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108화 (108/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108화

    포 힐케인(4)

    “젠장, 사춘기가 왔나. 아니면 정서불안이겠지. 요즘 들어 이 빌어먹을 짓거리에 왜 이렇게 염증이 나냐?”

    오크의 머리통에 깊숙하게 박힌 검을 뽑아내며 투덜거리자, 옆에 있던 루칸다가 ‘또 시작이군’ 같은 표정을 지었다.

    “루칸다, 각하가 진지하게 말하는데 그 눈빛은 좀 아니잖아. 선 넘지 마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각하. 각하의 수려한 용모에 감탄하는 눈빛이었습니다.”

    “진짜!? 하핫, 이거 좀 부끄럽네. 그런데 고블린 기준에서 잘생긴 거라고 해석하면 씹다 뱉은 만두처럼 생겼다는 소리잖아.”

    “각하께서는 저를 평소에도 씹다 뱉은 만두처럼 생겼다고 생각하셨군요.”

    “……아니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우리 루칸다가 암살 기술에만 통달한 줄 알았는데. 내가 모르는 사이에 태극권을 수련한 모양이다.

    “어, 어쨌거나 염증이 난다는 말이야. 솔직히 어? 아리카 섬 통일시키고 좀 쉬게 해줘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오크 죽이면 슬퍼서 잠을 못 자는 사람이라고. 너무 슬퍼서 8시간밖에 못 자.”

    “이번 일만 끝내면 잠깐 휴식기를 가지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아니…… 그냥 은퇴하고 싶어.”

    “은퇴하시면 뭘 하실지 계획은 있으십니까?”

    루칸다는 나와 대화하는 동안에도 병력을 움직여 오크 시체를 차곡차곡 쌓아 불태우고 있었다.

    구덩이 밖으로 솟아오를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오크 시체가 불타며 무슨 봉화처럼 보인다.

    “솔직히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아리카 섬에서 햄토리나 키우며 살까…….”

    “나쁘지 않군요.”

    “야, 루칸다. 솔직히, 진짜 솔직히 말이다. 내가 스칼렛한테 고백하면 받아줄 확률이 얼마나 될 거 같냐?”

    “취향이 너무 고약해서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만.”

    루칸다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스칼렛은 인간의 미적 관점에서 보자면 1클래스 탑티어 미인이 아니던가?

    저번에 마왕성에 갔을 때도 스칼렛에게 시선이 고정돼서 굳어버린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고블린 말고! 인간의 관점에서 생각해 봐.”

    “인간의 관점 말씀이십니까…… 인간처럼 유성생식을 한다는 전제 하에 가정을 세우자면…… 애초에 흡혈귀는 성별이 없습니다.”

    “자지스 크라이스트…….”

    “그리고 각하께서도 하이브 마인드인 이상 성별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죠.”

    아니, 그래도 달릴 건 달려 있다.

    기능에도 문제가 없었단 말이다.

    물론 서비스적인 관점에서의 기능이다. 생산직으로 전직이 될지는 아직 확인을 못해봤단 말이다.

    생산직이란 게 뭐냐면, 이게 물구나무와 연관이 있는…… 아니아니, 아니! 착한 어린이는 어서 익현이 형 채널 구독하러 가라!

    “그리고 그 흡혈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각하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이 무릎 꿇리지 못했던 사내들의 그림자를 투영해서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는 것뿐입니다.”

    “너무 스트레이트한 의견이라 좀 상처 받을 것 같은데…….”

    나도 그 정도는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내가 스칼렛에게 있어서 헬베르카의 대용품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아직 낙담하시기엔 이릅니다.”

    “뭔가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바체트 령에서 엘프의 유일한 서식지는 대수림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눈이 번쩍 뜨였다.

    그래, 지금까지 내 시야가 너무나 협소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내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되는 삶은 엘프 하렘 왕국의 건국이었다!

    “좋아, 이제 좀 의욕이 샘솟네. 고맙다, 루칸다. 대수림 정벌까지만 힘내자.”

    “둥지의 챔피언으로서 당연한 책무를 다한 것뿐입니다.”

    루칸다와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둥지의 입구에서 비올리네가 로아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 나오고 있었다.

    “놔, 놔라! 감히, 감히 네놈들 따위가……!”

    이미 둥지의 병력이 괴멸한 상태.

    아주 약간의 방어 설비와 근위대가 있기야 있었겠지만 말이다.

    우리 로아한테 걸리면 그딴 건 장애물도 되지 못한다.

    비올리네는 기본적으로 넬쟈와 크게 외형이 다르지 않았다. 몸이 전체적으로 슬라임처럼 반투명한 청색이라는 것만 빼면 말이다.

    “흥! 이미 흡혈귀의 뼈는 네놈들이 절대 못 찾는 곳에 숨겼다. 나를 죽이더라도 절대로 손에 넣지 못할 것이다!”

    비올리네는 로아에게 등을 밟혀 지면에 쳐박힌 채 기세 좋게 소리쳤다.

    “크르.”

    “아, 땡큐.”

    하이오크 척탄병에게 장전된 머스킷을 받아 비올리네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뒤통수에 총구를 꾹 들이민 후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비올리네가 모래사장에 축 늘어졌고, 하이오크에게 머스킷을 돌려준 후 돌아섰다.

    “빌어먹을 이 짓거리 진짜 염증나지 않냐, 로아? 나는 아무래도 하이브 마인드 체질이 아닌가 봐.”

    “엄청 적성에 맞는 거 같은데…….”

    “그냥 하이브 마인드 때려치고 우리 로아랑 둘이 살아야겠다. 어때? 프로포즈하면 받아줄래?”

    “으, 응!?”

    “역시 형제끼린 좀 위험한가?”

    “아, 아니……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정말?”

    “농담이야, 짜식아.”

    로아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인 후 해변가를 터덜터덜 걸었다.

    확실히 정신적으로 지친 모양이다.

    * * *

    “섬 정리되면 코볼트 작업대 불러서 샅샅이 뒤져. 아, 그 전에 넬쟈도 똑같은 개수작을 부리기 전에 혈액부터 챙겨 놓을까?”

    임시 거처로 사용하고 있는 넬쟈의 둥지로 돌아왔다. 그리고 넬쟈에게 혈액을 어디에 뒀는지 물어보려 했지만.

    늘상 심부의 개인실에 틀어박혀서 훌쩍이던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흠.”

    하이브 마인드가 둥지를 버리고 튀었다라. 이건 꽤나 파격적인 전법이라 상상도 못 했다만.

    “이건 내 실책이네. 넬쟈를 감시하겠다는 생각을 왜 미처 못 했지?”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루칸다가 우스갯소리를 들은 것처럼 낮게 웃었다.

    “바로 비르겐슈타인 부대를 동원해 섬을 수색하겠습니다.”

    “그래야지. 혹여나 녀석들이 흡혈귀를 완성하기라도 했다간.”

    골치가 아파지겠지.

    혹여라도 스칼렛과 동급의 흡혈귀가 나타난다면? 현재의 병력으로 어떻게든 제압은 가능하겠지만,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물론 나르시안의 직계손이 흔한 것도 아니고 그럴 확률은 0%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바로 쫓아. 생사는 묻지 않겠다.”

    “예, 각하.”

    녀석이 도망칠 방향은 뻔했다.

    * * *

    넬쟈는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북쪽을 향해 달릴 뿐이었다.

    넬쟈의 품에는 오랫동안 둥지에서 보관해 왔던 항아리가 안겨져 있었다.

    과거 죄인으로써 이 섬에서 처형당한 흡혈귀의 혈액이 담긴 항아리다.

    ‘미안해, 미안해…… 트올리카, 비올리네…….’

    자신의 잘못된 판단이 부른 참극이었다. 겁쟁이인 자신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트올리카와 비올리네는, 어쩌면 넬쟈를 공격할 생각이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실제로 병력을 전선에 배치하고 압박하며, 흡혈귀의 혈액을 내놓으라고 위협을 하긴 했지만.

    실제로 넬쟈를 향해 검을 휘두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넬쟈는 이대로라면 자신이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라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연회장에서 목격한 누자베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가 섬에 도착해서 중재자로써 이 분란을 조정해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시 트올리카와 비올리네가 화해하고 행복하고 조용했던 과거의 나날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하지만 누자베스가 섬에 도착하고 행한 일이란 단순한 파괴와 살육이었다.

    누자베스는 순수한 악의였을 뿐이다.

    아리카 섬이라는 거름망에 투과되어 순수하게 정제된 악의다.

    ‘미안…… 미안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대로 혈액을 가지고 트올리카의 둥지에 도착한다 한들 뭐가 달라질까?

    아마도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섬에서 누자베스를 막아설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넬쟈 자신이 스스로 불러들인 악마다.

    하지만 넬쟈에겐 이 사태를 막아설 힘도 없었고, 책임을 질 방도도 없었다.

    “아윽!”

    넬쟈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발목이 삔 것처럼 욱씬거렸다. 애초에 특수한 개체를 제외하곤 하이브 마인드의 육체는 인간과 거의 같거나 그보다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격렬한 육체 활동을 상정한 생물이 아니니 말이다.

    더 이상 달릴 수도 없었다.

    넬쟈는 몸을 웅크린 채 흐느꼈다.

    달조차 뜨지 않은 밤만큼이나 짙은 절망감이 뒤늦게 엄습해 왔다.

    넬쟈는 이를 악물고 발목의 통증을 참아가며, 모래사장을 기어갔다. 그리고는 항아리를 꽉 끌어안았다.

    이제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누자베스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모든 게 끝난 것이다.

    넬쟈의 뒤를 여유롭게 쫓던 정예 고블린 살수들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흑, 흐윽…… 흑…… 도와, 도와주세요…… 아무라도 좋으니까…….”

    넬쟈는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하지만 넬쟈에게 가까워지고 있는 건 도움의 손길 따위가 아니었다.

    정예 고블린 살수들은 단검을 뽑아 꼬나쥐었고. 그대로 비호처럼 도약했다.

    넬쟈는 본래의 형태도 유지하지 못할 만큼 난도질당할 것이다.

    그런 뻔한 결말이 확정되었다.

    도움의 손길을 바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윽!”

    촤악!

    예리한 절삭음이 고요한 밤을 울렸다.

    넬쟈는 곧 덮쳐올 통증에 대비하듯 몸을 더욱 웅크리며 어금니를 꽉 물었지만.

    “캬악!”

    “키륵?”

    “키…….”

    고블린 살수들이 물러나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넬쟈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글로레나 왕조의 문양이 박힌 망토가 바닷바람에 펄럭이는 게 보였다.

    망토 안쪽은 본 적도 없는 이질적인 형태의 의복이었지만. 지금 눈앞에 나타난 자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용사님, 조심하세요! 뒤에 마물이 살아 있어요!”

    밀리아가 정화된 은검을 뽑아 들어 넬쟈를 향해 내리쳤지만.

    카앙!

    류시혁은 시선도 돌리지 않고 밀리아의 검을 쳐냈다. 밀리아가 아무리 수도에서 신동에서 불릴 만큼 우수했다고는 하지만.

    류시혁과 전투력으로 비견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용사님? 이 무슨…….”

    밀리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주춤거리며 류시혁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류시혁은 넬쟈를 밀리아와 고블린 살수들에게 지키듯 그 사이에 버티고 섰다.

    “밀리아. 도와달라는 말을 못 들었나?”

    “하지만 저건 마족…… 하이브 마인드에요!”

    밀리아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듯 항변했지만. 류시혁은 넬쟈를 흘깃 바라본 후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이쪽 세계로 끌려온 뒤 처음으로 진심이 담긴 소리를 들어보는군.”

    넬쟈의 절망은 진짜였다.

    그 어떤 작위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심이 담긴 진짜 오열이었다.

    “상황을 정리한 후 잠깐 얘기를 나누지. 괜찮겠나?”

    넬쟈는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남자를 본 적도,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었지만.

    눈앞의 남자는 누구에게도 패배할 것 같지 않았다. 그 만큼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별것 없는 섬이라더니, 꽤 번잡한 마물들이 있었군.”

    자, 그리하여 용사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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