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짓는 플레이어 147화
카쿠쟈(5)
루칸다가 숙소의 방으로 돌아오자.
로아가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꽤나 언짢은 기색이다.
“젠장! 아무리 각하의 명령이라지만 이런 옷을 입고 돌아다니라니 속이 뒤집힐 거 같아.”
“로아, 목소리를 낮춰라. 혹여나 밖에 들린다면 곤란해지니.”
“지금 자기 일이 아니라고 그렇게 태연한 거지? 이런 창부 같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영애가 어딨어?”
“녀석들의 관심을 사기엔 딱 좋은 의상이었다만. 게다가 기억에도 또렷하게 남았겠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어깨선에서 시작하여 등과 허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드레스였다. 거기에 골반까지만 아슬아슬하게 가린 탓에 새하얀 다리가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었다.
빈약한 가슴이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오히려 가련한 이미지를 더하고 있었다. 게다가 로아는 누구라도 넋을 잃고 돌아볼 정도의 미인이다. 그런 자잘한 문제를 신경 쓰는 사내는 없을 것이다.
로아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풀어 헝클며 말했다.
“그래서 언제부터 착수할 생각이야? 각하께서는 너한테 전권을 위임한다고 하셨는데.”
“아직 우렌에 대한 여론을 잠깐 들은 것뿐이다. 마을의 상황도 파악해 둬야겠지. 가용 수단은 많이 확보해 둘 수록 유리하다.”
루칸다는 탁상에 놓인 목함을 열어 담배를 한 개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곧장 불을 붙이지 않고 손끝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는 우렌을 동지의 챔피언으로 영입하기 위해 무슨 짓을 해도 된다고 하셨지만. 녀석을 납치해 억지로 끌고 와봤자 별 도움이 안 되겠지.”
“한쪽 눈알을 뽑아버려. 충성을 맹세하겠다고 질질 짜면서 울부 짖을 걸.”
로아는 담배 꽁초를 튕겨 버리며 짜증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로아가 이렇게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누자베스의 명령으로 여장을 하게 된 것 때문일까? 물론 그 영향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로아의 심기가 불편한 건 누자베스와 스칼렛이 단둘이 둥지에 남아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로아를 루칸다와 함께 보낸 것은 루칸다의 요청 때문이었다. 로아를 사용할 곳이 있다는 이유였다.
가기 싫다고 울고불고 생떼를 쓰는 로아를 어르고 달래서 가까스로 루칸다와 함께 보낸 것이다.
누자베스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잘라서 손에 쥐어준 뒤에야 로아가 루칸다를 따라 둥지를 나서게 되었다.
누자베스의 머리카락이 담긴 주머니를 소중하게 만지작거리고 있는 로아를 바라보며 루칸다가 말했다.
“루스날. 이 세상엔 칼로 베어버릴 수 없고, 총탄으로 뚫을 수 없는 게 있는 법이다. 눈깔 하나를 후벼파낸 정도로 충성을 맹세하는 사내는 둥지에 필요 없다.”
“그럼 어쩌겠다는 말이야?”
루칸다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는 이내 눈을 뜨며 말했다.
“녀석의 갈증을 쫓아야지. 갈증이 무엇인지 알아낸 후엔 스스로 그 갈증을 자각하도록 유도해야겠고.”
“그리고?”
“우리는 그저 한 방울씩 물을 떨구며 물러날 뿐이다. 녀석이 자진해서 저수지에 도달할 때까지.”
그 지독한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곳이 누자베스의 곁밖에 없다면. 우렌은 두 번 다시 지독한 갈증만이 기다리고 있는 사막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루칸다가 피르에나 왕녀의 곁에서 낙원을 꿈꿨던 것처럼 말이다.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어. 루칸다 너한테 전부 맡기겠지만, 최대한 서둘러.”
로아는 드레스를 벗어 던진 후 침대의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누자베스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듯 머리맡에 두고 말이다. 루칸다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불을 끈 후 방을 나섰다.
‘내일부터 바빠지겠군.’
누자베스가 타우저 백작의 공세를 버텨내는 동안 우렌을 손아귀에 넣어 13차폐구로 돌아가야만 했다.
어느 쪽이든 간에 루칸다도 서둘러야 하는 입장이었다.
* * *
“로아나?”
“이 사람이 아주 귀를 틀어막고 사는구만. 요즘 그 아가씨 이름을 모르는 마을 사람이 없는데.”
“그렇게 예쁜가?”
“그걸 말이라고 하나? 소문으로는 헬베르카 분가 출신이라는데, 직접 보면 숨을 쉬는 걸 잊을 만큼 아름답다고 하더군!”
“헬베르카라면 당연히 그렇겠지! 그런데 그런 고상한 귀족 아가씨가 이런 촌구석까진 어쩐 일로 왔나?”
“나도 그건 잘 모르는데…… 무슨 장사를 한다는 모양이더라고.”
유바흐.
마왕성에서 남쪽으로 50여 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이었다.
이런 지역에선 외지인은 불가피하게 존재감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루칸다와 로아가 최대한 눈에 띄지 않고 움직이려고 해도 말이다.
그렇기에 루칸다는 가짜 신분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아니, 오히려 대놓고 더욱 알리기 위해 로아의 미모를 이용했다.
진실과 거짓이 미묘하게 섞인 정보는 순식간에 마을에 퍼졌고, 둘은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고 유바흐 마을에 섞여들 수 있었다.
‘로아나? 헬베르카 순혈이라면 분가라고 해도 상당한 귀족이겠네.’
마을의 사내들이 떠드는 얘기를 우연히 귀담아 듣고 있던 피에르 쟝은 흥미가 동했다.
피에르 쟝은 한 달 전부터 유바흐 마을에 체류하고 있던 떠돌이 음유시인이었다.
물론 음유시인이라는 건 표면적인 신분에 불과하다. 피에르 쟝은 각 마을을 떠돌며 지역 유지의 처첩을 유혹한 후 금품을 뜯어내는 난봉꾼이었던 것이다.
픽업 아티스트라는 직업이 정의된 건 1980년대 미국이 최초였지만, 로맨스 사기는 고대부터 이어진 유서 깊은 일이었다.
어쨌거나 이번 마을에선 마음에 드는 사냥감이 없었다. 아쉬운 대로 마왕군 장교의 마누라를 하나 꼬셔서 용돈 정도는 타고 있었지만 말이다.
피에르 쟝은 우쿠렐레를 가볍게 튕기며 ‘로아나’라는 아가씨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아무리 예뻐 봤자 여자가 다 거기서 거기지.’
지금까지 피에르 쟝의 표적이 되어서 벗어난 여자는 없었다. 시원시원하게 그려진 또렷한 이목구비와 낮고 달콤한 목소리. 거기에 수준급의 현악기 연주 실력!
거기에 여심을 사로잡는 러브레터 작성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피에르 쟝을 악기 연주 교습의 강사로써 집으로 불어들이는 순간이 끝이었다.
실제로 이 마을 유바흐에서도 마왕군 장교의 마누라도 어렵지 않게 손에 넣지 않았나?
“얼마나 예쁜지 한 번 보고 싶군.”
“요즘은 정오 전에 향료품 가게를 둘러보고 다닌다는데…… 오, 마침 저기!”
마을의 사내가 가리킨 방향을 피에르 쟝도 슬쩍 돌아봤다. 일대에 침묵이 흘렀다. 소름이 돋을 만큼의 정적이었다.
햇빛 아래에서 나타난 로아의 모습은 주변 일대를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남정네들은 모두가 그 자리에서 굳어 입을 반쯤 벌린 채 로아를 바라보기 바빴다.
피에르 쟝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저것이…… 밤의 어머니께 사랑받는 일족이란 말인가.’
음유시인의 노래에도 헬베르카는 종종 등장하는 마족이었지만. 그 실물을 보게 된 건 피에르 쟝도 처음이었다.
마치 이 세상의 생물체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피에르 쟝은 가슴의 박동이 빨라지는 걸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여자를 거쳐 왔지만, 진심으로 사랑을 품어본 적은 없었다. 사랑 따윈 애매모호한 허구의 관념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로아를 목격한 직후.
피에르 쟝의 등줄기로 강렬한 전류가 흘러내렸다.
* * *
루칸다와 우렌이 다시 만난 건, 그들이 13차폐구에서 온 지 3일째 저녁이었다.
모처럼 루칸다가 다시 찾아와 술집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지만, 루칸다는 다른 취객들에게 관심이 없는 듯 지나쳐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루칸다가 발걸음을 멈춘 건 우렌이 홀로 앉아 있던 테이블의 앞이었다.
“마왕군의 장교라는데, 올리브 열매도 주문하지 못할 만큼 박봉인가?”
“그런 질문을 하는 걸 보니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겠군.”
“아직 그 만큼 머저리는 아니라는 뜻이지.”
“현명한 친구로군. 안주도 없고, 싸구려 버번 한 병 뿐이지만 괜찮다면 앉게.”
우렌은 호쾌하게 웃으며 테이블의 맞은편을 가리켰다. 루칸다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 예를 갖춘 후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았다.
“아, 루칸다 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주문하시겠어요?”
술집의 점원은 루칸다를 기다렸다는 듯한 걸음에 달려와 방긋방긋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우렌을 상대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루칸다는 점원이 가져온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이 가게에서 가장 싸구려 안주, 그리고 술은 가장 독한 녀석으로.”
점원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 후 바로 주문을 전하기 위해 테이블을 떠났지만.
우렌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루칸다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적의와 경계심이 깃들었다. 빈틈없이 굳은 얼굴의 표정은 ‘카쿠쟈 우렌’의 것이었다.
루칸다는 그런 우렌의 표정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킬킬 웃었다.
“내 주문이 그렇게 이상했나?”
“어디 소속인가?”
가장 싸구려 안주와 가장 독한 술.
이런 주문을 하는 건 글로레나 왕국군의 병사들밖에 없었다. 그들의 입버릇이었고, 우렌도 적국 병사들의 입버릇을 하나나 둘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구면이었어. 한 번 만난 적이 있었지. 르 만타나 근위유격대를 기억하나?”
“잊을 리가 없지. 비아 엘티나 이후로 가장 치열하게 부딪쳤던 부대였으니까.”
“유격대장 루칸다는 어떤 고블린이었나? 비아 엘티나의 구원자인 카쿠쟈의 솔직한 평가를 듣고 싶군.”
“피도 눈물도 없는 지독한 악마 자식이었다고만 말해두지.”
“그렇게까지 평해주니 영광이군.”
점점 옛기억이 돌아왔다.
피르에나 왕녀가 이끌었던 붉은 종달새의 부대. 마족으로 구성된 이형의 병단이었고, 마왕군 모두가 이를 갈 만큼 지독하고 악랄한 놈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나타난 고블린은 유격대장 ‘루칸다’였다. 피르에나 왕녀의 오른팔 말이다.
“동족을 배신하여 번 돈으로 사는 술은 마시지 않겠네.”
우렌은 자신의 몫으로 동화 세 개를 주머니에서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우렌. 우리는 다른 대의를 쫓았던 것뿐이다. 그 대의가 시들어 스쳐지나간 농담이 되었으니, 술잔을 기울이지 못할 것도 없지 않겠나.”
“동족에게 칼을 겨누는 것에 무슨 대의가 있었나, 르 만타나의 악령이여.”
“그 얘기를 지금부터 하려고 하는데 시간 좀 내준다면 고맙겠군.”
루칸다는 점원이 가져온 술병에서 코르크를 따서 잔에 따라냈다. 그러고는 단번에 들이킨 후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사실 우리 같은 도구들에겐 그깟 대의가 뭐가 중요하겠나? 내키는 대로 마음껏 휘둘러 줄 주인이 필요할 뿐인데.”
바라보고 있던 이상향은 달랐지만.
대의를 품고, 결정하는 건 그들의 주인이 해야 할 일이다.
채찍과 검에게 대의는 중요치 않았다.
눈앞의 적과, 더 많은 적과, 수평선 가득 몰려오는 적이 있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이 아니던가?
우렌은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루칸다를 노려본 후. 얕은 한숨을 토해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얘기나 들어보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루칸다는 빙긋 웃으며 우렌의 잔에 술을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