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5화
“뭔 소리야?”
태현우가 한심하다는 듯이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뱀파이어가 어디 있어, 세상에.”
“…….”
에르제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지만, 태현우는 그것까진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인형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이거 그거네.”
그렇게 태현우는 서은우가 ‘오컬트’인가 뭔가에 빠져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에르제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없다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뱀파이어라는 존재가 없는데, 어떻게 이런 비슷한 형태의 인형이 존재한단 말인가?
상상으로 허구의 존재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이 기억이다.
본 것, 본 것 같은 것 혹은 들었던 것.
‘분명히 있어.’
만약 차원 이동 중에 시간이 뒤틀려 자신이 온 것보다 더 일찍 어떤 존재가 이곳에 왔다고 한다면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뱀파이어는 오랜 시간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종족이기에 그들이 아직까지 살아 있을 가능성도 높았다.
아이돌을 꿈꾸던 서은우의 몸에 들어온 것, 그리고 같은 차원으로 왔을 일족들.
주변의 상황이 딱딱 맞아떨어지면서 점차 윤곽이 잡히는 듯했다.
그렇게 인형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윤치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얘는 무슨 생각을 이렇게 깊게 하고 있어?”
“몰라. 갑자기 심각해져서는 이러네.”
“너, 또 이상한 소리 한 거 아니야?”
“내가 애냐.”
“그럼, 20살이면 아직 애지.”
“형이랑 나랑 한 살밖에 차이 안 나거든?!”
윤치우는 피식 웃으며 태현우의 머리를 한 차례 헝클어뜨리고는 에르제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은우야.”
“…….”
“은우야?”
“아.”
그제야 에르제가 고개를 들어 윤치우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윤이 형이 할 말 있다고 잠깐 나오래.”
“나한테?”
“아니. 우리 다 불렀어. 현우, 너도 나와.”
“엥, 왜?”
“내일 스케줄과 관련해서 변경 사항이 있다더라.”
그의 대답에 태현우는 에르제를 보며 말했다.
“귀찮은데……. 아! 네가 듣고 나에게 전해 주면 좋을 것 같은데 어때? 괜찮지!”
“은우 시키지 말고 얼른 일어나.”
“흐어어.”
윤치우의 말에 태현우는 더 이상 거부하지 못하고 흐느적거리면서 일어났다.
그렇게 거실로 나온 에르제는 다른 멤버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다 왔지?”
이윤의 말에 5명 모두 마치 미어캣처럼 고개를 들었다.
“내일 스케줄 변경 사항이 있어서 다시 공지할게. 좀 급하게 바뀌었어.”
그렇게 말한 이윤이 태블릿을 꺼내며 말을 이어 갔다.
“내일 원래 다 같이 개인 티저 찍는 거였잖아? 거기에다 추가로 화보도 같이 찍을 거야.”
“엥?”
태현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지만, 이윤은 대답 대신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시간별로 맞춰서 2명, 3명 이렇게 나눠서 찍을 거니까 오늘 일찍 자고 내일 일찍 일어나. 일부러 좋은 숍 예약해 뒀으니까 내일 얼굴 부은 사람은 각오해.”
이윤이 태블릿을 톡톡 두들겼다.
“그리고 변경 사항 있다고 했지? 이번에 같이 가는 사람들 바뀌었어. 이거 보고 확인들 해.”
에르제를 제외한 멤버들이 바뀐 사람을 확인하기 위해 태블릿 앞으로 옹기종기 모여들자, 이윤이 손을 들어 막았다.
“그리고 그 전에 바뀌게 된 이유부터 말해 줄게.”
“대표님 변덕 때문 아니에여?”
안단테의 말에 이윤이 그를 살짝 노려보았다.
“아냐. 이번에 너희 프로필을 잡지사 쪽에 쫙 돌렸거든. 그중에 ‘EW’에서 너희를 실어 주기로 결정했어.”
“진짜여? EW?!”
“헐, 그래서 화보도 찍는구나.”
EW 잡지사가 뭐길래 다들 이렇게 와와, 하며 난리가 난 거지.
모두 축제 분위기인데, 에르제 혼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에르제는 태현우의 소매를 죽죽 잡아당기며 물었다.
“잡지사가 뭔데?”
“어? 아, 그거…….”
그가 에르제의 질문에 대답을 하려 할 때였다.
“현우야! 잠깐만 이리 와 봐. 너 단테, 규중이랑 같이 가야 하거든?”
“아, 네!! 은우야, 미안. 나중에.”
태현우가 자신의 소매를 잡은 에르제의 팔을 풀며 이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에르제가 황망히 그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대답은 하고……!!”
“나중에!”
태현우가 손을 휘휘 저으며 재빠르게 이윤의 옆으로 가 버렸다.
벌써 무례함을 차곡차곡 쌓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자, 그쪽에서 민주혁이 걸어와 에르제의 옆에 앉았다.
춤을 연습하는 동안에 자신에게 적대심을 보이던 녀석이었는데, EW 잡지사란 말을 듣고 그 역시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자기를 버리고 간 태현우 때문에 에르제가 툴툴댔다.
“뭔진 몰라도 다들 신났네.”
“당연하지, EW인데. 아, 그보다 내일 너 나랑 같이 가야 해.”
“둘이? 그 사진인가 뭔가를 찍으러 가는 거야?”
“어. 가기 전에 숍에 들러서 메이크업이랑 하고 가야 하니까 늦게 자지 마.”
“……응.”
숍이니 메이크업이니…… 심지어 프로필 사진도 뭔지 모르겠지만, 지금 물어봐서 뭐하겠나.
어차피 내일이 되면 다 알게 될 텐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민주혁이 말을 덧붙였다.
“생각해 보니 넌 기억 못 하겠구나. 너랑 내 콘셉트, 뱀파이어랑 뱀파이어 사냥꾼이야.”
“오!”
누가 정했는지는 몰라도 마음에 드는 소리였다.
* * *
비몽사몽 상태로 숍에 들렀다가,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스튜디오로 향하는 길.
하늘은 새벽에서 아침을 향해 서서히 달려가고 있는 상태였다.
에르제는 신기하다는 듯이 손가락을 유리창 위에 쿡쿡 누르며 민주혁을 귀찮게 했다.
“저건 이름이 뭐야?”
“BMA.”
“그럼 저건?”
“오토바이.”
“특이한 이름이네. 그럼 저 검은색 수레는?”
“아반……. 아니, 그리고 수레가 아니고 차라니까!”
기어이 민주혁이 평정심을 잃고 짜증을 내자, 에르제는 레버를 잡아당겨 등받이를 뒤로 밀었다.
“야!!”
그 탓에 바로 뒤에 앉아 있던 민주혁은 옆으로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수레에 이름을 붙여 놓다니 참 특이한 세상이라니까.”
“……말을 말아야지.”
“말로 수레를 끄는 것이 아니라 둘둘 마는 거야?”
“X발. 윤이 형, 혹시 총 있어요?”
“이 나라는 총기 소지가 금지되어 있다던데……. 몰랐어?”
에르제가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젓자 민주혁은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들겼다.
“아, 진짜! 태현우 그 새끼는 이 새끼한테 핸드폰 사용법은 왜 알려 줘 가지고.”
에르제는 어깨를 으쓱하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이곳에서 본 마도구들은 죄다 신기한 것투성이였으나, 그중에서도 핸드폰이 제일 신기했다.
2,500년의 삶은 이 핸드폰이라는 마도구를 알기 전과 후로 나뉘어졌을 정도니까.
때문에 에르제는 핸드폰을 검색하며 밤을 지새웠고, 그 때문에 같은 방을 쓰는 태현우도 같이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 내일 혼나면 다 너 때문이라고 할 거야……!
아마 마지막 즈음엔 그런 말을 하면서 울상을 지었던 것 같다.
그래도 그 덕분에 에르제는 EW나 화보, 그리고 아이돌과 관련된 것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열심히 찾았던 것이 뱀파이어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모든 곳에서 한낱 미신으로 치부해 버린 까닭에 알 수 있는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내가 너희 때문에 매일 늙는다.”
“사람은 원래 매일 늙는 법이에요.”
이윤은 에르제의 말에 한숨을 푹 내쉬고는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어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래……. 다 왔으니까 이제 그만 내리자. 들어가면 오늘 잡지에 실릴 콘셉트도 자세하게 말해 줄 거니까 가서 설명 잘 듣고, 인사 잘 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
이윤이 차를 세우고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아직 데뷔 전인 연습생이니까 절대! 절대로 이상한 행동 하지 마라. 특히 은우.”
평상시 성격이 까칠한 민주혁과 기억을 잃고 이상해진 서은우.
이 둘을 바라보는 이윤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주섬주섬 챙기는 에르제를 보며, 손바닥으로 한 차례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이 지나간 자리에는 억지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하하하, 은우야? 그게 뭔지 설명 좀 해 줄래?”
“이거요? 태현우한테 빌린 얼굴과 몸을 가릴…….”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잖니?”
마치 아이를 타이르듯 이윤이 사근사근한 말투로 말했다.
“벌써 연예인 병에 걸린 거 아니지? 지금 너 대낮에 활보해도 알아보는 사람 아무도 없어. 얼른 치워.”
“알아보는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대낮인 게 문제인데요. 태양.”
에르제가 서서히 하늘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가리키며 말하자, 이윤이 에르제의 어깨를 잡아 문 쪽으로 끌어당겼다.
“네가 무슨 올빼미야, 부엉이야! 빨리 집어넣어!”
“나는 박쥐…….”
“시끄러!”
“제가 할게요. 형.”
결국 뒷좌석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던 민주혁이 에르제의 등을 밀어 차문 밖으로 밀어냈다.
에르제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는 아이돌과 관련해서 검색했던 내용을 떠올리며 곧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냈다.
물론, 말투는 다급했다.
“피부 타요!”
“……피부가 탄다고?”
“아이돌로서 열심히 관리를……!!”
그 말에 잠깐 가출했던 이윤의 정신이 잠시 차 밖을 활보하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멈춰!!”
이윤의 외침에 두 명의 움직임이 그대로 딱 멈췄다.
둘 모두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힌 자세였고, 뒤에 있던 민주혁의 손은 에르제를 차 바깥으로 밀어내기 직전이었다.
“그래. 5분밖에 안 걷기는 해도 관리는 해야지. 은우 말이 맞다.”
방송에 예쁘게 나오려고 하얀 피부를 유지하겠다는데 매니저로서 말릴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오랫동안 매니저 일을 해 오면서 오랜만에 듣는 아주 기특한 말이었다.
어느새 이렇게 프로 의식을 발휘하고 있을 줄이야.
단순히 기행으로만 여겼던 자신을 반성한 이윤의 공격 화살이 민주혁에게로 향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를 보며 이윤의 눈이 가늘어졌다.
“넌 없어?”
“……어, 없는데요.”
괜히 민주혁만 포지션이 이상해졌다.
“어쩔 수 없지.”
이윤이 됐다는 듯 어서 내리라고 하자, 민주혁은 에르제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이를 앙다물었다.
“치사하게 혼자만……. 귀띔이라도 해 주지.”
그는 툴툴댔지만 물론 이미 완전 무장을 하고 차에서 내린 에르제의 귀에까지 들리진 않았다.
그렇게 도보로 5분 정도 걷자, ‘인생 컷! 스튜디오’라는 곳에 도착했다.
“여긴 연예인 전문으로 잘 찍어 주는 곳으로 유명하니까 들어가서 말 잘 듣고.”
“그 이야기는 아까도 했어요. 아! 어제도요.”
“알아. 두 번이 아니라 백 번 말해도 모자라.”
기억을 잃은 서은우가 어지간히도 불안한 모양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에르제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여 준 뒤에야 겨우 스튜디오 안으로 입성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ToT-win’의 민주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들어가자마자 민주혁이 싹싹하게 인사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고, 에르제는 이윤의 당부에 따라 말은 하지 않고 고개만 숙였다.
“여기 가만히 있어.”
이윤은 둘을 멀찍이 세워 두고, 먼저 사진을 찍어 줄 정무진에게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모카 엔터테인먼트 매니저 이윤입니다.”
“반가워요. 정무진입니다.”
“오늘 저희 애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 대표님이 아주 신신당부를 하셔서요. 그리고 저도 오늘 찍을 콘셉트가 흥미로워서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정무진과 간단하게 명함을 교환하고 인사를 나눈 이윤은 다행히 얌전히 서 있던 에르제와 민주혁을 데리고 왔다.
민주혁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자, 에르제도 한 손을 유려하게 내리며 고고하게 인사했다.
그 모습에 이윤은 기겁했지만, 정무진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렇게 짧은 인사를 마친 뒤, 정무진은 에르제와 민주혁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한 명을 가리키며 이윤에게 물었다.
“이분이 뱀파이어죠?”
“……뭐??”
에르제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