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119화 (11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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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아연의 내기는 여러 의미로 내게 큰 도움이 됐다.

    우선 유서희에게 10%짜리 방탕한 광대의 상징뿐만 아니라 그녀의 전화번호까지 받아낼 수 있었다. 물론 나는 내 개인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 대신 보스로 친구등록을 했다. 그녀가 자존심이 상한 얼굴이었지만 그렇다고 내 개인 정보를 주기는 싫었다.

    김아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내 덕분에 그동안 쌓였던 욕구불만을 해소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꽤 오랫동안 제대로 된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한 상태였다.

    조금 민망하기는 했지만 욕구를 해소한 김아연은 더욱 나를 살갑게 대하더니 결국 보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주기로 했다.

    주는 걸 마다할 내가 아니었기에 나는 순순히 김아연의 호의를 호의로 받았다. 그녀도 나름 방송국 핵심 관계자였고, 당연히 꽤 쓸 만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나는 또 하나의 정보원을 만들 수 있었다.

    비록 두 여자의 관계가 동화 속 이야기처럼 좋아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녀들은 여전히 앙숙이었고, 서로를 향해 싫다는 감정을 드러냈다. 어차피 서로 싸우든 말든 내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기에 나는 그냥 모른척했지만.

    어쨌든 나는 김아연과 유서희를 통해 꽤 많은 걸 얻을 수 있었다. 이미 얻은 것도 좋았고, 앞으로 얻을 것도 기대됐다. 이보다 더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을 것 같아 보였다.

    한 가지 현실적인 문제만 제외하면.

    "둘 다 너무 유명하다는 게 문제지. 다음에 멤버를 소개해줘? 경험치 조공을 해줘? 웃기고 있네."

    두 여자는 너무 바빴다. 그 일이 있은 지 벌써 한 달이 다되어 갔지만 그녀들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었다. 그저 보스 앱을 통해 대화를 나누는 게 고작이었다.

    만약 드디어 귀족 몽마에 대한 정보를 물어오지 않았다면 나도 모르게 진장짓을 했을지도 몰랐다.

    다행히 리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유능했다. 그녀는 아예 책으로 만든 몽마 도감을 내게 건넸다. 물론 의학 서적처럼 두꺼운 책을 받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리아를 대동한 채 그녀와 함께 오랜만에 몽마 사냥에 나섰다.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귀족 몽마를 사냥했다. 일반 몽마보다 리젠 시간이 곱절은 더 길다보니 한동안 한국이 몽마에 대해 쾌적한 나라로 꼽혔다. 아무래도 귀족 몽마 중에는 선공형이 많다보니 사람들이 조금 걱정했던 것 같았다.

    다만 며칠 지나지 않아 2인 1조로 된 섹스 배틀러가 막 리젠된 귀족 몽마를 사냥하며 내 계획이 틀어졌다.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바다를 건너야했다.

    일본, 중국, 대만 등지의 인접한 아시아 나라들을 순회 공연한 덕분에 사냥감이 부족하여 손가락을 빠는 일은 없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며 아시아를 넘어 유럽이나 아메리카. 심지어 아프리카로 점차 영역이 넓어졌지만.

    입 안이 쓴 건 어쩔 수 없었다.

    "진짜 억소리가 났지. 그 덕분에 귀족 몽마를 싹쓸이 하다 시피 사냥하긴 했다만."

    단시간에 마일리지를 엄청 쌓게 됐지만, 그렇다고 멈출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돈은 부족하지 않았다. 죽을 때 싸고 갈 게 아니기에 딱히 아까운 생각도 없었다.

    리아가 입술을 삐죽거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그녀도 이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지난 한 달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이곳저곳 다녀오다 보니 시차가 꼬여 생활이 조금 불편해진 걸 제외하고는 큰 문제가 없었다.

    문제가 완전히 없지는 않았다.

    우선 수천만 원을 쓰며 귀족 몽마를 사냥했지만 얻은 게 너무 없었다. 안타깝게도 내 레벨은 너무 높았고, 그것은 귀족 몽마라고 해도 달리 적용되지 않았다. 결국 귀족 몽마를 사냥하며 나는 한 푼의 경험치도 얻지 못했다.

    물론 아예 없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69번째 귀족 몽마를 사냥하며 몽마 집행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몽마 사냥꾼처럼 치명 증폭을 올려주는 효과가 있었다. 상위 업적이다 보니 10%를 올려주는 몽마 사냥꾼보다 더 많은 20%를 올려주었다.

    업적도 업적이었지만 이보다 더 좋은 게 있었다. 바로 아이템이었다. 귀족 몽마의 뛰어난 상징과 물품들은 확실히 날 흡족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봤자 여성체 몽마라 내가 쓸 게 없지만. 거기에 드랍률도 점점 거지같아지고."

    한 가지 아쉽다면 보스의 빌어먹을 시스템이었다. 남성 참가자는 여성체 몽마를 사냥하는 게 보편적이었다. 문제는 여성체 몽마는 여성 참가자에게 주요한 특성을 지닌 아이템을 준다는 것이었다.

    싼 값에 팔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그냥 쟁여 놓을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이 생긴 건 당연했다.

    이 애매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지금 나는 네덜란드의 노르트홀란트 주에 있는 힐베르쉼으로 와야 했다.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도시 이름처럼 내게는 낯설기 그지없었다. 오랜만에 고향에 왔다고 리아는 좋아했지만.

    어쨌든 나는 NPO에서 마련해준 숙소에서 오늘 있을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신발을 신고 있는 게 어색했지만,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성진국의 위엄이 느껴지는 TV프로그램을 시청하며 중얼거렸다.

    "진짜 신기하네. 이래서 문화 차이, 문화 차이 하는 구나."

    "뭐가 그렇게 신기한데요?"

    네덜란드로 넘어온 뒤로 하루 종일 내 곁에 붙어있는 리아가 핸드폰을 만지다 말고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얼굴로 답했다.

    "일단 NPO. 너희 방송국부터 신기하지. 난 방송국이라기에 우리나라 방송국처럼 생각했지. 채널 연합체가 아니라."

    네덜란드의 공영방송은 내게 신기한 방식으로 운영됐다. 정파나 종교 등의 이익 단체가 개별적으로 방송국을 세운 뒤, NPO에 가입하여 방송을 내볼 낼 수 있는 시간을 빌리는 형태였다. 한 마디로 NPO는 일종의 프랜차이즈 회사였고, 개별 방송국은 가맹점이었다.

    재미있는 건 이러한 가맹국들의 성향이었다.

    "난 네덜란드 공영방송에서 불교 방송을 볼 줄은 꿈에도 몰랐어."

    실제로 NPO의 가맹 방송국 중에는 개신교뿐만 아니라, 천주교, 불교, 유대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의 다양한 종교와 관련된 방송국이 속해 있었다. 심지어 사회주의 성향이나, 보수주의, 진보주의, 자유주의 등 다양한 성향의 방송국도 있었다.

    물론 다양한 방송국이 존재했지만, 그 중 가장 인기 있는 건 유로비전을 관할하는 방송국이었다.

    리아가 내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양한 건 그 자체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으니까요."

    "그래. 근데 이건 또 뭐야? NTR? NTR이라고?"

    TV에서 시선을 떼고 리아가 건네준 책자를 대충 훑어보던 나는 어이없는 단어를 발견하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와 달리 리아는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냐는 얼굴이었다.

    "NTR이 왜요? 2010년인가? NPS랑 Teleac. RVU가 합병한 거예요. 주로 교육이나 문화. 교양 프로그램을 제작해요."

    "……그러냐."

    헛된 망상은 헛된 망상일 뿐이었다.

    괜한 기대를 머쓱한 얼굴로 지운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근데 보스는 어디서 해?"

    "아. 디지털 채널이요. 이번에 새로 만들었어요. 스포츠 채널에 넣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교양이나 예술 채널에 넣기도 애매하고. 그래서 NPO BOSS라고 아예 새로 만들었어요. 거기서 오늘 고영 씨 아이템을 경매할 거예요. 근데 그건 진짜 안 내놓으실 거예요?"

    "그거라니?"

    "그 속옷 세트요. 자체 성형이 가능한."

    리아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설명을 이었다.

    이것 봐라?

    나는 단숨에 리아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퀴이브의 속옷 세트를 탐내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 늘씬한 모델 같은 체형이었지만, 그렇다고 불만이 없는 건 아닌 듯 했다.

    리아의 속내를 읽어낸 나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슬쩍 그녀를 유혹해 보았다.

    "이건 딱히 경매할 생각이 없는데……. 빌려줄까?"

    "네! 네? 아니요! 아니거든요?"

    "맞는데 뭘. 빌려줄게. 앱 켜봐."

    "진짜 아니거든요?"

    아니라면서 폰은 왜 꺼내는데?

    차마 이렇게까지 대놓고 리아를 놀리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잠깐 동안 네덜란드 생활이 꼬일 것 같았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아가 양손으로 공손하게 자기 휴대폰을 받치고는 날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장난 아니죠? 장난이면 저 진짜. 진짜……."

    "진짜 뭐?"

    "진짜 화낼 거예요. 아니, 울어 버릴 거예요. 아니 신고 할 거예요!"

    얼씨구.

    나는 리아의 눈에 어린 탐욕을 읽으며 피식 웃었다. 리아도 결국 여자였다. 조금이라도 더 아름다워지고 싶은.

    "신고하든지 말든지. 아무튼 거래나 받아."

    "어? 어어! 어쩜!"

    아예 비명을 지르지?

    서양인 치고는 소박한 엉덩이를 들썩이며 리아가 핸드폰 화면과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는 별다른 기색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에게 퀴이브의 속옷 세트를 넘겨주었다. 물론 내가 이렇게 마음 편히 빌려줄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거래 메뉴에 새로 등장한 기간 제한 거래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한 달이면 되겠지?"

    "네! 좋아요!"

    "오케이. 그럼 그동안 고생한 보너스는 이걸로 퉁?"

    "퉁!"

    리아가 갑자기 날 향해 달려들더니 그대로 내 무릎 위에 앉았다. 그녀는 두 팔로 날 껴안은 채 좋아서 어찌할 줄 몰라 했다. 솔직히 이렇게 좋아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잠시 당황하여 어디에 손을 두어야할지 몰랐던 나는 금세 정신을 차리곤 리아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이내 감격어린 기분을 간신히 추스른 리아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물론 그냥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녀는 내 볼에 입술 자국을 남기고 나서야 내 몸에서 떨어졌다.

    쪽!

    "한 달 더 빌려주면 아주 청혼을 하겠다?"

    "그럴까요?"

    "하여튼 능구렁이가 다 됐어.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처음에는 어땠는데요?"

    "좀……. 멍청해 보였지. 금발도 아닌데."

    "뭐라구요?"

    리아의 입술이 닿은 볼을 손으로 슥슥 닦으며 대화를 나누다보니 자연스레 분위기가 풀어졌다. 내가 조금 심한 말을 해도 리아는 이제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도 시간이 흐르며 내게 적응한 듯 보였다.

    괜히 토라진 척을 하던 리아가 이내 살짝 걱정되는 얼굴로 물어왔다.

    "근데 고영 씨. 만약 남성용 아이템 중에 마음에 드는 게 없으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뭘 어떡해. 그냥 강화제나 질러야지. 아니다. 그 전에 저거 친밀도 작업 좀 하고. 진짜 드럽게 많이 먹는다니까."

    내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외국까지 와서도 계단 페티쉬를 보이는 미야프가 있었다. 계단 중간에 앉은 미야프는 아까 전 내가 준 먹이를 야금야금 먹으며 나를 힐끔거렸다. 마치 뺏어갈까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리아가 식탐을 보이는 미야프를 보더니 킥킥 거렸다.

    "아, 진짜 미야프 너무 귀엽지 않아요? 저런 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런 딸이 있으면 먹여 살리다 등허리가 휘겠지."

    "에이, 진짜 저런 딸이 있으면 바보처럼 좋아할 거면서."

    "아 몰라. 경매 시작하면 말해. 네덜란드 말은 너무 어려워서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나는 리아의 질문을 피하며 그대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딱히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미야프만으로도 충분히 힘겨웠다.

    귀족 몽마 사냥해서 남는 게 별로 없었던 건 미야프도 크게 일조했으니까.

    아예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을 잊기 위해 눈을 감은 나는 열심히 연습한 보스 앱 상상 실행을 시작했다. 꾸준한 연습 덕분에 확실히 훨씬 편안하게 보스 앱을 머리로 그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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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격 :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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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력 : 100 + 35

    + 지력 : 0 + 35

    + 체력 : 50 + 35

    + 속도 : 100 + 35

    + 정확 : 0 + 35

    + 행운 : 0 + 35

    + 잔여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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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한 달이 좀 안 되는 시간동안 3레벨을 올릴 수 있었다. 그리 빠르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일반적인 사냥으로 경험치를 얻지 못하는 걸 가만하면 느린 것도 아니었다.

    귀족 몽마를 사냥해도 경험치를 올릴 수 없었던 내가 미친 듯이 결투를 한 건 아니었다.

    내가 경험치를 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허수어미 사냥이었다.

    순회공연을 다니면서도 나는 고난과 도전을 잊지 않았다.

    덕분에 9단계까지 돌파했으니까. 나쁜 결과는 아니지.

    본래 나는 내 국적을 숨기기 위해 이번 순회공연을 기획했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아메리카에서 아프리카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허수어미를 사냥하면 사람들이 내 국적을 추측하기 어려워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에는 NPO와 협의하여 네덜란드에서 10단계 허수어미를 사냥하고, 그것을 취재하도록 하기까지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내 국적은 오히려 네덜란드로 알려진 가능성이 높았다.

    ========== 작품 후기 ==========

    오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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