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208화 (208/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208화

    이타노 서커스(4)

    [우렌 : 오랜만입니다, 전하. 그간 격조했군요.]

    [누자베스 : 그래그래, 이 전하가 얼마나 개고생을 하고 다녔는지 알면 깜짝 놀랄 거다.]

    [우렌 : 고생한 것치고는 무탈해 보입니다만.]

    [누자베스 : 이 자식이…… 둥지에서 꿀 빨던 놈이 그런 소리하면 전하가 야마 돌아버릴 거라고 생각 안 해봤냐.]

    [우렌 : 전하, 외람된 말이지만 둥지 아릿카사는 빨아먹을 꿀도 없는 둥지입니다.]

    [누자베스 : 그건 인정이지.]

    드디어 누자베스가 이시카니 섬의 인근까지 도착했고, 병력 통제가 가능한 거리가 되었다.

    해안선까지 접근한 수송선에서 수천, 수만 마리의 마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누자베스는 마인드 모드를 통해 병력의 상륙 상황을 지켜보며 입을 열었다.

    [누자베스 : 젠장할, 아름다운 사람은 떠난 자리도 아름답다는 말을 모르는 건가? 마왕군 놈들이 뒤처리를 깔끔하게 하지 않아서 이 사단이 나는 거잖아.]

    [우렌 : 마왕군의 병력이 용사 저지를 위해 마왕성 쪽으로 재배치된 건 최근의 일입니다. 모든 전쟁 물자와 시설을 철거할 여유는 없었겠죠.]

    [누자베스 : 아이고야, 저 망할 기관총 진지가 내 병력 다 갉아먹잖아!]

    이시카니 섬에 남겨진 방어 시설을 먼저 선점하고 있던 건 칼베라의 무력 집단 ‘나흐 만테아’였다.

    이제는 마치 흡혈귀들과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기관총 진지를 설치하여 방어선을 구축한 나흐 만테아는 해안선에서 상륙하는 누자베스의 병력을 향해 소사를 개시했다.

    투다다다다다!

    전기톱을 키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모래와 자갈이 튀어 올랐다.

    화망에 걸린 구울 머스킷티어들이 톱으로 잘려나간 것처럼 동강나서 해안을 나뒹굴었다.

    [누자베스 : 햄토리, 햄토리!! 후딱 내려서 기관총 무력화시켜!]

    [햄토리 : 쮸!]

    터엉!

    상륙선에서 내린 언더케이지 부대가 드디어 모래사장에 도달했다.

    자신의 체격에 8할에 달하는 거대한 방패와 숏소드로 무장한 중장갑병 부대.

    언더케이지 부대는 바로 산개하여 기관총의 사선을 가로막듯 섰다.

    구울 머스킷티어들은 바로 열을 맞춰 렛맨 중장갑병의 뒤를 따랐다.

    이런 급박한 상륙 작전에서 장갑차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병종이 있다는 건 상당한 이점이었다.

    “쮸, 쮸- 쮸우!”

    그리고 햄토리는 렛맨 전사들 중 셋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지목했다.

    언더케이지 부대의 부대원들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햄토리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했던 베테랑 전사들이었다.

    “쮸!”

    “쮸우, 쮸쮸!”

    “쮸, 쮸쮸, 쮸-!”

    쿵쿵!

    그리고는 일제히 주저도 없이 총탄이 빗발치는 해안선을 뚫고 돌격하기 시작했다.

    상체를 숙이고, 방패를 높게 치켜 든 방패 돌격이다.

    “중장갑! 중장갑이다! 매립 폭약 점화! 전달한다! 폭약 점화!”

    “폭약 점화!”

    쿠우웅!

    미리 해안의 방어선에 설치해 놨던 폭약이 불기둥을 내뿜으며 폭발했다.

    “쮸!”

    하지만 그보다 먼저 햄토리와 언더케이지 부대의 전사들의 반응이 더 빨랐다.

    네 마리의 렛맨 전사들은 무릎을 꿇고 방패를 사선으로 지면에 꽂아 폭발을 흘렸다.

    폭발에 전혀 데미지를 입지 않은 것인지 더욱 진격 속도를 올려 기관총 진지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진지에서 기관총을 갈기던 나흐 만테아의 병사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하지만 이내 결의를 다진 듯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낙원을 위하여!”

    “모든 종의 인민을 위하여!”

    카앙!

    검을 뽑아들며 진지 바로 앞까지 다가온 렛맨 전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쮸, 쮸쮸?”

    “크헉!”

    퍼억!

    햄토리는 가장 먼저 달려든 병사의 머리통을 방패의 모서리로 내리찍었다.

    끈적한 혈액과 뼛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쮸-!!”

    명령은 간단했다.

    렛맨은 아주 간단하고 직관적인 명령으로 움직이는 마물이니 말이다.

    햄토리의 명령은 한 마디.

    바로 무자비다.

    “크아악!”

    “커억!!”

    기관총 진지 안으로 뛰어든 렛맨 전사들이 나흐 만테아의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했다.

    렛맨 전사의 기본 전법은 2인1조.

    한 마리의 렛맨 전사가 방패로 상대를 짓눌러 제압하고, 다른 한 마리가 숏소드로 급소를 찔러 빠르게 숨을 끊는다.

    “쮸- 쮸우쮸- 쮸쮸?”

    햄토리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병사를 향해 비아냥거리듯 말했고.

    “그 더러운 주둥이로 왕녀 전하를 모욕하다니……! 왕녀 전하만이 진정한 낙원을 건국하실 분이다! 끅……!”

    쿠웅!

    햄토리가 방패로 병사의 몸을 벽면에 밀어붙여 제압했고. 나머지 세 마리의 렛맨들이 숏소드를 들고 달려들었다.

    푹푹푹푹, 푸욱!

    “끅, 크아아악-! 아아악! 으악!!”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토해졌다.

    무자비한 난도질 끝에 병사가 축 늘어졌다. 햄토리는 혀를 차며 방패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리고는 진지 밖을 바라보자. 이미 다른 기관총 진지도 하나하나 제압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햄토리 : 쮸, 쮸-]

    [누자베스 : 오케이, 빠르게 보급지까지 돌파해 보자고. 두르난 아재?]

    [두르난 : 이쪽은 언제든 준비 만전이야! 지하실에만 틀어박혀 있었더니 몸이 찌뿌둥하던 참이었거든.]

    두르난이 껄껄 웃으며 바로 누자베스의 부름에 응했다.

    보병 병력들보다 한 발 늦게 베놈과 자주 박격포를 적재한 수송선이 해안에 닿았다.

    모래사장에 착륙한 자주 박격포는 그 자리에서 바로 자리를 잡고 사격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콰앙, 쾅!

    자주 박격포의 포격이 시작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바로 해안선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고지 너머를 타격하기 시작했다.

    [누자베스 : 박격포 사격이 끝나면 그레이브 야드 부대를 둘로 나눠서 지역 제압을 개시한다. 베놈은 적의 전차 부대에 대비하여 각 위치에서 대기. 크라울 비젠 준비 완료되는 대로 보고.]

    누자베스는 빠르게 해안의 상황을 파악하고 명령을 하달했다.

    아무리 나흐 만테아가 지역을 선점하고 방어선을 구축했다고 하더라도, 누자베스의 병력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아릿카사는 가장 척박한 스타팅 지점에서 시작하여 끊임없는 동족 포식을 거듭한 끝에 살아남은 둥지다.

    비교될 수 있는 주변의 둥지들이 규격 외로 취급받을 만큼 강대했던 것뿐이다.

    아릿카사는 바체트 열도 전체를 통틀어서 보자면 의심의 여지없는 ‘강호’ 세력에 속했다.

    특히나 이런 마르하바 서도 같은 벽지라면? 그것도 마왕군이 철수한 뒤 마땅한 지배 세력이 없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기관총 진지가 제압되기가 무섭게 상륙한 병력이 빠르게 진격을 거듭했다.

    “일종의 전염병 같네.”

    누자베스는 담배에 불을 붙인 후 성냥을 털며 말했다.

    “도대체 얼마나 달콤한 속삭임이었는지 나도 궁금해질 정도야.”

    전력의 차이는 명확했다.

    누자베스의 군단 아릿카사는 이시카니 섬을 점령하고 있던 나흐 만테아를 짓밟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런 전력 차에도 불구하고 나흐 만테아에서 투항자는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나흐 만테아에 속한 마물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악을 내지르며 덤벼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가 하나 같이 ‘낙원’이라던가 ‘왕녀’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실존의 영역에서 추방되었음에도 이 정도의 영향력이 남아 있을 줄이야.”

    솔직히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만약 피르에나가 다시 한 번 부활에 성공한다면? 지금 저 광신도 같은 병사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후의 천국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흘린 피의 가치를 믿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목숨 위에 세워지게 될 낙원은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맹신하고 있었다.

    “계급과 종의 차별은 더 이상 수복될 수 없을 만큼 깊고 오래되었죠.”

    우렌이 누자베스의 옆으로 다가와 전황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인간이 마물을 증오하고 배척하는 것이 당연하듯. 귀족이 평민을 박해하고, 평민이 그들의 비루한 삶의 이유를 기득권에게 돌리는 악순환은 태초부터 반복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피르에나 왕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우렌이 궐련을 입에 물었다.

    “그녀가 약속한 낙원이란 그런 것이었겠죠. 모두가 나란히 설 수 있는 공평한 정원입니다. 저들은 자신의 세대에서 이 증오와 편견의 연쇄를 끊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의 아이들이 자라날 낙원을 위해 말이죠.”

    인간과 마족이 편견 없이 서로를 박애로 대할 수 있는 세상을 의미했다.

    그 모든 종이 계급으로 분리되지 않으며, 만인이 동등한 권리를 지니는 세상이다.

    “모두가 초인이라면 그런 세상도 나쁘지 않겠지.”

    누자베스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피르에나의 이상은 너무나 이상에 가까운 이상이었다.

    “우리에게 공평함이 필요할까? 평등이 필요할까?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보면 뻔한 대답이 나오지.”

    아니다.

    인간과 마물을 불문하고 평등한 상황에서 만족하고 안주할 녀석은 없었다.

    “결국 아래에 속한 놈들이 지금보다 더 위쪽에 자리잡고 싶어 하는 저열한 본능일 뿐이다. 위쪽에 자리잡은 놈들을 붙잡아 아래로 끌어당기며 그것을 평등이라고 포장하면 꽤나 정의롭게 들리는군.”

    결국 이 사회를 유지하는 건 상대적 다수의 동의를 얻은 차등일 뿐이다.

    모두가 피르에나처럼 초인이 될 수 없었고, 초인이 아닌 평범한 인간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너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겠지. 이미 이 세상은 고쳐 쓰기엔 늦었다는 사실을.’

    피르에나는 반드시 이 세상을 한 번 멸망시키려 할 것이다. 물리적인 멸망이 아닌, 철학의 영역에서 존재하는 멸망이다.

    그런 식으로 파괴되어 재구축될 세상에서 피르에나는 자신의 이상을 투영할 셈이었다.

    피르에나는 이 세상을 사랑하는 만큼 경멸하고 있었으니까.

    “자, 그렇다면 이번 상륙 작전의 진짜 걸림돌들이 슬슬 모습을 드러낼 때가 됐는데.”

    뺨을 스치는 바람에 희미한 피비린내가 섞였다. 신선한 피의 냄새가 아닌, 부패한 듯 썩은 피의 냄새였다.

    누자베스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냄새가 바로 ‘고혈종’이라 불리는 오래된 피의 소유자들이 지닌 특유의 향기라는 사실을 말이다.

    순식간에 주변이 어두워졌고, 백주월이 눈을 가늘게 뜨며 주변을 살폈다.

    어떤 경우에서라도 누자베스를 죽게 놔둬서는 안 됐다.

    바로 경계를 시작하고 반격할 태세를 갖춘 것이다.

    “극동의 전쟁 군주여. 이 섬에 머물고 계신 분이 누군지 모른 채 저지른 만행이라면 아직 기회가 있을 것이다.”

    중후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해안 전체를 울렸다. 누자베스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킬킬 웃었다.

    “누군지 알고 있다면 어쩔 건데? 엉덩이라도 때려줄 셈인가?’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대답을 대신하여 바람에 섞인 피냄새가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짙은 어둠의 장막 속에서 붉은빛 선이 점차 명확한 형체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연미복 차림의 흡혈귀 다섯 마리.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굳어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그만큼 강대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렇다면 혈족에 대한 도전이라 이해할 수밖에 없겠군.”

    뫼니에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누자베스와의 거리는 100여 미터나 떨어져 있었지만, 그 이글거리는 눈빛은 선명히 보이고 있었다.

    “이 만행에 대한 결과를 묻는 것이라면.”

    저벅.

    뫼니에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입을 열었다. 심장이 양단될 만큼 서늘하고 예리한 목소리로 말이다.

    “전쟁 군주여. 지금 이 순간 천하무적단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천하무적단.

    대륙 전체를 통틀어 최강의 무력 집단이라고 칭송받는 존재들이었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닌, 다섯 마리가 한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방금 전 누자베스와 백주월이 상대하고 왔던 제8신분의 흡혈귀 스카디 따위는 먼지처럼 느껴질 만큼 강대한 흡혈귀들이다.

    한 마리, 한 마리가 모두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들이 스스로를 ‘인빅투스’라 칭하는 것이 결코 과장이나 자의식과잉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주월아. 형아는 주월이만 믿는다. 저 모기 새끼들한테 뜨거운 맛 좀 보여줘라.”

    “하여간 결국 나한테 맡길 거잖아.”

    백주월이 앞으로 나서며 인빅투스의 흡혈귀 다섯 마리를 시선으로 훑었다.

    용사 한 사람과 인빅투스 다섯 마리.

    “전례 없는 빅매치 성사구만.”

    그렇게 말한 뒤, 누자베스는 혀를 깨물어 입 안에 피를 고이게 만들었다.

    꾸물거리고 있을 시간은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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