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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현자는 죽고 싶어-77화 (77/106)

대현자는 죽고 싶어 77화

형식적으로 일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주어진 업무도 꽤 본격적이었다.

왕정이 무너지고 왕궁을 다른 목적으로 개조 중이라, 에델라이드가 지내는 거처는 한 국가의 지도자가 머무는 곳이라고 하기엔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규모가 큰 편인 로베인 황궁에 비하면 말할 것도 없이 작았고, 보안이 조금 더 철저하다는 걸 제외하면 에델라이드가 쓰는 방이나 그 아래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이 쓰는 방이나 크기는 엇비슷했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안정됐지만, 당신한테 의견을 좀 구하고 싶어. 어쨌든 당신이 대현자라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으니까.”

이르커스 생각이 안 나게끔 서류 지옥에 빠트려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농담이 아니었나 보다.

아틀리에 꼴이 엉망이라 충동적으로 날 데려왔다는 에델라이드의 말과 다르게, 이미 많은 것이 준비돼 있었다.

나를 반갑게 맞이해 준 건 대부분 국정 관련 서류였다.

다 읽어 보고 꼼꼼하게 분류해 달라며 돌아서는 에델라이드를 보니, 테리즈가 참 손녀 하나는 끝내주게 비양심적으로 키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얘는 이런 걸…… 뭘 믿고 나한테 보여 주냐.”

입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일이 떨어지면 무의식적으로 처리하고 마는 나의 노예 시절 습관 때문에 침대에 눕기도 전에 서류를 좀 훑어봤다.

진짜 중요한 안건은 외부인인 내게 보여 주지 않았겠지만, 외부에 유출돼서 좋을 것 하나 없는 내용이 이미 충분히 내 손에 쥐어진 상태였다. 꼭, 일부러 보여 주기라도 한 것처럼.

[아자젤 카르만, 15세.

최근 기사가 되기 위해 아카데미에 입학함.

노먼의 사생아.

모친은 사망한 것으로 보임.]

다른 정보는 몰라도, (전)카만 왕족의 남은 핏줄이 어디에 있는지는 내가 알아서 좋을 것 없을 텐데.

????????????

“이르!”

마리아가 저 멀리서부터 뛰어와 이르커스를 꽉 끌어안았다. 황족의 체통이고 뭐고 찾아볼 수 없는 애정 표현이었다.

이르커스는 기습적으로 튀어나와 저를 껴안는 마리아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려 주었다.

다행히 이제 황녀도 아닌 자와 격의 없이 지낸다며 목 뒤를 붙잡고 쓰러질 귀족 대신, 마리아만큼이나 격의 없는 트리스탄만 이르커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바깥에서 오래 서 있던 건지, 이르커스를 붙잡은 마리아의 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돌아왔으면 안에서 기다리지.”

“됐어. 바쁜 사람 왔다 갔다 하게 하느니, 한가한 내가 기다리는 게 낫잖아.”

“이번 방학이 지나고 나면 졸업이던가?”

“그래. 이제 정식 기사 서임이 코앞이야. 서임을 못 받게 되면 트리스탄을 졸라서 용병단에 들어가도 되고.”

“우리 용병단 입단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아?”

“내가 조르면 해 줄 거면서 튕기지 마, 트리스탄.”

형제의 반역 때문에 직위를 잃은 뒤에도 마리아는 퍽 잘 지냈다. 아카데미도 자기가 원하는 곳을 찾아 입학했고, 검술 실력도 나날이 눈에 띄게 늘었다. 스스로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보통 귀족 자제들이 많이 다니는 아카데미가 아니라, 수련생의 절반은 용병이 되고 나머지 절반이 간신히 기사가 되는 평민 대상의 아카데미에 입학한 건 확실히 파격적이었다. 폐위됐다고 해도 전 황족이 이런 결정을 한 건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었으니까.

이르커스는 마리아를 향해 쏟아지는 원색적인 비난과 황실의 위신을 더럽힌다는 귀족들의 반발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마리아의 아카데미 입학은 그렇게 오래 화두에 오르지도 못했다. 이후 이르커스가 ‘대현자가 상대가 아니라면 결혼할 생각 없다’라는 폭탄을 던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카데미 생활은 할 만해? 처음엔 힘들다고 울었잖아.”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야. 지금은 거기가 오히려 내 집 같지. 황궁보다 더 익숙해. 친한 애들도 많고, 후배랍시고 날 따르는 애도 있어.”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나중에 소개해 줄게.”

마리아는 멋쩍은 듯, 위로 올려 묶은 금발 머리만 매만졌다.

만일 이르커스가 마리아의 검술 스승이 되기를 자처하지 않았더라면 마리아는 일찍이 기사의 꿈을 접었을 것이다.

어쨌든 마리아에겐 타고난 출신 성분이 있었고, 친남매인 라단타가 황제가 된다고 하더라도 기사보다는 국제 외교용 결혼 수단으로써 더 효용 가치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할 말이 있는데……. 어머니 쪽에 라단타가 찾아왔어.”

“그래?”

“어머니는 조용히 살고 싶어 하셔. 만약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건 어머니 뜻은 아니야. 내 말이 무슨 의미인 줄 알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반역으로 몰지 않을 거야.”

이르커스는 마리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라단타와 마리아는 친남매인 탓인지 서로를 꼭 찍어 낸 것처럼 닮아 있었다. 성격도 야망도 다른데, 얼굴만큼은 비슷했다.

마리아의 걱정과 별개로, 라단타가 다시 세력을 구축하고 황궁으로 돌아온다면 이르커스에게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지금 황궁에 문제가 생긴다면 유안은 별수 없이 자신의 곁으로 돌아올 테니까. 강제로 붙잡아 끌어오지 않아도 라단타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유안은 결국 로베인에 다시 돌아올 터였다.

“라단타가 다시 자기 자리를 찾겠다고 그러면, 넌 말리지 마. 그냥 모르는 척 있어.”

“…….”

“한 핏줄이니까 마음이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그냥 둬. 죽음을 향해 내달리는 사람은 아무리 붙잡아 봤자 소용없으니까. 스스로 방향을 틀기를 기다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거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르커스는 유안을 생각했다.

에이사와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한네만이 유안의 카만 입성을 알린 게 며칠 전이었다. 에델라이드는 다행스럽게도 이르커스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었고, 유안은 이제 남쪽 숲보다 더 빼 오기 쉬운 카만에 자리를 잡았다.

“이르는 어떻게 그렇게 모든 일에 초연해?”

마리아가 물었다.

마리아의 눈에 이르커스는 가끔 비인간적으로 보였다. 제게 잘 대해 주는 것과 별개로 욕심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으니까.

다른 이들이라면 목숨 걸고 매달릴 황위에도 미련이 없어 보였고, 주기적으로 귀찮게 굴던 마탑을 박살 낸 뒤에도 기뻐하지 않았다. 대현자를 봉인했던 마탑주가 죽어 버렸는데도 그 죽음에 대해 어떤 감상도 내비치지 않았고.

평범한 인간이 이렇게 초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마리아가 보기에 이르커스는 어딘가 결핍된 사람 같았다. 황제라는 자리에 오른 뒤에도 그 결핍은 깊어지기만 할 뿐, 나아질 기색이 없었다.

마리아는 여전히 이르커스를 좋아했지만, 이르커스에 대한 인간적인 호감과는 별개로 가끔 그가 자신과 같은 인간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꼭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는 사람 같아.”

“내가?”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배다른 형제가 다시 반역을 준비할 거라는 소리를 듣고, 그렇게 초연할 수는 없는 거잖아.”

이르커스는 마리아의 말에 고개만 내저었다. 초연하다는 표현은 이르커스가 생각하기에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뭔가를 갈망하는 것으로는 이르커스 역시 황위에 집착하는 라단타 못지않았다.

“나만큼 명확하게 바라는 게 있는 사람도 드물 텐데.”

라단타에게 시간이 얼마나 더 필요할지를 셈하며, 이르커스는 마리아로부터 몸을 돌렸다.

????????????

“그때 알았지. 이런 사랑, 다신 내게 없다.”

“진짜 꼴값이다.”

“뭐야, 대현자. 당신이 먼저 물어봐 놓고.”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로맨스는 궁금할 수밖에 없잖아.”

카만에 온 뒤로 일이 너무 바빠, 무기력증이 강제로 회복되었다. 우울한 마음과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를 과로로 극복하다니. 어떻게 보면 이거야말로 제정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확실히 이르커스 생각이 덜 들긴 했다.

남쪽 숲에 처박혀 있을 때는 길버트 말고 잔소리하는 존재가 없었는데, 카만으로 오니까 주기적으로 잔소리하러 오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가만히 앉아 쏟아지는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다 보면 자연스레 생각할 시간이 부족해졌다.

이졸데는 그 잔소리꾼 중 하나였다.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이졸데와 트리스탄은 아주 판박이였다. 사기 절대 안 당할 거 같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트리스탄이 이졸데라고 할 수 있다.

용병단 일 때문에 바빠 죽겠다고 투덜대면서도 이졸데는 주에 두세 번씩 날 찾아왔다. 남편의 지난 로베인 생활을 생생하게 듣고 싶다는 게 그 이유였다.

원거리 부부여서 서로 좀 서먹해졌을 줄 알았는데, 부부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있어야 금실이 좋다는 게 사실인지 두 사람은 나이를 꽤 먹은 지금까지도 신혼처럼 아주 열정적으로 불타오르는 중이었다.

“받은 건 열어 봤어?”

“받은 거?”

“테리즈 유품 말이야.”

“아, 맞다.”

남의 연애 및 결혼 얘기를 너무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던 나머지, 테리즈가 내게 남긴 물건과 편지에 대해 싹 잊어버리고 말았다.

에델라이드가 이 사실을 안다면 카만 국경에 나를 효시해 버릴지도 몰랐다. 나는 이졸데에게 절대 에델라이드한테는 이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완전히 까먹고 있었네.”

“당신은 영리한 건지, 허술한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네.”

“둘 다지, 뭐. 사람이 어떻게 한결같겠니. 무단 횡단하면서 쓰레기 줍는 게 인간인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

“당신은 이상한 소리를 너무 많이 한다니까.”

내가 수재인 건 맞지만, 물건 좀 까먹고 다닐 수도 있지.

테리즈에게 속으로 미안하다고 세 번 정도 사과했다. 당장 저승 갈 방법이 없으니까, 사과도 원격으로 해야 했다.

“에델한테 내가 네 앞에서 편지 열어 봤다고 말하지 마.”

“안 말해. 읽을 거면 빨리 읽어.”

“트리스탄한테도 말하지 마.”

“알겠다니까.”

이졸데와 트리스탄의 러브 스토리를 들어 본 바, 이렇게 말해도 이졸데는 트리스탄한테 오늘 일을 다 털어놓을 게 분명했다. 남편한테 보내는 편지에 ‘자기야~ 우리 여보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용~’이라고 적으면서 그 아래로 ‘대현자 진짜 허술함’이라고 적겠지.

하지만, 생각난 지금 당장 편지를 열어 보지 않는다면 또 까먹을 것 같았다.

이건 다 에델라이드 탓이다. 그러기에, 누가 일을 이렇게 많이 시키래? 서류를 너무 봐서 네 할머니가 준 편지를 완전히 까먹고 있었잖아.

닿지 않을 투덜거림을 속으로 삼키고, 밀봉된 편지를 레터 나이프로 조심스럽게 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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