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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69화 (69/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69화

    공투(1)

    리제가 돌격한 뒤.

    시릴스와 레오번은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진격을 명령하지 않겠다고 리제가 못을 박아두고 떠난 탓이다. 이래서는 병사들이 스스로 움직여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진짜냐…….”

    “제대로 미쳤군.”

    “진짜 혼자 돌격한 거야?”

    병사들은 어안이 벙벙하여 멍하니 리제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금새 초계 병력으로 배치되어 있던 오크 전사와 거리가 좁혀졌고. 리제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아르테간트를 휘둘렀다.

    쿠구궁!!

    검이 스치고 지난 허공에 푸른색 수정탑이 치솟았다.

    “카악!!”

    오크 전사 한 마리가 수정탑에 꿰뚫려 단말마를 토해냈다.

    “카락! 죽인다!!”

    끼기긱!

    카앙!

    리제는 재빠르게 방향을 전환했고. 오크 전사가 휘두른 도끼가 수정탑에 박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리제는 깃발을 장대 삼아 높게 도약했다.

    촤악!

    그대로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진 아르테간트가 중장갑의 오크 전사를 깔끔하게 양단해냈다.

    오크 전사 세 마리가 순식간에 당한 것이다. 그 말도 안 되는 전투를 병사들이 입을 반쯤 벌린 채 멍하니 지켜봤다.

    “염병할…….”

    중년의 병사가 입을 열었다.

    리제가 영주의 딸이라는 사실도, 갈라우드의 후손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번잡한 명찰을 모조리 떼놓고 보면 자신의 딸과 동년배인 소녀다.

    리제에게 안전한 길은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우선했다면 수성전 태세를 갖추고 성 안에 틀어박혀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리면 됐다.

    간단한 일이다.

    그 결과 백성들에겐 힘든 한 해가 되겠지만. 영주의 가족이 굶주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무리하게 전선을 확장하려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백성들을 굶주리게 둘 수는 없다는 것.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중년의 병사와 같은 심경을 느낀 병사들도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저마다 입을 열었다.

    “젠장, 이러고만 있을 겁니까! 진짜로 저 꼬맹이가 혼자서 뛰쳐나갔는데!”

    “그래! 내가 가오가 떨어져서 도저히 가만히는 못 있겠다!”

    “한 번 죽지 두 번 죽겠냐!”

    “맞습니다! 이번 전투에서 전공이라도 세우면 두둑히 챙겨준다지 않습니까?”

    “수컷은 겁탈하고 암컷은 죽여라!”

    분위기가 일변했다.

    레오번도 시릴스도 그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리제는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짓은 하지 않았다. 스스로 먼저 지옥에 발을 들였을 뿐이다.

    그리고 훌륭한 접전을 똑똑히 보여주며, 입만 산 무능한 우두머리가 아니라는 사실까지 증명해낸 것이다.

    등을 떠밀려 전장에 발을 들인 병사와 스스로의 의지로 전장에 나선 병사.

    같은 전력이라도, 같은 규모라도 이 차이는 컸다.

    ‘역시 피는 속일 수 없군요.’

    레오번은 복잡한 심정을 곱씹으며 리제를 바라봤다. 리제가 여성으로써 살아가길 간절히 바래왔다.

    안전한 곳에서 부군을 보필하며 여성이 마땅히 누려야 할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길 바랬지만.

    리제의 몸속에 흐르는 갈라우드의 피는 저주처럼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돌격!! 영주님을 지켜라!”

    “안 따라오는 놈들은 내가 돌아와서 직접 방울을 떼주마!”

    “너나 무섭다고 지리지 말고 노끈으로 꽉 묶고 오는 게 어때?”

    “크하핫! 내 물건을 묶을 만큼 긴 노끈이 어디 있긴 있나?”

    함성과 함께 병사들이 리제의 뒤를 따라 내달리기 시작했다.

    * * *

    “이런.”

    오베론은 서쪽에서 밀려오는 갈라우드의 군세를 발견하고는 혀를 찼다.

    너무 시간을 지체했다.

    지금부터 퇴각을 개시해도 어느 정도의 피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거리였다.

    ‘이것 참…… 먹을 수 있을 것 같으면서 아직도 먹을 수 없다니.’

    누자베스는 이미 한계점에 도달해 있었다.

    왼팔과 오른쪽 다리를 크게 뜯겨져 나가 축 늘어졌다. 장창에 꿰뚫린 복부에선 끈적한 혈액이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지 피를 토해내서 헐떡이는 상태.

    두 눈은 이미 초점이 맞지 않는 것처럼 탁했다.

    지금 당장 쓰러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단 말이다.

    하지만.

    접근해 오는 오크 전사들을 상대로 본능처럼 검을 휘두르며 버티고 있는 것이다.

    “…….”

    죽일 수 있다.

    앞으로 1분만 더.

    아니 10초만 더 있으면 숨통을 완전히 끊을 수 있다.

    그런 희망이 오베론의 발을 묶고 있었다.

    솔직히 지금도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 아닌가?

    하지만 여기서 더 지체를 하다간 진격해 오고 있는 갈라우드의 군세와 충돌하고 만다.

    피해를 입기 전에 퇴각하여 호즈칸과 합류하고, 방어선을 다시 구축해야만 한다.

    “허억, 헉…….”

    누자베스는 검을 지면에 꽂아 쓰러지려는 몸을 지탱했다. 무리도 아니다. 홀로 적진으로 뛰어들어 중장갑의 오크 전사 20마리 이상을 베었다.

    111호 둥지의 어지간한 챔피언도 어줍잖게 따라할 수 없는 경지였다.

    광기.

    그리고 광기에 필적하는 실력.

    만약 이런 식으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전우로써 같은 전장에 서고 싶은 사내였다.

    오베론의 시선을 느꼈는지 누자베스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피와 함께 웃음소리를 토해내더니 입을 열었다.

    “하하…… 딸피 보면, 하아…… 눈 돌아가는 건 어디든 마찬가지군……. 자기가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걸리는 건, 무슨 기분인지…… 쿨럭……! 나중에, 지옥에서 만나면 감상이나, 말해줘라.”

    “그런 노림수였군.”

    오베론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퇴각하기엔 늦었다. 이대로 퇴각하더라도 병력의 손실은 무마할 수 없다.

    이곳에서 살아 도망치더라도 카타쿨라는 실패한 지휘자를 살려둘 만큼 아량이 깊은 전쟁군주가 아니었다.

    “의문이 하나 남는군. 이런 식으로 111호 둥지의 챔피언과 일부 병력에 피해를 입히더라도, 그쪽은 총지휘관을 잃게 된다. 갈라우드의 군대가 그쪽만을 살려둘 이유는 없지 않는가?”

    “글세…… 갈라우드가 카타쿨라와 1:1로 맞다이 뜨고 싶은 게 아니라면, 하아…… 살려둘 이유는 충분할 텐데.”

    오베론은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전투력이 우수한 하이브 마인드라고 생각하는 건 과소평가였다.

    물론 대단히 천재적인 계략은 아니다.

    그저 이런 정신 나간 작전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실행에 옮긴다는 점이 감탄스러웠다.

    “111호 둥지는 한 걸음 물러나야겠군.”

    오베론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았다.

    이번 전투에서 111호 둥지가 가져갈 수 있는 건 비루한 무승부 판정.

    765호 둥지는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았던 무승부를 가져가는 것이다. 누자베스의 이 정신 나간 판단으로 인해 말이다.

    “전 병력. 응전 태세를 갖춰고 충격에 대비하라.”

    오베론의 사명은 여기까지였다.

    * * *

    전투의 결과는 예상 이상이었다.

    장창과 방패로 무장한 인간 보병 1200명. 그리고 800여 마리의 중장갑 오크 전사.

    어찌보면 무리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765호 둥지의 병력과 충돌한 직후. 도착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체력을 소모한 오크 전사들은 최적의 컨디션이 아니었다.

    게다가 리제가 선봉에 나서 활약을 거듭한 덕분에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치솟아 있었다.

    결정적으로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765호 둥지의 박격포 부대가 오크 전사들만을 노리며 진영을 붕괴시키는 걸 도왔다.

    이 모든 요소가 합쳐져 리제의 첫 출전이 대승으로 마무리 지어진 것이다.

    “아가씨. 적장의 목을 쳤습니다.”

    “하이브 마인드에게 협력하고 있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건 낭설이 아니었구나.”

    참수된 오베론의 머리를 바라보며 리제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오크 부대의 4할 정도가 전사했습니다. 나머지는 방위선까지 퇴각했군요.”

    레오번은 지평선 쪽으로 사라져 가는 오크 전사 무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쪽의 피해는 전사자가 180여 명 정도입니다.”

    그 외에도 팔이나 다리가 잘린 중상자나, 경미한 부상을 입은 병사들의 수가 200여 명을 넘었지만.

    800마리의 오크 부대를 상대로 얻어낸 결과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리제가 땀과 피로 얼룩진 얼굴을 장갑으로 훔쳐내며 뒤를 돌아보자. 승리의 여운에 잔뜩 들뜬 병사들이 보였다.

    “이겼다!! 내가 오크 놈들의 목을 셋이나 쳤다니까!”

    “허풍도 작작 쳐! 자네는 줄곧 내 뒤에 숨어 있었잖나!”

    “우와! 이 오크는 적영석 목걸이도 가지고 있는데?”

    “전리품은 모두 모아놔! 영주님께서 확인하신 후 공평하게 분배할 테니까!”

    리제는 보급 기지의 한 가운데에 갈라우드의 깃발을 꽂았다.

    “레오번, 성으로 전령을 보내. 승전보를 울려야지?”

    “호족의 늙은이들도 이번 전투로 태세를 바꾸겠군요.”

    병력의 꽤 잃게 되었지만 이번 전투의 결과가 전해진다면 호족장들은 서로 경쟁하듯 병력을 지원하려 할 것이다.

    리제가 명확한 결과물을 만들어냈고.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해냈기 때문이다.

    “아! 이번 전투의 가장 큰 전리품은 잘 챙겨 놨어?”

    레오번은 그 말을 듣고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이건 상상도 못한 수확입니다, 아가씨. 지금 시릴스가 치료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의식을 되찾으면 바로 보고해.”

    리제는 빙긋 웃으며 레오번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리고는 그 옆을 지나가 병사들의 앞으로 다가갔다.

    “증원이 올 때까지 요새화 작업을 실시하겠습니다! 아, 물론 이번에도 강요는 없습니다! 그냥 이 가련하고 가엾은 제가 혼자 흙더미를 옮기다가 골병이 들어서 쓰러질 뿐이니까요.”

    리제의 농담에 병사들 모두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핫! 우리 영주님이 아주 사람 부려먹는 재주에 도가 텄어.”

    “괜히 영주겠어? 아랫것들 잘 부려먹으니까 영주인 거야.”

    “그거 일리 있는 말이군, 하핫!”

    병사들의 눈빛에는 신임과 신뢰의 빛이 깃들어 있었다. 리제가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내는 것을 확인한 건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리제는 더 이상 어린 계집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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