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164화
태양의 영지에서(3)
“1인칭의 소설에서 화자와 주인공이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서술 트릭이라. 오츠이치 같은 양반이 좋아할 법한 속임수네.”
“독자들은 화자의 거짓말에 둔감한 법입니다. 둔감하다고 해야할지, 작가와 독자들의 오랜 암묵적인 룰이자 최소한의 매너겠죠. 거짓말쟁이가 화자인 소설은 소설로써 성립하기 힘드니까요.”
“하지만 소설을 쓸 생각이 처음부터 없다면 어때? 그저 거짓된 정보를 전달하는 게 목적이며, 누군가가 그 정보를 맹목적으로 믿게 만들기 위한 허무맹랑한 위장 작전에 불과하다면?”
“그렇게 ‘관측’되어 관측된 대로 존재하는 것이 순수한 목적이라면 유의미한 시도일 겁니다.”
“하기야 그 외신이라는 녀석들도 다수에게 관측되어 관념화된 존재에 직접 관여하는 건 까다로울 테니 말이야.”
백주월은 손에 들고 있던 단행본 사이즈의 책을 한 장씩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1978년 출간된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의 4판이다. 철학 따위에 관심도 없었고, 묵묵히 독서를 하는 취미도 없었지만. 공교롭게도 백주월이 가져오게 된 현대의 물건은 고서점에서 냄비받침으로 쓰려고 사놨던 이 책과 몇 가지의 잡동사니뿐이었다.
소련 시절의 서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책의 표지에는 수많은 검열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두 다리를 걸치고 거만하게 앉아 있는 백주월의 맞은편에는 로브를 머리끝까지 푹 눌러쓴 여성이 한 사람.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만 듣자면 꽤나 젊은 나이대의 여성이라고 알 수 있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단서는 여기까지입니다. 나머지는 용사님께서 마땅히 도달해야 될 정답에 다다르길 기도해 드리는 게 전부겠네요.”
“나 말고 다른 용사도 있다며? 그리고 용사는 아니지만 세상의 정답에 가장 가까워진 녀석도 하나 있다고 했지.”
백주월은 머리 아프게 생각하는 건 질색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기력하게 가만히 있을 체질도 아니었다.
“그 녀석들을 붙잡아 적당히 귀여워해주면 신나서 아는 걸 모조리 주절주절 떠들 텐데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성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었다.
백주월은 별 감흥도 없는지 시큰둥한 눈빛으로 바깥편의 거리를 바라봤다. 정오의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거리는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 같은 평화로운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면. 누군가가 오답을 먼저 제출한 것만으로 당장 멸망할 수 있다는 얘기를 진지한 어조로 떠들어 봤자, 실감이 될 리 없지 않은가?
“나 같은 놈을 용사랍시고 소환한 시점에서 이 세계는 멸망해도 되는 세계가 아닐까 싶은데.”
백주월이 이세계로 소환된 지 이틀이 지났다. 그를 이쪽 세계로 소환한 건 공화정파의 급진적 개혁 세력과 쉬르센 가문에 짓눌려 뒤편으로 물러나 있던 스텔라 교단의 일부 성직자들이었다.
이쪽 세계로 소환되기 직전?
백주월은 분명 총탄에 폐를 꿰뚫려 죽어가고 있었고, 자신의 시답잖은 인생을 돌이켜보던 중이었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던 백주월을 부른 건 찬란한 태양의 빛이었다.
‘당신에게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평생에 걸친 속죄의 기회이며, 용서받을 권리를 수복할 유일한 수단입니다. 그대에게 허락된 마지막 연옥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용서 따위를 갈구해 본 적이 없는 삶이었다. 그저 용서받지 못하는 짐승으로 살다 죽는 것이 숙명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양의 빛은 백주월에게 분명히 말했다.
‘유예를 드리겠습니다. 또 다른 세계에서 당신이 단 한 번이라도 누군가에게 용서를 받는다면, 그 용서로 당신의 삶이 긍정받을 수 있게 되겠지요.’
용서라.
백주월에겐 도저히 웃지 못할 농담의 일종이었을 것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부모에게 버려졌고, 식량 보급 따윈 기대할 수조차 없는 빈민가에서 자란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을 한정적이었다.
칼과 총으로 목숨과 몇 푼의 돈을 빼앗고, 덤으로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증오와 원한을 사는 일뿐이다.
백주월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런 쓰레기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재능이 충분했으니까.
인간을 죽이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재주 말이다. 백주월은 20대가 되기 전부터 마피아 조직 내에서 두각을 드러낼 만큼 우수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싸구려 창관에서 적대 조직원의 총을 맞고, 마지막 날숨을 토해내기 직전까지 그런 삶만을 살아왔다.
물론, 뇌에 공급되는 혈액이 적어진 덕분에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죽기 직전 백주월은 생각했다.
자신 같은 쓰레기 놈이라도 죽기 전에 한 번쯤은 온기를 느껴보고 싶다고 말이다.
돈을 받고 다리를 벌리는 창부의 체온으로는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감정의 공백까지. 그런 깊은 곳까지 닿을 수 있는 온기를 조금 갈구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소중하게 대해지는 감각이란, 여전히 백주월에겐 미지의 감정이었으니까.
백주월은 러시아어가 빽빽하게 인쇄된 책장을 천천히 넘기며 머릿속의 불순물을 하나씩 소거해 나갔다.
‘순수한 자기 극복을 통해 이뤄지는 삶의 증명과 오롯이 타인의 용서로 성립되는 존재 증명이라.’
류시혁과 백주월은 ‘용사’라는 카테고리 안에서만 공통항을 지닐 수 있었다.
이쪽 세계로 끌려오기 직전까지 경험했던 삶과 지향해야 할 골인 지점은 겹쳐질 수 없을 만큼 상이했다.
‘빌어먹을 만큼 골치 아픈 얘기야.’
그의 삶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죽이고, 빼앗고, 밤이 되면 푼돈으로 술과 여자를 사는 것뿐인 인생이었다.
그런 백주월에게 어울리지 않는 책무와 목표가 주어진 것이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도저히 감도 오지 않을 정도였다.
“놔주세요! 겨, 경비병을 부를 거에요!”
“그런 음탕한 얼굴로 먼저 꼬신 게 누군데 이제와서 내숭을 떨어?”
“치마를 걷어 봐. 이미 흠뻑 젖어 있을 걸.”
백주월은 시큰둥한 얼굴로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자, 하녀복 차림의 여자아이가 양아치 놈들에게 붙잡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치안 수준 하고는…….”
타악.
책장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색이 용사 아닌가? 작은 선행부터 착실히 쌓다 보면 나아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안으며 백주월이 찻집의 측면으로 보이는 골목 쪽으로 발을 향했다.
* * *
이건 실책이었다.
부화장에 쓸 만한 재료를 조사하기 위해 정원을 나서서 시내의 상점가를 돌아다니던 중이었다만.
내가 상정하지 못한 두 가지 요소가 있었다.
첫 번째는 이런 도심지에서도 범죄가 빈번히 일어날 만큼 치안 수준이 끝장난 시대상이라는 것과.
두 번째는 스칼렛과 유대 관계를 맺고 있는 덕분에 매혹 스킬이 패시브로 발동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지간한 정신력을 지닌 놈이 아니라면 흡혈귀의 매혹으로부터 버틸 수 없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물론 나는 이보다 더한 유혹도 버텨낼 만큼 자제력이 엄청난 남자지만! 다른 놈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 게 오산이었다.
“놔주세요! 겨, 경비병을 부를 거에요!”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골목으로 끌려와 버렸다.
‘진짜 이대로 안쪽 깊숙한 곳까지 끌려가준 다음에 조용히 처리할까.’
되도록 눈에 띄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얌전히 붙잡혀 있는 것뿐이다. 마음만 먹으면 이 더러운 부랑자 놈들의 손을 뿌리치는 건 물론이고, 단검 수백 자루를 쑤셔받아 고슴도치로 만들어 줄 수도 있단 말이다!
‘되도록 소동을 일으키고 싶진 않았는데.’
내 철칙 중 하나인 ‘은밀’에 위배되는 짓이다. 이런 쓰레기 놈들 한둘 죽이는 건 일도 아니지만, 만에 하나 꼬리를 밟힐 만한 짓은 하지 않는 게 상책 아닌가?
“그런 식으로 남자를 홀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지.”
“날뛰지 말라고. 우리도 그다지 거친 짓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계속 이러면 예쁘장한 얼굴이 엉망진창이 될 텐데.”
“이봐 그냥 머리를 몇 대 날려. 죽은 듯이 얌전해질걸.”
진짜 얌전히 놔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본의는 아니지만 사이좋게 스텔라 님의 곁으로 보내드릴 때였다.
“이 개자식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아래 입술을 짓씹어 입안에 피를 고이게 만들었다. 적당한 혈술로 모조리 꽈배기로 만들어줄 작정이었다.
황금빛의 안광이 눈꼬리를 타고 흘렀고, 혈술이 발동되려던 찰나.
“재밌어 보이는데 나도 끼워줄 수 있냐?”
심장이 철렁거릴 만큼 소름돋는 목소리였다. DNA 단위로 새겨진 생존 본능이 일제히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손끝의 마디까지 얼어붙은 듯 굳었고, 허리와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을 만큼 하체가 바들거렸다.
내가 알고 있는 목소리다.
그것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목소리였다. 뇌리에 가장 깊숙하게 각인된 공포가 끓어올라 척수를 타고 흘렀다.
‘백주월……?’
이건 거의 PTSD급의 반응이다.
혈술이고 뭐고 당장 도망칠 수도 없을 만큼 몸에 힘이 빠졌다.
그런 패닉 상태에서도 목소리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부디 내가 잘못 들었길 기도하며 말이다.
‘지자스 크라이스트……!! 백주월 맞잖아! 백주월 벌써 소환됐잖아! 테네브레 맙소사!!’
녀석의 얼굴을 잊었을 리 없었다.
저렇게나 껄렁하게 예쁘장한 얼굴이 흔하겠나? 게다가 신고 있는 워커나 귀에 박힌 피어스는 확실히 이쪽 세계의 물건이 아니었다.
백주월은 양손을 주머니에 푹 쑤셔 넣은 채 이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뭐야 저 새낀?”
“꺼져, 험한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아니, 험한 꼴 보는 건 우리들 쪽이라고 생각한다만. 저 정신병자 사이코패스 새끼가 지금부터 무슨 혐성질을 할지 눈에 선했다.
아마도 별 시답잖은 이유로 나선 게 틀림없다! 이 근처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커피가 더럽게 맛없다는 이유만으로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켜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코패스니까!
저 새낀 촌장 미간에 사마귀 난 게 징그럽다고 머리통을 터뜨려서 죽이기도 하는 놈이란 말이다!
‘미안해요…… 엄마, 아빠…… 저는 여기까진가 봐요…….’
폭발사산 확정이다.
틀림없다. 고사기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다.
“응? 순서는 이미 정했어? 내가 가장 먼저 즐기고 싶은데, 너희들은 뒤에 줄서서 기다리고 있으면 안 될까?”
아, 그런 거라면 내 기대 수명이 20분 정도 연장된 느낌이다.
“이런 기생오래비같이 생긴 새끼…… 크학!!”
빠악!!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백주월이 7미터 남짓한 거리를 좁혀와 양아치 놈의 면상에 주먹을 꽂기까지 일련의 과정이 완전히 생략되어 있었다.
“해볼 작정이냐!”
“죽여 버려!!”
양아치 놈들이 나이프 같은 조잡한 무기를 뽑아 들었지만. 백주월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내가 만든 캐릭터라 알고 있단 말이다.
백주월은 그저 죽이고 찢어발기는데 특화된 성격파탄자다. 양아치 몇 놈이 나이프 들고 덤빈다고 어쩔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양아치 놈들이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역시나 이런 놈들을 상대로는 고유 능력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양아치 놈들을 모조리 정리한 후 이쪽을 슥 바라보더니, 느릿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 저기…… 아니, 그게…… 저, 야, 얌전히 있을 테니까…… 죽, 죽이지 말아주세요…… 아직 죽기 싫어요…… 바로 벗을게요…… 때리지만 마세요…….”
“싸구려는 좋아하지만, 공짜는 싫어. 더군다나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건 더더욱 사양이지.”
백주월은 내 반응이 재밌는지 킬킬 웃으며 주머니에서 낡은 손수건을 하나 꺼냈다. 그러더니 반쯤 벌어져서 피가 흐르고 있는 내 입술에 가져다댔다.
“험한 꼴 볼뻔 했네, 꼬맹이. 혼자 돌아갈 수 있겠냐?”
이건 이런 식으로 안심시킨 뒤에 머리통을 폭파시키려는 고도의 노림수라고 생각한다.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