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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짓는 플레이어-49화 (49/210)
  • 던전 짓는 플레이어 49화

    쿠아가 황야를 향하여(1)

    스칼렛이 부대의 피해 현황을 체크하러 나간 뒤.

    루칸다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루칸다는 내 상처를 지긋이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 흡혈귀에게 들었습니다. 오거를 혼자 맡으셨다고.”

    “아니, 혼자는 아니지. 비르겐슈타인 부대를 끼고 죽을 둥 살 둥 버틴 거니까.”

    “조금 더 편한 길이 있지 않았습니까? 더 안전한 길이 있었을 겁니다.”

    확실히 루칸다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내가 구태여 혼자 오거를 맡을 필요는 없었다. 오로지 아비엥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줄 작정이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번 전투의 목표 중에는 루칸다의 엄호도 엄연히 추가되어 있었다.

    “어째서 루칸다 너를 위해 그렇게 위험한 다리를 스스로 건넜는지 묻고 싶은 거겠지?”

    “예.”

    “글쎄다…….”

    욱씬거리는 팔을 들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어째서였을까? 아직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닐까? 내가 위험을 감수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녀석이라고 판단했으니까?”

    “각하에게 반드시 우호적인 태세를 취하리란 보장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도 말이야…… 원래 사내놈들은 이해가 안 되는 짓거리를 하는 법이잖냐.”

    “확실히.”

    루칸다는 내 대답이 사뭇 마음에 들었는지 유쾌한 웃음을 머금었다.

    “루칸다. 이번에 아비엥을 처리할 때까지 협력하겠다고 말했지만 말이다. 어쩌면 조금 더 먼 곳까지 우리의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건 내 군세가 아리카 섬을 점령하고, 본도로 진출한 뒤의 이야기지만.”

    손가락을 두 개 펼쳐 보이며 말했다.

    “첫 번째는 쿠아가. 두 번째는 페이드레트. 나를 돕는다면 이 두 지역에서는 루칸다 네 의사를 존중하여 행동하겠다고 약속하마.”

    “누자베스 각하. 이제야 조금 하이브 마인드다운 눈빛을 지니게 되셨군요.”

    루칸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도저히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었습니다, 각하. 그렇다면 이 쥐꼬리만한 섬부터 통일시켜야겠군요. 앞으로 꽤나 바빠지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후 루칸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개인실을 벗어났다. 그 직후.

    [캐릭터 도감이 갱신되었습니다.]

    [3인의 윤왕 ‘루아 카날다’가 추가되었습니다.]

    [송곳 왕녀 ‘피르에나’가 추가되었습니다.]

    [최초의 원죄 ‘나르시안’이 추가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입수한 마물이나 인물의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눈앞에 떠올랐다.

    그리고 잠시 떠오른 정보창들이 흐릿해지나 싶더니.

    [캐릭터 ‘루아 카날다’와 ‘피르에나’의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메모리얼 전투 ‘쿠아가 황야를 향해’가 해금되었습니다.]

    -메모리얼 전투 ‘쿠아가 황야를 향해’에서 목표 달성 시 ‘드워프 박격포 분대 5개조’를 획득합니다.

    “드디어 스텔라 님께서 내게 아비엥을 박살내라고 계시를 내려주시는구만! 태양 만세!”

    류시혁이 말도 안 되는 보상을 마구 챙기던 수단이 드디어 내 눈앞에 드러났다.

    * * *

    내가 쓴 소설.

    그러니까 ‘던전 부수는 플레이어’에는 상당히 작가편의적인 설정들이 다수 존재했다.

    뭐, 주인공 류시혁에게 이것저것 퍼주기 위해 급하게 만들어낸 작위적인 설정들이란 말이다.

    반쯤은 박태준 팀장의 강압적인 설득과 제안 때문이고, 반쯤은 적당히 타협한 내 안일함 때문에 생긴 것들이다.

    그러니까 ‘메모리얼 전투’라는 이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이걸로 나름 분량도 많이 채웠고, 나름대로 개연성도 챙기면서 아이템 같은 걸 챙겨줬지.’

    메모리얼 전투의 구성은 간단하다.

    주인공 류시혁이 여행을 하며 알게 된 캐릭터와 일정 수준 이상의 친밀도를 갖게 된다면, 자동적으로 생성되는 서브 퀘스트였다.

    그게 아니라면 특정 캐릭터의 정보를 입수하면, 그 캐릭터의 과거에 관한 에피소드가 메모리얼 전투로 등장하는 것이다.

    ‘루아 카날다와 피르에나라…….’

    이번에 내가 얻게 된 메모리얼 전투는 ‘쿠아가 황야를 향하여’라는 퀘스트다.

    키워드가 된 캐릭터는 루아 카날다와 피르에나.

    방금 전 스칼렛과 나눴던 대화를 다시 한 번 복기해 보자.

    ‘쿠아가 황야는 백주월이 등장했던 에피소드의 배경이지. 주인 없는 둥지 에피소드에서.’

    그러니까 아마도 이 메모리얼 전투의 시간대는.

    ‘피르에나 왕녀가 이끄는 르 만타나 유격대가 마왕군의 영지에서 패배한 직후.’

    남은 패잔병들을 이끌고 쿠아가 황야로 후퇴하던 시기가 될 것이다.

    ‘메모리얼 전투는 과거의 정보를 직접 목격할 수 있다는 점도 있었지.’

    그런 식으로 얻게 된 정보로 류시혁은 여러 상황을 유리하게 굴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메모리얼 전투의 진짜 핵심은 퀘스트 완료 보상이다.

    ‘박격포 분대라니! 넌 뒤졌다 아비엥.’

    박격포라면 대륙에서도 손에 꼽히는 최신예 병기가 아니던가? 고대의 공학 기술로 만들어진 공학병기에 비하면 원시적 수준이지만, 현세대를 기점으로 따지자면 최신예가 맞다.

    특히나 이 일대는 험준한 산악 지대가 대부분이다. 모두가 나란히 열 맞춰서 총질이나 해대는 구시대적 병력이 상대라면?

    박격포 분대 같은 곡사 화기 부대는 그야말로 천재지변이나 재앙 수준이다!

    게다가 비르겐슈타인 부대라는 훌륭한 관측 부대도 존재하지 않나?

    만약 박격포 분대가 추가된다면 아비엥의 군대는 이미 튀긴 팝콘이나 다름없다.

    녀석의 병력이 팝콘처럼 허공으로 튀겨 오르는 걸 콜라 한 잔 마시며 느긋하게 지켜볼 수도 있었다.

    당장 메모리얼 전투를 개시하고 보상을 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침착하자, 침착하자 누자베스. 일단은 침착하게 심호흡하고, 메모리얼 전투 조건부터 확인하자.”

    메모리얼 전투에는 여러 가지 조건이 걸려 있다.

    그 전투마다 요구하는 조건이 달라서 먼저 제대로 확인하고 실행하는 게 우선이었다.

    [메모리얼 전투 : 쿠아가 황야를 향하여]

    [전투 등급 : 1성]

    [정보 : 글레로나 왕조의 제7왕녀 피르에나. 그리고 그녀가 이끄는 르 만타나 유격대는 큰 피해를 입은 채 퇴각 중입니다. 집요하게 추격해오는 마왕군의 병력을 따돌리는데 성공하고, 무사히 쿠아가 황야에 도착할 수 있을지는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목표>

    -피르에나의 생존(0/1)

    -루칸다의 생존(0/1)

    -쿠아가 황야의 전진 기지 도착(0/1)

    <부가 목표>

    -마왕군 병력 처치(0/100)

    -추격대 대장 우키라 처치(0/1)

    [인원 제한 : 5명]

    [보상 : 드워프 박격포 분대*5]

    [부가 보상 : 정제된 마나 12,000, 우키라의 석궁]

    “아니, 퀘스트 조건이 미쳤나?”

    다른 건 문제가 없었다. 흔히 내가 쓰던 조건과 거의 일치하니까.

    메인 목표가 있고, 서브 목표가 있고, 대충 상황 설명도 해주고, 보상도 알려주고.

    이런 것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하이브 마인드인데 인원 제한을 이따위로 두면 안 되지!”

    인원 제한 5명이라니!

    이건 진짜 너무했다.

    대규모 병력 운영에 특화된 하이브 마인드에게 고작 부대원 5명만 데리고 퀘스트를 수행하라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생각 좀 해봤으면 좋겠다.

    형편성에 너무 어긋나지 않나?

    “다섯 명이라니…… 잠깐만…….”

    물론 내가 류시혁이나 백주월처럼 말도 안 되는 사기 스킬에 주인공 버프까지 빵빵하면 해볼 만하다.

    류시혁 그놈이라면 생체 오나…… 아니, 아니아니. 생체 오나미라고 말하려고 그랬다. 다른 의미가 아니다. 진짜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어쨌거나 류시혁은 생체 오나미 4명 데리고 가도 이딴 퀘스트 따윈 하품하면서 클리어할 수 있겠지만.

    나는 아니란 말이다…….

    나는 그저 한낱 가엾고 연약한 하이브 마인드인데 어떻게 4명만 데리고 가서 깬단 말인가.

    “엔트리 멤버를 정리해 보자.”

    가장 먼저 선별된 멤버는 당연히 루칸다였다.

    ‘실제 경험자이기도 하니 퇴각 경로를 기억하고 있겠지. 주변 지리도 알고 있을 테고.’

    게다가 내 둥지에서 독보적인 수준의 전투력을 지니고 있으니까 루칸다를 엔트리시키는 건 확정이었다.

    ‘두 번째 멤버는 햄토리.’

    세글리트의 미혹을 얻은 뒤로 거의 일당백 수준의 전투를 보여주지 않았나? 이번 메모리얼 전투에서도 활약을 기대해볼 수 있었다.

    ‘세 번째는 스칼렛이겠지…….’

    초극 시험에 도전했다가 본래의 힘을 모조리 잃게 되었다고는 해도 강력한 흡혈귀라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실제로 내가 검술로 이겨본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나보다는 잘 싸울 게 틀림없다.

    ‘마지막 멤버는…… 아, 진짜 없는데…….’

    고블린 서비스 부대의 부대장인 보르가라던가, 비르겐슈타인의 부대원들은 애매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만에 하나 실패라도 했다간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고스란히 날려버리는 꼴이 될 테니까.

    ‘도대체 누구를 데려가야…….’

    그 순간 머리 위로 벼락이 내리친 것처럼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현재 내가 알고 있는 캐릭터 중에서 가장 강력한 녀석!

    “페페가 있었지! 그래, 페페가 있었구나!”

    이미 정체도 까발려진 김에 얼굴에 철판 깔고 부탁이나 해보자.

    벗으라면 벗고, 개처럼 짖으라면 짖고! 발가락을 핥으라면 오히려 이쪽에겐 포상이다!

    나는 바로 굴덴 마을을 다닐 때의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개인실을 나섰다.

    “귀공, 그 차림은 설마…… 정체도 들켰는데 인간들의 마을에 갈 작정인가?”

    마침 이번 전투에서 얻은 머스킷을 정리하던 스칼렛과 마주쳤다.

    물론 지시만 할 뿐이지, 몸을 쓰며 노동을 하는 쪽은 불쌍한 구울 아저씨들이었지만.

    “이그젝틀리!! 아, 그런데 혹시 페페한테 빈큐럼을 걸 수는 없어?”

    “……이미 시도해 봤네. 귀공이 붙잡혔을 때 말일세.”

    “안 돼?”

    “통하지 않았네. 미혹에 상당한 저항력을 지닌 모험가겠지.”

    과연…… 아무한테나 다 걸 수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본래의 힘을 되찾은 스칼렛이라면 모를까, 현재의 상태로는 상당한 제한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마을 좀 다녀올게!”

    슬슬 아침 해가 떠오를 시간이다.

    페페와 그녀의 동료들이 머무는 숙소의 위치는 일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다.

    * * *

    한숨도 못 잤다.

    페페는 퀭한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 않으면 임무를 수행하는데 지장이 생긴다.

    그런 기본적인 수칙은 알고 있었지만, 누워서 눈을 감기만 하면 누자베스의 얼굴이 떠올라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런 고민은 카를린한테도 상담 못하니까…….”

    아직 누자베스의 처분을 스스로도 결정하지 못한 상태다. 만약 누자베스가 하이브 마인드라는 사실을 동료들에게 털어놨다가, 기회가 있을 때 당장 토벌해야 된다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어지면 끝이었으니까.

    페페는 길고 붉은 머리카락을 빗어 정돈한 후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옷을 모두 벗고, 잠시 거울 앞에 섰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젠장, 게다가 왜 그렇게 귀엽게 생긴 거야. 진짜 죽이기 힘들어지잖아.”

    누자베스는 어지간한 여자라면 일순간에 현혹시킬 만큼 아름다운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귀엽게 생겼다는 게 죽이지 못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페페의 결단을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라는 사실은 확실했다.

    페페는 대충 셔츠를 걸치고 방문을 나섰다.

    그녀가 머무는 객실은 2층으로, 매일 아침이면 1층의 여관 로비에 모여 그날의 계획을 검토하는 게 일상이었다.

    “정신 차리자. 당장은 누자베스보다 카타쿨라의 둥지 공략에 집중해서…….’

    페페는 머릿속에서 누자베스의 모습을 지우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페페가 1층에 내려오자 항상 보던 한적한 여관 로비의 풍경이 펼쳐졌고, 구석진 곳에 홀로 앉아 있던 누자베스가 보였다.

    “아, 페페! 잘 잤어요? 일찍 일어났네요.”

    “누, 누자베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누자베스는 산에서 꺾어 온 듯한 야생화 한 뭉치와 시장에서도 팔지 않을 만큼 조악한 과일을 품에 잔뜩 안고 있었다.

    꽃과 과일 모두 숲에서 직접 캐온 것 같았다. 그 흔적처럼 누자베스의 양손에는 자잘한 생채기가 잔뜩 남아 있었다.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너 진짜 큰일 나고 싶어서 그래?”

    페페가 누자베스를 감싸듯 구석으로 데려가 그렇게 윽박지르자, 누자베스는 풀이 죽은 소년처럼 고개를 떨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치만 어젯밤에 구해준 답례도 제대로 못해서…… 인간한테 뭘 줘야 기뻐할지 생각해 봤는데, 역시 잘 모르겠더라구요.”

    누자베스는 해맑게 웃으며 품에 안고 있던 꽃과 과일을 페페에게 내밀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꽃하고 과일을 모아 왔어요. 이런 보잘 것 없는 것밖에 없어서 미안해요…….”

    아마도 밤새도록 고민했을 것이다.

    온전치 않은 몸으로 숲을 돌아다니며 야생화와 과일을 모으러 다녔을 누자베스의 모습을 떠올리자,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눈물이 울컥 치솟았다.

    “바보 아냐? 누가 이딴 걸 받고 싶다고…… 그랬다고…….”

    페페는 서툴고 순수한 호의를 눈앞에 두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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