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7화 (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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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마가 사라졌다.

    분홍빛으로 화했던 몽마가 내 물건에 흡수되어 사라지는 순간 공간이 무너졌다. 어둠을 흐르던 강물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푹신푹신한 융단이 깔린 회색의 방이 나타났다.

    "좀 아쉽네. 그래도 몸매 하나는 끝내줬는데. 진짜 엘프가 따로 없었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뒤로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사라진 몽마에 미련을 둘 필요는 없었다. 내 몸이 왼편에 자리한 백문을 향해 돌아갔다.

    "백문이 다음 단계고, 흑문이 게임 종료라고 했지?"

    직무유기의 표본인 디테로 인해 사전 지식이 부족했지만 상관없었다.

    "이래봬도 내가 게임 센스가 프로게이머 급이라고."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백문을 향해 걸어갔다. 망설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직무 유기의 표본인 디테로 인해 사전 지식이 없지만 방금 전투를 통해 자신감이 하늘을 뚫고 태양계 밖으로 날아간 상황이었다.

    공간이 변하며 크기까지 줄었기에 얼마 걷지도 않고 백문에 다다랐다.

    멈칫.

    처음 당찬 포부와 달리 내 손은 소심하기 그지없었다. 평범한 문고리 앞에서 내 손이 전진을 하지 못했다. 결국 내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 나왔다.

    "후우……. 빌어먹을."

    마음의 벽에 막힌 손을 내린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처음 당황했던 것이 전투를 치르며 사라지자, 이성이 다시 돌아와 나를 설득했다. 잠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알몸으로 앉은 나는 턱을 괴며 혼자 고민했다.

    "일단 여긴 현실이 아니지. 그리고 꿈도 아니고. 아니, 디테의 말대로라면 일종의 꿈이라고 해야 하나? 근데 감각이 느껴지는 꿈이 있던가?"

    짧은 지식으로는 도저히 지금 상황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흑문을 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70억 지구인 중에는 똑똑한 놈들도 많았고, 그들이라면 어찌어찌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고민도 잠시 고개를 저었다.

    "이걸 나만 겪은 거라면? 아, 미치겠네. 진짜. 어떡하지?"

    직무유기가 이렇게 무서운 거였다.

    몇 번이고 한숨을 쉬며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딱 떨어지는 건 없었다.

    당황, 공포, 의문, 환희, 경악.

    몽마의 성체에 온 뒤로 느낀 감정을 따져보면 딱히 긍정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부정적인 감정을 더 많이 느꼈었다. 그저 디테에게 동정을 털리고 정신이 반쯤 나가서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니 다시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이거 외계인한테 납치당한 거 아냐? 아니면 여기가 51 구역인가? 아니, 아니지. 나 같은 놈을 왜 납치하는데? 아, 진짜 뭐지?"

    한참을 홀로 웅얼거리며 생각해 보았지만 여전히 결론은 잡히지 않았다.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납치당한 것이라면 내가 어떻게 손을 써볼 수 없지 싶었다. 주도권을 잃은 게 확실한 상황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결국 내 손에 달린 게 아니라, 남의 손에. 보스의 손에 달린 건가?"

    실소가 흘러 나왔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막장이라며 헬 조선이니 뭐니 하지만 그래도 우리나라는 나름 현대적 민주주의 국가였다.

    "아, 북한 사람들이 매일 이런 기분으로 살겠구나. 안 됐네."

    뜬금없는 인권에 대한 깨달음이 찾아왔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내공이 사지백해로 뻗으며 환골탈태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냥 씁쓸했다.

    "결론은 정해졌네. 좀 엿 같지만 순응하게 적응해야하는 건가? 아, 이런 건 좀 싫은데."

    반골 기질이 충만했던 10년 전이라면 혼자 난리치고 성질을 부렸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아니었다. 서른 쯤 되다보니 한창 때보다는 성격이 좀 무뎌졌다.

    묵묵히 상황을 인지하고 인식한 덕분일까.

    심적 고통은 딱히 없었다. 20대를 파란만장하게 보낸 덕분인지 웬만한 일에 놀라지 않게 돼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내 물건이 물러질수록 내 정신은 단단해졌다.

    하긴, 20살에 성적 사망 선고를 받고 10년을 살았는데…….

    짝!

    "자, 분석은 똑똑한 사람들에게 맡기고. 나는 즐겨볼까?"

    손바닥이 찌릿할 정도로 세게 박수를 친 나는 애써 밝게 말했다. 이럴수록 긍정적인 생각이 좋을 것 같았다. 우울한 것보다는 해맑은 게 나았다.

    "그전에 좀 눕자. 오래 앉아 있었더니 허리가 쑤시네."

    벌러덩 자리에 드러누우니 등이 시원했다. 실제로 냉기가 등을 타고 올라왔다. 선풍기 바람 정도의 차가움에 가슴이 시원해졌다.

    "그럼 상태부터? 아니지. 게임을 잘하려면 게임에 대해 잘 알아야지. 도움말!"

    깍지 낀 손으로 뒤통수를 받치며 호기롭게 소리치자 일전처럼 수많은 창이 나타났다. 급할 건 없었다. 시간은 많았기에 나는 하나씩 집어 빠짐없이 읽어 나갔다.

    슬슬 등이 아려올 때가 되고 나서야 모든 창을 다 읽을 수 있었다. 다시 자리에 앉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보스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 지 감이 왔다.

    "진짜 RPG 게임이네. 턴이 있고, 턴 마다 공격을 하든, 스킬을 쓰든. 뭐든 한 가지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거지?"

    앞에 누가 있는 것처럼 혼잣말을 했다. 어쩔 수 없었다. 말조차 하지 않으면 공포가 나를 잠식할 것 만 같았다.

    여기는 호랑이 굴이다. 정신을 차리자.

    마음속으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끊임없이 말을 이었다.

    "일단 정리부터 해보자고. 말이 영 이상하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다 손으로 슥슥 글자를 써 보았다. 당연히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단지, 정리를 위한 상징적인 행위에 불과했다.

    음격 = 레벨.

    능력 = 스탯.

    기술 = 스킬.

    몽마 = 몬스터.

    능력치 = 스탯 포인트.

    기술치 = 스킬 포인트.

    말하면서 써보니 딱히 어려운 건 없었다. 그 외에도 칭호가 있었고, 상점이 있었다. 아, 주화(Coin)의 경우 동화, 은화, 금화가 존재했다.

    "음, 상점이라…….상점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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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록 물약 : 100 경험

    + 빨간 물약 : 100 경험

    + 주황 물약 : 250 경험

    + 노란 물약 : 500 경험

    + 하얀 물약 : 1,500 경험

    + 파란 물약 : 2,000 경험

    + 집중의 묘약 : 1,000 경험

    + 각성의 묘약 : 1,500 경험

    + 광분의 묘약 : 3,000 경험

    + 무기 강화제 : 20,000 경험

    + 장식 강화제 : 20,000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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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유 : 100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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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 상점에서 파는 물건의 종류는 11개가 전부였다.

    좀 빈약한데?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말 이게 전부인 듯 했다. 여분의 공간이 없고, 상점 설명에도 11개가 전부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뭐야? 템 사는데 등급을 따져?"

    돈. 아니, 경험치만 있다고 물품을 다 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빨강, 주황, 노랑 물약까지는 노예 계급에서 살 수 있었지만, 하얀 물약은 천민, 파란 물약은 평민 계급이 되어야 살 수 있었다. 아직 쓸 수 있는데도 계급이 필요한지는 알 수 없었다.

    아, 열 뻗히게. 이거 만든 신이란 놈이 명품관 출신인가? 어이고. 강화제는 아예 귀족부터 살 수 있네?

    뒤늦게 방금 전 읽었던 5개의 계급이 떠올랐다.

    노예, 천민, 평민, 귀족, 왕족.

    보스는 5개의 계급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다느니 이걸 말한 거였나?

    순간 뒷골이 땡겼지만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차피 살 수 있는 게 없잖아? 물론 표기되는 건 100 경험이었다. 단지, 그것을 쓸 경우 내 음격이 떨어질 테지만.

    중독을 해소할 수 있는 초록 물약이나, 생명력으로 짐작되는 활력을 100 회복할 수 있는 빨간 물약이나. 둘 다 그림의 떡이었다. 뭐, 딱히 먹음직스러운 떡은 아니었다.

    "스탯 5개가 낫지. 저것보다는. 그나저나 동화 상점을 할까? 말까?"

    살짝 고민이 들었다. 일반 상점과 달리 주화 상점은 해당 주화로 거래할 수 있었다. 게다가 주화 상점을 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1개의 해당 주화를 소비하여야했다.

    잠시 갈등을 했지만 결론은 금세 나왔다.

    "구경 값으로 쓰기는 좀 그렇지. 못해도 2개는 있어야 1원짜리라도 살 수 있으니……."

    언젠가 구경할 수 있는 걸 미리 구경하려고 돈을 소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동화 한 개가 얼마의 가치를 가진지 아직 알 수는 없었지만, 경험치보다는 크지 싶었다. 지금은 조금 참을 때라는 판단이 섰다.

    애써 피어오른 호기심을 짓누르며 화제를 돌렸다.

    "1음격. 그러니까 1레벨 올리면 스탯 포인트 5개를 주고. 그걸 투자하면서 강해지고. 스킬은 기본 스킬의 경우 경험치로 구매를 하고. 스킬 구성에 따라서 전직을 한다? 이거 은근히 복잡하게 설계해놨네."

    혼자 구시렁거리면서도 나는 기술 구매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현재 내가 구매할 수 있는 기술이 촤르륵……열리지 않았다. 지금 내가 구매할 수 있는 건 고작 1개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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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투 입문 : 1 기술치

    + 비활성

    + 비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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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유 : 1 기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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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기술이 하나뿐인 건 아닌 듯 했다. 가장 상단에 있는 기초 수련 아래로 족히 쉰 개는 될 법한 비활성화 창이 존재했다. 검은 색으로 뒤덮여 내용을 알 수는 없었지만 조건을 만족하면 활성화되는 방식인 듯 했다.

    "뭐가 됐든, 우선 읽어 보자고. 설명을 읽는다고 손해 보는 건 아니니까."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기술을 손가락으로 누르자 작은 창 하나가 불쑥 튀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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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투 입문]

    + 성투학개론.

    + 성투 초심자를 위한 지침서.

    + 성투 기술 습득을 위한 필수 과정.

    + 범용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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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 말을 잃었다.

    설명은 그럴듯하게 해놓았지만, 결국 섹스 배틀 입문 기술이라는 말이었다.

    "하하, 하하하……."

    디테의 말이 맞았다.

    이걸 만든 놈은 또라이였다.

    "섹스의 신도 다 있나? 아니지. 강……큼! 아무튼 디테도 신 비스무리한 거 아냐? 뭐, 신이라고 꼭 수도승처럼 지낼 필요는 없잖아? 제우스 같은 놈도 있고."

    신이 꼭 바른 존재일리는 없었다.

    신성한 신들이 있다면, 음탕한 신도 있지 않을까? 악신이나, 마신 이런 말도 있으니까.

    이미 과학적 원리는 우주 미아가 된 지 오래였다. 우주에 대해 깊게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법이었다. 이럴 때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따라야했다.

    "포기하면 편하지. 암, 그렇고말고."

    정말 포기하니 편했다.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과학을 잠시 옆으로 비켜놓아도 괜찮지 싶었다. 내 머리의 성능은 내가 잘 알았다.

    나는 오래전 대관령을 오르던 티코가 퍼진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차피 배워야 할 거니까."

    지금 당장 배울 수 있는 기술이 하나뿐이었다. 게다가 설명을 보아하니 기초 수련을 배워야 다른 기술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게임으로 치면 스킬 트리의 시작 스킬이었다.

    [범용 기술 '성투 입문'을 습득합니다.]

    기술치 하나를 소비하여 기초 수련을 익혔지만 딱히 변한 건 없었다.

    조금은 아쉬움 감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털며 함께 털어냈다.

    "다음은 칭호인가?"

    칭호창을 열어 보니 상하로 나눠진 2개의 창이 나타났다. 위에는 활성화 중인 칭호를, 아래는 보유 중인 칭호를 보여주는 듯 했다. 당연히 상단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거릴 낄 것 없다는 듯이 유일한 칭호를 눌러 보았다.

    [칭호 '최초의 승리'를 활성화합니까?]

    "응."

    [칭호 '최초의 승리'를 활성화합니다.]

    [주요 능력이 5씩 상승합니다.]

    "오! 좋은데?"

    여느 게임이 그렇듯 뜻밖의 성장은 기쁨을 선사했다. 주요 능력이면 근력, 지력, 체력, 속도, 정확, 행운의 6개 능력을 의미했다. 상태창에 표기되는 활력, 정력, 공격력, 방어력 등의 능력은 결정 능력이라 적혀 있었다.

    순서가 바뀐 듯 했지만 개의치 않고 획득한 칭호를 확인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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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승리]

    + 최초의 성투 승리자.

    + 주요 능력 5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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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 거 없었다. 가볍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창을 닫아 버렸다. 업적과 달리 칭호는 오직 하나만 적용됐다.

    "칭호보다는 업적이 더 중요하지."

    기세를 몰아 업적창을 열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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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신 겁탈

    + 최초의 동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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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청난 글자들이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자칫 당황할 법도 했지만 나는 침착했다. 직무유기의 표본인 디테 덕분에 자칫 꼬일 수 있었지만 이미 설명서를 완독한 뒤였다. 이정도 노력을 했으니 놀랄 리가 없었다.

    아니, 놀라면 좀 억울하지.

    슬쩍 보관창을 열어 보니 반짝이는 물체가 보였다.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는 여신 겁탈의 증표였고, 다른 하나는 최초의 동정 증표였다.

    이름이 좀 꺼림칙하지만 일단 활성화하는 게 중요하지.

    "먼저 여신 겁……큼큼. 이것부터 해볼까?"

    보관창에서 반짝이는 증표를 손가락으로 찌르니 보스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여신 겁탈의 증표'를 부착하시겠습니까?]

    "응."

    칭호 때와 마찬가지로 짧게 답하는 순간 보관창에 고이 모셔져 있던 증표가 밝은 빛을 냈다.

    별이 온몸을 불사르듯 오색찬란하고 눈부신 빛이 사그라지는 그 순간이었다.

    [업적 '여신 겁탈'을 활성화합니다.]

    [명중률이 100 상승합니다.]

    헐…….

    깜짝 놀란 나는 이번에도 뒤늦게 업적을 확인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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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신 겁탈]

    + 여신에게 겁탈당한 최초의 참가자.

    + 명중률 100 상승.

    + 합의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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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동정]

    + 최초의 성투에서 승리한 동정남.

    + 동정 상실 시 업적 소멸.

    + 주요 능력 10 상승.

    + 축의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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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진짜 또라이네?

    ========== 작품 후기 ==========

    시스템 창의 한글 표기는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거라...

    로키가 무슨 재주로 영어로 -_-;;

    불편하시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고영이보고 알아서 고치라고 하면 되니까요.

    사실 처음에는 저도 레벨로 해놨는데, 그러니 영 맞지가 않아서-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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