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63화 (163/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63화

    태양의 영지에서(2)

    비올리네의 아침은 에르멜을 깨우는 일로 시작한다. 전날 밤 일정을 확인하고 늦지 않도록 시간을 맞춰 에르멜을 깨우는 것이다.

    “도대체 자면서 옷을 왜 벗는 거야? 살다 살다 자면서 옷 벗어 던지는 잠버릇은 처음 보네. 야, 일어나. 아침이야.”

    “으으응…….”

    “기상! 기상! 복명복창합니다! 기상! 복명복창 안 합니까!? 정신 못 차립니까?”

    “으으…… 입 닥쳐, 비올리네……. 나 그거 진짜 트라우마 있으니까.”

    “에르멜 교육생! 5초간 전방에 힘찬 함성!!”

    “으아앙…… 시이이바아아알……!!”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오른 듯 이불 속에서 몸부림치는 에르멜을 슬쩍 바라본 후, 비올리네는 침대 바깥쪽에 널브러진 속옷과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정리했다.

    “하여간 내가 타르틸리엇을 탈취하러 왔는지 어린애 돌보러 왔는지 헷갈린다니까.”

    침대 위에는 에르멜이 여전히 엎드린 채 이불을 꼬옥 끌어안고 있었다. 참고로 비올리네는 에르멜이 때맞춰 일어난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비올리네는 잠시 멈춰선 채 에르멜의 나신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견갑골에서 솟아올라, 매끈하게 떨어지는 허리의 곡선이라든가. 그 뒤로 이어지는 탄탄한 엉덩이의 형태라든가 말이다.

    진주만큼이나 새하얀 피부와 대조적으로 또렷한 형태가 드러날 만큼 단련된 신체였다.

    에르멜은 졸린 눈을 반쯤 뜨며 비올리네 쪽을 돌아봤다. 그러더니 쿡쿡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음흉하게 어딜 보는 거야? 돈 내고 봐라, 짜식아.”

    “아, 물론 돈은 가져왔지. 그런데 마땅히 꽂아줄 곳이 안 보여서 곤란하던 참이었어. 팬티라도 걸치는 게 어때?”

    비올리네가 속옷을 가져오자 에르멜이 부시시한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는 사이 비올리네는 탁상에 걸터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쪽의 준비는 거의 다 됐어. 어젯밤에 얘기한 대로 타르틸리엇을 보관하고 있는 지하 중병기 창고의 동측으로 이어지는 배수관을 통해 침투하지.”

    “나도 담배 좀 줘라.”

    “이 자식은 진짜 손이 없나 발이 없나.”

    비몽사몽한 에르멜의 입술에 담배를 끼워 넣고 불을 붙여주자. 에르멜이 천천히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입을 열었다.

    “경비 상황은 평시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지만. 그래도 타르틸리엇은 왕국이 보유한 결전 병기 중 하나야. 어중간한 병력으로 돌파할 수는 없겠지.”

    “아쉬운 대로 델시미르 파광기는?”

    “타르틸리엇 없이 델시미르 파광기만 운용하는 건 무리가 있을 텐데.”

    따지자면 델시미르 파광기는 타르틸리엇의 애드온 무장에 가까웠다. 델시미르 파광기만 탈취한다고 해도 독자적인 운용에 상당한 제한이 걸릴 테니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에르멜은 비올리네가 가져온 속옷을 주섬주섬 챙겨입으며 말했다.

    “오늘은 수도지휘부의 군수사령관하고 차 한잔하자고 전해놨어.”

    “연줄 닿는 곳이 많네.”

    “농담이지, 비올리네? 수도에서 내 입김이 안 닿는 곳이 어딨겠어? 어쨌든 오늘 만나서 경비 인력을 적당히 빼놓을 수 있을지 물어볼게. 아, 그리고…….”

    에르멜은 이미 스텔라 교단의 성녀 후보였다. 그것도 다른 경쟁자가 없는 독보적인 후보 말이다.

    역대 성녀들이 성처녀 시절 정원에 틀어박혀 스텔라의 부름을 얌전히 기다린 것과 대조적일 정도다.

    왕국 내에선 이미 에르멜을 성녀로 취급하고 있는 분위기였다. 공식적인 임명은 아직이지만, 그녀가 수도에서 행사하고 있는 영향력은 역대 성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네가 더러운 하수도 지도를 그리는 동안 나도 군부의 늙은이들 줄을 세워 봤지.”

    군부의 수뇌들은 언젠가 선택을 해야만 할 것이다. 왕권의 수호자로 남을지, 아니면 태양의 의지를 지상에서 대행하는 자의 곁에 설지 말이다.

    에르멜은 눈을 감으며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마왕이 타계하는 순간을 기점으로 종래의 세상이 붕괴되겠어.”

    “수많은 야욕이 고개를 치켜드는 시대가 온다. 이 열도를 차지하고 있던 두 세력이 붕괴되는 순간이야말로 우리의 야망을 실현시킬 때가 아니겠냐?”

    바체트 열도에 흩뿌려진 전쟁 군주들이 일제히 일어나 저마다의 국가를 건국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비단 야망을 품고 있는 건 전쟁 군주들뿐만이 아니었다. 마왕군 내부의 수많은 파벌만큼 왕국군 내부에도 품고 있는 꿈이 다른 집단이 많았다.

    스텔라 교단도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을 것이다. 거기에 피르에나 왕녀를 부활시키려는 칼베라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붉은 종달새의 군대 역시 이 전국의 시대에서 날뛸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누자베스는.

    그런 혼돈을 바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누자베스의 눈동자는 짙은 탐욕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 세상의 전부를 집어삼키고 싶어서 안달이 난 괴물의 눈이었다.

    전쟁의 불길을 두려워하는 기색 따윈 없었다. 그러니까 저건 그저 본래 그렇게 태어난 괴물이다.

    ‘도달해야 할 곳은 같지만, 경유지가 너무나 다르네. 누자베스 너와 나는 서로를 처절하고, 철저하게 뜯어 먹는 관계로 끝맺어지겠어.’

    에르멜은 담배꽁초를 바닥에 대충 내던지며 말했다.

    “비올리네, 그건 알아서 하고 언니는 졸려서 조금만 더 자야겠습니다.”

    “야, 잠만! 기껏 깨워놨더니 다시 눕지 마!”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려는 에르멜을 끄집어내려고 했지만, 근력에서 큰 차이가 나는 비올리네가 에르멜을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오히려 비올리네가 에르멜에게 손목을 붙잡혀 이불 안쪽으로 끌어당겨졌다.

    “……이런 장난은 남자로 돌아왔을 때 해주면 고맙겠는데.”

    “나는 그냥.”

    에르멜이 키득키득 웃으며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안달 난 표정을 보는 걸 좋아할 뿐이야.”

    조급해할 수록 이성적인 판단과 멀어진다. 세상의 종말을 떠벌리고 다니는 종교란 본래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법이다.

    * * *

    누자베스가 지닌 에르멜의 평가는 박한 편이었다. 며칠 동안 함께 지내며 에르멜의 느슨하고 장난스러운 모습만 봐왔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제멋대로에 어리광도 심하며, 어린애처럼 유치한 장난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이것이 누자베스가 지니고 있는 에르멜에 대한 평가였다.

    하지만 세간에서 통용되고 있는 에르멜의 평가는 누자베스의 평가와 정반대에 가까웠다.

    ‘쉬르센 가문이 만들어낸 호문쿨루스라는 소문이 사실처럼 느껴질 정도로군.’

    제3군 수도지휘부의 군수사령관 ‘이마누엘’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에르멜을 보며 그런 감상을 떠올렸다.

    오후의 햇살이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와 실내를 흠뻑 적실 만큼 따스한 날이었지만. 에르멜을 눈앞에 두고 그런 따스함을 느낄 여유는 없었다.

    에르멜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차를 권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인정이나 자비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냉정한 눈빛이었다.

    이런 의미 없는 대화 속에서도 에르멜은 쉴 새 없이 이마누엘 준장을 평가하고 있을 것이다.

    “차가 입에 맞지 않으신지? 아까부터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만.”

    “담력이 약한 편이라, 보급로가 차단된 참호에서 항전하는 게 고작입니다.”

    이마누엘 준장은 이 상황을 비꼬듯 가벼운 농담을 내뱉었다. 에르멜은 왼손에 들고 있던 각모를 무릎 위에서 흔들며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확실히 사내에게 담력을 요하는 시대는 지나버렸죠. 교단의 새파란 수도원생 계집과 차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겁에 질리는 사내들이 살아 숨 쉬는 게 당연한 시대가 되었어요.”

    “나이를 너무 먹어 눈까지 멀어버린 모양입니다. 눈 비비고 찾아봐도 새파란 수도원생은 보이지 않습니다만.”

    에르멜은 입술의 모퉁이를 일그러뜨리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차라리 악마와 탭댄스를 추는 게 지금보단 마음이 편할지 모른다. 이마누엘 준장은 크게 숨을 토해내며 그렇게 생각했다.

    에르멜은 그렇게 큰 체구가 아니었다.

    고작해야 145센티에 어린 소녀로 보일 만큼 작은 체형이었다. 그런 외견에 어울리지 않게도 군의 장교복을 입은 모습이라니.

    다른 소녀가 에르멜과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다면, 군인 아버지의 제복을 훔쳐 입은 딸아이처럼 보이겠지만.

    에르멜에겐 베테랑 지휘관의 관록이 몸 곳곳에 깃들어 있었다.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몸짓에도 말이다.

    이마누엘 준장의 시점에선 그렇게 보였다. 군부에 깊숙이 뿌리 박은 거인과 마주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성처녀님께서 저 같은 후방의 나부랭이와 담소를 나누고 싶으셔서 자리를 마련하신 건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마누엘 준장은 마족들의 신앙에 대해 아는 게 있나요?”

    이마누엘 준장은 자신을 시험하는 듯한 에르멜의 질문에 지체 없이 대답했다.

    “밤의 어머니 테네브레를 주신으로 삼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마족이 최초의 밤 이후에 입게 된 은혜를 갚기 위해 헌신해야 된다는 것까지 말이죠.”

    “의외로 상세하게 아네요.”

    “사상 검증이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이단심문은 제 관할 업무가 아닌지라, 아쉽게도.”

    에르멜은 각모로 입가를 가린 채 쿡쿡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각모를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도저히 같이 웃을 수 없을 만큼 등골이 서늘한 웃음이었다.

    “신을 모신다는 것은 같으나, 우리와 그 행동 동기의 본질이 다르죠. 우리는 아직 스텔라 님께 받은 게 아무것도 없는데요.”

    “지금의 발언은 아무리 성처녀님이라도 문제시되지 않을지 우려될 뿐입니다.”

    “문제요? 문제가 어디 있겠나요. 지상에서 그 누가 저를 벌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형법 따위가 지엄한 천계의 규율 위에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은가요?”

    “죄송합니다, 실언이었습니다.”

    이마누엘 준장은 에르멜이 오늘 자신을 불러낸 이유가 무엇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망할 년. 성녀 취임이 코앞이라고 짓밟기를 시작했군.’

    군부와 왕정은 새로운 성녀의 탄생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강력한 종교 지도자의 탄생은 기득권의 큰 협위가 되었으니까.

    그리고 성녀 역시 군부와 왕정 내에서 각각 자신이 쓸 수 있는 수족을 선별하고, 나머지 것들을 짓밟아 놓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친성녀 세력이 누구인지 벌써부터 솎아내기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식 취임은 아직이었지만, 에르멜은 예외적으로 성녀 취급을 받는 게 묵인되고 있었으니까.

    ‘정년 때까지만 버텨볼 생각이었는데 말년에 꼬이는군.’

    이마누엘 준장은 복잡한 표정으로 에르멜의 안색을 살폈다. 여기서 성녀의 수족으로 선별되어 기회가 주어지느냐, 아니면 걸러져서 짓밟기를 당하느냐.

    그 선택은 오롯이 에르멜의 몫이었다.

    만약 후자라면 당장 이곳으로 이단심문관 놈들이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불의와 옳지 못한 것에도 너그럽게 눈을 감아주는 것이 마족들의 미덕이라네요. 밤의 어머니가 불의와 정의를 불문하고 감싸 안은 것처럼.”

    “녀석들의 비열한 본성을 합리화하기 딱 좋은 교리군요.”

    “그런가요?”

    에르멜은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신 후 이어 말했다.

    “하지만 인간 역시 태양처럼 살 수는 없답니다. 지상의 만물을 평등하게 보듬어 살피며, 빛과 어둠으로 혹은 흑과 백으로 정의와 불의를 명확하게 심판할 수도 없으니까요.”

    “타당하신 말씀입니다만.”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불의로부터 눈을 돌리고, 살아가며 셀 수 없을 만큼의 부정으로부터 눈을 감지 않나요?”

    그리고 인간만큼 자신의 불의에 관대한 생물도 없을 것이다. 에르멜의 눈빛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이마누엘 준장. 땅속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태양의 빛이 비칠 것이라 생각하나요?”

    “성처녀님…….”

    “딱딱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인간이 태양처럼 살려고 해봤자 불타서 잿더미가 될 뿐인 걸요.”

    딸그락.

    뒤늦게 이마누엘 준장은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손님들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이미 이곳은 에르멜과 이마누엘 자신. 그리고 이단심문관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처럼 살고자 한다면, 그 용기만큼은 높게 평하겠습니다.”

    물론 직접적인 위해는 가할 수 없을 것이다. 이건 그저 단순한 협박이다. 꼬투리는 언제든 잡을 수 있고, 잡히는 순간 이교도로 취급하여 끝장을 내주겠다는 협박이다.

    이마누엘 준장의 턱선을 따라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 떨어졌다.

    “본관은 우매하여 인간으로 사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성처녀님께서 그 길을 알려주신다면 따르겠습니다.”

    에르멜은 빙긋 웃으며 금화 세 닢을 테이블에 올렸다. 홍차 두 잔을 계산하기엔 금화 한 닢이면 차고 넘친다.

    이마누엘 준장이 금화와 에르멜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자, 에르멜이 작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남는 건 주머니에 넣어 두시길.”

    그리고 이마누엘 준장이 주머니에 넣어둬야 하는 건 금화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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