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자는 죽고 싶어 76화
테리즈가 내게 남긴 상자 안에는 편지 한 통과 열쇠 꾸러미가 들어 있었다. 에델라이드에게 이 열쇠는 뭐냐고 물어봤지만, 에델라이드도 모르는 눈치였다.
질투 나니까 테리즈의 편지는 혼자 있을 때 읽어 보라는 에델라이드의 성화에 못 이겨, 나는 다시 편지와 열쇠 꾸러미를 다시 집어넣고 상자 뚜껑을 닫았다.
“대현자님. 저, 뭐 물어봐도 돼요?”
“뭔데?”
“여기서 그간 어떻게 지내신 거예요? 대현자님은 나무 정령이 아니라, 일단은 인간이잖아요. 게다가 이제 마법도 못 쓰시고…….”
“그러게 말이다. 안 죽는다고 막 살기엔 주변이 너무 폐허인데.”
“나무 열매만 주워 먹고, 내내 누워 있다가 자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면서 그냥 살았어.”
나무늘보도 나보다는 활동적이겠지.
내 말에 세 사람의 얼굴 위로 각기 다른 표정이 떠올랐다. 각각 경외, 한심함, 안타까움이었다.
나는 대놓고 나를 향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는 에델라이드로부터 등을 돌려 누웠다.
“난 마저 누워 있을 거니까, 너희도 볼일 다 봤으면 그만 가 봐.”
“제가 정리라도 좀 해 드리고 갈까요?”
“괜찮아. 어차피 좀 자고 일어나면 금방 또 온실처럼 풀 자라 있더라. 그냥 놔둬. 자연 친화적인 삶을 추구하려고.”
“애도 없는데 대현자를 보니까 출가해서 엉망으로 사는 아들내미 보는 것 같네.”
“대현자가 아마 당신 선조의 선조의 선조 격이겠지만…….”
길버트가 혼자서 잔소리할 때도 귀찮았는데, 세 사람이 달라붙어 말 한마디씩 얹으니까 세 배로 정신이 없었다.
“데인이라고, 성격 나쁜 물푸레나무 정령이 너희 다 내쫓으래.”
나는 슬그머니 데인을 들먹이며 축객령을 내렸지만, 에델라이드 일행은 다들 할 일도 없는지 볼일도 다 봤으면서 갈 생각을 안 했다.
가만히 앉아 인간들을 구경하는 길버트를 역으로 구경하는 에이사와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자란 넝쿨을 쥐고 식용인지 아닌지, 자기 입에 넣고 보는 이졸데를 보고 있자니 기가 다 빨리는 기분이었다.
“왜 그렇게 무기력해진 거야?”
“나 진짜 많은 일이 있었어, 에델.”
“그래 보여.”
“앞으로 한 20년은 더 무기력하게 살아도 될 것 같아.”
“헛소리 말고 일어나라.”
내 한탄에 공감해 주는 것처럼 보였는데. 에델라이드는 많은 일이 있었다는 내 처연한 말에도 내 팔을 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기계 팔을 달고도 힘이 아주 장사였다. 붙잡힌 팔이 빠져, 어깨가 탈골될 뻔했다.
“너, 여전히 힘세구나.”
“우리 집 내력이야. 알면서.”
“팔 빠질 것 같으니까 놔주면 안 되니?”
“놓으면 도로 누울 거잖아. 내가 한심해서 진짜…… 가만히 봐줄 수가 없다. 당신 이러는 거, 이르커스 때문이지?”
“……뭐야. 왜 다들 대충 내 심란함의 원인을 바로 파악하는 거야?”
“당신한테 이르커스 말고 있는 게 없는데, 못 파악하는 것도 문제 아니야? 내가 트리스탄도 아니고…….”
에이사와 이졸데가 각기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이졸데는 무슨 넝쿨을 잘못 삼킨 건지 컥컥거리고 있었고, 그런 이졸데를 에이사와 길버트가 둘러싼 채로 관찰 중이었다.
저 둘 귀에 괜히 에델라이드와 내 대화가 들어가서 좋을 것 하나 없었다. 이졸데는 트리스탄의 부인이고, 에이사는 한네만의 동생이니까. 정보가 샐 구멍이 너무 많았다.
“나도 내가 지금 한심하게 구는 거 아니까, 그런 표정으로 그만 쳐다봐.”
“뭐가 문젠데?”
“이르커스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도 날 좋아하는 거.”
에델라이드의 질린 표정은 더욱 냉담해지기만 할 뿐,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간 마녀들의 망한 사랑 상담 지겹도록 들어 줬는데, 왜 내 망한 사랑은 아무도 진지하게 상담 안 해 주려고 하지? 세상은 너무 불공평했다.
“이렇게 늘어져 있을 거면 그냥 받아 줘. 당신, 나이도 많으면서 연애하는 거 처음도 아닐 거 아냐.”
“…….”
“……설마, 처음이야? 그 나이 처먹고?”
나이 먹었다고 연애를 꼭 해야 하나?
누가 날 좋아한 적은 종종 있었지만, 여러 이유로 연애 같은 건 할 수 없었다. 서로를 책임질 수 있는 관계 맺기……. 말이야 쉽지, 자세히 뜯어보면 시간과 감정을 잔뜩 소모하는 일 아닌가.
나태하게 지낸다고 여유가 있는 건 아니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한테 연애 같은 건 사치나 다름없다.
특히나 내게 관심을 드러내는 상대가 대부분 나보다 초절정 연하였다. 그러다 보니 나의 유교 자아가 ‘이 나이 차이는 인정할 수 없어!’ 하고 뛰어나간 탓에, 누가 고백을 해도 끝까지 모른 척 넘어갔다.
내 기억 속 예카리나의 마지막이 너무 비참했기 때문에, 누군가의 애정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안 돼 있기도 했다.
나는 보답을 바라지 않고 사랑을 퍼 주던 마녀들의 결말을 아니까.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봤고, 예카리나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의 장례도 종종 직접 치렀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내 손으로 사랑 때문에 요절한 이들의 무덤을 세웠다 보니 ‘사랑’이라는 단어만 봐도 한숨부터 나왔다. 그냥 ‘이 미친 짓을 나까지 해야 할까?’라는 의문이 절로 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 긴 세월 동안 수절하고 살았다. 나이 차이 때문이 아니라도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었던 데는 수많은 이유가 있었는데, 종족이 다른 상대에게 고백 받았을 때는…… 정말 아찔했다. 날 좋아해 줘서 고맙긴 한데, 상대가 드래곤이었기 때문이다.
성격 차이로도 헤어지는 커플이 널리고 널린 세상에서 종족 차이를 극복하고 사랑을 시작하는 건 더욱이 어려웠다.
종족이 다르면 생활 반경도 다르고, 세상을 보는 관점도 다르다. 무엇보다 그 드래곤이 내 몇 없는 동년배 친구였기 때문에 괜히 묘한 관계로 발전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발전했더라도 몇 년 못 갔을 것이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나타나 그 드래곤의 목을 베어 갔으니까. 역시, 사랑은 미친 짓이다.
“불멸자인데 어떻게 필멸자를 사랑하니?”
구구절절 내가 그동안 연애를 못 해 본 이유를 설명하기가 어려워, 나는 그냥 가장 큰 이유만 툭 던졌다.
내 말에 에델라이드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전에는 그래도 저렇게 사람 깔보는 표정은 못 지었는데, 지금은 아주 기막히게 잘 짓는다. 눈으로 욕하는 건 언제 배운 거람.
“이르커스는 사랑하잖아.”
“……아닌데?”
“됐어. 당신이 혼자서 땅 파고, 자기 마음을 갉아먹든 말든 내 알 바는 아니지.”
에델라이드가 드디어 붙잡고 있던 내 팔을 툭 놨다. 하지만 전과 달리 도로 누울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두 명이 말하면 그냥 짐작일 뿐이지만, 세 명 이상이 같은 말을 하면 그건 보통 사실이다.
“네가 보기에도 내가 이르커스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여?”
“사랑하지 않으면 당신 성격에 도망까지 쳤을까? 이르커스가 상처 받든 말든, 옆에서 빨리 죽여 달라고 주문이나 외웠겠지.”
“…….”
“불멸자가 필멸자를 사랑하지 못할 이유는 없어.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 이유를 따지려고 들었으면 인간은 진작 멸종했을걸. 인간은 이유를 가지고 동족을 사랑하는 것보다 혐오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
에델라이드가 드디어 삼켰던 식물을 뱉어 내고 정신을 차린 이졸데와 그 옆에서 손뼉이나 치고 있는 에이사를 불렀다. 이제야 카만으로 돌아갈 모양이었다.
나는 어서 가 버리라며 에델라이드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던 것도 사실이고, 혼자 있을 때보다 시간도 잘 갔지만, 자꾸 정곡을 찌르는 상대는 지금으로선 길버트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대현자.”
“왜.”
“당신도 카만으로 가자.”
하지만, 에델라이드는 순순히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 옆으로 온 이졸데와 에이사가 각각 다른 방향에 서서 나를 에워쌌다. 나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로 둘에게 양팔을 붙들렸다.
“당신 이렇게 폐허에서 한심하게 지내는 꼴, 두 눈 뜨고 못 보겠어. 따라와.”
“잠깐…….”
“잠깐은 무슨 잠깐이야. 당신, 방금 나한테 고용됐어.”
“내 의사는?”
“내 알 바니? 이러고 사느니 와서 일 좀 해. 당신은 할 일이 많아야 생기가 돌잖아.”
할 일이 많아야 생기가 도는 건 그냥 한국인 종특 같은 건데…….
몸을 비틀어 봤지만 이졸데를 뿌리치는 건 불가능했다. 에이사는 신이 나서 내 속도 모르고 ‘저희 또 같이 일하게 됐네요!’ 하고 발랄하게 외치기만 했다.
마지막으로 길버트를 향해 날 카만으로 보내지 말라고 허우적거렸지만, 길버트는 이미 망가진 아틀리에 문까지 미리 열어 주는 친절만 발휘했다.
뭐야. 우리, 친구라며? 앓던 이가 빠진 인간처럼 속 시원하게 날 보내는 길버트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길버트는 쿨하게 나를 내쫓았다. 사람 돼서 돌아오라는 말은 덤이었다.
카만, 다시는 안 갈 거라고 했는데…….
인생사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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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지내면 돼. 침대도 있고, 식사도 나오고…… 그 무너져 가는 아틀리에보다는 훨씬 낫잖아.”
“나, 정말 일해?”
“당연하지. 먹여 주고 재워 주는데 공짜일 것 같아?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안 먹어도 되는데…….”
“일하지 않는 자, 죽지도 말라.”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나는 가혹한 소리를 지껄이는 에델라이드의 단호한 얼굴을 처연하게 바라보았다.
나의 한국인 자아가 ‘그래도 일 없는 것보단 일 있는 게 낫지 않나?’라고 자꾸 고개를 들었지만, 웬만하면 편하게 뒹굴뒹굴하고 싶어 하는 대현자 자아가 내 한국인 자아를 내리눌렀다.
“나, 이제 마법도 못 쓰잖아.”
“마법 못 써도 잡일 처리 잘하잖아.”
“진짜 부려 먹으려고?”
“그럼 가짜도 있어? 이럴 시간에 서류 한 장을 더 봤으면 퇴근이 5분은 빨랐겠다.”
에델라이드가 날 이런 식으로 고용할 줄은 몰랐다. 이렇게 이력서 한 번 안 내고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특채당해도 되는 건가? 내전 직후에 갈 데 없어지면 카만 와서 일하라고 했던 건 맞지만, 그게 진담이었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