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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이슈
우크라이나, 러시아, 일본 정부의 안티 라디오 구매 조건은 간단했다. 한마디로 물건이 아니라 기술 자체를 구매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이거 너무 무리한 조건이군요.”
성진은 딱 잘라 말했다.
회장인 성진의 의중이 내려지자 주변에 모인 간부들도 조금씩 입장을 표시했다.
“회장님. 하지만 상대는 정부 차원에서 입장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일개 기업인 저희로서는 굉장히 어렵지 않을까요.”
박윤호 상무는 비관론을 내밀었다.
성진은 그런 의견을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2인자격인 박윤호의 업무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성진이 의견을 표시하면 그에 반대되는 무언가를 주장하는 것. 그 과정에서 의견이 환기되고 반대의견을 가진 직원들이 조심스럽게나마 주장을 할 수 있다.
때문에 박윤호는 거의 무조건적으로 성진의 의견과 반대되는 말을 우선적으로 꺼내는 편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국가를 상대로 하는 입장이 되면 상당히 어렵습니다.”
다른 직원들도 조금씩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다들 국가, 그것도 강대국 정부들의 요구를 일개 기업이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이었다.
성진은 웃으며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아니, 그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저희는 일개 기업입니다.”
“기업이면 무조건 정부 말을 들어야 합니까? 그건 아닐 텐데요.”
“회장님. 저희 제품을 사갈만 한 대상은 각국 정부뿐입니다. 이건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닌 거 같습니다.”
“가볍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
성진은 단호했다.
“여러분. 속된 말로 쫄지 맙시다. 우리 물건을 사 갈 대상이 각국 정부라구요? 제값에 제대로 된 가격을 주고 사 가야 손님 대접을 받는 법입니다. 밑천까지 다 내놓으라고 큰소리치는 강도들을 손님 대접해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성진의 말에 임원들 몇몇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회장님. 그렇다면 복안이라도 있으십니까?”
“뭐 복안이랄 게 있겠습니까. 외국 정부가 힘없는 일개 기업한테 횡포를 부리는데 우리도 우리나라 정부한테 요청해야죠. 그게 세금 내고 사는 이유 아니겠습니까?”
“허어…….”
그 말에 임원들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도무지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을 한 임원 한 명이 성진에게 물었다.
“우리나라 정부가 정말 우리 편을 들어줄까요?”
강대국들 앞에서는 사실 약한 모습을 많이 보여 온 대한민국 정부다.
그런 만큼 마음 한구석에 약간의 불안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는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성진이 임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다가 말석에 앉아 있는 장희원 부장을 쳐다봤다.
한국무역공사에서 파견된 형태로 있는 그는 사실 임원들 사이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미묘한 위치였다.
때문에 회의에서도 별다른 언급 없이 있던 그는 미동도 않고 성진의 눈빛을 받아내더니 곧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 미묘한 교감을 눈치챈 다른 임원들이 쳐다봤지만 두 사람은 찰나 간 눈빛을 계속 교환했다.
곧 성진은 조그마한 미소를 짓고 회의를 마무리했다.
“정부에 정식으로 요청하겠습니다. 이번 거래에 대해 외교적으로 힘을 실어달라구요. 일단 대응은 이렇게 하기로 하고 이번 회의는 마치도록 하죠.”
“예. 회장님.”
다들 미덥지 못하다는 반응이었지만 성진의 고집을 꺾기에는 자신들이 딱히 내세울 만한 대책도 없다.
순순히 회의장을 나가는 임원들에게 성진이 한 마디를 던졌다.
“장 부장님은 남아 주십시오.”
“저 말씀이십니까?”
이제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장희원 부장이 성진을 보며 반문했다.
“예. 장 부장님.”
“음……. 알겠습니다.”
결국, 다시 장희원 부장을 앉혀둔 성진은 모두가 나가고 단 두 사람만이 남은 회의실에서 질문을 던졌다.
“처음에 무역공사에서 장 부장님이 파견되셨을 때는 열정적인 무역맨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예. 저 무역맨 맞습니다.”
장희원 부장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지긋이 미소 지을 뿐이었지만 성진은 사념 해석을 통해 심리 상태를 고스란히 읽고 있었다.
‘정보기관 요원이라는 걸 까마득히 몰랐군.’
무역공사의 파견 직원으로서 정부와 업무 협력을 위해 파견되었다는 명분으로 들어온 사람이었다.
처음에 지나치게 열정적으로 성진의 신기술을 찬양하는 것은 결국 위장이었다.
성진도 열변을 늘어놓는 그 모습에 깜빡 넘어가 순수한 무역맨으로 생각할 뻔했지만 경계를 늦출 수 없어 사념 해석을 종종 사용해 속내를 파악한 지 오래였다.
성진은 지그시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왜 이러십니까. 저는 장희원 부장님이 절대 순수한 무역맨이 아니라는 거 다 알고 있습니다.”
“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끝까지 시치미를 떼는 장희원을 보며 성진은 또박또박 말했다.
“정보기관 요원이시지요? 알아보니 이력서의 경력은 진짜더군요. 해외 무역주재원으로 근무해 온 이력. 아마 무역상사 직원으로 위장해서 임무를 수행해오셨겠지요.”
“허헛.”
장희원은 헛웃음을 짓더니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무슨 어이없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시치미는 그만 떼세요.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이건 절대로 농담하는 것도, 떠보는 것도 아닙니다.”
성진의 단호한 눈빛을 읽은 장희원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
한숨을 내쉰 장희원은 성진을 보며 웃었다.
“더 이상 버티면 싸울 거 같군요. 저희로서는 한성진 회장님과 최대한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은 생각이니 이쯤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야말로 어떻게 된 영문인지 여쭤보고 싶네요.”
성진은 말투에서부터 불쾌감을 표시했다.
정체를 숨긴 채 성진의 회사로 파견 나온 것은 분명 무례한 일이다.
더욱이 정보기관 요원이라면 어떻게 보면 민간인 사찰로 비화될 수도 있다.
“불쾌하신 모양이군요. 이해합니다. 안 좋은 생각을 하실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만 저희로서는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만한 기술에 대해 최선의 보호조치를 취한 겁니다.”
“보호조치요?”
“예. 회장님께서 저희 국정원의 보안 제의를 거절하셔서 부득이 이런 수법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혹시 일전에 제가 한 회장님 앞에서 방사능 제거 기술에 대해 칭찬했던 거 기억나십니까?”
“예. 당연히 기억납니다.”
그때 장희원은 성진의 앞에서 방사능 제거 기술이 미칠 영향과 가치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놨다.
“탁월한 위장이셨습니다. 저도 하마터면 경계를 늦출 뻔했어요.”
“허허 위장 목적도 있었습니다만 그거 전부 진심입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린 것도 아니고 임무 투입 전에 관련 전문가들에게 들은 설명을 그대로 말씀드린 겁니다.”
“관련 전문가들이라면?”
“예. 저희 기관과 정부의 경제, 기술 전문가들은 한성진 회장님이 보유하신 방사능 제거 기술의 경제가치가 이 나라의 국운을 뒤바꿀 정도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정말입니까?”
그 말에 성진은 약간 솔깃했다.
정부의 협력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 정도로 성진의 기술을 고평가한다면 일이 쉬워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두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제가 이래 봬도 신분을 위장한 블랙 요원 중에서는 경력과 직급이 꽤 높은 편입니다. 제가 투입될 정도라면 이 기술, 나라에서는 대단히 높이 평가하는 게 분명합니다.”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하는 말이었지만 그만큼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말투였다.
성진은 그의 말이 전부 진실이라고 믿지 않았다.
사념 해석을 통해 그가 정보기관 요원임을 알아차렸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일반인에 비해 사념 해석이 어려웠다.
정확한 정보가 나오지 않고 자꾸만 어그러졌다.
성진은 그가 스스로의 감정이나 중요한 정보를 통제하는 정신적인 훈련을 받았을 거라 짐작했다.
이런 종류의 인간을 완전히 신뢰하는 건 자살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흠. 이거 그럼 내가 떡밥을 던져볼까.’
성진은 신중하게 마음을 고르며 말했다.
“좋습니다. 나라에서 그만큼 제 기술을 높이 평가해준다면 기쁜 일이죠. 그렇다면 최근의 외국 정부가 해 온 제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술 자체를 넘겨달라는 제안 말입니다.”
장희원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한마디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낚시죠. 그냥 찔러나 보는 겁니다.”
“낚시라…….”
“예. 그냥 떡밥을 던지는 거죠. 진지하게 반응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그냥 한성진 회장님의 협상 역량을 보려는 겁니다. 그리고 다른 상황도 살피겠죠. 특히 우리나라 정부가 한성진 회장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나 보려는 거지요.”
“음. 어떤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말씀하십시오. 가능한 한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그 말에 씨익 웃은 성진은 가볍게 말을 던졌다.
“대통령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예?”
장희원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아니 그게 지금……. 무슨…….”
“정부에서 정말 제 기술에 국운이 달렸다고 생각한다면 빠른 시일 내에 대통령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저는 이도 저도 아닌 거 싫습니다. 미적지근하게 말로만 도와준다 하지 마시고 확실하게, 화끈하게 그렇다 아니다 하길 바랍니다.”
“저……. 한 회장님. 그건 제가 약속드릴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난처해하는 장희원 부장을 보면서 성진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확실하게 전달만 해 주십시오. 빠른 시일 내에 대통령을 만나게 해 달라구요. 그게 아니라면 전 정부 지원은 포기하고 최대한 제 기술을 비싼 값에 팔아넘길 궁리를 해야겠습니다.”
폭탄 발언이었다.
사실 까놓고 보면 무례한 어깃장이다.
하지만 생떼를 쓴다고 해도 성진이 말하는 사항을 장희원은 가볍게 대하지 못했다.
당황, 당혹.
그 찰나의 흔들리는 빈틈을 노리고 성진은 사념 해석을 걸었다.
적어도 그의 마음 안에서 벌어지는 고민은 확실히 느껴졌다.
‘적어도 아주 거짓말은 아닌 거 같긴 한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속내를 간파당한 장희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말씀은 전해 올리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기대는 말아 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안 된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요. 되도록 정부 차원에서 원활한 협조가 있었으면 합니다.”
“예.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