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15화 (115/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15화

    누군가의 방법(7)

    찰나의 순간이었다.

    측면에서 횡단을 가르는 로아의 대검을 받아 쳐낸 직후.

    촤아악!

    몸이 종잇장처럼 밀려나며 모래사장 위에 긴 궤적을 그렸다. 그리고 류시혁이 자세를 고쳐 잡을 새도 없이 루칸다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푸른 연기를 머금은 검신.

    류시혁은 본능적으로 저 검격을 막아내거나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어떤 변수 요소도, 진리처럼 여겨지는 물리법칙조차 저 검이 지닌 절대적 결과를 바꿀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류시혁은 루칸다의 검을 막아내려는 것처럼 황급히 검을 치켜들었다.

    이대로 검과 함께 통째로 류시혁을 양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영악한 놈이로군.’

    그러나 루칸다도 그 찰나의 순간 칼날 너머로 번뜩이는 류시혁의 눈빛을 포착해냈다.

    재빠르게 허공에서 방향을 틀어 착지했고, 류시혁의 발이 루칸다가 접근했던 방향을 향해 내질러졌다.

    저 위력적인 발차기에 직격으로 맞았다면 지금쯤 루칸다가 바닷물에 처박혔을 뻔한 순간이었다.

    처음부터 검으로 막아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협공을 한 번 흘려낸 후 류시혁이 바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 밀리아가 플레어를 발동시킨 곳을 향해 말이다.

    80미터의 거리를 좁히기까지 1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루칸다와 로아가 그 뒤를 바짝 쫓았다.

    하지만 류시혁 쪽이 더 빨랐다.

    오크 전사들이 트올리카를 보호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그딴 것들이 류시혁의 장애물이 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이브 마인드만 처리한다면 모든 병력이 무력화된다. 루칸다와 로아 역시 하이브 마인드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챔피언에 불과했으니까.

    휘익!

    류시혁의 검이 트올리카의 목을 향해 정확하게 날아들었다.

    누자베스는 마인드 모드를 통해 이 장면을 주시했다. 류시혁이 트올리카의 목을 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 싶었다.

    손쉽고도 가벼운 정의가 집행되는 광경이란. 일그러진 고독감을 적셔주는 단비와 같았다.

    ‘그래, 대중이 바라는 정의란 결국은 저렴한 명분에 불과하지. 시혁아 넌 그저 광대일 뿐이야. 실존하지 않는 관념을 집행하는 척 하며 싸구려 쾌감을 자아내는 재주밖에 없겠지.’

    누자베스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완벽무결한 정의의 사자 따윈 없다.

    류시혁은 전지하지도 않았고, 전능하지도 않다.

    가시적인 적이 마련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싸구려 인간이다. 자신과 크게 다를 리가 없다.

    그리하여 이야기는 주인공 류시혁의 재조형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누자베스의 예상을 비웃듯 류시혁은 휘둘러진 검의 궤도를 바꿔 뒤쫓아온 루칸다를 향해 날아들었다.

    카앙!

    간발의 차로 검격을 막아냈지만, 루칸다의 팔에서 섬뜩한 골절음이 울렸다.

    그 충격으로 루칸다가 수십 미터나 날아가 모래 사장에 내리 꽂혔다.

    촤악!

    멋드러지게 루칸다를 쳐낸 후 지면에 착지한 류시혁은 얕은 웃음을 토해냈다.

    “역시 이 섬은 이상하군. 하이브 마인드조차 잃을 것이 있다는 말인가.”

    류시혁은 간발의 차로 트올리카의 눈빛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눈이었다.

    수학적인 계산을 통해 승산을 도출해내는 하이브 마인드가 품을 법한 눈빛은 아니었다.

    무언가 지켜야 할 것이 있는 남자의 눈이었고, 그는 종용당한 선택에 의해 전장에 선 것뿐이다.

    그리고 류시혁이 쿠르드 지역에서 질리도록 봐왔던 눈이었다.

    “용사님! 마왕군이 상륙을 준비하고 있어요. 저장된 게이트 좌표로 워프해야 돼요!”

    밀리아는 문스톤을 꺼내들며 류시혁을 향해 다가왔다. 게이트 좌표가 저장된 문스톤이었다.

    “아, 누자베스! 누자베스도 데리고 가야 되는데……!”

    뒤늦게 떠올랐다.

    밀리아는 누자베스가 달려간 방향을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하지만 류시혁은 이미 어느 정도의 퍼즐 조각을 맞췄는지, 그다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마 알아서 오지 않을까?”

    “그럴 리가 없잖아요! 당장 누자베스를 찾으러…….”

    밀리아는 이질적인 분위기를 깨닫고는 입을 멈췄다.

    분위기가 일변해 있었다.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던 폭음과 마물들의 괴성이 멎었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듯 조용했다.

    저벅.

    정적 속에서 전투화의 굽이 모래사장을 지긋이 즈려밟는 소리가 울렸다.

    류시혁과 밀리아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봤고. 누자베스가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틀림없이 누자베스였다.

    허름한 옷차림이 아니라, 짙은 회색의 제복을 걸치고 있었지만 말이다.

    오른쪽 가슴에는 금빛 테두리로 장식된 붉은 훈장이 하나 달려 있었다.

    총독이 직접 하사하는 ‘2급 금성’의 훈장이다. 밀리아는 마왕군의 표창이나 훈장에 관해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금성 훈장은 지역을 제압하는데 성공한 하이브 마인드에게 수여되는 것이다. 그것도 2급이라면? 최소 수천 명의 인간을 죽이고, 그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은 마물이란 증거다.

    “누자베스……?”

    밀리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누자베스를 향해 말을 걸었다. 밀리아의 목소리는 명백히 떨리고 있었다.

    “아, 밀리아.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우리 애들이 살짝 거칠어서 크게 다칠까 봐 걱정했어요.”

    누자베스는 밀리아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시선이 류시혁을 향한 순간 끓어오르는 적의가 동공에 서렸다.

    “언제부터 눈치챘지?”

    그런 의문이었다.

    류시혁이 트올리카를 죽이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다. 아마도 류시혁은 이 무대가 누군가에 의해 연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게 추론하는 것이 옳았다.

    적어도 누자베스의 사고 과정을 거치자면 그러했다.

    “하이브 마인드였군. 밀리아의 감별도 틀릴 때가 있는 모양이야.”

    “그, 그럴 리가 없어요! 누자베스에겐 정말 사람의 영혼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지금까지 인간의 영혼을 지니고 있는 하이브 마인드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설령 그 하이브 마인드의 주재료가 인간의 혈액이나 시체 같은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영혼 그 자체를 전이시킬 수는 없었으니까.

    “글세, 하이브 마인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류시혁은 누자베스의 적의 어린 시선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지옥의 밑바닥에서 나뒹굴다 보면 대충 느낄 수 있게 되더군. 절망의 수렁에 빠진 인간이 택하는 방법은 한정적이니까.”

    일반적인 경우의 인간이라면?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탈출할 수 없게 되었다고 판단한 순간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십중팔구의 대다수가 여기에 속했고.

    1할 정도의 인간만이 구원을 포기하고 단념하고, 절망을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누자베스는 어느 쪽일까?

    ‘무엇이 너를 그 고독 속으로 밀어넣고 있는 것일까.’

    누자베스는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 정제된 증오와 방향성 없는 적의를 토해내는 괴물이었다.

    절망의 밑바닥에 빠진 인간은 아주 드물게. 바깥의 인간을 붙잡아 자신과 같은 곳으로 끌어당기려 한다.

    그런 식으로 서로를 망가뜨리는 것이 관계의 전부였다. 그런 방법으로 밖에 충족될 수 없는 고독이었고, 그렇게나 저열하게도 채워지는 동질감이다.

    서로를 상처 입히고, 상처입고, 지친 짐승들처럼 서로의 상처를 핥는 것밖에 선택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누자베스는 류시혁의 손목을 붙잡았던 것이다. 자신과 같은 구렁텅이 속에서 더럽혀지길 바랐으니까.

    하지만 그 저열한 욕망으로 끌어당길 수 있을 만큼 용사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누자베스. 나는 네게 손목을 붙잡혔고, 너는 내 팔이 닿는 곳에 들어왔다.”

    이로써 류시혁과 누자베스는 서로의 진짜 모습을 마주했고, 시시하고 지루한 탐색전은 필요 없었다.

    “시험해 보겠나? 네가 나를 구렁텅이 속으로 끌어내릴 수 있을지. 아니면 내가 너를 구렁텅이 밖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지.”

    누자베스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저 눈빛이 소름 끼칠 만큼 증오스러웠다.

    “역시 너는 내 오점이야, 류시혁.”

    “너는 내 마지막 숙제겠군, 누자베스.”

    누자베스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자신이 구하지 못했던 소녀를 떠올렸고, 자신조차 해내지 못했던 일을 타인에게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속으로 되뇌었다.

    류시혁은 누자베스에게 있어서 오답으로 점철된 실패작이었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누자베스 스스로가 자기혐오에 무너질 만큼, 류시혁의 존재의의는 치명적이었다.

    마왕군의 병력이 해안가에서 밀려들고 있었고, 류시혁과 누자베스는 밤의 어둠을 사이에 두고 돌아섰다.

    언젠가.

    어느 쪽이든 결국은 수컷 짐승들처럼 해결을 봐야만 했다. 가장 원초적이고 야만적인 폭력만이 수컷이 구사할 수 있는 논리의 전부였으니까.

    그래, 수컷은 언제나 그렇게 가엾게도 구제불능인 놈들뿐이다.

    * * *

    포 힐케인 섬에서 아리카 섬으로 귀환한 날의 밤이었다.

    내가 자리를 비웠던 사이 둥지의 관리를 맡고 있던 스칼렛이 보고를 하기 위해 찾아왔다.

    스칼렛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누워 보고 사항을 듣다가, 문득 포 힐케인 섬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스칼렛 귓구멍 활짝 열고 듣고 있지? 이 오빠가 말이다. 그 용사 놈에게 눈을 부릅! 뜨고 말했지. ‘이봐, 젊은 친구. 신사답게 행동해’라고 말이야! 그랬더니 글쎄 그 용사 놈이 새하얗게 질려서 헐레벌떡 꽁무니를 내빼더라니까!? 크……! 어때!? 좀 멋졌어? 응? 하핫, 용사도 별 것 아니라니까!”

    “주군, 일단 사실부터 정정하자면 이도 쪽에는 수의근이 없으니 활짝 열고 싶어도 열 수 없네. 그리고 주군은 나보다 수천 살이나 어린 주제에 무슨 오빠인가?”

    어? 진짜?

    그건 내가 몰랐던 지식이다.

    그럼 도대체 어떤 무식한 놈이 귓구멍 활짝 열라는 소리를 처음 고안해냈단 말인가?

    스칼렛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을 멈칫하더니, 갑자기 뺨을 꽉 꼬집었다.

    “귓구멍이 안 된다면 아랫구멍이라도…… 같은 상상도 그만두게.”

    “내, 내가 언제…… 스칼렛 너 자꾸 그런 식으로 근거 없이 각하를 이상한 사람 만들지 마라.”

    그러니까 독자들이 오해를 하지 않나?

    나는 결코 그런 저질스러운 상상을 하지 않았는데, 저런 근거 없는 소리로 모함하는 것이다!

    어, 어쨌거나 탈자기에 관련된 오해부터 해명하겠다. 내가 탈자기로 미소녀의 손목시계를 수리해주는 상상을 하긴 했지만, 이건 결코 저질스럽거나 음란한 행위가 아니란 말이다.

    오히려 당신들의 음란한 뇌가 나의 순수한 선의를 왜곡하여 보는 게 아닐까!?

    “도대체 머릿속으로 누구랑 대화하는 겐가?”

    “이, 있어 그런 게. 상상 친구들이야.”

    스칼렛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내렸다.

    “주군은 가끔씩 그렇게 허세를 부릴 때가 있군.”

    “허세 아냐.”

    “어울리지 않는 허세를 부리며, 시답잖은 소리를 애써 주절거리지 않아도 되네.”

    “스칼렛 나는…….”

    내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부드럽고도 서늘한 감촉이 입술 위로 포개졌다.

    옅은 미열을 머금은 숨결이 입술 사이에서 뒤섞였고, 의식이 날아갈 정도의 향기에 취해 그대로 잠들 뻔한 순간.

    스칼렛이 입술을 떼며 고개를 들었다.

    눈을 뜨고 올려다보자, 스칼렛이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빙긋 웃어 보였다.

    “주군이 무섭거나 괴로운 경험을 한 날이면 그런 식으로 자신을 과장스럽게 포장한다는 걸 이 늙은이가 모를 줄 알았나?”

    그 말은 어폐가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끌려온 뒤로 모든 것이 두려웠으니까. 괴롭지 않은 날도 없었다.

    스스로를 우스꽝스럽게 포장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나날들뿐이었다.

    오랫동안 가슴에 응어리져 있던 감정의 침전물들이 녹아 토해질 것만 같았다. 어금니를 꽉 물며 표정을 숨기고자 스칼렛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아직은 아니야.”

    눈물을 흘려도 될 날은 여전히 오늘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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