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화
130화
드디어 이브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9월 4일, 토트윈의 3집 앨범 팬사인회가 시작되었다.
확연히 달라진 인기를 증명하듯, 이번 팬싸컷은 2집 때보다 더 올라서 150장이라고 했다.
‘내일 초동 결과가 나온다고 하던데, 그것도 100만 장 이상 나갔을까?’
멤버들은 150장이 컷이라면 무조건 100만 장을 넘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던데, 에르제는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다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하지?”
이윤이 메이크업까지 완벽하게 마친 토트윈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이번에는 저번보다 인원을 조금 더 받았다고 하셨어. 그래서 조금 지치거나 할 수도 있기는 한데, 팬들 앞에서 그런 거 티 내지 말고.”
“네. 조심할게요.”
윤치우가 대표로 대답하고, 나머지 멤버들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래도 잔소리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 빠르게 대답한 듯했는데, 안타깝게도 이윤의 잔소리는 그 정도로 막아 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설교에 가까운 잔소리를 10분 넘게 듣고 나서야, 비로소 토트윈은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윤치우는 손목에 찬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멤버들 앞에 소화하기 좋은 음식들을 차례대로 꺼내 늘어놓았다.
닭 가슴살을 이용한 다양한 요리들이었다.
“30분밖에 안 남았으니까 배고프지 않을 정도로만 먹고 가자.”
“엇, 어디서 났어여?”
안단테가 서둘러 자리에 앉으며, 플라스틱 통에 밀봉된 닭 가슴살 샐러드를 요리조리 살폈다.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서 만들어 둔 거야. 상하지 않았으니까 안심하고 먹어도 돼.”
“역시, 치우 형 최고!!”
“잘 먹을게.”
“언제 이런 걸 또 준비했어? 피곤했을 텐데.”
안단테와 태현우 그리고 민주혁은 감사 인사를 잊지 않고 말한 뒤 뚜껑을 열었다.
맛은 없었지만 정성이 들어 있었기에 다들 말없이 윤치우가 싸 온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
“…….”
하지만 그 와중에 손도 대지 않는 에르제를 보며 윤치우가 물었다.
“은우는 안 먹어?”
“으음.”
에르제는 그 말에 뚜껑을 열어 내부를 윤치우에게 보여 주었다.
“고기가 없어.”
“그건 원래 우리 숙소에 없어.”
“알아. 어제 새벽에 냉장고 열어 보니까 아무것도 없더라.”
그 말에 민주혁이 반응했다.
“야! 너 또…….”
“쉿.”
에르제가 검지를 입에 가져가며 비밀 엄수 조약을 상기시켰다.
냉장고를 털었다는 건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지만, 목덜미를 물었다는 말은 민주혁이 자기도 모르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때로 진중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
그 말에 민주혁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다시 닭 가슴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치우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고기는 이번 활동 성과가 좋으면 대표님이 또 사 주실 거야. 오늘은 한 끼도 못 먹었잖아. 한창 활동기라 체중 감량이 중요해서 닭 가슴살 말고는 없어.”
“닭 가슴살도 고기는 고기에여.”
안단테가 자신 있게 말하다가 퍽퍽 살이 목에 걸렸는지 컥컥대며 물을 찾았다.
“천천히 먹어. 그렇게까지 시간이 부족한 건 아니야.”
윤치우가 얼굴이 시뻘게진 안단테의 등을 두들겨 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굶다가 이따 무대 할 때 쓰러질지도 모른다?”
“으으.”
에르제는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닭 가슴살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이것을 언제까지 먹어야 하는 것인가.
그놈의 체감도 되지 않는 체중 감량 때문에 닭 가슴살만 한 달 내내 먹고 있는 듯했다.
에르제는 새삼스럽게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깨달았다.
‘신님! ……신아~.’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에르제는 간곡히 부탁했다.
‘다음 축복은 꼭 고기 맛이 나는 걸로 부탁합니다.’
그렇게 성직자의 기도를 따라 한 에르제는 울상을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 * *
멤버들이 남은 시간을 닭 가슴살로 배를 채우는 데 할애한 이후, 본격적인 팬사인회가 시작되었다.
이윤이 말한 대로 저번보다 사람이 늘었는지, 의자의 숫자가 언뜻 보기에도 많아 보였다.
벌써부터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 중에는 대포 카메라를 들고 이쪽을 찍는 무리도 있었다.
‘팬 서비스는 오랜만이니까.’
에르제는 간만에 키스 날리기를 해 주었다.
팬 하나가 놀라서 대포 카메라를 떨어뜨렸으나, 다행히 대참사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말도 없이 왔네.’
그 옆에 앉아 있던 세리나가 엄청난 반응 속도로 떨어지는 카메라를 잡아 주었기 때문이다.
세리나는 에르제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목례를 하고는, 이내 옆의 사람들과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괜히 소외되는 듯한 기분에 에르제가 뚱하니 앉아 있을 때였다.
그의 귀로 신경 쓰이는 대화가 들려왔다.
“뭐야, 완전 어이없어.”
“왜?”
“누구는 앨범 100장 넘게 사서 겨우 당첨된 건데, 누구는 아무 제재도 없이 그냥 들어가더라?”
“응?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안 보여 줬는데, 그냥 여기를 들여보내 줬다고?”
“어. 내가 바로 뒤에 있었는데, 그냥 들여보내더라고.”
“흠……. 그럼 관계자 아니야?”
“그건 아닌 것 같던데.”
이야기를 꺼낸 팬의 말을 들어 보니, 이곳의 스태프가 아무런 제재도 없이 남자 팬 한 명을 들여보낸 듯했다.
다른 팬의 말대로 관계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으나, 그러기엔 처음에는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고 한다.
분명 가드, 스태프와 실랑이를 벌였는데, 갑자기 뭐에 홀린 사람처럼 그냥 통과를 시켜 줬다고.
‘……혹시?’
에르제가 혹시 하는 마음에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남자 팬을 찾았으나, 어디에 있는 건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닌가.’
두 팬의 이야기가 이제 다른 곳으로 흘러갔기 때문에 에르제는 그쪽에 관심을 끄고 턱을 괴었다.
음악 방송에서 라하임에게 메시지를 남기기는 했으나, 녀석이 확실하게 알아들었는지 어쩐지 알 수가 없었다.
연락처를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쪽에서 몰래 박쥐로 변해 찾아오지도 않았으니까.
‘저쪽에서 이야기한 남자 팬이 라하임이면 좋겠는데.’
에르제는 품에 넣어 둔 보석을 만지작거렸다.
일단 라하임에게 주기 위해서 챙겨 오기는 했는데, 사실 이걸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죽은 아이들 것과, 내 힘이 담겨 있기는 한데…….’
레스터의 기억을 읽어 보아도 단검에 박아서 사용하는 것 말고 다른 용도는 따로 없는 듯했다.
그것 때문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단검은 따로 숨겨 둔 상태였다.
‘의식을 주관한 게 라하임이니까 이것에 대해 뭔가를 더 알고 있으면 좋겠는데.’
어차피 자신은 신에 의해서 지구로 오게 되었으니, 의식을 위한 용도로 보석을 쓸 일은 없어지지 않았나.
현명한 라하임이라면, 이것을 가지고 유용한 사용처를 찾아낼지도 모른다…… 는 것이 일단 에르제가 내린 판단이었다.
그렇게 에르제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은우야.”
태현우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팔을 툭툭 쳤다.
“그만 멍때리고 준비해. 팬분들 오신다.”
“아.”
에르제는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팔을 테이블 밑으로 내렸다.
어느덧 팬사인회 회장을 꽉 채운 팬들이 이쪽으로 올라오는 계단에 주르륵 줄을 서 있었다.
조금 기다리자, 가장 먼저 앉아 있던 안단테를 지나서 첫 팬이 당도했다.
팬은 히히 웃으며 에르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이달그마.”
“이달그마.”
스님 합장하듯 인사를 주고받은 팬과 아이돌은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제는 팬사인회에도 많이 익숙해진 에르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에 AM, FM 노래 괜찮은 것 같아요?”
“네! 뮤비도 멋있고, 무대도 완전 좋았어요.”
“다행이네요. 저희가 앨범을 좀 급하게 준비한다고 걱정 많이 했거든요.”
“헉, 하긴 더빙 촬영도 있었으니까 시간 되게 빠듯했겠네요.”
토트윈의 일정을 모조리 꿰차고 있는 팬은 스스럼없이 에르제와의 대화에 녹아들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그리고 에르제는 에르제대로 팬이 제대로 감동받을 모먼트를 잊지 않았다.
일단 한번 팬사인회에 온 팬들은 완전 기억 능력을 이용해 모두 외워 두었기에, 에르제는 얼굴을 매치시키는 것만으로 금세 이름을 떠올렸다.
‘저번 팬사인회에 처음 왔던 팬이구나.’
에르제는 팬이 자신의 이름을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CD에다 사인과 함께 덕담까지 남겨 건네주었다.
“……!!”
팬은 감동한 얼굴로 바라보자, 에르제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저는 한 번 본 팬분들은 다 기억…….”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태현우가 그랬는데.
언제나 배움과 수용의 자세를 견지하며 관대함을 기본으로 삼는 로드이기에 에르제는 태현우의 의견을 충분히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기억?”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유지아 이브님은 기억하고 있어요. 2집 앨범 팬사인회에서 우리 처음 봤잖아요.”
“맞아요!!”
팬은 사인이 된 CD를 소중히 받아 들며 에르제에게 물었다.
“오빠가 제 이름 기억해 줬다고 자랑해도 돼요?”
“그건 좀 곤란한데요.”
에르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다른 팬분들이 섭섭해할 거예요.”
“앗!”
물론 진실은 모든 팬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기에 자랑하지 말라고 한 거지만, 때로는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한 법이었다.
팬은 얼른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드의 눈치를 살피며 에르제 왼쪽에 앉아 있는 민주혁에게로 이동했다.
그렇게 서른이 넘는 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사인을 해 주고 있을 때.
팬사인회 초반에 그랬듯, 주변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리는 소리에 관심을 빼앗겼다.
“와, 뭐야.”
“얼굴 실화야? 누구지? 연예인인가?”
“존잘…….”
당연히 자신인가 싶어서 그쪽을 바라보았으나, 그들 이야기의 대상은 에르제가 아닌 듯했다.
사인을 받고 의자에 앉아 있던 그들의 시선은 토트윈이 아니라 다른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르제의 오른편, 그러니까 팬들이 줄을 서 있는 쪽이었다.
‘누구지?’
하지만 각도 때문에, 그들이 누굴 말하는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줄 서 있으면 여기까지 오겠지.’
당장 자신의 앞에 팬이 앉아 있었기에 이 이상 한눈을 팔 수가 없었다.
커프스링크를 만지작거리던 에르제는 다시 사인을 하고 팬과 대화를 나누는 데에 집중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테이블 위를 정리하는 에르제의 머리 위로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