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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ss-135화 (13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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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강의 모습이 예전과 달랐다.

    지난 달 잠수함 패치의 영향으로 허수마비도 침실로 성투가 가능했고,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모자와 선글라스를 쓴 가벼운 차림으로 허수마비로 수련하는 게 가능했다.

    완전히 예전 부끄러움을 벗어 던지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예전처럼 부끄러움에 지배당하지도 않는 모습이었다.

    나도 바다 건너 야구단 이름이 적힌 모자를 쓴 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여름의 절정이다 보니 조금 걷는 것만으로도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래도 강바람이 한 번 불어오니 한결 나았다.

    산책하듯 가볍게 걷는 것도 잠시 나는 우두커니 멈춰서야했다.

    허수마비를 상대로 연습하는 이들의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허수마비는 우리나라 최고 스타였고, 그 주위에 눈을 감고 있는 이들은 극성팬 같았다. 얼마나 그들이 많았는지 도저히 허수마비 근처로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사람이……."

    "참 많죠?"

    내 한탄에 옆에서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호리호리한 여자가 보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모자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려 나이를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팔까지 싹 가려서 나이를 모르겠네. 그래도 목주름을 보니 젊어 보이는데.

    슬쩍 탐색하는 것도 잠시 나는 자연스레 여자의 말에 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여자가 내 과묵한 반응에 한걸음 더 다가왔다. 순간 향기로운 화장품 냄새가 물씬 풍겼다. 물론 내 코에는 그리 좋은 냄새는 아니었다.

    아, 도대체 얼마나 떡칠을 한 거야?

    언뜻 향수까지 뿌린 것 같자,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여자는 내 표정을 보지 못했는지 인파에 둘러싸인 허수마비를 보며 혀를 차며 말했다.

    "슬슬 평민들이 많아졌는지. 너무 복잡해 졌어요. 그렇다고 대전이나 부산까지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네요."

    "그쵸? 사람들이 저렇게 둘러싸고 있으면 전투 시작 자체를 못하니까요. 하여튼 적당히 하고 좀 빠지지."

    "그런데 다들 왜 사냥은 안하고 저런답니까?"

    내 물음에 여자가 고개를 홱 돌려 날 바라보았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 표정을 읽은 순 없지만 대충 무슨 개소리냐는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은 이어진 그녀의 목소리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당연하죠. 숙련도 노가다 하는 거잖아요?"

    "기술 숙련도 말입니까?"

    "그럼요. 오늘 아침에 난리 났잖아요. 타란툴라가 활력 회복 10성 달성하거 인증하는 바람에."

    "아……."

    오늘 아침에 워낙 다사다난한 일이 있다 보니 모르고 있었다.

    나는 슬쩍 핸드폰을 꺼내 그 인증을 찾아보았다.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포털 사이트 메인에 기사로 떡하니 놓여 있었으니까.

    --------------------

    [활력 회복]

    + 숙련도 : 10성

    + 매 공방 후 전체 활력의 10% 회복.

    + 활력 회복 기술 및 물품 성능 50% 증가.

    + 범용 달인 기술.

    --------------------

    "……개사기네, 이거."

    "맞아요. 개사기. 그래서 난리 난 거죠. 허수마비만큼 활력 회복 숙련도 올리기 좋은 게 또 없잖아요?"

    그건 맞았다. 내가 10단계로 올려놓은 최종 허수마비라 해도 데미지는 여전히 1이었다. 활력과 방어력은 지랄 같이 높아졌지만.

    대충 지금 상황이 어떤지 이해한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낮게 읊조렸다.

    "방송 탄 맛집도 아니고."

    "풋! 그 말이 맞네요. 진짜 타란툴라 때문에 예전부터 숙련도 노가다하던 나 같은 사람만 우습게 됐어요. 그쪽도 그렇죠?"

    "그렇죠."

    그렇기는 개뿔.

    물론 나도 숙련도 노가다를 하고 있었다. 다만 오늘은 노가다가 아닌 사냥을 위해 왔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좀 열 받네. 분명 업적이 있었을 텐데.

    내 대꾸에 여자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지만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보다 최초 달성 업적을 놓쳤다는 것에 좀 짜증이 났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던 일이지만, 뒤쳐진다는 건 기분 나쁜 일이었다.

    사실 활력 회복은 얼마나 활력을 기술로 회복 하냐에 따라 숙련도 오르는 게 차이가 났다. 분명 저렇게 허수마비에게 달라붙어 있는 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기는 했지만, 그보다 하루 종일 몽마와 치열하게 사냥하는 게 더 많은 숙련도 경험치를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내 약점이지만.

    내 사냥은 원샷원킬이었다. 그러니 활력 회복 스킬의 효과를 받기 어려웠다. 그나마 귀족 몽마를 사냥할 때 잠시 전혼을 갈아 끼고 신경 써서 그렇지. 그렇지 않았다면 활력 회복은 9성은 고사사하고 5성이나 올릴 수 있을까 싶었다.

    뭐, 업적 효과도 좀 보긴 봤지. 이거 생각할수록 아깝네.

    만약 내 예상대로 최초 숙련도 10성 달성 업적이 숙련도 성장 촉진 옵션이라면 두고두고 배가 아플 것 같았다.

    됐다. 됐어. 하여튼 욕심은 많아가지고.

    아쉬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보다 지금 상황에 집중했다. 상황이 어떻든 나는 오늘 안에 최종 허수마비를 보내고 싶었다.

    내가 막 상념에서 깨어났을 때 여자의 은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그런데. 나랑 숙련도 노가다 하지 않을래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뜻밖의 제안을 하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짙은 선글라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눈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게 말로만 듣던 보스 꽃뱀인가?

    보스 꽃뱀은 남자와 여자를 구분 짓는 말이 아니었다. 그저 약속 대련을 하자고 꼬신 뒤 뒤통수를 쳐서 경험치를 먹고 튀는 얌체족 전체를 가리키는 은어였다.

    쓴 웃음이 나왔다.

    "좋습니다."

    "어머? 남자네. 시원시원하네요."

    내 대답에 여자가 팔짱을 끼더니 나를 주차장으로 이끌었다. 아마 차 안에서 하자는 것 같았다. 물론 더운 여름날 현실에서 땀을 뺄 생각은 아니겠지만.

    여자의 손에 끌려가는 동안 나는 슬쩍 눈을 감고 장비창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건 너무 티가 나니까.

    퀴네의 갑주 세트를 벗었다. 순간 타격 횟수가 3회가 줄어들었지만 상관없었다. 아니, 이걸로도 모자를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업적과 칭호까지 내리려다 말고 나는 방향을 선회했다. 어차피 사장된 기술이지만 기술로 공격하면 괜찮지 싶었다.

    "다 왔어요. 들어가요. 이왕이면 뒷자리가 나으려나?"

    "편할 대로."

    사방이 새까만 창문으로 된 비싼 외제차 안은 시원했다. 에어컨을 켜 놓은 걸 보니 확실히 날 낚으려는 것 같았다. 물론 결과야 두고 봐야 되겠지만.

    하여튼 어딜 가나 남을 등쳐먹으려는 것들이 문제네.

    이내 나와 여자가 나란히 뒷자리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여자는 자기 이름은 고사하고 별호도 말하지 않았고 있었다. 의심이 이젠 확신으로 변했다.

    이런 쪽으로 꽤 유명한가? 얼마나 해 처먹었으면 본명으로 하려고 그러지?

    요즘 트렌드는 본명을 감추기 위해 결투장을 통해 결투를 하는 게 다반사였다. 개인 대 개인으로 매칭할 경우 서로 본명을 드러내야하니 민감하고 꺼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는 잘됐다 싶었다.

    난 내 이름보다 별명이 더 유명하니까.

    내 예상대로 여자는 손을 내밀며 바로 결투를 시작하려 했다.

    "그럼 바로 시작할까요? 그래도 결투니까. 100턴까지만 연습하고 그 뒤로는 서로 상의를 하든지. 아니면 실전으로 하든지. 그렇게 해요. 괜찮죠?"

    끄덕.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윽고 여자가 내 손을 잡았고, 나는 그녀의 결투 신청을 수락했다.

    내가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순간 장소가 변했다. 익숙한 내 침실이었다. 피식 웃은 내가 고개를 돌려 보니 침대 위에 날카로운 눈매를 한 여자가 알몸으로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옭기며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할까요?"

    "저, 저기요! 잠깐, 잠깐만요!"

    크게 당황한 여자가 소리쳤지만.

    "그럼 가장 숙련도가 낮은 기술부터 쓸 게요. 괜찮죠?"

    "제발요! 잠깐만요!"

    확실히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여자가 다급해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원래는 차 안에서 얼굴을 숨긴 채 뒤치기를 하려고 했을 테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여자를 침대에 눕혔다. 그 와중에도 여자가 계속 소리쳤다. 물론 나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자, 아 해요. 아."

    치과의사처럼 자상한 말이었지만, 여자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마치 사형 집행을 앞둔 사형수처럼 바들바들 여자가 떨었다. 그런다고 미안한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그녀가 말했던 대로 약속 대련을 할 생각이었다.

    뭐, 한 방이라도 버틸지는 모르겠다만.

    여자를 침대에 눕힌 나는 그녀의 가슴에 올라타며 말했다.

    "그럼 잘 부탁해요."

    "제 말 좀……읍! 으읍! 읍읍!"

    여자가 포기하지 않고 다급하게 말을 뱉었지만, 그녀의 말소리는 이내 내 물건에 막혀 버렸다.

    오랜만에 엑스칼리버로 돌아간 내 물건은 평범했다.

    아. 평균보다는 좀 큰가?

    사실 많이 컸다. 퀴네의 세트를 벗어 꿈틀이들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커진 귀두와 하물의 사이즈는 그대로였다.

    이윽고 보스가 심드렁하게 결과를 알렸다.

    ['조미소'에게 2,571의 피해를 주었습니다.]

    ['조미소'가 절정에 올랐습니다.]

    ['870 경험'을 획득합니다.]

    뭐야? 29렙짜리야?

    29레벨이면 2차 전직을 했다는 걸 의미했다. 물론 2차 전직을 했다는 것에 놀란 건 아니었다. 다만 2차 전직까지 해 놓고 이렇게 논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보스가 나타난 지 다섯 달이 흐른 지금 2차 전직이면 나름 고수 축에 들었으니까.

    어쨌든 결투는 그렇게 끝났다.

    뒤늦게 그냥 모른척하고 삽입 공격을 해서 조미소의 장비나 상징을 깰까도 싶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런다고 정신 차릴 가능성은 없었으니까. 또 괜히 갑질 하는 것도 싫고.

    침실에서 나왔지만 조미소는 실신 한 채 잠들어 있었다.

    나는 피식 웃고는 그대로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시간이 꽤 흘러도 한 번 달아오른 숙련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쉬이 꺼지지 않았다.

    이참에 그냥 신경 쓰지 않고 드러내려고 했는데.

    사람 일은 정말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맞았다. 결국 나는 크게 마음먹은 걸 이루지 못한 채 네덜란드 행 비행기에 올랐다.

    며칠 사이 영혼이 빠져 나간 것 같은 리아와 함께.

    ***

    암스테르담.

    네덜란드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인 이곳에는 명물이라고 칭하는 것들이 많았다. 박물관의 도시답게 개인이 차린 엄청난 입장료의 박물관들은 물론이고, 그 유명한 반 고흐 박물관도 있었다. 심지어 유명 맥주 회사의 박물관도 있으니 볼거리는 넘쳐흘렀다.

    그래봤자 내 관심을 끄는 건 맥주 박물관뿐이었지만.

    유럽에서 알아주는 물가가 비싼 도시였지만, 다행히 내 지갑보다는 얇았다.

    그렇게 반나절 정도 이곳저곳 둘러보다보니 리아도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린 리아와 함께 나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갈색 벽과 회색 지붕들이 고풍스러움을 자랑하는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이 바로 우리의 목적지였다.

    중세 성처럼 보이는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앞에는 푸른 나무들과 너른 잔디 공원이 자리했다. 그 잔디밭의 중앙에 오늘의 목표가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있었다. 바로 허수마비였다.

    아쉽게도 암스테르담에는 귀족 몽마를 사냥하러 온 적이 없었기에 10단계 최종 허수마비는 아니었다. 문제될 건 없었다. 어차피 10단계까지 올리는 건 금방이었다.

    나는 나름 한적한 모습을 보이는 푸른 공원을 보며 리아에게 물었다.

    "근데 방송국 사람들은 언제 오는 거야? 설마 네덜란드 사람이 코리안 타임을 쓰는 건 아니겠지?"

    답이 없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나는 리아의 엉덩이를 찰싹 소리 나게 때리며 낮게 읊조렸다.

    "정신 차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래?"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술 때문이지."

    "……씨잉."

    리아가 울상을 지었다.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더 놀리고 싶었다.

    안 돼지. 그랬다가는 진짜 제대로 삐지니까.

    작은 유혹을 벗은 나는 리아와 함께 암스테르담 바로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잊지 마. 미야프는 몽마야. 무슨 말인지 알지?"

    "……알아요. 알지만, 사람 같잖아요? 아이 같잖아요?"

    "그래. 같지. 하지만 같은 거뿐이야. 그러니까 너무 사람처럼 대할 필요는 없어. 미야프는 그냥 미야프로 대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알겠지?"

    리아가 내 단호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모르지 않는 눈치였다. 몽마와 인간 사이의 차이를.

    이쯤하면 됐다 싶은 내가 막 리아를 향해 물으려고 할 때였다.

    리아가 그보다 한 발 앞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부탁을 해왔다.

    "근데, 고영 씨. 미야프 좀 소환해 주면 안 돼요? 여기서 놀면 미야프도 좋아할 것 같은데. 네? 안 될까요?"

    ……지금까지 뭘 들은 거냐.

    이쯤하면 병이었다.

    결코 치료할 수 없는 불치명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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