이 좋아 보이는 게 문제긴 했다.
소일거리를 해도 지겨운 모양이다. 강희찬은 어느새 코치가 두고 간 펑고 배트를 손에 쥐고 있었다. 장난이라도 치려는 듯했다.
‘지금 누구는 너 때문에 가뜩이나 경기도 일찍 시작하는 날에 여기까지 왔거늘…….’
괜한 심술이 도진 송재혁은 화풀이할 수 있는 다른 대상을 찾았다. 당연히 그건 제 옆에서 다시 음료수를 마시려는 친구가 될 수밖에 없다.
윗선에선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겠으나, 인터뷰는 어떻게 편집을 해도 대상자의 본래 성격을 숨겨줄 수는 없다. 게다가 옆엔 애인이라고 칭하기도 뭣한 놈에게 카드값이며 돈을 뜯겨놓고 태연하게 음료수나 마시는 바보 호구가 있고.
“…….”
가만히 보는 시선을 의식했는지 정이선은 마시던 음료수를 다시 제자리에 두었다. 왠지 그 모습마저 불쌍하게 느껴져 입에선 한숨이 절로 새었다. 야. 짧게 부르는 말과 동시에 송재혁은 그라운드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너 저기서 하나 골라봐.”
“뭘?”
“보고 한번 괜찮은 놈으로 골라보라고.”
“…고르면 뭐 어쩌게.”
뜬금없는 대화 흐름에 정이선은 와락 얼굴을 구겼다.
그래도 평소엔 호구라고 타박하는 정도였다. 며칠 전에 동창회에 다녀와서 저러는 걸까? 괜한 물음이 귀찮았지만, 적당히 맞춰줘야 이야기를 끝낼 수 있다.
이선은 포기하고 푸른 잔디와 흙이 조화로운 운동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
선수들은 개성이라고는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다 같은 차림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누가 누군지 구분이 되지 않을 외모들이다. 왼쪽에서 오른쪽. 이선은 천천히 시선을 옮기며 인물들을 눈에 담았다.
‘…꽤 키가 크네.’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가 훌쩍 컸다. 이내 그것이 순전히 본인의 신장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잔디가 깔린 곳보다 봉긋하게 솟은 언덕 위에 서 있기 때문이었다.
그 높이를 제외해도 작다고 말할 수는 없는 신장일 거다.
남자는 보통의 야구 배트보다 긴 방망이를 오른손에 쥐고, 가볍게 위로 던진 공을 친다. 노란 바구니로 정확하게 공이 들어갈 때도 있었고, 아깝게 빗나갈 때도 있었다. 바구니를 빗나간 공은 그 주변에 있던 머리가 짧은 선수들이 부지런히 주워 담는다.
운동장에 있는 다른 누구도 하지 않는 행동 때문인가? 마치 맞춤복인 양 운동복을 소화한 옷매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 운동복 위로 있는 얼굴이 선수치고는 의외로 선이 가늘다 싶은 탓일 수도 있었고.
어쨌든 눈이 가는 사람이라고. 이선은 그리 생각했다.
“저기… 50번?”
“…….”
“왜. 고르라며.”
빤히 바라보는 송재혁의 시선에 민망해진 이선이 괜히 퉁명한 목소리를 냈다. 고르라고 해서 골랐는데 왜 저런 눈으로 보는 건데.
“…너도 진짜 대단하다.”
이름 대신 연습복에 새겨진 번호를 들은 순간 송재혁의 입에선 한숨이 절로 새었다. 본인이야 부정해도 이쯤이면 팔자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뭐가?”
“운동장에 사람이 몇인데, 골라도 제일 못돼 처먹은 놈으로 고르네. 넌 진짜 그냥 팔자 같다.”
“…그냥 보고 고르라며.”
얼굴만 보고 성격을 어떻게 알아, 내가. 삐친 호구가 중얼거렸다.
‘딱 봐도 싹퉁머리 없게 생기지 않았나?’
송재혁은 매번 카메라를 들이댈 때마다 한 대 쳐버리고 싶다는 표정을 짓던 얼굴을 새삼스레 다시 봤다. 하지만 이미 직장에서 당한 서러움이 가득한 그의 눈이 강희찬의 얼굴을 객관적으로 평할 수는 없었다.
남자 얼굴 따위는 오래 보고 싶지도 않다. 피사체를 따라 카메라를 조금씩 움직이며 송재혁은 입을 열었다.
“넌 진짜 조심히 살아라, 좀. 아무 데나 퍼주지 말고.”
나직한 목소리였다. 송재혁의 말이 단순한 타박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을 향한 걱정임을 알고 있다. 이선은 얼핏 새어 나오는 웃음을 누르려 아랫입술 안쪽의 살을 슬쩍 깨물었다.
“그럼 오늘 밥은 사주는 거야?”
“야……. 나를 그 범주에 같이 두면 안 되지.”
억울하다는 듯 크게 뜬 눈이 이선을 향했다.
“일주일 전부터 보쌈 먹고 싶었는데.”
“이 아침에 문 여는 보쌈집이 어디 있어.”
“하는 데 있어.”
이선은 반쯤 포기하고 고개를 저었다. 분명 오늘은 야구경기가 있는 날이다. 친구는 주말과 법정 공휴일은 쉬는 자신과는 휴일의 개념이 다른 직장에 다녔다.
촬영을 마치고 오후엔 야구장으로 출근해야 한다기에, 간단히 먹을 줄 알았는데. 첫 끼부터 잘도 저런 걸 먹겠다고 한다. 위장은 여전히 20대 초반인 친구를 존경하고 있던 때였다.
딱― 딱―
규칙적인 소리가 구장을 울려댔다. 말소리에 섞인, 배트와 공이 내는 일정한 소음은 이제 귀에 충분히 익었다.
탁―
그건 야구에 문외한인 자신이 듣기에도 빗맞은 걸 느낄 수 있는 타격음이었다.
“어… 야!”
도란도란한 선수들의 말소리 대신 어어, 하는 소란. 보고 있던 송재혁의 얼굴이 사색이 되는 모습. 이선이 그걸 인지하는 것보다도 눈앞이 까맣게 변하는 게 먼저였다.
아픔은 그 뒤였다.
“아…으…….”
“야, 이선아!”
신고 있던 운동화가 점점 가까워지는 순간. 고개는 본능적으로 통증의 원인이 왔을 방향을 향했다.
주황색의 긴 배트를 든 사람은 여전히 남들보다 머리 하나가 높다. 햇살 탓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아래로 내려다보는 그 눈이 슬쩍 찌푸려져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한 당황도, 다친 사람에 대한 염려도 묻어나지 않았다.
‘뭐야.’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한 시선이 정이선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아, 형! 잘 넣어주세요!”
“빨리하라고. 배고프다.”
쪼그리고 앉아 공을 줍는 후배의 말에 강희찬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럼 먼저 밥 먹으러 가면 되잖아요.”
후배의 구시렁대는 소리는 옆에 앉은 다른 놈이 팔꿈치로 쿡 찌름과 동시에 어물어물 입 안으로 사라진다.
스프링 캠프를 제외한다면, 이렇게 일찍 일어나서 훈련을 하는 스케줄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틀 정도는 아침에 후배가 두드리는 문소리에 겨우 일어났었다. 그것도 며칠 지내다 보니 이젠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날 정도는 될 만큼 익숙해졌다.
‘말소되고 며칠이 지난 거지?’
때때로 날짜를 셈하는 순간 정신이 멍해지곤 했다.
조용한 야구장. 구경을 오는 관중보다 경기를 뛰는 선수의 숫자가 더 많은 이곳의 공기는 아주 예전에 겪어본 어떤 곳과 닮았다. 물론 그라운드 상태나 시설은 비교도 되지 않겠지만.
아무리 1군에 관중이 없어도 이 정도로 적막하기는 힘들다. 차라리 고등학생 시절, 유명 라이벌 고등학교의 황사기 본선 매치가 여기보다 더 떠들썩했다.
마운드 주변을 굴러다니는 공 하나를 주워 들며 강희찬은 생각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분위기는 모든 생각을 과거로 돌리고 있었다.
‘…여기가 이래서 싫은 거다.’
쥐고 있던 공을 위로 던졌다. 금방 내려오는 경식구의 속도에 맞춰, 오른손에 쥐고 있던 타격코치의 펑고 배트를 휘둘렀다.
탁!
공은 배트에 빗맞았다. 그 탓에 오른손이 지잉 하고 울렸다. 순간적으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손에서 번지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어어, 하는 후배들의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몇 번 지면에 부딪혀 튀어 오른 공이 도착한 곳은 1루 더그아웃이었다.
고개를 돌린 강희찬의 눈에 카메라를 들고 있는 구단 직원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 그 옆에 있는, 고개를 숙인 남자가 공에 맞았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씨발.
순간적인 짜증에 욕설이 목까지 차올랐다. 이미 후배 몇은 다친 사람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더그아웃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연습이 끝난 후, 얼른 점심을 먹으러 가려고 일부러 뒷정리를 거들고 있던 차였다. 그 행동이 무색하게도 귀찮은 일이 생겼다. 빠른 식사는 요원해 보였다.
“야, 이선아!”
카메라를 벤치에 내려놓은 구단 직원이 남자를 부축했다. 하지만 이내 몸은 땅으로 쓰러졌다. 잠깐 눈이 마주쳤나 싶은 얼굴은 이제 벤치 등받이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그 순간이었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투수코치가 사색이 된 얼굴로 더그아웃에 들어오고 있었다.
씨발, 진짜.
컵스의 2군 투수코치인 이명호는 최 감독의 8년 후배인 팀 메이트였다. 그 말인즉, 이명호가 신인으로 컵스의 유니폼을 입었을 적, 최선형은 감히 올려다보기도 어려운 까마득한 선배였다는 소리다.
이명호의 데뷔 시즌이 끝난 후, 최선형은 회전근개 파열로 인해 선수 유니폼을 벗고 투수코치가 되었다. 무서운 선배는 더욱 무서운 코치가 되었다. 이명호가 은퇴하고 코치 연수를 위해 미국에 다녀왔을 무렵엔 선배는 이제 ‘최 코치’가 아닌 ‘최 감독’이 되어 있었다.
옛날도 아니고 이젠 둘이 술잔을 기울이며 속을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최선형은 무서운 선배이자 코치님이자 감독님이었다.
적어도 선수나 코칭스태프 사이에서 1군 감독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희찬이, 좀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2군 보낸다.’
엔트리 말소 기사가 뜨자마자 최 감독으로부터 개인적인 연락이 왔다.
팀의 토종 에이스는 3년 연속으로 이닝 소화가 많았다. 용병도 저 정도로 이닝을 소화했다면 피로도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팀이 한국시리즈를 치렀기 때문에 강희찬은 가장 오래, 많이 경기를 뛰었다. 3년 연속이었다. 그가 한국시리즈 1선발로 뛰었던 것이.
이명호가 강희찬을 마지막으로 본 건 그가 막 신인으로 입단하고 몇 개월이 지난 때였다. 용병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대체선발로 낼 수 있는 투수가 누가 있느냐는 최 코치의 연락을 받았다.
갓 입단한 고졸 투수는 꾸준히 선발 수업을 받았고, 컨디션과 볼이 그 어떤 선배들보다도 좋았다. 연차 따지지 말고 솔직히 얘기하라는 최 코치의 말에, 이명호는 ‘강희찬’이라는 이름을 꺼냈다. 바로 다음 날 감독이 강희찬을 콜업 하겠노라 직접 연락이 왔다.
‘아무도 너보고 잘하라고 안 한다. 부담 갖지 말고 보여줄 거 다 보여주고 와라.’
콜택시에 짐을 실어주며 이명호는 말했다. 이제야 고졸 1년 차 선수다. 잠실에 가면 ‘강희찬’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어차피 용병 투수의 대체선발 자리였다. 아무도 너에게 맥커친과 똑같이 하는 걸 바라지 않는다는 코치의 말에 데뷔전을 앞둔 신인 투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닫아주고, 출발하는 모습을 보고서도 이명호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택시가 사라진 곳을 지켜봤다.
귀가 터질 것 같은 1군 데뷔전. 분명 이명호도 선수 시절 경험한 적 있었다. 그리고 다시 2군 그라운드로 돌아왔을 때 느껴지던 적막과 허한 감각 역시 또렷하다. 선수로서 유니폼을 벗은 지는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선수라면 누구나 거치고 견뎌야 할 성장통이었다. 하지만 다시 이곳을 밟을 때 느끼게 될 상실감을 미리 걱정하던 선배이자 코치의 염려는 무의미해졌다.
8이닝 102구.
괴물 같은 데뷔전이 단순한 운이 아니라는 걸 그 후 1군에서 증명했다. 맥커친이 엔트리에 돌아와도 신인 투수는 말소되지 않았다. 가을야구에선 롱 릴리프로 보직이 바뀌었지만, 강희찬은 착실히 그곳에서 버텨냈다.
개막전 선발투수.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투수. 올림픽 결승전 승리투수.
더 이상 이름 옆에 ‘용병 투수의 대체선발’, 혹은 ‘신데렐라’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았다. 그것들을 대신할 다른 말들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를 보는 것처럼 자꾸 신경이 갔다. 나이 먹은 사람 특유의 과한 걱정이라 해도 이명호는 할 말이 없었다.
대략 5년 만에 다시 마주한 얼굴은 이제 ‘고졸 신인 투수’가 아닌 프로의 느낌이 완전히 배어 있었다.
다시 이천의 구장을 밟게 되었을 때 어린 투수가 느껴야 할 상실감을 걱정했던 건 역시 기우였다. 수원에서 온 택시에서 내린 얼굴엔 그저 피로감만 묻어났다. 지금 엔트리에서 빠져도 다시 1군으로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여유였다.
‘더럽게도 못했더라. 3이닝 9실점이 뭐냐?’
5년 만에 만난 제자를 향해 이 코치는 장난스러운 인사를 던졌다. 투수는 멋쩍어하는 기색도 없이 짐가방을 오른쪽 어깨에 멨다.
‘2점은 분식 당한 겁니다.’
‘…새끼가, 말이나 못 하면.’
올해 유일하게 개막전에 이름을 올린 토종 선발투수에게 이제 와 해줄 기술교육 같은 것도 없다. 최 감독도 엔트리 말소 기간인 열흘 동안 푹 쉬기만을 바라고서 2군으로 보낸 것이다. 말소 기간에 한 번 정도 등판을 시켜 실전 감각만 유지해 주면 될 일이었다.
오늘도 무사히.
남의 돈을 받으며 직장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에 품고 있는 말을 이 코치 역시 되뇌었다. 감독의 계약 여부에 따라 움직이는 게 코치진의 거취다. 무사 안녕한 직장 생활에 갑작스럽게 떨어진 폭탄이었다.
열흘간 사고 없이 곱게 데리고 있다가 그대로 1군으로 보내면 된다. 그렇게 생각한 지 사흘째. 결국 폭탄은 터지고 말았다.
“이 새끼가 씨발……. 밥이나 처먹으러 갈 것이지, 펑고 배트는 왜 들고 설쳐, 설치기를!”
꼭대기 층까지 뚫려 있는 클럽하우스 건물의 홀 내부에 코치의 목소리가 울렸다.
“사고를 치려면 1군에서 치라고! 왜 내려와서 지랄이야!”
‘3이닝을 막는 데 9실점이나 했으면 내려와야지.’
강희찬은 한숨처럼 나오는 숨을 삼켰다. 생각을 그대로 내뱉는 건 지금 상황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코치마다 스타일이 있었다. 어떤 코치들은 혼을 낼 때 말대답을 하는 걸 싫어했고, 그렇지 않고 대답을 꼬박꼬박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명호는 전자에 가까웠다.
“그리고 왼손잡이가 왜 오른손으로 빠따는 잡아!”
하지만 이건 강희찬도 나름의 할 말이 있었다. 왼손은 신경 써서 관리하라고 했던 게 이 코치 본인이다. 처음 이천에서 봤을 땐, 할 수 있으면 밥도 오른손으로 먹으라는 말까지 했었다. 물론 그 말을 따르기는 힘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젓가락질을 오른손으로 할 수는 없었으니까.
“…손 울려서요.”
흘러나온 대꾸를 듣자 한 걸음 앞서던 이명호의 걸음이 멈춰졌다.
“…….”
뭐 이딴 새끼가 다 있을까?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 마주한 얼굴을 잡아 뜯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선수에게 할 수 없는 화풀이를 대신하듯 이명호의 걸음이 다시 빨라졌다.
“인터넷에 글이라도 올라가면, 최 감독… 그 미친 불곰 같은 성질머리에 나를 얼마나…….”
아찔해지는 상상에 두통이 몰려온 이명호는 솥뚜껑 같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난 못하는 선수들한테 뭐라고 안 한다. 코치를 조져 버리지.’
최 감독이 입버릇처럼 하는 소리가 환청처럼 이 코치의 귀에 울렸다. 최 감독은 아직도 체구가 어지간한 젊은 투수들만큼 큰 사람이다. 저 앞에 보이는 처치실의 문패를 보자 이명호의 입에선 탄식 같은 한숨이 흘렀다.
공에 맞고 쓰러진 남자는 타격코치에게 업힌 채 클럽하우스 건물로 옮겨졌다. 마사지를 받는 용도인 간이침대에 눕혀져도 10분째 제대로 깨지 못하고 있단다.
구급차라도 불렀어야 했나. 소란을 피하기 위해 잠깐 상태를 지켜봤지만, 이러다 더 큰일을 치를지도 모른다.
“일어나면 잘못했다고 빌어. 인터넷에 글 안 쓰게 하란 말이야. 딴소리도 됐고, 무조건 죄송합니다만 해.”
이명호가 씹어 뱉듯 말했다. 이를 악물고 말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쌍소리가 나오려는 걸 눌러 참고 또 눌러 참았다. 하지만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선수는 그런 코치의 노력을 몰라주는 게 분명했다.
“…애초에 보호장비도 안 한 일반인이 왜 훈련 중에 더그아웃에―”
“야, 이 개새끼야!”
꼭대기 층에서도 들릴 법한, 커다란 소리가 다시 한번 건물을 울렸다. 착각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강희찬은 생각했다. 앞서 걷던 코치는 분을 이기지 못한 듯 요란스레 뒤로 홱 돌았다.
“그래, 씨발. 말 잘했다. 그러니까 너 평소에도 행동을 똑바로 했으면, 내가 이래?”
“…….”
이 코치는 젊은 시절엔 꽤 미남 선수라고 평가받았다. 80년대 배우처럼 부리부리한 눈이 그 평가에 큰 영향을 끼쳤을 거다. 하지만 지금 그 눈은 화를 가득 담은 채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코치의 모습에 강희찬은 하려던 말을 중간에서 끊을 수밖에 없었다.
“공 날아다니는 데서 하이바 안 쓰고 정신 팔고 있던 놈도 잘한 거 없지. 잘한 거 없는데―”
이명호의 말은 점점 애원조로 변했다. 그런 코치의 목소리를 강희찬은 어느 순간부터 열중쉬어 자세로 듣고 있었다.
“인터넷에 글이라도 올라가면 너는 ‘강희찬’이고 그놈은 ‘일반인 모 씨’ 아니냐. 어? 대가리는 장식이야?”
“…….”
“네 팬이라잖냐. 적당히 죄송하다고 하고 병원비만 물어줘서 조용히 마무리하면 되지, 송 PD 친구라는데.”
“…….”
“강희찬. 대답.”
“…알겠습니다.”
대답 자체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였지만, 이 코치가 거기까지 무어라 할 수는 없었다.
바닥으로 시선을 내린 채 아직도 열중쉬어 자세로 있는 선수의 얼굴을 봤다. 불만의 기색이 어리는 것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그라운드에 들어올 거면 안전장비를 갖추어야 했고, 그게 아니라면 공이 날아오는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봐야 한다. 저쪽도 과실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문이 나봐야 손해인 건 이름이 알려진 선수뿐이다.
완전히 납득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반박은 하지 않는다. 지금 상황에선 가장 최선의 모습을 보이는 제자를 보자, 이명호의 화도 한풀 꺾였다.
“오늘 KC 전, 어차피 너는 안 나가니까 송 PD랑 같이 병원 가.”
“제가 왜 거기까지…….”
“그럼 내가 가리? 일 없는 놈이 가야지.”
중간에 말을 끊은, 기가 찬 코치의 말투에 강희찬은 나직이 숨을 뱉었다.
“병원 같이 갔다가, 오늘은 집으로 바로 퇴근하고, 내일 잠실에서 버스 타.”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이 코치는 다시 걸음을 돌렸다. 처치실 앞에 도착한 이명호의 투박한 손이 조심스레 문을 두어 번 두드리자, 안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이명호의 손에 의해 문이 열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낯선 남자의 인영이었다.
10분 동안 잠깐 깨다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던 사람은 다행히도 완전히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구급차까지는 부르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에 속에선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제발 뒤에 있는 놈이 멀쩡한 표정을 짓고 있기를.
간절한 바람을 담아 이명호 코치는 입꼬리를 힘껏 들어 올렸다. 정말 걱정했다는 마음이 상대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얼굴에 미소를 담뿍 담았다.
선수 시절에는 신경도 써본 적 없던 표정 관리는 코치직을 10년 가까이 하다 보면 자연스레 느는 모양이다.
* * *
“야, 이 개새끼야!”
평일 아침에 막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는 때처럼 잠이 든 것도, 깬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였다. 그 모호한 정신을 현실로 돌아오게 한 건 문 너머로 들려온 짧은 고성이었다. 실내가 아니라 운동장에서 들었어도 귀에 확 꽂혔을 성량이라고 이선은 생각했다.
밀려오는 두통과 함께 겨우 시야에 걱정이 묻어 있는 송재혁의 얼굴이 들어왔다.
“정 선생, 괜찮냐? 좀 일어날 수 있겠어?”
아, 이 자식…….
“야……. 너, 나보다 카메라를…….”
지끈거리는 머릿속엔 암전되기 전의 순간들이 몇 장의 필름처럼 남았다.
공이 날아드는 것과 동시에, 제 친구보다도 회사 물품일 카메라를 먼저 챙기던 송재혁. 한심함과 짜증이 반씩 섞여 있던 선이 유려한 옆얼굴. 그리고 …아마도 욕설을 내뱉던 입 모양.
“너 자꾸 못 일어나서 걱정했다. 지금 119 부르려고 했는데, 딱 일어나네.”
“…….”
여기까지 오는 동안 반경 5㎞ 안으로는 밭밖에 없었다. 이런 곳까지 구급차를 부르면 오는 데 얼마나 걸릴까.
아픔을 잊기 위해 생각을 애써 돌리며 정이선은 몸을 일으켰다.
분명 운동장에 있었는데, 일어나 보니 간이침대 위였다. 누군가에게 업혀 왔는지 끌려왔는지 몰라도, 성인 남자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경험인 건 확실했다.
“나 여기 어떻게…….”
똑똑.
어떻게 왔는지 물으려는 이선의 말은 노크 소리에 묻혔다.
송재혁의 대답과 동시에 열린 문틈으로, 딱 적당할 정도의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이내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가 완전히 안으로 들어왔다.
“일어나셨네요.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인상에 어울리는 미소가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는 게 이선의 첫 느낌이었다.
“아, 네…….”
“우리 선수가 후배들 뒷정리를 돕다가 그만……. 죄송하게 됐습니다.”
정이선은 왜 선한 미소가 편하지 않았는지 금세 깨달았다. 조금 전, 문밖에서 ‘개새끼’를 찾던, 성악을 해도 될 것 같은 울림통을 자랑하는 목소리의 주인이다.
설마 초면인 자신을 향해서 개새끼를 찾기야 하겠느냐마는, 그래도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우리 선수가 직접 뵙고 사과를 하고 싶다고 해서……. 강희찬.”
자신을 향하던 미소와 목소리가 한순간 얼음장처럼 싸늘해졌다.
강희찬. 50번 선수의 이름인 듯했다. 싸한 시선과 눈빛이 향한 사람보다 오히려 이선이 더 놀랐다.
‘선생님은 왜 우리한테 말할 때랑 전화 받을 때랑 목소리가 달라요?’
학교에서 애들한테 심심치 않게 들어본 적 있는 말이었다. 너희 부모님 전화라서 그렇다고 솔직히 말하는 건 어쩐지 멋쩍어서 대충 얼버무렸지만. 그때 아이들이 이런 기분을 느꼈던 걸까.
“…죄송합니다.”
“아니요, 제가…….”
형식적인 사과와 대답이다. 하지만 괜찮다는 이선의 말은 채 완성되지 못했다. 남자와 시선이 마주친 탓이었다.
옅은 쌍꺼풀이 진 눈은 객관적으로는 선하고 온화해 보이는 인상을 줬다. 가까이서 본 얼굴의 전체적인 이목구비는 역시 ‘선이 곱다’라는 말에 조금 더 가까울 만큼 조화롭다. 하지만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과 얼굴에 묻은 짜증은 그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분명 자발적으로 사과를 하기 위해 온 건 아닐 거다. 코치로 보이는, 나이가 좀 더 있는 남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테지만, 젊은 사내는 불쾌한 기색을 전혀 숨기지 않고 있었다.
“검사는 병원에서 받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예약을 했으니까, 바로 서울로 올라가서 진료받으시면 될 겁니다.”
“아, 저는…….”
“송 PD, 병원 어딘지 알지?”
이선이 제대로 된 문장 하나를 뱉기도 전에 병원에 가는 결론이 났다.
코치가 건네는 카드를 받은 송재혁은 부지런히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큰 체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코치의 친절한 미소를 받으며 정이선은 어영부영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코치보다 손가락 하나 정도 높은 곳에 있는 얼굴엔 여전히 짜증과 성가심이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기억엔 없지만 정신을 차리다 말기를 꽤 여러 번 반복했단다.
송재혁에게서 ‘잃어버린 10분’을 전해 듣자, 아까보다 더 머리가 아파졌다. 이선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조수석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송재혁에게서 미리 들었던 것보다 일찍 출발하게 되었다. 야구경기가 저녁에 시작하는 것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빨리 서울로 출발하는 셈이었다. 그게 자신의 검사를 위한 것임을 깨닫고 괜찮다고 했지만, 얌전히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탈 수밖에 없었다.
일단 구단에서도 확실히 병원 진료를 받아두는 걸 원한다는 말 때문이었다. 자신이야 야구장에서 좀 다친 거라지만, 친구는 여기가 직장이다. 여러모로 곤란한 게 분명했다.
‘저기… 정 선생. 서울 갈 때 누구 같이 갈 건데…….’
이선의 목에 걸려 있던 출입증을 돌려받던 송재혁은 어렵게 운을 뗐다.
‘누구?’
‘아까 너 맞힌 걔.’
예상은 했다만……. 이어진 송재혁의 말은 확인사살이었다.
‘오후에 시합 있다고 하지 않았어?’
‘걘 어차피 오늘 등판 아니라서 상관은 없는데……. 너 괜찮은가 해서.’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 힘들었으나 굳이 되묻지는 않았다. 어쨌든 오늘 시합에 나가지 않기 때문에 병원에 함께 가도 상관없다는 얘기일 터였다.
그게 일반적인 건가. 정이선이 속으로 생각하는 동안, 송재혁은 조수석 문을 열고도 한참을 머뭇거렸다.
‘사실… 내가 너 강희찬 팬이라고 얘기했거든.’
‘어?’
‘미안하다, 야. 도저히 심심해서 친구 데려왔다고 말하긴 좀 그래서…….’
아까부터 쭈뼛대던 태도의 원인을 파악했다. 그리고 관람객 하나가 다쳤다고 해서 선수가 따라오는 이유도 얼핏 이해할 수 있었다.
직원의 친구이자 구단의 팬이라는 얘기를 들으면 아무래도 이런 대접을 해주는 걸까? 실상 정이선은 팬은커녕, 올림픽 한일 결승전에도 관심을 두지 않던 인간이었다.
‘강희찬이면… 아까 그 사람? 50번?’
‘어. 지금 씻고 나온다니까, 넌 일단 차에 타고 있어.’
‘…….’
왜 그런 쓸데없는 말을 했을까. 딱히 아픈 곳도 없는데 검사는 꼭 받아야 하는 걸까.
송재혁이 오면 한 번 더 물어야겠다고 했던 다짐은 금세 수그러들었다. 조수석 앞 유리창 너머로 카메라 장비를 잔뜩 챙긴 송재혁이 보였다. 당연하지만, 혼자는 아니었다.
“…….”
이젠 길거리에서 반소매를 입은 사람을 심심치 않게 보는 시기다. 매년 날씨가 미쳐 가는지 작년보다 더 더워진 걸 체감했고.
그런데도 남자가 소매를 걷은 채 입은 셔츠는 더워 보이지 않았다. 푸른 바탕에 흰 세로줄 무늬가 옅게 깔린 디자인 때문일까. 짜증기가 묻어 있었지만 청량해 보이는 얼굴 덕분일 수도 있다.
운동장에 있었을 땐 멀어서 잘 몰랐지만, 점점 다가오는 얼굴을 보니 확실히 느꼈다.
옅은 쌍꺼풀이 진 눈을 비롯해 이목구비가 제법 곱게 오밀조밀하다. 해사하게 웃으면 더없이 잘 어울릴 얼굴이다. 하지만 전혀 웃고 있지 않고 햇살이 따가운지 인상을 팍 쓰고 있어서, 그런 외모도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씻고 나온다던 송재혁의 말은 사실이었는지, 남자의 머리는 군데군데 젖은 티가 났다. 운동복도 제법 잘 소화한다 싶었는데, 저렇게 보면 선수가 아니라 인기 많은 대학생처럼도 보였다. 송재혁이 ‘걔’라고 칭한 걸 보면 나이도 그 정도로 어릴지도 모른다.
사실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이천까지 오는 내내 들었던, 오늘 찍으러 갈 선수가 올림픽에 나갔었다느니 몇 년 연속 개막전에 등판했다느니 따위의 말 때문은 아니었다.
적어도 한국에선 연장자가 옆에서 짐을 들고 있다면 나눠 드는 게 자연스럽다. 송재혁은 촬영 장비를 잔뜩 둘러메고 있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빈손으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시원하게 걸음을 뻗는다.
기묘한 투 샷을 보느라 멈칫했던 정신은 뒷좌석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돌아왔다.
“거기 맞죠? 이름 바뀐 데. 세브란스 병원이었나.”
“네.”
들릴 듯 말 듯 한 말을 내뱉고 남자는 자연스레 뒷좌석 문을 젖혔다. 심드렁한 대꾸에도 송재혁은 개의치 않은 채 마찬가지로 뒷문을 열었다. 뒷좌석엔 카메라와 남자가 나란히 올라앉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카메라가 어색해하고 있다. 정이선은 잘게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시트에 몸을 푹 기댔다. 가죽 시트의 마찰음이 더는 말 걸지 말라는 의도로 읽혔다. 방금 씻은 보송한 얼굴에 있는 눈이 감겼다. 이선은 흘긋 룸미러로 향했던 시선을 거두었다.
이제 한참을 밭만 보이는 풍경 속을 내달려야 한다. 오늘 이곳에 처음 온 정이선보다 남자가 그 사실을 더 잘 알고 있을 거다.
현명하다면 현명한 처사다. 남자의 옆에 장비를 둔 송재혁은 뒤늦게 운전석에 몸을 실었다.
“머리 아직 아파?”
“아니. 이제 안 아파.”
기대 섞인 눈빛으로 답했지만, 송재혁은 고개만 끄덕이며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래도 사진은 찍어야 할걸. 졸리면 좀 자. 아침에 일찍 일어났잖아.”
“올 때 잤잖아. 안 졸려.”
주말 오전이었다. 굳이 자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이선은 거절했다. 이미 뒷좌석에 자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멀쩡한 친구를 셔틀버스 운전기사로 만드는 건 미안한 일이다.
송재혁은 많이 미안했는지 몇 번이나 뒤로 기대서 자라는 말을 했다. 이선 역시 몇 번이나 괜찮다는 말로 제안을 거절했고.
물론 미안함도 있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이선의 뒤에는 한참 전부터 눈을 감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뒤에 사람이 있는데, 그것도 얼마 전에 자신을 향해 짜증을 숨기지 않던 사람이 있는데 시트를 젖히는 용기 따위는 이선에겐 없었다.
몇 번의 실랑이에 지친 이선은 말을 돌려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선은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검사하는 데 돈 많이 드나? 찍어본 적이 없어서…….”
“야, 너보고 내라고 안 해. 구단에서 보험 처리하지.”
“아, 진짜?”
“…왜? 너 카드값 밀린 거 있어?”
자고 있어도 된다는 말을 했을 때와는 달리 목소리의 온도가 차갑다. ‘강희찬.’ 한순간에 싸늘해지던, 울림이 좋은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착각이 일었다.
“빨리 말해. 너 카드 제대로 받아온 거 맞아? 오백도 현금으로 빌려 갔다며.”
차가 거의 없는 일차선 도로를 내달리며 송재혁은 추궁했다.
“받았어. 카드 먼저 돌려달라고 해서 받아왔어.”
“염병할 새끼. 카드값도 갚으라고 해야 할 거 아니야.”
“그냥 쓰라고 줬던 건데 지금 와서 갚으라고 하기도 좀 그렇잖아.”
“…미친놈아, 대충 계산해도 삼천은 썼겠구만 그걸 왜 안 받아!”
목소리가 높아짐과 동시에 속도 계기판의 바늘이 가리키는 숫자도 높아진다.
이선은 두려운 광경을 애써 무시했다. 차가 많이 다니는 곳은 아니었지만, 본능적으로 이선의 손은 안전벨트를 꾹 쥐었다. 칼과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건드는 게 아니란다. 그래도 할 말은 있었다.
“시험 준비하는 사람한테 어떻게 당장 그 돈을 달라고 해.”
“시험 준비는 개뿔. 내가 살면서 공무원 준비를 그 새끼처럼 하는 걸 본 적이 없다고. 너 임용 준비할 때보다 더 안 하잖아.”
“…해. 노량진에서 사는데.”
“내가 아까도 말했지? 그 새끼가 붙는 것보다 공시 없어지는 게 더 빨라.”
“…….”
휙휙 넘어가는 풍경에 어느 순간부터 층이 낮은 건물 따위가 섞여 보이기 시작했다.
온종일 좁은 고시원과 사람이 빽빽한 강의실을 찾아다닐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내 생각은 깨끗하고 빳빳하던, 재작년 발행된 기출 문제집으로 이어졌다.
이선이 그 책을 보고 방을 나와 1층으로 내려왔을 때였다. 로비 소파에 남녀 한 쌍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편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손에 든 채로. 그 모습을 보고 들었던 생각은 의외로 단순했다.
소박한 데이트네.
공부하는 데 돈이 없으면 서럽지만, 필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 정이선은 그런 시간을 직접 보내봤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밥이라도 챙겨 먹으라고 줬던 카드의 거래액이 어느 순간부터 초임교사의 월급으로는 빠듯할 정도가 되었다.
송재혁에게 매달 적은 돈을 빌렸다 갚아가며 지낸 게 두어 달이었나. 좀 미안했지만, 얘기를 하기 위해 고시원에 갔던 날. 늘어난 카드값의 원인을 깨달았다. 먹는 입이 하나에서 둘로 늘어난 거다. 데이트를 매번 노량진에서만 할 수도 없었을 테고.
질질 끄는 발소리를 듣고, 이쪽으로 향했던 신규진의 얼굴엔 당혹이 서렸다.
‘카드 줘.’
내뱉은 목소리는 스스로가 듣기에도 소름이 돋을 만치 덤덤했다. 놀라웠다. 이렇게 태연한 목소리가 나와도 되는 건가.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인데 이럴 수가 있나.
선뜩한 의심이 일었다. 의심이 현실이라면, 몇 년 동안 이어왔다 여긴 자신의 시간은 뭐가 될까.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에서 생각을 떼어내고자 이선은 필사적으로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무어라 말하려 하는 신규진의 얼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다는 여자의 얼굴, 구불구불한 파마가 들어간 머리카락, 아래위가 세트인 트레이닝복.
‘야, 이선아…….’
‘줘.’
이런 상황에선 자신이 소리라도 지르고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따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고시원에서 게이 치정극을 보일 순 없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아니, 애초부터 완전한 ‘게이 치정극’이 성립되지 못할 조건이었다.
사실 그런 이성적인 생각이 작용하진 못했다. 다른 곳에 집중하려 해도 정신은 자꾸 어딘가로 끌려가듯 멍해졌다.
그래도 차마 여자친구 앞에서 자존심이 상하기는 싫었는지 신규진은 이내 지갑에서 보라색 카드를 꺼냈다. 그걸 받던 자신의 손이 떨렸는지는 이젠 기억나지도 않는다.
‘빌려 간 돈은 빨리 갚고.’
‘너, 그건……!’
‘…….’
무어라 따지려는 신규진의 얼굴을 지그시 봤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상대할 때 효과적인 방법은 스물여덟인 놈에게도 똑같이 통했다. 사실 자신의 방법이 통했다기보단,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여자의 탓일 가능성이 컸다.
…스물넷? 다섯?
옅은 화장이 올라온 얼굴과 트레이닝복을 입은 차림새까지 봐도 나이를 가늠하긴 어려웠다. 계단을 내려오며 얼핏 들었던 ‘오빠’ 소리에 자신보다 어리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하는 거 보니까.’
여자를 향해 두었던 시선을 천천히 신규진 쪽으로 옮겼다.
‘너 합격 못 해.’
‘…….’
‘장담해. 너 붙는 것보다 시험 없어지는 게 더 빨라.’
뭐, 송재혁에겐 어떻게 공무원 시험이 없어지냐며 말했지만, 당시의 자신도 같은 생각을 했었다. 사람의 사고과정이란 건 다 비슷하다.
누군가에겐 악담이었고, 대다수 사람에겐 지당한 현실을 뱉었던 날. 그때의 기억을 애써 머리 한구석으로 밀었다.
“…….”
동시에 조수석 창에 머리를 기댔다. 규칙적인 차의 진동은 귓가를 간지럽게 했다. 이제 점점 도시의 모습에 가까워지는 풍경을 이선은 의미 없이 눈에 담았다.
병원이란 건 예약을 했다고 해서 대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의사를 만나고서도 30분쯤을 기다려서야 CT 촬영을 할 수 있었다. 그 시간 동안 송재혁은 자신의 직장 동료쯤 되는 선수에게 들어가 봐도 좋을 것 같다 얘기했지만, 돌아온 건 됐다는 짧은 한마디였다.
오히려 송재혁이 먼저 잠실로 떠나야 했다. 송재혁은 상사의 전화를 받았는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통화를 마친 후엔 2군에서 쓴다는 법인카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싶은 난감함이 덧씌워졌고.
친구라고 해도 외부인에게 회사 카드를 맡기는 건 오싹한 일이다. 의외로 그 난감한 문제는 금방 해결됐다.
송재혁의 손에 있던 파란색 카드를 길고 단단해 보이는 손가락이 잡아채듯 가져갔다.
“내일 코치님 드리겠습니다.”
인상과 비교하면 건조한 톤인 남자의 목소리가 병원 복도를 울렸다. 크지 않은 목소리임에도 신기하게도 멀리까지 전달이 잘 되는 음색이었다. 깔끔한 얼굴과 목소리를 쓰는 직업이었으면 잘 됐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아나운서 같은…….
애써 쓸데없는 의식의 흐름에 집중할 만큼 이선은 속으로 안절부절못했다.
여기서 나도 진찰을 받지 않고 가겠다고 하는 건 너무 어린애나 하는 소리겠지? 아니, 어린애도 안 하려나.
아무런 결정권이 없는 이선은 의자에 앉은 채, 엄지손톱 옆의 애꿎은 살을 뜯었다.
멋쩍고 어색한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늘 일 때문에 급하게 불려가는 게 분명한 송재혁에겐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그래 주면 고맙죠. 저… 얘 좀 부탁할게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는 송재혁을 올려다보는 동안, 이선은 정말 어린애라도 된 양 기분이 묘해졌다.
아주 어릴 적, 어머니가 주말에 일을 나가야 하면 이웃집에 맡겨지곤 했었다. 그때의 감각과 비슷한가. 애 취급을 받는 것 같은 민망함에 이선은 괜히 어른스러운 행세를 할 수 있는 말을 골랐다.
“야, 너 밥은?”
“야구장 가서 먹지, 뭐. 너, 끝나면 연락해라. 혹시 모르니까 집에 갈 땐 택시 타고.”
대체 아침부터 문을 연다던 그 보쌈집이 어딘지 궁금했지만, 정이선은 입을 다물었다. 연락하라는 말을 마치 유언처럼 남기고, 이제 깨지기 위해 회사로 향하는 친구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지는 탓이었다.
“…….”
“…….”
초면이었고, 제대로 말을 섞어보지도 못한 사람과 남겨졌다. 대기를 위해 마련된 병원 의자에 나란히 앉은 남자 둘이 할 이야기는 없었다. 정말 다행히도, 숨을 내쉬기도 힘든 어색한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이선 님.”
간호사의 청아한 목소리가 이선을 구했다. 의사와 함께 CT 사진을 볼 시간이었다. 이름을 채 부르기도 전에 벌떡 일어난 환자를 보고 간호사는 순간 놀랐지만, 익숙하게 그 위로 친절한 미소를 덮는다.
“들어오세요.”
‘CT상으로 특별한 이상이 보이는 건 아닙니다. 그래도 얼마 간격을 두고 증상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메스껍거나 어지러우면 바로 내원하셔야 합니다.’
말끝을 끌어서인지, 의사의 말은 참으로 친절하게 들렸다.
이선이 고개를 몇 번 끄덕이자 진료는 끝이 났다. 대기 시간에 비해 진료 시간은 지나치게 짧았다.
놀랍게도 진료실 안까지 따라 들어온 남자는 내내 말이 없었다. 구단의 법인카드로 결제를 하는 순간, 서명을 요구하는 수납처 직원의 말에 짧게 ‘네’ 하고 답한 게 전부였다.
한참을 사람과 대기 시간에 치인 병원에서 나오자, 입에선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색한 사람과 있을 때 누구나 그러하듯, 이선은 생명줄처럼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차에서 잠깐 확인했지만, 거미줄이 쳐진 듯 액정에 금이 간 상태였다. 아마 쓰러지는 동안 바지 주머니에 뒀던 핸드폰에 충격이 간 듯했다. 끄트머리에 더러운 게 좀 묻었다고 강화유리 필름을 떼어버린 며칠 전의 자신을 탓해봐야 소용없었다.
“깨졌어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남자는 반보 정도 뒤에 있었다.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감 때문에 멈칫한 사이 정이선은 깨달았다. 목소리가 큰 코치가 억지로 시켜서 내뱉은 ‘죄송하다’ 소리를 제외하면, 오늘 하루 동안 남자의 말이 자신을 향한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무덤덤한 표정을 짓는 어린 얼굴은 이내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자신의 대답 같은 건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따라오세요.”
신장이 보통 사람보다 큰 탓인지 몰라도 남을 내려다보는 태도가 퍽 자연스러웠다. 갓 씻고 나왔을 때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뺨은 이내 다 마른 뒷머리에 가려졌다.
여전히 남에 대한 배려는 없어 보이는 뒷모습을 따라 병원 정문을 나오고도 큰길을 조금 걸었다. 이선이 목적지를 깨달은 건 내내 두어 걸음쯤 뒤에서 지켜본 뒷모습이 한 상점의 자동문을 누르고 들어갈 때였다.
새로 나온 기종의 핸드폰 광고가 붙어 있는 대리점이었다. 젊은 남자 셋이 동시에 외치는 어서 오라는 인사가 작지 않은 내부를 울렸다.
“쓰는 요금제 그대로 핸드폰만 바꿀 겁니다. 돼요?”
“네. 가능합니다. 찾는 모델 있으세요?”
적극적인 미소로 응대에 나선 직원이 결국 고객을 물었다. 실적 경쟁에서 도태된 나머지 직원 둘은 보고 있던 핸드폰 화면으로 고개를 내린다. 온종일 보는 게 핸드폰인데도 질리지도 않는 모습이 신기했다. 이선이 대리점 내부를 살필 무렵에도 대화는 이어졌다.
“그냥 제일 요즘에 나온 걸로 주세요.”
“그러면… 이게 가장 잘나가는 모델이에요. 용량이 큰 게 없었는데, 오늘 아침에야 두 개 들어왔거든요.”
“그럼 그걸로 주세요. 저 말고 이쪽이 쓸 겁니다.”
그제야 직원은 눈을 들어 멀거니 서 있던 남자를 봤다. 일행이라기엔 애매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들어온 남자 둘이었다.
그중 먼저 들어온 남자가 머뭇거리는 기색도 없이 상담을 위해 마련된 의자에 앉기에, 당연히 이쪽이 고객인 줄 알았더니…….
서 있던 쪽도 자신이 고객이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멍하니 벌리던 이선의 입에선 뒤늦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그냥 수리 맡기면 괜찮을 겁니다. 액정만 나갔지 다른 건 다 잘 되고 있는데…….”
핸드폰 대리점의 입장에선 가장 달갑지 않은 말이다. 남자의 말에 대리점 안엔 순간적으로 정적이 흘렀다.
정적을 깬 건 앉아 있느라 눈높이가 낮아진 남자의 한숨이었다. 오른 다리만 쭉 뻗은 남자의 기묘한 자세가 이선의 눈에 들어왔다.
“그럼 나중에 수리비 줘야 될 거 아니에요.”
“꼭 그럴 필요는…….”
…없다.
그 말을 차마 끝내지 못한 건 남자가 앉아 있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댄 탓이었다. 동시에 흘러나온 숨소리를 통해 기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초면이라도 알 수 있다. 남자는 오늘 내내 자신, 혹은 상황에 대한 불만과 성가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냥 대충 끝내고 빨리 찢어지자.
자신을 올려다보는 검은 눈동자가 직접 말을 하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이어지지 못한 대화는 결국 실랑이의 끝을 의미했다.
“그걸로 주세요.”
아주 잠깐 영업에 방해를 받았던 직원의 손길이 다시 바빠졌다. 그는 핸드폰의 주인 될 사람이 또다시 무언가 거절의 말을 꺼낼까 재빨리 박스를 뜯었다.
이용하던 통신사를 묻고, 신분증을 요구한다. 그러는 동안에도 앉아 있는 남자는 자리를 비켜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직원은 제 앞자리가 아닌, 옆 직원의 자리와 고객용 의자를 빌려야만 했다.
대리점 직원의 도움을 받아 연락처를 옮기고 나서야 대충의 절차는 끝이 났다.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기종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운영체제에 정이선은 괜히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쓰던 것보다 크다는 것도 어색한 이유 중 하나였다.
‘이래서 액정만 수리해서 쓰겠다고 했던 건데…….’
낯선 기계의 질감을 손바닥으로 느끼는 동안 직원은 젊은 남자가 내미는 카드를 받아 들었다. 남자는 할부로 하시겠냐는 말을 짧은 고갯짓으로 거절했다. 서명마저도 한일자로 찍. 남자가 직원에게서 돌려받은 카드는 파란색 법인카드가 아닌 회색이었다.
지갑에 카드가 들어가기가 무섭게 남자는 걸음을 뗐다. 걸음이 빠르진 않은 이선은 조금 벅차게 남자의 보폭을 뒤따라 가게를 나섰다.
“저… 감사합니다.”
대리점에 들어올 때보다 가까워진 거리감이었지만, 여전히 남자는 정이선보다 앞에 있었다. 두 보가 한 보가 된 것뿐이다.
익숙하지 않은 거야 둘째 치더라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마운 것도 사실이었다. 남자가 자신의 회색 카드로 한 번에 긁은 돈은 이선이 3개월 전 할부로 산 노트북보다 비쌌다. 초면인 사람에게 베푸는 친절로만 받아들이기엔 과하긴 하다. 게다가…….
이선의 말이 잠깐의 공백을 둔 사이에도 남자의 시선은 끈질기게 도로변을 향했다. 마치 혼잣말을 하는 양 이선은 눈길 하나 주지 않는 사람을 향해 말을 이었다.
“사실 제가 부주의하게 있었는데…….”
“그러니까요.”
남자의 입이 열렸다. 그 순간 이선은 목소리가 날아와 꽂힌다는 게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온 남자의 음성은 높낮이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서늘했다. 어느새 목소리와 꼭 닮은 남자의 시선 역시 자신을 향한 채였다.
“그쪽이 안전장비도 없이 공 날아다니는 데서 정신 놓고 있었는데도, 욕먹는 건 납니다.”
“…….”
남자가 걸음을 멈춘 순간 간격은 반보로 줄었다. 한 박자 늦게 이선이 걸음을 멈추었지만, 이미 거리감은 좁혀진 채였다.
고개를 돌린 남자의 깨끗한 옆얼굴과 내려다보는 시선. 오늘 하루 봤던 얼굴 중 가장 짜증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서늘한 무표정이 오롯이 이선을 향하는 동안, 초여름의 이른 오후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입이 얼었다.
“따져보면 쌍방과실인데, 게임도 빠지고 여기 와서 돈까지 쓰는 건…….”
품평이라도 하듯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눈길이 위아래로 훑어온다. 내리깔며 보는 것만큼이나 익숙하게 짓는 표정일지도 모른다.
“나중에 이걸로 인터넷에 시끄럽게 말 돌면 귀찮아서 하는 겁니다.”
훑어보는 시선이 기분 나쁘고 말고의 문제는 둘째였다. 그보다. 저런 표정이 제법 얼굴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멍한 생각이 흐르는 동안, 뾰족한 의도가 담긴 말은 깔끔한 목소리를 타고 유려히 흘러나왔다.
“올리는 그쪽이야 누군지 몰라도 나는 이름이 그대로 까이니까요.”
어쩌면 남자는 정이선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기가 불편했는지도 모른다.
죄송하다고 해야 하는지, 무어라 따져야 하는지 갈팡질팡하는 와중에도 정이선은 생각했다. 과연 자신이 이 남자의 팬이라는 송재혁의 거짓말을 전해 들었을까?
어느 쪽이든 초면인 사람에게 본인의 짜증을 가감 없이 비추는 성격은 부러울 정도다.
“…전화기 주세요.”
대꾸를 잊은 이선을 향해 남자가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이선은 잠시 망설였다.
분노와 짜증을 눌러 참지 못한 남자가 방금 제 돈으로 사서 들려준 핸드폰에 해코지를 할지도 모른다. 멍청한 상상은 의외로 현실이 되진 않았다. 다소 일반적인 상식과 동떨어져 보이는 남자라도 거기까지 몰상식하진 않았다.
남자는 0이 여섯 개인 기본 비밀번호를 풀더니, 무언가 빠르게 화면을 두드렸다. 그리고 다시 이선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받은 화면엔 ‘010’으로 시작하는 열한 자리의 숫자가 있었다. 생각할 것도 없이 핸드폰 번호였다.
“다음에 진료받으면 연락하세요.”
오늘처럼 병원에 따라오겠다는 말일까?
썩 달갑지 않은 제안을 한 남자의 시선은 이제 큰길가로 향했다. 택시를 잡을 생각인지 고개를 왼쪽으로 틀고 달려오는 차 몇 대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보고서야 정이선은 왠지 모르게 억울해졌다.
남자의 말에 따르면 50 대 50, 쌍방과실이다. 그런데도 몇 시간 내내 남자의 눈치를 보고 죄송하다는 말을 했던 건 자신뿐이었다.
짜증과 성가심으로 점철된 그 얼굴을 한순간이나마 다른 표정으로 일그러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가정하며 탓하는 남자에게 한마디라도 하고 싶은 걸 수도 있고.
“…저기.”
“…….”
목소리에 반응한 남자가 고개만 돌렸다. 그가 잡으려 했던 택시는 이미 저만치 뒤에서 다른 승객을 태웠다.
남자는 대답이 없었지만 자신을 향한 시선으로 충분히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서늘한 눈빛을 온전히 받아내며 이선은 입을 열었다.
“저도 인터넷에 함부로 글 올리면 곤란한 직업이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이선의 의도가 대거리였든 뭐였든, 실제로 나온 말은 그것을 반영하지 못했다. 자신이 듣기에도 그저 멍청하게만 들리는 소리였다. 당연히 찔러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 같은 남자의 얼굴을 일그러트리지도 못했고.
“네.”
남자는 이선의 바보 같은 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저 새로이 앞에 정차한 택시의 문을 열어젖힐 뿐이다. 차에 타기 전, 짧게 고개를 끄덕인 것도 같았다.
택시 문이 닫히자마자 차는 부드러우면서도 늦지 않게 출발했다.
‘장난 아니네…….’
택시의 뒷모습은 점점 작아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방금 전의 대화는 머릿속에서 떠나지 못했다. 시야에서 택시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정이선은 새삼 느꼈다.
…오래 살 거라고. 저렇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면, 적어도 일찍 죽지는 않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