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14화 (114/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14화

    누군가의 방법(6)

    초로한 얼굴.

    160센티에 못 미치는 짤막한 신장.

    살이 뒤룩뒤룩 찐 비만 체형.

    맥주 거품처럼 흘러나온 뱃살과 구부정하게 움츠린 어깨와 허리.

    얼굴의 절반을 가릴 만큼 큼지막한 안경.

    항시 머금고 있는 비굴한 미소, 실처럼 가늘은 두 눈.

    그런 볼품 없는 땅딸보가 어울리지도 않게 마왕군의 상급 장교 제복을 걸치고 있는 것이다.

    우렌을 모르는 사람이 그를 처음 목격한다면, 그리 대단치 않은 사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우렌은 상급 장교 육성 기관인 ‘나인 게르나’를 세 번이나 월반하여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트 장교.

    최대 월반 횟수와 최연소 수석 졸업이라는 전설을 남긴 사내였다.

    임관 이후에도 센 엘티나 라인에서 자신의 우수함을 증명하였고, 그 결과 마왕 직속령에서 가장 가까운 ‘비아 엘티나’ 지역의 감찰관으로 임명되었다.

    감찰관의 무덤이라고 불리던 지역이다.

    북쪽으로는 마제 ‘투아하’의 둥지가 위치해 있었고, 동쪽으로는 대수림의 여왕 ‘유리아’의 둥지가 접경한 지역이었으니까.

    하지만 우렌은 감찰관으로 임명된 직후 투아하와 유리아를 완벽히 제압하고, 지역의 중재를 통해 균형을 잡았다.

    우렌에게 ‘카쿠쟈(채찍)’라는 이명이 붙은 것은 그때부터였다.

    하이브 마인드 조련사.

    철혈의 중재자.

    마왕군 제일의 전쟁 군주 처리반.

    마왕 아일라드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문제가 되는 하이브 마인드를 처리하는데 특화된 장교다.

    바체트 령에서 그에게 찍혀 좋은 꼴을 본 하이브 마인드도 없었고, 그의 눈에 찍히길 바라는 하이브 마인드도 없었다.

    ‘누자베스. 아리카 섬을 집어삼킨 괴물이라.’

    시트란테 서도의 감찰관이었던 레오란드는 특진되어 마왕성 내의 후방직으로 발령되었고, 우렌은 그때 레오란드에게 누자베스에 관한 이야기를 몇 번인가 들은 적이 있었다.

    ‘헬베르카의 혈액을 사용했다고 그랬지? 확실히 운이 좋아서 지역을 차지한 하이브 마인드들과 분위기 자체가 다르군.’

    척 보면 척이다.

    우렌은 문제아로 낙인찍힌 하이브 마인드라면 질리도록 상대해 봤다. 어떤 식으로 구슬려서, 어떻게 다뤄야 할지, 무슨 체벌로 길들여야 할지 뻔히 보였다.

    하지만 누자베스는 우렌에게도 이레귤러 케이스로 보일 만큼 이질적인 존재였다.

    “전후 사정은 넬쟈 님에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전황만 보자면 이 섬의 모든 것을 손에 넣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적법한 행위가 아니었기에 온전한 전리품은 못 주겠다?”

    “아이고, 각하께서 아주 총명하셔서 제가 입 아프게 떠들 필요가 없군요.”

    우렌은 헤실헤실 웃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포 힐케인 섬의 전쟁 군주들께서 맡겨진 사명을 성실히 이행하지 못하였으며, 이후 정상적으로 이행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이 섬에 봉인되어 있던 흡혈귀의 파편 및 현화한 혼령을 수거해 가겠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얻어갈 수 있는 건?”

    “각하께서 몸 성히 돌아가실 수 있도록 제가 직접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누자베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실소를 흘렸다. 우렌은 마치 누자베스의 비위를 맞추듯 따라 웃었다.

    “우렌, 나는 그런 농담을 별로 안 좋아해.”

    “농담이 아니라면 어쩌시겠습니까?”

    두꺼운 안경 너머로 예리한 안광이 흘러나왔다. 도저히 농담을 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건 협박이었다.

    여기까지 힘들게 행차해서 얻어맞고 쫓겨나면 체면이 구겨질 테니. 얌전히 물러난다면 그 체면 만큼은 지켜주겠다는 협박이다.

    이미 누자베스는 마인드 모드로 포 힐케인 섬에 몰려든 전함을 확인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렌 역시 누자베스의 가용 병력을 확인한 상태였다.

    서로의 패를 확인했고, 어느 쪽이 우세한지 결과가 도출되었다.

    얼간이가 아니라면 싸워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왕의 정규군에 비하면 하이브 마인드의 군대란 민병대나 의병 수준이다.

    게다가 규모 면에서도 차이가 난다면?

    콜드 게임이다.

    누자베스는 우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리고는 헤실헤실 웃고 있는 우렌의 얼굴을 향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그럼 오늘 내가 얼마나 병신 새낀지 알게 되겠네.”

    “하하…… 농담이시겠죠?”

    “눈탱이 한 대 처맞지 뭐. 그럼 할 말도 다 했으니 뒹굴어 보자고. 밑바닥에서 태어나서 진흙탕에서 뒹구는 것밖에 재주가 없는 새끼랑 엮이면 더럽게 놀아야지.”

    누자베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우렌의 가슴팍에 달린 휘장에 담배를 비벼 불을 껐다.

    마왕 아일라드가 직접 하사한 ‘창성돌격휘장’이 담뱃재에 더럽혀졌다.

    ‘객기인가? 오만인가? 아니면 상황을 파악하는 최소한의 지능도 없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패를 숨겼나?’

    우렌은 빠르게 가능성의 조각들을 모아 검토했다. 그리고 누자베스가 연회장에 참석했던 사실을 떠올렸고, 아리카 섬에 잔존한 병력과 챔피언이 있다는 정보도 검토 대상에 넣었다.

    ‘설마…….’

    말이 안 된다.

    병력의 규모와 질의 차이가 명백한 상황에서 이런 막무가내의 태도를 취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아리카 섬을 취한 전쟁 군주가 그 정도의 판단력도 없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누자베스가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수 있는 이유는 분명히 존재했다.

    “아이고, 왜 이러십니까. 누자베스 님. 좋게좋게 해결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동포끼리 얼굴 붉히고 그런 게 좋은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포 힐케인 섬은 내가 관리한다. 흡혈귀의 파편은 그쪽에 넘기지. 이게 내 마지막 제안이다. 싫으면 오늘 눈탱이 한 대 처맞고.”

    누자베스는 우렌의 발치를 슬쩍 내려다 본 후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예상치 못한 곳도 한 대 더 얻어맞겠지.”

    우렌은 그제야 누자베스가 의기양양할 수 있는 이유를 짐작해냈다.

    ‘비아 엘티나를 더럽힐 셈인가.’

    우렌은 간만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길들이는 맛이 없었던 전쟁 군주뿐이지 않았나?

    이렇게까지 망나니 같고, 막무가내인 미친개는 오랜만이었다.

    자신이 물어뜯기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눈빛이다.

    그저 녀석의 머릿속엔 상대를 얼마나 물어뜯어 넝마 조각으로 만들 수 있을지, 그런 가학적 행위에 대한 집념밖에 없을 것이다.

    우렌의 직감이 속삭였다.

    조련하는 보람이 있을 것 같은 녀석이다.

    누자베스는 누구의 손에도 길들여지지 않은 늑대다. 우렌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어휴…… 어쩔 수 없군요. 이거 혈기왕성한 젊은 전쟁 군주님을 상대하려니 겁나서 식은땀이 다 납니다, 허허”

    우렌은 손수건을 꺼내 두툼한 목덜미에 맺힌 땀을 훔쳐냈다.

    “조만간 정식적인 서류를 준비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래그래, 말귀를 알아먹는 놈이라 맘에 드네. 아, 혹시 너네 부대에 거유 서큐버스도 있냐? 있으면 한 마리만 덤으로 첨부해서 보내.”

    “차, 찾아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거유 서큐버스?

    우렌은 누자베스의 저 의미심장한 발언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서큐버스? 한 마리의 서큐버스를 어떤 식으로 운용할 셈이지? 거기에 거유라니…… 잠깐, 형태 그 자체에 착안한 것이 아닌 무언가 은유적 표의로써 경고를 하려는 것인가?’

    우렌이 누자베스의 진의를 해석하는 사이 누자베스는 섬을 떠날 준비를 하기 위해 나서고 있었다.

    * * *

    카가각!

    날붙이가 갈려 나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류시혁의 몸이 크게 뒤로 밀려났다.

    검격을 막아낸 충격으로 손목이 찌릿찌릿 저려 왔다.

    류시혁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바닥을 펼쳐 다시 쥐어본 후 시선을 들었다.

    그의 눈앞에는 밤하늘의 어둠을 등진 두 마리의 마물이 느긋하게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루칸다와 로아였다.

    류시혁이 이쪽 세계로 소환되어 여정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그에게 제대로 대적할 수 있는 마물은 한 마리도 없었다. 애초에 대결이라고 부를 만한 전투 자체가 없었고.

    류시혁의 일방적인 폭력에 마물들이 모조리 학살당하는 일은 몇 번인가 있었지만 말이다.

    ‘밀리아가 말한 오래된 마물 같은 것인가?’

    고혈종.

    혹은 반 르낙시아의 존재라고 불리는 마물들이다. 최초의 밤이 도래하기 이전에 태어나, 무수한 격전과 사선을 극복해 온 마물.

    ‘어느쪽이든 적당히 봐주며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군.’

    지금까지 루칸다와 로아. 류시혁은 둘을 상대로 싸우며 치명상을 입진 않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자신이 밀리게 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1:1의 승부라면 류시혁 쪽이 조금 더 우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의 비등한 수준의 마물 둘을 동시에 상대하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야, 루칸다. 각하께서 저건 죽여도 된다고 하셨어?”

    로아가 그렇게 물었고.

    “생사를 묻지 않겠다고 하셨지.”

    루칸다는 담뱃잎을 뱉어낸 후 바짝 말린 담뱃잎을 한 장 더 꺼내 입에 구겨 넣었다.

    물론 루칸다는 누자베스가 어디까지 바라보고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사력을 다해도 죽일 수 없을 것이라 예상하신 것이겠지.’

    루칸다도 전율할 정도의 실력이었다.

    류시혁이 선택받은 이계의 용사라는 말이 아주 허풍처럼 들리지 않을 만큼 말이다.

    류시혁은 마치 싸우기 위해 태어난 생물처럼 느껴졌다.

    그게 아니라면 병기의 일부, 그 자체처럼 보일 만큼 검의 숙련도가 상당했다.

    어떻게 휘두르고, 막아내거나 피할 경우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뻔히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다.

    ‘녀석은 미완성의 병기다. 그렇기에 부숴버릴 수 있는 기회는 지금이 마지막이겠지.’

    류시혁은 자신의 능력을 100% 이해하고 체득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루칸다가 보기에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동작을 머뭇거리다 놓치는 경우가 몇 번인가 있었다.

    “다음 빈틈을 만들면 내가 목을 노리지.”

    “제대로 확인한 거 맞지? 괜히 죽였다가 각하가 화내면…….”

    “젠장, 분명히 죽여도 된다고 말씀하셨다니까.”

    로아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루칸다와 속도를 맞춰 발을 내딛었다.

    류시혁은 이미 저 둘의 협공을 몇 번인가 받아냈고. 대략적인 속도와 위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발을 조금만 삐끗해도 목이 깨끗하게 절단될 정도로 정교한 협공이다.

    류시혁은 거리를 좁혀오는 사형 집행인들을 직시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유언을 남길 시간은 없나?”

    류시혁이 필터 부분까지 타들어 가기 시작한 담배와 함께 농담을 내뱉었지만.

    돌아온 것은 밤하늘을 가르듯 교차하며 새겨지는 두 줄기의 검격이었다.

    퍼엉!

    그 순간 멀지 않은 거리에서 폭음이 울렸고, 굉음이 울린 지역이 대낮인 것처럼 밝아졌다.

    밀리아의 스킬 ‘플레어’였다.

    루칸다의 주특기인 ‘그림자 도약’을 봉인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지만, 위치가 잘못되었다.

    이 정도의 명도라면 루칸다는 다시 한 번 그림자 도약을 통해 모습을 숨길 수 있을 것이다.

    ‘저곳은……?’

    플레어가 밝힌 지역에서 하이브 마인드 ‘트올리카’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밀리아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이브 마인드를 처치한다면 챔피언을 비롯한 모든 병력이 방향성을 잃게 된다.

    “슬슬 검증을 시작해야지, 시혁아?”

    그리고 누자베스도 이 장면을 마인드 모드로 지켜보고 있었다.

    손쉬운 파훼법이 마련되었고, 스테레오 타입의 악당이 무대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얄팍한 싸구려 정의가 어떤 결말을 도출해낼 수 있을까?

    누자베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선착장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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