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46화 (146/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46화

    카쿠쟈(4)

    “우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우리는 남들만큼만 불행하고, 남들 못지않게 행복할 뿐이야. 삶이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비극도 희극도 아닌 법이니까.”

    사관생도 시절부터 비아 엘티나 제압전까지. 우렌과 줄곧 함께했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우렌과 반대로 자유로운 삶을 꿈꾸던 사내였다.

    “사내의 삶이란 그리 복잡하지 않거든. 한 자루의 칼과 죽여야 할 놈만 있으면 끝이지. 사치를 부리자면 보드카와 매중초 한 모금, 하룻밤을 같이 보낼 엉덩이 가벼운 암컷 정도는 더 필요하겠지만.”

    “언제까지인가?”

    우렌은 꿈꿔 본 적도 없는 사치와 향락을 흘려들으며 되물었고. 사내는 킬킬 웃으며 대답했다.

    “관짝에 못 박을 때까지겠지, 우렌. 수컷이란 뒤질 때까지 그런 식으로 사는 거다.”

    그런 대답이었다.

    수컷의 삶이란 그랬다.

    애새끼였다가, 그리고 애새끼였다가, 또다시 애새끼였다가, 어쩌다 아버지였다가. 결국은 한때 누군가 죽을 만큼 사랑했던 누군가가 되는 것뿐이다.

    직후 비아 엘티나 제압전의 광경이 플래시백 되듯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폭음과 비명 소리. 고통에 젖은 신음과 거리를 좁혀오는 무수한 군화굽 소리.

    그 잔혹한 풍경 속에서 사내는 죽어가고 있었다. 터져 나온 내장이 흙바닥 위로 흘렀다.

    “추워요…… 추워, 추워…….”

    그 기억 위로 딸의 마지막 목소리가 겹쳤다. 아이가 토해낸 마지막 날숨은 송곳처럼 가슴에 박히는 것이다.

    이미 십수 년이 지난 과거의 일이었지만, 우렌의 뇌리 깊숙한 곳에 새겨져 결코 지워지는 법이 없었다.

    “헉!”

    우렌이 얕은 비명과 함께 눈을 떴다. 자신이 열차의 좌석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잠시 잠에 들었던 것이다.

    우렌은 가슴의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훔쳐냈다.

    주변 좌석에 앉아 있던 승객들이 우렌의 비명을 듣고는 힐끔거리며 그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장교 정복을 입고 있다지만, 불어난 군살과 듬성듬성 빠져 숱이 적은 머리카락. 세월의 흐름을 숨길 수 없을 만큼 늘어난 주름.

    열차에 타고 있던 승객들의 눈에는 그저 초라한 중년 남성처럼 보였다.

    승객들은 이내 비루한 중년에게 흥미를 잃고, 각자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 중에서 한 소년만이 우렌을 유심히 지켜보다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아저씨 그거 비아 엘티나 특공 육성장이죠?”

    소년은 우렌의 가슴에 달려 있던 무수한 훈장들 중 하나를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우렌은 그 훈장을 슬쩍 내려본 후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사뭇 흥분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우와! 그럼 아저씨도 구원자들과 같이 싸웠던 거예요?”

    “이 아저씨는 운이 좋아서 말이다. 훌륭한 영웅들과 함께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지.”

    “그, 그럼…… 비아 엘티나의 카쿠쟈와 만난 적도 있어요? 철혈의 중재자요!”

    두 하이브 마인드의 접경 지역에 위치해 있었던 탓에 전쟁의 포화에 휘말려 수많은 마족이 죽었다.

    그 접경 지역이 ‘비아 엘티나’였다.

    그리고 비아 엘티나에 출전하여 수많은 동포들의 삶을 구해낸 것이 바로 철혈의 중재자였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아 말했지만. 카쿠쟈 부대는 끝끝내 강대한 두 하이브 마인드를 비아 엘티나 지역에서 몰아냈던 것이다.

    소년은 눈을 빛내며 우렌의 대답을 기다렸고. 우렌은 힘없이 웃으며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구나. 늙으면 어제의 일도 잘 기억나지 않게 되는 법이라.”

    우렌의 대답에 소년은 한껏 실망한 듯한 눈빛을 보내더니, 이내 자기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우렌은 차창 밖을 잠시 바라보다, 누추한 가방을 열었다. 임관 직후 지급받은 보급품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다. 그의 무욕하고 청렴한 성품을 대변하듯 말이다.

    가방에서 봉제 인형과 바늘을 꺼내 들었다. 봉제 인형을 만들기 시작한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손재주가 없는 것인지 그가 만든 인형은 언제나 조잡했다.

    우렌은 서툴기 그지없는 사내였다.

    전쟁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중년 사내일 뿐이다.

    그런 우렌이 만든 봉제 인형을 언제나 기쁘게 받아주던 딸은 이제 이 세상에 없었다.

    우렌은 씁쓸한 미소를 되삼키며 봉제 인형의 마무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존재한다는 건, 역시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열차는 조만간, 아직도 채 정리되지 못한 전장에 도달한다. 늙고 지친 수컷에게 가정만큼 난해한 전장은 없었다.

    * * *

    “이곳에서 못 보던 얼굴이군. 어디 출신인가?”

    기묘한 조합이었다.

    수컷 고블린 한 마리. 그리고 국화 인장을 지닌 헬베르카 계열의 마물이 한 마리.

    확실히 이런 허름한 술집에서 보기 힘든 조합이 아니던가?

    취객들의 흥미를 끌기 충분했다.

    그리고 이렇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다가온 녀석도 있었다.

    루칸다는 다가온 취객을 가볍게 훑어본 후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페이드레트 출신이다. 중부의 아카르타 산맥에 위치한 요새 도시지.”

    “오호라, 그랬군. 이런 고상한 아가씨하고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동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고블린 형씨도 뼈대 있는 집안의 도련님이었군.”

    페이드레트 출신의 고블린은 ‘고혈종’의 후계였다. 반 르낙시아의 은혜로 태어난 정령들 중 세 번째로 두각을 드러낸 일족이다.

    타종족의 암컷을 잉태시켜 난잡하게 번식하는 일반적인 고블린들과 달리, 페이드레트의 고블린은 동일종으로서의 순수성을 지켜 온 종족이다.

    물론 다른 고블린이 스스로를 페이드레트 출신이라 주장해도 비웃음을 사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루칸다의 말투나 몸짓은 거칠면서도 기품이 깃들어 있었다.

    스스로의 출신을 밝히지 않더라도 유서 깊은 일족의 고블린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루칸다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헬베르카 계열의 마족. 분가 루스날 출신의 로아 역시 의심의 여지 없는 순수 혈통이었다.

    가지런히 땋아 뒤로 묶은 금발은 노을빛을 머금은 강물만큼이나 청명했고, 흠 잡을 곳 없이 유아한 이목구비는 로아가 헬베르카 출신이라는 사실을 여지없이 주장하고 있었다.

    성별을 불문하고,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을 채 바라볼 만큼 아름다운 생물체. 그 자체만으로도 헬베르카 계열이라는 사실이 증명된다.

    결정적으로 국화의 인장이 새겨진 비녀를 머리에 꽂고 있지 않은가?

    “루칸다 공. 시간이 늦었으니 먼저 숙소로 돌아가 있겠습니다.”

    로아는 다가온 취객을 슬쩍 바라봤지만, 전혀 흥미가 없다는 듯 새침하게 시선을 거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칸다가 배웅을 하고자 같이 일어나려 했지만, 로아가 루칸다의 어깨를 손끝으로 살포시 누르며 말했다.

    “내일의 거래에 늦지 않을 정도만 즐기다 돌아오시길.”

    “미안하군, 이런 늦은 시간까지 어울리게 해서.”

    로아는 부드러운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 후 홀로 술집을 나섰다.

    치마 아래로 뻗어 나온 가늘고 부드러워 보이는 로아의 허벅지는 이 술집에 모인 남정네들의 시선을 잡아끌기 충분했다.

    로아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본 후, 취객이 음흉한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끝내주는 여자로군. 헬베르카 출신이겠지? 나 같이 천박한 가난뱅이는 손끝 한 번 건드려 보지도 못하겠어.”

    “그렇게 자조하지는 말게. 그냥 저 녀석들의 인선이 까다로울 뿐이니 말일세.”

    “말은 참 겸손하게 하는구만. 그래서 어땠나? 치맛자락은 한 번 들춰봤나?”

    “페이드레트 출신이라고 목숨이 두 개인 건 아니라.”

    루칸다는 끌끌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는 담배에 불을 붙이는 사이 다른 손님들도 루칸다의 근처에 은근슬쩍 다가와 있었다.

    “이번 교역의 동업자로써 동행하고 있는 것뿐이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밑천이 적으면 남는 것도 없더군.”

    “역시 어마어마한 부잣집 아가씨였군!”

    “그래서 진전은 있었나?”

    “그 진전이란 사업 파트너로써의 진전을 의미하는 건가?”

    “크하핫! 이 고블린 양반이 애를 태우게 하는 재주가 있구만.”

    “다른 쪽의 진전을 얘기하는 것이라면 아직 계획만 짜고, 시장 조사를 하는 중이라고 해두겠네.”

    위스키를 거듭 들이킨 후 살짝 취기가 오른 듯 조금 상기된 목소리로 내뱉었다.

    “뭐, 조만간 자빠뜨리겠지만. 그때도 이 마을에 체류 중이라면 헬베르카의 아가씨는 어떤 교성을 흘리는지 얘기해주지 못할 것도 없지.”

    루칸다는 빠르게 타지의 술집에 녹아 들어갔다. 화제의 불씨를 로아가 제공한 후 떠났고, 루칸다가 능숙하게 주변의 이목을 끌어 모은 것이다.

    출생 성분과 달리 격식을 차리지 않는 털털한 성격도 한몫 거들었지만. 수컷은 몇 살이 되어도 여자와 칼싸움 얘기에 환장하는 법이다.

    그리고 계집질과 칼싸움은 루칸다의 전공 분야였다. 취객들은 순식간에 루칸다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루칸다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호의와 관심의 시선을 받으며 천박한 이야기를 낄낄거리며 떠들었다.

    루칸다가 트롤 도적놈 다섯 마리를 도륙낸 얘기로 한창 분위기가 달아오르려던 찰나.

    끼익.

    술집의 문이 열렸고, 루칸다가 입을 멈추자 취객들의 시선이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우렌이잖아?”

    “저 양반은 간만에 일을 받았다며 한동안 보이지 않더니.”

    “또 술독에 빠져 살겠구만.”

    취객들은 저마다 알고 있는 우렌의 정보와 평가를 술술 토해냈다. 루칸다는 짐짓 모르는 척 질문을 던졌다.

    “누군가?”

    “아, 고블린 형씨는 타지에서 와서 모르겠군. 마왕군의 장교라는데…… 내가 보기엔 한물 간 모양이야. 허구한 날 대낮부터 혼자 퍼마시는데, 줄이 밀려서 반쯤 퇴역한 신세겠지.”

    루칸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우렌을 관찰했다.

    ‘저것이 카쿠쟈의 우렌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군.’

    술집에 모습을 드러낸 우렌은 사뭇 인상이 달랐다. 13차폐구에서 만났던 우렌은 생기가 넘쳐 흘렀다.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된 우렌은 전장에서 보여준 모습과 180도 달랐다.

    축 늘어진 어깨와 뱃살. 세탁은 하는 건지 의심이 될 만큼 허름한 의복. 숱이 적은 머리를 긁적이며 구석진 자리에 힘겹게 앉는 모습이라니.

    주문을 받은 점원이 가지고 나온 건 싸구려 버번 한 병이었다.

    루칸다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점원을 불러 무언가를 주문한 후 외투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상하신 아가씨를 야심한 시간에 혼자 두는 것도 몹쓸 일이니 슬슬 돌아가야겠네.”

    사뭇 아쉬운 듯 루칸다를 붙잡는 목소리가 많았지만, 루칸다는 우렌 쪽을 슬쩍 바라본 후 지체 없이 술집을 나섰다.

    우렌은 술집의 시끌벅적한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버번 병을 따서 글래스잔에 따르려 했지만.

    “방금 나가신 손님이 우렌 아저씨 주라고 주문했어요. 이거 드세요.”

    점원이 퉁명스럽게 말하며 술병 하나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나한테?”

    우렌은 점원이 가지고 온 술병의 라벨을 확인했다.

    “마스키아 17년산…….”

    마스키아는 클레디마 산의 블렌디드 위스키 중 하나였다. 그다지 고가의 술도 아니었지만, 가난뱅이가 쉽사리 마실 수 있는 술도 아니다.

    마스키아는 게르나의 고어로 ‘출전’을 의미하며 가장 값이 싼 17년산은 초급 장교의 임관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마시는 의례가 있었다.

    우렌도 첫 임관 때 마셨던 기억이 있는 위스키였다. 그리고 퇴역만을 남겨 놓고 있는 우렌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술이기도 했다.

    “참으로 짓궂게도 친절한 손님이셨던 모양이군.”

    우렌은 허탈하게 웃으며 오프너를 손에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