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독식왕 : 클리어러 077화
“길드 결성과 사업 발족에 대한 발표를 먼저 하면 사업을 준비하는 동안 생기는 공백을 메꿀 수 있다는 거네요. 당신은 유명하니까 그만큼 화제가 될 테고요.”
“맞습니다. 저는 어차피 브레인형 게이머이고 제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은 사업 분야뿐입니다. 길드의 명칭이나 방향 같은 것은 성오 씨 뜻대로 하십시오. 다만 저에게 부길드장 직책을 주셨으면 합니다. 영호 씨 말씀대로 제가 가진 유명세를 이용할 필요가 있고, 그 정도 직책도 없다면 제 동료들이 납득하지 못할 것 같기도 하고요.”
“흠…….”
나는 솔직히 다른 게이머들과 길드로 묶이는 데 거부감이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가상현실 게임 공간에 있을 때도 엄격히 말해 나 혼자 플레이한 것이 아니다.
많은 NPC 파티원과 함께 공략을 했었더랬지.
“영호, 너는 어떻게 생각해?”
티코이가 신중한 얼굴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좋고 싫고 여부를 떠나 당장은 피할 수 없는 일 같습니다.”
티코이의 말을 듣고 노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나 역시 티코이의 생각에 동의를 했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더라도 당장은 니콜라스의 저격 범위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니까.
2
길드 결성 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난 뒤, 대화는 더욱 심도 깊어졌다.
노아는 내게 사업을 개시할 때 내놓을 수 있는 아이템에 대해 물었다.
“귀화제와 리에고 등불은 카오스 게이머 닷컴과 계약이 돼 있어서…….”
내 말에 노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계약이요? 계약서를 만들어 서명이라도 하셨나요?”
“그건 아니지만 선금을 받아서…….”
“그 계약은 이행할 필요 없습니다. 선금은 그들이 성오 씨 목숨을 노린 대가라고 생각하세요. 어차피 피스&호프와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이입니다.”
“……그렇다면 귀화제와 리에고 등불, 그리고 추그니다킹 뿔, 미라의 정수…….”
“그러고 보니 그 추그니다킹 뿔은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그렇게 완벽한 물건을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 내놓으셨던데.”
“노하우가 있거든요.”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노아는 성오 일행의 지금까지 행적을 빠짐없이 알고 있었다. 추그니다킹이 던전 마스터로 있는 던전을 그들은 단 한 번 공략했을 뿐이다. 상식적으로 같은 물건을 여러 개 내놓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는 동안 노아는 빤히 바라보았다.
갑자기 씩 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네, 너무 깊이 묻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추그니다킹 뿔을 계속 제공할 수 있다는 말씀이죠? 미라의 정수도 그렇습니까?”
“네.”
“나쁘지 않네요. 다만 확실한 임팩트가 있는 아이템은 없는 것 같은데, 귀화제와 리에고 등불은 기존에 없던 아이템이기는 하지만 이미 카오스 게이머 닷컴에서 판매가 되었던 까닭에 화제성이 부족합니다.”
노아의 말에 나는 조금 더 생각을 해보았다.
“근시일 내 얻을 수 있는 괜찮은 아이템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돌개 보드라고, 이번 주 안에 샘플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노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귀화제와 리에고 등불처럼 이전에는 없던 아이템인가요?”
“네, 제 생각으론 그 이상으로 화제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요.”
“오! 좋습니다.”
“어떤 물건인지 안 들어보셔도 되나요?”
“괜찮습니다. 샘플이 완성되면 직접 보여주세요.”
마치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죠.”
3
노아에게 내놓겠다고 한 ‘돌개 보드’는 다음에 공략할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벡실룸이 던전 마스터인 무덤 던전을 획득하고 나는 당연히 코어를 이용해 주변 탐색을 했다.
하지만 한참을 탐색해도 NPC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럴 경우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또 다른 던전을 공략하고 그곳의 코어를 탐색하는 것.
영토 항목 퀘스트의 기한도 한 달이었기 때문에 다음에 공략할 던전도 빨리 고를 필요가 있었다.
레벨도 충분이 오른 현재, D급 던전도 더 이상 부담이 되지 않았다. 나는 적당한 거리에 위치한 또 한 곳의 D급 던전에 예약을 했다.
이번 던전도 15층짜리여서 하루에 두세 개 층을 공략할 생각으로 일주일을 예약했다.
던전 공략에 나선다는 것을 알고 나서 수보타는 대놓고 나를 피했다.
티코이 집에 갔을 때도 바쁜 척을 하며 내가 있는 거실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면 얼른 고개를 숙였다.
보다 못한 내가 말했다.
“수보타, 넌 안 가도 되니까 걱정하지 마.”
“아! 그렇습니까!”
엉겁결에 기쁨을 드러낸 그는 얼른 표정을 바꾸었다.
“그것 참 안타깝네요. 이번에도 주인님께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거짓말하지 마, 다 보이니까.”
“헉!”
‘이분은 어떻게 된 게 내 생각을 다 꿰뚫어 보는 거지?’
수보타는 경이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맞아도 통증을 못 느끼면서 뭘 그렇게 쫄고 그러냐?”
“쪼, 쫄다뇨? 그런 거 아닙니다. 제 능력이 워낙에 미천해서 주인님께 누가 될까 봐 그런 것이죠.”
“그래그래.”
“주인님.”
이번에는 티코이가 말을 걸었다.
“왜?”
“전에 말씀하신 것 말입니다.”
“전에 말한 거?”
“주거지를 구하신다고…….”
“아, 그거. 쓸 만한 데를 찾았어?”
“생각을 해봤는데 기존의 건물을 구입하는 것보다 땅을 사서 건물을 짓는 게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던전 주변이라면 땅값도 사니까요.”
“그거 좋은 생각인데? 그럼 일단 땅을 산 다음에 건물을 어떻게 지을지 생각해 보자.”
“넵, 그렇게 알고 진행하겠습니다. 그리고 가족분들 말입니다. 계속 지금 계시는 곳에 살게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저희가 주거지를 옮기면 제 집으로 이사를 오시게 하는 건 어떨까요? 던전 주변이기는 해도 어차피 검은산 던전은 주인님 소유니까 안전을 염려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괜찮은 생각이다.”
티코이의 집은 꽤 큰 저택이지만, 이 정도면 어머니와 누나가 살기에 불편함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집이 너무 크면 관리하기가 힘들 테니까.
그렇게 결정된 일을 어머니와 누나가 있는 자리에서 얘기했다.
“이사를 하자고?”
“정확히 말씀드리면 제가 따로 살고 어머니와 누나는 더 큰 집으로 이사를 하시는 거죠.”
“왜 따로 살아? 어차피 세 식구밖에 없는데.”
“그게…… 아무래도 제가 하는 일이 좀 특수해서…….”
그것은 솔직히 설득력 없는 변명이었다. 나는 말을 꺼내기 전에 충분히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어머니는 내가 십 년이나 혼수상태에 있었던 탓에 다시 떨어져야 한다는 것에 거부감이 있으실 것이다.
내가 난감해하고 있는 것을 보고 누나가 말했다.
“아이~ 엄마도 참! 얘도 혈기왕성한 나이인데 여자 친구도 만나고 해야 하잖아요.”
“여자 친구가 왜? 따로 사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셨다가 얼굴을 살짝 붉히셨다.
“자식, 컸다고 벌써부터.”
누나는 놀리듯이 어머니 옆에서 웃음을 지었다.
생각지 못한 오해였지만 나는 당장의 부끄러움은 감수하기로 했다. 당장 다른 이유를 대기는 어려운 상황이니까.
“저도 좋은 여자 만나서 장가가야죠.”
장가라는 말이 어머니 얼굴에 화색이 돌게 했다. 어머니는 급기야 내 엉덩이를 팡팡 때렸다.
“그래, 우리 성오 얼른 장가가서 예쁜 손주들 데리고 와라. 너랑 새 애기 바쁘면 애들은 내가 봐줄게.”
너무 앞서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부끄러움은 순간일 뿐이니까.
‘장가라…….’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많은 여자를 그려 보았다, 대다수가 NPC이고 뜻밖에 유진이의 얼굴도 있었다.
‘다 미인이구나.’
결혼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가상현실 게임에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고 보니.’
암젤이 자기가 본처가 되겠다는 둥 이상한 소리를 했던 게 생각났다.
‘남들이 보면 부러워할 상황이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NPC와 결혼을 한다는 자체가 어색한 일처럼 여겨졌다.
‘한국이 일부다처제였다면 몰라도…….’
잘난 척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중 한 명만 골랐을 때의 후폭풍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4
D급 던전 공략 3일째.
공략은 예상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루에 세 개 층씩 공략을 하여 지금은 7층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돌개 보드’를 제작하는 재료를 얻을 수 있다.
‘언덕’이 테마인 이 던전에서는 유독 바람 속성을 사용하는 몬스터가 많이 등장한다.
푸르른 창공에 녹색 벌판이 펼쳐진 풍경은 보기에 아름답지만 던전답게 당연히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키이잉-
마치 모터가 돌아가는 것처럼 날카로운 회전음이 들려왔다. 나는 언덕을 넘기 전에 걸음을 멈추었다.
암젤과 아린 역시 상황을 파악하고 몸을 낮추었다.
키잉!
키이잉!
언덕 맞은편에서 시커먼 그림자들이 솟구쳤다.
‘그라차’라는 이름을 가진 거북형 몬스터이다. 이 몬스터의 특징은 등딱지를 헬리콥터처럼 회전시키며 공격을 해온다는 것이었다.
공략법은 두 가지이다.
원거리에서 쏘아 맞히거나, 아니면 회전이 멈출 때까지 기다리는 것.
나는 시간을 아낀다는 의미에서 전자의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연사!’
퍽! 퍽! 퍽!
딱히 유도살을 날린 것이 아닌데도 궁사 클래스의 최고 경지에 올랐기 때문에 화살들은 어긋남 없이 전부 몬스터의 몸뚱이에 박혔다.
회전력을 잃은 그라차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크르릉!”
암젤이 소환한 사자가 그 위를 덮쳤다.
[퀘스트 ‘그라차 한 마리 처치하기’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경험치 +800을 얻었습니다.]
그라차의 사체가 사라지기 전에 등딱지를 잡고 있으면 몸뚱이만 사라지고 등딱지는 그대로 남게 된다.
[‘그라차의 등딱지’ ×1을 얻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열 마리 이상의 그라차를 사냥했다.
재료를 얻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지만 어차피 퀘스트를 달성하기 위해서도 그 정도 사냥은 해야 했다.
그라차 집중 출몰 구역을 넘어가자 이 던전의 두 번째 데미 마스터인 ‘세붐’이 등장했다.
세붐은 특이하게 생긴 몬스터이다. 신장이 2미터쯤 되고 곰과 닮은 신형을 가지고 있는데, 무엇보다 큰 특색은 몸 전체에 돌풍을 만들어내는 뿔이 가득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소라처럼 생긴 그 뿔에서 강한 돌풍이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온다.
돌풍은 들판을 지나면서 점점 몸집을 키우기 때문에 가능한 한 근접한 거리에서 상대를 하는 편이 나았다.
이놈은 그라차보다 레벨이 높기 때문에 마나가 쉽게 바닥나지 않는다.
거의 무한대로 돌풍을 쏘아내서 이것이 멈추기를 기다리면 끝도 없었다.
아린이 방패의 곡을 연주해서 전방위로 불어오는 돌풍을 차단했다. 그리고 나는 똑같은 바람 속성의 공격을 몬스터에게 날렸다.
‘토네이도 스피어!’
콰가가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