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airway to Growth -->
***
시원함을 찾아 온 사람들로 카페가 북적거렸다.
안과 밖 모두 사람들도 가득한 공간이 너무 어색했다. 바로 내 앞에 앉아 있는 나 원장 때문이었다. 그녀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진지 슬쩍 고개를 돌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바쁜 사람들의 모습만 바라보았다.
그래도 다행이네. 더 늦었으면…….
이 어색함이 좋았다. 아니, 안심이 됐다. 만약 이대로 더 시간이 흘렀다면 나와 나 원장 관계는 더 이상했을 것 같았다.
어쨌든 한 가지는 알겠다.
내 감정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것과. 그렇다고 감정이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어떤지 살펴보고 나니 자연스럽게 입이 떨어졌다.
"뭐야? 그 소심한 모습은?"
"……오랜만에 봤는데, 이러기니? 연락도 안하고. 나쁜 놈."
"잘 지냈어?"
"하지 마. 그런 말."
내 짧은 인사에 나 원장이 어색함에 몸을 떨었다.
사실 어색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기는 싫었다. 최소한 한 가지는 나 원장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오글거리지?"
"응. 엄청."
짧은 몇 마디를 나누기 무섭게 다시 대화가 끊겼다.
하아. 이거 쉽지 않네.
생각했던 것만큼 말이 잘 나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 다짐까지 옅어진 건 아니었다.
나는 이번 기회에 나 원장과 관계를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비슷하게 돌려놓고 싶었다.
"진짜 어색하네. 몇 달 만에 봐서 그런 건 아니겠지만."
"고영아……."
"나 쌤. 그 오글거리는 눈빛으로 보지는 말고. 뭐, 나 쌤을 좋아한 건 맞는데. 지금도 좋아하는 건 맞는데. 그런데."
입안에 맴돌고 있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이런 내 모습에 나 원장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녀가 여전히 내 마음을 부담스러워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예상보다 덤덤했지만.
꽤 아프네.
그래도 생각만큼 아프진 않았다. 시간이란 만병통치약이 내 풋 감정을 토닥여준 것 같았다.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고 나서야 간신히 하고 싶었던 말이 흘러 나왔다.
"아, 이런 말하기 좀 민망한데. 그래도 그때처럼 막 그런 건 아냐. 그냥 좋아하는 거야. 여자가 아니라 나 쌤을. 무슨 말인지 알지?"
"……응!"
나 원장이 살짝 물기 어린 눈으로 날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또 다시 입안이 씁쓸했지만, 얼굴로 드러낼 정도로 쓰지는 않았다.
이걸로 확실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편하게 탁자에 몸을 실었다. 팔꿈치를 탁자에 대고 손바닥으로 턱을 괴니 마음도 덩달아 편해진 느낌이었다.
"아, 되게 쫄았네. 아무튼 여행도 좀 하고 그랬거든?"
"진짜? 여행을 했어? 어디? 어디 어디 다녀왔는데?"
하여튼 이 여자. 미워할 수가 없다.
여전히 내 마음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날 걱정하는 나 원장의 모습에 혹시라도 남아 있는 마음이 있을까 싶어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욕심내지 말자고. 그냥 흐르는 대로 가자고.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나는 괜히 으스대는 어투로 말을 이었다.
"유럽도 좀 다녀오고, 유럽도……. 유럽만 갔다 왔네. 그러고 보니까."
"그게 어디야! 난 계속 병원을 지켰는데. 요즘 걱정이야. 장사가……아차!"
"어쭈. 그동안 타락했는데, 나수정 씨. 지금 장사라고 했지?"
"아냐!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냐. 맞구만.
나 원장이 울상을 지었다.
이윽고 한참을 꿍얼거리더니 고개를 들고 솔직한 속내를 드러냈다.
"……나 병원 닫으려고."
"어? 뭐라고? 왜!"
내가 나 쌤에게 고백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진짜 식겁했다. 가슴이 철렁한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나 원장은 천생 의사였다. 그녀는 남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다독여주는 걸 좋아했다. 게다가 잘하기까지 하니 이보다 더 좋은 천직이 없었다.
그런 나 원장이 병원을 닫는다고 했다.
나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채 물었다. 내 목소리가 꽤 날카로워졌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같잖은 풋풋한 감정은 애초에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제는.
"너 뭐야. 무슨 일인데? 돈이 부족해? 운영할 돈이 부족하면 말해. 내가 투자할 테니까."
"그런 거 아냐. 돈이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꽤 벌어놨어."
"그럼 뭔데? 왜 병원을 닫겠다는데!"
목소리가 너무 컸다.
카페 손님들이 쩌렁쩌렁한 내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들의 시선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나는 화가 났다.
나 원장이 성을 내는 내 손을 보드랍게 잡아 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이 여자는 이랬지.
언제나 날 따스하게 품어주는 나 원장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는지도 몰랐다. 그녀가 자신의 재능을 오래오래 꽃피우길 바랐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 그리고 그렇게 크게 소리 지르면 어떡해? 여기 너 혼자 있니?"
부드럽지만 엄한 나 원장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나 원장은 그제야 목소리를 풀고 날 달랬다.
"그동안 너무 일만 한 거 같아서 그래. 좀 쉬고 싶거든. 물론 일이 싫은 건 아냐. 여전히 여러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게 좋지만."
달래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데.
짧게 한숨을 내쉰 나는 일단 이유라도 듣고 싶었다.
"그런데?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면 되잖아?"
"그것도 좋겠지. 근데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
"무슨 일인데? 얼마나 대단한 일인데 병원까지 닫겠다는 거야?"
"또, 또!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 아니라고 했지?"
"적당히 해. 내가 웬만해선 안 그러는 걸 너도 알잖아? 괜히 말 돌리지 말고. 도대체 이유가 뭐야?"
나 원장이 낭패어린 얼굴로 변했다.
그것도 잠시 작게 웃더니 내 손을 가지고 장난치기 시작했다.
"우리 고영이 많이 컸네? 이젠 누나 걱정도 다 해주고?"
"말 돌리지 말라니까."
"별 거 아냐. 그냥 세상을 좀 둘러보고 싶었어. 이곳에 있으니까 비슷한 사람들밖에 못 보더라고. 좀 더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앞으로 내 삶을 그리고 싶어."
"……너 진짜 못 됐다."
"미안."
나 원장이 내 솔직한 감정에 혀를 쏙 내밀고 사과했다.
역시 아직 나 원장이 나보다 고수였다.
그냥 웃음이 나왔다.
"하여튼 내가 어떻게 널 이기겠냐."
"어쭈? 이게 누나라고 안 할래? 확!"
"확 뭐? 어쩔 건데?"
좀 유치했지만 때론 유치한 것도 좋았다.
나는 오랜만에 나 원장과 아웅다웅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자리가 길어져 자연스레 술집까지 이어졌다.
꽤 취기가 오른 나 원장이 날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너 정말 보기 좋아. 그리고 너무 했어."
"넌 아니고? 너라도 먼저 연락할 수 있었잖아?"
나도 취했다.
서로 혀 꼬부라진 목소리를 대화했지만, 생각보다 대화는 잘 이어졌다.
나 원장은 시원하게 소주잔을 비우곤 탁 소리 나게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멍충아! 내가 그렇게 했는데. 그런데 어떻게 연락을 해! 이 바부야!"
"그러네. 나 차였었지? 너 후회한다. 내가 얼마나 쩌는데?"
"쩔긴 뭐가 쩔어? 장아찌 담그냐!"
아, 이제야 알겠다.
내 개그가 왜 이 모양인지.
나는 범인은 바로 당신이야 라는 눈빛으로 발그레한 나 원장을 바라보았다.
"적당히 마셔. 아무튼 아까 선물 고마워."
"치. 고맙긴. 니꺼 내꺼가 어딨니? 그래도 다행이다. 아까 쫌 쫄았다?"
"왜?"
"너무 큰 선물 받아서 놀랐지. 좀 부담스러웠는데. 히힛!"
나 원장의 귀여운 애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물론 그보다 솔직히 좀 서운한 게 더 컸지만.
"웃기시네! 낼름 좋다고 받아 놓곤."
"그거야 확인을 안했지. 나 그런 여자 아니거든!"
"누가 뭐라냐. 하여튼 너도 징하다. 그렇다고 모아 놓았던 상자를 다 깠어? 마늘 까냐?"
"으히힛! 마늘 깐대!"
……확실했다.
내 유머 감각의 근원은 나 원장이었다.
개그 학살자가 헤실헤실 웃었다.
에효. 내 인생이 그렇지 뭐.
날 보며 해맑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
나 원장이 떠났다.
나를 떠난 게 아니라 여행을 떠난 거지만, 괜히 기분이 울적했다.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일찍. 어른스러웠다면 좋았을 것을.
한결같이 나를 대하는 나 원장이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그녀의 이름과 같은 목걸이를 선물로 주었다. 나 원장은 내 선물을 거절하지 않았다. 도리어 진심으로 좋아하며 냉큼 받아서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뭐, 진짜 목걸이가 아니라서 그런 거지만.
어쨌든 목걸이는 목걸이였다. 특히 이름이 붙은 네이밍 아이템이었다. 내 장비처럼 이오비의 수정 목걸이는 독특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나 원장은 내가 준 목걸이를 바로 장비창에서 장착했고, 동시에 그녀의 목에 하늘빛 물방울이 달린 고풍스러운 목걸이가 나타났다.
우리 모두 정말 크게 놀랐다.
덕분에 나 원장이 당황했지? 그것도 꽤.
나 원장은 현물이 아니기에 선뜻 내 선물을 받았다. 그런데 막상 장착하니 현물과 다를 바 없었고, 그러니 그녀로서는 뒤늦게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나 원장은 이미 받은 선물을 돌려주는 짓을 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뒤져보며 내게 줄 선물을 고심했다.
그렇게 고르고 고심했지만, 나 원장은 고르지 못했다.
결국 내가 괜찮다고 손을 저었다. 그러자 나 원장은 더욱 오기를 부렸다. 기어코 가지고 있던 상자와 궤짝을 모두 깐 그녀가 한 가지 도면을 내게 내밀었다.
면목이 없는 얼굴로 내게 내민 한 장의 도면 아이템은 바로…….
[절망의 나뭇가지 도면]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을 때 나는 히든 퀘스트를 달성할 수 있었다.
뜻하지 않았던 상황에 놀란 내가 덥석 나 원장의 손을 잡고 좋아했다. 나 원장도 내가 좋아하니 웃어주었다. 그 순간만큼은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예전으로 돌아가기는 개뿔이!"
한여름 밤의 꿈처럼 나 원장은 사라졌고, 나는 거실 소파에서 혼자 죽치고 있었다.
연거푸 한숨을 내쉰 나는 갑자기 미친놈처럼 피식 피식 웃었다.
"그래도 마음은 편하네. 차인 거 치고는 말이야."
처음에는 나보다 더 철벽같은 나 원장의 모습에 실망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은 틀렸다.
나는 실망은 고사하고 서운하지도 않았다. 그저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았다. 그녀는 내게 가족과 다름없었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어차피 톡으로 연락하고 지내자고 했으니까.
게다가 나 원장과 내 사이는 끊어진 게 아니었다. 그녀는 자주 연락하라고 했고, 나는 알겠다고 답했다. 물론 대답을 하면서 너나 자주 연락하라고 진상을 좀 부렸지만.
술까지 한 잔 하며 서로 그동안 쌓아 놓았던 걸 풀다보니 답답했던 마음도 스르르 녹아 버렸다. 남모르게 쌓아 두었던 감정이 사라지자, 우리는 점점 예전 모습으로 돌아갔다. 자리를 파할 때 쯤 어깨동무를 할 정도로.
그날 일을 떠올리다 보니 자연스레 절망의 나뭇가지까지 생각이 이어졌다.
나는 나 원장이 남기고 간 선물을 확인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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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뭇가지]
+ 마신을 찌른 패륜의 상징.
+ 주요 능력 10씩 상승.
+ 공격력 150 상승.
+ 방호력 100 상승.
+ 15%의 고정 확률로 대상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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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놈 참 실하네.
검은 칠지도 같은 외형을 한 장검은 엄청났다. 올 스탯은 물론이고, 타격력과 마법력을 150이나 올려주었다. 거기에 방어력과 항마력까지 올려주니 이건 뭐 깡패였다. 게다가 특수 효과까지 있으니, 버릴 게 하나 없었다.
오직 한 가지 문제를 제외하면.
"평민 무기도 못 끼는데, 왕족 무기라니……."
이 신검은 그림의 떡이었다.
쓰지도 못하고, 팔지도 못하는. 계륵 같은 무기였지만, 그렇다고 싫은 건 아니었다. 지금에야 쓸 수 없다지만, 나중에는 또 몰랐다.
나는 보관창 한 곳에 절망의 나뭇가지를 고이 모셔 놓은 채 까먹었던 일을 해치웠다.
바로 마하스의 선물상자를 개봉하는 일이었다.
['불곰의 힘줄 1개'를 획득합니다.]
……무슨 재료에 한 맺힌 놈도 아니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불곰의 힘줄에 대한 정보를 읽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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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곰의 힘줄]
+ 신성한 성력이 깃든 힘줄.
+ 신성 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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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내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고유 임무 '신의 허리띠'를 생성합니다.]
하나를 해결하나 또 하나가 나타났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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