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회: 4권 - 003. 어머니라는 존재 -->
검정고시를 공부하면서도 영식은 계속해서 성진 부모님의 가게 일을 도왔다.
저녁이 훨씬 지나고 집에 들어온 영식은 언제나처럼 대입 검정고시용 참고서를 꺼내들었다.
“녀석, 참. 당분간은 일 쉬래도 그러네.”
성진이 만류해도 영식의 입장에서는 그만둘 수 없는 일이었다.
“에이. 제가 밥벌이 정도는 해야죠.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나중에 실컷 부려먹어 준다니까 그런다. 지금은 그냥 검정고시에만 신경 써.”
성진은 그런 영식이 대견하면서도 여전히 마음이 쓰였다.
“아니에요 형. 가게는 계속 나올 거예요.”
마음을 돌리지 않는 영식을 보고 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영식은 이런 방식으로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건지도 몰랐다.
“그래. 네 생각이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영식의 마음을 헤아리기로 한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내일은 주말이니까 미란 씨네 집에 한번 가보자.”
“미란이 누나네요?”
“응. 집이 어딘지 알고 있니?”
“예. 가게 근처에요. 제가 알고 있어요.”
“그래? 그러면 오늘 푹 쉬고, 내일 미란 씨네 집에 한번 가보자. 괜찮니?”
“저야 언제든 상관없죠.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뭐 꼭 일이 있다기보다도…… 얼굴이나 보려는 거지 뭐.”
성진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사실 미란을 만나려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미란의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어서 인공지능 팔찌의 힘으로 치료에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보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점은 따로 있었다.
‘그때 미란 씨가 눈물을 보였던 거 같은데…….’
성진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신경 쓰이는 장면이었다.
미란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성진이 미란과 단둘이 만나면 더더욱 어색해지기만 할 거 같아 영식과 동행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럼 내일 점심때쯤에 미란 씨네 집에 찾아가자. 연락은 네가 해줘.”
“예, 형. 그럼 제가 내일 아침에 전화할게요.”
“그래.”
성진은 영식의 공부를 잠시 봐주다가 저녁 일찌감치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독 미란의 표정이 뇌리에 자꾸만 떠올랐다.
“후우. 이것 참…….”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성진은 생각을 떨쳐내려 애써 잠에 빠져들었다.
* * *
다음날 미란에게 전화를 건 영식은 키득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누나가 좋아하는 거 같은데요.”
성진의 눈치를 보는 영식이었다.
자신을 놀리려는 마음이 뻔히 보였지만 성진은 잠자코 모르는 체 했다.
“그래? 오랜만에 만나려니 반가운가 보네.”
“에이, 아니죠.”
영식은 능글맞게 웃으면서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짜식이.”
성진은 그런 영식을 단호하게 응징했다.
손을 뻗어서 영식의 머리를 세차게 문질러대자 영식이 엄살을 피웠다.
“으앗! 혀, 형! 아파요! 으아앗.”
허둥대면서 성진의 손아귀를 빠져나간 영식이 비명을 질러대며 도망쳤다.
“하핫. 그러게 왜 까불어?”
성진은 작게 웃으면서 말했다.
“빨리 옷이나 갈아입어. 나가야지.”
“예에, 형.”
“참. 이거 선물이라도 하나 들고 가야 할 거 같은데. 괜찮은 거 없을까?”
“어. 선물이요? 글쎄요…….”
영식은 마땅한 선물이 안 떠오르는지 난처해하는 기색이었다.
“으음.. 미란 씨나 미란 씨 부모님들이 좋아하시던 거 없었어?”
“아. 누나랑 누나 어머님이 과일을 좋아하셔서요. 과일이라도 사갈까요?”
“어머님이 편찮으시다던데 과일 드실 수 있어?”
“아…… 그, 그러네요.”
영식이 고개를 긁적거렸다.
한참 골똘히 생각하던 성진이 피식 웃었다.
“까짓것 다 사면 되잖아. 과일이랑 고기 세트, 꽃도 사가자. 다 무난하니까 하나는 걸리겠지 뭐.”
“예. 제 생각에도 그게 괜찮은 거 같네요.”
영식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빨리 가자.”
“예 형.”
성진은 영식과 함께 집을 나섰다.
차를 모는 성진의 머릿속에 미란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다릴게요.”
성진에게 했던 미란의 말이 저절로 뇌리를 울렸다.
‘흠…….’
비록 성진이 잘못한 건 없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꽃은 미란 씨가 좋아하는 걸로 사자.”
“예, 형. 제가 알아요.”
영식이 자신 있게 나섰다.
“뭐? 야 그런 거 알면 미리 말했어야지.”
“헤헷. 막상 떠올리려니까 잘 안 떠올라서요.”
“그래. 그럼 일단 꽃집으로 가자.”
성진은 인공지능 팔찌가 위치를 나타내는 근처의 가까운 꽃집으로 차를 몰았다.
* * *
차에서 내린 성진이 꽃집으로 다가가자 안에서 꽃을 돌보고 있던 주인이 얼른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뭘 드릴까요.”
중년의 꽃집 여주인은 마저 하던 손질을 그만두고 성진에게 다가갔다.
“어떤 게 필요하세요?”
“예. 꽃을 선물하려고 하는데요.”
“아. 그러세요? 어떤 꽃으로 드릴까요.”
이번에는 보고 있던 영식이 얼른 나섰다.
“다알리아로 주세요. 빨간색으로요.”
“아. 붉은색 다알리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꽃다발, 꽃바구니 중에서 뭘로 하시겠어요?”
성진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꽃바구니로 해주세요.”
“예. 감사합니다. 누구한테 주실 거죠?”
“음…… 그게…….”
성진은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잘 아는 친구입니다.”
“아, 혹시 여자분?”
“하핫. 예.”
“예. 알겠습니다.”
여주인은 성진의 신용카드를 받아서 결제하고 즉석에서 꽃바구니를 만들어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다알리아가 주지만 주변을 장식하는 안개꽃과 풀잎 장식 등을 넣어서 보기 좋게 꾸며놓은 꽃바구니였다.
“감사합니다.”
“젊은 여자분이 좋아하실 만한 취향으로 꾸몄어요. 기분 좋으셔야 할 텐데.”
“예. 감사합니다.”
성진은 꽃바구니를 들고 영식과 꽃집을 나왔다.
“이거 좋아하는 거 정말 맞지?”
“그럼요. 옛날에 누나가 그랬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이 빨강 다알리아 선물받는 게 꿈이라구요.”
“뭐?”
영식의 말을 들으니 막상 다알리아를 선물하기가 부담스러워졌다.
‘그런 의미가 있었단 말이야?’
하지만 기왕 산 꽃바구니를 버릴 수는 없는 노릇.
“에이. 그래 알았다.”
성진은 다시 차를 몰았다.
* * *
미란의 집은 새하얀 벽돌로 쌓은 단독주택이었다.
미리 기다리고 있었는지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미란이 슬리퍼를 신고 뛰어나왔다.
“어서 와요. 성진 씨.”
한껏 밝은 표정의 미란이 대문을 열었다.
간편한 생활복 차림이었지만 옅은 화장을 한 미란은 뒤로 넘겨 질끈 묶은 생머리가 잘 어울리는 청순한 모습이었다.
성진은 가지고 있던 꽃다발부터 내밀었다.
“선물입니다.”
“어머 이건…….”
미란이 붉은색 다알리아를 알아봤다.
성진은 괜한 오해를 부를까 싶어 얼른 말을 보탰다.
“영식이가 미란 씨 좋아하는 꽃이 이거라고 해서요. 그래서 사왔습니다.”
“아아. 그랬구나…….”
약간 아쉬운 표정을 지은 미란은 옆에 있던 영식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고맙다, 영식아.”
“에이 고맙긴 누나. 내가 항상 누나 생각하는 거 알지?”
“으이구. 또 까분다.”
피식 웃은 미란이 꽃바구니를 들고 안으로 안내했다.
“들어오세요.”
“예.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간 성진은 곳곳의 깔끔한 살림 세간의 모습에 감탄했다.
검소한 세간이라 언뜻 눈에 띄지는 않아도 군데군데 여성적인 미란의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다.
“커튼 장식이 예쁘네요.”
“아아. 그거 제가 직접 만든 거예요.”
성진의 칭찬에 미란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