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뷔 후에 흡혈은 안 됩니다-175화 (175/307)

제175화

175화

손이 관 앞에서 튀어나온 것과 동시에, 화면은 동굴에서 너른 풀밭으로 바뀌었다.

토트윈의 데뷔곡이었던 ‘HaLLo’가 언뜻 생각나는 풀밭, 판타지 세계관을 가져왔다는 것을 은연중에 알려 주는 장치였다.

가볍게 불어오는 산들바람, 낮게 깔린 카메라가 멤버들의 다리 부근을 바람처럼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나선형을 그리듯 서서히 위로 향하더니, 사선으로 서 있는 멤버들의 모습을 비추었다.

가운데 선 민주혁이 주먹을 말아 쥐고, 팔꿈치를 접은 채 아래로 손을 내렸다.

짙은 남색 슈트 안 하네스가 아래로 내려가는 손을 따라 보였다.

― It’s the time.

깨어야 할 시간

준비된 무대로

Hol’up

And hop up

짝짝, 검은색 장갑을 낀 손들이 머리 옆에서 박수를 쳤다.

오만하고 거만한 눈빛의 민주혁이 카메라를 응시하다가 멀어지고, 그 앞을 윤치우의 긴 다리가 채웠다.

널찍하게 발을 벌려 들어온 윤치우가, 관자놀이 부근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 It’s your voice.

날 부르는 소리

선명하게 들려.

Sound up

And…….

날카롭게 찍어 낸 비트와, 무겁게 짓누르는 듯한 신디사이저 소리.

푸른 풀밭을 울리는 북소리처럼 혹은 심장 고동처럼.

경쾌하게 맞아떨어지는 군무와 함께 점점 그 소리를 키워 갔다.

윤치우가 긴 다리를 뒤로 뻗으며, 다시 한번 카메라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그 사이를 뚫고 솟아오르는 불길, 순식간에 화면이 바뀌었다.

바뀐 화면은 어느 고성을 비추었다.

뾰족하게 솟은 첨탑에는 보름달이 걸려 있었고, 첨탑 꼭대기에는 조그만 박쥐 날개 모양이 달려 있었다.

벌컥, 창문이 열리고 에르제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얇은 하얀 장갑을 벗어, 창문 밖으로 날려 보냈다.

하늘하늘 날아가는 장갑을 보며, 에르제는 가볍게 턱을 괴고 카메라를 응시했다.

나른하게 풀어진 눈매와, 시원하게 옆으로 걷어 낸 흑발, 그리고 그 밑에 드러난 짙은 눈썹.

창백한 피부와 대조적인 붉은색 입술 위로 매혹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간질간질, 속삭이는 듯한 멜로디였다.

― knock, knock

Keep knock on

조금씩 가까워지는

두 세계의 stance.

난 그곳에 있어.

계속해서

하늘하늘 떨어지던 장갑을 따라, 카메라도 아래로 내려왔다.

마치 지면을 뚫고 내려가듯 전환된 화면은 조금 전 고성과 대조되는 듯한 장소였다.

진한 초록색의 잎들, 그리고 사뭇 신성해 보이는 제단.

그리고 그곳에서 태현우가 제단의 계단에 걸터앉은 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간질간질하던 에르제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듣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빠져드는 맑은 목소리였다.

― knock, knock

keep knock on

조금씩 울려 퍼지는

이 세계의 voice.

이어지는 그날.

너에게 닿을 그날.

태현우의 목소리를 따라 모여든 바람이 작게 소용돌이를 일으켰고, 위로 솟아올라서 담아 둔 것들을 퍼뜨렸다.

어느덧 노을이 지는 하늘과, 불꽃놀이를 하듯 끝에서 터져 나가는 작은 불빛들.

형형색색으로 퍼지는 빛 가루를 따라 내려온 곳에는 끝없는 길이 펼쳐져 있었다.

지평선에 맞닿은 길과, 양옆으로 나 있는 너른 녹색 대지.

오케스트라가 들어오며 웅장해진 사운드에 토트윈이 길 위에서 군무를 맞추었다.

조금 전까지는 부드럽게 움직였다면, 지금은 강렬한 춤 선을 살린 안무였다.

발을 박차고, 돌고, 손끝을 힘 있게 당겨 옆으로 한 걸음 튕기고.

그리고 손을 노크하듯이 만들어 허공에 툭툭 두들긴다.

그 뒤 아슬아슬한 동작들 사이에서도, 멤버들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채 춤을 췄다.

― knock, knock

Keep knock on

( Da, Da, Da, Da )

신호를 맞춰

잡음이 섞이지 않게

It’ll be the key.

팔꿈치를 허리 옆까지 당기고, 크럼프를 활용한 춤이 이어졌다.

그렇게 각 멤버들의 단독 샷까지 하나씩 나오고 난 뒤.

곡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갔다.

끝도 없이 펼쳐졌던 길, 토트윈은 결국 그 끝에 다다랐다.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 나갔다.

빛이 들어오는 지점을 향해서.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을 향해서.

허리 옆까지 내려온 오른손의 주먹이 다시 한번 허공을 두들겼다.

― knock, knock

Keep knock on

Our world.

속삭이듯 울리는 마지막 가사와 함께.

토트윈은 빛에 빨려들 듯 희미하게 사라졌다.

“와…….”

제이의 홈마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콘서트에서 보았을 때도 정말 좋았지만, 확실히 뮤직비디오로 보는 것은 또 달랐다.

모카 엔터테인먼트에서……. 아니, 장 대표가 토트윈에게 진심이라고 하더니.

확실히 자본을 쏟아부은 부내가 확 났다.

‘진짜 마이너스의 손에서 탈출했나.’

제이의 홈마는 푸스스 새는 웃음을 머금은 채 뮤직비디오를 다시 처음으로 돌렸다.

‘원래 이런 건 보면서 하나씩 찾는 맛이 있지.’

어떤 팬들은 빠르게 댓글을 통해 중요 지점들을 확인하고 숨은 내용을 알아내었지만, 그녀는 직접 찾는 것을 더 선호했다.

그러다 보면, 또 다른 해석을 내놓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뮤직비디오를 집중해서 보던 제이의 홈마는 입꼬리를 올렸다.

‘콘서트 때는 일부러 이 의상을 안 입었구나.’

아무래도 하네스는 뮤직비디오에서 먼저 보여 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미치겠다.’

제이의 홈마는 에르제가 나오는 장면에서 몇 번씩 정지 버튼을 눌렀다.

‘섹시함 그 자체네.’

저번에 제이와 함께 예능에 한 번 나가고 나서 분위기가 확 바뀌었더니, 확실히 이런 컨셉츄얼한 의상과 화장이 너무도 잘 어울렸다.

‘누가 서은우는 진짜 뱀파이어야, 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아.’

콩콩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제이의 홈마는 뮤직비디오를 다시 한번 집중해서 시청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빛을 향해 걸어가는 멤버들 주위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작게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이건 뭐지?’

제이의 홈마는 한참을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자 댓글을 뒤져 보기로 했다.

아무리 직접 찾는 것을 선호하긴 하지만, 그래도 며칠 동안 밤을 새워서 암호를 해독할 정도로 열정에 넘치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뮤직비디오가 올라온 지 고작 10분 만에 정답이 나왔다.

― 똑같이 생긴 문양들을 비교해 가면서 추측해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 말고는 답이 없는 듯함.

처음에 나온 (문양 그림) 이게 D, 그리고 이것들이 다…….

(자세히 보기)

자세히 보기를 손가락으로 누르니, 댓글을 쓴 이는 문양들을 알파벳으로 모두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조합하니 각자 DIA, SPIRIT, DELLA, LEV, ERZE였다고 한다.

┖ ㅁㅊ 올려라, 얘들아!!

┖ 대박 ㅋㅋㅋ 아니, 근데 이제야 이거 써먹는 거임? 이번 활동기는 이거로 활동하는 건가?

┖ 그건 좀;; 이거로 애들 부르기에는 좀 오글거렼ㅋㅋ

┖ ㅇㅈ

처음에 영어만 보았을 때는 뭔가 싶었는데, 소리 내어 읽어 보니 저 영어 단어들의 조합은 멤버들의 예명이었다.

“아……! 에르제!”

제이의 홈마는 댓글에 ‘좋아요’를 눌러 주고는, 에르제라는 단어를 중얼거렸다.

“에르제라…….”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뱀파이어 로드 에르제?”

코끝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스마트폰 화면을 껐다.

* * *

희미하게 일렁이는 횃불을 따라 걷던 제이는 붉은 카펫 위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부르셨습니까, 로드.”

“응.”

고개를 꺾어야 보일 높은 곳에서 에이리스가 턱을 괸 채 대답했다.

“불렀지.”

“…….”

그녀의 말에 제이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떤 일로 부르셨는지 감히 여쭙고자 합니다.”

제이의 말에 하얀 박쥐가 날개를 퍼덕거렸다.

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 모습을 본 에이리스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무서워할 필요는 없단다. 그냥 하나 확인하고자 함이니.”

“……예.”

“최근에 에르제를 만났니?”

“……예?”

제이가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황급히 숙였다.

설마 에르제를 따로 만난 것을 들켰나. 분명 놈이 링크는 없을 거라고 했는데.

‘……내 안에 자라고 있는 혈석 때문에 몸에 무리가 가는 술법도 사용하지 못할 거라고도 했어.’

그렇다는 건 자신의 기억을 강제로 읽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뜻.

만약 그게 거짓말이라면, 에르제가 굳이 자신을 만나서 혈석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억을 읽으려고 한다면…….’

에르제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빠르게 생각을 마친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그래?”

에이리스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녀의 생각이 깊어지면서 둘 사이의 침묵도 길어졌다.

엄습해 오는 두려움에 제이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제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정말입니다. 토트윈은 이제야 활동기에 들어가고, 에르…… 제를 따로 만날 기회는 없었습니다.”

“기억을 한번 확인해 볼까?”

“……!”

그녀의 말에 제이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하얀 박쥐가 빠르게 비행하여 제이의 앞에 내려앉았다.

박쥐의 보라색 눈이 제이를 가만히 응시했다.

제이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보라색 눈과 시선이 마주치며,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기억을 읽히기 직전의 전조였다.

‘버텨. 버티면 돼……!’

제이는 손톱이 파고든 자리를 더욱 세게 눌렀다.

“……됐다.”

에이리스가 그렇게 말하며 손짓하자, 하얀 박쥐는 다시 그녀의 의자 팔걸이로 날아가 날개를 접었다.

“나는 항상 너를 믿고 있단다.”

“가, 감사합니다. 로드.”

“그러니까 믿어 줄게. 기억을 읽히면, 정신적으로 네가 너무 고통스러울 테니까.”

“과분한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뭘 그렇게까지.”

에이리스는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돌리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그녀의 흑발이 손가락에 꼬여 있었다.

“에르제가 2장로를 탈취한 건 알고 있겠지?”

“……예.”

“내 오빠는 그런 위험을 굳이 감수하는 타입이 아니야.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거든. 예전에도 그랬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2장로를 데리고 갔다는 건 어느 정도 내 계획을 눈치챘다는 뜻이겠지. 과거에 한 번 겪었던 일일 테니까.”

에이리스가 손가락을 아래로 내리자, 꼬였던 머리가 손가락에서 스르륵 풀어졌다.

“1장로에게 내가 보잔다고 전하렴.”

“예.”

“그리고.”

에이리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제이를 바라보았다.

“내가 네 힘을 강하게 만드는 건 계획에 아주 중요한 일이야. 그건 너도 알고 있으리라고 믿어.”

“그렇……습니다.”

‘내 안에서 혈석을 키우는 일이니까 당연히 중요하겠지.’

제이가 입술을 깨물며 대답하자, 에이리스가 말을 이었다.

“마침 토트윈의 활동기라고 하니 우연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거야. 에르제에게 그 사실을 흘리렴.”

“……흘리라고 하심은…….”

“내 계획의 핵심이 너라는 거, 그걸 에르제가 알아차리도록 만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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