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짓는 플레이어-70화 (70/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70화

    공투(2)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었다.

    이런 독백을 떠올리기엔 지금까지의 여정이 꽤 길지 않았나?

    내가 이 세계로 갑자기 납치당해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지낸지 어언 4개월째다. 내 고생담을 원고로 써놨으면 족히 120편은 넘었을 것이다.

    코코아페이퍼에 런칭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분량이란 말이다.

    박태준 팀장한테 뭐라고 말하며 원고를 보내야 될지 아직 고민 중이긴 하지만.

    ‘아 글쎄…… 원고 작업을 너무 열심히 하다보니까 제가 소설 속으로 전이돼서 하이브 마인드가 되어 있더라니까요? 그래서 제가 직접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원고를 다시 써봤습니다.’

    ‘예? 설정 붕괴요? 직접 경험한 일인데 설정 붕괴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건 그냥 제 기억이 애매모호해서 그런 거예요.’

    ‘아니, 무슨 정신병이에요 시발! 진짜 이세계 갔다 왔다니까!! 조현병 아니라구요! 잠깐, 당신들 뭐야? 당신들 뭔데…… 놔, 놔봐. 잠깐 놔봐! 아냐! 난 미치지 않았어! 나는 하이브 마인드 누자베스라고……!!’

    이런 뻔한 결말이 눈에 선명했다.

    그게 아니면 ‘어, 형님 이 새끼 웃는데요?’같은 결말이겠지.

    어느 쪽이든 간에 내가 행복하게 간장게장 퍼먹는 일은 없을 것이다. 틀림없다.

    그런 스테레오 타입의 에필로그를 차례차례 떠올리는 동안 천막의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목숨은 건진 것 같고.’

    마지막 기억은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오크 전사 놈들이 갑자기 솟아난 수정탑에 꿰뚫려 죽는 장면이었다.

    그 뒤에 뇌에 혈액 공급이 끊긴 것처럼 픽 쓰러졌고 말이다.

    눈을 뜨니 이런 천막 안이었다.

    ‘상처도 대부분 치료되어 있네.’

    아직도 욱씬거리는 둔통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지만, 당장 죽을 정도로 아프진 않다.

    몸에 감긴 붕대를 둘러보며 몸을 일으키려 하자.

    덜컹.

    “아…….”

    뒤늦게 깨달았다.

    내 양손이 결박되어 머리맡의 세워진 지지대에 묶여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천막 안쪽에서 소리가 난 순간.

    바깥쪽의 대화 소리가 멎었다.

    그리고는 이내 천막의 출입구를 통해 아직 앳된 소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 누자베스? 기분은 좀 어때.”

    소녀는 씨익 웃으며 내 앞을 지키듯 섰다.

    “…….”

    빠르게 소녀의 모습을 훑었다.

    전체적으로 날렵한 디자인의 가죽 경갑.

    흉부에는 금속 플레이트를 덧대 치명상을 방지하고 있었다.

    사이즈가 큰 망토를 두르고 있는 덕분에 얼핏 보면 로브 차림의 수도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젠장, 엄청 귀엽게 생겼네.’

    저 정도의 미형이라면 류시혁의 하렘 파티에 가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류시혁 그놈은 전국팔도의 무지개 머리카락 색을 지닌 미소녀를 수집하는 게 취미인 놈이니까.

    참고로 박태준 팀장의 아이디어니까 나는 관계없다. 이 점은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자.

    ‘잠깐, 류시혁? 류시혁이라고……?’

    잠깐 소녀의 허리춤 쪽을 바라봤다.

    저 복잡기괴한 세공이 들어간 검집.

    물결처럼 부드러운 긴 금발.

    장난기 가득한 입꼬리.

    “시릴스?”

    이제야 기억났다.

    지금 눈앞의 소녀는 시릴스다.

    류시혁이 아리카 섬에서 카타쿨라를 처치하고 떠날 때 합류한 미소녀 동료!

    머리카락 색과 성격 묘사는 분명히 내가 썼으니 기억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허리춤에 차고 있는 저 검! 시릴스가 사용하던 고대 유물인 ‘아르테간트’가 확실했다.

    “시릴스라고? 네가 왜 시릴스를 알고 있어?”

    “…….”

    “아니, 알 수도 있나. 이런 전쟁을 벌일 정도라면 사전 조사 정도는 해놨을 수도 있으니까.”

    소녀는 침대 주변을 천천히 걸으며 내가 묶여 있는 꼴을 천천히 살펴봤다.

    “그럼 내가 누군지도 알아?”

    “미안한데 손이 묶여 있어서 지갑을 못 꺼내겠네. 아니면 후불로 지불해도 되는 가게인가?”

    “아하핫! 재밌네, 하이브 마인드도 그런 농담을 할 줄 아는구나.”

    시릴스는 지체 없이 아르테간트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내 머리쪽을 향해 휘둘렀다!

    서걱!

    틀림없이 내 목을 칠 작정인 줄 알았다만. 손목을 결박하고 있던 줄이 잘렸다.

    “이런 거친 플레이는 요청한 적 없어.”

    “너무 불평하지 마. 이래 뵈도 생명의 은인이잖아.”

    역시나 영주 갈라우드의 군대가 나선 것이다.

    오베론의 기묘한 행동으로 유추한 일종의 가능성이었다만.

    결국 오베론 녀석은 딸피에 눈 돌아가서 시간을 질질 끌다가 크게 한 방 먹었을 테고 말이다.

    자기가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빠진 꼴이다.

    ‘나를 살려 놨다는 건 교섭의 여지가 있다는 의미겠지.’

    내가 죽는다면 765호 둥지의 병력은 통제력을 잃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갈라우드는 혼자서 카타쿨라의 영토 확장을 막아야 한다.

    한 마디로 이독제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쪽의 영주와 직접 얘기하고 싶은데.”

    “응, 얘기해.”

    “영주가 있는 쪽으로 안내해 준다면…….”

    “그러니까 여기서 얘기하라니까.”

    “호위 무사 따위와 나눌 얘기는 없어.”

    시릴스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까부터 이야기의 핀트가 안 맞는데. 혹시 내가 시릴스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시릴스가 아니면 뭐겠나?

    사실 카타쿨라는 미소녀 형태의 하이브 마인드였습니다! 같은 얼빠진 전개가 아니길 간절히 바란다.

    아니, 내가 일부러 미소년의 외형을 취하고 있으니 그런 가능성도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시릴스는 알고 있는데 나를 모른다는 건 이상하지 않아? 시릴스는 내 호위 무사잖아.”

    “뭐?”

    그럼 내 눈앞에 있는 소녀가 갈라우드의 딸 ‘리제’라는 건가?

    ‘어째서?’

    그런 의문이 가장 먼저 들었다.

    어째서 영주 갈라우드가 직접 나서지 않고 장녀인 리제를 전장으로 내보낸 것인가?

    하물며 본인이 직접 나서기 싫었다면 장남인 파오루도 있지 않았나?

    참고로 내가 쓴 소설의 세계관은 매우 정석적인 중세풍의 판타지다. 여자가 집안일 외에 무언가를 한다는 게 매우 이례적인 일이란 말이다.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내가 영주 자리를 맡고 있어. 그러니까 갈라우드 가문의 총책임자로써 누자베스 너와 이야기를 나눌 자격은 충분할 것 같은데.”

    장녀 리제가 갈라우드 가문의 대표가 되었다라.

    ‘구린 냄새가 나네.’

    리제에 관한 정보는 극히 적었지만, 이건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사안이었다.

    * * *

    정보를 종합해 보자.

    리제와 나눴던 대화를 통해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은.

    ‘일단 리제는 내 소설에서 자신의 정체를 속였군.’

    사실을 정정하겠다.

    내 소설 ‘던전 부수는 플레이어’에서 류시혁의 동료가 되는 여자애는 ‘시릴스’가 아니라 ‘리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리제는 자신의 호위 무사인 ‘시릴스’인 척을 하고 류시혁을 따라 나선 것이다.

    내 소설에서 등장하는 시릴스의 특징과 리제의 특징은 상당히 일치하고 있었다.

    ‘이건 굉장한 발견인데.’

    하긴 이상하긴 했다.

    류시혁이 카타쿨라를 처리하고 섬을 떠나려던 찰나. 갑자기 시릴스, 아니 리제가 따라오더니 뭐라고 했더라.

    ‘카타쿨라를 처치해 준 답례로 제가 용사님의 여정을 돕게 되었습니다!’

    였던가?

    상식적으로 이런 보상이나 답례에 관한 얘기는 당연히 영주인 갈라우드의 입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다.

    뜬금없이 따라오더니 동행하겠다는 전개가 어딘지 부자연스러웠다.

    ‘시릴스는 박태준 팀장의 압박에 못 이겨서 급조해서 넣은 미소녀 동료였으니까.’

    하지만 이쪽 세계에선 다른 식의 개연성이 추가된 것이다.

    ‘사실 시릴스는 리제였고. 모험에 나서기 위해 시릴스인 척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영주에겐 비밀로 몰래 따라나선 것이다.’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충격적인 발견이다.

    단순히 시릴스가 사실은 리제였다는 설정 때문이 아니다.

    ‘전지적 시점에서 서술한 내용도 헛점이 있으면 변할 수 있다는 건가?’

    메타적 요소로 인한 사정은 고려치 않는다. 이 세계는 가장 그럴싸한 형태로 스스로의 빈틈을 메꾸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수많은 설정들이 다른 식으로 바뀔 수 있다.’

    내가 직접 쓴 설정도 예외는 아니다. 이 법칙을 깨달은 것이 가장 큰 수확이다.

    ‘어쩌면 내가 메모리얼 전투에 참여 자격을 얻은 건.’

    시스템적인 배려가 아닌 통보일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자 등골이 오싹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이봐, 일단은 이렇게 생겼어도 난 하이브 마인드다. 너무 친근하게 굴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생긴 건 인간하고 똑같은데?”

    “그거야 인간 놈들을 홀리기 위해 가장 비슷한 형태로 의태한 것뿐이지.”

    “오…….”

    리제는 진심으로 감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형태만 똑같은 거야?”

    “뭘 묻고 싶은 건데…….”

    “어, 그게 그러니까…… 기능적인 부분이라던가?”

    글세.

    그건 아직 시험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만. 배설 기관 같은 경우는 형태만 갖추고 있지, 실제로 사용되진 않는다.

    그런 사실을 고려하자면 나는 확실히 인간이 아닌 ‘괴물’이 되어 있는 것이다.

    “흐으음.”

    리제는 내가 신기한지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이쪽을 찬찬히 살펴봤다.

    “그나저나 손발을 결박하지 않아도 돼? 이래 뵈도 마물인데.”

    그것도 그냥 마물이 아니라 마물 오야붕이다.

    “아, 됐어. 누자베스 네가 인간에게 적대적이지 않은 하이브 마인드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

    “그래?”

    “점령한 마을의 주민들이 농번기를 무사히 끝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지?”

    “딱히 인간에게 우호적이라서가 아니라. 식량 생산에 차질이 생기면 양쪽 모두가 곤란하니까. 게다가 배가 부르면 어지간한 불만도 잠잠해지는 법이야.”

    리제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합리적이네. 단순히 욕망과 여흥을 위해 인간을 해하는 마물들과는 달라.”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전쟁군주다.”

    “인간을 배척하는 카타쿨라와 다르다는 건 내가 직접 봐서 알고 있어.”

    확실히 카타쿨라는 갈라우드와 불가침 조약을 맺은 하이브 마인드지만. 그렇다고 인간들에게 우호적인 개체는 아니었다.

    심심풀이를 위해 인간을 부수거나, 잡아먹는 짓을 서슴지 않게 하는 놈이었다.

    “그나저나 영주는 어디 갔길래 네가 임시 영주를 맡고 있지?”

    “가진 패를 다 보여달라고? 그럼 서로 한 꺼풀씩 벗어볼까?”

    눈을 가늘게 뜨며 리제가 베시시 웃었다.

    확실히 마냥 어린애처럼 생각이 없는 녀석은 아니다.

    “지금 이 상황이라면 나를 억지로 벗기는 것도 가능할텐데?”

    침대에 걸터앉은 채 천막의 사면을 둘러봤다. 이곳은 적의 주둔지다.

    그리고 나는 적에게 사로잡힌 ‘포로’ 신세고 말이다. 이쪽을 고문해서 억지로 모든 정보를 실토하게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리제는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나랑 나눠 먹을 생각은 없어?”

    “이 좁쌀만 한 섬을?”

    “너무 욕심 부리지 말자고. 서로 필요한 만큼씩만 가져가는 건 어때, 누자베스?”

    시선이 교차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얼마만큼이나 진심인지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