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2
평소보다 묘하게 피곤하고 몸이 무겁다 싶었다. 아랫배도 뭔가 아픈데다 음식을 먹으면 더부룩했다. 늘 마시던 차를 마셨을 땐 속이 메스꺼울 정도였다.
고작 반나절 그 상태였을 뿐인데 윤서경은 집으로 이한영을 보낼 만큼 걱정하다가 일찌감치 집에 돌아왔다. 아직 회사 일이 많이 남았을 텐데. 다른 의미지만 유온도 걱정하며 다시 돌아가 보라 했으나 윤서경은 전혀 그렇게 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결국 그대로 부경 병원으로 달랑 들려오다시피 했다. 윤서경의 손에 진료실에 집어넣어진 뒤, 유온은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사실 어디가 많이 아픈 건 아닌데요.”
“대표님은 유온 씨 일엔 걱정이 많으시니까요.”
늘 유온을 봐주는 중년의 의사도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약물 문제로 워낙 조심할 부분이 많은 유온이기 때문에 아주 걱정이 없는 건 아닌 듯했다. 유온의 상태를 이리저리 살피던 의사는 얼마 후 눈을 둥글게 뜨더니 말했다.
“잠깐 대표님 좀 모시고 들어올게요.”
“네?”
그 말에 덜컥 불안해진 유온은 손을 꼭 쥐며 진료실 문만 쳐다보고 있었다. 곧 그 문으로 윤서경과 의사가 들어왔다. 윤서경도 미간을 찌푸린 모습이었다. 그러나 의사는 자기 자리에 앉더니, 다소 들뜬 기색으로 말했다.
“임신 3주 차예요.”
유온과 윤서경이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축하드려요, 두 분.”
마치 자기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의사가 기뻐했다. 임신……. 유온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를 낳아도 된다는 생각은 벌써 오래전부터 해 왔다. 하지만 윤서경이 피임약을 끊고 노팅을 여러 번 해도 생기지 않아 반쯤 포기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때에. 믿을 수 없어서 그냥 멍하니 있던 유온은 집에 온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그래도 그때까지 윤서경이 말을 걸면 꼬박꼬박 대답은 했다. 먹고 싶은 건 없는지, 많이 피곤한지, 그런 물음이었지만 사실 평소 하던 질문과 거의 비슷했다.
“아…….”
유온이 그런 소리를 낸 건 그날 밤 침대에 누워서였다. 진단을 받고 무려 몇 시간이 지나서야 드디어 실감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유온의 목소리에 윤서경이 멈칫 놀라 들여다보았다.
“왜 그래요.”
“아, 아니, 그냥…….”
유온은 우물거리다가 배에 손을 얹었다. 배 속에 있는 태아는 생명체라고 부르기도 조심스러울 만큼 작다. 그러나 아기였다. 윤서경과, 자신의 아기. 그 아기가 배 속에 있다. 부지런히 자라나 태어나서 두 사람의 품에 안길 것이다.
“너무 신기해서요…….”
“……네.”
윤서경이 바짝 다가오더니 유온의 몸을 끌어당겨 자신의 품 안에 꼭 맞도록 안았다. 아직까지 들리는 건 두 사람의 심장 소리뿐일 텐데, 신기하게도 한 사람의 소리가 더 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그때부터 유온의 생활은 임신한 몸에 맞춰졌다. 사실 임신 전에도 윤서경은 유온을 애지중지했으나 그게 한층 더 심각해졌다. 그는 낮에 일하는 시간을 대폭 줄이고 집에 있으면서 유온의 발이 땅에도 닿지 않게 했다.
운동을 해야 한다고 했다고 소극적으로 주장하자 매일 가벼운 스트레칭 같은 걸 가르쳐 줄 강사를 집으로 부르고, 하루에 한두 번씩 바깥을 산책했으나 어쨌든 집 안에서 유온을 들고 다니는 건 멈추지 않았다.
임신이라는 진단을 받은 후 유온 역시 걱정이 많아졌다. 원래 자신은 스트레스며 압박에 취약한 편이고 환경에도 영향을 많이 받는다. 병원에도 여전히 다니고 있었다. 약은 임신 중에도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바꾸었지만 임신을 하면 우울증이 심해진다거나, 그것 말고도 감정 기복이 커진다는 말을 여러 번 들어 아무리 생각해도 불안했다.
그래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 8주 차에 접어들었다. 한 장 한 장 늘어가는 초음파 사진에서 아기는 조금씩 자라는 듯했지만 아직 배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납작했고, 입덧 같은 것도 없었다. 윤서경이 워낙 잘 돌봐주니 뭔가가 불편하지도 않았다.
문제는 8주 차를 막 넘기면서 시작되었다.
아주 심한 건 아니었으나 가끔씩 별것도 아닌 일에 공연히 마음이 서러워지곤 했다. 이전에 우울증이 아주 심할 때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긴 했어도, 제법 곤란했다.
이를테면 이랬다. 어느 날 새벽 유온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윤서경을 돌아보자 그는 깊게 잠이 들어 있었다. 새벽 3시 20분. 잠에서 깨 뭔가를 하기엔 너무 애매한 시간이었는데 눈이 말똥말똥했다. 그리고…… 콜라가 너무 마시고 싶었다.
대체 왜 콜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 탄산음료는 거의 마시지 않는데. 거의가 아니라 아예 안 마셨다. 손으로 꼽을 것도 없을 정도로 아예. 그런데 갑자기 콜라를 당장 마셔야 할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임신한 몸에도 태아에게도 해로울 걸 아는데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유온은 슬쩍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주방으로 가서 커다란 냉장고를 열었다. 가사 도우미가 깔끔하게 정리해 둔 냉장고에는 뭐가 들어 있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음료 칸에는 물과 차갑게 한 차 종류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
포기하지 못하고 다른 칸에 심지어 냉동실까지 뒤졌으나 콜라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야 윤서경도, 유온도 그런 건 마시지 않으니 처음부터 있을 리가 없긴 하지만. 냉장고 문을 탁 소리가 나게 닫은 뒤 유온은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콜라가 없다는 사실에 침울해져서 멍하니 있는데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자 윤서경이 서서 고개를 의아하게 기울이고 있었다.
“왜요, 먹고 싶은 거라도 있습니까?”
“…….”
“말해 봐요.”
한밤중에 냉장고 앞에 앉아 있었을 뿐인데……, 아니, 충분히 의미를 알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 사실을 들킨 게 부끄러워서 한층 침울해진 채 유온이 중얼거렸다.
“콜라요…….”
그러자 윤서경은 두 말도 하지 않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린 뒤 유온을 바닥에서 끌어 올려 품에 안았다.
“잠시만 기다려요.”
입술이 관자놀이에 닿고 정말로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윤서경은 유온을 거실 소파에 앉히고 나가서 쇼핑백을 받아 들어왔다.
“일단 종류별로 사 왔다고 하는데요.”
쇼핑백 안에 콜라가 브랜드별로 있었다. 심지어 어디서 사 온 건지 병에 든 유기농 제품도 있는 것 같았다. 그걸 집어야 할 것 같았지만 손은 가장 유명한 상품으로 갔다. 쥐면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캔을 든 채 윤서경을 올려다보았다.
“몸에 안 좋다던데…….”
“괜찮습니다. 매일 마시는 것도 아니고.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게 더 안 좋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윤서경은 유온의 손에서 콜라를 가지고 가, 얼음이 든 유리잔에 옮겨 담고 레몬 슬라이스까지 올려서 가지고 왔다. 목이 따가운 것도 잊고 급하게 마시자 물을 마셔도 사라지지 않던 갈증이 가시는 것 같았다. 홀짝홀짝 한 잔을 다 비우고 나니 서럽던 기분이 가라앉았다.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잔을 들고 있다가 윤서경을 보았다.
“좀 이상한 것 같아요.”
“뭐가 이상합니까?”
“그냥 이것 하나 못 마셨다고 우울하고.”
그러자 윤서경이 짧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다가와 유온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원래 그런 거라고 합니다. 그래도 지금은 구하기 쉬운 게 먹고 싶어서 다행이네요.”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갑자기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게 생각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아까의 그 울적함을 달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 표정을 본 윤서경이 웃으며 유온의 뺨을 쓰다듬었다.
“어떻게든 구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오늘은 이거면 됐습니까?”
유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서경은 유온의 손에서 유리컵을 빼내고 안아 올려 다시 침실로 향했다.
다행히도 입덧이나 다른 몸이 힘든 증상은 없었고, 먹을 것 문제 말고는 감정이 크게 널뛰지도 않았다. 먹을 것도 대체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물론 윤서경의 기준에서이긴 했지만…….
유온은 집에서 나름 태교와 비슷한 이런저런 취미 생활을 하며 습관처럼 배에 손을 올린 채 지냈다. 개월 수가 이 정도 차면 배 속에서 아기가 움직인다, 그게 몸으로 느껴진다, 그런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처럼 아기는 움직이지 않았다. 유온은 약간 시무룩해진 채로 치즈 과자를 집어먹었다. 아까부터 계속 먹고 있었고 작은 포장이긴 해도 벌써 두 봉지째였다.
임신하기 전엔 이런 과자 종류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먹으면 속이 안 좋아서 오래전에 한 번 먹어 보곤 그 후로 손도 뻗어 본 적 없다. 그게 갑자기 못 참게 먹고 싶어져서 박스로 사 버렸다.
대체 임신이라는 게 뭐기에 이렇게 식성을 완전히 바꿔 놓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테이블 위에 수북하게 쌓인 귤껍질도 그랬다. 가끔 생각나면 한두 개 먹는 정도였는데 이젠 과일 바구니에 귤이 떨어질 일이 없다.
입 안에 있던 과자를 꿀꺽 삼킨 유온은 귤 하나를 굴려 끌어당겨서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한 조각 떼어 입에 넣자 기분이 확 좋아질 정도로 새콤하고 맛있었다.
마지막 남은 귤에 손을 뻗으려 하는데 차 소리가 들렸다. 주택으로 이사한 후 좋은 점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윤서경이 타고 오는 차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게 좋았다. 유온은 손을 털고 일어나서 현관 앞에 섰다. 이르게 돌아온 윤서경이 현관문을 열었다.
이 시간이 좋았다. 당연한 듯이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자신은 마중을 나오는 시간이. 그리고 함께 욕실에 들어가 하루 종일 있었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씻는 것도. 매일 하루하루가 비슷하게 흘러가는 것 같은데, 서로가 할 말은 끝도 없이 많았다.
“저녁은 좀 적게 먹을까요?”
어느 틈에 테이블 위를 본 건지 윤서경이 그렇게 물었다. 유온은 자신이 테이블에 만들어 놓은 잔해를 생각하며 얼굴을 조금 붉혔으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먹은 과자와 귤이 다 어디로 가 버렸는지 배가 고팠다.
심지어 푸짐하게 차려진 저녁 식사를 유온은 평소보다 반 그릇 정도 더 먹었다. 식사를 마친 후 차를 마시며 유온이 조금 심각해졌다.
“저 너무 많이 먹는 것 같아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보통 사람은 그 정도는 먹어요.”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유온은 늘 그렇듯 ‘아닌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다가, ‘그런가…….’로 넘어갔다. 윤서경이 한 말이기에.
실제로 유온은 임신 전에 먹는 양이 워낙 적었기에 스스로 느끼기에 먹는 양이 확 늘어났다고 해도, 보통 사람과 비슷하거나 조금 많은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나니 아직 8시도 안 된 시간인데 꾸벅꾸벅 잠이 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임신하고 나서는 잠도 많이 늘었다. 하루 종일 먹고 자는 것 말고는 하지 않는다. 덕분인지 뺨이 약간 동그래졌고 뽀얀 빛이 돌았다.
소파에 앉아 졸고 있자 윤서경이 그런 유온을 안아 침실로 데리고 갔다. 비몽사몽한 중에도 유온은 배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아기가 움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윤서경은 말없이 한쪽 다리를 세우고 앉아 유온을 끌어안듯 앉혀 놓고 있을 뿐이었다.
그대로 막 잠이 들려 할 때였다. 유온은 퍼뜩 눈을 뜨며 일어났다. 하마터면 머리를 부딪칠 뻔했으나 윤서경이 능숙하게 몸을 뒤로 빼 피했다. 그걸 신경도 쓰지 못한 채 유온은 윤서경의 팔을 잡았다.
“왜 그래요?”
“아, 아, 아기가 움직여서…….”
정말 미세한 움직이었지만 분명했다. 배에 손을 얹고 있자 또 얌전히 있다. 언제 다시 움직일지 몰라서 윤서경의 손을 잡아 아예 제 배에 올렸다. 그리고 얼마 후 배 속에서 묘한 느낌이 들었다. 윤서경도 신기하다는 듯 입을 조금 벌리곤 유온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와…….”
유온은 연신 신기한 감탄사를 내뱉으며 윤서경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치고 있었다.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아기는 더 움직일 마음이 없는지 그 후로 조용해졌지만, 태동을 처음 느낀 유온은 아직 그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기가 착하네요.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걸 알아주고.”
윤서경이 속삭였다.
자신의 배 속에 태아가 있다는 사실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아직은 손바닥보다 작을 아이, 그러나 살아서 움직인다. 그런 아기를 자신이 품고 있는 게 신기했다. 자신과 윤서경의 아기였다.
“누굴 더 닮았을까요…….”
“글쎄요. 어느 쪽이든 예쁘겠죠.”
두 사람을 조금씩 닮은, 사랑으로 생겨난 결실.
아기가 세상에 태어날 날이 애타게 기다려졌다.
* * *
아기는 상당한 난산이었다. 유온이 힘들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고 한참을 괴로워했다. 윤서경은 앞으로 절대 아이를 가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유온이 바란다고 해도 다시는 낳지 않겠다고. 자신이 대신 낳을 방법이 생기지 않는다면.
유온 역시 기나긴 진통이 끔찍했기에 윤서경의 말에 동의했다. 아픔에 익숙하다고 생각했건만 아기를 낳는 고통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태어난 아기는 사랑스러웠다. 머리카락은 젖어서 달라붙어 있고 얼굴이 아직 생긴 것도 알 수 없을 만큼 쪼글쪼글한데도, 한없이 귀엽고 예쁘게 보였다.
태어난 아기는 아슬아슬하게 저체중을 피했을 정도로 평균보다 자그마했다. 하지만 유온과 윤서경이 채 걱정하기도 전에 병원에 있을 때부터 하루가 다르게 자랐고, 퇴원할 때쯤엔 여느 우량아 못지않았다. 마치 아기가 유온이 난산일 걸 걱정해 덜 자란 채로 나온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유온 또한 난산이었던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회복이 빨랐다.
집에는 아기를 돌보기 위해서 일하는 인원이 늘어났으나 유온과 윤서경 또한 할 일이 많았다. 특히 유온은 자신이 집에 있는 만큼 아기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영인이라고 이름을 지은 아기는 빠르게 컸다. 며칠만 지나면 어느새 자라 있는 느낌이었다. 처음엔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아기는 곧 꿈틀거리다가 몸을 뒤집었다.
한 번 뒤집는 법을 터득하자 그 후로는 자유자재였다. 유온은 잠시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리고 있다가도, 아기가 몸을 뒤집으려 하면 그때부터 가만히 관찰했다. 대체로 아기는 오른쪽으로 뒤집든 왼쪽으로 뒤집든 몸을 뒤집는 것에 성공하면 홀로 굉장히 뿌듯한 얼굴을 하곤 하는데, 그 얼굴이 무척 귀엽기 때문이었다.
기기 시작한 후로는 아기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기를 봐주는 사람이 더 있지 않으면 혼자서는 돌보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아기가 기는 속도는 기겁할 만큼 빨랐다. 거실에 데리고 나왔다가 고작 몇 초 시선을 돌리고 있으면 어느새 식탁 밑까지 들어가 있곤 했다.
아기의 옷과 신발 따위를 사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아기는 아래위가 연결된 우주복을 입었는데, 이 우주복이 정말 귀여운 디자인이 많았다. 아기 옷을 전담하는 퍼스널 쇼퍼가 자주 집에 방문했고, 유온은 온갖 동물 귀가 달린 우주복 중에서 하나를 고르지 못해 결국 전부 다 사버리곤 했다.
그렇게 입히는 것보다 사는 게 더 많아서 유온은 산처럼 쌓인 옷을 다 한 번씩 입혀 보기 위해 열심이었다. 매일매일 혹시 아기가 옷을 더럽히진 않았는지 유심히 살펴보다가, 혹시나 이유식이라도 흘리면 얼른 옷을 갈아입혔다.
그래서 아기는 하루 종일 곰돌이가 되었다가 토끼가 되었다가 공룡이 되곤 했다. 새 옷을 입히면 사진을 잔뜩 찍어 놓곤 한 번씩 모아서 윤서경의 부모님에게 보내 드리고, 저녁에 윤서경이 돌아오면 함께 보았다.
또 아기는 유온이 보기에 윤서경을 닮아서 다정하고 세심했다. 한 번은 유온이 아기에게 먹일 간식을 가지러 갔다가 식탁 의자에 다리를 부딪쳤다. 아프긴 했지만 그냥 참고 아기 옆으로 돌아오자, 아기는 근엄하게까지 느껴지는 얼굴로 유온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사리 손으로 유온이 부딪친 자리를 토닥토닥 만져 주었다.
‘다친 걸 아는 건가……?’
고개를 갸웃하며 보자 아기는 역시 곧 멍이 들 것 같은 유온의 다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똑똑하긴. 유온은 웃으며 아기의 우유 냄새가 나는 머리에 입을 맞췄다.
마침 차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 윤서경의 어머니, 서 회장이 곧 도착할 거라고 연락을 했다. 바쁜 시간을 겨우 쪼개 손자를 보러 오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토끼 귀가 달리고 가슴엔 당근이 그려진 옷을 입혔다. 가장 귀여워 보이는 옷으로 고심해 고른 것이었다.
초인종 소리에 유온은 일어나서 현관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 서 회장이 두 손 가득 무언가를 든 채로 서 있었다.
“밖에서 부르지 그러셨어요.”
“아냐. 별로 무겁지도 않아.”
비서와 운전기사의 손길도 물리치고 직접 들고 온 모양이다. 쾌활하게 웃은 서 회장은 집 안으로 들어와선 손부터 씻고 나와 아기 앞에 앉았다. 아기는 할머니를 알아보는지 두 손을 흔들었다. 한참 아기를 안고 어르고 예뻐하던 서 회장이 문득 중얼거렸다.
“그런데, 정말 서경이 아기 때랑 똑같다니까. 좀 무서울 정도구나.”
“그, 그래요?”
“그렇다니까. 유온이 너를 안 닮은 건 아닌데……. 특히 표정이 똑같아.”
그 말에 유온도 아기를 들여다보았다. 아기치고는 좀 딱딱한 얼굴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기였다. 입매가 보들보들하고 눈은 반짝거리는 아기. 유온은 윤서경의 얼굴을 가만히 떠올리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얘는, 못 믿겠어? 참. 유온이 너 서경이 아기 때 사진 본 적 없지 않니?”
“아……. 네, 없어요.”
윤서경의 집에 가 보지 않은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앨범 같은 건 볼 기회가 없었다. 거실에 장식된 어릴 때 사진만 보았을 뿐이다. 영인이와 똑같다는 윤서경의 갓난아기 때 모습……. 그러고 보니 왜 한 번도 아기 때 앨범 볼 생각을 못 했는지 의아했다.
“그렇게 똑같아요? 저 볼래요…….”
서 회장이 잘됐다고 즐거운 얼굴을 하며 아기를 내려놓고, 휴대폰을 들었다. 한참 여기저기를 뒤적거리던 서 회장은 목적한 걸 찾았는지 유온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거기서부터 다 서경이 사진이야.”
“…….”
서 회장이 내민 사진을 한 장씩 넘겨 보던 유온은 점점 오묘한 표정이 되어 아기와 휴대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사진 속 아기는 흡사 영인이를 다른 곳에 데려가 찍은 것처럼 놀랄 만큼 똑같았다.
아기가 누구를 닮았느냐에 대한 평은 분분했다. 윤서경의 가족들은 둘 다 닮았지만 지금 얼굴은 윤서경과 똑같다고 말했다. 반면 윤서경은 자신은 거의 닮지 않았고 이유온의 얼굴이라고 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의견이 갈리거나 둘을 놀라울 정도로 반반 닮았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보니 정말 어디서 어떻게 보아도 아기는 윤서경의 아들이었다. 나중에 알파로 발현하고 나면 분위기까지 비슷해질 아들.
“그냥 그렇다는 거야. 누굴 닮았으면 어떠니? 예쁘기만 하면 됐지. 유온이 너는 어디 아픈 데 없고?”
“아……. 네, 전 괜찮아요. 어머니는요?”
“멀쩡하지. 내가 너보다 건강할 걸. 또 살 빠진 거 아니지?”
“그대로예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지만 서 회장은 의심이 담긴 눈길로 유온을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건 영인이 간식이랑 옷이랑 유온이 네 영양제고, 권 실장한테 전복이랑 닭 전해 뒀다. 네가 그때 맛있다고 한 농장에서 잡은 닭이야. 권 실장한테 삼계탕 해 달라고 해.”
“네, 어머니…….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아이고, 이 귀여운 것. 우리 집 애들은 하나같이 쌀쌀맞고 무뚝뚝하고. 서경이가 어쩌다 너 같은 애를 만났다니.”
서 회장이 유온의 볼을 주물거리다가 머리를 세게 쓰다듬었다. 유온은 그녀가 상견례 자리에서 자신을 칭찬했을 때 그 뜻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다소곳하다는 말을 그대로 알아듣지 못해선 음침할 정도로 조용하다는 의미인 줄 알았다. 지금은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안다. 유온은 뺨을 따뜻하게 붉히며 서 회장의 손길 아래 얌전히 있었다.
부경은 세간이 재벌 집안에 대해 가지는 생각과는 가풍이 퍽 달랐다. 윤서경의 부모님은 항상 자식들에게, 가족끼리 칼을 들이대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일이라고 가르쳤다. 가족이 세상에서 가장 큰 아군이며, 그런 가족이 적으로 돌아서면 그보다 무서운 적이 없다고. 아군과 싸울 시간에 힘을 합쳐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는 게 집안의 교육이었다.
그런 교육 속에서 자란 윤서경의 눈에 자신의 집안은 꽤나 이상하게 보였을지도 몰랐다. 정확히는 유온 하나가. 아예 집안 전체가 서로에게 등을 돌린 채 날을 세우는 경우라면 모를까, 사이가 좋은 집안에서 혼자만 외따로 떨어져 있었으니까.
어쨌든, 그 사이가 좋은 집안에 유온은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여졌다. 부모님, 형, 누나, 모두 유온에게 다정했다. 자신이 그런 사랑을 받게 될 거라고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유온으로선 아직도 신기하고 적응이 안 되는 일이었다.
자신을 위해 준비해 왔다는 음식,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곧 사라지는 게 아닐까 불안해하지도, 그들의 성의에 어떻게 대답해야 심기가 상하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느끼는 마음만큼 고맙다고 말하면 충분했다.
한참 유온을 쓰다듬고, 영인이도 다시 안아 요람처럼 흔들어 준 뒤 서 회장이 물었다.
“서경이는 오늘 늦는다고 하니?”
“네, 저녁에 회의가 있대요.”
“걔는 이런 애기랑 너 두고 회사 갈 때 발이 떨어진대?”
“가기 싫대요…….”
아침에 출근할 때 영인이를 안고 배웅하면 그는 두 사람에게 각각 입을 맞추곤 복잡한 얼굴을 하곤 했다. 안 그래도 유온이 혼자(도우미가 몇 명이나 있으니 결코 혼자 하는 건 아니었다) 아이를 보게 하는 게 미안하다고 회사에 있는 시간을 최대한 줄인 그였다. 우뚝 서 있는 그에게 다녀오시라고 말하며 발돋움해 뺨에 입을 맞추고 나서야 그는 현관을 나섰다.
회사에 가기 싫어 한다는 말에 서 회장은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나도 애들 아기 때는 두고 출근하기 싫었다. 서경이는 유온이 너도 있으니 더하겠지. 너를 얼마나 걱정하겠니.”
“이, 이젠 좀 덜해요.”
이전만큼 안절부절못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서 회장은 윤서경과 닮은 눈매를 휘며 웃더니, 한 팔로는 아기를 안고 다른 손으로 유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마쯤 더 아기와 놀던 서 회장은 시간이 없다며 아쉽게 일어났다. 아기를 안고 대문까지 배웅하러 나가자, 아기는 차에 오르는 할머니에게 꺅꺅 소리를 내며 몸을 휘저었다. 얼마 전에 배운 ‘안녕’이었다. 서 회장은 그 모습을 보며 함박웃음을 짓고는 돌아갔다.
유온은 차의 뒷모습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서 있다가 들어왔다. 사람 한 명이 잠시 다녀갔을 뿐인데 집 안이 적적했다. 영인이를 안고 어르자 아기는 까르르 웃다가 짧은 두 팔을 앞으로 뻗어 유온의 뺨을 감쌌다. 그러고 보니 이건 윤서경이 자주 하는 행동이다. 아기가 어른을 보고 배워서 그러는 건지, 윤서경을 닮아서 그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사랑스럽다.
“영인아, 낮잠 잘 시간이네.”
“아우우…….”
낮잠이 별로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늘 자던 시간에 침대에 눕히면 영인이는 대체로 열을 세기도 전에 잠들었다. 아기를 토닥토닥하며 방으로 들어와 눕히자 역시나 속으로 다섯을 셌을 때 아기의 눈이 감겼다.
색색거리며 자는 찹쌀떡 같은 얼굴을 보고 있자 유온도 잠이 쏟아졌다. 영인이가 푹 잠들면 나가서 잠 깨게 뭐라도 해야지. 그렇게 생각했으나, 아기 이불 옆에서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유온은 그대로 스르르 자 버렸다.
퍼뜩 깨어났을 때 아기는 아직도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자그마한 두 손을 오므려 쥔 채였다.
가만히 아기를 바라보던 유온은 손끝으로 아기의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대답이라도 하듯 벌어진 아기의 손은 가까이 있던 유온의 손가락을 잡은 채 다시 오므라들었다.
유온은 슬쩍 손을 빼 보았다. 잠들어서 잔뜩 풀어졌던 아기의 표정이 찌푸려지더니, 손이 오물오물 움직이며 손가락을 따라왔다. 결국 웃으며 손가락을 다시 쥐여 주고는 곁에 가만히 누워 아기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린 윤서경의 사진은 보았지만 완전히 갓난아기 때 모습은 처음 봤다. 정말…… 똑같았다.
워낙 바쁜 윤서경의 가족들이기에 아직까지 제대로 시간을 가지고 아기를 본 건 서 회장뿐이었다. 다른 가족들은 거의 스친 것에 가깝게 보았을 뿐이다. 윤서경의 누나 윤세경은 아기를 보자마자 윤서경과 너무 똑같이 생겨서 소름이 돋는다고 말했다가, 영인이한테 한 말이 절대 아니라면서 사과하기도 했다.
그러는 게 이해가 갈 만큼 영인이와 윤서경은 닮았다. 그런데 신기하게 자신을 전혀 닮지 않은 건 아니다. 유온은 깊이 잠든 아기의 동그랗고 따뜻한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조금 더운지 머리가 축축했다. 이불을 절반만 걷고, 깨지 않을지 확인한 다음 거실로 나왔다.
서 회장이 가지고 온 선물은 제자리에 정리가 되어 있었고, 주방에선 유온이 자는 사이 벌써 닭을 삶아 두었는지 고소한 냄새가 났다.
평온한 집 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느새 이 평화에 익숙해졌다. 어느 날 이 모든 게 사라질까 봐 무섭다는 생각도 이제 들지 않았다. 오랜 시간 이런 평온한 감정을 모른 채 살아왔지만, 이제라도 알았으니 충분했다.
잠시 그대로 있다가 영인이에게 돌아가려 몸을 돌렸을 때였다. 영인이가 자고 있던 방의 문이 작게 흔들리더니 스르르 열렸다.
문이 저절로 열릴 리는 없다. 유온은 저도 모르게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역시 아기가 한쪽 손을 번쩍 든 채로 엎드려 있었다. 얼굴에는 자신이 해냈다는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깨어나서 여기까지 기어와 문을 연 모양이었다. 유온이 생각하기에도 대단한 업적이었다. 영인을 안아 올린 유온은 아기의 푹신한 엉덩이를 토닥이며 한참 칭찬했다.
낮에 거의 잠을 안 잤는데도 아기는 오늘따라 잘 기분이 아닌지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기만 했다. 유온은 저녁을 먹은 후에도 영인을 안거나 눕혀 둔 채로 책을 읽어 주고, 피아노를 쳐 주며 시간을 보냈다. 아기가 간신히 눈을 감은 건 저녁 8시가 다 되어서였다.
영인이 나이의 아기가 낮잠을 안 잔다는 건 어른이 하루 종일 활동을 하는 것과 같았다. 평소 자는 시간인 8시를 넘기자 아기는 정말 기절하듯 잠들었다. 동그랗게 올라온 아기의 배 위에 손을 얹은 채 유온은 또 한참 동안 자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뽀얀 솜털에 감싸인 뺨이 발그레했고, 길고 가느다란 속눈썹이 조금씩 움직였다.
아무리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자는 얼굴이었다. 이대로 아침까지 잘 것이다. 머리에 손을 얹어 덥진 않은지 확인한 뒤 거실로 나왔을 때 마침 현관문이 열렸다. 손에 호텔 로고가 쓰인 케이크 상자를 들고 있었다. 곧 호텔 델리의 시즈널 디저트가 일제히 바뀔 시기인지라 요즘 그가 저렇게 상자를 들고 오는 일이 잦았다.
“다녀왔어요. 영인이는 자고 있습니까?”
성큼 다가와 익숙하게 닿는 입술에 눈을 가늘게 뜬 유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이 되면서 고용인용 별채로 넘어가 있던 직원 한 명이 조용히 들어와 윤서경이 가지고 온 디저트를 바로 먹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오늘은 다섯 종류였다.
그동안 윤서경은 욕실로 들어갔고, 유온은 문을 살그머니 열곤 아기가 깨어나지 않을지 확인했다. 꼼짝도 안 하고 자고 있는 게 당장은 깰 기색이 없었다. 깨도 새벽이거나, 아니면 내일 아침까지 내리 자거나. 침실로 올라갈 때 안아 들면 잠깐 깰 수도 있지만 어차피 그때 깨면 또 금방 잠든다.
다과를 다 차린 직원이 다시 돌아가고 얼마 후 윤서경도 편안한 차림이 되어 나왔다. 가을 시즌을 겨냥한 디저트는 밤과 유자가 주재료였다. 전부 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은 크기로, 샘플로 열다섯에서 스무 종류를 만든 뒤 호텔 각 브랜드와 레스토랑 코스 디저트를 포함해서 여섯 종류 정도가 선택된다.
물론 유온이 그 결정권을 가지는 건 아니었다. 유온은 이런저런 알레르기가 많아서 먹을 수 없는 재료가 많았고, 또 본인이 그런 중요한 결정을 하는 건 여전히 불편해했다. 윤서경은 그냥 판매하기 전에 샘플로 만들어진 것들을 가지고 돌아와 유온에게 먹일 뿐이었다.
그중에서 유온이 맘에 들어 했는데 정식 메뉴로 채택하지 않은 건 가끔씩 델리에 전달해서 따로 만들어 가지고 오기도 했다.
윤서경은 한 손에 찻잔을 든 채 다른 손으론 턱을 괴고 유온이 밤 타르트를 먹는 걸 바라보았다. 윤서경을 만난 후로 지금까지 꾸준히 먹는 양이 늘어난 유온은 이제 조각 케이크 하나 분량쯤 되는 디저트는 무리 없이 먹을 정도가 되었다.
타르트를 다 먹고 위에 잘게 썬 유자 껍질이 올라간 무스를 손에 들었다. 어느 정도 새콤할 거라고 생각하고 한 스푼을 떠서 입에 넣은 순간 입이 다물어졌다. 어느 정도가 아니고 입술과 혀가 움찔거릴 정도로 시었다.
유온을 보고 있던 윤서경이 그걸 보고 눈썹을 까딱하더니 입을 벌렸다. 한두 입 거리인 디저트였기에 혹 유온이 먹다가 맛이 없는 기색이면 남은 걸 그가 먹어 주곤 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신데……. 좀 고민하다가 남은 한 입을 스푼에 떠서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윤서경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다. 그게 재미있어서 작게 웃음을 터뜨리자, 윤서경도 웃더니 고개를 기울여 입을 맞췄다. 혀끝이 겨우 닿을 듯 말 듯했을 때였다. 갑자기 영인이 자고 있는 놀이방의 문이 열렸다.
황급히 몸을 떼고 일어나자 아기가 바닥에 엎드린 채 또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윤서경이 몸을 일으켜 다가가서 영인을 안아 올렸다.
“영인이가 지금 혼자 문을 연 겁니까?”
“네, 아까도 그랬어요.”
두 사람은 잠시 아기의 영특함을 칭찬했다. 뿌듯한 얼굴이 더더욱 뿌듯해진다. 그러다 시간을 확인한 윤서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잠을 많이 잤나요?”
“아니요……. 왜 자꾸 깨지……. 낮에도 거의 안 잤어요.”
아기가 잠을 너무 많이 자도, 많이 안 자도 걱정되는 게 부모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자 영인은 더없이 기분 좋은 얼굴로 유온을 보고 있었다.
“영인아……. 잠이 안 와?”
그러자 영인은 도톰한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으음, 하며 영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유온은 문득 윤서경을 보았다. 아까 서 회장이 보여 주고 간 윤서경의 아기 때 사진을 떠올리자 웃음이 나왔다. 영인이가 아기치고 크다고 해도 아기라, 윤서경이 안으면 늘 작은 치와와라도 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릴 때 얼굴이 거의 남지 않은 것 같았는데, 아기 때 사진을 보니 또 비슷한 부분이 있다. 다 자란 상태로 어디서 뚝 떨어진 것처럼 생겨서는 영인이만큼 작게 태어나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리고 확실히 영인이와 똑같이 생겼다.
“왜요?”
“아니, 아까 어머니가 다녀가셨는데……. 영인이가 서경 씨 아기 때 얼굴이랑 똑같대요.”
“……네, 온 가족한테 돌아가며 듣고 있습니다. 사실 난 잘 모르겠어요. 당신이랑 더 닮은 것 같은데.”
윤서경이 아기의 몸통을 잡고 슥 들어 유온과 얼굴을 나란히 놓았다. 무심코 아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기도 동그란 머리를 돌렸다. 정면에서 아기와 마주 보니 역시 작은 윤서경이었다. 유온은 웃으며 영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영인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팔을 뻗어 아기를 자신이 받아 안고는, 윤서경이 한 것처럼 아기와 윤서경의 얼굴을 나란히 두었다. 자신이 하려니 팔을 위로 들어 올려야 했다.
역시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영인은 무슨 놀이로 생각했는지 고개를 돌려 윤서경을 쳐다보았다. 그걸 알고 윤서경은 장난치듯 시선만 조금 옆으로 한 채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아기가 묵직해 보이는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손을 뻗었다.
하지만 짤막한 팔 때문에 원하는 곳까지 손이 닿지 않았다. 바동대는 아기의 몸을 팔의 방향대로 옮겨 주자, 아기는 손바닥을 제 아빠의 뺨에 탁 얹더니 그대로 힘을 주었다. 윤서경의 고개가 그걸 따라 아기 쪽으로 돌아갔다.
겨우 눈을 마주치게 되자 영인이는 좋아서 작게 바동거렸고, 그런 아기에게 윤서경이 입을 맞췄다. 아기는 또 깔깔 웃었다. 몇 번 그 놀이를 반복해 주다가 9시를 넘겼을 때였다. 아기는 코를 찡긋거리더니 우우……. 하고 끙끙대는 소리를 내다가 눈을 무겁게 깜빡깜빡했다. 윤서경은 들어 올린 채 놀던 아기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영인은 건전지를 빼낸 것처럼 움직임을 뚝 멈춘 채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잠들었다.
아기를 제 방에 눕혀 두고 침실로 들어왔다. 지난달부터 따로 자기 시작한 아기는 처음엔 자신을 방에 혼자 두고 나간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 듯했으나 다행히 금방 적응했다. 며칠에 한 번 정도 새벽에 잠깐 깨는 것 말고는 푹 잠들어서, 아침에도 잠투정 없이 일어나곤 했다.
가끔 유온은 아기가 겨우 7개월인데 너무 어른스러운 것 같다는 생각에 심란해지곤 했다. 아기를 낳기 전과 낳은 직후에 읽은 책에 아기는 울고 보채고 부모님을 힘들게 하지만, 그 값을 사랑스러움으로 돌려준다는 말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기는 그저 사랑스럽기만 했다. 유온과 윤서경을 힘들게 하는 일이라곤 없는데 오히려 그게 걱정스러웠다.
그 말을 하자 윤서경은 별것 아니라는 듯, 자신도 어릴 때 그래서 어머니가 이런저런 검사를 받으러 다닐 정도였다고 대답했다. 그냥 원래 타고난 성격이 침착한 거라고.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신생아였지만 영인은 알파로 발현할 확률이 무척 높다고 한다. 생긴 것도, 행동도 비슷한데 알파이기까지 하다면 정말 윤서경을 많이 닮겠지. 차분하게 자라서 다정하고 단단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윤서경처럼. 그런 아이를 자신의 배로 낳았다.
신기한 기분이 들어 윤서경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태블릿을 보고 있던 그가 의아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쳐다보기만 했을 뿐인데 그는 눈을 마주치고 웃더니, 태블릿을 내려놓고 유온의 허리에 팔을 감아 끌어당겼다.
무릎 위로 올라가면서 얇은 바짓단이 말려 올라갔다. 유온의 뺨을 감싸고 키스하려 하던 윤서경이 시선을 내렸다. 낮에 의자에 부딪친 자리에 아직 멍이 남아 있었다.
“이건 왜 그래요?”
“부딪쳤어요…….”
유온은 웃고 말았다. 멍든 자리를 매만지는 게 아까 영인이 했던 것과 똑같이 보여서였다. 왜 웃는지 눈을 둥글게 하는 윤서경의 귀에 그 이야기를 속삭여 주었다. 윤서경이 아, 하곤 유온과 함께 웃었다.
“내가 집에 없을 땐 영인이가 당신을 돌봐주겠네요.”
“네.”
윤서경은 농담으로 한 소리겠지만 정말 그럴지도 몰랐다. 키스가 이어지고 윤서경의 손이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영인이를 재워 두고 할 때면 늘 그렇듯 깰까 봐, 울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되었지만 신기하게도 아기가 깨면 뭘 하다가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자다가도 갑자기 눈이 뜨였다.
혹시 알아채지 못해도 항상 영인이의 방 CCTV를 보고 있는 직원들이 아기 방과 바로 연결된 다른 통로를 통해 들어올 것이다. 유온은 숨을 내쉬며 두 팔로 윤서경의 목을 끌어안았다.
굵은 팔이 마주 뻗어와 유온의 허리를 안고 등줄기를 천천히 더듬었다. 길게 팬 등의 골을 따라서 단단한 손가락이 내려갔다. 유온은 따뜻한 물에 잠겨 가는 것처럼 윤서경에게 몸을 기댔다. 자신의 체온을 온전히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감각은, 상대가 윤서경이기에 조금도 두렵지 않고 편안했다.
상의 단추가 전부 풀어지고 바지와 속옷이 차례로 벗겨졌다. 유온은 자신도 손을 뻗어 윤서경의 옷 단추를 풀었다. 짙은 색의 편안한 상의가 벗겨지고 그 안에 있던 몸이 드러났다. 곡선을 그리며 융기하고, 그 줄기를 따라 잘게 쪼개진 근육이 윤서경이 숨을 쉴 때마다 느리게 오르내렸다.
바지가 허벅지까지 내려간 것을 보고 유온은 윤서경의 단단한 배에 두 손을 얹으며 무릎을 한쪽씩 들었다. 속옷과 바지가 발목을 지나 빠져나가선 바닥에 떨어졌다.
두 사람 다 옷이 어디로 떨어졌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느새 맞물린 입술이 더 중요했다. 키스하며 유온은 윤서경의 한쪽 허벅지 위에 걸터앉은 모양이 되었다. 아래가 돌처럼 단단한 허벅지에 고루 눌렸다. 도망치려고 해도 윤서경이 등을 꾹 누르고 있어서 아래를 문지르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교묘하게 구멍 입구와 성기 아래쪽을 누르는 허벅지에 밀부가 금방 젖어 들어 축축해졌다. 윤서경의 맨살에도 고스란히 느껴질 것이다. 유온이 움찔움찔 몸을 움츠리자 그는 더욱 세게 아래를 눌러 댔다. 눈을 꾹 감은 유온이 어쩔 수 없이 신음했다. 그러자 윤서경은 유온의 얼굴로 손을 뻗어 눈꺼풀을 톡톡 두드렸다.
눈을 뜨자 그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멍하니 그 눈을 보고 있자, 윤서경이 유온의 허리를 두 손으로 쥐며 말했다.
“이리 올라와요.”
“……?”
고개를 갸웃하고 꾸물꾸물 허벅지에서 배 위로 자리를 옮겼다. 윤서경이 등을 쓰다듬었다.
“조금 더.”
이번엔 가슴 근처까지 올라갔으나 윤서경은 여전히 허리를 잡고 있다. 그제야 어디까지 올라오라는 건지 알아들은 유온은 얼굴이 새빨개져선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미리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윤서경은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더니 그대로 끌어 올렸다.
“아……!”
아래가 거의 윤서경의 얼굴에 닿을 듯했다. 유온은 당황해서 입만 벙긋거리며 조금이라도 거기서 떨어지려 애썼다. 윤서경은 그런 유온의 허벅지를 잡곤 잡아당기고, 유온은 침대 헤드에 손을 얹은 채 버텼다. 그러나 윤서경은 힘을 다 주지도 않은 것인데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결국 몸이 미끄러지듯 그 위로 앉혀졌다. 그래도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어 완전히 주저앉아 버린 건 아니었으나, 윤서경이 아래를 빨기에는 충분했다.
“아으, 아, 아……, 놔, 놔주세요, 싫어…….”
그러나 윤서경은 유온의 허벅지를 안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계속 혀며 입술을 움직일 뿐이었다. 아래에서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배 바로 아래에 보이는 윤서경의 얼굴에 유온은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새빨개졌다.
“서경 씨, 아, 아……, 놔줘요, 흐윽…….”
대답 대신 젖은 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는 도저히 놓아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이대로 성기를 집어넣을 수 있게 될 때까지 있으려는 생각인지도 몰랐다.
“다, 다른 자세로 해요……. 네? 다, 다른 건 다 괜찮으니까…….”
“다?”
순간 들린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에 유온은 움찔했다. 다……, 다 괜찮은 건 아니고, 그렇게 말하려 했으나 윤서경이 한 발 빨랐다.
“그럼 엎드려 봐요.”
“…….”
“다 괜찮다고 했잖아요.”
“아, 아니, 그게…….”
“얼른.”
제 입으로 한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나온 이상 저 말대로 순순히 엎드리지 않으면 윤서경이 어떻게 괴롭히고 나올지 몰랐다. 유온은 어쩔 수 없이 느릿느릿 몸을 움직여 윤서경의 몸 위에 엎드렸다. 그대로 그의 아랫배와 허벅지에 팔을 얹고 나자 정말로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다.
눈앞에 보이는 윤서경의 성기는 단단하게 일어서 있었고,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윤서경이 천천히 손끝으로 구멍 입구를 쓸었다. 그에 마치 재촉이라도 받은 듯 유온도 그의 것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손 안에서 맥박 치는 성기는 뜨겁고 단단했다. 상체를 약간 일으킨 윤서경이 유온의 다리를 안고는 다시 아래에 혀끝을 댔다.
이럴 거면 차라리 얼굴에 아래를 댄 채가 나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닌가, 이게 낫나. 혼란한 채로 유온은 우선 입을 벌려 성기를 입술 사이에 물었다. 매끈한 귀두를 입술 사이로 조여 물다가 혀로 핥자 뒤쪽에서 윤서경도 조금씩 거칠어진다. 겨우 혀를 내밀어 성기를 감싸듯 핥다가 입에 물고, 기둥을 입술로 문지르길 반복했다.
어느 것도 진득하게 하진 못했다. 윤서경이 계속해서 아래를 자극해서였다. 잔뜩 젖은 안쪽까지 파고드는 혀와 입술은 유온의 입이 열릴 때 성기를 머금는 대신 신음만 잔뜩 하게 만들었다. 정신이 들자 자신은 윤서경의 것을 두 손으로 쥐고 뺨에 붙여 문지르며 우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 흐윽……, 시, 싫어, 이거, 창피해요, 싫어…….”
몇 번을 그렇게 중얼거렸는지 모르겠다. 말과 달리 아래는 녹진하게 풀어져 있었다. 당장 이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을 정도로. 아래를 그렇게 풀어놓은 윤서경 역시 그걸 알았는지, 입술을 떼더니 그대로 상체를 일으켰다. 유온도 그의 손에 잡혀 몸을 바로 세웠다.
그렇게 등을 윤서경의 가슴에 기댄 채, 별다른 자극도 받지 못하고 있던 성기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유온은 고개를 잔뜩 젖히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쁜 신음과 숨결을 토해냈다. 안을 와락 벌리며 들어오는 성기의 감촉이 낯익고도 버거웠다.
“하, 아……, 아…….”
아직 절반도 채 들어오지 않았다. 윤서경이 팔로 자신의 허리를 껴안아 유온의 몸에 무리가 되지 않도록 지탱하고 있었다. 힘줄이 곤두선 그 굵은 팔을 보고 있자 가슴이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유온은 입술을 꽉 물고는, 윤서경의 팔을 안으며 스스로 허리를 움직였다.
“유온 씨.”
갈라진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유온은 고개만 끄덕이고는 조금씩 더 몸을 비틀어 성기를 몸속으로 집어넣었다. 한참을 애쓴 끝에 뿌리까지 온전히 품을 수 있었다. 가쁜 숨을 내뱉은 유온이 신음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입맞춤을 조른다는 걸 곧바로 안 윤서경이 유온의 머리를 한 손으로 감싸고 키스했다. 입술도, 아래도 농밀하게 맞닿아 있는 감각이 기분 좋았다. 유온은 입을 더 크게 벌려 달고 깊은 키스를 요구하며 쥐고 있던 이성의 끈을 제 손으로 놓았다.
* * *
저녁에 아기에게 분유를 먹이고, 거실에 앉혀 둔 뒤 잠시 책을 찾다가 돌아보았을 때였다.
“…….”
유온은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깜빡여도 보고, 다른 곳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봐도 똑같았다. 영인이가 앉아 있었다.
7개월이니 앉는 게 이상하지 않았지만, 보지도 못한 사이에. 유온은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서 아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앉아 있는 아기의 모습은 아직 머리가 무거워 똑바로 앉지 못해서 둥글둥글한 삼각형 모양이었다.
‘아, 사진. 사진…….’
서둘러 휴대폰을 찾아선 찰칵찰칵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하지만 사진을 찍다가 아기의 동그란 볼이 우물우물 움직이는 걸 발견했다. 먹을 걸 준 기억은 없었다. 눈에 보이는 건 뭐든 입에 넣어 보는 나이인지라 깜짝 놀라 다가가자 영인이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 입에 물려 있던 실리콘 인형이 침 범벅이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저건 어차피 누워서 입에 물고 놀라고 사온 장난감이라 빨아도 상관이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닦아 놓기도 하고. 유온은 영인의 앞에 앉으며 말했다.
“놀랐잖아, 영인아…….”
생각해 보면 영인이가 기어서 갈 수 있는 범위에는 부딪칠 것도 없고, 입에 넣으면 안 되는 것도 없다. 그래도 놀란 건 사실이다. 유온의 반응을 본 영인이 입술을 오물거리며 유온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머리를 기우뚱거리며 제 손에 들린 인형을 보더니, 배시시 웃으며 그걸 팩 내던졌다. 꼭 나쁜 짓을 들키고 이제 안 하겠다고 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니, 아기가 그런 게 가능한가……. 설마. 일단 다시 휴대폰을 가져와 사진과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한참 찍는 동안 아기는 작은 발과 손을 꾸물거리며 얌전히 카메라를 보거나 몸을 꾸물거렸다. 유온은 뒤늦게 휴대폰을 내려놓고 영인이 던진 장난감을 다시 집어서 건네주었다.
“자, 물고 놀아도 돼.”
“우.”
영인이 장난감을 두 손으로 쥐더니 유온을 보았다. ‘진짜?’라고 묻는 것 같았다. 유온은 그 앞에 웅크리고 앉아 한참 아기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좀 더 네 마음대로 해도 되는데……. 너는 아기잖아.”
“아우…….”
“너무 착해도 걱정이네.”
혹시라도 아이가 자신과 윤서경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봐, 아직 7개월짜리 아기는 그러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염려스러웠다.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볼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아기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아기의 얼굴이 구겨지면서 눈에 눈물이 와락 고였다.
“우……, 아아앙!”
걱정스럽다고 말한 거지 갑자기 울라고 말한 건 아니었다. 유온은 당황해서 두 손을 뻗어 영인을 안아 들고 일어났다. 아기는 10분이 넘도록 울다가 겨우 눈물을 그쳤다. 아기의 등을 토닥거린 뒤 유온은 미지근한 물을 먹이고, 자신도 조금 마셨다.
금방 그친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깜짝 놀랐다. 자신이 뭔가 아기가 울 만한 말이라도 한 걸까. 그냥 너무 착하게 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는데. 우느라 얼굴이 찐빵처럼 불어 버린 아기는 빨개진 코를 훌쩍거리다가 유온의 어깨에 고개를 푹 묻으며 잠들었다.
한숨을 내쉬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의아하게 고개를 돌리자 윤서경이 들어왔다. 이르게 퇴근한 모양이었다. 영인을 안은 유온을 본 그는 천천히 다가왔다.
“계속 안고 있지 말아요, 힘든데.”
“이제 막 안았어요. 울어서…….”
“울었어요?”
유온이 고개를 끄덕이곤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냥, 너무 말 잘 듣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한 건데.”
“흠…….”
한쪽 허리에 손을 얹은 윤서경이 고개를 기울이더니 다른 한 손으로 영인을 받아 안았다.
“영인이가 날 닮은 거면, 그 말을 알아듣고 운 걸 수도 있겠네요.”
“네?”
“…….”
윤서경은 잠시 말없이 있다가, 영인이 깊게 자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아니까요.”
“…….”
“아기가 순하고 조용한 건 그냥 성격이지, 부모가 힘들까 걱정해서 그러는 건 아닙니다. ……눈치를 보는 건 더욱 아니고.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 다정한 목소리에 유온은 눈을 내리깔았다가, 천천히 끄덕였다. 아기의 순함이 걱정으로 다가온 것은 자신이 바로 그렇게 순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혹시나 자신이 무언가 못 해 주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서 아기가 착하게 구는 것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싶어 하는 건, 사랑을 달라고 말하는 건 아닌지. 조금 두려웠던 것 같다.
차라리 아기가 제멋대로에 예민하고 말을 안 들으면 이런 마음이 들지 않을 텐데, 윤서경이 말했다. 당신과 내 아이면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축 처진 유온에게 입을 맞춘 뒤 윤서경은 아이를 방에 눕히려 들어갔다. 그 후엔 같이 저녁을 먹고 거실에 앉아서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미처 그에게 보내지 못했던 사진을 같이 보았다. 아기가 운 것보다 혼자서 일어나 앉았다는 게 생각해 보니 훨씬 큰 사건이었다.
윤서경의 가족들에게 사진을 보내자 반응은 폭풍 같았다. 아직 아기가 기는 것도 제대로 못 본 어머니 외의 가족들은 빨리 시간을 내서 보러 가야 한다며 끙끙거렸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윤서경은 아직 마치지 못한 일을 하러 서재로 들어가고, 유온은 잠시 테라스에 나가 화초를 돌보았다. 한참 보다 거실로 돌아와 손을 씻고 나서 보니 집 안이 유달리 조용했다.
아까 윤서경이 영인을 데려다놓았던 놀이방을 열어 보자 아무도 없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2층으로 올라가 영인의 침실을 연 유온은 그대로 문가에 서서 웃음을 지었다. 영인은 바닥에 깔아 둔 매트 위에 작은 이불을 덮은 채 자고 있었고, 그 옆에서 영인을 팔 안에 둔 채 윤서경도 잠들어 있었다.
왠지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온은 문틀에 손을 얹은 채 가만히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등 뒤로 문을 조심스레 닫고 다가갔다. 깊이 잠들었는지 자신이 다가가도 둘 다 깨지 않았다. 매트 위에 앉은 유온은 영인의 옆에 조심스레 누웠다. 가까이 몸을 붙이자 이마에 윤서경의 손끝이 닿았다.
그 따뜻한 손에 이마를 댄 채로, 영인의 동그란 배 위에 손을 올리고, 유온도 깊고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