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독식왕 : 클리어러 197화
Chapter 49 - 격돌 (3)
1.
‘그나마 공간이 넓어 다행이네.’
계획은 가브리엘의 마나가 바닥날 때까지 도망 다니는 것으로 정했지만, 막상 실천하려니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이성이 흐려져 영점이 빗나간다고는 해도 모든 분노가 나를 향해 있기 때문에 눈에 불을 켜고 내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용광로’는 화염 속성 스킬을 사용하는 가브리엘의 궁극기이다.
게임으로 치면 한 번 사용할 때 생명력이나 마나가 엄청나게 소모되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기술.
핀치에 몰렸을 때 ‘에라, 모르겠다’ 하고 사용하는 기술이나 진배없다.
확실하게 패색이 드러난 상황도 아닌데 이런 기술을 사용했다는 것은 조금 어색한 일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 이유가 암젤이 사용한 ‘필레소의 홍안’에 있다고 보았다.
홍안은 가브리엘의 ‘공포’를 밀어낼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가브리엘은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고, 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무시무시한 환상을 보았을 수도 있다.
그가 어떤 공포와 맞닥뜨렸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최고 등급의 사이코패스인 그가 이렇게 흥분한 걸 보면 아마도 대단히 끔찍한 환각이지 않을까 싶었다.
암젤은 계속해서 소환술을 사용하는 중이었다.
사방이 재로 가려져 있기 때문에 상대를 정확하게 식별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가브리엘은 뭔가 움직이는 물체만 포착되면 스킬을 날려댔다.
그게 나나 암젤인지 아니면 소환수인지까지 예리하게 구분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암젤은 냉철하게 타이밍을 잡아서 소환수를 불러내고 다시 불러들이는 행동을 반복했다.
불러낸 소환수가 죽어버리면 다시 소환할 때까지 쿨타임이 필요하지만, 생명력이 소진되지 않은 상태에서 불러들이면 그것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니?”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면 가브리엘을 당해내지 못했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상당히 고전했을 것이 틀림없다.
“고마우면 소원 한 가지만 들어달라옹.”
“19금 소원이라면 안 들어줄 거야.”
“쳇.”
어지러운 숨바꼭질이 삼십 분가량 이어졌을 때 암젤이 날카로운 눈으로 한 방향을 응시했다.
그녀가 한숨을 뽑아내며 말했다.
“이제 끝난 것 같다옹.”
처음보다 시야가 많이 밝아졌기에 나 또한 가브리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검어졌던 피부가 절반 이상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현재 허리를 수그리고 괴롭게 숨을 헐떡이는 중이었다.
“이제 슬슬 반격해도 되지 않겠냐옹.”
“기다려 봐.”
숨이 끊어질 정도로 괴롭게 헐떡이던 가브리엘이 허리를 폈다.
그의 몸뚱이가 다시 새까만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가브리엘이 변하는 모습에 뭔가 위화감을 느껴 재빨리 암젤을 끌어안고 등을 돌렸다.
꽈앙-!
귀를 먹먹하게 만들 정도의 굉음이 터졌다.
1차 폭발과 비교하면 위력이 절반에도 못 미쳤지만 어쨌거나 또 한 번의 용광로를 터뜨린 것이다.
후두두둑-
화산암이 쏟아지는 기세도 처음보다 훨씬 작아 나와 암젤에게 미치지도 못했다.
나는 몸을 일으키고 가브리엘이 있던 곳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더 이상 사람 모양의 새까만 형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거리를 좁히고 나서야 바닥에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가브리엘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낮고 긴 한숨을 토해냈다.
“끝난 것 같네.”
괴물 같은 놈이라 이대로 두면 또 생명력과 마나를 회복할 테지만 당연히 그렇게 내버려 둘 마음은 없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히루도의 창을 꺼내 가브리엘의 심장에 겨누었다.
낮게 신음을 흘리며 괴로워하지만 동정심은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
그대로 창을 내리꽂았다.
“컥.”
살아 있을 때 오만함이 하늘을 찔렀던 것과 반대로 죽을 때는 짧은 단말마가 전부였다.
[레벨 151이 되었습니다.]
[기존 클래스를 강화하거나 새로운 클래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나는 고민 없이 마법 클래스를 8로 올렸다. 이것으로 당분간은 마법 클래스를 강화하는 일도 일단락된 셈이다.
8보다 높은 클래스도 분명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경지까지 가기 위해서는 레벨만 올리는 게 아니라 특정 조건이 더 필요하다.
가상현실 게임에서 나는 그것을 매우 어렵게 달성했었고, 현실에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최초로 ‘대리인’을 죽였습니다.]
[업적 ‘대리인 살해자’를 달성했습니다.]
[대결의 탑에서 정복한 층수 다섯 층 위까지 대리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응?”
가브리엘의 정보창을 봤을 때 군주의 대리인이었다는 사실이 의외이긴 했지만 그를 죽였다고 업적까지 달성하게 될 줄은 몰랐다.
‘대리인 살해자’의 효과가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제법 머리를 굴리고 나서야 의미를 깨닫고 실소를 흘렸다.
‘거참, 어렵게도 말하네.’
대결의 탑에서 정복한 층수라는 것은 퀘스트를 통해 최종적으로 죽인 군주의 서열을 의미하는 것일 터다.
다섯 층 위까지 대리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그보다 서열이 다섯 단계 높은 군주의 대리인까지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었다.
당장은 이게 어떤 메리트가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 게임의 최종목적은 이계의 왕을 죽이고 그 자리를 탈환하는 것이니까.
페이즈만 따라가면 한 명씩 군주를 죽일 수 있다.
대리인을 찾아서 죽이는 것은 게임의 목적과는 딱히 관계가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의미 없는 업적이 존재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나는 나중에 더 고민해 보기로 하고 일단은 가브리엘이 남긴 보상을 챙기기로 했다.
그도 게이머인 이상 죽으면서 결정석을 남겼을 테니까.
“……?”
시체를 내려다본 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멈칫해야 했다.
가브리엘의 시체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미약하게나마 생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죽인 다음 경험치를 얻었고, 레벨이 올랐다. 거기다 업적까지 달성했지 않은가?
가브리엘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제로였다.
‘부활 스킬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일부 몬스터나 종족의 경우 목숨이 여러 개이거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나와 같은 인간이고, 그의 목숨이 하나라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나는 게임의 스토리가 예상치 못한 쪽으로 요동치고 있음을 느꼈다.
다른 때라면 이 재미에 게임을 한다고 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두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가브리엘의 가슴이 꿈틀 하고 움직였다.
창에 찔렸기 때문에 세로로 갈라져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 불가사의하게도 그곳에서 소생의 기운이 포착된 것이다.
[대리인 가브리엘의 육체를 빌려 55위 군주 오이누스가 현신합니다.]
[이곳을 결투의 탑에 준하는 장소로 간주합니다.]
“뭐?”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가브리엘의 몸에서 점점 더 격한 반응이 일어났다.
온몸이 강하게 들썩이는 움직임을 보이더니 급기야 양팔로 땅을 짚고 일어나려 했다.
메시지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지금 가브리엘의 몸을 차지한 것은 55위 군주 오이누스이다.
늘 대리인의 존재 의미가 수수께끼였는데 그 비밀이 한 꺼풀 벗겨지려는 찰나인 것이다.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인벤토리에서 다시 창을 꺼냈다.
그것으로 힘껏 가브리엘의 목을 베었다.
팍-
살가죽과 뼈가 잘리는 감각이 생생히 느껴졌다.
하지만 그에 조금 앞서 가브리엘의 등을 찢고 커다란 덩어리가 튕겨 나갔다.
애벌레가 탈피하듯 살가죽을 뚫고 무언가가 튀어나간 것이다.
“쉣! 이건 또 뭐냐옹?”
나는 신중한 눈으로 방금 튀어 나간 녹색 덩어리를 주시했다.
가브리엘의 덩치가 작은 편이 아니지만 그 안에서 나온 존재는 가브리엘보다 두 배는 더 덩치가 컸다.
두꺼운 갑옷을 입고 전체적인 형상은 파충류에 가까웠다.
나는 투시자의 눈으로 놈의 정보를 들여다보았다.
이름 : 오이누스
서열 : 55위
레벨 : 167
스탯 : 근력 465 /체력 433 /민첩 399 /행운 88
이력 : 이계의 군주들 사이에서도 오이누스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버려진 땅이라 일컬어지는 코요트에 거주하는 그는 왕위 쟁탈전이 한창이던 때 본래 그 땅을 소유하고 있던 리네카를 죽이고 군주의 표식을 차지했다.
왕위 쟁탈전이 끝난 뒤, 근본 없는 그를 군주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적지 않은 자가 도전을 했지만, 독특한 능력에 줄줄이 희생양이 되었다. 그는 군주이지만 영지민이 없는 불모지를 경영하며, 멋모르고 영지에 접어드는 자들을 잡아먹고 능력을 신장시킨다.
‘군주 맞네…….’
결투의 탑 이외의 장소에서 이계의 군주를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메시지가 제멋대로 이곳을 결투의 탑에 준하는 장소로 지정했지만, 그렇다고 상황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오이누스는 경이에 찬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가브리엘의 몸을 통로로 삼아 반대편의 세상으로 튀어나온 그는 모든 게 새롭게 느껴질 것이다.
물론 이곳은 내가 스킬로 창조한 가상공간이기 때문에 암만 두리번거려 봤자 소용없는 일이지만.
‘레벨 157인데 무슨 스탯이 저렇게 높아?’
물론 클래스에 따라 스탯이 레벨과 무관한 양상을 보이는 일이 많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놈은 어느 모로 보나 육체를 활용해 싸우는 타입이었다.
레벨에 비해 스탯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것도 독특하지만 근력과 체력, 민첩이 고르게 높다는 사실도 신기했다.
이런 특징을 보인 놈이 하나 더 있었지.
하지만 가브리엘의 스탯도 언밸런스라는 측면에서 보면 악어 얼굴을 한 괴물보다 훨씬 양반이었다.
‘얼마나 많이 잡아먹은 거냐…….’
주위를 둘러보던 악어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무엇보다 신경이 거슬리는 것은 그의 커다란 주둥이에서 줄줄 흘러나오는 침이었다.
가브리엘보다 훨씬 노골적으로 나를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는 것이다.
“산 넘어 산이다옹.”
암젤이 그렇게 말했을 때 악어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 안에 있는 혀가 마치 카멜레온의 그것처럼 쭉 길어졌다.
나는 히루도의 창으로 혀를 치려다가 마음을 바꾸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피했다.
아마도 히루도의 창을 그 혀에 댔다가는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고 말았을 것이다.
별다른 기술이 없어 보이는 오이누스가 수많은 사람을 잡아먹고 스탯을 신장시킨 비밀은 아마 저 혀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어, 주인님. 시간이 다 돼가나 보다옹.”
암젤이 허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올려다본 하늘은 천천히 색이 엷어지는 중이었다.
‘공간 생성’ 스킬이 끝나가고 있다는 뜻.
가브리엘이 터뜨린 두 번의 용광로 때문에 제한 시간이 더 짧아진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눈앞의 괴물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오이누스는 가브리엘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은 놈이다.
이런 놈이 바깥에 풀려났다가는 아마 주거지가 쑥대밭이 되고 말 것이다.
나는 히루도의 창을 집어넣고 마법을 쓸 준비를 했다. 암젤도 즉시 호랑이 다섯 마리를 불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