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독식왕 : 클리어러 078화
두 가지 돌풍이 맞물리며 회전력이 상쇄되었다. 그 틈에 암젤이 소환수를 불러내 세붐을 덮쳤다.
“크아앙!”
퍽! 퍽!
겨우 한 번의 공격으로 쓰러뜨릴 수 있을 만큼 약한 몬스터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싸움이 엉키면서 세붐의 빈틈도 점점 더 크게 드러났다. 한순간의 기회를 포착해 나는 필살기나 다름없는 스킬을 날렸다.
‘백 개의 창!’
퍼버버벅!
“크와아아!”
데미 마스터가 괴성을 울리면서 괴로워했다.
5
세붐이 사라지며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소라처럼 생긴 십여 개의 ‘돌풍 제조기’였다.
놈을 쓰러뜨리면 이 아이템이 나온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것을 활용하는 방법까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세붐이 죽으면 이 돌풍 제조기는 그저 소라 모양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나에게는 다른 사용처가 있었다.
세이브 존에 이르러 나는 이번 층에서 얻은 두 가지 재료를 꺼내놓았다.
‘그라차의 등딱지’와 ‘세붐의 돌풍 제조기’, 이 두 가지를 합성하면 ‘돌개 보드’를 만들 수 있다.
돌개 보드라는 이름은 물론 내가 편의상 지은 것이고 정식 명칭은 따로 있다.
[‘그라차 세붐 보드’ ×1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라차 세붐 보드.
알기 쉬운 이름이기는 하지만 부르기가 어렵다.
나는 같은 아이템을 재료가 허락하는 대로 열 개 이상 만들었다.
그라차와 세붐은 위층에도 계속 등장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돌개 보드 사용 방법은 단순하다. 이 위에 올라타 발을 굴리면 꽁무니에 장착된 돌풍 제조기에서 바람이 생성된다.
달릴수록 속도가 빨라지고 일정 순간이 되면 자동차보다도 더 빨리 날아갈 수 있다.
환경에 따라 사용 시간이 달라지며 물속이나 진공 상태가 아니라면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었다.
돌풍 제조기의 수명이 제한적이어서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용시간은 대략 서너 시간 정도.
내가 이 아이템을 귀화제나 리에고 등불 이상으로 반향을 일으킬 수 있을 거라고 본 것은 게이머들이 던전 안에서 특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대응하기 좋은 물건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만약 공략 도중에 변수를 만나 후퇴해야 할 상황이 발생한 경우, 그리고 넓은 던전에 들어와 원하는 만큼 사냥을 하고 그만 돌아가고 싶어졌을 때 돌개 보드는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아이템은 나에게도 효용이 크다.
내가 던전을 꼼꼼히 공략하는 것은 경험치와 보상을 얻고자 하는 것도 있지만 모든 퀘스트를 달성하여 메인 퀘스트 달성 요건을 충족시키려는 이유가 컸다.
돌개 보드를 사용하면 해당 층에서 달성할 수 있는 퀘스트를 모두 달성한 뒤 세이브 존까지 날아가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면 훨씬 빠른 공략이 가능하게 될 터.
적당이 휴식을 취하고, 몸을 일으켰다.
“가자! 암젤, 아린.”
6
예상대로 노아는 내가 만들어서 가지고 온 돌개 보드를 보고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이것이 게이머들 사이에 미칠 영향은 대단할 겁니다. 브레인형 게이머들은 각종 게이머용 장비를 제작하지만 이렇게 혁신적인 물건을 만들어내지는 못하거든요. 상상은 해도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죠.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흥분한 노아의 얼굴을 보며 뿌듯하기도 한 한편 적당히 해줬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너무 깊이 파고들면 내가 대답해 줄 말이 없으니까.
노아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좋습니다! 이 아이템을 우리 사업의 개시품으로 하면 되겠네요.”
그는 물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카오스 게이머 닷컴에서 상점을 만들 때 이름을 ‘OG’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 뜻이 뭐죠?”
“‘오더 게이머(Order Gamer)’라는 뜻입니다.”
“오더 게이머?”
노아는 곧 그것이 뜻하는 바를 이해했다.
“아! 카오스 게이머 닷컴의 반대 개념이로군요! 하하! 생각지도 못했는데, 기가 막힙니다. 실제로 이렇게 카오스 게이머 닷컴과 대항하게 되었으니까요.”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럼 길드 이름과 사이트 이름도 OG로 하실 겁니까?”
“네, 따로 이름을 만들기도 귀찮으니까 그대로 하죠.”
“알겠습니다.”
노아는 웃는 얼굴로 대답하고 이어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이번 주 주말에 시간 괜찮으십니까?”
“왜요?”
“방송국에 연락을 했는데, 가급적 빨리 인터뷰를 했으면 하더군요. 주말 이틀 중에 성오 씨가 편한 날에 하도록 하지요.”
“인터뷰…… 요?”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갑자기 매스컴이라니.
앞으로 게이머 생황을 하는 데 불편함이 생기지 않을까 우려되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인터뷰는 아마 제 위주로 진행이 될 겁니다. 성오 씨는 그, 뭐랄까. 인지도가 아직 적어서…….”
“아…….”
‘이건 또 이것대로 자존심이 상하네.’
나는 이맛살을 더욱 찡그렸다.
Chapter 24 - 유명세
1
돌개 보드를 얻고 나서 던전 공략 속도가 현저히 빨라졌다. 퀘스트만 모두 공략하고 나머지 구간은 보드를 타고 날아갔기 때문이다.
덕분에 예정보다 빠른, 5일째 되는 날 던전 최상층에 이를 수 있었다.
언덕이 테마인 이 던전의 마스터는 최초로 상대하는 초거대형 몬스터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언덕 자체가 몬스터였으니까.
초거대 거북형 몬스터인 이놈의 이름은 ‘그라차차’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그라차의 최종 진화형이다.
“쿠오오오…….”
항상 그런 것처럼 던전 마스터전이 시작되면 일종의 이벤트가 펼쳐진다.
흡사 지진이라도 난 듯 발밑이 움직이더니, 확 하고 솟구쳤다.
이 몬스터 자체가 대단한 공격력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그라차의 진화형답게 때때로 팽이처럼 몸을 회전시켜 우리를 떨어뜨리려고 했다.
떨어지면 짧고 거대한 발로 밟아버리는 게 이놈이 하는 거의 유일한 공격이었다.
회전은 빠르지 않아도 워낙 진동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이때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떨어지지 않게 버텨야 한다.
동시에 그라차차의 등판에는 이 던전에 등장했던 거의 모든 몬스터가 서식하고 있다.
결국 그라차차와의 일전은 세 단계로 요약할 수 있었다.
첫째, 회전에 버텨내기.
둘째, 등판에서 출몰하는 몬스터 사냥하기.
셋째, 틈틈이 그라차차를 직접 공격하여 생명력 떨어뜨리기.
결과적으로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는 공략이었고, 그만큼 인내심과 집중력을 필요로 했다.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방위를 가늠했다.
멀리 보이는 머리통과 반대편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꼬리로 몸통의 길이를 쟀다.
놈의 등판 정중앙이 내가 노리는 지점이었다. 회전을 버텨내고 몬스터들을 물리치면서 바득바득 그곳으로 갔다.
그라차차의 등판 한가운데에는 조그맣게 융기된 지점이 있었다. 그곳을 집중 공격하면 특별한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
“크와와와!”
“크르르르!”
단순하지만 길고 지루한 공방이 이어졌다.
나는 싸움이 시작되고 두 시간째에, 그라차차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위를 깨뜨리는 데 성공했다.
등판이 부서지면서 파란색 보석이 튀어나왔다.
이것은 일명 ‘윈드 사파이어’라고 불리는 보석형 아이템으로 바람 속성을 품고 있는 결정석이었다.
게이머들이 직접 사용하는 경우는 없고, 이 안에서 풍력을 추출해 내 색다른 에너지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오히려 일반 결정석보다 얻을 수 있는 에너지양이 적기 때문에 거래 단가가 낮다. 따라서 대다수의 게이머가 이것을 굳이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무척 유용한 아이템이다.
윈드 사파이어를 손에 쥐자 주먹 위로 작은 돌풍이 솟구쳤다.
[‘바람’ 속성을 획득했습니다!]
[유저의 마나와 속성이 결합합니다.]
나는 창술과 궁술의 최고단계에 도달해서 무기술에 속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내 마나 자체가 무기술, 그리고 어둠 속성에만 특화되어서 부여할 수 있는 속성 자체가 없는 형편이었다.
바람 속성 에너지가 내 마나와 결합하여, 드디어 한 가지 속성 공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꼭 이런 과정을 거치치 않더라도 마법사나 정령술사 같은 클래스를 얻었더라면 더 쉬웠겠지만 애초에 택한 방향이 달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바람 속성을 얻음으로써 쓰임새가 더욱 스킬이 있다.
토네이도 스피어.
전에는 그저 창과 체술의 응용 기술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속성이 결합되어 훨씬 더 큰 위력을 발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전방에서 몰려오는 세붐을 향해서 스킬을 날렸다.
‘토네이도 스피어!’
콰과가각!
전에는 그저 상쇄되는 정도였지만 이제 내가 일으킨 바람이 세붐의 돌개바람을 집어삼키고, 놈에게 직접 타격을 입히게 되었다.
“크아악!”
스킬을 얻어맞은 세붐이 벌렁 나자빠져 바닥을 굴렀다. 그 뒤로 날아드는 세 마리 그라차를 향해 더욱 강해진 또 하나의 스킬을 날렸다.
‘백 개의 창!’
콰앙!
마치 볼링핀이 날아가듯 그라차들이 기절하여 후두둑 떨어졌다.
총 여섯 시간.
그라차차를 공략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공략 자체가 어려운 편은 아니었기 에 크게 상처 입은 곳은 없지만 심신의 피로감이 극에 달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공략 뒤에 얻어지는 보상은 그 피로를 한꺼번에 날려 버렸다.
[레벨 69가 되었습니다. 스탯 포인트 3을 얻었습니다.]
[메인 퀘스트 [지위] - 2. ‘랭킹 50,000위 안에 진입’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랜덤 보상 상자(세트 아이템 전용)을 얻었습니다.]
[D-002 던전의 마스터가 되었습니다.]
[메인 퀘스트 [영토] - 2. ‘던전 두 개 이상 획득하기’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스킬 에그(A급 이상 보장)을 얻었습니다.]
영토 퀘스트는 당연히 달성할 줄로 알고 있었지만 지위 퀘스트까지 달성할 줄은 몰랐다.
여섯 시간짜리 피로감이 눈 녹듯 사라진다.
지금까지 공략한 PHASE 2의 메인 퀘스트는 세 개. 이제 남은 것은 두 개뿐이다.
2
토요일.
나는 노아와 한 약속 때문에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가 잡은 인터뷰 날짜가 오늘이었기 때문이다.
매스컴과 인터넷을 통해 연일 보는 것이 게이머 관련 기사이고 게이머 중 상당수가 연예인 못지않은 유명인이라는 것을 알지만 내가 직접 방송에 나가게 될 줄은 몰랐다.
티코이는 나보다 더 진지하게 옷을 고르고 코디를 해주었다.
“역시 주인님은 외모가 탁월하셔서 조금만 신경 써도 광채가 나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이 과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오늘 같이 인터뷰를 할 사람이 노아라는 것이다.
유명도에서 이미 그의 상대가 되지 않을뿐더러, 외모도 음…….
나는 거울을 보고 냉정히 생각했다.
‘나도 못나진 않았으니까.’
객관적인 기준에서는 꽤 괜찮은 편일지도 모른다. 타고난 얼굴이 어머니를 닮아 나쁘지 않은 수준이고 게이머가 된 뒤 체격도 다부져졌으니까.
‘기죽을 필요 없지.’
그렇게 생각을 하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