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09화 (109/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09화

    누군가의 방법(1)

    [누자베스 : 헐…….]

    마인드 모드를 켜놓고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넬쟈를 구경하던 중이었다.

    얼마나 더 도망칠 수 있을지 느긋하게 감상하고 있었는데 상상도 못한 놈이 갑자기 무대 위로 등장했다.

    [누자베스 : 아니, 형이 거기서 왜 나와……?]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내 눈알이 갑자기 고장난 게 아니라면 말이다.

    지금 이 섬에 나타난 저 남자는 틀림없이 류시혁이었다.

    비엔나 소시지처럼 줄줄이 달고 다니던 가슴 크기 다양한 미소녀들이 보이진 않지만.

    ‘현대적 디자인의 슈트 차림. 그리고 글로레나 왕조의 문양이 새겨진 망토.’

    저런 해괴한 복장 센스를 갖춘 캐릭터가 내 소설에 그렇게 흔하진 않았다.

    현대의 의복을 지니고 있는 건 단 둘뿐이다. 류시혁과 백주월.

    그리고 저 복장 묘사는 내가 몇 번이고 원고에 썼던 것이니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왜 저 새끼가 이 섬에 있는 건데? 지금쯤 육로로 이동하면서 둥지 박살내기나 하고 있어야 되잖아!’

    참고로 말해두지만 내 소설 ‘던전 부수는 플레이어’의 주인공 류시혁은 착실하게 레벨링을 하는 성실한 캐릭터였다.

    갑자기 루트에서 벗어나 시키지도 않은 이상한 짓거리를 하는 캐릭터가 아니었단 말이다!

    ‘소환된 지 보름은 됐을까?’

    그렇다면 적어도 히로인을 셋은 데리고 있어야 한다. 여정을 떠날 때 수도에서 붙여준 길잡이 밀리아를 포함해서.

    하지만 지금 류시혁의 곁에 밀리아 외에는 다른 히로인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쓴 원고대로 진행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루칸다 : 각하. 제3세력의 개입입니다.]

    [로아 : 인간 모험가인 것 같은데…….]

    [누자베스 : 비르겐슈타인 부대 철수시켜! 아니, 모든 부대 퇴각이다. 최소한의 관측 병력만 남기고 주변에 두지 마!]

    미안하지만.

    클리셰처럼 경험치가 될 마물을 퍼줄 생각은 없다. 실제로 류시혁이 궁지에 빠졌다가 레벨업을 해서 체력이 모두 회복되고, 순식간에 전황을 역전시킨 에피소드도 있지 않았나?

    녀석을 상대할 생각이라면, 베스트 멤버만으로 확실하게 치명상을 입히는 게 최선이다.

    괜히 어설프게 병력을 보내서 해치우려고 했다간, 니벨룽겐의 광역 썰기에 경험치로 환전될 뿐이다.

    ‘소환된 지 보름째라.’

    확실히 그다지 큰 성장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초반에 종결급 무기를 얻긴 했지만, 레벨이나 스킬 숙련도는 1권 중반쯤 수준이겠지.

    ‘어째서 이 섬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내 소설대로라면 류시혁의 목적은 오로지 둥지를 까부수고 하이브 마인드를 찢어 죽이는 게 전부다.

    그러니까 이 섬에 찾아온 것도 소문을 듣거나, 왕궁의 요청으로 하이브 마인드의 둥지를 토벌하기 위해서겠지.

    ‘누자베스,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면 된다. 녀석의 목적은 내가 아니다.’

    스스로를 납득시키듯 되뇌었다.

    ‘포 힐케인 섬을 찾아왔다는 건 이 섬에 뿌리내린 세 마리의 하이브 마인드가 타깃이라는 얘기일테니까. 어쩌면 흡혈귀의 이야기까지 들었을테고, 그걸 적절하게 처리하는 역할도 맡았겠지.’

    그러니까.

    나는 조용히 녀석이 할 일을 하도록 자리를 비켜주면 그만이다.

    비록 흡혈귀를 손에 넣진 못했지만, 여기서 아싸리 목 따이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그래, 그렇게 하자.

    이게 최선이다.

    “…….”

    납득이 되지 않는다.

    가슴이 답답했다.

    역시 여기서 곱게 물러나주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다.

    “욕심 좀 부려볼까?”

    거의 다 입에 들어온 먹잇감이다.

    그걸 도로 내뱉고 조용히 물러난다?

    말도 안 된다. 생존 본능보다 앞서 헬베르카로서의 탐욕이 들끓었다.

    봉인된 흡혈귀를 손에 넣을뻔 했는데 그걸 포기하고 돌아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여기서 류시혁에게 죽지 않더라도, 돌아가는 길에 화병으로 쓰러져 영영 못 일어날 게 뻔했다.

    [누자베스 : 얘들아, 저건 그냥 모험가가 아닌데. 용사라고 들어는 봤냐?]

    [로아 : 들어는 봤지. 피지배층의 불만과 원성을 잠재우기 위한 허구의 구원자잖아. 인간 놈들이 그런 쪽으로는 머리를 잘 쓰니까. 아, 인간뿐만이 아니라 고블린들도 그런 허무맹랑한 신앙이 있었지? 안 그래, 고블린 용사님?]

    [누자베스 : 이야, 우리 루칸다도 용사였어!? 딱 됐다. 저 새끼랑 맞다이 뜰 수 있겠다.]

    [루칸다 : 오래된 전설일 뿐입니다.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면 곤란합니다.]

    [누자베스 : 그럼 어쩌냐. 저 새낀 구라가 아니라 진짜 용사인데.]

    실재하는 전설 그 자체다.

    그리고 나 같은 마족에겐 실존하는 재앙이고 말이다.

    [누자베스 : 넬쟈는 이미 뒤진 목숨이야. 저 새낀 내가 아는데 피도 눈물도 없는  사이코패스거든.]

    [루칸다 : 인간 용사와 친분도 있었습니까?]

    [누자베스 : 친분 정도가 아니라, 거의 부모와 자식 같은 관계거든.]

    어쨌든 결단을 내려야 할 때다.

    류시혁을 피해 흡혈귀의 부속품들을 얼른 챙겨 섬을 떠날 것인가?

    아니면 오늘 이 자리에서 끝장을 볼 것인가?

    ’15편 내외의 기간이다. 아직 완전한 상태는 아니겠지.’

    내가 낳은 최흉의 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것이 악재일지, 호재일지는 직접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누자베스 : 저 사이코패스가 넬쟈 찢어 죽이고 어디로 가는지 관찰 좀 한 후에 생각해 보자.]

    상대는 류시혁이다.

    당장 신중해서 나쁠 건 무엇 하나 없었다.

    ‘뭐야, 왜 안 죽이는 건데?’

    이쪽의 예상과 달리 류시혁은 어째선지 넬쟈를 보호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지금 검을 들고 달려드려는 밀리아에게서 검을 빼앗은 후 밀쳐내지 않았나?

    “음…….”

    이건 일종의 가능성인데.

    혹시 류시혁도 리제 때처럼 무언가 일그러진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내가 만들어낸 요소 외에도 무언가 더 섞여서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상태가 된 것이다.

    어떤 식으로 고장 나서 하이브 마인드를 죽이지 않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검증해볼 가치가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목에 걸린 초커를 툭툭 두들겼다.

    순식간에 옷차림이 허름한 튜닉으로 바뀌었다. 제필프의 최종선고가 관념을 형상화하는 갑주이기에 쓸 수 있는 편리한 기능이다.

    “얼마나 전지전능할지 검증을 시작하자, 시혁아.”

    원고에서 드러나는 부분만큼만 전지전능하여 그런 식으로 독자들에게 보여지는 것일지.

    아니면 진짜 완벽무결한 존재인지 확인해 볼 차례였다.

    * * *

    고블린 살수들은 재빠르게 류시혁의 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시혁이라면 충분히 뒤를 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물 토벌이 아니라,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당장 중요한 건 넬쟈였다.

    이쪽 세계로 오고 나서 유일하게 작위적인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 존재를 발견한 것이니까.

    “괜찮나? 잠깐 얘기를 나눠보고 싶은데, 공용어를 말할 수 있으면 좋겠군.”

    “…….”

    넬쟈는 뒤늦게 시혁이 인간 모험가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재빠르게 절벽 밑으로 기어가 숨었다.

    물론 벽을 등진다거나, 구석에 숨는다고 안전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넬쟈는 항아리를 꽉 끌어안은 채 바들바들 떨 뿐이었다.

    ‘이건 좀 곤란한데.’

    하필이면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이 같은 인간이 아니라, 하이브 마인드라니.

    시혁은 어떻게 하면 넬쟈의 경계심을 풀어줄 수 있을지 천천히 생각해 보는 사이.

    타다닷!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전 넬쟈를 덮쳤던 고블린 살수?

    그럴 리가 없다. 저렇게 허접하게 발소리를 울리며, 존재감을 드러낸 채 접근할 리가 없지 않나?

    시혁이 봤을 때 고블린 살수들은 상당한 수준의 훈련을 받은 정예 마물들이었으니까.

    “용사님! 조심해요!”

    밀리아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시혁은 이미 발소리가 울리는 텀으로 대충 속도를 산정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밀리아의 다급한 외침은 시혁에게 필요 없는 것이었다. 만약 이 장면을 글로 읽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상황 파악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넬쟈를 괴롭히지 마! 이 악당 자식아!”

    시혁을 향해 달려든 것은 허름한 차림새의 소년이었다. 그것도 제대로 된 무기가 아니라, 해변에서 주워 온 것 같은 나무 막대를 치켜 들고 있었다.

    부웅!

    소년은 기세 좋게 나무 막대를 휘둘렀다! 하지만 시혁이 그런 허접한 공격에 당할 리 없었다.

    시혁은 소년이 손목을 다치지 않게 나무 막대를 붙잡아 세우지 않고, 부드럽게 끌어서 붙잡았다.

    “놔, 놔!! 넬쟈, 지금이야! 도망쳐!”

    “잠깐만. 이 하이브 마인드와 아는 사이인가? 무인도라고 들었는데.”

    “넬쟈는 나쁜 짓은 하나도 안 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넬쟈를 살려줘…….”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군. 이 하이브 마인드를 해칠 생각은 없었다. 잠깐 진정하고 얘기를 나누고 싶다만.”

    “……정말?”

    “그래, 정말이다.”

    시혁은 소년에게서 나무 막대를 빼앗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소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누, 누…….”

    넬쟈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말을 끝까지 토해내지 못하고 입만 뻥긋거렸다.

    “잠시만요, 용사님.”

    밀리아는 갑자기 소년의 뒤로 다가와 등에 손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잠시 미약한 빛이 감돌았고, 밀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진짜 인간의 아이네요. 이런 곳에 아이가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잠깐 확인해본 것뿐이에요.”

    “그런 것도 알 수 있나?”

    “교단의 고위 성직자는 영혼 그 자체를 직접 투영해서 볼 수 있으니까요. 이 아이는 확실히 인간의 영혼을 지니고 있어요. 합성 생물인 하이브 마인드였다면 속이 텅 빈 상태였겠죠.”

    밀리아는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는 넬쟈를 못마땅하다는 듯 슥 쳐다보며 이어 말했다.

    “그렇기에 선함도 악함도 없는 것이겠죠. 하이브 마인드는 합리성에 기반하는 마물. 설령 선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건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 적응하여 살아남기 위한 선택적 인격이에요.”

    밀리아의 의견은 하이브 마인드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었다.

    “어, 어쨌든 너희들 물러나! 넬쟈는 인간을 무서워한단 말이야.”

    소년은 시혁과 밀리아를 뒤로 밀쳐냈다. 소년의 말이 사실인지 넬쟈는 시혁이나 밀리아 같이 낯선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소년을 향해서도 공포에 물든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 용사님이라고 했는데 진짜야?”

    “어울리지 않지만 일단은 그렇다.”

    “그, 그럼 역시 넬쟈를 죽이러 온 거잖아!”

    시혁은 다시 나무 막대기를 주워 들려고 하는 소년을 붙잡아 진정시킨 후 말했다.

    “나는 그저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것을 선별할 뿐이다. 용사라는 건 결국 최대다수의 공리를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무뢰한에 불과하지만.”

    “용사님! 자꾸 그런 식으로 자신을 폄하하지 마세요.”

    소년은 시혁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혁은 피식 웃은 뒤 소년에게 말했다.

    “쉽게 말해서 나쁜 하이브 마인드만 혼내주는 사람이다. 네 말대로 이 하이브 마인드가 선함에 가깝다면 내가 나설 일은 없겠지.”

    “나쁜 하이브 마인드…….”

    소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맞아! 그럼 북쪽에 사는 나쁜 하이브 마인드를 없애줄 수 있어?”

    “그건 이야기를 좀 더 들어봐야겠구나.”

    시혁은 소년을 지긋이 바라봤다.

    넬쟈와 마찬가지로 ‘진짜’에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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