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65화 (65/200)
  • <-- Soul Fishing -->

    ***

    침실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셨다.

    나도 모르게 손등으로 눈을 가리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조금만, 조금만 더.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나는 옹알거리며 게으름을 부렸다. 어쩔 수 없었다. 어제 너무 의욕이 넘친 나머지 밤늦도록 사냥에 매진했고, 그 결과 자정이 넘어서 겨우 잠들고 말았다. 거기에 연이은 섹스 배틀로 쌓인 피로가 터지며 도저히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였다.

    나방 고치처럼 몸을 이불로 둘둘 감고 한 시간이 더 흐르고 나서야 나는 슬금슬금 침대를 기어 나왔다.

    "후암. 대낮이라 일단 일어나기는 했는데. 영 귀찮네."

    이불로 전신을 칭칭 동여맨 상태로 침대 끝에 앉은 나는 다시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며 졸기 시작했다. 요 근래 이렇게 힘들게 일어나는 건 정말 처음이었다. 요 근래가 아니라 2차 성징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아이고. 이러다 하루 종일 자겠네.

    자석처럼 내 몸을 잡아당기는 침대의 유혹을 억지로 이겨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머리가 띵하더니,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어어!"

    화들짝 놀라 양손을 뻗었다.

    탁!

    다행히 몸이 쓰러지기 전에 바닥을 양손으로 짚을 수 있었다. 덕분에 꼴사나운 모습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뭉친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찌릿찌릿한 고통이 팔에서 올라오자, 본능적으로 양팔을 감싸며 겨드랑이 사이에 넣었다.

    "으윽! 왜 이래?"

    납덩이가 가득 찬 것 같은 머리와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의 콜라보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대로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으며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따듯한 물을 욕조에 받고 몸을 집어넣었지만 잔뜩 뭉친 근육은 풀릴 생각이 없었다. 면 강화제를 쏟아 부운 짜장면 같았다. 내 몸이 정말 내 몸이 아니었다.

    뜨거운 물을 받고 몸을 지지는 걸 반복하다보니 순식간에 한 시간이 또 사라졌다.

    결국 정신을 차리는데 꼬박 2시간이 걸렸다.

    "아으. 죽겠다. 이 쓸모없는 몸뚱아리. 거 얼마나 걸었다고, 이래?"

    허리를 굽히는 것도 쉽지 않아 대충 수건으로 몸을 닦고 선풍기 앞에서 몸을 말린 나는 소파에 대충 누워야했다. 도저히 일어나 앉지 못할 정도로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그 와중에도 배고프다고 모닝롤과 주스를 챙겨온 내가 대견했다.

    "그래도 누워서 먹을 순 없으니까. 으으……."

    괴상한 신음 소리를 내며 억지로 몸을 일으킨 나는 소파에 기댄 채 허기부터 채웠다. 대충 봉지를 찢고 통째로 빵을 입에 넣었다. 당연히 목이 막혔고, 병째로 주스를 마셨다.

    거지처럼 꾸역꾸역 먹다보니 금세 배가 찼다.

    "이제야 좀 살겠네. 으허."

    트림을 하며 배를 슥슥 문지르다 말고 신음을 토했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사방에서 난리였다. 확실히 어제 무리하긴 무리한 모양이었다.

    조심스레 스마트폰을 들어 보스 앱을 실행해 전투 기록을 확인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미쳤구나. 도대체 몇 마리를 사냥한 거야? 서른여섯. 아니지 히든 퀘까지 하면, 서른 일……돌았네."

    왜 그랬을까.

    뒤늦은 후회가 찾아왔다. 물론 그냥 섹스가 아닌 섹스 배틀이라 가능한 숫자였지만, 그래도 너무 많았다. 아무리 사정하지 않고 사냥만 했어도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후. 이건 진짜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서른 일곱 번을 하다니. 변강쇠도 이리 못하겠네."

    헛웃음이 흘러 나왔다. 다시 생각해도 미친 것 같았다.

    도대체 얼마나 정신줄 놨으면 기억도 안 나지?

    어제 전혼을 착용하고 난 뒤의 일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엄청 흥분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자주 깜빡하기는 했지만, 바로 전날 일을 완전히 다 까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간 치매지. 건망증이 아니라.

    진짜 필름이 끊긴 것처럼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전투 기록을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갔다. 단순한 통계가 아니었기에 꽤 시간이 걸릴 듯 했다. 말없이 전투 기록을 읽어 내려가던 내 눈이 크게 떠졌다.

    "……나 렙업 했네?"

    여전히 레벨업 했을 당시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능력창을 열어 봤지만 역시 나였다. 심지어 나는 속도에 스탯을 투자까지 해 놓은 상태였다.

    돌겠네, 진짜.

    다행히 알츠하이머와 같은 무서운 병에 대한 공포는 없었다. 나는 매년 정기적으로 건강 검진을 했고, 저번 달에 받은 결과는 깨끗했다. 아무래도 폭주 비스무리한 걸 한 듯 싶었다.

    "튜토리얼 때도 열 받아서 한 번 그러더니. 이번에는 좋아서 그러네."

    기억을 떠올리려고 해 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럴 때 억지로 안돌아가는 머리를 고생시킬 필요가 없었다. 마음을 편하게 먹은 나는 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아! 잠깐. 또 까먹을 뻔 했네."

    평민이 되며 조금 더 참가자에게 편리해진 점이 있었다. 바로 경험치 표기였다. 그것을 상태창에 추가한다는 게 어쩌다보니 아직까지 방치하고 말았다.

    또 까먹기 전에 나는 얼른 상태창을 변경하고 펼쳐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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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활력 : 2,504/2,504

    + 정력 : 588/588

    + 경험 : 5,860/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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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격력 : 258

    + 마법력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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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어력 : 26

    + 항마력 :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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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중률 : 137

    + 회피율 :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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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명도 : 61

    + 치명 증폭 : 125%

    + 치명 저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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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결 현재 상황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동시에 내가 어젯밤 무슨 짓을 했는지 감이 왔다.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한탄 아닌 한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740만 더 올리면 22렙이네?"

    오늘 일어났을 때 왜 뼈마디가 쑤시고 근육이 뻐근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고개를 젓다가 우연찮게 핸드폰의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내 눈이 또 다시 벌어졌다.

    "4시? 벌써 4시라고? 그럼 15시간동안 잔 거. 아니. 그냥 기절했구나, 나."

    한 나절 넘게 기절할 정도라니.

    더 웃긴 건 그 와중에도 절구를 사용한 것 같다는 점이었다. 보관창을 둘러보니 잡템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동화가 한 개 늘어나 있었다.

    늘어난 건 동화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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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착품]

    + 치명의 반지 : 1개

    + 줄무늬 다람쥐의 상징 : 1개

    + 누더기 붕대녀의 상징 : 1개

    + 점액 고양이의 상징 : 2개

    + 반달 가슴 곰인형의 상징 :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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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벤토리의 장착 텝에는 4종류의 상징이 있었다. 그 중 3가지는 이미 알고 있는 상징이었지만, 한 가지는 아니었다. 정확하게 따지면 누더기 붕대녀의 상징도 사냥을 통해 얻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진짜 귀신이라도 쓰인 것 같았다. 물론 그럴 리가 없었다. 세상에 악마는 있어도, 귀신은 없으니까.

    "얼씨구. 상징까지? 그러고 보니 어제 곰돌이 탈을 쓴 몽마와 그 짓을 한 거 같기도 하고."

    얼핏 곰돌이 탈 인형이 떠올랐다. 유두와 무릎을 이은 선을 기준으로 안쪽은 알몸이었고, 바깥쪽은 갈색 털로 뒤덮였던 것 같았다. 거기에 가슴 사이에 반달 문신까지.

    나는 고개를 흔들며 어렴풋이 떠오르는 반달 가슴 곰인형의 모습을 털어냈다. 괜히 요상한 몽마의 외형에 집중하면 내가 더 타락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점점 이상해지네. 나도, 보스도.

    "그래도 테이밍은 안했나 보네. 반지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거 보니."

    대충 어젯밤 상황이 그려졌다. 아마 미쳐 날뛴 게 분명했다. 부디 SNS에 흑역사의 한 페이지가 올라가지 않기만을 바랐다.

    혀를 차며 처음 보는 곰인형의 상징의 세부 정보를 띄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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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달 가슴 곰인형의 상징]

    + 악마들도 귀여워하는 천민의 인형.

    + 악마형 몽마에 대한 내성 15%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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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곰인형의 상징의 옵션을 확인해 봤지만 딱히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애매한 효과에 머리를 긁적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건 그렇고. 이거 계륵 같은데?"

    정말 계륵과 다름없었다. 다람쥐는 거의 여성 전용인 엉덩이 기술 위력 상승이었고, 고양이는 그나마 속박 저항 상승이라 가지고 있을 만 했다. 누더기 붕대녀야 매 턴 3%씩 피를 회복하지만, 3개밖에 남지 않은 슬롯에 올리기에는 애매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거 한동안 자리만 차지하겠네. 매매창은 여전히 텅 비었고. 고양이나 곰인형 상징 하나씩 더 얻어서 지르자니, 그렇게 쓰기에는 좀 아깝고. 진짜 상황이 왜 이러냐."

    어제부로 내 운이 끝난 게 틀림없었다.

    참가자는 처음 4개의 상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후 음격이 10단위로 오를 때마다 1개씩 제단이 추가 됐다. 원래 21레벨이면 총 6개의 제단을 가져야했지만, 튜토리얼 보상 덕분에 현재 나는 7개의 제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 7개의 제단 중 어느덧 4개나 상징을 올린 상태였다.

    3개의 제단 밖에 남지 않은 이상 아무 상징이나 활성화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필요 없어지면 깨부수고 자리를 만들어야하니 더욱 신중해졌다.

    "아직 9레벨이나 남았으니까. 그냥 패스하자. 어차피 이젠 공격적인 상징을 올려야하는데."

    반달 가슴 곰인형의 상징을 활성화해서 악마형 몽마에게 내성을 올리는 것도, 누더기 붕대녀의 상징을 활성화해서 활력 회복을 3% 추가하는 것도. 그 어느 것도 지금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하얀 독수리가 나오기 전이라면 또 모를까. 이미 몸빵은 충분하잖아? 길게 보자. 길게.

    상징에 대한 문제를 일단락하고 앱을 종료하려고 할 때였다.

    "음?"

    내 눈가에 반짝이는 게 들어왔다. 바로 자유 임무였다. 오늘 자정이 지날 때 자동으로 자유 임무가 생성 된 듯 싶었다.

    호기심이 든 나는 얼른 자유 임무를 열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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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회차 자유 임무]

    + 최대한 많은 몽마를 절정에 오르게 하라.

    + 임무 현황 : 0/30

    + 기본 보상 : 음격 1단계 상승

    + 우승 보상 : 퀴네의 사슬 투구

    + 자유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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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씨……. 왜 하필! 왜!"

    짜증이 썰물처럼 밀려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젯밤 제대로 미쳐 날뛰었건만 자유 임무는 오늘부터 적용됐다. 당연히 어제 사냥한 서른일곱 마리의 몽마는 카운트 되지 않았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짜증을 부렸지만, 그런다고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유 임무를 닫아 버렸다.

    "그래도 해야겠지. 서른 마리라. 이달 말까지 3주정도 남았으니까. 하루에 2마리면 기본 보상은 받겠네."

    말은 그렇게 해도 나름 우승을 꿈꿨다. 단순한 호기가 아니었다. 남들보다 하루라도 먼저 자유 임무를 받게 된 이상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생각됐다.

    너무 무리하지 말자. 꾸준한 게 중요하니까.

    우승을 위해 무리할 생각은 없었다. 오늘만 해도 어젯밤 무리한 덕분에 하루를 공으로 날릴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다.

    과유불급이 딱 어울리는 순간이지.

    적절한 페이스 조절을 다짐하며 자유 임무창을 닫았다. 이제 더 할 게 없을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 있었다.

    "매일 일어나면 전혼 낚시부터 해야겠어. 한동안 알람을 해 놓고. 버릇을 들여야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아이템 중 한 가지만 가질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무조건 영혼의 낚싯대를 고를 확률이 100%였다. 물론 치명도 40이나 올려주는 과부 제조기의 상징도 좋고, 더 이상 얻을 수 없는 헐벗은 선녀의 상징도 좋았다.

    거기까지였다.

    아무리 두 상징이 탐나더라도 영혼의 낚싯대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매일 랜덤으로 전혼 하나를 얻는다는 것은, 곧 이레에 금화 2개씩 공짜로 얻는 것과 같았다. 은화로 치면 3일에 2개였다.

    "금화 2개로 전혼 7개를 사냥할 수 있으니까. 은화 2개는 3개지만. 하여튼 사행성 디테일 쩌네."

    얼마 안 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금화 하나에 1,000 경험치였고, 은화 하나에 500 경험치였다. 역산 효율이 낮은 금화로 쳐도 하루에 285 이상의 경험치를 얻는 것과 같았다.

    "단순 계단을 제하더라도, 상급 전혼이 나오면 대박이니까."

    실실 웃으며 나는 전혼 사냥창을 열었고, 그 즉시 낚싯대를 클릭하며 사냥을 시작했다.

    두근, 두근.

    빠르게 그림이 돌아갈 때마다 내 심장이 쫄깃해졌다. 도박에 중독되면 안 되는데. 걱정이 들었지만, 이미 늦은 듯 싶었다.

    두 손을 모은 채 정체불명의 기도를 하는 사이 두 번째 전혼 사냥이 끝났다.

    철컥.

    ['주홍 늑대의 영혼 1개'를 획득합니다.]

    "늑대?"

    어제와 다른 동물의 영혼이 나왔다.

    내 손이 저절로 움직이며 보관창에 들어간 노란 늑대의 영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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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홍 늑대의 영혼]

    + 등급 : 천민 4단계

    + 성장 : 50/75

    + 효과 : 치명 증폭 90%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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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음.

    애매했다. 아니, 객관적으로 보면 꽤 괜찮은 효과였다. 다만 계급이 마음에 걸렸다.

    "계급 차이가 좀 크네. 귀족 2단계랑 천민 4단계라. 아무리 남자는 한 방이래도, 이건 못 바꾸겠다."

    아쉽지만 하얀 독수리가 더 마음에 들었다. 자그마치 1,700의 활력이었다. 치명 증폭 90%가 늘어나는 것도 엄청났지만, 이 단숨에 최대 활력이 3배로 뛰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 치명도가 60이니까. 90% 데미지가 늘어봤자, 대충 계산하면 한 30% 증뎀인가?"

    혹시 몰라 핸드폰 계산기로 두드려보니 30%도 나오지 않았다. 250%에서 340%로 데미지가 늘어나봤자, 60%의 치명타 확률로는 1.28배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깔끔한 결과를 얻은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려고 했지만…….

    우두둑!

    "……커억!"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았다. 뜨끈한 물에 잠시 풀렸던 근육은 소파에 기대고 있는 동안 다시 굳은 상태였다. 갑자기 전신의 모든 근육이 쥐어짜지는 고통은 끔직했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쉬어야 할 듯 싶었다.

    ========== 작품 후기 ==========

    절대 평민 승급 후 바뀌는 걸 까먹은 게 아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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