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207화
이타노 서커스(3)
“카베르네. 아버지께서 원색의 현상명을 사용하는 것을 불허하셨음에도, 어째서 ‘그 아이’만이 우리와 상이한 현상명을 스스로 입에 담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니?”
카르메네르는 반쯤 잠에 들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카베르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카베르네는 졸린 눈을 간신히 뜨며 카르메네르를 올려다봤다.
“이것은 합당하며, 타당하고, 절대다수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의심이란다. 자매들조차도 인지하지 못할 만큼 긴 공백기에 대한 부연 설명이 없다면 말이지.”
“메를로 언니?”
“그래, 마치 카베르네 너를 모조하여 만든 위작품처럼 존재하는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나눠보고 싶다고 생각했단다.”
메를로는 자매들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힘을 지닌 흡혈귀였다.
시공을 자유롭게 도약할 수 있는 리쿼렐과 비교해도 단연 독보적일 만큼 성질이 달랐다.
메를로는 ‘관념’을 조작하는 능력을 지닌 흡혈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변의 섭리에 거스를 수 있는 능력이다.
이미 정형화되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상식과 현상을 비틀어, 이형으로 만드는 것만이 메를로의 전문 분야였다.
예를 들어 ‘죽음’이란 현상을 무효화하거나, 삶의 유한성을 상쇄하는 등의 재주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여기까지 의심의 끝자락이 닿았다면.
카르메네르가 이 세상의 비밀에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나르시안이 빚어낸 첫 번째 딸.
가장 큰 원죄를 상속 받은 영원한 밤의 딸이 이 지리멸렬한 수수께끼와 촌극의 선단에 닿은 것이다.
“미아 나크랏과 테네브레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어둠이었고, 스텔라와 크리스델은 교차하지 않는 평행선을 이루는 빛이었지.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남기고자 했던 진짜 유산은 무엇이었을까? 그저 우리가 우리의 내면에 잠든 야수성을 극복하여 초극에 도달하는 것만이, 이 진혼식 이후의 삶이 지니는 의미의 전부였을까?”
카르메네르의 눈에는 보이고 있었다.
이 세상의 진짜 실체가 말이다.
실존의 영역에서 생존해 있는 존재 중, 카르메네르가 가장 초극에 가까운 흡혈귀였기 때문이다.
첫째 딸 카르메네르는 나르시안이 스스로 초극의 시험에 들기 직전, 그가 남긴 마지막 전언을 떠올렸다.
“카베르네. 메를로가 초극에 도전했을 때를 기억하고 있니? 그 아이가 초극의 시험에 임하던 도중 그 권리와 자격을 스스로 포기하고, 부스러기처럼 잔존한 이유를 유추해보거나. 혹은 그렇게 포기할 수 있는 일이었는지 의심해 보거나.”
카르메네르는 눈을 가늘게 뜨며 붉은색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혹은.”
그녀의 모든 뇌세포와 시냅스가 명확한 정답을 향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권리를 빌어 초극에 도전했던 인간의 왕녀가 반드시 시간의 수순에 따라 존재할 것이라, 그런 어리석은 믿음을 품지는 않았을지 스스로를 의심해 본 적은? 메를로가 그 왕녀와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의 영적 위계를 되찾았을 때 동반된 동기화 현상은?”
“시간은 관측되는 공간의 상이성에 불과해, 언니.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개념이야.”
“그래, 우리가 관측되는 공간의 상이성을 시간이라 부른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 않겠니?”
카르메네르는 쿡쿡 웃으며 카베르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의 능력까지 훔쳐서 흉내내는데 성공했다면, 이 모든 현상과 사건이 납득이 되는구나.”
카베르네가 관장하는 영역은 ‘공간’이다.
그리고 카르메네르는 이 모든 추론에 결론을 덧붙이려 했지만.
끼이익.
문이 열리고, 초대하지 않은 방문객이 자매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니와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대모님께서 잠시 자리를 비켜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비올로였다.
제1신분의 정점.
모든 흡혈귀들의 군주이자, 나르시안의 원죄를 상속받은 적통 상속자.
그녀의 눈동자에는 명확한 욕망과 살의가 깃들어 있었다. 카르메네르가 수를 쓰는 것보다 스칼렛이 더 빨랐던 것뿐이다.
카르메네르가 준비한 무대와 대본보다 먼저 등장한 애드립이 그 실체를 드러낸 것뿐이다.
“이 세상의 전부를 네게 줬음에도, 그 욕심이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게 되었구나.”
카르메네르는 탄식하듯 자신의 딸을 바라봤다. 하지만 네비올로는 어금니를 꽉 물며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송곳니를 드러냈다.
“어머니께서는 늘 그런 식이었죠. 언제나 저를 챙겨주는 척을 하면서, 항상 당신이 가슴에 두던 딸은 바르베라였습니다. 많은 것을 주시는 척을 하며, 진정으로 제가 바라는 것을 주신 적이 한 번이라도 있습니까.”
“네비올로. 나는 네게 더 이상 무거운 짊을 맡기기 싫었을 뿐이란다. 아무리 네비올로 너라도 이 세상과 메를로 둘을 동시에 짊어질 수는…….”
“거짓말! 그딴 거짓말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어머니께서 저를 조금만 더 챙겨주셨다면…… 조금만 더 바라봐줬다면, 바르베라에게 주신 애정의 절반만이라도 주셨다면……!!”
카베르네가 네비올로의 앞을 가로막듯 일어섰고, 네비올로는 당연한 수순이라는 듯 레이피어를 뽑아 들었다.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네비올로가 한숨처럼 마지막 전언을 토해냈다.
더 이상 대화가 통할 것 같은 상태가 아니었다. 네비올로의 정신은 이미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무리 네비올로가 카르메네르의 딸이자, 제1신분이라고는 해도. 상속 신분인 메를로가 지닌 달콤한 향기를 이겨낼 수 없었던 것이다.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단다, 네비올로.”
“유독 더 아픈 손가락은 있는 법이겠죠.”
카르메네르 역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네비올로를 향해 서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쇠락했다고 해도 상속 신분을 둘이나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당신들의 시대는 끝난지 오래입니다. 혈족의 여왕에게 불가능한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그 말과 동시에 시야가 붕괴했다.
마치 그 끝이 존재치 않는 무저갱으로 추락하는 듯한 감각이 덮쳐들었다.
지면과 사면을 비롯한 모든 벽면이 흑과 백의 체스판처럼 변해갔다.
“저는 드디어 보상받은 것입니다…… 당신께 받지 못했던 사랑을 대모님께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것만이 제가 그분의 사랑에 보답할 유일한 길입니다.”
“메를로가? 재밌는 농담이구나. 그 아이는 파괴욕과 사랑을 구분할 줄 모르는 괴물이란다.”
카르메네르가 재미난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네비올로는 눈을 가늘게 뜨며 목덜미에 선명히 남아 있는 키스 마크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이만 잠들어 주셔야겠습니다, 어머니.”
네비올로의 능력은 ‘위상 복제’였다.
이 능력이 전개된 공간이라면 네비올로는 필승을 자랑할 수 있는 흡혈귀였다.
설령 그 상대가 상속 신분에 속하는 카르메네르와 카베르네일지라도 말이다.
* * *
“쿨럭! 어째서, 어째서 이 스카디가…… 이런 촌구석의 가축들에게……!”
스카디가 피를 토해내며 무릎을 꿇었다.
이미 전신이 몇 번이고 불태워져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이런 결과는 납득하기 힘들다.
아니, 납득할 수 없었다.
스카디는 제8신분에 속하는 흡혈귀다. 대륙에서도 무시당할 정도의 위계가 아니었다. 하물며 바체트 열도? 이런 극동의 촌동네에서 제8신분에게 대적할 수 있는 존재는 드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스카디의 믿음과 달리 결과는 명확했다.
쿠우웅!
“크헉……!”
날아든 미사일이 폭발하며 섬광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헬파이어라는 이름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처럼, 그야말로 지옥불 같은 화염이었다.
“이…… 이, 무슨 마법을…….”
대전차 미사일을 생애 처음으로 경험해 본 스카디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어지간한 마법사의 화염 마법에도 완벽한 내성을 지니고 있던 스카디다.
그런 스카디의 육신에 유효한 데미지를 남길 수 있는 공격은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싸움 수준 실화냐? 진짜 세계관 최강자들의 싸움이다… 그 찐따 같던 백주월이 맞나? 진짜 백주월은 전설이다…….”
“시끄러워, 제발 입 좀 다물어 정신병자야…….”
이미 승부는 결착이 났다.
스카디가 전력을 다해 싸웠지만, 누자베스에게 혈액을 수혈받고 있는 백주월의 상대가 될 순 없었다.
누자베스가 여유롭게 농담을 중얼거릴 수 있을 만큼 상황은 정리되어 있었다.
“정신병자? 정신병자라고? 이 자식은 형님한테 말하는 싸가지가 아주 날이 갈 수록 아름다워지네. 어! 내가 말이야! 사람이 좋으니까 비올리네도 만나게 해주고 그러는 거 아니냐고 진짜!”
“닥쳐, 누자베스. 네 입으로 비올리네 운운하지 말라고.”
“솔직히 까놓고 말하자 주월아. 이 형이 비올리네 역을 맡을 때마다 얼마나 자괴감이 들고 괴로운지 아냐? 그런데 너를 위해서 어금니 꽉 물고 영혼의 메소드 연기해 주는 거 아냐?”
“……아, 알았으니까. 저 흡혈귀 처리부터 먼저 하자 좀. 그러니까 지금도 이렇게 일 도와주고 있는 거 아냐?”
“알긴 뭘 알아!? 어…… 어? 생각해 보니까 생각할수록 빡치네? 너, 너어…… 네가 뭘 알아! 남자 밑에 깔리는 기분을 너 따위가 알겠냐!”
“미안.”
“미안 말고 미사일 발사나 해.”
콰앙!
스카디의 몸 절반이 찢겨져 흩뿌려졌다.
더 이상 신체를 수복할 만큼의 혈액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흡혈귀가 아무리 불멸의 존재라지만, 이미 누자베스와의 전투에서 그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학습해 뒀다.
결국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혈액의 잔량을 빠르게 고갈시키면 흡혈귀 역시 확실한 죽음에 도달하는 것이다.
“아이고야, 질기다 질겨. 흡혈귀 양반 고생이 아주 많아.”
“쿠헉, 쿨럭쿨럭! 잡종 놈들이…… 천한 가축 주제에 감히 혈족에게……!”
누자베스는 스카디에게 다가가 구두굽으로 머리를 꾸욱 짓밟았다.
“누가 보냈냐? 응? 이 자비로운 누자베스 전하가 신사답게 물어볼 때 아는대로 다 불어. 안 그러면 너 진짜 큰일난다?”
“죽여라, 네놈 같은 천박한 가축에게 말할 이유가 없다.”
“피르에나 왕녀의 파편을 옮기던 놈하고 한통속인 것 같더만. 누가 그런 괴물을 다시 부활시키려는 작전에 동의한 걸까.”
초인 피르에나가 부활하는데 성공한다면, 이 세상에 전례 없는 피바람이 불 것이다.
경멸하기에 파멸을 동경하며.
파멸 이후에 찾아올 창조와 재생을 진지하게 믿는 쪽의 인간이 바로 피르에나일 테니까.
초인 피르에나는 그런 존재로 다시금 이 세상에 강림할 것이다.
“큿, 크하핫! 이미 늦었다. 초인은 혈족의 의지에 의해 완성될 것이다……!”
누자베스는 위화감을 느꼈다.
흡혈귀들 만큼 자존심이 강한 종족도 없다. 특히나 ‘초극’에 관해서는 그 자부심이 엄청났다.
원죄의 아버지 나르시안이 최초로 초극에 도전했던 것을 긍지로 삼고 있는 일족 아닌가?
그런 일족이 인간의 초극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그건 말이 안 된다.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일이다.
스칼렛 역시 피르에나가 초극에 도전한 행위 그 자체에 상당한 불쾌감을 보이지 않았었나?
누자베스의 뇌세포가 빠르게 상황을 검토했고, 가장 먼저 일종의 가능성을 도출해 냈다.
“죽여 버려. 정보는 다 캐냈어.”
스카디에게 떨어지며 누자베스가 그렇게 명령했다. 그리고 등 뒤에서 들려오는 폭발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내가 사용할 수 있고, 사용한 적이 있는 속임수라면.’
당연한 추측이었다.
누자베스는 담배의 끄트머리를 짓씹었다.
‘상대도 당연히 사용할 수 있고, 사용한 적이 있을 것이다.’
누가 피르에나의 그릇이 될지는 뻔했다.
아니, 본래 피르에나였던 껍데기가 본래의 실체를 되찾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