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최후의 전투 (6)
블록 국왕은 제오 장로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벌벌 떨었다.
장현이 누구인가. 플레이어 중 무력으로 탑클래스에 드는 자다. 심지어 대공의 박람회 경기에서는 아르헨을 누르고 1위까지 했었다.
블록 국왕은 아홉 꼬리 던전 레이드에 직접 참가하진 않았지만, 동료인 차준우와 김동석을 통해 장현의 무력을 전해 들은 적 있었다.
조금 전 영상으로 직접 본 장현의 전투 장면은 들은 것보다 더 어마어마했다.
블록 국왕 자신이 장현을 상대로 싸운다면, 1초 만에 죽음을 맞이할 게 분명했다.
그런데, 지금 거부하면 당장 죽을 판이었다.
괜히 항복한다고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이미 한참 늦었다.
“자신이 없나 보군. 항복하겠다는 것도 거짓말이었나. 아님 아무 쓸모없는 놈이었던가. 이런 놈이 인류를 대표한다고 찾아왔다니, 네놈이 감히 마왕님을 기만한 것이냐.”
제오 장로가 살기를 쏘아 보냈다.
블록 국왕은 벌벌 떨면서 함께 온 국왕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이대로면 그냥 죽을 판이니 장현을 설득해서 항복하게 합시다.”
블록 국왕은 차마 장현을 잡아오자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들의 실력으로 장현을 잡아오는 게 무리라는 것쯤은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이보시오, 블록 국왕. 장현이 미친 것도 아니고, 그가 우리에게 설득되어 항복하려고 하겠소?”
옆에 있던 에칭 국왕이 조심히 물었다.
그는 사실 대세를 따라가는 사람에 불과했다.
장현이 킹덤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을 때는 그에게 들러붙었다가, 지금은 블록 국왕을 따라 항복하러 왔었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아무래도 줄을 잘못 선 듯했다.
블록 국왕이 화를 내며 말했다.
“그럼 그냥 이대로 못하겠다고 하란 말입니까? 에칭 국왕은 그럴 수 있겠소?”
“그럴 순 없지요.”
에칭 국왕은 어떻게든 살고 싶었다.
블록 국왕의 꼬임에 빠져 항복사절단으로 온 게 후회되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든 장현을 설득해야 했다. 문제는 방법이다.
“여러분이 보기에, 우리 실력으로 장현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뻔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수로 장현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을 어찌할지. 아르헨 국왕은 우릴 사절로 보내놓고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거요?”
“아르헨 국왕에게는 기대하지 마시구려. 우리에게 대표 자리를 건넬 때부터 탐탁지 않아 하는 눈빛이었소. 우리 덕에 위기를 넘기면 그때 어떤 표정을 할지, 한번 두고 보겠소.”
“그래서 지금 딱히 무슨 수가 있습니까? 장현은 그동안 한 짓으로 보아 마왕에게 죽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런 놈을 무슨 수로 설득하냔 말입니다.”
옆에 함께 있던 국왕 중 한 명이 울분을 토하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장현을 무슨 수로 설득할지,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제 다 떠들었으면 얼른 전장으로 나가거라. 목숨이 아깝다면 놈을 잡아오든지 죽이든지 능력껏 해보거라.”
제오 장로의 말에 국왕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나섰다. 그때 제오 장로가 한마디 했다.
“너희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을 하나 알려주지.”
“그게 무엇입니까?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블록 국왕과 일행들은 자신들을 전장으로 등 떠밀던 제오 장로가 혹시 살려주는 건가 싶어 열심히 빌었다.
“너희들, 어차피 항복하기로 했으니 이참에 마족이 되는 건 어떠냐. 그렇다면 저 장현을 죽이는 것 또한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네? 마족으로 말입니까?”
국왕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마왕에게 항복하겠다고는 했지만, 인간을 버리고 마족이 되고 싶은 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들 역시 튜토리얼과 영지전을 거쳤기에 마족이 된 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별로 안 내키는가 보군. 혹시 외모 때문에 그러는가. 너희 인간과 유사한 외모의 마족도 있다. 이미 봤을 텐데, 안젤라라고. 서큐버스 마족 말이다.”
“아, 안젤라. 장현과 함께 다니던 마족이었지. 깜빡 잊고 있었군.”
안젤라의 모습은 인간으로 쳐도 상당한 미녀에 속한다.
끔찍한 괴물 같은 외모가 아닌,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면. 마족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마족이 되면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지 않겠는가.
그럼 굳이 장현을 설득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를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겠습니다. 마족이 되겠습니다.”
블록 국왕이 가장 먼저 대답했다.
그가 먼저 하겠다고 하니, 다른 국왕들 또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저, 저도 마족이 되겠습니다.”
“저도 되겠습니다.”
제오 장로는 그들에게 검은 알약을 건네줬다.
“이것을 복용해라. 마왕님께서 친히 너희에게 내리신 선물이다.”
이미 마족이 되기로 했기에 그들은 두려운 기색을 보이면서도 알약을 복용했다.
잠시 후 알약을 복용한 일곱 명의 국왕들에게서 마기가 피어오르며 마족화가 진행되었다.
푹. 푹. 꿀렁. 꿀렁.
육체가 뒤틀어지면서 손발과 머리가 길어지기 시작했다.
이전의 보잘것없던 기운 대신, 강대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이들이 뿜어내는 마력은 지난날 영지전에서 장현이 상대했던 크레온보다 훨씬 강력한 마력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크레온은 기본 육체적 능력은 인간보다 뛰어났지만, 그가 마족화가 된 것은 영지전까지 쌓아온 포인트만을 기반으로 했을 때였다.
반면 일곱 명의 국왕들은 비록 장현이나 아르헨에게는 비교할 바 못되었지만, 그래도 인간들 중에서는 상위권에 이른 자들이었다.
킹덤의 국왕이라는 자리는 가위바위보로 따먹은 것이 아니었다.
레이드를 하면서 쌓아온 포인트에, 더불어 왕국 사업을 하면서 쌓은 막대한 포인트까지 있었다.
그 포인트들이 마족화될 때 큰 역할을 했다.
이제 그들은 중급 마족에 준하는 존재로 탈바꿈 한 것이다.
다만, 외양은 기대했던 인간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뱀 또는 목이 긴 도마뱀과도 같은 외양으로 변했다.
블록 국왕과 그 일행들은 마력이 강대해진 것보다, 외모가 흉물스러운 몬스터나 다름없게 변했다는 것에 큰 상실감을 느꼈다.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안젤라 같은 인간형 외모가 될 수 있다고 했잖습니까. 이 모습이 어딜 봐서 인간형이라는 말입니까?”
얼마나 황당하고 분노가 치밀었는지, 그는 상대가 자신의 목숨을 쥐고 있는 마왕군 장로라는 것도 잊고 따지듯이 물었다.
“마족 중에 서큐버스 같은 인간형 마족도 있으니, 그렇게 될 수도 있었는데. 뭐, 안되었군. 그게 너희들의 본래 성향과 일치하는 모습인 거 같군. 아무래도 마족으로 변할 시 본성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도 실망할 것 없다. 마력을 쌓으면 마법을 통해 인간 모습으로 폴리모프할 수 있으니.”
마족으로 변한 국왕들은 불만이 컸지만 그래도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할 수 있다는 말에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설령 안 된다고 해도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제오 장로가 명령했다.
“이제 충분히 해볼 만하군. 자, 그럼 나가서 장현을 죽여라.”
마족화가 된 국왕들은 이제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기에 꾸물대지 않고 나섰다.
그들이 장현이 있는 전장으로 향할 때.
마튜브에서는 실시간 안내가 나오고 있었다.
[마족화된 인간 일곱 명과 플레이어 장현의 승부가 시작됩니다.]
경기 영상을 시청 중이던 구독자들의 반응 또한 뜨거워졌다.
[마족화된 인간들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내분으로 격화된 상황에서 그동안 플레이어들을 이끌었던 장현을 배신하기로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장현을 쓰러트리기 위해 마족이 되길 선택했습니다. 누가 이길지 기대가 되는 승부입니다.]
해설자의 말대로였다. 경기의 구독자들은 지금의 대결 구도에 만족해했다.
더 이상 마족 확진자들이 경기에 나오지 않자, 불만 또한 사그라들었다.
이것이 마왕의 노림수였다.
대중들의 불만이 있으면 해결해 주고 원하는 판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장현은 마르바스 성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었다.
마왕이 나오더라도 패드의 권능과 묠니르로 싸워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패드의 권능을 살려 최소한 목숨을 부지할 자신은 있었다.
그런 장현의 앞에 나타난 건, 마족 일곱 명이었다.
각자가 뿜어내는 마력이 조금 전에 상대했던 흑천마궁의 궁주들 못지않았다.
“한 명 다음은 세 명이더니, 이번엔 일곱 명이군. 너희들도 마왕군의 부군단장이냐.”
“장현. 난 블록 국왕이다. 이들 역시 킹덤의 국왕들이다.”
일곱 명의 마족 중, 뱀처럼 생긴 마족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쏘아붙였다.
그 말에 장현은 말을 더듬을 정도로 놀랐다.
“뭐, 블록 국왕이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 날 속이려는 속셈인가 본데, 나를 바보로 아느냐?”
장현은 자신을 블록 국왕이라고 주장하는 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정말이오, 장현. 우린 킹덤의 국왕들이오. 난 에칭 왕국의 에칭 국왕이오.”
“당신들이 킹덤의 국왕들이라고?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런 마족의 몰골로 변한 것이지.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또 무엇이고.”
장현은 그들의 말에 반신반의하면서 물었다.
대체 마르바스 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들이 저런 몰골이 된 것인지.
그의 동료들 역시 저렇게 마족이 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우린 당신이 마르바스를 떠난 직후 마왕의 공격을 받았다. 지금 이곳 마르바스가 포위된 것이 보이지 않느냐.”
“그런데, 마법 왕국 테오 국왕의 보호막이 마르바스를 지키고 있는데, 당신들이 킹덤의 국왕이라면 어째서 여기 있는 거요?”
장현의 의문에 그들은 대답을 주저했다.
장현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마왕에게 항복하려고 했다는 말이 차마 입에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우린 타협안을 제시하고자 마왕군에 사절로 갔었소. 그러다가 거부당했고, 강제로 마족화가 되었소. 이게 전부 당신이 멋대로 일행들을 다 이끌고 나가서 생긴 일이니 이제 책임을 지시오.”
블록 국왕은 뻔뻔하게 장현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다. 장현은 화가 났지만 확인할 게 있어서 참았다.
“무슨 책임을 말하는지 모르겠군. 나는 킹덤의 국왕도 아니오. 당신들, 국왕들끼리 회의를 해서 반란군과 손을 잡지 않았소? 그리고 그 조건으로 내가 만든 백신을 반란군에 제공하기로 했던 거 같은데. 이제 와서 내게 책임이라. 대체 무슨 책임을 지라는 건지 모르겠군. 그보다 아르헨, 테오, 마현, 제이미 등 다른 국왕들은 어쩌고 당신들만 여기 있는 거요?”
“그들은 협상안에 반대하고 내게 인류의 대표 자리를 내주었다.”
“그렇군. 당신들만 마왕에게 항복하러 갔다가 마족이 된 거였군.”
장현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깨달았다.
1회차 때와 같았다. 마왕과의 전쟁을 앞두게 되자 겁에 질린 자들이 마왕에게 항복을 했던 것이다.
아르헨이 전쟁 중에 뒤통수칠 것 같은 자들을 추려 마왕에게 보낸 거라는 걸 알았다.
“흥! 당연히 항복해야지. 어리석게 마왕에게 대적하여 싸워봤자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그런 말을 떠들 거 같았으면 반란군과 손잡지를 말았어야지. 그래놓고 내 탓을 해? 내 덕에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까지 접종해놓고. 염치도 없는 인간들이군. 아니 이제는 마족이라고 해야 되겠군. 이 염치도 없는 마족들아.”
“이놈. 보아하니 순순히 끌려갈 거 같지 않군. 네놈의 연설 때문에 우리 인류가 멸망하게 되었다. 마왕님께서 네놈을 잡아오길 원하니, 마지막으로 한 번만 물어봐주마. 순순히 끌려가겠느냐, 아니면 우리 손에 죽겠느냐.”
“마족이 되었다고 네깟 놈들이 날 어찌할 수 있을 거 같으냐. 그런 말을 지껄인 놈들이 지금까지 다 내게 죽은 줄은 모르겠지. 이제 적으로서 날 상대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게 해주마.”
장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대꾸했다.
블록 국왕 일행들은 전투가 시작되자 몸에서 촉수들을 내뿜었다.
수십 가닥의 촉수는 제각각으로 움직였다.
어떤 촉수에는 날카로운 칼날 같은 가시들이 달려 있었고, 어떤 촉수에는 무엇이든 씹어 삼킬 것 같은 피라니아 이빨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꿈틀 꿈틀. 펄떡 펄떡.
촉수 한 가닥 한 가닥이 허벅지보다 굵었고 핏줄 같은 것이 꿈틀거렸다.
한때 인간이자 킹덤의 국왕이었던 일곱 명의 마족들은 그렇게 촉수들을 움직이며 장현을 공격해왔다.