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회: 4권 - 002. 조직 경영 -->
식사를 마치고 혜영을 배웅한성진은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
오후에는 투자 유치를 요청한 사업자들과의 집단 면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사업 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발표가 있겠습니다.”
직원의 진행에 따라 차례대로 사업계획서를 들고 올라온 면담자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예. 먼저……. 제 사업계획은…….”
각자 자신이 준비한 ppt, 프린트물 등으로 참고 안내를 하도록 했다.
이것은 회사 내부의 아이디어 회의에서 채택된 방식이었다.
투자 면담 방식은 매우 독특했다.
모든 면담자 앞에서 각자의 아이디어나 사업적인 비전을 설명하게 하고, 각자 질문을 던지게 한다.
바로 이 부분이 관건이었다.
투자를 놓고 경쟁을 벌이기 때문에 서로 앞다퉈서 상대방의 사업계획의 단점을 귀신같이 찾아냈다.
간혹 상대방을 헐뜯거나 별 거 아닌 단점을 크게 부풀리는 경우도 있었다.
발표 능력이 능숙한 사람도 있고, 미숙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 자리는 그런 발표력만을 보려는 자리가 아니다.
성진은 그런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묵묵히 면담자들의 태도를 살폈다.
‘인성이든 능력이든 모두 드러내게 하는 데는 이만한 방법이 없지.’
성진은 말없이 뒤편에서 면담자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채점을 매겼다.
성진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뿜어지는 사념을 읽을 수 있다.
그런 인간의 마음은 격한 상황에서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때문에 이렇게 투자 요청을 한 면담자들을 모아놓고 서로 자유롭게 질문을 던지게 한 것이다.
물론 기밀 사항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스스로 노코멘트 할 자유가 있었지만 결국, 기밀을 유지한 채로 최대한의 비전을 어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차후 국제 시세 변동에 따라 큰 위기를 맞을 수 있는데 대책은 있으십니까?”
“그, 그것이…….”
날카로운 질문이 던져지면 준비가 미흡한 면담자들은 쩔쩔맸다.
반면에 머릿속으로 생각해둔 대답이 떠오르면서도 제대로 대답을 못하는 경우도 수두룩했다.
성진은 그런 점들을 모두 확인해가며 채점했다.
‘사업을 하려면 적어도 확신이나 단호한 면이 있어야지.’
성진은 우유부단한 성격이 보이는 사람들은 일차로 탈락시켰다.
사업을 직접 진행하면서 더욱 절실히 깨달은 것이지만 사업은 누구보다 단호한 면모가 있어야 한다.
자칫 잘못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부하 직원들의 가정까지 몰락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인격에 문제가 보이는 사람들을 탈락시켰다.
“그러면 기본적인 문제도 모르고 여기까지 온 겁니까? 거 이거 참. 기본이 영…….”
상대방의 기를 죽이려고 눈알을 부라리면서 혀를 차는 사람들.
중요한 경쟁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럴 수는 있다.
하지만 성진에게 닿는 사념 중에서 유독 불쾌하고 찝찝한 기분이 묻어나는 경우가 있었다.
‘이번에는 저 사람이군.’
성진은 유달리 음흉한 사념을 뿌리는 사람을 눈여겨뒀다가 탈락 리스트에 체크해뒀다.
사업계획의 구체성도 중요했지만 저렇게 불쾌한 사념을 뿌리는 사람은 십중팔구 인격에 큰 문제가 있었다.
사실 실제 사업을 하자면 저런 사람들이 오히려 잘 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진은 저런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사업에 성공해서 돈을 잘 벌수록, 그 밑의 사람들은 더욱 고달파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뭣보다 저렇게 부정적인 마음이 강한 사람들은 신의를 쉽게 배반할 가능성이 높지.’
사업하는 사람 중에서 신용을 목숨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개중에는 쉽게 투자를 받아서 한탕 해보고, 결정적으로 안 되면 말지라는 식으로 무책임하게 도주를 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돈을 잃은 건 어쩔 수 없지만 책임을 다하지 않는 건 용납할 수 없다.’
마냥 착한 사람을 바라는 게 아니다.
성진이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투자 대상자는 균형 잡힌 의지와 굳은 심기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렇게 한참 투자 면담을 가장한 발표회가 끝나고 성진은 몇 사람을 낙점했다.
“자. 그럼 이것으로 발표회를 마치겠습니다.”
진행하던 직원이 폐회를 선언하고 면담자들이 웅성대며 발표회장을 빠져나갔다.
뒤편에서 조용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성진에게 박윤호가 다가왔다.
“오늘은 성과가 좀 있으셨습니까?”
“예. 몇 명 괜찮은 사람이 보이네요.”
“그러십니까? 다행이네요.”
박윤호와 전진수 같은 핑크레터 팀 출신은 성진의 심복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에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쾌거를 같이 이루어냈다는 동질감이 있었다.
강력한 정치 실세였던 최진곤 의원을 무너뜨리는 모습을 지켜본 이들은 성진의 능력에 있어서 열렬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성진 역시도 그들을 신뢰했다.
그래서 박윤호나 전진수 모두 상당한 중책이 주어졌다.
“그나저나 제가 상무 직함을 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박윤호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나마 대기업에서 조직생활을 오래도록 해온 박윤호는 다른 간부들을 통솔해서 성진이 조직 운영에서 다소 놓치기 쉬운 여러 부분을 매끄럽게 채우고 있었다.
“박 상무님이 잘해주고 계셔서 제가 편합니다. 전진수 씨. 아니, 전 부장도 잘해주고 있으니까요.”
“하핫. 그 친구 보안부서 일은 한가하다고 제 앞에서 자랑하더군요.”
가끔씩 정보지 공급책 역을 맡았지만 본래 전진수의 전공은 정치학이었다.
마땅히 맡길 만한 역할이 없어서 보안부서의 책임자 역에 맡겨놨지만 전진수는 의외로 성실하게 보안 부서를 꾸려나갔다.
어차피 전자 데이터를 통한 모든 정보 유출은 인공지능 팔찌가 감시하지만 무엇보다 조심해야 할 것은 사람이다.
앞으로 회사가 커질수록 여러 방면으로 보안을 강화해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믿을 만한 심복이 보안 부서를 책임지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전진수 부장은 성실하니까 일이 없어도 만들어서라도 하겠죠.”
“예. 무척 성실한 친구입니다. 특히 사장님 일이라면 저희 모두 불철주야 노력하기로 맹세를 했습니다.”
박윤호는 진심을 담아 성진에게 말했다.
“맹세까지나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성진이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박윤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희 모두 사장님 덕에 인생 자체가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의미 없이 하루하루 흘려보내던 인생들을 데리고, 큰 꿈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비록 한참 나이 어린 젊은 사장.
하지만 박윤호에게 있어 성진은 감히 한계를 잴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호언장담해 온 모든 일이 눈앞에서 이뤄져갔다.
성진은 자신들에게 더 큰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했고, 이제 그 약속을 기다리는 일만 남아 있었다.
“저희를 어디까지 데려다주실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한결같은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거 너무 그러시니 제가 부담스러운데요.”
성진은 가볍게 엄살을 떨었다.
그런 성진에게 박윤호가 웃으며 말했다.
“부담스러우셔도 별 수 없습니다. 저희 모두, 사장님께 인생 단단히 걸어놨으니까요.”
“하핫. 그 베팅, 제가 꼭 대박 내드려야겠는데요?”
“두말하면 잔소리죠! 사장님.”
“하하핫.”
웃으며 복도를 가로질러간 성진은 문득 주변의 회사 모습을 둘러봤다.
최신식 인테리어가 장식된 사무실들.
저마다 분주하게 업무에 매진하는 직원들.
이것이 모두 성진이 소유한 회사의 모습이었다.
인공지능 팔찌를 얻은 지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아 성진은 상당한 규모의 대형 투자사를 경영하는, 경영자의 입장이 되어 있음을 새삼 실감했다.
“정말 커졌군요.”
성진의 말에 박윤호가 눈을 크게 떴다.
“예?”
“우리 회사. 참 번듯해졌습니다.”
“아핫. 예. 처음에는 이 8층짜리 건물이 썰렁할 지경이었는데 어느 틈엔가 직원도 많이 늘고, 회사의 내실도 이제는 탄탄대로입니다.”
뿌듯함을 담아 말하는 박윤호를 보고 성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직은 멀었지.’
요즘 들어 플루토 자산운용의 달라진 위상이 실감나는 성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요즘 들어 성진의 뇌리에 있는 방사능제거기술에 대한 것만으로도 성진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올해 안에 정신없이 바빠질 테니 각오해두세요.”
“예?”
뜬금없는 성진의 말에 다시 어리둥절해하는 박윤호였다.
영문을 몰라 하는 박윤호를 두고 성진은 웃으며 복도를 걸어 나갔다.
* * *
봄 날씨가 제법 완연해진 어느 날.
모니터 앞에 앉아서 경건한 자세로 기도를 드리는 청년이 있었다.
‘으으……. 제발. 아무나 신이시여.’
양손을 모아 합장하듯 기도하던 청년은 바로 영식.
모니터 앞에 앉아서 홈페이지를 켜놓은 영식은 검정고시 합격자발표 명단을 클릭하기에 앞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무슨 쓸데없는 짓이야 대체.”
뜸을 들이는 영식을 가볍게 핀잔하는 성진을 보고 영식이 겸연쩍어했다.
“아이, 참. 형님. 떨리잖아요.”
“떨리기는.”
성진은 피식 웃었다.
“이러고 있으면 불합격이 합격이 되냐? 괜히 그러지 말고 빨리 봐.”
성진이 마우스에 손을 가져다 대자 영식이 호들갑을 떨었다.
“으앗! 혀, 형!”
기겁을 한 영식을 아랑곳 않고 성진은 합격자 명단을 클릭했다.
곧이어 화면가득 나온 합격자 명단을 둘러본 성진이 혀를 찼다.
“짜식이…….”
“왜, 왜요?”
잔뜩 긴장한 영식을 돌아보면서 성진이 말했다.
“합격했잖아, 인석아.”
“합격이요?”
눈이 휘둥그레진 영식이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모니터를 둘러본 영식의 눈에 곧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김…… 영식?’
자신의 이름을 발견한 영식의 입가에 금방 미소가 번져갔다.
“아, 아싸!”
자신도 모르게 손을 치켜올린 영식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 합격! 형! 저 합격했어요.”
호들갑을 떠는 영식을 보고 성진도 미소를 머금었다.
“짜식. 누가 보면 공무원시험이라도 합격한 줄 알겠다. 그만 진정해.”
“에헤이. 그래도 저 진짜 많이 긴장했다구요.”
영식은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이제 몇 달 뒤에 고졸 검정고시까지 볼 건데 뭘 그래? 중졸 검정고시는 그냥 당연히 합격한다 생각했어야지.”
“에이. 당연이라뇨. 저 진짜 긴장했다니까요?”
영식의 너스레에 성진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여름에 고졸 검정고시 반드시 합격해라.”
“예. 꼭 그래야죠.”
언제 긴장했냐는 듯 호언장담하는 영식이었다.
“그래, 그렇게 자신감 있게 시험 준비해.”
“예, 형.”
성진은 싹싹하게 구는 영식을 보면서 내심 미안함을 느꼈다.
영식의 어머니를 수소문하는 일에 영 진척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소식이 궁금할 텐데 통 내색을 않네.’
성진이 애쓰고 있다는 점을 아는 영식이었다.
그런 만큼 성진이 알아서 잘해주리라 믿기 때문인지 영식은 따로 어머니 찾는 일을 묻지 않았다.
“영식아.”
“예?”
“너무 애어른 흉내 내지 마라.”
영식은 무슨 소리냐는 듯 모르는 척을 했다.
하지만 성진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을 영식이 아니었다.
“가끔 나한테 속마음 풀어 놔도 괜찮아. 내가 네 형이잖아. 우리 의형제 맺기로 한 거 아니었냐?”
가만히 영식의 어깨를 다독이는 성진이었다.
영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형님.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감사는 무슨. 그리고 그 형님 소리 하지 말고 그냥 계속 형이라고 불러. 내가 형님 소리 들을 나이는 아니잖아.”
“헤헷. 예. 형.”
“그래. 아무튼 이제 검정고시도 합격했으니까 오늘은 푹 쉬어. 그동안 고생했다.”
“예. 성진이 형 덕분이에요.”
성진이 아니었다면 영식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싶었다.
사실상 영식에게 세상을 가져다준 사람이 성진이었다.
“덕분은 무슨. 네가 고생한 거지.”
성진은 웃으면서 방을 나갔다.
혼자 남겨진 영식은 모니터에 뜬 자신의 합격 공고를 보면서 눈을 감았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