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176화
5월부터 시작된 토트윈의 활동기, 그 첫 방송은 음악 방송 프로그램이었다.
무사히 무대를 마치고 내려온 에르제는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들어 팬들의 반응을 확인했다.
― 뮤직비디오부터 퀄리티가 장난 아니더니, 무대도 개쩔었음. ㅠㅠㅠ 콘서트 못 가서 개슬펐는데, 이거로 만족한다.
― 콘서트 때는 하네스 안 입었대.
┖ 헐, 근데 그것도 조아.
― 확실히 이제 무대 경험이 많아져서 그런가. 무대 하는 거 엄청 여유로워 보임.
┖ ㅇㅈ 난 그중에서 윤치우가 제일 많이 성장한 거 같음. ㅋㅋ
┖ 솔직히 다른 멤들이 워낙 첨부터 잘해서 그렇지 치우도 그때 타돌이랑 비교해도 그렇게 꿀리지 않았어.
┖ 원래 장 대표가 일단 실력 우선이잖아
┖ 실력은 무슨? ㅋㅋㅋㅋㅋ 비주얼 넣겠다고 개판인 애들 꼭 한둘씩 껴 있었는데.
┖ ㅇㅈ 사고도 걔네들이 젤 많이 침. ㅋㅋㅋ
┖ 우리 썬은 안 그럼.
― 올해는 상 다 휩쓸어 버리는 거 아님? 후반기에 정규 아님 최소 디싱 여러 개는 낼 것 같은데.
┖ 일단 이번 정규 수록곡까지 다 조음.
┖ 이브들 또 행복회로 돌리넼ㅋㅋㅋ
‘흠.’
에르제는 스마트폰 화면을 껐다.
확실히 반응이 좋기는 하다만, 잠잠했던 다른 반응들도 같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전에는 D.D. 쪽이나 다른 곳에서는 굳이 공격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갑자기 이렇게 되었을까.
이제는 이렇게 견제해야 될 정도로 토트윈의 위상이 달라져서 그런가.
‘하긴…… 예전에 음유시인을 했을 때도 그랬었지.’
에르제는 피식 웃었다.
자신의 위상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다른 이들의 시기와 질투는 더욱 심해졌다.
심지어는 음유시인도 아닌, 다른 귀족들까지 에르제를 견제했다.
‘자기들의 국가에 데리고 있는 음유시인의 실력이 달리니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던 거겠지.’
에르제는 대기실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굳이 이런 댓글들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었다.
결국 실력으로, 성적으로 증명하면 되니까.
음유시인이었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다 찍어 누르고 나니, 그 이후에는 오히려 나를 서로 데려가겠다고 난리였지.’
에르제는 픽 웃어 버리고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였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대기실 문이 열렸다.
‘이윤도 여기에 있는데, 누구지?’
다들 같은 생각인지, 멤버들이 일제히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제이가 몸을 반쯤 밀어 넣고 대기실 안을 둘러보더니 멋쩍게 웃었다.
“미안합니다. 저희 대기실이랑 헷갈렸네요.”
제이는 하하, 웃어넘기고는 그대로 문을 닫고 사라졌다.
“……?”
“뭐지?”
자신들보다 연차도 높고 경험도 많은 제이가 대기실을 헷갈렸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어여!”
안단테가 황당한 분위기를 수습했고, 다른 멤버들도 이내 별일 아니라는 듯 넘겼다.
LAK와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았으나, 대기실을 착각하는 정도는 실제로 별일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에르제는 그들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부러 얼굴을 비치고 간 거야.’
나를 나오게 만들려는 건가.
‘근데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냥 메시지를 보내면 되는 거 아닌가?’
방법이 좀 괴상하기는 했지만, 에이리스가 메시지 내역을 다 확인하고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
에르제는 뻔한 변명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치우가 잠시 가늘어진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으나, 이내 고개를 휙 돌렸다.
‘…….’
저번 새벽에 윤치우와 이야기를 나눈 뒤로 계속 저런 상태라 에르제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윤치우의 일은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없지.’
본인 스스로 서은우에 관한 생각을 정리하고 나면.
‘그때…….’
에르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역시나.
“어!”
복도를 왔다 갔다 하던 제이가 손을 들어 아는 척을 해 왔다.
“서은우 씨!”
“안녕하세요.”
“화장실 가는 길인가 봐요?”
“……네.”
도대체 뭔 생각인 건지.
왜 뜬금없이 우연히 만난 연기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네가 날 불러냈잖아.’
그런 말이 목젖까지 차올랐으나, 에르제는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제이가 은근슬쩍 눈치를 주고 있기도 했고.
‘어디서 지켜보는 눈이라도 있는 건가?’
에르제는 화장실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제이를 바라보았다.
조금 시간을 들여 그를 관찰한 에르제가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게 있는데.”
“저한테요?”
“네.”
“뭔데요?”
“여기서는 조금 곤란하고.”
에르제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따라오라고 턱짓을 했다.
그러고는 빈 대기실을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제이가 따라 들어온 것을 확인한 뒤에 에르제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후우.”
에르제는 심호흡을 한 뒤, 오른손에 힘을 집약시켰다.
검은 기운이 오른손에 스멀스멀 피어오르자, 놀란 제이가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뭐, 뭘 하려고…….”
“가만히 있어요, 선배님.”
순식간에 몸을 돌린 에르제가 제이의 그림자에 오른손을 푹 집어넣었다.
마치 땅을 파고 들어간 듯 에르제의 팔이 제이의 그림자 속을 빠르게 휘저었다.
“……찾았다.”
이마를 찌푸린 채 집중하던 에르제가 팔에 힘을 쥐었다.
이윽고 제이의 그림자 속에서 팔을 빼낸 에르제의 손에는 보라색 피가 묻어 있었다.
에르제는 이 와중에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이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거 처리해 달라고 날 부른 건 아닐 테고.”
“……역시 눈치가 빠르네요.”
제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기실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에르제가 입을 열었다.
“에이리스 짓이에요?”
“네.”
“그래서 되지도 않는 연기를 한 거고요?”
“되지도 않는 연기라니…….”
되지도 않는 연기 맞다.
누가 자기 그림자에 숨어 있다고 눈이랑 입술로 그렇게 비죽거리느냐고.
섭섭하다는 투로 말하는 제이의 말을 무시하며 에르제는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어차피 김지원에 관해서 나도 물어볼 게 있었으니까.’
에르제가 입을 뗐다.
“이제 듣는 귀는 없어요.”
그러고는 다리를 꼰 채 그와 시선을 맞췄다.
“에이리스가 당신에게 날 우연히 만나서 뭘 이야기하도록 시킨 건가요?”
“그런 셈이죠.”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알현실에서 만났던 에이리스와의 일을 모두 전해 주었다.
“…….”
에르제는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일부러 그 정보를 흘리라고 했다고? ……어째서?’
에이리스는 계획이 들켰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래, 그건 2장로를 납치하는 순간부터 그렇게 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에이리스가 조급하게 움직일 테고 그러면 자연히 빈틈이 생길 거라고 여겼다.
‘그와 더불어 제이까지 이미 포섭한 상태이니 완전히 우리 쪽이 유리한 상황을 만들었는데…….’
굳이 이 타이밍에 가장 핵심적인 제이를 노출시킨다?
‘내가 제이가 핵심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 그것까진 모르고 있을 텐데.’
에르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런데, 나에게 일부러 알려 주는 이유는 뭐지?’
체스로 치자면, 킹을 사선에 던져 놓은 상황이다. 스스로 체크메이트에 걸려든 상황이라는 뜻.
‘단순히 내가 지금 제이의 목숨을 끊기만 해도 당장의 계획은 취소가 돼.’
그렇게 되면 새로운 혈석의 숙주를 찾아야만 한다.
아까운 데 캄의 힘도 그대로 날아가 버릴 테고.
‘혹시.’
에르제는 감았던 눈을 뜨고 제이를 바라보았다. 제이는 가만히 에르제의 생각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제이가 불안한 눈빛을 띠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나를 보는 겁니까?”
“그냥요.”
에르제는 싱긋 웃었다.
“선배님을 죽여 볼까, 싶어서요.”
* * *
에르제는 토트윈의 대기실로 돌아가면서 플랑에게 말했다.
“방 안에 시체 하나 있을 거야. 그것 좀 치워 줘.”
“알겠다, 로드.”
어딘가에서 대답이 들려오고, 조금 전까지 있었던 빈 대기실로 향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후…….’
에르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날 흔들 속셈인 건가.’
일단은 저쪽이 불리한 입장이라 일부러 자신의 심리를 복잡하게 만들려는 의도일 가능성이 높았다.
‘뭐가 됐든, 에이리스의 숨통을 틔워 놔야 해.’
1장로까지 잡아가고 그녀의 계획을 죄다 망쳐 놓게 되면, 그대로 눈이 돌아가 버릴 테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앞뒤 잴 것 없이 바로 전쟁이야.’
뱀파이어와 뱀파리스, 그들 사이에서 죽어 나가는 인간이 과연 얼마나 될까.
에르제는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
‘그러니까 에이리스가 계획이 어떻게든 잘 진행되고 있다고 믿게 해야 해.’
차근차근, 겉에서부터 갉아먹어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에르제는 대기실로 들어섰다.
“……?”
대기실에 한 발 들어섰을 뿐인데, 분위기가 영 이상했다.
다들 하던 말을 멈추고, 죄다 들어오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에르제가 슬쩍 눈치를 보고 안으로 들어오자, 이윤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
“은우야.”
“네?”
“너…… 저번에 그랬다는 거 진짜야?”
“저번이 어떤 저번이에요?”
“콘서트 끝났던 날.”
‘콘서트 끝났던 날이면…….’
김지원을 만나러 갔던 날이다.
에르제가 당황한 눈으로 태현우를 바라보았다.
슬쩍 고개를 돌리는 태현우의 모습에 에르제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설마…… 내가 창문으로 나가는 걸 본 건가?’
그렇다면 박쥐로 변하는 모습까지? 그래서 지금 이런 분위기인 건가?
“…….”
에르제가 당황해 눈동자만 굴리고 있으니 결국 답답했던 이윤이 먼저 말을 덧붙였다.
“그 왜 있잖아. 너희들 술 먹은 날.”
이윤이 태현우를 가리켰다.
“쟤가 그러던데, 네가 막 손가락으로 탁자를 부수고, 프라이팬…… 은 주먹으로 뚫었다던데?”
“……아!”
다행히 박쥐로 변하는 걸 봤다거나 한 건 아닌 모양이다.
에르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으니 윤치우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아니, 윤이 형. 그러니까…… 그때 현우도 많이 취해 있었어요. 주혁이는 자고 있었고요. 너는 기억이 없지?”
민주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현우가 발끈했다.
“아니, 필름이 끊길 정도로 취하진 않았다니까!”
“원래 취한 사람은 자기가 취한 줄 몰라. 그리고 너도 아침에 봤잖아. 책상이랑 프라이팬 어떻게 되어 있었는지.”
‘……고생이 많다.’
에르제는 자신 대신 열심히 변명해 주는 윤치우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맞아. 프라이팬으로 책상을 내리쳐서 그런 거야.”
“하……. 아닌데…….”
태현우가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했으나, 에르제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그때 많이 취해서. 앞으로는 조심할게.”
“……?”
그의 말에 이윤이 미간을 좁혔다.
“치우는 그거 자기가 했다고 하던데?”
“?”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