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16화 (1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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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6,000.

나 원장의 몸 안에 살고 있는 코끼리의 위엄은 대단했다. 고작 한 끼에 48만원이라는 거금이 사라졌다. 물론 내 재력을 알고 있기에 스스럼없이 허리띠를 풀었겠지만, 그래도 그녀의 식성은 정말…….

어휴. 조심하자. 이 아줌마 먹성을 까먹다니. 아니, 그것보다 내 허세가 문제였나?

"그나저나 무슨 1인분에 4만5천원이나 해? 진짜 고기 집에 가서는 맛만 보고 밥이랑 찌개로 배를 채우라고 하는 이유가 있었구나. 썩을."

괜히 호기 부린 결과는 처참했다. 평생 먹고 살 걱정 없이 살 재력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시 한 번 큰 유산을 물려주신 부모님과 유산을 잘 관리해준 삼촌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잠시 한날한시에 나를 떠난 부모님이 떠올라 슬퍼졌다. 씁쓸한 이야기지만 애잔한 마음은 오래가지 않아 사라졌다. 20년도 더 된 일이다보니 솔직히 이제는 부모님을 생각해도 덤덤했다.

"그래도 고기는 맛있었으니까. 그래도 그 동네 다시는 안 간다."

비록 고급을 처발처발한 고기 집이었지만 누군가와 함께 식사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그것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가 있었다. 특히 나에게는 더욱더 그랬다.

나 원장을 알게 된 뒤로 내가 점점 평범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나를 사람처럼 만들어주는 그녀에게 돈 몇 푼이 아까울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내가 그녀에게 빚을 졌다고 할 수 있었다.

"진료비만 해도 중고차 한 대는 뽑았겠다."

언제부턴가 나 원장은 내게 진료비를 받지 않았다. 아예 진료라 생각하지 않는 듯 친구처럼 대했다. 그런 그녀에게 고기값을 아까워하는 건 정말 아니었다.

요즘 나 쌤 병원을 찾는 사람도 준 것 같은데. 내가 평생 고기 셔틀, 그것도 소고기 셔틀 해줄게.

"벼룩의 간을 날름 먹을 순 없으니까."

기분 좋은 포만감과 따스한 봄 날씨가 합쳐지니 슬슬 춘곤증이 몰려왔다.

"후암. 안되지. 아직은 아니지. 오늘은 정말 쉬어야 해. 이러다가 이 녀석이 걸레짝으로 변하겠다."

밀려오는 수면욕을 억지로 밀어내며 나는 욕실로 들어갔다. 이럴 때 찬물로 씻는 게 최고였다. 가볍게 찬물로 씻고 나오자 정말 거짓말처럼 졸음이 사라졌다.

정신을 다잡은 나는 거실 탁자 위에 있는 렙탑을 집어 들고 서재로 들어갔다. 나 원장 덕분에 굵직굵직한 정보는 알았지만 디테일이 부족했다. 등받이가 있는 사장님 의자에 앉으며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을 검색해 보았다.

신이라 불리는 사나이. 아니, 검색 엔진을 이용하니 수많은 자료가 나타났다. 백만이 넘는 자료에 나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곧 지난 이틀 동안 2초에 한 번씩 새로운 글이 인터넷에 올라왔다는 걸 의미했다.

"진짜 신드롬은 신드롬이네."

보스에 관한 글은 많았지만 막상 필요한 정보는 잘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저런 검색어를 추가하고 제거하며 계속 검색을 하다 보니 그나마 괜찮은 결과가 나타났다. 그것도 국내 사이트였다.

단정한 수귀 공략.

짧은 제목과 달리 글 내용은 풍성했다.

나도 모르게 공략글이라고 써 놓은 걸 숨소리도 내지 않고 읽어 보았다. 공략법은 경험치로 미리 물약을 사 놓는 것과 추천 스탯이 주된 내용이었다. 다만 내 경험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사실 차이가 없으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했다.

"어쩔 수 없지. 개사기 버프 빨이 있으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 맞는 말인데? 대단하네."

솔직히 감탄했다. 나야 디테의 버프 빨로 수월하게 몽마의 성체를 정복하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아무런 도움 없이 스스로 1층 보스를 사냥한 건 대단한 일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댓글을 확인해 보았다.

그 순간 내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아무리 인터넷이라지만……."

원색적인 비난이 즐비했다. 누군가는 글쓴이의 경험을 의심했고, 누군가는 헛소리로 치부했다. 간간히 글쓴이에게 동조하거나, 감사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본디 검은 때가 더 잘 보이는 법이었다.

마우스 휠을 굴리면 굴릴수록 댓글은 점점 점입가경으로 치달았다. 글쓴이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서로 물어뜯기 바빴다. 나는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뒤로 다양한 글들을 뒤져보았지만 내게 도움이 되는 정보는 딱히 없었다. 오랜만에 영어를 써서 외국 사이트를 뒤져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인터넷에 국경은 없었고, 어그로는 만국공통이었다.

결국 피곤에 치인 나는 렙탑을 닫아 버렸다.

"제대로 된 사이트가 있으면 좋겠는데. 아쉽네."

정보의 홍수. 인터넷의 흔한 별명이었다. 실제로 인터넷은 정보의 홍수였다.

홍수는 결국 자연재해였다.

온갖 정보 속에서 얻은 게 아무것도 없지는 않았다. 대체로 사람들. 그러니까 성투난무 참가자들의 수준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물론 신빙성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대충 가늠하는 정도는 될 것 같았다.

"간간히 1층 보스를 깼다는 사람들이 보이는 걸 보니까, 방심하면 안 되겠는데?"

원래 은거기인이 강한 법이었다. 나만해도 인터넷에 글을 쓰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었다.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실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정보들이 빠르게 정리되어 나갔다. 그 중 필요한 정보는 남겨두었고, 필요 없는 정보는 가차 없이 지워버렸다.

정보를 정리하다보니 참 사람은 다양하다는 걸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튜토리얼에서 닥사라니……."

참가자들 중에는 같은 몽마를 반복해서 사냥하는 이들이 존재했다. 방식은 간단했다. 흑문을 통해 꿈에서 깨고 24시간 뒤에 다시 꿈을 꾸면 사라졌던 몽마가 다시 나타나난다고 했다.

비록 빠른 경험치 획득은 불가능했지만, 확실히 안전한 방식이었다. 게다가 이 방법에 대해 알린 글쓴이는 앞으로 계획도 써 놓으며 여기가 끝이 아님을 알렸다. 나름 똑똑한 사람 같았다.

"레벨업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다시 닥사하고. 다시 레벨업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꼭 나쁘다 할 수는 없겠네."

시간을 제외하면 가장 안정적이면서 확실한 방법임에는 확실했다.

물론 끌리지 않았다.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격차가 벌어질 게 뻔했다.

"지금 내가 2층 보스를 잡았는데. 이제 두 번째 방이라니. 이건 아니다. 아무리 안전해도 내 방식은 아냐."

감히 타인의 선택에 왈가왈부하는 오지랖을 펼치지는 않았다. 단지 그들의 선택을 인정하며 나는 나만의 선택을 할 뿐이었다. 나는 조급한 것도 싫었지만, 굼뜬 것도 싫었다.

이왕 받은 버프는 최대한 이용하는 게 좋으니까.

아흠, 그런데 왜 이렇게 졸립지. 아, 안 되는데. 아직 해도 안 떨어졌는데. 알아낸 것들도 정리해야…….

방심한 사이 수마가 나를 덮쳤다.

***

"선생님. 그럼 저 먼저 퇴근할게요!"

"응. 조심히 들어가……벌써 갔네. 칫! 계집애. 남자친구 생겼다 이거지?"

나수정은 서진영이 쌩하니 사라지고 닫힌 출입문을 보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녀가 서운해할만도 했다. 남자친구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서진영은 매일 퇴근할 때 술친구를 해달라며 나수정을 괴롭혔었다.

잠시 서운한 마음도 들었지만 나수정은 부정적인 마음을 오래 담아주지 않았다. 그녀도 서둘러 퇴근 준비를 했다. 놀 사람이 없다지만 청승맞게 불 꺼진 병원 안에 혼자 있는 건 싫었다.

원장실로 들어갔던 나수정은 금세 로비로 나왔다. 딱히 준비할 게 없었다. 이런저런 잡동사니가 들어있는 작은 가방과 외투를 챙기면 끝이었다.

가방을 메고 병원 밖으로 나선 나수정이 뒤꿈치를 바짝 치켜세우며 현관문을 잠갔다. 문을 살짝 당겨보며 제대로 잠갔는지 확인한 그녀는 미련 없이 걸음을 돌렸다. 열심히 일했으면 열심히 쉬어야했다.

워낙 주택가에 자리 잡은 병원이라 그런지 주변 길은 북적거리지 않았다. 그녀는 낭랑하게 대로를 혼자 걸으며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나수정의 얼굴에 분노가 일었다.

"씨이. 결혼하더니 다 배신자가 됐어. 어떻게 읽지도 않을 수 있어!"

메시지를 보낸 지 5분이 지났지만 숫자 1은 사라지지 않았다. 함께 수련한 동기고 뭐고 없었다. 이렇게 결혼이 무서운 거였다.

그 뒤로 나수정은 친하게 지냈던 몇몇 동기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결과는 한결 같았다. 숫자 1은 여전히 석상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나쁜 년들."

고운 입술에서 거친 목소리가 튀어 나오고 말았다. 나수정도 사람이었다.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씩씩거리며 오기를 부렸지만 화만 났다.

결국 나수정은 입술을 쭉 내밀고 쭉 뻗은 오피스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이 바로 그녀의 집이었다. 비록 현대식으로 잘 지어진 건물이었지만 반겨주는 이가 없는 그곳은 조금 쓸쓸하게 느껴졌다.

대충 구두를 벗어 놓고 가방과 외투를 거실 소파에 던진 나수정의 입술은 여전히 댓발 나와 있었다. 씻는 것도 귀찮았는지 그녀는 스타킹을 주욱 벗더니 냉장고에 있는 캔 맥주를 꺼내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 짧은 사이에 나수정은 멋진 의사선생님에서 방구석 폐인처럼 변해 있었다.

질겅질겅.

어디서 튀어 나왔는지 조금 오래된 것 같은 오징어가 나수정의 입에서 사정없이 씹혔다. 마치 그녀의 연락을 씹는 동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여전히 오징어 다리를 씹으며 그녀가 훌러덩 정장을 벗어 재꼈다.

……기대한 움직임은 없었다.

주위에 너부러져있던 츄리링을 주워 입은 나수정이 벌러덩 소파에 드러누웠다. 그녀의 손에는 시원한 맥주 캔과 TV 리모컨이 들려 있었다. 물론 입에서는 여전히 오징어 다리가 꿈틀거리는 중이었다.

"뭐, 재밌는 거 없나. 아직 드라마 할 시간은 멀었는데."

무의식적으로 TV 화면을 돌리던 나수정이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탁자 위를 주섬주섬 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찾던 것을 발견했는지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요 녀석! 여기 숨어있었네?"

나무젓가락.

튀김용 나무젓가락을 집어 든 나수정이 머리 망을 풀어 헤쳤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찰랑……거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냥 긴 머리카락을 대충 휘감더니 역시 대충 젓가락을 꽂아 고정시켰다.

탁자위로 머리 망을 툭 던진 나수정이 다시 소파에 들어 누웠다. 참 일관적인 여자였다. 그녀는 그 뒤로도 드러누운 채 맥주와 오징어를 즐기며 배를 까뒤집고 벅벅 긁었다.

잠시 백수녀 코스프레를 하던 나수정이 슬쩍 옆에 놓인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여전히 숫자 1은 사라지지 않았다. 화가 난 그녀는 거칠게 스마트폰을 뒤집어 놓고 다시 TV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오늘 너무 많이 나온 거 아닌가? 다음에는 내가 끌고 가서 사야지."

뒤늦게 오늘 점심 값이 떠오른 나수정이 머쓱한 얼굴로 이마를 긁었다. 그녀도 양심이 있었다. 오늘 식대는 한 끼 식사라고 치부할 정도로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아무리 방구석 백수처럼 지낸다지만 나수정은 전문의였다. 박고영은 그녀의 병원 운영을 걱정했지만, 그래도 먹고 살 정도는 됐다. 그런걸 보면 그녀의 실력이 썩 괜찮은 듯 싶었다.

바보상자에 정신 줄을 놓다보니 어느덧 밤이 깊었다.

나수정은 뒤늦게 자정이 다됐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씻기는 하는지 욕실로 들어갔던 그녀는 꽤 오랫동안 몸을 씻었다. 깨끗한 타월차림으로 욕실을 나선 그녀의 얼굴에는 잡티하나 없었다.

짝!

"내일 치우자. 내일 꼭!"

잠시 돼지 우리. 아니, 거실을 바라보던 나수정이 자신의 양볼을 때리며 약속했다. 글쎄다. 그 약속이 지켜질 것 같지는 않았다.

거실과 달리 나수정의 침실은 나름 깔끔했다.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침대 위로 올라간 나수정이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편안함에 그녀가 행복한 미소를 살짝 베어 물었다. 정말 나이와 달리 어리게 사는 그녀였다.

금방이라도 불을 끈 채 잠에 들 것 같았던 나수정이 좀처럼 잠을 청하지 못하고 있었다. 언뜻 그녀의 얼굴에 고민이 보였다. 언제나 활달한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씨잉……. 이대로 자면 자궁으로 끌려 갈 텐데. 아, 어떡하지? 진짜 싫은데……."

박고영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던 나수정이었다.

이제 보니 다 허세였다. 자신의 오른 손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두 눈은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수정은 박고영과 별반 다르지 않은 신세였다.

그녀는 처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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