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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52화 (52/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52화

    쿠아가 황야를 향하여(4)

    메모리얼 전투를 개시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뭐, 결국은 이것도 내 머릿속에서 나온 작가편의적 설정 아닌가?

    눈앞에 뜬 시스템창에서 전투 개시를 선택하면 가까운 위치에 푸른빛의 포털이 생성되는 구조다.

    파아앗!

    바로 전투 개시를 선택하자, 둥지 내부에 지름이 3미터는 되어 보이는 타원형의 포털이 열렸다.

    ‘메모리얼 전투에서 부상을 입거나 죽어도 전투 종료시 모두 원상 복구된다는 게 다행인 점이지.’

    사망이나 부상의 리스크가 없는 보너스 전투의 느낌이다. 그저 전투의 목표 달성에 실패한다면 기회를 놓치는 것뿐이고, 성공한다면 리스크 없이 보너스를 얻는 것이다.

    ‘그나저나 만약 내가 이번 전투에서 실패한다면…….’

    소설을 쓸 땐 보상 아이템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있었던 터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 메모리얼 전투에서 일어난 과거의 일이 현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걸까?

    만약 이번에 내가 과거로 돌아가서 르 만타나 유격대의 퇴각을 성공적으로 돕지 못한다면? 그 결과 피르에나 왕녀나 루칸다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설마 과거에서 루칸다가 죽었다고, 현재의 루칸다가 사라지거나…….

    “이건 바깥 고리의 간섭 흔적이군. 이쪽 세상의 섭리와 무연한 현상일세.”

    내가 그런 타임 패러독스에 대해 잠시 생각하고 있자, 스칼렛이 포털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와 다른 방향으로 결과가 나면 현재에 영향이 미칠까?”

    “귀공은 그런 멍청한 질문을 진지하게 하는 겐가?”

    “아니, 좀 모를 수도 있지…….”

    “시간추 번복의 대의 명제가 참이라면 우리가 간섭할 수 있는 과거의 시간선은, 우리가 현재 경위하고 있는 시간선과 반드시 다른 시간선이어야 해.”

    이쪽을 거의 경멸하듯 바라보는 스칼렛과 달리 페페가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루칸다가 더욱 알기 쉽게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즉 간섭할 수 있는 과거의 시간선은 언제나 다른 평행세계라는 조건이 붙습니다. 그러니까 알고 있던 과거와 다른 일이 벌어져도, 현재에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메모리얼 전투에서 목표 달성에 실패하여 피르에나나 루칸다가 죽게 되더라도. 그저 피르에나와 루칸다가 퇴각 중 전사한 또 다른 세계선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 차원 균열은 바깥 고리의 간섭이 현화한 것일세. 이쪽의 상식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지.”

    스칼렛이 사뭇 신기하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귀공은 어디서 이런 재주를 손에 넣었나? 마치 바깥의 고리에서 온 존재 같구만.”

    “원래 하이브 마인드는 기괴한 재주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는 법이야.”

    준비는 모두 끝났다.

    남은 건 과거로 돌아가 챙길 건 모조리 챙겨서 돌아오는 일뿐이었다.

    * * *

    “하핫! 도망치는 꼴이 마치 쥐새끼들 같군!”

    왕립 107수비연부 직할 제2기동대.

    동부군에게는 일명 ‘스컬지’라고 불리는 이 부대는 기동타격 및 추격전에 특화된 집단이었다.

    드래곤 산란장에서 드물게 태어나는 변종 마물 ‘드루에나’를 타고 다니며 전장을 질주하는 스컬지 부대를 직접 목격한 자들은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스컬지에게 등을 보인다는 건 죽음을 의미한다.’

    드루에나는 드래곤의 아종이며, 동시에 열화된 돌연변이다. 그 크기는 드래곤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아 4미터 남짓.

    지능도 낮아 마법을 익히긴 커녕 언어도 구사할 수 없으며. 날개가 퇴화되어 하늘을 날아다닐 수도 없다.

    하지만 몸집이 작아져 협소한 지역에서도 기동이 가능했고, 날개가 퇴화한 대신 다리가 발달하여 소름 돋을 정도의 속도를 지닌 마물이다.

    그리고 스컬지는 이 드루에나를 타고 다니며 적군을 추격하는 훈련을 전문적으로 받아온 병사들이다.

    2인1조.

    한 마리의 드루에나에는 스컬지 부대원 두 마리가 타고 행동한다. 앞쪽에 앉은 병사는 드루에나의 움직임을 제어하며, 긴 장창을 들고 근접전을 수행한다.

    그리고 뒤쪽에 앉은 병사는 석궁으로 도망치는 적군의 등을 노리는 것이다.

    “우키라 님. 유격대의 선두가 곧 코플란 협곡에 진입합니다.”

    “멍청한 년. 마치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지 않나?”

    그리고 제2기동대의 기동대장 ‘우키라’는 이 가장 난잡한 전선이라고 불리는 ‘센 엘티나 라인’에서 잔뼈가 굵은 야전 지휘자였다.

    우키라는 인간과 트롤 사이에서 태어난 ‘하프 트롤’ 종족으로, 자신의 출생 성분에 지독한 열등감을 지닌 트롤이다.

    실제로 마왕군에 입단했을 때도 우수한 성적과 전투 능력을 선보였지만, 그의 친모가 천한 인간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런 벽지로 발령이 난 것이었다.

    하지만 우키라는 센 엘티나 라인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 왔다.

    몸에 흐르는 피의 절반이 천한 인간의 것이라 할지라도, 우키라는 자신의 유용함을 몸소 증명해 온 것이다.

    그 결과가 현재의 지위였다.

    자랑스러운 왕립 107수비연부 소속!

    제2기동대의 야전 지휘자라는 지위 말이다.

    그리고 오늘 또 다시 한 번 우키라에게 하늘이 기회를 내려주셨다.

    ‘송곳 왕녀…… 그년만 붙잡으면 이 지긋지긋한 센 엘티나 라인과도 이별이다.’

    우키라는 손때 묻은 석궁을 훑으며 고양된 기분을 다잡았다.

    “쿠아가 황야의 전초 기지로 향하는 것이겠지. 그대로 협곡을 통과하여 도하할 셈인가.”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피르에나 왕녀가 이끄는 유격대가 어디로 향할지는 뻔했으니까.

    게다가 치명적인 패전 직후다.

    사기와 체력이 떨어진 건 두말 할 것도 없었고, 부상병들까지 뒤섞여 진군 속도가 상당히 떨어진 상황이다.

    다 차려놓은 밥상.

    그런 말이 딱 떠오를 만큼 완벽한 식탁이었다!

    ‘이런 벽지다. 의무에 살짝 유희를 섞어도 누가 뭐라 할 수는 없겠지.’

    우키라는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늘 협곡을 빠져나가는 쥐새끼는 한 마리도 없을 것이다!!”

    “우오오오오!”

    “죽여, 죽여죽여!”

    “가장 먼저 왕녀를 붙잡으면 포상이 있습니까!”

    우키라는 그 질문에 킬킬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먼저 맛을 본 후에 즐기게 해주마.”

    “우효-!!”

    철컥.

    석궁에 볼트를 장전한 순간 일백 마리에 달하는 드루에나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사냥의 시작이었다.

    * * *

    “어 뭐야? 구울 아저씨들이 여기 왜 있어?”

    “나한테 물어봐도 알 리가 없지 않나? 그리고 그레이브 야브 부대뿐만이 아닐세.”

    스칼렛과 내 시선이 동시에 향한 곳에는 루칸다가 서 있었다.

    루칸다가 잠시 뒤를 돌아보자, 그림자 쪽에서 두 마리의 고블린 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지휘자 직계 부대도 같이 전이되는 모양입니다.”

    그런 설명은 없었는데.

    젠장, 어쩐지 하이브 마인드인 나와 류시혁이 동등한 조건으로 메모리얼 전투에 도전하는 건 형편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은 나를 포함해서 다섯 명뿐이지만.

    그 멤버들 중 지휘자가 있고, 직계 부대를 지니고 있다면 같이 전이되는 것이다.

    “뭐 나쁜 조건은 아니니까 넘어가고.”

    주변을 둘러봤다.

    황망할 만큼 넓게 펼쳐진 평야.

    본격적인 건기인지 숨이 턱턱 막힐 만큼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래서 이젠 어쩔 거야? 솔직히 과거로 도약했다는 느낌은 전혀 없는데.”

    페페는 아직도 못 믿긴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돌아봤다.

    “일단 경험자의 얘기를 먼저 들어봐야겠죠.”

    그렇게 말하며 루칸다에게 시선을 돌렸다.

    “루칸다?”

    “…….”

    “혹시 그건가? PTSD야? 혹시 어지럽거나 속이 안 좋으면 바로 말해라.”

    “아, 각하.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할 일이 있어서…….”

    루칸다는 뒤늦게 현재의 지리를 파악한 후 입을 열었다.

    “첫 패배 직후 유격대는 쿠아가 황야의 전초 기지까지 후퇴해야 했습니다. 그 뒤를 추격해온 부대는 ‘스컬지’라고 불리는 놈들입니다. 유격대가 만전의 상황을 갖추고 있었다면 어렵지 않게 내쫓았을 잡졸에 불과합니다만…….”

    “부대가 괴멸될 수준의 피해를 입고 퇴각 중이었지. 그런 잡졸들 조차 위협적일 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을테고.”

    “예. 센 엘티나 라인과 쿠아가 황야 사이엔 코플란 협곡이라는 좁고 긴 통로가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과거대로라면 코플란 협곡을 경유할 겁니다.”

    “혹시 몰라 물어보는 건데 스컬지라는 그 새끼들은 세 살 먹은 애새끼들처럼 기어 다니는 놈들이야?”

    “기동력 하나는 확실한 부대죠.”

    “그런데 패잔병들을 이끌고 협곡을 통과하겠다는 판단을 했다고?”

    내 의구심은 꽤나 타당했고, 루칸다 역시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각하. 협곡이 끝나는 지점에는 얕은 강이 하나 흐르고 있습니다. 건기였던 덕분에 수위가 낮았고, 충분히 도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는 해도 확실히 이성적인 판단은 아니었죠.”

    “그런 아마추어 같은 지휘는 누가 내렸는데?”

    “피르에나 왕녀님입니다.”

    그간 루칸다에게 들었던 정보를 곱씹어 봤다.

    ‘피르에나는 무패의 전설을 자랑했던 지휘관이다.’

    그 전설이 절반만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런 병신 같은 지휘를 내리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참작의 여지는 있었다.

    ‘첫 패전 이후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루칸다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피르에나 왕녀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이성을 잃고, 패닉 상태의 지휘관이 얼마나 처참한 방향으로 부대를 이끌 수 있는지 반증하고 있는 상황이다.

    “마지막으로 확인하지. 그 명령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나?”

    “저와 사크바하가 극구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왕녀님께선…….”

    “정신이 나갔으니 말귀가 통할 리 없지.”

    루칸다와 사크바하는 잔존 병력을 나눠 추격을 늦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격대의 구심점은 그 누구도 아닌 ‘피르에나 왕녀’다.

    유격대가 모조리 괴멸해도 피르에나 왕녀만 살아서 쿠아가 황야에 도착한다면 퇴각 작전은 9할 이상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살릴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피르에나는 그 작전에 동조하지 않았다.

    “왕녀님께선 계속해서 괜찮다는 말만을 반복했습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말이죠.”

    “그래서 퇴각 작전의 결과는?”

    “보다시피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습니다.”

    루칸다 뿐만이 아니다.

    사크바하를 포함하여 나머지 유격대의 부대원들 모두가 무사히 협곡을 빠져나와 강을 건넜다.

    그렇게 쿠아가 황야에 기적처럼 도달한 것이다.

    “추격대는?”

    “모르겠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내 생각엔 집에 불 켜놓고 나와서 급하게 돌아간 거 같은데.”

    물론 농담이다.

    ‘스컬지 부대가 무언가의 이유로 추격을 포기했다. 혹은 추격 중 무언가의 사건에 휘말렸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확실치 않지만.

    피르에나의 언행이 내 신경을 긁어 놓고 있었다.

    ‘마치 알고 있었던 것 같네.’

    스컬지 부대가 더 이상 추격을 계속하지 못할 이유가 생긴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피르에나는 정신이 나갔던 게 아니다.’

    자신과 유격대의 명운을 믿고 맡길 만큼의 ‘무언가’가 있었다.

    그 신뢰를 기반으로 내린 판단이다.

    ‘전장에 선 경험도 없는 화초 같은 왕녀가 갑자기 나타나 무패 진격의 전설을 세운 것도.’

    그리고 이곳에서 내린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판단도. 모든 것이 하나의 원인에 기인하고 있었다.

    ‘퍼즐 맞추기에는 재주가 없는데 말이야.’

    일의 우선순위부터 정립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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