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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53화 (53/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53화

    쥐와 고양이(1)

    피르에나 왕녀가 전지전능하여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일을 모두 간파하고 있다는 전제는 구석에 처박아 두고 생각해 보자.

    이번 퇴각 작전에서 제3세력이 개입하여 스컬지 부대의 발을 묶어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은 언행이었다.

    피르에나 왕녀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알면 알수록 수수께끼 같아지네.’

    내가 알고 있는 한 메모리얼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존재는 ‘류시혁’과 ‘나’뿐이다.

    물론 더 있을 수도 있다.

    내가 쓰지 않은 이후의 전개에서 메모리얼 전투에 참여할 자격을 얻게 되는 캐릭터가 새롭게 등장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가장 가능성이 높은 쪽은 ‘백주월’이다.

    ‘이번 메모리얼 전투에서는 검토해야 될 사안이 너무 많아서 머리가 복잡해지네. 일단은 메모리얼 전투의 결과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지, 피르에나 왕녀가 어떤 식으로 정보를 얻게 되었는지, 그리고 질량을 지닌 물질을 가지고 돌아올 수 있을지, 가능하다면 어느 정도의 질량까지…….’

    툭.

    옆에 있던 페페가 가볍게 내 어깨를 쳤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뇨…… 그냥 오늘 저녁은 뭘 먹을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아무 생각 없이 단순해서 좋겠네.”

    “원래 남자는 아무 생각이 없는 생물이에요.”

    “하이브 마인드에게도 성별이 있었나…… 어쨌든 곧 신호가 올테니까 멍때리지 마. 불안하잖아.”

    이번 작전의 개요는 3개의 조로 나눠져 스컬지 부대를 막아내는 것이다.

    루칸다와 비르겐슈타인의 고블린 살수 두 마리는 ‘르 만타나 유격대’의 뒤를 바짝 쫓으며 만에 하나 저지선을 통과한 스컬지 부대원을 처리하는 임무를 맡는다.

    이걸 군사적 전문용어로 ‘짬처리’라고 한다.

    그리고 이번 작전의 핵심 역시 스칼렛이 맡게 되었다. 어째선지 주인공인 나보다 더 활약하는 포지션을 자주 잡는 기분이다.

    어쨌거나 스칼렛과 햄토리, 그리고 그레이브 야드의 구울 머스킷티어들이 협곡의 입구 쪽에 매복하고 있다가 스컬지 부대가 사거리에 들어온 순간 사격을 개시한다.

    1차 사격 후 착검 돌격!

    매우매우 간단하고 뻔한 작전이지만, 적이 매복 부대의 존재 자체를 인지하지 못했거나 상정하지 않았다면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나와 페페는 협곡의 위쪽에서 단둘이 꽁냥거리면서 꿀이나 빠는 임무를 맡았다.

    꿀을 빤다는 건 군사적인 전문 용어의 일종으로 전혀 성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으니 오해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뭐, 꿀을 빤다고?

    꿀은 군사적 의미로 ‘망고’와 동의어지.

    망고를 빤다라…… 망고에서 나오는 꿀을 의미하는 것인가?

    포르노적 표의를 함유한 단어로 행위의 은유성을 강화한 것인가?

    끈적거리고 달콤한 액체의 유사성에 착안한 신개념의 행위 묘사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추측은 그만둬 주길 바란다는 말이다. 그런 추측은 건담 만든 할배만 하는 거다.

    ‘이쪽의 임무는 우키라 처치였지.’

    그러니까 스칼렛과 햄토리가 잡몹들을 처리하는 동안 페페와 내가 우두머리 목을 치고 빠지겠다는 작전이다.

    때마침 우키라가 이끄는 스컬지 부대가 협곡의 입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오우…… 아주 그냥 자기가 대장이라고 광고를 하고 있네.’

    번쩍이는 황금빛 뿔이 달린 투구라니.

    뭔가 기괴하게도 살짝 인간처럼 생긴 저 트롤이 바로 ‘우키라’일 것이다.

    딱 불쾌한 골짜기의 중앙에 걸처진 외모라서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페페 제가 먼저…….”

    “내가 선두에 설 테니까 엄호해.”

    스릉!

    페페가 검을 뽑아들자 푸른 오러가 검신에 감돌았다. 내 싸구려 철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싼 검이겠지?

    일전에 보여줬던 오거 분다와의 전투는 어디까지나 제대로 준비도 못한 상태에서 임하게 된 것이다.

    오늘처럼 제대로 장비를 갖추고 왔다면 전에 봤던 전투력 이상을 기대할 수 있겠지.

    * * *

    눈 깜짝할 새였다.

    우키라가 어떻게 대처해볼 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선두가 협곡의 입구에 다다른 순간.

    협곡 밑바닥의 흙더미가 움직였다.

    흙과 자갈이 꿈틀거리는 것 같은 광경이 펼쳐진 직후, 엎드려 있던 수십 마리의 구울이 몸을 일으키며 모습을 드러냈다.

    생존을 위해 호흡을 필요로 하지 않는 구울의 특성 상 수십 시간을 저러고 버티고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른 부대? 어째서 이 협곡에…….’

    우키라가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이었다.

    구울 무리는 순식간에 전열을 갖추고, 머스킷의 총구를 스컬지 부대를 향해 겨눴다.

    “설마……!!”

    타다다다당!

    지면이 뒤흔들릴 만큼의 굉음이 울렸다!

    새하얀 포연이 그레이브 야드 부대를 뒤덮었고. 비명 소리가 총성에 묻혔다.

    “개자식들! 유격대 소속이었나!!”

    우키라가 재빠르게 방향을 틀며 머릿속에서 판단을 쥐어짜냈다.

    ‘3열식 전열 보병. 동부의 전투 방식이다.’

    새로운 전술이 등장하면 상부에 보고되고, 상부의 참모부는 전술의 효용성과 실제 결과를 검토하여 각 부대에 전파한다.

    우키라도 마왕군의 야전 지휘자다. 한 달에도 수십 통의 신규 전술에 관한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머스킷으로 무장한 전열 보병에 관한 정보는 이쪽 서부에서도 꽤나 큰 반향을 일으킨 전술이었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그레이브 야드 부대의 일제 사격으로 인해 스컬지 부대원 열댓 마리가 당했지만. 현재의 거리와 이 돌격 속도라면 전혀 문제가 없는 수준이다.

    앞으로 잘해야 2열 사격까지다.

    그다음엔 근접 거리에서 스컬지 부대가 무참히 도륙해 버릴 수 있었다.

    ‘착검 돌격하는 순간 찢어 발겨주마.’

    우키라는 전열보병의 전투 방식을 대충 유추하고 있었다. 전열보병은 거리가 좁혀지는 순간 착검하여 백병전으로 돌입한다.

    그렇기에 우키라는 부대를 산개시키지 않았다.

    이대로 창처럼 꿰뚫어 버릴 작정이었다.

    “돌겨어억! 고작해야 구울 무리다!! 이대로 돌격해서 모조리 죽인다!”

    우키라와 스컬지 부대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피르에나 왕녀였다. 이런 허접한 구울 놈들에게 할애할 시간은 없었다.

    스컬지 부대의 맹렬한 돌격으로 그레이브 야드 부대와의 거리가 좁혀져 갔고.

    타다다다당!

    30미터. 2열이 일제 사격을 가했다.

    다시 한 번 뿌연 연기가 그레이브 야드 부대의 모습을 감췄다.

    “지금이다!! 놈들이 돌격해 오는 순간 모조리 죽여라!!”

    대열을 갖추고 돌격해 온다면 스컬지 부대가 불리할 리 없었다. 드루에나에 탄 장창병과 석궁 사수. 그리고 드루에나 자체의 전투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일개 구울 보병이 백병전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병종이 아니었단 말이다.

    하지만.

    “뭐……?”

    연기가 걷힌 후 우키라의 머리가 잠시 멈췄다.

    착검하여 일제히 돌격해 올 것이라 예상했던 구울 부대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착검도 하지 않은 채 3인1조의 형태로 흩어져 다시 한 번 장전을 하고 있었다.

    타앙!

    “카악!”

    우키라의 바로 옆에서 내달리던 스컬지 부대의 부대원이 총탄에 꿰뚫려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말도 안 돼! 화망도 형성하지 않은 머스킷이 이렇게 적중할 리가…….”

    타앙! 타앙!

    “캭!”

    “커헉!”

    구울 머스킷티어의 사격 명중률은 전술 보고서에 적혀 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구태여 화망을 형성하지 않아도 내달리는 스컬지 부대원을 적중시킬 정도.

    게다가 3인1조로 산개하여 자율적인 전투를 수행한다는 건 우키라의 패러다임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2개의 조가 교차 사격하며 서로의 지근거리를 커버했다. 그렇게 착실하게 스컬지 부대의 머릿수를 줄여나가고 있었다.

    ‘이대로 퇴각할 순 없다.’

    하지만 이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우키라의 머릿속에는 출세에 대한 열망이 남아 있었다.

    송곳 왕녀만 붙잡으면 동부 전선 발령은 확정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단 말이다.

    그런 우키라의 머리 위에서 붉은 궤적이 추락하고 있었다.

    * * *

    “어라, 루칸다 대장. 그 눈은 어떻게 된 겁니까?”

    “신경 쓸 거 없다. 파편에 스친 것뿐이니까.”

    “그렇습니까…… 선봉에서 왕녀님과 같이 계실 줄 알았습니다.”

    “그래, 같이 있었지. 왕녀 전하의 명령이다. 짐마차에서 가져갈 물건이 있다만.”

    “아, 바로 열겠습니다.”

    유격대의 후열은 군수 물자를 운반하기 위한 짐마차 수십여 대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루칸다가 한쪽 눈을 덮은 거적을 긁적이며 접근한 짐마차는 정확하게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수송병이 루칸다를 알아보고 바로 짐마차의 열쇠를 열었다.

    덜컹.

    문이 열리며 어두컴컴한 내부가 드러났고.

    루칸다가 안으로 발을 들였다.

    ‘분명 이 마차였지.’

    루칸다는 십수 년 전의 일이 어제의 일처럼 선명했다. 그의 기억이 확실하다면 이 마차에…….

    “어? 루칸다 대장? 어? 그럴 리가…… 방금 어라? 마차 안으로 들어가신 줄…….”

    루칸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가 마주한 것은.

    십수 년 전의 자기 자신이었다.

    루칸다는 재미난 농담을 떠올린 것처럼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왕녀 전하의 명령이었지. 퇴각 도중 갑자기 짐마차 열에 수상한 자가 침입하지 않았는지 확인해 보라는 명령이었다. 그렇지?”

    “…….”

    “어떻게 알고 있냐는 표정인데. 이렇게 오래 살다 보면 비슷비슷한 경험을 한두 번씩은 해보는 법이라서 말이야.”

    루칸다는 검을 뽑으며 느긋하게 말했다.

    “나는 그 고블린 도둑놈을 쫓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루칸다는 과거의 자신과 얼굴을 마주했다.

    “웬놈이냐.”

    “아까 말하지 않았나? 고블린 도둑은 처음 보나? 꽤 흔한데.”

    루칸다는 킬킬 웃으며 검끝을 흔들었다.

    그 순간 과거의 루칸다가 지체 없이 검을 뽑아 달려들었다.

    카앙!

    칼날과 칼날이 격돌했고, 불꽃이 튀기도 전에 다시 한 번 휘둘러졌다. 사선에서 내리 꽂히는 듯한 검격은 타르샬라류의 특징적인 움직임이다.

    타닷!

    루칸다가 재빠르게 과거의 루칸다의 뒤로 돌아 몸을 숙였다.

    쉬익!

    칼날이 짐마차의 옆쪽을 갈랐고.

    끼기기긱!

    천장의 무게 때문에 전체가 삐걱이기 시작했다.

    “확실히 힘은 좋았지만 엉성했군. 이러니까 고블린 도둑놈 하나 제대로 못 잡은 거야.”

    “그 움직임은…… 페이드레트 출신의 고블린인가?”

    “글세. 붙잡아서 고문이라도 해보면 알 수 있지 않겠나?”

    카강! 카가가가각!

    다시 한 번 검이 부딪쳤고, 이번엔 루칸다가 밀리는 형세였지만.

    콰득!

    루칸다는 과거의 루칸다의 발끝을 뒤꿈치로 밟아 으깬 후 어깨로 밀쳐냈다. 그 순간 그림자 도약을 통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휘릭!

    순식간이었다!

    과거의 루칸다가 지니고 있던 두 자루의 흑요석 검 중 한 자루를 뽑아냈다.

    과거의 루칸다는 바로 흑요석 검을 빼앗기 위해 팔을 뻗었고.

    촤악!

    루칸다의 칼끝이 그의 왼쪽 얼굴을 찢어냈다.

    칼날이 눈까지 닿아 한쪽 눈알이 완전히 갈라졌을 것이다.

    “크윽!”

    과거의 루칸다가 물러나며 찢겨나간 얼굴을 한손으로 붙잡았다.

    주르륵.

    검붉은 피가 턱선을 따라 흘렀다.

    “오, 한결 더 잘생겨졌군. 고맙다는 말을 대신해서 이 검을 잠깐 빌려가지.”

    “네놈 따위의…… 도둑놈이 감당할 수 있는 검이 아니다.”

    “그거야 차차 알게 되겠지. 아, 다 쓰면 시트란테 서도의 아리카 섬에 놔둘 테니 나중에 찾아가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루칸다는 어둠 속에 녹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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