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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 타석에 쪼그려 앉았다. 처음엔 투수의 동작에 맞춰 방망이를 휘두르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그것도 더워서 못 해먹을 지경이었다. 마운드 위에 서 있는 투수가 입은 푸른 유니폼에 비해, 자신의 검은색 유니폼은 한여름에는 더욱 고역이다. 감독의 불호령이 떨어져도 할 말이 없는 행동에도 여전히 등 뒤의 더그아웃에선 응원 소리만 들려왔다.
탁!
타자가 친 공이 3루 관중석으로 날아갔다.
“파이팅!”
파이팅은 무슨.
겨우 맞혀도 타이밍이 늦다. 늦을 뿐만 아니라 구위에 방망이가 밀리고 있었다. 클린업도 삼진을 당하고 물러난 공이다. 8번에 들어가는 유격수의 타격으로는 저게 최선이었다.
‘7번부터 9번까지 너무 투수 치트키 아니냐.’
한 이닝 막는 데 공 열 개도 안 쓰겠네.
자조적인 웃음을 짓는 동안 전광판에 노란 불이 하나 더 들어왔다.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유리한 카운트를 잡은 투수는 지체 없이 준비 동작을 취한다. 투수의 인터벌은 많이 짧은 축이다.
150 언저리의 직구와 각이 큰 변화구. 타자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짧은 인터벌. 마운드에서 이길 수 있는 조건은 완벽하게 갖춘 셈이다.
투 스트라이크를 먹고서야 정신을 차린 타자는 뒤늦게 심판에게 타임을 요청했다. 헬멧을 고쳐 쓰고, 장갑을 매만지고. 방망이까지 다시금 말아 쥐어도 딱히 답을 찾은 얼굴은 아니었다. 주자가 나간 상태도 아니었으니 벤치에서 번트 사인이 나올 리도 없고.
이미 결과가 눈에 보이지만, 다시금 확신할 수 있다. 타석에서 고민하는 타자는 투수를 이기지 못한다.
직접 서봤으니까 안다. 마운드에서 봤던 숱한 얼굴들. 고민의 기색을 보였던 얼굴들은 결국 전광판의 붉은 표시등과 교환되듯 더그아웃으로 사라졌다.
경기 재개를 알리는 심판의 신호를 확인한 투수는 다시 투구판에 발을 댔다.
역시 이 거리에서 보니 확실히 느껴졌다. 마운드의 높이를 제외해도 키는 컸고, 큰 키를 감안해도 팔다리가 길었다. 기본 신체조건에서 오는 스트라이드도 컸다. 신장과 팔 길이를 십분 활용하겠다는 의도가 느껴질 만큼 릴리스 포인트가 높다.
“스트라이크, 아웃!”
역동적인 주심의 삼진 콜을 확인하며 쪼그려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방망이로 스파이크를 몇 번 툭툭 쳤다. 한참을 모래밭에 처박혀 있느라 방망이 헤드에 붙었던 모래 알갱이가 떨어졌다.
몸을 일으키고, 배트의 중간 부분을 쥐었다. 방망이를 질질 끌며 타석에 들어갔다가는 나중에 감독에게 한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9번 타자, 투수 강희찬.
일정한 톤의 목소리가 더운 야구장의 공기를 울렸다.
아무리 황사기 본선 2회전이라지만 장내 방송은 특이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경기가 부산 지역 방송에서는 중계로 나간다고 했었나.
야구 명문고 소리를 듣는 학교가 특이하게도 황사기 본선 진출은 꼭 10년 만이라고 했다. 투수 하나 잘 들어와서 본선 진출한 주제에 요란스럽기도 하다는 고 감독의 비아냥이 떠올랐다.
타석에 서기 전, 강희찬은 심판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손짓으로 화답이 돌아온다.
두 번째 불펜 투수로 전 이닝을 막았다. 강희찬이 타석에 서는 건 오늘 경기에선 처음이었다.
중계방송까지 나가는 본선 경기에 등판했던 부산일고의 3학년 선발투수는 2이닝을 채우지 못하고 내려가야 했다. 그러고 올라온 게 1학년 투수였다. 게다가 기록을 보니, 1회전에 만만한 학교를 상대로 이미 선발 출전을 했다.
보통이라면 상대 감독이 이쪽을 무시한다고 여겨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무시가 아니었다. 2회 중간에 들어왔던 1학년은 8회의 아웃 카운트 두 개를 잡은 순간까지도 마운드에 있었다. 차라리 저쪽이 진짜 선발인 셈이었다.
2회까지 3학년 투수를 털어먹은 덕에 콜드 패는 경우 면했지만, 투수가 바뀐 후로는 무안타였다. 거기에 역전까지 당했다면 확실히 분위기는 가라앉기 마련이었다.
자존심이 잔뜩 상한 3학년들은 한참 전부터 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고작해야 1학년 불펜이 던지는 공에 꽁꽁 막혔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도 다음 이닝의 수비를 위해 장비를 이미 챙긴 상태였다. 하나 남은 아웃 카운트가 자신의 차례에서 잡힐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모습들이다. 심지어 대기 타석에 있는 1번 타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의 자신처럼 쪼그려 앉아 있는 정도는 아니었어도, 방망이에 체중을 실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
강희찬은 시선을 더그아웃 벤치로 돌렸다. 몇 년간 몸에 배어온 버릇이었다. 그러나 감독도, 코치도 어떤 동작도 하지 않는다. 노 스윙 사인이다.
어느 순간부터 강희찬은 타석에서 공 세 개로 루킹삼진을 당해도 감독에게 욕을 먹지 않는 유일한 선수가 되어 있었다.
‘언제부터였지?’
정확한 시점을 파악하긴 어려웠으나, 어렴풋이 예측할 수 있는 건 학교에 찾아온 프로팀 스카우트 팀장과 감독이 이야기를 나눈 때 정도였다.
운동장에서 티배팅을 하던 강희찬을 감독과 스카우트 팀장이 지켜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정확한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감독은 난감한 얼굴을 하며 몇 마디를 하려 했지만, 그것도 이내 팀장에게 막힌 듯했다.
다음 날부터 타격 훈련에선 거의 제외되다시피 했다. 강희찬이 ‘왜?’라는 물음을 하기 전, 감독이 먼저 면담을 요청했다. 황사기 예선 하루 전이었다.
‘넌 혹시 내일 불펜으로 나가도 타석에선 치지 마라. 삼진 먹어도 되니까 공 치지 말고, 몸쪽으로 오면 무조건 피하고.’
왜 그래야 하냐고 물어도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해라.’
선수의 궁금증은 간단히 묵살당했다.
시키는 대로 해라. 그 말 아래에서, 감독과 구단 사이에 어떤 이해가 오고 갔는지. 고등학생인 자신이 알기는 힘들었다.
좌타자용 배터박스의 중간쯤 섰다. 저것보다 느린 공에도 노 스윙 사인이었다. 애매하게 빗맞으면 꽤 오랫동안 손이 울릴 게 분명하다. 불확실한 안타의 확률보다도, 벤치와 구단은 확실한 자신의 왼손에 무게를 두었다는 소리였다.
이 투수는 절대 공을 치지 않는다. 이미 타석에 선 위치만으로도 배터리는 알고 있을 터였다.
“스트라이크!”
무릎 앞으로 스쳐 지나간 공이 대기 타석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빨랐다. 그럼에도 전광판에 찍힌 구속은 147이었다.
그러니까, 결정구로 던질 땐 이것보다 더 빨리 들어온다는 말이었다.
속으로 혀를 찼다. 투수마다 주는 회전의 차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기계가 던지는 150과 사람이 던지는 150은 느낌이 천지 차이였다. 전광판에 147이 찍힌 공은 체감상으로는 150을 훌쩍 넘겼다.
최악인 건 쉴 틈을 주지 않고 바로 투구 동작에 들어간다는 점이다. 포수 새끼는 과연 사인을 주는 게 맞긴 하는 걸까 싶은 인터벌이다.
퍽!
“스트라이크!”
허리 높이로 지나간 커브를 보고 깨달았다. 자신이 벤치로부터 노 스윙 사인을 받는 건 이미 소문이 퍼질 대로 퍼졌을 거다. 이 정도면 아예 건드리지도 않을 것을 알고 던지는 공이었다.
‘…….’
…눈이 마주친 건가?
그 짧은 생각이 완성되기도 전에 검은 모자 아래로 있던 입매의 한쪽이 올라갔다.
웃었다고 보기도 애매한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느낄 수 있었다. 완전히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임!”
투수의 와인드업 자세가 시작됐지만, 강희찬의 타임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짜증이 날 법한 상황에서도 투수는 그저 투구판에 두었던 발을 풀 뿐이었다.
‘…….’
다리 사이에 방망이를 세운 채 장갑을 매만졌다. 생각을 정리하기엔 짧았지만, 그래도 하지 않는 것보단 나을 거다.
…9번 타순에, 심지어 투수다.
타석에 투수가 서면 좀 더 신경이 예민해진다. 다 같은 선수라도 이건 투수로서의 본능이었다. 맞히면 안 된다는 무의식적인 방어기제인지 동료의식인지가 작동했다.
강희찬은 배터박스의 가장 앞쪽 모서리에 발끝을 댔다. 저 구위에서 오는 변화구는 회전이 걸리는 시점에선 맞히지도 못할 거다. 그럼 아예 휘기 전에 쳐버려야 한다.
‘…오늘 가장 많이 결정구로 쓰던 포크볼? 아니면 150을 찍은 직구?’
마운드에 있는 자신이라면 어땠을까?
배터박스에 새로 선 위치를 보고 포수는 이미 자신이 공을 칠 생각임을 읽었을 거다. 9번 타자에, 다음 이닝엔 공을 던져야 하는 투수.
몸쪽 승부를 굳이 할 이유는 없다. 게다가 배터박스 끝에 붙어 있다시피 하니, 더더욱 던지지 못할 거다. 코스는 일단 바깥쪽이겠고, 구종은…….
“휘정고, 다 안 됐어?”
“이제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경기 재개를 알리는 심판의 신호와 동시에 투수는 다시 투구판에 발을 붙였다.
나한테 어려운 공을 던질 리가 없다.
몸에 맞고서라도 출루를 하겠다는 생각조차 멈칫하게 만드는 구위였다. 본능적인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속으로 되뇌었다.
투수가 가장 오랜 세월, 가장 많이 던져봤을 공이면서도 가장 강력할 구종.
마운드에 있을 자신이라면 그걸 던질 터였다.
바깥쪽 비슷하게 들어올 직구. 포크볼이라도 휘기 전에 갖다 맞힐 수만 있으면 파울은 나겠지.
생각은 끝났다. 타석에서 생각이 많으면 진다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남은 건 타격 훈련에서 거의 배제된 이 반사 신경이 공을 따라갈지의 문제였다.
‘둘도 늦다.’
하나 반에 방망이가 나가기 시작해야 겨우 맞을까 싶은 속도다. 아무리 벤치 지시였다지만, 휘둘러보기라도 할걸. 그냥 흘려보낸 초구가 아쉬워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투수가 다리를 올리는 타이밍에 맞춰 강희찬 역시 오른발을 들었다. 본능적으로 휘두른, 익숙하지 않은 방망이는 지나치게 무겁게 느껴졌다.
퍽!
포수의 미트에 경식구가 박힌 소리가 실내도 아닌 야외구장을 울렸다. 방망이를 휘두른 순간 깨달았다.
…하나 반에도 늦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불이 모두 사라진 전광판은 새로운 이닝의 시작을 알렸다. 심판의 판정과 동시에 마운드에서 걸음을 뗐던 투수는 이제 더그아웃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렁찬 삼진 콜 이후에도 미련이라도 남은 듯 타석에서 떠날 수 없었다.
“희찬아.”
장난스레 부르는 목소리와 함께 머리 위에 글러브가 올려졌다. 1학년 동기가 자신의 장비를 가져다주었다. 방망이를 건네고, 장갑을 벗는 동안 이미 투수의 뒷모습은 더그아웃 안으로 사라진 상태였다. 11번이 새겨진 뒷모습이 잔상처럼 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의외로 시작은 한순간이었다. 나을 듯 떨어지지 않는 열병처럼, 8년을 들러붙은 열패감의 시작은 생각보다 별것 아니었다.
* * *
올해 동창회를 적극적으로 주최했다는 친구의 입에서 보험사에 취직했다는 말이 나온 순간, 송재혁은 들고 있던 맥주잔 위로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찰나의 시간 동안, 당사자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비슷한 난감함을 느꼈을 거다. 요새 치과 보험이 어떻다 하며 시작하는 김은호의 말이 한 귀로 흘러나갔다. 나머지 동창들과 묘한 동료의식을 공유하며 송재혁은 표정을 갈무리했다.
서른을 바라보는 20대 후반들이 모이는 고교 동창회란 대부분 이런 용도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메신저에 저장된 연락처에는 다 뿌리고 보는, 그래서 재수가 없으면 전 애인의 결혼 소식도 알게 하는 모바일 청첩장에 비해 실물은 ‘꼭 오라’는 의도가 느껴져서 참으로 난감하다. 그걸 받았던 게 작년이었다. 하필이면 같은 날 회사 선배의 결혼식까지 있었던가. 돈은 두 배로 나가면서도 밥은 제대로 먹지도 못했던 기억이 떠올라 씁쓸해졌다.
그래도 결혼식은 밥이라도 주지.
거절하지 못해서 억지로 들어야 하는 보험은 다달이 돈만 잡아먹는 골칫덩이다. 계약직이라고 말해 줘도 돌아오는 소리라고는 ‘그래도 거기면 대기업 아니냐’는 속 편한 말뿐이었다.
2차로 온 치킨집에서 열 명이 조금 넘는 사내들이 맥주 500 한 잔씩을 비워낼 무렵, 송재혁은 이 자리가 몹시도 지루해졌다.
이제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거의 10년이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옛 얼굴이 남아 있으면서도, 슬슬 나이가 들어가는 동창들의 모습은 씁쓸한 기분만을 느끼게 했다.
예전처럼 같은 교복을 입고, 하루의 절반 이상을 함께 지내던 친구들이 아니었다. 같은 나이라는 걸 제외하면 이제 공통점이라고는 없는 인생들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미 테이블을 오가는 말소리는 ‘대화’가 아니었다. ‘천하제일 스트레스 자랑 대회’에라도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모두 남의 말은 듣지도 않고 각자 자신의 이야기만 한다. 초등학교 선생인 친구에게서 들었던 저학년들의 특성과도 비슷했다. 집단적 독백이라고 했던가…….
그래도 이런 자리엔 자랑할 직장 스트레스라도 있어야 나오기 편하다. 졸업했던 강신 고등학교는 한 학년에 11반이 있던 남학교였다. 그중 송재혁이 속했던 3학년 7반의 정원은 서른다섯이었고.
서른다섯 명이 와야 다 모이는 반창회에 참석한 건 그것의 절반도 되지 못했다. 이것도 작년부터 송재혁이 참여하면서 늘어난 숫자라고 한다. 일찍 취직했던 친구들이 그를 보며 반가운 마음에 했던 말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애매한 나이였다. 스물여덟이라는 건. 아예 더 나이가 들어서 만난다면 서로 조금은 비슷하다 느낄까. 마흔 정도에는 적어도 누구든 일을 하며 벌어 먹고살 테고, 대부분은 가정을 꾸리고 있지 않을까.
판단하기 어려웠지만, 역시 20대 후반들의 인생이라는 건 공통분모를 찾기 힘들다는 결론을 냈다.
누군가는 직장에 취직하고 이제 막 어설픈 티를 벗어가기 시작하는 반면, 아직도 학교에 다니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취업 준비를 하고 있어도 크게 이상할 건 없는 나이이기도 했다. 작년의 송재혁도 그런 처지였다.
“야, 소주 더 시켜야 하지 않아?”
“우리 테이블 것도 같이 시켜라.”
주말 출근을 하는 송재혁과 달리, 금요일을 맞은 직장인들은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소주를 무식하게 섞어 마시기 시작했다. 옆 테이블에 있는 잔들엔 하나같이 투명에 가까운 노르스름한 액체가 있었다. 맥주에 소주를 탄 게 아니라 소주에 맥주를 첨가한 수준이었다. 테이블 위를 오가는 커다란 목소리들 덕분에 가게를 울리는 여자 아이돌의 노랫소리는 이제 들리지도 않았다.
“이건 맨날 보던 얼굴들만 나오네.”
“왜. 이번엔 김은호, 얘 나왔잖아. 그래도 뉴페이스는 매년 생긴다, 야.”
작년에도 똑같은 레퍼토리였다. 하필이면 이 두 놈과 같은 테이블에 앉은 자신을 원망해도 이미 늦었다.
듀오 중 한 놈은 졸업하며 교수님이 추천해 준 중견 기업에 일찍 입사했고, 남은 한 놈은 공기업에 들어갔다. 자신들이 동창회를 열어보자고 얘기가 나왔을 땐, 저들 둘뿐이었다는 말을 작년에도 들었다. ‘김은호’라는 이름 대신 ‘송재혁’이 있었다는 걸 제외하면 아예 내뱉는 대사도 같았다.
저걸 오랜만에 본 친구를 향한 순수한 반가움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아직도 자신이 자격지심에 젖어 있기 때문인 걸까.
“송재혁 너도, 그렇게 한번 얼굴만 비추라고 얘기해도 더럽게 튕기더니.”
“그래서 이제 잘 나오고 있잖아.”
공기업에 다니는 놈은 얼큰하게 취한 상태에서도 송재혁의 이름까지 언급하는 친절을 잊지 않았다. 괜히 보험에 들어달라는 이야기를 들을까 봐 김은호와 멀리 떨어져 앉았더니, 이게 웬 난리냐.
도망이라도 치듯 송재혁은 남아 있던 맥주를 입 안으로 쏟아 넣었다. 한 모금이라기엔 버거운 양의 김빠진 탄산이 목구멍을 지났다. 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친구가 소주병을 기울여왔다. 그는 친구의 움직임에 질겁했다.
“이제 안 마셔.”
“아, 새끼. 오랜만에 보는데 빼냐?”
“그거 여기다 부어 마시면, 내일 출근도 못 한다.”
송재혁이 생맥주잔을 손바닥으로 덮은 탓에 기울어진 소주병은 향할 곳을 잃었다. 그래도 친구가 소주를 자신의 손등 위로 부을 만큼 취하진 않은 게 다행이었다.
“여기 소주 두 병이랑, 500은… 세 잔 주세요.”
“네.”
계산서에 체크를 한 아르바이트생은 이내 술을 들고 돌아왔다. 500㏄ 생맥주잔 세 개를 한 손에 들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내 그 셋 중 하나가 자신의 앞에 놓이자, 송재혁은 낮은 신음을 뱉었다.
“내일 출근한다고.”
“뭐, 맥주 하나도 안 되냐?”
“너도 주말에 출근하시든가요.”
이미 나온 술을 무를 수도 없는 일이다. 애써 변명하며 송재혁은 묵직한 잔을 들어 입에 갖다 댔다.
갓 나온 맥주답게 넘어가는 동안 탄산이 목을 때려댔다. 골이 띵하지 않을 정도로만 시원한 온도나 절로 입에서 소리가 나올 만큼 가득한 탄산. 출근 핑계를 대며 거절하긴 했어도, 사실 이 감각과 맛은 절대 싫지 않다는 게 문제다.
잔 옆에 엎어두었던 핸드폰을 들고 시간을 확인했다. 10시 30분. 시간은 애매했다.
8시에 만나서 식사 겸 1차를 하고, 2차로 식당 옆 건물에 있는 호프집으로 넘어왔다. 천하제일 스트레스 자랑 대회도 이제 슬슬 소재가 떨어져 갈 시점이었다.
말소리가 커지다가도 잦아들기를 반복했다. 그 순간엔 어느 음원 사이트의 차트 순위대로 흘러나오는 노래 가사가 또렷하게 들렸다. 그러다 누군가 화제를 꺼내면 다시 거기에 우르르 몰려드는 게, 마치 수조 속 금붕어들 같았다.
“너네, 걔 기억나냐? 정이선.”
떡밥이 없는 금붕어들은 다른 어항, 아니 테이블의 안줏거리를 염탐했다. 그 이름이 들려온 순간, 송재혁은 고개를 돌렸다. 이제 아예 종목을 바꿨는지 소주잔을 든 채로 말하고 있는 사람이 김은호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정이선? 문과반?”
“그러고 보니까, 걔 어떻게 사냐? 너 친했잖아.”
“친하긴 뭘 친해. 그냥 얘기 몇 번 해준 거지. 내가 걔 때문에 시달린 거 생각하면…….”
다시 자신을 향해 돌아온 질문의 화살에 김은호는 질색했다. 먼저 ‘정이선’이라는 이름을 꺼낸 의도가 너무 빤히 보였다.
행여나 그때의 일을 다른 누군가가 먼저 언급할까 봐 그러겠지.
그 이름을 먼저 꺼냄으로써, 스스로 떳떳하다고 모두에게 알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김은호가 앉아 있는 테이블뿐만 아니라, 송재혁의 앞에 있던 ‘공기업’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니.
“왜? 무슨 일 있었는데?”
‘공기업’이 묻는 것과 동시에 김은호의 입에선 준비라도 한 듯한 말들이 대략 5분간 쏟아졌다.
고등학교 때 들었던 말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 내용이었다. 본인에게야 중요하지만 남에겐 들어도, 듣지 않아도 그만인 말이었다. 슬슬 얘기가 지루해졌는지 김은호의 앞자리에 앉아 있던 녀석 하나가 잔을 내렸다.
“걘 뭐 하고 사냐?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네.”
“정이선 대학 거기 갔잖아. 선생 되는 데.”
“씨발, 그럼 게이가 선생 하는 거냐? 대박이네.”
“그런 건 인성 검사로 못 걸러내나. 나 같으면 내 자식 죽어도 그 학교 못 보낸다.”
“교육청에 신고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거기까지가 송재혁이 참은 순간이었다.
탕!
묵직한 잔과 테이블이 만나는 소리가 울렸다. 김은호와 시선이 마주친 건 그다음이었다.
“안 주냐?”
“…뭘?”
“보험 팔러 온 거 아니었어?”
첫인상에서 호감을 받아야 하는 영업맨 특유의 깔끔한 얼굴이 굳어졌다.
보험 영업직이 어떤 말에 자존심을 다치는지 송재혁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20년 가까이 하셨던 일이었다.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떠오르는 어머니의 얼굴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우며 송재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따로 연락하든가. 먼저 간다.”
침묵은 길어야 3분. 그 이후로는 아마 자신이 금붕어들의 떡밥이 되겠지.
호프집의 좁은 계단을 내려오며 스치는 생각에 송재혁은 웃었다. 계단을 내려오자 늦봄의 더운 밤공기가 훅 끼쳤다.
뻔한 자리였다. 저런 뻔한 자리에라도 가고 싶었던 자신도 뻔한 인생살이고.
애매하게 마신 술은 아쉬움만을 남겼다. 호프집에서 나올 때 뒷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최근 통화 목록의 일곱 번째쯤 있는 이름을 눌렀다. “여보세요?” 발신자가 누군지 다 떠도, 버릇처럼 저런 식으로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익숙하면서도 우스웠다.
“잤냐?”
휴일 전날 밤에, 11시도 되지 못한 시각이었다. 돌아올 답을 알면서도 물었다. 질문에 대한 답이 핸드폰을 통해 건너왔다.
―아니.
날이 더워지면 저녁엔 자리가 비는 걸 보는 게 힘든 동네 편의점의 파라솔이 오늘은 운 좋게도 공석이었다. 혹시라도 누가 먼저 앉을세라 컵라면 두 개와 맥주 두 캔, 김치, 단무지, 거기에 과자 하나까지 재빠르게 샀다.
계산을 마친 송재혁이 컵라면에 물을 부을 동안 남은 한 사람은 자리를 지키는 임무를 담당했다. 송재혁이 몸으로 편의점 문을 밀며 나왔을 때, 이미 테이블엔 단무지며 김치가 정갈하게 개봉된 상태였다.
“좀 뜨겁다.”
송재혁의 컵라면 옆엔 김치가, 그 맞은편엔 단무지가 있었다. 비교적 최근 안 사실이었는데, 친구는 제법 포장을 까는 데 소질이 있었다. 아마 매일같이 군것질거리의 포장을 까달라고 하는 아이들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익숙해진 것 같았다. 까지 못하면 먹지를 마. 언젠가 변덕으로 사본 막대사탕의 껍질을 까주며 송재혁에게 했던 말을 아이들에게도 할지 모른다.
“동창회에서 저녁 안 먹었어? 갑자기 이 시간에 불러내.”
“너 어차피 내일 출근도 안 하잖아, 정 선생.”
“나야 상관없는데, 너는 하잖아.”
시간이 됐는지 정이선은 젓가락을 위에 두었던 라면의 뚜껑을 벗겼다.
라면을 덜어 먹지는 않지만, 어쨌든 뚜껑이 있는 라면 중에서도 김치 맛. 라면 취향은 같았는데, 옆에 두고 먹는 반찬은 달랐다. 송재혁의 옆엔 볶음김치가, 정이선의 옆엔 단무지가 있었다. 각자 옆에 둔 캔맥주도 다른 브랜드였다.
송재혁은 매번 새로운 맥주를 골라 마셨지만, 정이선은 항상 같은 것을 골랐다. 맥주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정이선은 모험보다는 이미 경험한 익숙한 것에 손을 내미는 사람이었다.
“마시다 말아서 기분 나빠.”
“그럼 거기서 더 마시고 오지. 돈도 냈는데, 아깝게.”
“됐어. 술맛 떨어져, 거기.”
“뭐가 그래.”
중얼거린 정이선은 라면을 한 젓가락 집어 올리고 입에 넣는다. 불지도 않더니, 이내 뜨거웠는지 ‘으으’ 하는 이상한 소리만 냈다. 뜨겁다고 얘기해 줬더니.
조금 더 식히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송재혁은 젓가락을 볶음김치로 돌렸다.
“김은호 나왔더라.”
“…응. 그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송재혁은 약간의 공백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보험사 취직했던데. 그것 때문에 나온 것 같더라.”
“설마.”
동료 교사들이 알음알음으로 부탁하는 저축 통장이나 신용카드를 매번 발급받는 주제에. 정이선은 여전히 멍청한 소리나 했다.
저런 건 사람이 좋다고도 보기 힘들다. 그냥 멍청하거나 아무 생각이 없거나. 둘 중 하나였다. 교대에 들어가고 임용까지 통과한 놈한테 하기는 좀 그런 말이지만.
정수리로 날아드는 시선을 의식하지도 못하고 정이선의 젓가락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야식을 먹자고 청한 송재혁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먹고 있었다. 라면 한 젓가락에 동그란 단무지 하나를 통째로 먹는다. 나트륨 섭취량이 걱정되는 식습관이지만, 사실 송재혁 역시 라면은 반도 먹지 않았는데, 김치는 거의 다 먹어가고 있었다.
“들었어, 보험?”
“미쳤냐? 나 그리고 치과 보험 있어.”
“치과 보험이었어? 보장은 괜찮았고?”
“왜? 괜찮으면 들어주게? 호구냐?”
“…그냥 나도 들어볼까 생각한 거거든.”
호구라는 소리는 싫었나. 오독오독 단무지를 씹는 소리가 왠지 모르게 불만스럽게 변했다.
하긴. 못생긴 사람한테 진짜 못생겼다고 말하는 건 상처지. 진짜 호구한테 호구라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거다. 순간적으로 치솟은 짜증을 가라앉힌 송재혁은 입을 열었다.
“별로 보장 좋지도 않았어. 나중에 필요하면 우리 회사 걸로 들어. 차라리 그게 훨씬 나아.”
“…괜히 회사 계열사라고 그러는 거 아니고?”
“아니거든. 나도 들었거든.”
말을 뱉은 순간 정이선의 입에선 피식 웃음이 샜다. 왜 갑자기 기분 나쁘게 웃느냐는 말에도 이선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너네 반은 1년에 한 번은 모이는 것 같네.”
“청첩장 돌리려고 그러는 거지. 보험을 팔든가.”
“꼬박꼬박 잘 가잖아.”
“나도 언젠간 돌려야 될 거 아니냐. 청첩장.”
“결혼하게, 수아 씨랑?”
“아냐, 아직. 그냥 그렇다는 말이지.”
송재혁이 여자친구인 이수아와 식사 자리라도 마련하려고 해도, 언제나 정이선은 어영부영 거절했다.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억지로 권하기도 힘들었다. 그런 주제에 정이선은 꼬박꼬박 자신의 여자친구를 향해 ‘수아 씨’라고 불렀다.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도 없으면서.
“동창회 재밌었어? 애들은 많이 왔고?”
동창회라는 대화 소재를 피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정이선은 관심을 두었다. 아니, 가지 못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더더욱 궁금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송재혁이 속했던 3학년 7반 급우들의 사이가 특별히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 말인즉, 아마 비슷한 종류의 모임이 분명 문과반의 어느 무리에서든 열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이선은 그런 종류의 모임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이선은 송재혁의 ‘동창’이었지만, ‘동창회’에는 참석할 수 없었다. 그게 꼭 반이 달랐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사실 ‘동창’이라고 해봐야 단 한 번도 같은 반인 적이 없었다. 정이선은 문과였고, 자신은 이과였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정이선’이라는 이름을 몰랐던 것도 아니었다.
문과에서 제일 성적 좋은 애, 라는 타이틀로 이과반 학생들은 그 이름을 인지하고 있었다. 남학교 특성상 세 반밖에 없는 문과에서 잘해봤자 얼마나 잘하겠냐는 생각은 무의미했다. 모의고사를 보면 백분위가 소수점 단위로 노는 녀석이었으니까.
아무튼 ‘문과반의 성적 빌런’이 다른 이유로 유명해진 건 고3 여름방학이 끝나고 춘추복을 입을 즈음이었다. 소문이 어느 기간, 어떤 정도로 부풀려서 전해졌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여흥거리가 없는 남학교에서 ‘정이선이 게이라서 김은호에게 집적거렸다’는 소문은 자극의 정점이었다.
처음 소문의 시작은 달랐는지도 모른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같은 반이었던 김은호의 상태는 이상해졌다. 아마 문과반에서는 그즈음부터 소문이 먼저 돌았을 것이다.
결국 김은호는 제 주변 친구들에게 ‘나는 그냥 잘 대해준 건데, 정이선이 자신에게 딴마음을 품은 것 같다. 그래서 난감하다’는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하고 다녔다. 괜한 짓은 아니었는지 금세 소문은 정이선과 김은호가 게이라는 게 아닌, ‘정이선’이 게이라는 쪽으로 굳어졌다.
스무 해를 채 살지 못한 인생들이다. 실제로 접할 수 있는 범주 내에 동성연애자가 있었다는 건 10대 후반 남학생들에게는 충격이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송재혁은 입 안이 썼다. 단순한 정의감이나 도덕심, 성 소수자에 대한 연민은 아니었다. 여름방학이 시작하기 전, 학교 도서실에서 책상 아래로 손을 잡고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을 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극적인 소문과는 달리 무언가가 달라진 것을 체감하기는 힘들었다. 양쪽의 부모님들이 학교에 왔었다는 이야기도 들렸지만, 어쨌든 ‘그런’ 종류의 소문이 난 것 치고는 온건한 분위기였다.
당사자들에게는 아닐지 몰라도, 제삼자들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정신을 차려보면 수능이었고, 어느 순간 학교 정문에는 유명 대학 합격자들의 이름이 적힌 현수막이 걸렸다. 자신의 이름은 걸리지 않았지만, 그 현수막에는 당연하게도 정이선의 이름이 있었다.
서울로 대학을 가는구나. 남학교에서는 특이하게도 교대에 가는구나.
말도 제대로 섞은 적 없는 타인의 이름을 보고 느낀 것은 그게 전부였다.
추운 겨울이 지나면서 고3 때의 해프닝도 점점 기억 구석으로 사라졌다. 오늘처럼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면 한 번씩 생각해 보긴 했지만, 금세 다시 흐려지는 일이었다. 남의 일이란 건 결국 그 정도였다.
만나려고 마음먹지 않은 이상 평생 마주칠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게 고교 동창이었다. 게다가 정이선이 학교 인원의 절반 정도가 간 인근 지역의 대학교로 간 것도 아니었다.
서울 바닥 한복판을 걷다, 말 한번 나눠본 적 없는 동창과 대뜸 눈이 마주쳤다. 그건 특이하고 색다른 경험이었다.
거기가 간판조차 제대로 있지 않은 술집 앞이었다는 건 둘째 문제였다.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남자와 실랑이를 하던 얼굴엔 피로감이 묻어 있었다. 남자가 제풀에 지친 듯 그 앞을 떠나자, 남겨진 사람은 입구 벽에 쓰러지듯 몸을 기댔다.
잠깐 멍하니 바닥으로 내리깐 눈 때문이었는지 처음엔 ‘저게 누구였더라’ 하는 기시감이 먼저 들었다. 이내 시선이 올라오자 단번에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정이선이었다.
‘…….’
교복을 입지 않아도, 왼쪽 가슴에 이름표가 달려 있지 않아도 알아봤다는 게 신기했다. 자리를 피해줘야 하나. 모르는 사람인 양 갈 길을 가는 게 보통일 거라는 생각보다도 송재혁의 입이 열린 게 먼저였다.
‘안녕.’
군대까지 전역한 20대 남자의 입에서 나왔다기엔 토 나올 정도로 귀여운 대사였다. 정이선은 어처구니없는 인사를 비웃지도, 어색함 때문에 지나칠 정도로 반가운 기색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응. 안녕.’
자신이 내뱉었을 땐 소름 끼치도록 간지러운 인사가 그 입에서 나오는 건 의외로 괜찮았다.
어쨌든 먼저 용기를 내어 인사를 건넸던 것은, 서른을 바라보는 지금 시점까지도 송재혁의 인생에선 몇 안 되는 잘한 짓 중 하나였다. 의미 없는 신세타령이나 청첩장이나 돌리기 위해 존재하는 동창회로 지친 날, 동네 편의점 파라솔에서 캔맥주를 함께 마시는 친구가 있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었으니까.
안주로 골랐던 과자를 몇 개 집어먹는 손이 규칙적이었다. 과자 한 번, 맥주 두 모금. 치과 보험에 대한 관심은 이내 줄어든 듯했다.
“정 선생, 너 내일 뭐 하냐. 할 거 없으면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자.”
“촬영 가?”
“어. 심심하니까 같이 가.”
“내일 시간이 돼?”
“오전에 갔다가 금방 올 거야. 어차피 너 주말에 누워서 잠만 자잖아.”
“…수업자료 만들 때도 있어.”
초임 교사 시절에야 매일 해 떨어져야 퇴근하고 주말에도 잡다한 일을 했지 요샌 아니었다. 많진 않아도, 경력과 자료가 쌓이자 초보 교사는 주말엔 그럭저럭 쉴 수 있었다.
나름대로 반박을 한다. 하지만 쉬는 날 누워서 잠만 잔다는 사실은 딱히 부정하지 않고 있었다. 미혼 직장인 남자들의 휴일이란 다 비슷했다. 저 성격은 조기축구를 다닐 만큼 에너지가 넘치지도 못했으니까.
“같이 가주면 점심은 사는 거야?”
“정 선생님. 밥은 나라 녹을 먹는 네가 사야지. 계약직의 등골을 빼먹으려고 하냐. 이것도 내가 샀는데.”
송재혁은 턱 끝으로 파라솔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너 진짜 올해 끝나고 정직원 되기만 해봐라.”
당연하게 이어지는 뻔뻔한 요구에 정이선은 기가 찬 얼굴을 했다. 어차피 자신이 계산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반쯤은 장난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걸 모를 친구도 아니었다. 송재혁은 오히려 ‘뭐’라고 말하는 얼굴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결국, 포기한 얼굴로 정이선은 대화를 돌렸다.
“혹시 핸드폰으로 찍은 영상도 편집할 수 있어?”
“할 수야 있지. 왜?”
“많이 어렵나?”
“간단한 거면 편집하는 앱도 있을걸?”
“그래도 좀 있어 보이게 하고 싶은데. 노래도 넣고.”
“뭐 하려고?”
“나중에 우리 애들 수료식 할 때 보여주게.”
미혼인 정이선이 ‘우리 애들’이라고 지칭할 대상은 하나뿐이었다. ‘우리 애들’의 나이를 속으로 더듬어봤다. 이윽고 송재혁의 이마가 와락 구겨졌다.
“너네 애들 열 살이라며. 걔네 나중에 그거 기억도 못 해.”
핸드폰으로 결제 하나 하려고 해도 버벅대는 주제에 꿈도 크지.
송재혁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정이선은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식어 빠진 라면 국물을 들이켰다. 하여간 저건 열 살짜리 애들이랑 같이 살아서 그런지, 점점 철이 없어지고 있었다.
“…책 같은 거 볼만한 거 없어?”
“나중에 내 거 빌려줄게. 아니면 내가 만들어 줄게. 어차피 5분짜리 아니야?”
인터넷에 검색 몇 번을 해보면 금방 찾을 수 있는 것을 굳이 또 책을 찾아서 보겠단다. 굉장히 아날로그적인 생각이지만, 대체로 정이선은 저랬다. 뭔가 알아볼 일이 있으면 포털 검색보다는 책에서 찾으려는 희한한 특징이 있었다.
“내가 하는 데까지 해보고, 잘 모르겠으면 물어볼게.”
“오냐.”
송재혁은 애매하게 캔에 남아 있던 맥주를 한 번에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전자음이 뒤섞인 아이돌 노래를 안주 삼아 마셨던 맥주에 비하면 시원하지도 않았고, 어느새 김은 다 빠져 있었다. 자그만 캔 하나는 ‘술을 마셨다’는 만족감을 주기도 힘들 게 분명했다.
가끔씩 스치는 선선한 바람이 아니라면 불쾌하고 습한 날씨. 여름으로 넘어가는 밤 아래에서,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 순간 모기에 물려 있었다.
무엇 하나 ‘좋다’는 범주에 들어가기 힘든 것들이, 송재혁의 오늘 하루에서 가장 편하고 즐거운 시간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