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
독식왕 : 클리어러 201화
내가 마이클의 얘기를 듣지 않고 바로 죽여 버린 것은 마인드 리더로 그의 생각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상대는 애송이…….]
[지금 상황만 넘긴다면…….]
마이클은 따로 떨어뜨려 놓으면 일류 게이머이지만 피스&호프 안에서는 일개 부속품일 뿐이다.
그런 그가 니콜라스를 쓰러뜨릴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아무튼.
나는 손을 탁탁 털고 시크릿 하우스 안을 둘러보았다.
이번 싸움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신력을 소모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모든 게임이 그렇듯 공략하고 나면 끝인 법이다. 오히려 어려운 파트일수록 보람이 크다.
“냐아옹.”
시키지 않아도 암젤이 알아서 마이클과 앰버가 죽으면서 남긴 결정석을 모아왔다.
[행운 26을 흡수했습니다.]
[근력 28을 흡수했습니다.]
[체력 24를 흡수했습니다.]
[민첩 28을 흡수했습니다.]
“역시…….”
스킬 스톤은 쓸 만한 게 없었지만 스탯 스톤만큼은 큼직큼직한 것들을 토해냈다.
할 일을 마친 나는 등을 돌려 현장을 떠났다.
5
노아는 심호흡을 한 뒤 핸드폰을 들어 저장된 단축 번호를 눌렀다.
지워 버리고 싶은 번호이지만 반대의 의미로 꼭 가지고 있어야 할 번호이기도 했다.
세 번째 신호가 울릴 때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노아!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어?
“미국에 있을 때보다 훨씬 잘 지내고 있어. 적어도 지루하진 않으니까. 누구 덕분에.”
-하하.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
거기까지 얘기한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침묵은 30초가량 이어졌다.
노아가 긴 한숨을 내쉰 뒤 먼저 입을 열었다.
“더 이상 하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어. 내가 뭘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잖아?”
-그걸 공개하면 너도 잃는 게 많을 텐데? 같이 죽자는 거야?
“일방적으로 살해당하는 것보다는 낫지. 경고했어. 더 하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알았다. 너보다 내가 잃은 게 훨씬 많지만 일단 여기서 멈추기로 하지.
“고마워.”
노아는 전화를 끊고 테이블에 있는 술잔을 들어 입안에 술을 털어 넣었다. 아직도 양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
곁에 있을 때도 두려웠지만 떨어지고 나서 더 두려워진 게 니콜라스다.
그는 자신의 친형이기도 했다. 조성오의 존재가 호기심을 일으켜 먼 나라로 왔지만 같이 지낸 세월이나 관계의 깊이로 치면 당연히 니콜라스가 먼저였다.
“아니…….”
하나뿐인 친형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계기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혈육의 정이 소멸한 건 이미 몇 년 전의 일이었다.
형식적으로나마 끈을 붙잡고 있었지만 방금의 통화로 더 확실해졌다.
‘악마…….’
니콜라스는 악마다. 추상적인 의미로서의 악마가 아니라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의미의 악마.
누구보다 논리적인 자신이기에 비논리적인 것을 가려내는 것은 쉬웠다.
인간의 탈을 쓴 비논리의 실체는 멀리 떨어져서 보아야 더 확실하게 보인다.
“후…….”
노아는 양손을 머리 뒤에 대고 깍지를 끼었다. 그 상태로 의자에 몸을 쭉 기댔다.
조성오와 그가 이끄는 파티원들을 생각하자 어두웠던 마음이 금세 환해진다.
가브리엘까지 해치운 걸 보면 정말 어처구니없이 강한 존재들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이 처음 한국에 와서 몇 달이 흐르는 동안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빨리 성장했다.
이대로 가면 니콜라스와 정면에서 맞서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악마가 아닌 영웅을 서포트하는 일.
어차피 2인자라면 후자가 나은 것이 자명하다.
6
마이클과 앰버를 해치우고 돌아와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열두 시간을 내리 잤다.
일어나서 핸드폰을 보니 노아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니콜라스와 휴전 협정을 했어요. 물론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몇 달은 괜찮을 겁니다^^
휴전 협정이라니…….
어떻게 해야 니콜라스랑 그런 걸 맺을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노아가 그렇다니 납득할 수밖에.
물론 언제까지 갈지 의심스럽기는 하다. 니콜라스 같은 타입은 손해 본 것은 반드시 벌충하는 타입이니까.
그게 꼭 돈이나 사람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자존심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몇 달이라도 벌게 되어 다행이다. 이대로만 간다면 몇 달 안에 그를 넘어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니까.
가브리엘을 해치웠으니 이제 미뤄 두었던 일을 처리할 차례이다.
메인 퀘스트 중 남아 있는 하나, ‘B급 이상 던전 획득하기’.
게네아를 물리쳤지만 그것은 마요르에게 걸린 마법을 풀기 위해 중간층을 뛰어넘어 한 일이었다.
던전을 완전히 공략하려면 그냥 지나쳤던 나머지 층들도 마저 공략해야 했다.
‘가기 전에 열어볼까?’
지위 퀘스트를 달성하고 얻은 보상.
세트 아이템 전용 랜덤 보상 상자.
나는 인벤토리에서 상자를 꺼내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열기 전에 로또 스킬을 사용했다.
파각 파각 파각-
[축하합니다! 로또 3등에 당첨됐습니다.]
[1분간 모든 스탯이 150퍼센트 상승합니다.]
“오오!”
이제 로또 4, 5등은 쉽게 당첨되는 수준이 됐지만 3등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 등수이다. 단순히 우연 같지는 않아 조금 생각해 보니 답이 나왔다.
40개가 넘는 스탯 스톤을 흡수하면서 행운 스탯도 많이 올랐다.
이전에도 레벨에 비해 스탯이 높은 기형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가브리엘이나 오이누스를 능가할 정도로 레벨 대비 스탯이 높았다.
‘이제 로또를 실전에 사용해도 되겠는데?’
지금까지는 행운 스탯을 올려 강화나 추첨 확률을 높이는 용도로 사용했지만 3등 이상의 등수가 당첨된다면 적과 싸울 때도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단 S급 스킬인 만큼 남발할 수는 없다.
‘좋아.’
안 그래도 높은 행운 스탯을 뻥튀기했으니 어떤 보상이 나올지 기대되었다.
화악-
상자를 열자 밝은 빛이 시야를 덮었다.
[데피니온의 팔찌를 얻었습니다.]
[데피니온의 신발을 얻었습니다.]
[데피니온의 바지를 얻었습니다.]
[데피니온의 로브를 얻었습니다.]
[세트 효과가 발동합니다!]
[마법 스킬 사용 시 마나 소모량이 50퍼센트 감소합니다.]
[마법 스킬의 위력이 40퍼센트 증가합니다.]
[마법 관련 직업 숙련도가 70퍼센트 증가합니다.]
“역시!”
유니크급 마법사 세트가 나왔다. 이전까지 사용했던 것이 레어 등급의 모르돈 세트였음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적절한 보상이 아닐 수 없었다.
수치를 따지자면 모르돈 세트보다 60~70퍼센트가량 더 좋은 방어구다.
여기에 티코이의 솜씨가 더해지면 약 두 배가량 더 좋은 물건으로 변모하겠지.
중후한 느낌의 모르돈 세트에 비해 더 화려한 의상이었다.
데피니온이라는 이름은 넘버링 아이템 ‘아판테스의 눈’ 이력에서 본 적이 있다.
상인의 능력이 아까워서 눈을 도려냈다고 했지.
잔악한 행위가 아닐 수 없지만 적어도 방어구만 착용하는데 그의 인격까지 옮아 오지는 않으니까.
식사를 하고 나서 던전 예약을 했다.
처음에는 일주일간 예약이 불가능하다고 하더니 내가 OG 길드장 조성오인 것을 알고 내일과 모레, 이틀간 종일 예약을 잡아주었다.
특권을 누리는 것 같아 조금 그렇긴 하지만 나는 이계의 위협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니까. 이 정도는 누려도 괜찮겠지.
7
티코이에게 새로 얻은 방어구의 업그레이드를 맡기면서 동시에 미스터리한 용액의 실체를 검사하도록 했다.
마요르가 40개의 스탯 스톤과 함께 가져온 정체불명의 액체.
개인적으로 가브리엘을 쓰러뜨릴 수단이 아닐까 짐작하지만 아직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다.
“알겠습니다. 바로 착수하겠습니다.”
티코이는 할 일이 생겼다는 것에 기뻐했다.
‘그렇다면…….’
나는 남은 한나절의 시간 동안 뭘 해야 할까 생각했다.
원래대로라면 게임을 하며 보냈겠지만 뭔가 중요한 걸 잊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참 생각한 후에야 떠올릴 수 있었다.
“아하!”
꼬마 마법사.
조은영이라는 게이머가 파라얀의 대리인이 될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었다.
그녀를 대리인으로 만드는 것은 시급하지는 않아도 꼭 해야만 할 일이다.
다른 이계 군주도 아니고 파라얀의 대리인을 찾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에.
‘혼자 가는 것보다…….’
다른 대리인을 한 명 대동하는 것이 설득하기 더 쉬울 것 같았다.
처음에는 유진이를 떠올렸지만 꽤 오래 보지 못했던 이한호에게 연락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동안의 일을 설명도 할 겸.
먼저 조은영에게 연락했다.
“정말요? 사실 약속이 있지만…… 길드장님이 만나자는데 당연히 취소를 해야죠.”
살짝 부담되지만 이왕이면 빨리 만나는 게 나을 테니까.
“다른 사람들한테는 절 만난다는 얘기 안 해줬으면 좋겠어요.”
“아…… 네,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모양새를 보니 원래는 딴 사람들한테 얘기하려고 했었나 보다.
만약 전에 만난 동료 게이머들에게 얘기한다면 상황이 쓸데없이 복잡해질 우려가 있었다.
OG가 새 게이머를 영입한다는 잘못된 정보가 퍼질 수 있고, 그녀들이 조은영을 질투할 수도 있으니까.
‘미리 못을 박아두길 잘했네.’
다음은 이한호에게 연락했다. 기본적으로 공무원 신분인 만큼 혹시 바쁘면 유진이를 불러야겠다 생각했는데, 흔쾌히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내 전화를 받고 살짝 긴장하는 그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아아~ 그렇군. 나 말고도 다른 대리인들이 있을 테니까. 갑자기 연락했기에 또 무슨 문제가 터졌나 했어.”
“문제가 있긴 했지만 해결했어. 만나서 얘기해 줄게.”
8
약속 장소는 인사동에 있는 한정식집이었다. 이한호가 나 대신 예약을 했다.
“반장이 되고 나서 이래저래 접대할 일이 많이 생겼어. 정말 귀찮은 일이지.”
“반장이 됐다고?”
“아, 말 안 했나? 전임 반장의 불명예스러운 전적이 드러나고 한바탕 피바람이 불었거든. 물론 이 바닥이야 위부터 아래까지 다 썩었지만 적어도 시늉은 낸 거지. 한 명 한 명 후보를 제하다 보니 나한테까지 차례가 돌아온 거야. 덕분에 잔소리 들을 일은 적어졌지.”
이한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표정만 보면 진급으로 얻은 혜택보다 불편한 점이 더 많은 듯했다.
나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그에게 제안했다.
“싫으면 그만두세요.”
“그러고야 싶지. 그런데 내가 이 자리에 있어야 너에게도 도움이 될 거 아니야.”
“그게 꼭 그렇지도 않아요.”
이한호의 말대로 그가 공무원 지위에 있으면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흘러온 것을 보면 이한호가 얻을 수 있는 정보라면 노아를 통해서든 티코이를 통해서든 얻을 수 있었다.
오히려 그 둘의 정보력이 더 나았다.
만약 오늘 한 명의 대리인이 추가된다면…… 그리고 앞으로 대리인의 숫자는 점점 늘어날 테니까.
그들을 마냥 방치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이한호를 향해 입을 열려는 찰나에 문이 열리더니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여자가 들어섰다.
“늦어서 죄송해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