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1942년 (1)
1942년 1월 12일.
워싱턴 D.C.의 백악관에서는 휠체어에 앉은 한 남자가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
인 새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후······.”
“각하, 피곤하시면 보고는 다음에 다시 이어서 하겠습니다.”
“아니오, 계속하시오.”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는 어니스트 킹
제독에게 괜찮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그럼 다음으로, 동남아시아 일대의 전황입니다. 현재 괌, 버마, 태국, 홍
콩이 모두 일본의 수중에 떨어진 상태이며, 어제 남보르네오와 셀레베스 섬에
서도 추가적인 상륙 작전이 있었습니다.”
“흐음···.”
루즈벨트는 복잡하게 얽힌 동남아시아 일대의 지도를 바라보며 침음을 삼켰다.
한 달 전,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반파시키킨 일본군은 곧이
어 말레이 해전에서 영국의 동양함대마저 격침 시켜버렸고, 그로 인해 현재
동남아시아 일대는 사실상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진 거나 다름없었다.
“···필리핀은 어떻게 되었소?”
“필리핀에서는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미군과 필리핀군이 바탄 반도에서 버티
고 있습니다. 하지만 물자 부족이 심각하고 보급을 보낼 방법도 여의치 않아
오래 버티기는 힘들 겁니다.”
비록 아직까지는 동인도제도와 필리핀이 버텨주고 있었지만, 이들이 함락되는
것도 결국 시간문제일 터였다. 그럼 그 다음은 호주, 그리고 인도양까지 넘어
가겠지.
‘빌어먹을···.’
하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일본의 비열한 기습은 오랫동안 대공황에 지쳐있던 미국인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고, 고립주의에서 깨어난 미국은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강해지고 있
었으니까.
‘문제는, 그때까지 동맹국들이 버텨줄 수 있을 것인가로군···.’
루즈벨트는 킹 제독의 옆에 서 있던 조지 C. 마셜 대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셜 장군, 현재 소련의 상황은 어떻소?”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아직은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그렇소? 얼마 전에 받았던 보고에서는 작년 말부터 대반격에 나서서 나치 놈
들을 밀어내고 있다고 들었소만.”
“예, 맞습니다. 한때는 모스크바 시가지까지도 빼앗겼었습니다만, 현재는 약
100km 밖까지 독일군을 밀어낸 상태입니다.”
마셜 장군은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생각하면, 소련의 수도가 아직도 나치의 사정권 안에 놓
여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비록 지금은 소련이 주도권을 잡고 있지만 언제 전세가 뒤집혀도 이상하지 않
을 상황입니다.”
“흠.”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소련이었다.
비록 지금까지는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저력을 발휘하며 버텨주고 있지만, 과
연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그리고 소련이 무너지는 것보다도 더 걱정되는 것은 저놈들이 나치와 멋대로
강화한 다음 전선에서 이탈하는 상황이었다.
다들 이렇게까지 많은 피를 흘린 상황에서 설마 소련이 나치와 화친할 수 있
을까 하고 말했지만, 과거 1차대전 당시에도 러시아 제국은 연합군을 배신하
고 탈주하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소련에게 더 많은 랜드리스를 보내줘야 할 것 같군.”
“안 그래도 소련에서도 더 많은 지원을 요구하던 참이긴 합니다. 하지만 현재
유지되고 있는 북극해 항로는 손실이 너무 큰 데다가 겨울에는 이용하기 어렵
습니다.”
“지중해와 흑해를 통과하는 것은··· 아마 어렵겠지?”
“예, 크레타 섬에 이어 몰타섬까지 추축국의 손에 떨어지는 바람에 지금 지중
해는 로열 네이비도 함부로 움직이기 어려운 판국입니다. 게다가 흑해의 항
구, 세바스토폴도 독일군의 손에 떨어지기 직전입니다.”
“후··· 어렵군, 어려워.”
루즈벨트는 칭얼거리는 두 동맹국, 영국과 소련을 생각하며 감싸 쥐었다.
현재로서는 두 나라 중 하나라도 연합에서 이탈하거나 붕괴하면 유럽 대륙이
나치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어려울 터였다.
하지만 위기에 처한 소련을 도와주고 싶어도, 미국으로서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렌드리스를 하기에는 해로가 막혀있고, 군사적인 개입을 하기에는 현재 미국
과 독일은 공식적인 교전국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나치 놈들, 설마 아직도 선전포고를 하지 않을 줄이야. 아니면 설
마, 소련 침공 때처럼 우리를 상대로도 선전포고 없이 전쟁을 벌일 생각인 건
가?’
그렇다고 반대로 미국이 먼저 선전포고를 하기도 어려웠다.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려면 우선 상원의원의 표결을 통과해야 했는데,
일본과의 전쟁도 난국에 처한 마당에 또 다른 적성국을 만드는 것에 과연 동
의해 줄 것인가.
“···어쩔 수 없군. 지금은 위험한 북극해 항로를 통해서라도 랜드리스를 지속
하는 수밖에. 뭐, 도중에 가라앉으면 가라앉는 만큼 더 많이 보내면 되지 않
겠소?”
“하하, 알겠습니다.”
비록 그만큼 더 많은 민간인 선원들이 피해를 입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전쟁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
반면에, 그 무렵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에서는 이미 축배를 터트리고 있었다.
“서기장 동지!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하하, 내가 뭘 한 게 있겠소이까. 모두 다 전선에서 피 흘리며 싸워준 병사
들의 공이지.”
“아닙니다, 동지! 서기장 동지께서 강철과 같은 굳건한 의지로 전선을 지휘해
주시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대승을 거둘 수 있었겠습니까!”
“좋소! 그렇다면 압제자들에 맞서 싸운 인민의 승리인 것으로 합시다!”
그 모습에, 동계 공세의 허가를 받기 위해 스타브카에 방문한 주코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정녕 최고 지휘사령부의 모습이란 말인가.’
이곳의 분위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과는 너
무나도 달랐다. 모두들 마치 이미 전쟁에서 이긴 것 마냥 웃고 떠들고 있었다.
“오, 여기 승리의 주역이 오셨군. 수고했소, 주코프 장군!”
“···감사합니다, 서기장 동지.”
“그래, 그럼 주코프 동지도 왔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회의를 진행해 봅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1942년의 첫 번째 스타브카 회의는 점점 더 걷잡
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럼 우선, 상황 보고부터 드리겠습니다.
현재 아군은 북쪽의 오스타시코프부터 르제프, 모자이스크, 칼루가, 므첸크스
까지 진격한 상태입니다.
이 중, 모스크바와 가장 가까운 전선은 모자이스크 일대로, 약 100km 거리입
니다.”
1월 대반격.png
“하하하! 좋군, 아주 좋소. 혁명의 수도, 모스크바를 나치 놈들에게 내주다
니.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맞습니다, 서기장 동지!”
그 후로도 이어지는 보고는 모두 화려한 승전보들뿐이었고, 스탈린은 보고가
이어지는 내내 만면에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그러나 모스크바 방어군을 직접 지휘하는 주코프로서는 이러한 분위기에 당혹
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 소련이 쟁취한 이 작은 승리는 결코 저들의 말처럼 쉽게 얻어낸 것이 아
니었다.
공세 종말점에 도달해서 지쳐 쓰러진 독일군을 상대로, 극동에서 온 강력한
정예부대를 투입하고도 막대한 피를 흘려서 간신히 얻어낸 승리였다.
만약 아군이 방어자의 입장이 아니었다면, 만약 올해 겨울이 이토록 춥지 않
았더라면, 만약 적들이 지치고 약해진 상태가 아니었다면 아군은 결코 이길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주코프는 차마 그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패배주
의자라는 낙인이 찍혀 사령관 자리에서 쫓겨나게 될 테니까.
“보고를 들어보니 이미 전세는 우리 소련의 편으로 완전히 기운 듯하군. 주코
프 장군, 그렇지 않소?”
“···예, 맞습니다. 서기장 동지.”
“좋소! 그럼 지금 당장 모든 전선에서 총공세를 감행해 독일군을 완전히 몰아
내도록 하시오!”
그렇게 1942년 1월, 소련군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다.
*****
소련군의 대공세가 결정된 바로 그 무렵, 르제프 남부의 시쵸프카에 위치한 9
군 사령부에서는 연일 이어지는 격전에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중령님! 1기갑사단으로부터 보고입니다! 현재 니콜스코예, 솔로미노 방면에
서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빌어먹을··· 참모장님은 안 계시나?”
현재 9군의 상황은 혼돈 그 자체였다. 지금껏 후퇴와 반격을 반복하다 보니
여러 부대들이 전투지경선도 없이 혼재되어 버렸고, 그로 인해 보고와 명령체
계가 뒤섞여서 지휘부는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제기랄···.’
그러나 작전참모 블라우로크 중령으로서는 이 상황을 해결할 도리가 없었다.
지휘관님이 계셔도 어려울 판국에, 고작 작전참모 나부랭이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바로 그때였다.
“흠. 아무래도 여기, 여기가 문제인 것 같군. 예비대는 어디에 있나?”
“아, 그것이···.”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블라우로크 중령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털코트를 멋지게 차려입은 장군이 작전 지도를 내려다보며 다른 참
모들에게 이것저것을 지적하고 있었다. 블라우로크는 곧장 그에게 다가가 경
례를 올렸다.
“충성. 작전참모 블라우로크 중령입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현재 9군 사령
관님께서는 부재중입니다만···.”
“하하, 사령관이 없다고? 여기에 있지 않나. 내가 새로 부임한 9군 사령관일세.”
“···먼저 알아뵙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실례지만, 각하의 성함을 여쭤봐
도 되겠습니까?”
중령의 질문에, 장군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나? 발터 모델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