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15화 (1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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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쩍.

    두 눈이 떠졌다.

    익숙한 침실 천장이 보였다.

    아, 돌아왔구나. 그래 돌아왔지. 에효.

    아직 잠에 취한 머리를 깨우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날 때 내 입에서 괴상한 신음이 흘러 나왔다.

    "으음……."

    보스가 나타난 뒤로 잠을 자도 썩 개운한 것 같지 않았다. 그것이 아니면 전투 여파일지도 몰랐다. 이유가 뭐가됐든 찌뿌둥한 몸을 깨우기 위해 일단 찬물로 씻고 싶었다.

    저벅저벅.

    좀비처럼 걸어 욕실로 들어가는 내 신세가 왠지 짠했다.

    어쨌든 시원하게 샤워를 하자 그나마 정신이 돌아왔다. 욕실에서 나온 나는 여느 때처럼 거실을 가로질러 냉장고 앞에 섰다. 활짝 열린 냉장고 문 사이로 찬 공기가 튀어나와 내 얼굴을 적셨다.

    아, 장보는 걸 깜빡했네.

    냉장고 안은 여전히 생수밖에 없었다. 그 중 하나를 꺼내든 나는 벌컥벌컥 시원하게 마셨다. 갈증이 가시며 확실히 정신이 돌아왔다.

    생수를 냉장고로 돌려놓고 몸을 돌리는 순간 내가 그대로 얼었다.

    스윽.

    불안감이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침임에도 여전히 조용히 잠들어 있는 엑스칼리버가 보였다. 나는 슬쩍 반바지를 들어 보았다.

    젠장.

    엑스칼리버는 단순히 잠든 게 아니었다. 녀석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악전고투를 치르다보니 성한 곳이 없었다.

    "아주 잘근잘근 씹어놨네. 근데 꿈이라며? 꿈에서 겪은 게 현실에도 적용된다고?"

    문득 이상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달았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무덤덤하게 여긴다고는 하나 꿈은 꿈일 뿐이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다는 사실에 나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나 원장의 지식이 필요했다.

    ***

    집을 나선지 두 시간이 지났을까.

    내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뒤섞인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러니까 일종의 잠꼬대는 말이지?"

    "그럴 가능성이 높지. 비슷한 사례들이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보고되고 있을 걸? 오늘 자기 전에 두 손에 수갑을 채워 봐. 그럼 확실할 테니까."

    "전문의씩이나 돼서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해도 되는 거야?"

    다리를 꼰 채 커피를 홀짝거리는 나 원장에게 투덜거렸지만, 그녀는 그저 어깨를 살짝 으쓱여 보일뿐이었다.

    하여튼 돌팔이. 그나저나 표정을 보니 정말 별 거 아닌가 보네. 다행이다.

    나와 같은 증상을 겪은 사람들이 전 세계에 즐비하다는 사실이 정말 큰 위안이 됐다. 덕분에 나는 더 이상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거릴 필요가 없어졌다. 내 변화를 읽은 나 원장이 작게 웃으며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연고라도 줄까? 어디 한 번 누나가 진찰해줘? 나름 인턴 때 외과도 돌았으니까."

    "됐네요. 그나저나 진짜 세상이 미쳐 돌아가나."

    "미쳐 돌아가지. 지금 각국 정부는 전부 패닉일 걸?"

    나 원장의 뜬금없는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왜긴 왜야. 아무리 그래도 뉴스 좀 보고 살아라. 지금 몇몇 나라에서 시민들이 난리잖아? 우리나라도 인터넷은 더 없이 뜨겁고."

    "설마 이걸 해결하라고? 미친 거 아냐?"

    "사람은 다양하니까. 어쩔 수 없는 정부의 숙명이랄까?"

    에이, 그래도 이건 아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실체 없는 문제를 해결하라? 그것은 천조국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나름 시니컬하게 코웃음을 치며 나 원장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외계인이면 나았지. 이건 그게 아니잖아? 뭐, 딱히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아예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니까. 물질적 피해만 피해야?"

    "그건 아니지만……."

    "그리고 사람들은 진짜 정부가 보스를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냐. 그저 정부가 국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거지. 불안하잖아? 미지의 존재가 우리의 머릿속에 들어온다는 게."

    나 원장이 달라보였다. 그동안 조금 맹한 옆집 누나 같았는데. 이제 보니 그녀는 나름 똑똑한 여자였다.

    "그나저나 보스를 만든 이유가 뭘까?"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네. 단지……."

    "단지?"

    나는 잠시 말을 아끼는 나 원장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내 노골적인 재촉에 나 원장이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개방성이 뛰어난 사람들이 난리치는 게 좀 걱정돼서."

    "개방성? 아, 광신도들?"

    "얘는. 말을 해도 꼭. 아무튼 그런 사람들이 일종의 계시로 받아들이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걱정 돼. 가뜩이나 복잡한 세계 정세인데."

    "흠. 엄한 사람이 피해를 입겠네."

    "그럴지도……."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아무리 내가 큰 트라우마를 두 개나 가지고 있다지만 공감 능력이 없는 미친놈은 아니었다. 고작 꿈에 불과한 현상이 현실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인간은 허상에 휘둘릴 정도로 나약한 존재니까.

    에이, 괜히 꿀꿀해지네.

    깊게 생각하는 건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스스로 밝은 사람이라 최면을 걸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애써 활짝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만하자, 이런 이야기는. 어차피 미친놈들이잖아? 언제고 사고 칠 놈들이야."

    "그럴지도 모르지."

    "그나저나 방송계는 호재네. 이야깃거리가 많으니까. 아니다. 나 쌤도 갑자기 성수기를 맞은 거 아냐? 손님이 늘지 않았어?"

    "환자! 손님이 아니고 환자라니까."

    "아, 실수! 미안합니다."

    은근히 깐깐한 나 원장이었다. 이럴 때는 깔끔하게 사과하는 게 최선이었다. 괜히 억지 부리다가 된통 당할 테니까.

    그 뒤로 나 원장의 잔소리가 이어졌지만, 재빠른 사과 덕분에 큰 사달이 나지는 않았다.

    폭풍 잔소리를 끝낸 나 원장이 목이 말랐는지 커피 잔을 들어 살짝 입을 축였다. 아니었다. 벌컥벌컥 원샷 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살짝 움츠렸다.

    조심해야겠다.

    달그락.

    나름 거칠게 커피 잔을 내려놓은 나 원장이 잠시 나를 노려보더니 이내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도 전 세계 석학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다고 하니까. 조만간 무슨 결론이 나오지 않을까?"

    "그래? 뭐, 머리 아픈 이야기는 그 사람들끼리 하라고 하고. 나야 썩 나쁘지 않으니까."

    "나쁘지 않아?"

    "그럼. 나쁘지 않지. 그래도 꿈에서는 이 녀석이 용트림을 하니까."

    "뭐? 푸훕!"

    나 원장이 빵 터졌다.

    어이, 나 쌤. 지금 그거 비웃은거야? 그런 거야?

    뒤늦게 내가 와락 얼굴을 일그러트린 걸 확인한 나 원장이 서둘러 헛기침을 하며 수습하려고 했다.

    늦었어, 이 노처녀야.

    물론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천성이 착한 나 원장은 금세 표정을 되돌리며 자신의 실수를 무마하려 나섰다.

    "미안. 그런 단어를 들을 줄은 몰랐어. 방심했다가 빵 터졌네. 미안, 미안해. 화 풀어. 응? 고영아아아."

    "이미 늦었어. 애교 부린다고 될 문제가 아냐. 이미 내 자존심은 저기 있는 쓰레기통에 처박힌 지 오래야."

    "내가 꺼내다 줄까? 응? 으응?"

    "됐거든요."

    내가 고개를 홱 돌리며 팔짱을 끼자, 나 원장이 곁으로 와서는 내 팔을 잡아당기며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귀여운 척. 아니, 내 팔에 매달린 나 쌤은 좀 귀여웠다.

    에이, 남자가 화내서 뭐해.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야지.

    결국 내 화는 금세 물에 빠진 솜사탕처럼 변했다.

    달달한 기분을 조금 더 느끼고 싶었지만, 그보다 더 궁금한 게 있었다. 나름 호기심 많은 나 원장이라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보스에 관한 정보와 사례들을 찾아봤을 게 분명했다. 그녀는 박학다식하니까.

    슬쩍 나 원장의 손을 잡아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됐어. 그것보다 뭐 새로운 거 나온 거 있어?"

    "응? 뭐? 아, 보스?"

    나 원장이 내 질문을 확인하며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나 원장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나 원장은 내 행동에 놀라거나하지 않았다. 우리는 친했다.

    잠시 주먹 쥔 손으로 입을 막으며 골똘히 생각하던 나 원장이 이내 말문을 열었다.

    "딱히 새로운 건 없던데? 너처럼 꿈을 꾸고 나서 몸에 상처가 있다는 사람들은 좀 되는 것 같더라. 근데 상처 부위가 일괄되는 게 좀 의외였어. 남자는 성기에 집중적으로 상처가 나 있었고, 여자는 가슴에. 물론 상처가 크고 작은 차이는 있었지만."

    "그래? 그럼 정말 나만 이상한 게 아닌가 보네?"

    "그렇지. 딱히 몽유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도 아니라니까. 너도 몽유병은 없었잖아?"

    "나야 한 번 자면 불이 나도 모르니까."

    "하여튼……. 아무튼 그리고, 아! 맞다!"

    내 너스레에 나 원장이 슬쩍 눈을 흘겼다. 그것도 잠시 그녀가 박수를 치며 눈을 반짝였다. 무언가 새로운 게 떠오른 듯 했다.

    나 원장이 살짝 신난 목소리고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꼭 밤에 잠을 자지 않아도 몽마의 성체로 갈 수 있대!"

    "뭐? 그게 가능해?"

    "응. 가능해. 생각해보면 간단한 방법이더라."

    나 원장이 잠시 뜸을 들였다. 그녀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에 나는 화를 낼 수 없었다. 마치 문제의 정답을 맞춰보라는 것 같았다.

    까짓것 장단을 맞춰주지.

    잠시 고민을 해 보았다.

    무슨 방법이 있을까? 현실에 출입구가 있을 리는 없잖아? 꿈은 잘 때만 꿀 수 있는 거 아닌가?

    아아.

    그랬구나.

    정답은 금세 나왔다.

    내 표정 변화를 본 나 원장이 참 잘했다는 듯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정답을 알았나 보네?"

    "어. 간단하네. 나 원 참."

    "그래? 그럼 정답이 뭘까? 두구두구두구!"

    나 원장이 입으로 북소리를 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참 귀여운 친구다. 의사이기 이전에 그녀는 내게 거의 없는 친구였다.

    이왕 장단을 맞춘 김에 끝까지 나 원장의 장난을 받아주었다.

    "정답."

    "네, 말해보세요."

    "낮잠."

    "딩동댕! 정답입니다! 참 잘했어요!"

    어이, 머리를 쓰다듬지 말지?

    내 머리를 쓰담쓰담하는 나 원장의 손길은 부드러웠다. 원래 누가 내 머리를 만지는 걸 싫어하다보니 미용실도 잘 가지 않는 나였지만, 그녀의 손길은 예외였다. 작은 손이 참으로 따스하기도 했다.

    "애도 아니고. 근데 진짜 낮잠을 자도 몽마의 성체로 가는 거야?"

    "응. 내가 직접 실험을 해봤지!"

    "올, 의심병. 아야!"

    슬쩍 농을 던졌다가 호된 꼬집기가 내 팔뚝에 들어왔다.

    쓰읍. 진짜 드럽게 아프네. 조만한 손이 뭐 이렇게 매워?

    "아무튼 잠에 빠지면 바로 몽마의 성체로 의식이 이동하는 거 같아. 벌써 연구진이 연구를 시작했는데, 결과는 영 신통치 않은 거 같더라."

    "연구? 잘 때 온 몸에 이상한 빨판 같은 거 붙이고하는 그런 거야?"

    "풋! 어, 그런 거야. 근데 평소와 별 차이가 없대. 결국 우리 인류의 과학으로 설명 불가능한 현상이라는 걸 증명한 거지."

    "골 때리네. 그나저나 나 쌤은 걱정도 안 들어? 나야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다지만."

    "무슨 걱정?"

    내 물음에 나 원장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반문했다. 순진무구한 눈빛 속에는 장난기가 다분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말을 하게하려는 술수였지만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그냥 모른척했다.

    "만약 보스가 현실에도 적용될 수도 있잖아? 꿈을 조작하는데, 현실이라고 조작 못하겠어?"

    "그렇지.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걱정 안 돼? 전쟁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몽마. 결국 악마들이 현실에 나타날 수도 있는데."

    "글쎄. 그건 너무 비약이 아닐까? 악마들이라도 실체가 있을 거 아냐? 악마라고 맨몸으로 우주를 유영해 올 수 있을까? 그건 힘들 것 같은데? 만약 실체가 없으면 몽마니까 여전히 꿈속에서나 나타날 테고."

    묘하게 설득력 있었다. 확실히 나 원장의 말이 맞았다. 악마든 뭐든 걸어서 지구까지 오려면 억겁의 세월이 필요하지 싶었다.

    "그것보다 다른 문제가 하나 있긴 해."

    "응? 다른 문제?"

    "꿈속에서 몽마와 싸우는 대신, 지구에서 인간끼리 싸우는 방식으로 변할 수도 있으니까."

    확실했다. 나 원장은 나보다 똑똑했다.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건데.

    이마에 주름을 만든 나는 설마 하는 눈으로 나 원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학자들도 가능성이 있다고 하네. 꿈을 통제한다는 건 결국 우리의 잠재적 무의식을 통제하는 것과 같잖아? 아직 우리도 정복하지 못했는데. 물론 육체를 지배하는 것까지는 무리겠지만, 통제로 시스템을 이식하는 건 가능할 수도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

    "이제 겨우 이틀 됐는데 별 이야기가 다 나왔네."

    내 어이없어하는 반응에 나 원장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녀도 솔직히 조금 황당하긴 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호기심이 강한 과학자들이라고는 하나 별 생각을 다한다 싶었다.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확인하다보니 어느덧 시간이 점심을 훌쩍 지나있었다. 뒤늦게 내가 나 원장의 시간을 너무 뺏었다는 걸 깨달았다. 괜히 미안해졌다.

    "뭘 또 미안해하는 거야? 됐어. 나도 재밌으니까 그냥 앉아서 떠들은 거지."

    "하여튼 귀신이네, 귀신이야. 내가 잘 때마다 내 머릿속을 열어보기라도 하는 거야?"

    "그럴 필요가 있나? 얼굴에 빤히 보이는데. 아,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갈래?"

    자연스럽게 나 원장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입을 가만두지 않았다. 나도 은근히 수다스러웠지만, 그것은 나 원장도 마찬가지였다.

    괜히 들뜬 마음에 나는 호기롭게 선언했다.

    "좋지. 시간도 많이 뺏었는데 오늘은 이 오빠가 쏜다!"

    "진짜? 오빠! 오라버니! 고기, 고기 사 주세요! 소고기! 한우로!"

    나 원장이 팔짱을 껴오며 기쁨의 표호를 질렀다. 폴짝폴짝 뛰는 모습이 영락없는 돈가스 먹으러가는 어린아이였다. 하여튼 요물이었다.

    근데 이 친구가 이렇게 발랄했나? 아닌데. 오늘따라 왜……아!

    깜빡했다.

    그녀의 몸 안에는 코끼리가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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